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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과답

최갑상님의 질문인 '유아세례'에 대한 답글입니다.

작성자이천우|작성시간05.10.27|조회수1,104 목록 댓글 3
최갑상님 안녕하세요.

님의 질문을 접한지도 여러 날이 지났군요. 좀더 빨리 답해 드렸어야 했는데 이제서야 글을 올립니다.

님께서는 '유아세례'와 관련하여서 의문되는 것을 질문하였습니다. 그것은 "세례에 관한 규정을 읽으면서 유아세례에 대한 언약신학적인 입장을 유심히 읽어보았습니다"라고 하였으며, "저도 여러 부분에 동감하며 우리의 자녀 또한 언약의 자녀로써 키워야 함을 인식합니다. 그리고 할례라는 의식과 함께 유아세례를 말하고 있는데 한 가지 제가 이해가 부족한 것이 있어서 글을 올립니다"하면서, 유아 때 받는 세례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으로 인한 구원 서정에서 볼 때 과연 "우리가 언약의 자녀를 유아라 할때 부모의 신앙고백이 효력이 있음으로 인해 그 유아를 하나님의 권속으로 두는 것이 합당한지" 아니면 "바울의 표현으로 구원의 설정을 하나님의 주권에 두고 하나님이 택한 언약백성인 이삭의 자녀들이 모두 할례를 받았으나 하나는 귀히 쓸 그릇으로 하나는 천히 쓸 그릇으로 여기는 것처럼 두 자녀 모두에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르치며 훈계하되 구원의 효력에 있어서 부르심(정하심)은 오직 하나님께 두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를 구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님께서는 로마서 9장에서의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적 선택과 함께 중세 교회 역사 속에서 행해져 온 유아 세례의 적용이 안고 있었던 문제점 속에서 개혁교회가 취해 왔던 사실 속에서 유아세례에서의 구원의 효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물었습니다. 맞는지요?

저는 님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여서 하고자 합니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이지만 이 점을 굳이 강조하는 것은, 그랬을 경우에 교회사에서 교회가 보여 온 유아세례에 관한 견해와 입장은 성경의 원리 속에서 충분히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이를 다음과 같은 순서로 해 나가겠습니다. 전개되어지는 글이 다소 길더라도 끝까지 인내하며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유아세례

이에 있어서 우선 '유아세례'부터 설명해 나가겠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유아세례를 행해야 하느냐? 유아세례를 행하지 말아야 하느냐? 유아세례가 과연 구원의 효력이 있느냐? 유아세례는 구원의 효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를 떠나서 유아세례가 지니고 있는 진정한 의미부터라도 알고자 해서입니다. 그리고 더불어서 알려 두고자 하는 것은 지금 님의 질문은 '세례'에 관한 것이 아닌 '유아세례'에 관한 것이며, 따라서 '세례'에 대한 답변이 아닌 '유아세례'에 대하여 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먼저 분명히 합니다. 그것은 설명해 나가는 중에 세례에 관한 부분이 자연스럽게 다루어지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부분은 결국은 님이 질문한 '유아세례'의 내용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강조하는 것은 유아세례를 세례가 지닌 본질적인 의미라든지 또는 성인된 신자가 받는 세례의 기준과 그 시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현하의 우리 나라 교회는 유아세례를 베풀고 있습니다. 종교법인으로 등록되어 있는 한 장로교단 헌법에 수록되어 있는 예배모범에서 유아세례를 다루고 있는 것에 따를 때 이는 여타의 교단도 동일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유아세례를 베푸는 기준에 있어서는 유아의 부모 중 둘 다 신자이거나 또는 부모 중 한 분만이라도 신자이면 유아세례를 베풀고 있으며, 예식서에서는 세례를 받는 유아의 연령을 만2세까지로 규정하면서 이를 공연히 지체할 것이 아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유아에게 세례를 베푸는 예식을 행하는 목적을 설명하기를 "이 예식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것이니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인증(印證)이요, 구약 때에 아브라함의 자손이 할례를 받는 특권이 있던 것과 같이 복음의 은혜 아래 있는 성도의 자손에게 이 예식 행하는 특권이 있으니 그리스도께서 만국 백성에게 명하사 세례를 받으라 명하셨고, 어린이들에게 축복하사 천국의 백성은 이와 같다 하셨으며, 복음의 허락은 성도와 그 집안에 미친다 하셨고, 사도들도 이와 같이 집안 세례를 베풀었으니 우리의 성품의 죄과로 더럽게 된 것을 인하여 반드시 그리스도의 피로 씻으며, 성령의 권능으로 성결함을 얻어야 한다고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세례를 받는 유아를 둔 부모에게 권면하기를 "삼가 부모의 직분을 할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의 자녀를 가르치며, 신구약 성경에 가르친 거룩한 종교의 원리대로 가르칠 것이니, 이 원리의 요령은 우리 교회 신경과 대소요리 문답에 간단히 가르쳤은즉 이 모든 책임은 부모의 직분을 도와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를 위하여 기도하며, 친히 그 자녀와 함께 기도하며, 그 아이 눈 앞에 충성함과 경건함의 본을 보이고, 하나님의 주시는 힘을 얻어 진력하여 주의 성품과 훈계 안에서 자라게 해야 한다"고 하여서 '유아세례'의 예식을 행함을 '부모의 자녀에 대한 신앙 양육의 책임'과 연계시키고 있습니다. 님께서는 이 점을 우선 특별히 관심을 갖고 주시해 주실 것을 바랍니다.


유아세례와 할례와의 관계성

이제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은 유아세례와 할례와의 관계성입니다. 우리가 유아세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할례와의 관계성 속에서 반드시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교회가 유아세례를 하나님의 언약적 구속사의 관점(또는 계약 원리)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교회가 유아세례의 예식을 행하는 것의 정당성을 주장한다든지 또는 부당함을 주장한다고 하면 그것은 단지 교회사 속에서 유아세례가 보여온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인식 때문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본질적인 속성 속에서 순수함을 지켜 가는 중에서 유아세례의 여부를 다루어 갈 수가 있는가 하면 또한 교회가 당시 시대의 종교, 정치, 문화 등의 배경 속에서 단지 이익과 힘의 논리로 다루어 갈 수도 있는 우려를 배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유아세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규정한 데는 없습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세례를 말씀해 주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어떤 근거에서 신약의 교회는 유아세례를 말하고 또한 베푸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언약적 구속사의 관점에 따른 '부모와 자녀의 언약적 관계의 원리'에서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유아세례를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세례와의 관계 속에서 보게 되는 할례로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의 표징으로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언약의 표징이란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님께서 잘 아실 것입니다만, 창세기 12장 1-3절에서 보는대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세 가지를 약속하여 주셨습니다. 첫 번째는 자손입니다. 두 번째는 그 자손들이 거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룰 땅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 나라의 그 자손들이 하나님이 다스리는 통치에 의하여서 받아 누릴 복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언약을 주셨으며, 또한 하나님이 이 일을 이루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서 이 큰 언약을 받을 때의 나이가 75세였습니다. 그의 아내인 사라는 65세였구요. 이때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이었기에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그로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언약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는 사실 안에서 한 아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세월이 유수같이 흐르고 흘러서 갔는데 아브라함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도무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언약이 성취될 기미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대하여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서 이룰 언약의 성취를 자신의 몸을 통해서 날 자인 '아들'에서 자기 집에서 길리운 자인 다메섹 사람이요 충복인 엘리에셀에게로 기대가 옮겨졌을 뿐입니다. 그 당시에 아들이 없는 아브라함으로서는 자신의 재산을 물려줄 사람으로 자기 집 재산을 잘 관리하고 있는 그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을 더욱 견고히 하게 하며 하나님의 언약이 신실하다는 확증의 사건을 갖게 하십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고 하시며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시고(창 15:5), 그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굳게 믿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또한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창 15:7)라고 말씀하여 주셔서 하나님이 그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것은 그와 그의 자손이 지금 그가 있는 이 땅을 차지하게 하기 위해서임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손과 함께 땅도 언약으로 받았었습니다만 그는 그동안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여기서 저리로 또한 그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유목민 생활을 이방인처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로서는 단 한 평의 땅도 소유하고 있지를 않았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주께서 나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였사오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창 15:3)과 말한 것과 함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 무엇으로 알리이까"(창 15:8)라고 말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무엇을 근거로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말씀한 이 땅을 자신과 자신의 후손이 차지하게 될 것을 믿을 수 있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이렇게 그때까지 아직도 후손과 땅에 대한 언약이 실현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이라는 언약의 실현에 대해서도 아브라함은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이번에는 삼 년된 소 암컷과 삼 년된 염소 암컷과 삼 년된 양 수컷을 각각 한 마리씩, 그리고 어린 산비둘기 한 마리와 어린 집 비둘기 한 마리를 하나님에게 가져 나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것들을 가져다가 반으로 쪼개어 각을 뜨게 한 후에는 양쪽으로 놓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비둘기들만은 쪼개지 않고 그냥 놓게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지시를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리고 어느덧 해가 저물어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내용인즉 한나님은 그의 후손들이 이방 땅에서 나그네로 살고 또한 400년 동안 종살이로 혹독한 세월을 보낼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러한 이방 나라를 치고 그 후손들을 나오게 하여 하나님이 언약하신 땅으로 들어올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표징으로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일을 하신 것은 "내가 만일 너와 맺은 언약을 지키지 않는 다면 내가 이와 같이 될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알게 하여 주시는 것으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 대해 친히 보증이 되어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서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다시 언약을 재차 맺어 그 사실을 확증시키는 말씀을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이 차지할 땅이 어디에서 어디까지인지 구체적인 지역을 언급하심으로써 하셨습니다(창 15:9-21).

그런 후 아브라함의 나이가 99세에 이르렀을 때 다시 한번 그에게 나타나셔서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가 가져야 할 신앙적인 자세를 언급하시면서 아브라함의 후손이 셀 수 없이 많을 것임을 재차 확인하시며 그를 그 수많은 무리의 조상이 되게 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개명시켜 주신 것이 바로 이때입니다. 그러면서 이때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반드시 지킬 것이며 또한 그의 후손들과도 지켜 나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그만의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그의 모든 후손과도 맺는 것임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만 지킬 것이 아니라 그의 후손들도 그 언약을 굳게 지키도록 후손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창 17:1-9).

할례는 이때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아브라함과 그의 모든 후손들과 맺은 성격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들도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도록 하라고 한 후에 모든 남자는 다 할례를 받도록 하였습니다. 그 할례는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그 후의 모든 세대에서 행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이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맺은 언약의 표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누구든지 사내아이로 태어난 자는 8일만에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하는데, 집에서 태어난 종뿐만 아니라 이방 사람 가운데서 돈을 주고 사온 종도 마찬가지로 반드시 할례를 받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다고 하는 표징이 그들의 몸에 남아 있게 하였습니다. 만일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아 있는 것을 그들 스스로가 원치 않으며 그래서 거부하여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지 않는 까닭에 반드시 하나님의 백성의 무리에서 끊어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의 무리에서 쫓아낸다는 것입니다(창 17:10-14). 여기에서 보는 대로 할례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세운 때부터 아브라함의 혈통을 통해서 난 자들만의 것이 아닌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있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의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할례가 지닌 참된 의미는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는 것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인다고 하는 하나님과 그 백성과의 '관계성'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할례를 받는 사람은 그것에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아 있는다고 하는 믿음의 문제였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내인 사래의 이름을 '사래'에서 '사라'로 부르도록 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복을 내려 아이를 낳게 하고 모든 나라의 어미가 되게 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창 17:15-16).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심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낳게 하신 것에서, 그리고 이삭은 조상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을 또한 이을 자로 있는 것에서 증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수다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랬듯이 그의 후손으로 오는 모든 사람들은, 그리고 아브라함이 가진 언약의 믿음 안에서 할례를 받는 모든 이방인들도, 그래서 땅의 모든 족속들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지닌 언약적인 믿음 안에서 베푸는 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할례는 '피의 의식(儀式)'입니다. 난지 8일된 사내아이의 고추 살을 베는 것이기에 거기에는 피가 흐르고 또한 고통이 따릅니다. 이제 태어난지 겨우 8일된 아이이기에 살을 베는 고통을 모르겠습니까? 과연 그렇겠습니까? 아이가 철철 흘리는 피는 아름다운 광경이겠습니까? 아닙니다. 모세의 부인인 십보라가 아들인 게르솜에게 할례를 행할 때는 차돌이 사용되었습니다. 날카로운 차돌을 칼처럼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주 예리한 칼만큼은 아니겠지요. 그래도 그것으로 아들의 살을 베어서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그때 십보라가 한 말이 있습니다.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의 남편이로다"(출 4:26). 이 말은 십보라가 '피로 맺어진 남편'이라는 뜻인데 할례를 가리킨 것이었습니다. 십보라는 아들에게 피를 흘리는 표징을 갖는 것을 통해서 남편이 사실은 '죽음'에서 벗어났다는 안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모세가 애굽에서 도망하여 미디안 땅에 있을 때 제사장 르우엘이 딸 십보라와 짝을 맺어 주었고, 그 둘 사이에서 '내가 타국에서 객이 되었다'는 뜻의 이름인 게르솜을 낳았는데(출 2:11-22), 모세가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동족에게로 돌아갈 때 바로에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장자이니 그 아들을 풀어 주어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할 것이며 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는 하나님께서 애굽 왕 바로의 장자를 죽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길을 가다가 어떤 곳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그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서 그를 죽이려고 하였고, 이에 놀란 십보라가 얼른 날카로운 차돌을 취해서 그것으로 게르솜의 할례를 행하고서는 그 피 묻은 돌을 모세의 발에 갖다 대고서 '당신은 참으로 나와 피로 맺어진 남편이다'라고 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었는가 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그의 후손들인 이스라엘과의 언약을 수립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는 일을 하고 계신데 그 사자로 선택된 모세에게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게르솜에게 할례의 언약을 행하지 않고 있음으로 해서 할례를 무시한 자는 "내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다"라고 하신 지경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지 않고 있는 모세를 죽이려고 위협하신 것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을 지킬 것을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제사장의 딸로 있으면서 잘 알고 있는 십보라이기에 그녀는 즉시 돌이켜 할례를 행하여 남편 모세를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십보라는 이 사건을 통해서 아들의 피를 흘림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않음으로해서 죽음에 처해진 남편을 다시금 새로이 남편으로 얻었다고 하는 신앙적인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모세에게서 피의 의식인 할례는 그를 죽음에서 벗어나게 하여 새 생명을 얻게 한 사건으로 등장합니다. 따라서 할례를 행하게 하는 것을 통해서 있게 하신 피 흘림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죽음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죽음에 처하게 하신 상징적인 의미를 할례를 통해서 나타내신 것이며, 그리고 이 죽음에서 그를 살려 생명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그와 함께 하실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피 흘리는 표징은 제사 제도에서도 나타내심

피 흘리는 표징은 제사 제도에 의해서도 나타내셨습니다. 과연 피의 의식을 표징하는 할례가 하나님으로부터 죽음의 두려움과 고통에서 새 생명을 얻게 하는 '은혜'인 것은, 제사 제도에서 잘 나타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피의 의식의 표징인 할례를 통해서 지켜나가게 하셨다고 하면, 모세와 맺은 언약에서는 제사 제도를 통해서 피를 흘리는 표징을 더욱 절감할 수 있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제사 제도에서 번제와 속죄제와 속건제를 드릴 때에 황소와 염소와 양과 비둘기를 희생 제물로 삼아 피를 흘리게 하였습니다. 여기서 흘린 피는 자신과 아들이 할례를 받을 때에 흘린 피와 함께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끊임없이 흘러 흘러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제사 제도에서 다음의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각인시켜 주셨습니다. 이를 모세가 번제를 올리고 화목제를 드리게 한 후 언약 책을 들고 나와 백성 앞에서 읽어 주고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 24:7-8)고 한 데서 보게 됩니다. 모세는 지금 백성들에게 뿌린 피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모세에게 하신 말씀과 모든 법규]을 분명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맺은 언약의 피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를 드릴 때 짐승이 흘리는 피에서 하나님이 자신들과 맺은 언약을 생각하게 되고, 또한 그 언약에서 자신들의 죄 문제를 떠 올렸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사람에게서 피를 흘리는 표징인 할례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의 인식을 갖게 하셨으며, 더 나아가 짐승에서 흘리는 피의 표징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은 속죄를 통해 정결케 된다는 인식을 갖게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절기 규정에 따라 제사를 보존해 나가면서 "피 흘림이 없이는 속죄를 받을 수 없다"(히 9:22)는 사실과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애지 못한다"(히 10:4)는 것과 함께 짐승의 피가 아닌(히 10:1-3) '더 나은 피'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피의 은혜를 바라보는 믿음을 지녀나가야 했습니다(히 9:23).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한 속죄입니다(히 9:24-28). 율법은 바로 그 장차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실 그 좋은 것들을 계시적으로 보여 주시는 모형이요 그림자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옛 율법에 따라 희생제물을 해마다 드려왔던 것이며, 그렇게 하는 것을 통해서 단 한 번의 희생제사로 자신들을 정결하게 할 것을 믿음으로 지니고 그 날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언약의 피의 실체인 그리스도의 보혈과 세례

지금까지 언약의 표징으로서 피의 의식인 할례가 지닌 참 뜻과 또한 제사 제도에서 계시하시고 있는 피의 의식이 갖는 참 뜻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도대체 구약에서의 그러한 피의 의식이 지금 우리가 신중히 생각하며 알고자 하는 유아세례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과연 단 한번에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림으로써 언약의 피로써 지녔던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이상 이제 더 이상의 할례라든지 제사 제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닙니까?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이며 당연합니다. 해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구속 사역을 앞에 두고 있는 때에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둘러 앉은 마지막 만찬에서 떡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이것을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고 하셨고, 또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고는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하였습니다(마 26:27-28). 예수님은 자신이 흘려서 제자들에게 마시게 될 피를 '언약의 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흘리실 피는 짐승의 피와 같이 매번 피 뿌림으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흘리실 피는 다시는 피 흘릴 이유가 없도록 그를 믿고 따르는 모든 제자들에게 '생수의 강'이 되어서 다시는 목마름이 없도록 영원히 솟아나는 샘물이 됩니다(참조. 요 4:14).

예수님의 구속 사역에 의해서 이전의 옛 언약에 의한 피 흘림은 종식이 되고, 새 언약의 피를 마시는 시대가 도래하였습니다. 새 언약의 피!. 이것은 피 흘림에 의한 표징에 의해서가 아닌, 그러니까 피 흘림이 없는 전혀 새로운 표징의 방식으로 교회에 주어졌습니다. 다름 아닌 '세례'입니다. 할례는 제사 제도와 함께 이 전혀 새로운 방식의 표징인 세례가 주어질 때까지 한시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이 피 흘림이 없는 세례는 죄사함의 표징으로 주어졌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 받아 죄를 용서받아 성령을 선물로 받은 것에 대한 표징입니다(행 2:38). 여기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물세례가 아닌 '성령세례'를 뜻합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세례입니다(*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세례가 성령세례인 것에 대해서는 본 개혁주의신앙공동체 게시판에서 개혁주의신앙에 올려져 있는 '성령세례'를 참조하십시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과거 구약에서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해 가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할례와 제사법에서 보여주시고 있는 반면에 신약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롭게 맺은 언약은 죄사함을 주시는 은혜로 작용하고 있으며 또한 그 사실을 확실히 약속하는 표징으로 주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례는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죄사함의 표입니다. 또 하나는 죄사함의 약속입니다.

이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교회[개혁교회] 중에서 교회 간에 이 두 가지 중에서 하나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개혁교회] 중에는 세례를 죄사함을 주신 은혜에 초점을 두는가 하면, 다른 교회[개혁교회] 중에는 죄사함의 약속에 초점을 둡니다.

가령 웨스트링크(H. Westerink)는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의 견해에 반대하여 세례는 중생을 약속 받은 것이라는데 무게를 두고 말하였습니다. 그가 이러한 견해를 가지게 된 것은 카이퍼가 세례를 중생과의 직접적인 관계로 설명하면서 이를 외적 언약과 내적 언약으로 말한 데 따른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에 있어서 외적 표징으로 물세례를 받은 사람일지라도 그들 모두가 반드시 다 구원에 이른 것은 아니며, 다만 생명을 부여받은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이라야 구원에 이르는 것으로 설명을 해 나갑니다. 이것이 그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해서, 그는 언약과 세례를 둘로 나뉘는 것에 반대하여서 오직 하나의 언약만이 존재하고 따라서 오직 하나의 세례만이 존재한다고 하면서 세례는 약속에 기초하여서 집행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약속을 받았는가 하면 "우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면, 성령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사시며 우리를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지체가 되게 하실 것이라고 우리에게 이 성례를 통하여 확신하게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진 것을 우리의 소유가 되게 하시는데, 곧 죄의 씻음과 날마다 우리의 삶을 갱신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결국 완전히 정화되어 영생 안에서 택하신 언약 백성들의 회중 가운데 거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약속을 근거로 세례를 받는 것이요 이 사랑의 언약 안에서 중생이 요구되고 있다는 견해를 가짐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자 하는 자는 이 언약 안에 있는 약속들을 경청해야 할뿐만 아니라 이 약속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며 그 사실을 세례 받을 때에 분명하게 신앙적으로 고백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모든 언약이 그러하듯이 새 언약의 표징인 세례에서도 약속을 바라보는 자는 새로운 순종의 의무를 지게 되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그것은 앞서 '죄사함의 약속'으로 말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나는 또한 세례는 '죄사함의 표'를 함께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 세례 예식에서 세례를 받는 자는 지금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함으로써 죄 용서를 받았으며 또한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얻었음을 고백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주로 모시고 섬기는 신앙 안에서 그에 합당한 자로서의 삶을 살 것을 고백합니다. 그 고백은 온 회중 앞에서 행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는 공적인 성격을 띱니다. 그리고 그것이 갖는 의미는 세례를 받는 사람의 신앙을 지금 온 회중이 인정하고 그래서 자신들과 같은 그리스도의 한 지체로 받아들여서 함께 신앙의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이 '구원받은 자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것'을 알 때 단지 약속을 바라보고 순종의 의무를 지는 것으로서의 고백 속에서 세례를 받는 것이라고 하기는 설득력이 약합니다.

그러면 세례를 받으면서 신앙고백한 자이면서도, 그래서 외적인 표징을 분명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중생한 내적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하여야 합니까? 그럴 경우 세례라는 표징은 결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되며, 해서 그가 받은 세례는 참 세례를 받은 것이라고 보기가 어려운 것 아닙니까?

물론 이런 우려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중생이 우리를 하나님을 향하여 생명있는 자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하나님의 단독 사역이요,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성령세례로 행하여지고 있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교회가 베푸는 물세례가 중생을 가져다 주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생은 하나님의 영이시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행하는 물세례가 그를 중생으로 이끌어 가지는 못합니다. 교회가 행하는 물세례는 단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주이심을 믿고 그분을 의지하여서 죄를 회개하는 자에게 구원이 임하였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 자요 그래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나가는 자로 함께 교회의 몸을 이루고 있다는 것에 대한 표징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기에 세례와 함께 행하는 성찬은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몸으로 제공하고 자신의 피로 제공한 떡과 잔을 나누는 것을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그 의미를 기념하는 것에서 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만일 누구든지 합당하지 않은 태도로 떡을 먹고 주님의 잔을 마시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몸과 피를 모욕하는 크나큰 죄를 범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해서 누구든 떡을 먹고 잔을 마시려 하는 자는 그 전에 먼저 자신을 주의 깊게 돌아보아서 주님의 몸을 생각하고 그래서 떡을 먹고 마시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서 할 것을 말씀하였습니다(고전 11: 23-30). 이렇게 성찬은 주님의 죽으심으로 가져다 준 새 언약에 의해서 행해졌으며, 또한 그에 의하여서 구원이 효력 있게 미친 자들이 참여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신앙을 가진 자에게서 세례는 그의 믿음을 아주 확고히 하는 인증(印證)의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그를 성찬으로 인도합니다.

그러면서 또한 이 세례는 표징이기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신앙을 가진 자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말해주고 그 약속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니까 신자 당사자들만의 유익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땅의 모든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태어나는 중생의 사역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며, 이는 사람이 그 때를 인지(認知)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말입니다. 어느 사람이 예수를 저주하지 않고 '주'이심을 신앙하는 고백을 하는 것은 성령으로 하는 것이며, 그래서 성령께서 그러한 고백을 하게 하지 않으시면 그 누구도 예수를 주로 고백할 수 없다는 사실을 성경은 말씀합니다(고전 12:3). 교회가 베푸는 세례[물세례]는 이 신앙고백에 의해서 갖는 것입니다. 교회가 객관적으로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가진 신앙을 인정하고 그래서 교회의 신앙과 동질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가 고백하는 신앙에 의해서입니다. 이것이 아닌 한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어떤 사람의 신앙의 유무와 그 진실 여부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신앙고백을 하는 그의 인격 위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세워집니다. 그러기에 그에게 베푸는 세례를 단지 중생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그래서 중생을 인치기 위해서 시행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단지 중생을 요구하시는 그 필연성에 의해서와 거기에 약속되어진 것을 바라보며 그러한 자신들에게 주어진 의무를 다 이행하고자 하는 자에게 베푸는 것으로만 여길 수는 없습니다. 세례에는 물론 이러한 의미가 당연히 있습니다만 이것이 전부가 아닌 그 이상의 의미인 지금까지 말한 내용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세례에 있어서 자꾸 언급될 수 밖에 없는,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실질적으로 발휘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그래서 그런 자들이 있음으로 해서 이를 세례의 구원론적인 면에서 부정적인 면(세례의 구원론적인 성격을 배제하는 것)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그런 사람이 있을지라도 그들에 의해서 세례가 지닌 본래의 의미와 원리가 약화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다만 세례를 정당하게 시행해야 할 것이며, 또한 그 세례를 받은 자가 합당하게 성찬에 참여하도록 권면할 뿐입니다. 이것은 결코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하거나 게을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아세례는 성경적으로 옳은 전통인가?

이제 우리의 관심인 유아세례 문제를 다루겠습니다. 교회가 베푸는 유아세례에서 과연 그 어린 아이들에게 구원의 효력이 미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님께서는 칼빈의 로마서 9장의 설교를 들어서 이 문제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님께서는 "칼빈의 로마서 9장의 설교를 보면 하나님의 구원예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으로 인한 구원 서정이 이해가 되어집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언약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택자로서의 구원설정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요소라 여겨집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그런데 님께서는 또한 "우리가 언약의 자녀를 유아라 할 때 부모의 신앙고백이 효력이 있음으로 인해 그 유아를 하나님의 권속으로 두는 것이 합당한지 아니면 바울의 표현으로 구원의 설정을 하나님의 주권에 두고 하나님이 택한 언약백성인 이삭의 자녀들이 모두 할례를 받았으나 하나는 귀히 쓸 그릇으로 하나는 천히 쓸 그릇으로 여기는 것처럼 두 자녀 모두에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르치며 훈계하되 구원의 효력에 있어서 부르심(정하심)은 오직 하나님께 두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합니다. 로마서 9장에 아브라함의 자녀 이삭과 이스마엘만을 예로 하였으면 그 본처(하나님의 정하신) 소생의 자녀가 아니기에 그러할 수도 있겠으나 이삭의 자녀는 동일한 입장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선택적으로 임하는 것을 보면서 한 고민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님의 고민이 충분히 이해가 되어집니다.

로마서 9장에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바울은 거기서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바울은 서두에서 동족 이스라엘이 그리스도께 나아가기를 심히 원하고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어느 정도인지 아십니까? 1-3절을 보면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자신이 영원한 저주를 받는 것이 이스라엘 동족에게 구원을 가져올 수만 있다면 그렇게까지라도 하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까지 말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지 않는 사실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위대한 약속을 주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으로 출생했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다 참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그 사실을 아브라함에게는 이삭만이 아니라 다른 아들인 이스마엘도 있었지만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해서 다 그 아들이 아니라 약속을 받은 이삭과 그로부터 난 자손들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다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에 있는 자만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셨으며 또한 그가 리브가와 혼인하여서 쌍둥이 아들을 낳았지만 장자인 에서가 동생인 야곱을 섬기게 될 것을 말씀하였고,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함을 말씀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삭에게 할례를 행하였으며 또한 이삭은 쌍둥이 형제인 에서와 야곱에게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그럴지라도 약속을 따라 난 자는 둘 다가 아닌 야곱입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자신이 원하고 택한 대로 실행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아브라함의 같은 아들일지라도 한 사람은 사랑하고 한 사람은 미워하는 일을 애굽의 바로를 들어서도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애굽 나라를 주신 것은 그를 통하여서 하나님을 온 세상에 나타내셔서 그의 영광을 온 세상에 드러내심으로써 어떤 사람에게는 긍휼을 베푸시는가 하면 또한 어떤 사람에게는 강퍅한 상태에 처하게 하시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 사실을 유대인과 이방인에게로 끌고 갑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차별하지 않고 그들 모두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긍휼에 풍성하신가를 알게 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요 주권입니다.

그렇지만 말입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반면에 유대인은 이방인이 받지 못한 율법을 받는 특권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율법을 지키는 것에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나아가지를 못했습니다. 그것은 단지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로운 자가 되어 구원을 얻으려고 했지 그 율법에서 말해 주고 있는 주님이 자신들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주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깨닫지를 못하여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갖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렇게 이스라엘이 구원받기를 원했지만 그와는 다르게 그리스도께서 마침이 되신 율법에 헛된 열심을 가졌습니다(롬 10:1-4).

여기에서 보는 대로 바울이 말하고자 한 것은 아브라함의 육신의 혈통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으로 난다고 할지라도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은 '약속의 자손에게만 적용된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데 있었습니다. 이삭은 본처의 소생이요 이스라엘은 사라의 몸종으로 있었던 하갈의 소생인 차이에 있기 때문에 본처의 소생인 이삭만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만 사라의 몸을 통해서 날 자인 이삭을 '약속의 자녀'로 정하신 데 따른 것입니다. 이삭이나 이스마엘이나 그들이 본처의 소생이든 첩의 소생이든 모두 다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하갈의 몸에서 날 아들인 이스마엘이 아닌 사라의 몸에서 날 아들인 이삭을 약속의 자녀로 정하셨고, 또한 그와 그를 통하여 날 자를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속에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의 언약을 성취해 가시는 데 있어서 '언약'에 충실하셨으며, 여기에 '선택'이란 구원론적인 교리가 적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선택의 교리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 사역으로 이해가 되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사랑하고 이스마엘은 미워하셨으며, 이러한 사실은 이삭의 아들에게서도 그래도 나타나고 있는데 동생 야곱은 사랑하고 형 에서는 미워하였습니다. 이삭이, 그리고 야곱이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삭을 약속을 이을 자인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셨으며 또한 야곱을 그의 조상에게 주신 약속을 이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면 말이죠. 우리가 자녀를 낳아서 기를 때, 그것도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의 자녀를 낳아 기를 때(사실 한 명의 자녀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 자녀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부모는 자신의 신앙고백 속에서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고 맡기신 자녀를 '언약의 자녀'로 인식하면서 유아세례를 베풀고 신앙 안에서 양육합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럴지라도 님께서 질문하신 대로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일해 가시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선택으로 인한 구원의 서정이 이해가 되어지지만, 그 택자로서의 구원 설정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요소로 여겨지기에 아무리 우리가 낳은 자녀를 언약의 자녀로 인식하고서 유아세례를 베풀며 하나님의 권속[가족]으로 둘지라도 그 중에 어떤 자녀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으며, 반면에 어떤 자녀는 그렇지 못할 것인데 유아세례를 베푸는 것이 무슨 효력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즉 구원의 효력이 유아세례를 받은 자녀들에게 유효하겠는가? 효과적으로 작용하겠는가? 하는 것이죠.

님이여!, 우리가 유아세례를 생각하기에 앞서 그것이 '세례'의 예식으로 행해지는 것이기에 (물)세례 문제로 다루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말이죠. 유아세례를 행하는 예식이 과연 구원의 효력에 관한 문제이겠습니까? 앞서 세례를 다루면서 이 문제를 분명히 하였습니다. 아닙니다. (물)세례가 죄사함의 표이요 또한 죄사함의 약속으로서, 그 세례가 죄사함을 받아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에게서는 인침의 행위인 동시에 또한 그 은혜를 바라보는 자들에게는 죄사함의 약속에 두고 이끄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구약의 할례와 다른 것은 할례는 아브라함 때부터는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의 가족 공동체적으로 행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이 이스라엘 공동체를 형성했을 때는 당연히 민족적 국가의 거룩한 예식으로 행해집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있고자 하면 할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이렇게 할례는 가족 구성원이든 또는 민족 구성원이든 '공동체'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할례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을 이루는 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세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교회의 공적인 인증(認證)을 받아 교회 구성원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할례와 다른 것은, 세례는 분명한 신앙고백 속에서 행해집니다. 할례는 자녀의 신앙고백과는 관계없습니다. 부모의 신앙공동체 안에서 한 일원으로서 난지 8일만에 행해집니다. 그리고 부모를 통해서 자신들의 조상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교육받으며 자랍니다. 그렇지만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섬기는 신앙을 가진 그 고백에 의해서 행해집니다. 우리는 교회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5-18)에 충실합니다. 세례[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는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분과 한몸으로서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는 산 자가 된 것에 대한 신앙적인 행위(롬 6:4)이며, 이러한 사실은 장차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의 부활도 가져오는 일을 할 것이라는 진리에 대한 하늘의 재가를 뜻하는 성격을 갖습니다. 그러한 사실로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물세례]를 받는 것이며, 여기에서 고백하는 신앙에 의해서 세례를 받은 사람은 생명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로 서서 출발하게 됩니다. 이렇게 교회의 실질적인 생명의 탄생을 가져오는 신앙고백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들은 그런 신앙고백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도 이제 겨우 만2세 이하의 유아일 경우에는 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 유아들을 단지 구약 교회인 이스라엘이 행한 할례의 전통을 따라서 세례를 베풀어야 할까요? 그래서 유아세례 따로, 어느 정도 자란 후에 입교문답을 따로 하는 일을 해야 할까요? 사실 유아세례를 말하는 가르침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무엇 때문에 교회는 유아세례를 베풀까요?

유아세례의 근거를 성경에서 단지 제도적인 시행에서 찾고 그러한 논리적인 뒷받침에서 찾는다고 하면 당연히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상대적으로 유아세례를 부정적으로 볼 수 밖에 없고, 그래서 거부해야 할 정당한 이유도 없습니다.

그것은 유아세례를 행하는 근거를 구약의 할례가 지닌 의미에서 원리적으로 찾는다고 해서 이를 문제 삼고 잘못으로 몰고 갈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구속 사역으로 할례가 제사 제도와 함께 종식되어 이를 제도적으로 더 이상 계속해서 해야 할 이유가 없어졌지만 이것은 사실 피 흘림이 필요없는 '더 나은 피'인 세례[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세례]가 생명의 법으로 세워지기 때문이었고,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원리적인 측면에서 자녀를 여전히 하나님의 언약 아래 두고서 신앙적으로 양육해야 할 필연성을 갖고 있는 까닭에 유아세례의 필요성을 요구한다고 해서 잘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교부들에 의해서 유아세례가 사도적 전통에 따른 것인 듯한 기록도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사적으로 유아세례가 행해진 시기는 2세기 때부터, 또는 그보다 훨씬 전인 사도 때부터인 것으로도 보입니다. 이는 당시 때에 활동한 교부들에 의해서 확인이 됩니다. 2세기 후반에 활동한 교부인 터툴리안(Tertullian)은 마태복음 19장 13-14절에 근거하여 유아세례를 금지한 것을 보면 2세기, 또는 그전에 이미 유아세례가 교회에서 실시되고 있었을 것으로도 생각됩니다. 그렇지만 다른 대부분의 교부들은 유아세례를 지지하였습니다. 터툴리안과 동시대의 사람인 오리겐(Origen)은 교회가 사도들에게 유아세례의 전통을 받았다는 뜻으로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3세기의 키프리안(Cyprian)이 참여하였던 공회(A.D. 253)에서는 유아세례의 정당성을 선포하였습니다. 4세기에 활동한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세례의 은혜는 사죄뿐만이 아니요 세례를 통해서 여러 가지 유익을 받기 때문에 유아들에게 세례를 베푼다고 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5세기에 활동한 어거스틴(Augustine)은 유아세례가 사도적 전통이고 자기 시대 때에 실시되고 있는 것으로 말하였습니다. 12세기 이후의 중세교회 시대 때에 행해진 유아세례는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고 때로는 공존적으로 힘을 발휘하며 때로는 적대적 관계 속에 있는 현실 속에서 이용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종교개혁 이후 등장한 기독교의 여러 자생적 세력의 교리적 이해 관계의 얽힘 속에서 유아세례의 정당성은 논쟁 거리가 되기도 하면서 유아세례를 베푸는 교회로 또는 유아세례를 시행하지 않는 교회로 지금까지 존재해 오고 있습니다. 종교개혁가인 루터와 칼빈은 서로 간에서 개혁의 내용상의 차이는 있지만 교리와 교회생활에서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유아세례를 없애지는 않았습니다. 칼빈은 유아세례의 첫 번째 근거를 구약의 할례에서 보는 언약의 원리를 계승하는 것에 두었습니다. 신약 교회는 구약 교회의 발전적인 연속체로 보았기에 비록 신약 교회가 구속의 영적 완성에 근거한 것인 만큼 제도와 전통에 있어서 그러한 형식 원리를 그대로 따를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구약 교회는 예표적인 성격을 띠고 있고 신약 교회는 그 성취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정신과 본질에 있어서는 양 시대의 교회가 동일하다고 보아서 할례의 신약적 형태로 유아세례를 받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표현은 다르지만 후대의 유명한 신학자인 바빙크(H. Bavink)의 견해에서도 보게 됩니다. 그는 "개혁신학자들은 유아세례의 근거가 성경에 있다고 하며 하나님의 은혜 언약[계약]은 성인된 신자들만이 아니라 그 자녀들까지도 포함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들이 말하듯이 성인이 세례를 받는 것처럼 유아가 세례를 받는 것이 정당한 것은 그것이 반드시 중생이나 신앙이나 회개를 이유로 함이 아니고 오직 은혜 언약[계약] 때문이다. 유아세례의 근거로서 더 이상 깊고 튼튼한 것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할례로부터 세례에 이르기까지에 따를 경우 이러한 견해들은 그대로 다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교부들이 유아세례의 전통을 사도들에 의하여서 갖게 된 것으로 말하지만 그 또한 사실 여부를 그들의 말에 의존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이유로 무조건 유아세례의 부당함으로만 몰고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례에는 분명 하나님의 언약적 관계의 이해 속에서 주어진 '죄사함의 약속'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해서, 신앙의 부모는 자기의 자녀들을 '언약의 자녀'로 인식을 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세례에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유아세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아이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행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시고...."하는 차원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성인된 남자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해 가지고 있는 신앙을 세례 의식을 통해 고백하면서 교회원으로 가입하는 공적인 인정을 받습니다만, 유아는 지금 하나님의 새 언약의 은혜 안에 있는 부모의 책임 아래서 그 아이를 또한 하나님의 언약 아래 두고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잘 양육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겠다는 자녀를 향한 부모의 신앙고백이라는 사실입니다.

앞서 한 내용의 부분에서도 말했듯이 교회가 베푸는 세례인 물세례는 그가 고백하는 신앙에 의해서 행하게 됩니다. 그가 지닌 신앙의 진실되고 그렇지 않은 사실은 전적으로 그가 하는 고백에 따릅니다. 그래서 교회가 객관적으로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가진 신앙을 인정하고 그래서 교회의 신앙과 동질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가 고백하는 신앙에 의해서입니다. 이것이 아닌 한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어떤 사람의 신앙의 유무와 그 진실 여부를 판단할 수 없음을 말하였습니다. 그렇기에 물세례는 어떤 한 신자에게 구원의 효력으로서 행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효력은 전적으로 그 사람에 내주하고 계신 성령께서 갖게 하시는데 따르는 것입니다. 물세례는 다만 그러한 사실을 공적으로 인정하고 그 사실을 교회에 선포하여서 교회가 그를 교회의 한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물세례가 지닌 역할과 그 기능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성령세례와 혼동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것은 유아세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태어난지 만2년도 안 되는 유아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은 구원의 효력의 차원에서가 아닙니다. 아무런 인식력도 없는 아이에게 신앙고백과 구원의 효력이라니요!. 더욱이 세례를 받는 유아들이 과연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난 자들인가 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의 작정과 관련하여서는 그 유아들이 훗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갖고 그 신앙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교회에 가입하는 것을 통해서 입증될 터인데 유아 때에 베푸는 세례에서 구원의 효력 운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님이여!, 이제 내가 처음에 님에게 교회 헌법의 예배모범에서 말하고 있는 유아세례와 그에 대한 부모의 책임을 소개하면서 "유아세례의 예식을 행함을 부모의 자녀에 대한 신앙 양육의 책임과 연계시키고 있습니다. 님께서는 이 점을 우선 특별히 관심을 갖고 주시해 주실 것을 바랍니다"라고 한 말을 기억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부모는 당연히 자신의 자녀들에 대한 인식을 '하나님의 언약의 자녀'로 가지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는 그 자녀들이 하나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택한 자녀로 선택되었고, 그래서 모두가 다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자녀들 모두가 하나님의 약속을 이을 자인 사랑을 받는 자일 것을, 아니면 그들 중에 한 명이, 아니면 그들 모두가 다 구원에서 제외될지를.... 모릅니다. 허지만, 그들의 부모인 그리스도인은 자녀들을 하나님의 언약 아래 두고서 "삼가 부모의 직분을 할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의 자녀를 가르치며, 신구약 성경에 가르친 거룩한 종교의 원리대로 가르칠 것이니, 이 원리의 요령은 우리 교회 신경과 대소요리 문답에 간단히 가르쳤은즉 이 모든 책임은 부모의 직분을 도와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녀를 위하여 기도하며, 친히 그 자녀와 함께 기도하며, 그 아이 눈 앞에 충성함과 경건함의 본을 보이고, 하나님의 주시는 힘을 얻어 진력하여 주의 성품과 훈계 안에서 자라게 해야 한다"에 충실하는 것은 여기서 밝히고 있는 대로 당연히 부모로서 그 직분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성장하는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서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진리를 가까이 대하고 인도를 받을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한다고 하면, 그래서 그 열매를 자녀에게서 본다고 하면 그 부모는 참으로 행복하다고 아니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반면에 부모가 그렇게 자녀를 하나님의 언약 아래 두고서 신앙적으로 양육하는데 최선을 다한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부모의 뜻과 노력과는 상관없이 어그러진 길로 간다 해서 부모로서 맡은 직분에 불충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의 부모는 자녀들이 주님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잃지 않도록 항상 염려하여 자녀를 돌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자녀를 둔 부모의 심정이요 자세여야 합니다.


님이여!. 이제 말을 끝맺을까 합니다.

유아세례를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는 논쟁거리가 아닙니다. 유아세례에 대해 좋게 생각해서 하면 어떻고, 유아세례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판단되어서 안 하면 어떻습니까? 교회의 회의에서 유아세례를 할 것을 결의하여서 시행하면 어떻고, 교회 회의에서 유아세례를 금지를 결의하여서 시행하지 않으면 또 어떻습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성경적인 근거를 추적해서 어떤 견해를 갖는다고 해서 그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그 판단에 따를 뿐입니다. 이게 무슨 두리뭉실한 이야기인 것처럼 들립니까?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는 유아세례의 시행 여부를 말해 주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아세례는 성경적으로 옳은 전통인가?를 말해주지 않습니다. 오늘날 유아세례는 옳은가? 과연 성경적인가? 하면서 유아세례를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말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유아들이 받는 그 세례[물세례]를 구원 얻는 믿음의 지식과 분별력에서 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도 없고 진리의 분별력도 할 수 없는 유아들이 성인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 속에서 구원론적인 의미에서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면 유아세례를 행하는 교회는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 교회들이 지금 유아세례를 구원의 효력이 미치는 것으로 베푸는 일을 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그 유아에게 세례를 받는 오늘 '구원이 임하였다'고 가르칩니까?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부모로서 신실히 하여야 할 일을 확인시키고 하나님의 언약에서 바라보는 약속을 의지할 뿐만 아니라 자녀들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칠 것을 고백하게 하는 것이라면 이 또한 틀림없는 성경적으로 옳은 일입니다.그런 면에서 본 개혁주의신앙공동체에 올려져 있는 '유아세례에서 보는 언약의 자녀들에 대한 신앙교육의 중요성'을 보면 충분히 이해될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리고 유아세례를 시행하는 것에서 이것이 결코 구원설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성의 본질을 훼손하거나 벗어나지도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는 님이여, 님의 질문에 대한 답글로서 충분히 이해하고 그래서 님의 마음에 수납될 수 있을 만큼 만족을 드렸는지요.

아니면 그렇지를 못하여서 여전히 고민을 남겨 놓게 하였는지...., 또는 이전 보다 더욱 혼란케 하였는지....., 만일 그렇다면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부족한 지식에 따른 것이니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럴 경우 더 나은 지식으로의 인도를 받는 도움을 입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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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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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루디아 | 작성시간 08.12.11 십보라의 "피남편"에 대한 해석에 대해 잘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느 해석에도 잘 납득이 안되어서 그냥 있었는데 이 글을 읽으면서 뜻밖의 수확을 얻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루디아 | 작성시간 08.12.11 다시금 유아세례가 비성경적이라고 들고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이 글을 통해 다시한번 공부하게되어서 감사합니다.
  • 작성자진리와자유 | 작성시간 09.11.24 유아세례는 성경적입니다. 개혁교회가 지켜야 할 바른 신앙이고, 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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