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민님 안녕하세요.
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질문을 해 주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구원받게 해달라고 기도해도 됩니까? 구원은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으로 아는데.. 만약 가족이나 친구 가운데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을 구원시켜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예정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적절한 기도가 아닐 듯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 옳습니까?"
그러면, 이에 대하여 답변을 시작해 나가겠습니다.
먼저, '기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를 기독교[그리스도교]가 가지고 있는 성경적인 이해 속에서 갖겠습니다.
성도에게서 기도는 그야말로 일상(日常)적인 생활로 갖는 본능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기도가 어떻게 나오게 되는 것이냐에서 성도의 기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님께서는 다음의 기도를 보거나 또는 행한 적이 있나요? 어떤 것인가 하면 '기복(祈福)'입니다. 그러니까 복을 구하는 기도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복은 하나님께서 언약에 의한 구속사에서 성취하시는 하나님 나라요 곧 그 의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땅에 속한 육신에 관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기도를 무속종교의 형태로 말하는데 자연의 그 무엇을 통해서든지 신의 존재와 그 능력과 효험을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가령 모지역의 한 절 근처에서는 큰 나무가 하나 있는 데 그 가지 하나에 아래로 향한 남근(男根)의 모습을 한 돌출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한 분이 며느리[딸, 또는 자신]가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소원하면서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얼마 후 과연 임신을 하였고 그렇게도 바랐던 아들을 보았습니다. 그 일은 소문이 소문을 낳고 급속도로 확산하여서 많은 사람들에게서는 절대적인 믿음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 남근을 달고 있는 나무를 향해 기도를 하면 아들을 낳는다는 믿음 말입니다. 꼭 이런 나무는 아닐지라도 우리나라 무속신앙에서 마을에 대표되는 큰 나무를 산신령이 깃든 것으로 본다든지, 삼신할머니가 아들을 점지해 준다든지 하는 신앙에서 대표적인 기복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시지만 불교의 한 유명한 스님은 불교가 본래의 모습인 철학이 아닌 기복 종교화되는 것을 우려했다지요!. 사실 절에서 스님이 돈을 받고 병 낫기를 위해서이거나 또는 여타의 소원 성취를 위해서 부적을 만들어 준다든지 기도를 해 준다든지 하는 것은 본래의 불교의 존재와는 전혀 맞지 않는 모순된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게 지금 남의 일 가지고 심각해 하며 왈가왈부 할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네 교회의 모습의 실상입니다. 그래서 뜻 있는 자들은 가슴을 쥐어짜며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예배에서도, 그 흔한 부흥집회이니 무슨 집회이니 하는 데서는 예외 없이 기복신앙을 말하고 가르치며 그 신앙으로 기도하면서 살게 하니 말입니다.
왜 서두에서부터 이런 부정적인 사실을 들추어내서 말하는가 하면, 기도의 본질을 올바르게 아는 데서부터 이야기의 출발을 하기 위해서 입니다. 도대체 왜 기독교에서도 여느 무속 종교라든지 기타 기복 신앙의 종교가 가지고 있는 기도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그런 기도를 하는 것입니까? 우선은 말입니다. 그것은 기도를 잘못 알고 있는 것이 한 요인입니다. 기도는 '마음으로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기를 신불(神佛)에게 비는 일'이라고 우리 나라 말 국어 사전에 정의되어 있듯이 사람이 자기의 마음에 바라는 바인 소원의 성취를 위해서 신불에게 비는 행위인 것으로만 이해한 데 따르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기도는 자신이 바라는 바의 가지고 있는 소원을 신에게 비는데 따른 응답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응답이라는 것은, 기도자가 당연히 자기의 소원을 가지고 꼭 이루어 달라고 빈 것이기에 꼭 있어야 할 것이 됩니다. 기도자에게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이 아니죠.
그렇지만 말이죠.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경적인 이해에서 우리가 갖는 기도는 그런 기도와는 본질적인 성격부터 다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마 6:5-15, 25-34; 눅 11:1-13)에서는 전혀 그런 것으로서의 기도를 말씀하시지 않고,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첫째로,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의해서 갖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외식하는 자의 기도를 경계시키셨습니다. 가령 경건한 척 하는 선을 가장한 자들처럼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서 하는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 할지, 그래서 무엇을 구할지를 다 아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하는 것이기에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성에 의해서, 그러니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성에 의해서 가져지는 것이 기도입니다. 여기에는 남을 의식하여서 선을 가장하는 기도를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이교를 믿는 이방인들처럼 하는 기도도 경계시키셨습니다. 그들은 중언부언하여서 기도합니다. 같은 말을 또 하고, 그래서 한 말을 또 합니다. 그렇게 반복해서 합니다. 그것은 그렇게 해야만 기도의 응답을 받을 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기도자가 구하기 전에 이미 그들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그렇게 중언부언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있어야 할 것을 다 알고 계시다니요!.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다 알고 계시다는 것이요, 해서 우리가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이미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고 계시기에 그것을 알아서 다 들어주신다는 그런 뜻입니까? 과연, 정말 그렇습니까? 그런 면에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성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다음의 두 번째에서 보겠습니다.
둘째로, 기도는 우리가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있으며 그래서 그 뜻을 잘 받들어서 순종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구하기 전에 이미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알고 계신다"(마 6:8)고 말씀하시면서, 이어서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며 우리가 '주기도문'으로 말하고 있는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에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를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의 생명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주권적 권능으로 이끌어가시며 보호해 주실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데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우리가 고백하는 주기도문의 형식에서 보는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에서의 '대개'란 말에서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대개'는 '왜냐하면'입니다. 앞에서 가르치신 여섯 부분의 기도를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신 후, 그러니까 "너희들이 기도해야 할 내용은 이러 이러한 것이다"라고 가르치신 후, 이제 제자들이 그렇게 기도해야 할 당위성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하라!. 왜냐하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입니다. 이것을 앎으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입니다!." 하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감사와 경배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좇아 그 기도의 삶에 하나님의 응답을 바라보며 기다림을 갖습니다. 송영의 마지막 말인 '아멘'에는 하나님의 응답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아멘은 '그렇게 될 것이다', '그렇게 이루어질 것이다'를 뜻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확신으로 갖는 기대가 아닙니다. 가르치신 기도의 응답이 기대되는 것은 그것이 보증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그들과 함께 하시며 도우시겠다는 약속과 능력을 말씀하심으로 제자들을 그에 대한 믿음 속에 두셨습니다.
그렇다면 말이죠. 님이여!, 기도가 무엇인지를 잘 이해하였을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이 세상에 처한 현실적인 상황과 그에 따른 육신적인 처지 속에서 지닌 바라는 바 그 무엇을 이루어 달라고 간청하여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이 우리를 향하여 갖고 계신 뜻을 잘 받들어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으로서의 인생을 사는 것이요, 항상 그 의식(意識) 속에 있으면서 그럴 수 있기 위하여서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고 의지하는 간구 속에 사는 것입니다. 이를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해 주심으로써 그러한 의중을 분명히 알게 해 주십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그러한 염려는 이방인들이나 갖는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일을 하면서 살 것인지를 고민하면서 그것을 실천할 수 있기 위하여 기도하라…"(마 6:25-34).
사실 우리가 갖는 기도의 본질적인 성격이 이런 것이라는 데는 보다 근원적인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갖고 계신 영원한 작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기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갖고 계신 작정인데,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속하여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것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하나님의 계획의 실천으로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셨으며, 또한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시고 삼일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소유할 수 있게 해 주신 것이며,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시고 교회를 세워나가시면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의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일하여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다름 아닌 이러한 사실 속에서 우리가 주님과 어떤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할지를 기도를 통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제 님이 질문한 내용으로 보다 접근하여서 기도를 보겠습니다. 님은 "다른 사람을 구원받게 해달라고 기도해도 됩니까? 구원은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으로 아는데.. 만약 가족이나 친구 가운데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을 구원시켜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예정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적절한 기도가 아닐 듯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 옳습니까?"하며 궁금해 하였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볼까요?
우리가 불신자를 위하여서 기도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우리의 기도는 그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든 또는 가족이나 다른 믿는 자를 위한 것이든지 간에 사실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큰 원칙 속에서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말이죠.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라는 믿음의 공동체 속에 있는 삶인 자신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며, 또한 가족을 위하여서 기도하는 것이며, 또한 다른 믿는 자를 위하여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적인 기도를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한 일원으로 있는 내가 나와 나의 가족과 나의 믿음의 형제들과 갖고 있는 관계 속에서 가질 기도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라는 큰 원칙 속에서 보는 원리를 좇아서 갖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제자된 자에게 위임된 사명과 연계해서 기도를 갖게 됩니다. 그것은 마태복음 28장 18-20절에서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신 데 따른 것입니다. 여기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크게는 '너희는 (온 세상으로)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따라 붙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너희는 가서 첫째,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것이요 둘째, 제자를 삼은 그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것이요 셋째, 그러한 자들에게 너희들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자신들에게 위임된 사명이 있기에, 교회는 첫째는 예배하는 공동체로서의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뚜렷하게 보여나가는 동시에 둘째는 그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위임된 사명을 충성스럽게 잘 받들어서 수행해 나가야 하며, 따라서 그러하고자 하는 이 기도를 항상 해 나가는 것은 의당히 교회가 가져야 할 마땅한 신앙적 자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기도하는 것이 어떤 일입니까? 그것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뜻을 온 세상에 알게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서 행하고자 하는 권세가 과연 생명있게 힘있게 행사될 수 있도록 교회가 받들어 나가는 믿음의 일입니다.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자신과 한몸으로 결합된 교회와 함께 세상 끝날까지 이땅에 존재합니다. 그래서 이땅에 계신 동안에 교회가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함으로 주님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또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함으로 주님의 뜻대로 역사를 움직이시는 권세를 행사하며 살도록 하십니다. 우리가 갖는 기도는 우리를 향하여 갖고 계신 주님의 뜻을 잘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요 또한 주님의 뜻이 과연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7장에서 구원의 중보자의 자격을 지닌 신분에서 '대제사장적인 중보의 기도'를 하십니다. 거기에 보면,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을 이룰 때가 되었다는 하면서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본래 그들은 아버지의 사람이지만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셨고 자기는 그들에게 아버지께서 주신 말씀을 전하였는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자기가 아버지께로부터 이 땅에 내려왔으며 아버지께서 자기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고 이를 믿는 믿음을 잘 지켰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모든 사람들을 돌보셔서 아버지와 자기가 하나인 것 같이 이들도 하나가 되게 하고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게 할 것을 구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본 영광을 이들도 함께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구합니다.
님이여, 우리가 불신자를 위하여서 하는 기도는 교회가 그리스도이신 주님께로부터 위임받은 사명 속에서 갖는 이 구원의 중보자의 기도 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불신자를 위하여서 기도한다는 것은 멸망 받을 자를 위하여서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자들이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게 되기를 위하여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안전하게 보호를 받아 멸망의 자식 외에는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신자를 위하여서 기도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는 복음 전도[복음 전파]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 속에서 연계해서 봐야 합니다. 불신자들이 멸망을 당하지 않고 구원받기를 원하는 이것은 복음 전도[복음 전파]를 통해서 나타내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중적인 의미에서입니다. 불신자는 예수 안 믿기로 작정한 자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게 아니고 지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심을 믿지 않고 있는 자를 뜻합니다. 이들에게는 님께서 예정론의 관점에서 말한 대로 "구원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분명히 그렇습니다. 복음 전도라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사람을 구원하는 믿음의 의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사람에게서 그 의가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실을 온 세상에 드러내어서 알게 하는 것이 복음 전도입니다. 이 복음 전도가 어떤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향기로운 냄새입니다. 자신들을 생명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좋고 기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 생명의 향기를 맡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죽기보다 싫습니다. 그것은 그들은 멸망으로 나아갈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냄새에서 죽음과 멸망의 공포에 찬 냄새를 맡습니다. 복음 전도가 그들에게는 지혜로운 말씀으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고 미련한 것으로 들리는 것은 그런 까닭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에서, 부활의 복음에서 생명의 향기를 맡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냄새를 맡습니다. 도무지 하나님의 능력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무런 능력도 없는 것으로 여깁니다(고전 1:18-25; 고후 2:14-16).
복음 전도는 말이죠. 우리가 누구를 믿게 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다만 꽃의 향기가 퍼져나가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그리스도의 향기를 사방에 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맡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 중에서 어떤 사람은 생명을 보는 향기로운 냄새로 맡거나 아니면 어떤 사람은 죽음과 두려움의 공포를 보는 향기를 맡는 것은 우리의 능력에 관한 일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 전도하는 것은 이처럼 생명에 속한 사람과 사망에 속한 사람을 분명히 구분 짓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밖에 있는 자들도 있습니다. 복음 전도는 우리가 구원은 하나님께 있다는 진리를 세상에 전하여 온 세상에 하나님을 선양(宣揚)하는 데 있는 것이지 우리가 누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불신자의 구원을 위해서 복음 전도를 한다는 것은 아직 하나님의 구원의 영광을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 진리를 나타내어 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는 눈을 가져 기쁨을 지니는 자와 그것을 보지 못하여 공포를 느끼는 자를 잣대로 재어서 그것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작정이 모순된 허구적인 것이라는 것을 들추어내는데 이용하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예정론을 내세워서 "하나님께서 이미 구원하시기로 다 정하셨으면 인간이 굳이 복음을 전파하며 전도할 이유가 무엇이 있는가? 때가 되면 다 알아서 교회에 나올 것이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아무리 죽어라고 복음을 전파하여 전도해도 안 믿을텐데...."하는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기에 하는 말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님께서 염려하신 대로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정말 구원의 예정론적인 관점에서 보자만 적절한 기도가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말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가져 교회를 이루는 것을 복음의 전파를 통해서 하게 하셨지 복음의 전파가 없이도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교회를 이룰 수 있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다음의 말씀을 보십시오. 로마서 10장 13-18절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믿음은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위하여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 전하는 말씀을 들음으로써 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듣든지 안 듣든지 복음을 전파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말이죠. 설사 그 누가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듣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복음 전도는 불신자의 생명을 구원하는 데만 초점에 맞추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복음 전도를 통해서 멸망에 이를 자를 드러내시는 것도 복음 전도입니다. 이 사실을 항상 인식하고 있어야 하며 따라서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누가 복음을 듣든지 안 듣든지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복음 전도란 구원의 하나님을 온 세상에 선양하는데 있는 것이지 사람을 어떻게 해서든지, 그래서 무슨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구원하는데 맞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말이죠. 불신자를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는 문제도 해결되었으리라 여겨집니다. 우리는 불신자의 구원을 위하여서 기도하여야 합니다. 바울이 동족 이스라엘을 염려하며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얼마나 열정을 가지고 일하였는지를 님은 잘 아실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이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힘과 그 수고와 노력의 대가요 결과로 구원만을 기대하면서였습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동족인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 충성스럽게 사역을 수행하였습니다만 이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의 옷과 소매자락을 붙잡고 "당신들, 제발 예수 믿어야 돼!. 그래야만 죄에서 구원을 받고 생명을 얻어. 그렇지 않으면 다 지옥에 가게 돼. 그러니 내 말 들어!."하면서 교회에 끌고 나오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단지 하나님이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전파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거부하는 그들에게 그럴 경우 그 구원이 다른 사람[이방인]에게 간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도 불신자를 위하여서 기도하고 또한 복음 전도에서도 열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 불신자가 우리의 가족이든 또는 친지이든 또는 친구이든 또는 이웃이든 또는 직장 동료이든 또는 오며 가며 스치는 중에 인연을 갖게 된 사람이든지 간에 복음 전도의 대상이 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어서 그 생명으로 교회를 이룰 수 있기를 위하여서 기도하여야 하고, 그래서 그 심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에게 위임된 사명인 복음을 전파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더하여 주신다면 그들 한 사람의 생명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그리스도께서 입으신 영광을 그들도 볼 수 있기를 위하여서 또한 기도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기도는 결코 하나님이 가지신 구원의 예정론적인 입장에 위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위임된 복음을 전하며 불신자를 위하여서 기도를 가질 뿐이지만, 전적 부패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도무지 볼 수 없는 눈과 들을 수 없는 귀와 깨달음에 이를 수 없는 강퍅한 마음을 지닌 인간에게 볼 수 있는 눈을 소유하게 하시고 들을 수 있는 귀를 갖게 하셨으며 깨닫는 마음을 지니게 하셔서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 위대한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서 얼마나 철저하고 빈틈없이 그렇게 차질 없이 당신이 갖고 계신 구원의 예정을 이 역사 속에서 그들에게 실천적으로 실행하여 가고 계시는지를 보기 때문입니다. 이는 반대로 멸망에 이르는 자들을 보는 것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님이여!.
이상으로 말을 맺겠습니다. 지금까지 언급한 기도의 본질적인 성격을 잘 이해하시고 하나님이 가지신 영원한 작정 속에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관점에서 그리고 이것과 연결되어 있는 교회적인 삶의 관점에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문제를 찬찬히 살펴보시며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님께서 알고자 하는 기도가 하나님의 구원의 예정론에 맞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위대한 진리의 교리 위에서 행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것이라는 확신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님의 질문에 충분한 설명이 되어서 이해가 되었는지요!
님에게 흡족함을 드릴 수 있을 만큼 답글을 올려드렸으면 좋겠는데, 무엇을 설명하고 표현하는 것을 글로 한다는 것이 참 어렵다는 것을 느낍니다. 더욱이 대면하여서 서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정확히 전달하는 대화를 할 수 없는 가운데서 이렇게 글로서만 할 경우는 더더욱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러기에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이 혹 님이 알고자 하는 내용을 정확히 따르지 못함으로써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것은 아닌지 하는 염려를 갖습니다. 그럴 경우 주저하지 마시고 설명이 부족하거나 그래서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거나 오히려 의문이 남거나 하는 부분을 다시 질문해 주십시오.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최선을 다해서 성실하게 답변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님의 평안을 빕니다.
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질문을 해 주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구원받게 해달라고 기도해도 됩니까? 구원은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으로 아는데.. 만약 가족이나 친구 가운데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을 구원시켜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예정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적절한 기도가 아닐 듯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 옳습니까?"
그러면, 이에 대하여 답변을 시작해 나가겠습니다.
먼저, '기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를 기독교[그리스도교]가 가지고 있는 성경적인 이해 속에서 갖겠습니다.
성도에게서 기도는 그야말로 일상(日常)적인 생활로 갖는 본능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기도가 어떻게 나오게 되는 것이냐에서 성도의 기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님께서는 다음의 기도를 보거나 또는 행한 적이 있나요? 어떤 것인가 하면 '기복(祈福)'입니다. 그러니까 복을 구하는 기도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복은 하나님께서 언약에 의한 구속사에서 성취하시는 하나님 나라요 곧 그 의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땅에 속한 육신에 관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기도를 무속종교의 형태로 말하는데 자연의 그 무엇을 통해서든지 신의 존재와 그 능력과 효험을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가령 모지역의 한 절 근처에서는 큰 나무가 하나 있는 데 그 가지 하나에 아래로 향한 남근(男根)의 모습을 한 돌출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한 분이 며느리[딸, 또는 자신]가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소원하면서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얼마 후 과연 임신을 하였고 그렇게도 바랐던 아들을 보았습니다. 그 일은 소문이 소문을 낳고 급속도로 확산하여서 많은 사람들에게서는 절대적인 믿음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 남근을 달고 있는 나무를 향해 기도를 하면 아들을 낳는다는 믿음 말입니다. 꼭 이런 나무는 아닐지라도 우리나라 무속신앙에서 마을에 대표되는 큰 나무를 산신령이 깃든 것으로 본다든지, 삼신할머니가 아들을 점지해 준다든지 하는 신앙에서 대표적인 기복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시지만 불교의 한 유명한 스님은 불교가 본래의 모습인 철학이 아닌 기복 종교화되는 것을 우려했다지요!. 사실 절에서 스님이 돈을 받고 병 낫기를 위해서이거나 또는 여타의 소원 성취를 위해서 부적을 만들어 준다든지 기도를 해 준다든지 하는 것은 본래의 불교의 존재와는 전혀 맞지 않는 모순된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게 지금 남의 일 가지고 심각해 하며 왈가왈부 할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네 교회의 모습의 실상입니다. 그래서 뜻 있는 자들은 가슴을 쥐어짜며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예배에서도, 그 흔한 부흥집회이니 무슨 집회이니 하는 데서는 예외 없이 기복신앙을 말하고 가르치며 그 신앙으로 기도하면서 살게 하니 말입니다.
왜 서두에서부터 이런 부정적인 사실을 들추어내서 말하는가 하면, 기도의 본질을 올바르게 아는 데서부터 이야기의 출발을 하기 위해서 입니다. 도대체 왜 기독교에서도 여느 무속 종교라든지 기타 기복 신앙의 종교가 가지고 있는 기도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그런 기도를 하는 것입니까? 우선은 말입니다. 그것은 기도를 잘못 알고 있는 것이 한 요인입니다. 기도는 '마음으로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기를 신불(神佛)에게 비는 일'이라고 우리 나라 말 국어 사전에 정의되어 있듯이 사람이 자기의 마음에 바라는 바인 소원의 성취를 위해서 신불에게 비는 행위인 것으로만 이해한 데 따르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기도는 자신이 바라는 바의 가지고 있는 소원을 신에게 비는데 따른 응답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응답이라는 것은, 기도자가 당연히 자기의 소원을 가지고 꼭 이루어 달라고 빈 것이기에 꼭 있어야 할 것이 됩니다. 기도자에게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이 아니죠.
그렇지만 말이죠.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경적인 이해에서 우리가 갖는 기도는 그런 기도와는 본질적인 성격부터 다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마 6:5-15, 25-34; 눅 11:1-13)에서는 전혀 그런 것으로서의 기도를 말씀하시지 않고,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첫째로,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의해서 갖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외식하는 자의 기도를 경계시키셨습니다. 가령 경건한 척 하는 선을 가장한 자들처럼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서 하는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 할지, 그래서 무엇을 구할지를 다 아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하는 것이기에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성에 의해서, 그러니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성에 의해서 가져지는 것이 기도입니다. 여기에는 남을 의식하여서 선을 가장하는 기도를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이교를 믿는 이방인들처럼 하는 기도도 경계시키셨습니다. 그들은 중언부언하여서 기도합니다. 같은 말을 또 하고, 그래서 한 말을 또 합니다. 그렇게 반복해서 합니다. 그것은 그렇게 해야만 기도의 응답을 받을 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기도자가 구하기 전에 이미 그들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그렇게 중언부언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있어야 할 것을 다 알고 계시다니요!.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다 알고 계시다는 것이요, 해서 우리가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이미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고 계시기에 그것을 알아서 다 들어주신다는 그런 뜻입니까? 과연, 정말 그렇습니까? 그런 면에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성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다음의 두 번째에서 보겠습니다.
둘째로, 기도는 우리가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있으며 그래서 그 뜻을 잘 받들어서 순종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구하기 전에 이미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알고 계신다"(마 6:8)고 말씀하시면서, 이어서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며 우리가 '주기도문'으로 말하고 있는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에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를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의 생명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주권적 권능으로 이끌어가시며 보호해 주실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데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우리가 고백하는 주기도문의 형식에서 보는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에서의 '대개'란 말에서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대개'는 '왜냐하면'입니다. 앞에서 가르치신 여섯 부분의 기도를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신 후, 그러니까 "너희들이 기도해야 할 내용은 이러 이러한 것이다"라고 가르치신 후, 이제 제자들이 그렇게 기도해야 할 당위성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하라!. 왜냐하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입니다. 이것을 앎으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입니다!." 하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감사와 경배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좇아 그 기도의 삶에 하나님의 응답을 바라보며 기다림을 갖습니다. 송영의 마지막 말인 '아멘'에는 하나님의 응답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아멘은 '그렇게 될 것이다', '그렇게 이루어질 것이다'를 뜻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확신으로 갖는 기대가 아닙니다. 가르치신 기도의 응답이 기대되는 것은 그것이 보증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그들과 함께 하시며 도우시겠다는 약속과 능력을 말씀하심으로 제자들을 그에 대한 믿음 속에 두셨습니다.
그렇다면 말이죠. 님이여!, 기도가 무엇인지를 잘 이해하였을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이 세상에 처한 현실적인 상황과 그에 따른 육신적인 처지 속에서 지닌 바라는 바 그 무엇을 이루어 달라고 간청하여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이 우리를 향하여 갖고 계신 뜻을 잘 받들어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으로서의 인생을 사는 것이요, 항상 그 의식(意識) 속에 있으면서 그럴 수 있기 위하여서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고 의지하는 간구 속에 사는 것입니다. 이를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해 주심으로써 그러한 의중을 분명히 알게 해 주십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그러한 염려는 이방인들이나 갖는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일을 하면서 살 것인지를 고민하면서 그것을 실천할 수 있기 위하여 기도하라…"(마 6:25-34).
사실 우리가 갖는 기도의 본질적인 성격이 이런 것이라는 데는 보다 근원적인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갖고 계신 영원한 작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기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갖고 계신 작정인데,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속하여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것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하나님의 계획의 실천으로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셨으며, 또한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시고 삼일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소유할 수 있게 해 주신 것이며,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시고 교회를 세워나가시면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의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일하여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다름 아닌 이러한 사실 속에서 우리가 주님과 어떤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할지를 기도를 통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제 님이 질문한 내용으로 보다 접근하여서 기도를 보겠습니다. 님은 "다른 사람을 구원받게 해달라고 기도해도 됩니까? 구원은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으로 아는데.. 만약 가족이나 친구 가운데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을 구원시켜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예정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적절한 기도가 아닐 듯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 옳습니까?"하며 궁금해 하였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볼까요?
우리가 불신자를 위하여서 기도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우리의 기도는 그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든 또는 가족이나 다른 믿는 자를 위한 것이든지 간에 사실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큰 원칙 속에서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말이죠.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라는 믿음의 공동체 속에 있는 삶인 자신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며, 또한 가족을 위하여서 기도하는 것이며, 또한 다른 믿는 자를 위하여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적인 기도를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한 일원으로 있는 내가 나와 나의 가족과 나의 믿음의 형제들과 갖고 있는 관계 속에서 가질 기도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라는 큰 원칙 속에서 보는 원리를 좇아서 갖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제자된 자에게 위임된 사명과 연계해서 기도를 갖게 됩니다. 그것은 마태복음 28장 18-20절에서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신 데 따른 것입니다. 여기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크게는 '너희는 (온 세상으로)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따라 붙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너희는 가서 첫째,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것이요 둘째, 제자를 삼은 그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것이요 셋째, 그러한 자들에게 너희들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자신들에게 위임된 사명이 있기에, 교회는 첫째는 예배하는 공동체로서의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뚜렷하게 보여나가는 동시에 둘째는 그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위임된 사명을 충성스럽게 잘 받들어서 수행해 나가야 하며, 따라서 그러하고자 하는 이 기도를 항상 해 나가는 것은 의당히 교회가 가져야 할 마땅한 신앙적 자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기도하는 것이 어떤 일입니까? 그것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뜻을 온 세상에 알게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서 행하고자 하는 권세가 과연 생명있게 힘있게 행사될 수 있도록 교회가 받들어 나가는 믿음의 일입니다.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자신과 한몸으로 결합된 교회와 함께 세상 끝날까지 이땅에 존재합니다. 그래서 이땅에 계신 동안에 교회가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함으로 주님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또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함으로 주님의 뜻대로 역사를 움직이시는 권세를 행사하며 살도록 하십니다. 우리가 갖는 기도는 우리를 향하여 갖고 계신 주님의 뜻을 잘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요 또한 주님의 뜻이 과연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7장에서 구원의 중보자의 자격을 지닌 신분에서 '대제사장적인 중보의 기도'를 하십니다. 거기에 보면,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을 이룰 때가 되었다는 하면서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본래 그들은 아버지의 사람이지만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셨고 자기는 그들에게 아버지께서 주신 말씀을 전하였는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자기가 아버지께로부터 이 땅에 내려왔으며 아버지께서 자기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고 이를 믿는 믿음을 잘 지켰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모든 사람들을 돌보셔서 아버지와 자기가 하나인 것 같이 이들도 하나가 되게 하고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게 할 것을 구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본 영광을 이들도 함께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구합니다.
님이여, 우리가 불신자를 위하여서 하는 기도는 교회가 그리스도이신 주님께로부터 위임받은 사명 속에서 갖는 이 구원의 중보자의 기도 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불신자를 위하여서 기도한다는 것은 멸망 받을 자를 위하여서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자들이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게 되기를 위하여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안전하게 보호를 받아 멸망의 자식 외에는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신자를 위하여서 기도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는 복음 전도[복음 전파]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 속에서 연계해서 봐야 합니다. 불신자들이 멸망을 당하지 않고 구원받기를 원하는 이것은 복음 전도[복음 전파]를 통해서 나타내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중적인 의미에서입니다. 불신자는 예수 안 믿기로 작정한 자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게 아니고 지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심을 믿지 않고 있는 자를 뜻합니다. 이들에게는 님께서 예정론의 관점에서 말한 대로 "구원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분명히 그렇습니다. 복음 전도라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사람을 구원하는 믿음의 의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사람에게서 그 의가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실을 온 세상에 드러내어서 알게 하는 것이 복음 전도입니다. 이 복음 전도가 어떤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향기로운 냄새입니다. 자신들을 생명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좋고 기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 생명의 향기를 맡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죽기보다 싫습니다. 그것은 그들은 멸망으로 나아갈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냄새에서 죽음과 멸망의 공포에 찬 냄새를 맡습니다. 복음 전도가 그들에게는 지혜로운 말씀으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고 미련한 것으로 들리는 것은 그런 까닭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에서, 부활의 복음에서 생명의 향기를 맡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냄새를 맡습니다. 도무지 하나님의 능력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무런 능력도 없는 것으로 여깁니다(고전 1:18-25; 고후 2:14-16).
복음 전도는 말이죠. 우리가 누구를 믿게 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다만 꽃의 향기가 퍼져나가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그리스도의 향기를 사방에 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맡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 중에서 어떤 사람은 생명을 보는 향기로운 냄새로 맡거나 아니면 어떤 사람은 죽음과 두려움의 공포를 보는 향기를 맡는 것은 우리의 능력에 관한 일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 전도하는 것은 이처럼 생명에 속한 사람과 사망에 속한 사람을 분명히 구분 짓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밖에 있는 자들도 있습니다. 복음 전도는 우리가 구원은 하나님께 있다는 진리를 세상에 전하여 온 세상에 하나님을 선양(宣揚)하는 데 있는 것이지 우리가 누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불신자의 구원을 위해서 복음 전도를 한다는 것은 아직 하나님의 구원의 영광을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 진리를 나타내어 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는 눈을 가져 기쁨을 지니는 자와 그것을 보지 못하여 공포를 느끼는 자를 잣대로 재어서 그것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작정이 모순된 허구적인 것이라는 것을 들추어내는데 이용하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예정론을 내세워서 "하나님께서 이미 구원하시기로 다 정하셨으면 인간이 굳이 복음을 전파하며 전도할 이유가 무엇이 있는가? 때가 되면 다 알아서 교회에 나올 것이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아무리 죽어라고 복음을 전파하여 전도해도 안 믿을텐데...."하는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기에 하는 말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님께서 염려하신 대로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정말 구원의 예정론적인 관점에서 보자만 적절한 기도가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말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가져 교회를 이루는 것을 복음의 전파를 통해서 하게 하셨지 복음의 전파가 없이도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교회를 이룰 수 있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다음의 말씀을 보십시오. 로마서 10장 13-18절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믿음은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위하여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 전하는 말씀을 들음으로써 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듣든지 안 듣든지 복음을 전파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말이죠. 설사 그 누가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듣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복음 전도는 불신자의 생명을 구원하는 데만 초점에 맞추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복음 전도를 통해서 멸망에 이를 자를 드러내시는 것도 복음 전도입니다. 이 사실을 항상 인식하고 있어야 하며 따라서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누가 복음을 듣든지 안 듣든지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복음 전도란 구원의 하나님을 온 세상에 선양하는데 있는 것이지 사람을 어떻게 해서든지, 그래서 무슨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구원하는데 맞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말이죠. 불신자를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는 문제도 해결되었으리라 여겨집니다. 우리는 불신자의 구원을 위하여서 기도하여야 합니다. 바울이 동족 이스라엘을 염려하며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얼마나 열정을 가지고 일하였는지를 님은 잘 아실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이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힘과 그 수고와 노력의 대가요 결과로 구원만을 기대하면서였습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동족인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 충성스럽게 사역을 수행하였습니다만 이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의 옷과 소매자락을 붙잡고 "당신들, 제발 예수 믿어야 돼!. 그래야만 죄에서 구원을 받고 생명을 얻어. 그렇지 않으면 다 지옥에 가게 돼. 그러니 내 말 들어!."하면서 교회에 끌고 나오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단지 하나님이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전파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거부하는 그들에게 그럴 경우 그 구원이 다른 사람[이방인]에게 간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도 불신자를 위하여서 기도하고 또한 복음 전도에서도 열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 불신자가 우리의 가족이든 또는 친지이든 또는 친구이든 또는 이웃이든 또는 직장 동료이든 또는 오며 가며 스치는 중에 인연을 갖게 된 사람이든지 간에 복음 전도의 대상이 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어서 그 생명으로 교회를 이룰 수 있기를 위하여서 기도하여야 하고, 그래서 그 심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에게 위임된 사명인 복음을 전파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더하여 주신다면 그들 한 사람의 생명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그리스도께서 입으신 영광을 그들도 볼 수 있기를 위하여서 또한 기도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기도는 결코 하나님이 가지신 구원의 예정론적인 입장에 위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위임된 복음을 전하며 불신자를 위하여서 기도를 가질 뿐이지만, 전적 부패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도무지 볼 수 없는 눈과 들을 수 없는 귀와 깨달음에 이를 수 없는 강퍅한 마음을 지닌 인간에게 볼 수 있는 눈을 소유하게 하시고 들을 수 있는 귀를 갖게 하셨으며 깨닫는 마음을 지니게 하셔서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 위대한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서 얼마나 철저하고 빈틈없이 그렇게 차질 없이 당신이 갖고 계신 구원의 예정을 이 역사 속에서 그들에게 실천적으로 실행하여 가고 계시는지를 보기 때문입니다. 이는 반대로 멸망에 이르는 자들을 보는 것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님이여!.
이상으로 말을 맺겠습니다. 지금까지 언급한 기도의 본질적인 성격을 잘 이해하시고 하나님이 가지신 영원한 작정 속에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관점에서 그리고 이것과 연결되어 있는 교회적인 삶의 관점에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문제를 찬찬히 살펴보시며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님께서 알고자 하는 기도가 하나님의 구원의 예정론에 맞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위대한 진리의 교리 위에서 행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것이라는 확신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님의 질문에 충분한 설명이 되어서 이해가 되었는지요!
님에게 흡족함을 드릴 수 있을 만큼 답글을 올려드렸으면 좋겠는데, 무엇을 설명하고 표현하는 것을 글로 한다는 것이 참 어렵다는 것을 느낍니다. 더욱이 대면하여서 서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정확히 전달하는 대화를 할 수 없는 가운데서 이렇게 글로서만 할 경우는 더더욱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러기에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이 혹 님이 알고자 하는 내용을 정확히 따르지 못함으로써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것은 아닌지 하는 염려를 갖습니다. 그럴 경우 주저하지 마시고 설명이 부족하거나 그래서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거나 오히려 의문이 남거나 하는 부분을 다시 질문해 주십시오.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최선을 다해서 성실하게 답변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님의 평안을 빕니다.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