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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과답

Re:'자유의지'에 대한 답글입니다.

작성자이천우|작성시간06.10.21|조회수780 목록 댓글 3
안녕하세요 신승환님

님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하여 질문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는 구원론과 관련해서 가진 의문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견인해 간다는 것을 믿지만 이를 인간의 자유의지와 관련해서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지를 알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님이 질문한 내용이 무엇인지를 먼저 본 후에 그에 대한 답변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8 [개역]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이 말씀이 여러분과 나에게 영원한 소망이 되길 기도합니다. 우리의 보전은 안전한 보전뿐만 아니라 거룩한 보전입니다....."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아멘. 성경은 분명히 구원받은 자를 끝까지 견고히 지키신다고 약속합니다. 성도의 견인은 충분히 성경적으로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견인을 묵상하며 한가지 의문점이 떠올랐습니다. 자유의지의 회복영역은 어디까지인가? 감리교는 선행적 은혜를 인정하며(내용상은 약간 다르지만)...아담때의 자유의지의 회복으로 보는것 같습니다. 이때도 마귀의 유혹으로 넘어갔죠. 이런 이유로 구원받은 자도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아담 때에 가지고 있던 자유의지와 상태....언약적으로는 행위언약이라고 하면 할말이 없지만...자유의지를 중심으로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언약적으로 우리는 은혜언약안에서 구원의 절대성을 변증할수있지만 저는 견인교리는 인정하며 다만 새로운 피조물로써 우리안에 형성된 자유의지의 형태...어떤 영향아래의 다스림...변화와 영역을 알고 싶습니다. 아담이 가지고 있는 자유의지와...새로운 피조물로써 회복된 자유의지의 차이가 무엇인가? 이것이 질문의 핵심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에 대한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이란 구원론에서 마지막 부분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용어는 성도의 구원이 갖는 하나님의 영원한 보장(eternal security)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이는 벌콥의 글에서도 확인이 됩니다. "성도의 견인의 요지는 하나님이 중생시키시고 은혜의 상태에로 유효적으로 부르신 자들은 그 상태로부터 전적으로 또한 궁극적으로 떨어질 수 없으며, 다만 분명히 그 상태에서 끝까지 견인하여 영원히 구원받을 것이라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이 교리가 선택받은 자들이 마침내 확실히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또한 특별히 가르치기를 한번 중생되고 하나님에 의해 은혜의 상태에로 유효적으로 부름 받은 자들은 비록 어떤 때에 악에게 굴복되어 죄에 빠질 수 있을지라도 은혜의 상태에서 완전히 떨어져 영원한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가르친다"면서, "엄격히 말하면 견인하는 자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견인을 정의한다면, '신자 안에 있는 성령의 지속적인 사역으로서 이 사역에 의해 마음 속에서 시작되는 신적 은혜의 역사가 계속되고 완성에 이르게 된다' "는 견해를 가지고서, 하나님은 그의 역사를 결코 버리시지 않으시기 때문에 성도들은 끝까지 계속적으로 견고케 된다고 보았습니다. 이때 벌콥은 성도의 견인이 성도들이 구원의 길에서 계속적으로 인내하는 활동을 필연적으로 보여주는 까닭에 사실상 이 인내는 성도들이 협력하는 일로 간주된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견인을 성도의 성향이나 활동으로 보지 않고 견인하는 자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성도의 견인 교리에 대한 성경의 증거는 이곳에서 새삼 언급하지 않겠습니다만, 성경은 곳곳에서 성도의 견인에 대한 가르침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더욱이 성도의 견인은 칼빈주의의 다섯 가지 요점(the five points of Calvinism)으로서 칼빈의 5대 교리로 다루어지고 있는 (1)전적타락(Total Depravity) (2)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3)제한적 속죄(Limited Atonement) (4)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5)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의 하나로 필연적으로 다른 것들과 밀접히 연관된 가운데서 함께 다루어집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견인은 이것 하나만 뚝 떼어서 독자적으로 그 의미를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 앞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전적 타락, 무조건적 선택, 제한적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속에서 그 의미를 이해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의 견인은 하나님의 언약과의 관계성에서도 필연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성도의 구원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서 출발한 것으로 사실상 창세 전에 이미 확정된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관계로 성도의 견인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성도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일하심이 참으로 신실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말입니다. 성도의 견인에서 다루어지는 성도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의 상태에서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말하며 그 신앙에 서 있는 것은 오직 개혁주의 교회(개혁파교회)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한국 개신교는 이 명칭에서 말해주는 바와 같이 자신들이 개혁신교로서 개혁교회를 내세움에도 불구하고 성도의 견인 교리와는 전혀 다른, 은혜에서 떨어질 수 있다(falling from grace)는 견해를 따르고 있는 교파가 대부분입니다. 이 견해는 구원받은 사람도 종국에 가서는 구원으로부터 떨어질 수 있다는 가르침인데, 로마 카톨릭파, 소씨니안파가 이 견해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신교에서는 알미니안파로 있는 감리교, 성결교와 심지어는 루터파 교회까지도 성도가 은혜의 상태에서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성도의 견인에서 보게 되는 인내를 믿지 않습니다.

그 주요한 이유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이해에서 찾게 됩니다. 본래 성도의 견인이 말해 진 것은 어거스틴(Augustine; 354-430)에 의해서입니다. 그는 예정론자로서 성도의 견인을 말하였는데, 선택받은 자는 궁극적으로 잃어버린바 될 만큼 타락될 수는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인간의 의지의 활동을 중시한 가운데서 갖는 견해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동시적으로 같이 다루는 것이 역력합니다. 그는 '은총과 자유의지'에서 말하기를,“하나님께서는 그의 성경을 통하여 인간에게 자유로운 선택의 의지가 있음을 계시해 주신다”라고 하였으며, 또한“하나님께서 나에게 돌아오라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로 향하리라 라고 말씀하실 때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의지는 우리의 의지이며 하나님 당신의 약속은 하나님의 은총에 속한다는 것을 나타낸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은 자유의지를 아담의 죄와 관련해서는 아담이 범죄한 죄를 그의 의지에서 행한 부패로 보았습니다. 아담이 죄를 범하기 전에는 도덕적으로 완전하였는데 그가 자기 의지로 죄를 범하였고, 그로 말미암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간의 성품은 부패한 것이 되어서 자손에게 죄가 유전한다는 '죄의 유전설'을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담에게서 나오는 모든 자손은 아담과 함께 죄인이 됩니다. 그런 까닭에 아담이 죄를 지은 것은 대표적인 행위로서 인류는 함께 그 책임을 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 유전에 의하여 인간의 의지는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존재하며 활동하는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비록 이 의지는 죄 때문에 속박을 당하게 되었기 때문에 자기 의지로 구원을 받을 수가 없지만, 구주의 은혜로 말미암아서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구주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서는 그의 의지는 그를 정복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노예(slave)로 있기 때문에 그분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하나님의 생명의 구원에 이르는 것은 의지의 활동이 작용한 때문이라고 보는 것인데, 이는 그 의지의 활동을 성령의 지배에 의한 결과로 본 데 따른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본 것은 하나님의 생명의 구원에 이르는 인간 의지의 활동을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서 기능하는 것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의 인죄론으로 다루어지는 아담의 범죄는 그의 의지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아담의 범죄에서 보게 되는 죄 또한 아담의 의지에서 행한 결과에 따른 부패로서 다루어져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흠 없는 거룩한 자로 만드실 일을 위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방편으로서 입니다. 이는 오늘날 하나님의 언약 신학의 관점에서 충분히 말해지고 있는 것이기에 결코 생뚱맞는 소리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펠라기우에서 알미니우스(1560-1609)와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서 인간의 의지는 자신들의 구원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믿음에 있는 선을 자기 의지로 할 수 있다고 보며, 또한 성령께서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나아오게 역사 하실 때 이를 자기 의지로 거부할 수도 있다는 것으로 있습니다. 인간의 의지를 이렇게 보는 것은 예지예정론(豫知豫定論)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구원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에 의해서 인간의 의지를 이해할 경우 구원받을 자들을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그들을 선택하시기로 예정하셨다는 주장을 갖게 되기 때문에 복음에 반응해 믿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예정에 선행된다고 보는 견해를 갖게 됩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선행적 은혜 교리'를 말하게 됩니다. 목원대학교의 이선희 교수는 'John Wesley의 선행은혜(Preventing Grace) 개념에 대한 소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1) 구원은 보통 (그리고 매우 올바르게) ‘先行하는 은혜’라고 지칭되는 그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선행하는 은혜는 (1.1)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자 하는 최초의 소원, (1.2)하나님의 뜻에 관하여 비추는 빛의 최초의 여명, (1.3)하나님께 거역하여 죄를 범했다는 사실에 대하여 최초로 대수롭지 않게 일시적으로 뉘우치는 것을 포함한다. 이들은 모두 생명을 향한 어느 정도의 경향성, 어느 정도의 구원,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들에 대하여 완전히 감지하지 못하는 눈멀고 무감각한 마음으로부터 건짐을 받기 시작하는 시작단계를 암시한다. (2) (그런 다음에) 구원은 성경에서 보통 ‘회개’라고 칭하는 ‘죄를 깨닫고 뉘우치게 하는 은혜’에 의하여 계속 진행된다. 이 은혜는 보다 큰 정도의 자기인식, 돌 같은 마음으로부터 한 걸음 더 건짐 받음을 초래한다. (3) 그런 후에 우리는 기독교의 진정한 구원을 체험한다. 이 구원에서 우리는 ‘은혜를 통하여’ ‘믿음에 의하여 구원을 받는다’. 이 구원은 ‘칭의’와 ‘성화’라는 저 두 개의 큰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칭의에 의하여 우리는 죄의 책임으로부터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의 총애에로 회복된다. 성화에 의하여 우리는 죄의 세력과 죄의 뿌리로부터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의 형상에로 회복된다.”라고 말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은혜에 이르는 것에만 아니라 칭의와 성화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의지의 작용이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제, 님이 알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 곧 자유의지에 관하여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님은 고린도전서 1장 8절의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를 들고, "이 말씀이 여러분과 나에게 영원한 소망이 되길 기도합니다. 우리의 보전은 안전한 보전뿐만 아니라 거룩한 보전입니다....."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하면서 "성경은 분명히 구원받은 자를 끝까지 견고히 지키신다고 약속합니다. 성도의 견인은 충분히 성경적으로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을 보아서 성도의 견인 교리에 잘 서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한가지 의문점을 가졌습니다. 그것은 "자유의지의 회복영역은 어디까지인가?"하는 것이요, "감리교는 선행적 은혜를 인정하며(내용상은 약간 다르지만)...아담 때의 자유의지의 회복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이때도 마귀의 유혹으로 넘어갔죠. 이런 이유로 구원받은 자도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아담 때에 가지고 있던 자유의지와 상태....언약적으로는 행위언약이라고 하면 할말이 없지만...자유의지를 중심으로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언약적으로 우리는 은혜언약 안에서 구원의 절대성을 변증할 수 있지만 저는 견인교리는 인정하며 다만 새로운 피조물로써 우리 안에 형성된 자유의지의 형태...어떤 영향아래의 다스림...변화와 영역을 알고 싶습니다." 하면서 "아담이 가지고 있는 자유의지와...새로운 피조물로써 회복된 자유의지의 차이가 무엇인가? 이것이 질문의 핵심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질문의 요지는, 마지막에서 묻고 있는 하나님께 범죄한 아담의 자유의지와 함께 오늘날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회복된 우리의 자유의지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지를 알고자 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먼저, 아담의 자유의지를 설명 드리겠습니다. 아담을 말하게 되면 그의 범죄와 타락, 그리고 그에 따른 인류의 죄인 됨을 떠올리게 됩니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은 전적 타락하여 부패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류의 인성(人性)에 대해서 있어서 칼빈주의는 인간은 완전히 타락하여 의지의 자유도 없고 또 선을 행할 힘도 없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하지만 알미니안파는 인간의 죄는 하나의 경향(傾向) 또는 편견으로서 의지의 자유를 인정합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선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견해를 갖습니다. 선행적 은혜를 말하며 이것에 반응할 수 있는 인간의 의지를 말하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담의 자유의지를 말함에 있어서는 필연적으로 먼저 하나님의 예정과의 관계에 대한 이해부터 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과거에 예정에 대한 곡해로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을 예정해 놓으셨다면, 그래서 예정하신 대로 인간의 구원을 해 가신다면, 그렇다면 인간은 기계적인 인간이요 로봇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는 반문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예정을 인간의 언행심사, 수족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다 미리 정해 놓은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 하리라"(마10:29)는 말씀이 인용됩니다. 그러나 이는 예정에 대한 그릇된 이해입니다. 예정(豫定) 교리는 온 우주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서 인간의 구원과 관련한 협의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구원의 예정이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 대한 구원을 미리 정하셨다는 확증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이 안에서 인간의 의지는 참으로 자유롭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일에 있어서의 선택과 행동에 인간의 의지는 결코 침해당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그 예정을 이루어 가는 것으로 섭리가 됩니다. 가령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중앙에 두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지 말라고 한 하나님의 언약 속에서 아담의 의지는 그의 생각과 판단을 좇아 행동됩니다. 그런 그의 의지는 결코 침해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그의 의지는 하나님의 예정을 이루어 가는 것으로서 발휘가 되고, 그래서 행동됩니다. 아담은 사단의 시험에서 자기 의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따먹었습니다만, 이런 그의 의지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룰 일을 정하시고 택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흠이 없는 거룩한 자로 만듦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예정에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아담은 무죄의 상태에 있었습니다만 그는 죽음으로써 그 첫사람이 되어 그에게서 나는 모든 자손들을 죽음에 처하게 하여야 할 자로서, 죄를 짓고 죽을 수 있는 가능성이 항시 있는 상태 속에서 그의 의지가 마음껏 발휘가 됩니다. 그래서 그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통해서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이 금지한 명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의지로 죄를 짓고 타락합니다.

아담 이후에 그에게서 나오는 모든 자손은 자기 의지로 삽니다. 그러나 이들의 의지란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악을 행하는 것으로 죄성에서 나오는 부패를 나타내 보여서 인간이 죄인인 사실을 스스로 말해 줄뿐입니다. 인간은 자기 의지로 항상 자기 죄를 채울 뿐이며 마침내 하나님의 진노는 그의 머리에 쏟아질 것입니다(살전2:16). 육에서 나는 것은 육으로써(요3:6) 여기에서 나오는 인간의 의지는 모두다 육이 지닌 부패한 악한 죄의 본성일 따름입니다. 이렇게 부패한 인간의 의지의 발휘란 죄값인 사망을 심판으로 받습니다. 하나님은 저들을 항상 악할 뿐인 상태에 내버려두십니다. 그런 그들의 의지에서 행해지는 것에서는 아무런 선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생활은 곧 그들이 품고 있는 악을 나타내는 것이었으며, 그들은 악한 생각에 의한 욕망이 이끌어 가는 대로 악한 일만 행할 뿐입니다. 그들은 말입니다. 날 때부터 육신이 원하는 대로 행하여 악한 데로만 달려나갔습니다. 인간이 이런 존재이기에 하나님의 진노를 면치 못합니다. 그래서 '진노의 자녀'로 표현이 됩니다(엡2:3).

여자에게서 나오는 아담의 모든 자손이 발휘하는 의지의 자유란 것이 이런 것인데, 구약에서 하나님은 그 여자의 자손에게서 사단과 그 세력을 미워하며 원수지간으로 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세상에 두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의 의지의 자유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의지의 자유란 육의 악한 죄의 본성만 나타낼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하나님을 경외케 하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는 말입니다. 그들의 의지를 그렇게 하나님에 대해서 반응을 보이는 선한 것이 되게 하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인간 역사에 보는 바와 같이 인간은 항상 자기들의 마음에 좋은 대로 생각하고 또한 움직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은 선지자적인 일을 하게 하는 자들을 믿음의 은혜에 있게 하셨으며, 또한 선지자가 전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믿음의 은혜에 있게 하신 자들을 두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참으로 복이 있다는 것을 세상에 드러내 알게 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님은 아담의 자유의지에서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회복된 우리의 자유의지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지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의 구속 역사를 이루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흠 없는 거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말이죠. 우리가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믿음에 있게 된 것은 과연 우리의 의지에 따른 것인가? 하는 문제부터 해결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앞서 타락한 인간의 의지란 부패뿐인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인간의 의지는 자유롭게 발휘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가 그들의 타락한 죄의 악한 본성에서 자유롭게 발휘되도록 내버려두시는 데 따라서 인간은 자기들 마음에 좋은 대로, 그래서 자기들이 하고 싶은 대로 맘껏 하는 상태에 있습니다(cosmos님이 질문한 "인간의 죄 행위도 하나님의 허용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이런 의미에서 이며, 이는 궁극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자유의지도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응을 나타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허물과 죄로 이미 죽은 자의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엡2:1). 그럼에도 인간에게서 전적 타락(전적 부패)이 아닌, 자유의지 혹은 인간의 능력(free will or human ability)을 말하여 인간이 비록 범죄하여 타락함으로써 부패의 영향을 받았지만 영적 선을 택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무능해진 것은 아니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생명에 이르게 하시는 믿음을 자력(自力)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죄로 완전히 죽은 자가 된 것으로 보지를 않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에게서는 당연히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에 대해 살아 있는 것이 되어 자신들의 의지로 하나님에 대해서 반응을 나타내 보일 수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을 전적 타락의 견해로 갖는 사람은 그의 완전 부패성으로 전혀 자력으로서는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한다는 견해를 갖습니다. 사실 죄로 죽은 자에게서 생명의 반응을 보일 수 있는 무슨 여력이 있겠는지요. 그러므로 에베소서 2장 8-9절에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임을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말입니다. 인간의 의지란 하나님에 대해 반응하는데 있어서 결코 아무런 작용도 영향도 없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오는 것이며, 그래서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불러일으키심에 의하여 하나님에 대한 반응을 갖는 것을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로 신앙고백 하는 것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되어지는 것이며, 또한 예수님을 신앙고백 하는 것은 혈과 육에 의해서 되어지는 사람의 뜻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세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입니다(마16:17, 요1:12-13, 6:40).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13:48)의 말씀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작정하심의 성취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신앙고백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있는 의지의 자유 선택에 의해서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에게 성령을 주셔서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받아들이는 믿음에 있게 하심으로써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서 의지란 어떤 것일까요? 이 의지를 자유의지로 말합니다만, 이는 그리스도인이 자기 의지를 자유롭게 사용한다는 뜻에서 쓰는 말일 것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가 다음의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인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의 복음을 믿는 믿음에 있게 하신 사실로 인해서입니다. 그리고 구속의 복음이란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이름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베푸신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인에게 일생동안 입혀집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우리를 보면 육신 안에 올바른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우리는 올바르게 살지를 못합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하고 싶은데 도무지 되지를 않고 악한 일을 하지 않으려고 애써도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선을 하고자 원하는데 도리어 악을 행합니다. 그렇다면 너무나도 분명하잖습니까?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죄가 우리를 사로잡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말이죠. 우리가 마음 속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고자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 마음 속에서는 육의 본능이 작용하여서 여전히 우리 몸을 죄의 종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에 따라서 우리는 마음으로는 언제나 하나님을 섬기는 종이 되기를 원하고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살기를 원하면서도 실제로는 여전히 죄의 종이 되어 있는 자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말이죠. 우리가 아직 육의 구속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아직 우리 육이 부활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의 부활을 입을 때까지는 육인 우리 몸은 죄의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즉,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의 종이란 상태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은 우리의 믿음의 주이신 그리스도께서 다시는 정죄 받는 일이 없도록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능력이 죄와 죽음에서 나오는 독에 쏘여 사는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비록 우리 육신은 죄 때문에 죽지만,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혼을 용서해 주셨으므로 우리 영혼은 살 것이며, 또한 우리 안에 계신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죽은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이 입은 부활의 영광을 함께 누리고 있습니다. 이것을 알게 해 주시는 말씀이 로마서 7-8장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의지에 대하여 알게 되는 것이 무엇인가요? 우리에게서 무슨 선하고 의로운 의지가 나오겠는지요. 그리스도인이면 선한 의지가 나오는 것으로 생각이 되십니까?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자기 의지로 선하게 살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까? 그렇게 살 수 있는 의지를 자기의 마음대로 자유롭게 발휘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가요? 그렇다면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선을 행하였다면 그것은 그렇게 하고자 하는 선택을 우리가 마음먹어서, 그렇게 마음의 결정을 우리의 의지로 자유롭게 선택해 나가서 되어진 것이 결코 아닙니다. 바울은 아주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라고 말입니다(롬9:14-16).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의 긍휼(자비, 사랑)은 누가 그것을 얻으려고 결심을 했다거나 노력을 하였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풀고자 하는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비를 베푸십니다.

그렇습니다. 만일에 말이죠. 자신에게서, 그리고 어떤 믿음의 형제에게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베풀어지는 것을 보거든, 그것이 그리스도에게서부터 사랑이 공급되어진 데 따라서 행하여지고 있는 것임을 알고 그 일을 행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야 합니다. 사랑을 베풀어 선을 행하는 그 행함은 내가 한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입니다.

이상으로 답글을 마치겠습니다. 이 글이 님이 알고자 하시며 궁금해하시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습니다.

주 안에서 평안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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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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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cosmos | 작성시간 06.10.22 ▶ "인간의 죄 행위도 하나님의 허용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 이것에 대한 설명까지 첨부해 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만, 목사님께서 바쁘시면 나중에 천천히 따로 답 주셔도 황공무지로소입니다.
  • 작성자이천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6.10.22 안녕하세요 cosmos님, 답글의 전개에서 자연스럽게 다루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마음에 님이 알고자 하는 것도 함께 가지고 있겠습니다.
  • 작성자신승환 | 작성시간 06.10.25 좋은 대답 기대하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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