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eden님
날씨가 점차 겨울로 들어선 티가 나는데, 잘 지내시는지요. 일기예보를 보니 강원도 지역에 대설주의보가 떨어졌다고 합니다. 님이 계신 곳은 우리나라 지역에서 유난히 춥고 눈이 많이 오는 지역인데, 건강에 유의하셔서 주님께서 주신 몸을 주의 일을 위해 쓰는 의로운 도구가 되시기 바랍니다.
님의 질문을 받은 지가 벌써 오래되었는데 이제야 답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많이 기다리셨을 텐데 미안한 마음을 갖습니다.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님은 디모데전서 5장을 읽으시면서(님이 "에베소서 5장을 읽다가"라고 하신 것은 읽으신 바울의 서신을 순간적으로 가장 많이 읽으며 다른 서신서에 비해서 기억에 깊이 각인이 되어 있을 듯 싶은 에베소서로 착각했거나 오기 했지 않나 싶습니다.) 17절 이하의 내용에서 현재의 교회실정과 다른 부분을 발견하고는 다음의 두 가지를 알고자 하셨습니다.
1) 목사와 장로의 관계, 그리고 장로의 사역(또는 직무) 특히 "다스린다" 에 관하여
2) 안수에 관한 것
먼저 첫 번째인 "목사와 장로의 관계, 그리고 장로의 사역(또는 직무), 특히 '다스린다'에 관하여"에 대하여 보겠습니다. 디모데전서 5장 17절입니다.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디모데전서는 바울이 1년 반 동안 고린도에 있을 그의 믿음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는 디모데에게 써보낸 것으로서 목회서신의 하나입니다. 이 서신을 받을 당시 디모데는 에베소교회에서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서신에서 에베소교회에 사역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권면합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17절) 여기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장로들을 존경하라"고 권면합니다만, 장로의 직임에 있으면 그들은 모두가 존경받을 자라는 차원에서 하고 있는 권면은 아닙니다. 장로들들을 존경해야 할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이라고 하였으며, 둘째는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욱 존경하라고 하였습니다.그러니까 말입니다. 장로가 존경을 받는 이유는, 장로라는 직임에 있음으로 해서가 아니고 장로의 직임을 통하여 교회에 봉사하여 섬기는 사역 때문입니다.
이때 '잘 다스리는 장로들'과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이 어떤 자들인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님은 이를 '다스리는 장로'와 '말씀과 가르침을 주는 장로'로 구분하여 이해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러니까 치리장로와 교훈장로, 곧 치리 사역을 하는 장로와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역을 하는 장로로 말입니다. 그래서 장로와 목사의 관계에서 구분되어 이해하고 있는 듯 하며, 그래서 님은 "본 구절이 목회자와 장로의 관계에 관하여 아주 구체적인 설명으로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장로는 목사를 돕기만 하는 자가 아닌 '함께 동역하는 자' 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비단 님의 경우에서만이 아니라, 우리네 교회에서 대부분 이렇게 해석하여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이죠. 교회에서 장로들을 존경해야 하지만, 특별히 말씀을 전하는 목사를 더욱 존경해야 한다는 식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그 구절은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러니까 치리장로와 교훈장로를 구분하여서 그 관계성을 말해주면서 말씀과 가르침을 주는 장로를 더욱 존경할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실은 말이죠. 먼저 언급하신 '잘 다스리는 장로들'이란 장로의 직무를 훌륭하게 수행하는 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앞 절인 5장 1-16절과의 관계에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연로한 어른들을 친부모를 대하듯이 존경하는 태도를 가질 것과 나이 어린 사람은 친동생처럼 대할 것을 이야기하면서, 교회는 아무도 돌보아줄 사람이 없는 과부가 있거든 사랑으로 돌보아 줄 것을 말합니다. 이때 어떤 사람이 존경받을 자로서 교회의 돌봄의 대상이어야 하는지를 교회의 규칙으로 갖게 하여 실행하도록 합니다. 또한 교회에 봉사하는 부인들의 모임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면서 여기에 필요한 주의점도 줍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다시 한번 믿는 자에게 과부가 있는 사람은 그를 도와 주어 교회에 짐을 지우지 않게 하여서 교회가 진정 아무도 의지할 데 없이 외로이 사는 과부들을 도와줄 수 있게 해야 할 것을 권면합니다.
바울은 이 권면을 하면서 장로들을 언급합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따라서 17절에서의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치리장로만을 따로이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장로의 직임을 맡아서 그 직무를 잘 수행하여 감당하는 모든 장로들을 다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교회를 잘 다스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또한 교회를 잘 다스리는 것으로써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이 있었던 것이며, 이들을 언급하여서 설교와 가르치는 사역에 수고하는 장로들은 알아줄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렇게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존경할 것을, 그리고 또한 말씀과 가르침의 수고를 하는 장로들을 더욱 존경할 것을 권면한 것은 장로들이 존경을 받아야 하는데 어떤 종류의 장로들이 존경받고 보수(생활비 지원)를 받아야 할 것이냐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에서의 '배나 존경할 것으로 알되'는 충분히 보수하여 생활을 지원하고 존귀히 여길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이분들은 말씀과 가르치는 일의 수고를 위하여서 자기 생업을 포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분들을 알아주고, 그래서 마땅히 존경하는 마음 속에서 섬겨야 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만일에 말입니다.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수고를 하는 장로의 직무(목사)를 수행하는 자가 교회로부터 생활비의 지원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재산과 넉넉한 경제적 여건을 갖추고 있다면, 또는 생업을 놓지 않고 종사하고 있어서 생활에 아무런 곤란을 겪지 않고 있다면, 그는 교회로부터 생활비의 지원을 받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장로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그들이 말씀과 가르침의 수고를 하는 장로의 직무를 수행한데 따른 보수(대우)를 해주라는 권면을 결코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들'은, 이 사역을 위하여 생업에 종사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교회가 이들의 기업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구약 백성들이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인들의 기업이 되었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는 갑절의 두 배로 존경하는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것에서가 아니라, 그분들이 말씀과 가르침으로 사역하고 있는 교회 봉사의 직무로 인해서 교회는 그들에게 충분한 생활비의 지원을 하고 높은 존경으로 대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18절에서 신명기 25장 4절과 예수님이 말씀하신 마태복음 10장 10절을 인용하였습니다.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의 요지는, 오직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일을 함으로써 이것으로써 교회의 성도들이 받을 하늘의 기업을 위하여 일하고 있는 장로들에게, 교회의 성도들은 마땅히 그들이 소유하고 있지 못한 땅의 기업이 되어서 공정히 평정(評定)하여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함께 평균을 이루어 '남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하나님의 은혜의 공급 속에서 함께 돌봄의 살핌을 받고 있습니다. 이는 '말씀과 가르침의 수고를 하는 장로들'과 교회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 있는 '한 백성'이요, 하나님의 '한 자녀' 라는 특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7절은 님이 알고 있듯이 "장로를 일컬어 '다스린다' 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말씀과 가르치는 일' 이라는 장로의 사역에 관하여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개혁교회에서는 이미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목회자와 장로의 관계에 관하여 아주 구체적인 설명으로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장로는 목사를 돕기만 하는 자가 아닌 '함께 동역 하는 자' 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의 개념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치리장로와 목사와의 관계를 말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만일에 그렇게 알게 되면 말이죠. 님이 우려하기를 "이 부분은 제도권교회에서는 매우 도전적인 불순한 이론으로 받아들여지는 부분입니다. 특히 감리교의 교리와 장정에서는 결코 용납이 안 되고 있는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목사와 장로를 수직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로 나아갈 가능성이 농후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아야 할 것이지만", 그러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목사들을 더욱더 존경해야 할 것이다." 라고 말하여서, (치리사역)장로보다 (말씀사역)목사에 더 큰 비중과 가치를 두고서 장로보다 목사를 더욱더 알아주어야 한다고 말하여서 목사를 높이 잘 대우하여 줄 것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목사와 장로의 관계는 이런 수직적이고 계급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목사란 직분도 장로란 직분도 또한 집사란 직분도 사실은 교회의 일을 봉사하여 섬기는 직무를 수행하는 것에서 불려지고 있는 직분적 사역의 호칭일 뿐이며, 이들 모두는 다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된 믿음의 형제요 자매로서 '성도'입니다.
목사와 장로의 관계는 각각 주님으로부터 받아 맡고 있는 일에 의해서 서로 협력적 관계입니다. 목사는 '말씀과 가르침'을 맡은 직분자입니다. 목사는 오직 이 사역을 위해서만 그리스도의 주신 은사에 따라서 세움을 입었습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에서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사를 온전히 사용하여야 하며, 그것은 '복음의 순전한 전파'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하나님의 본의의 이해 속에서 올바르게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으로서의 설교를 하여야 하고 또한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장로는 목사와 함께 교회의 감독을 맡은 직분자입니다. 여기서 장로가 맡고 있는 교회의 감독이란 것은 '말씀의 감독자(감시자)' 역할을 하는 것에서입니다. 장로는 목사의 설교가 복음에 순전함으로 전파되도록 설교에 책임있게 참여함으로써 말씀을 살피는 일을 하여야 하며, 또한 목사의 설교를 들은 성도가 설교를 통하여 주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는지를 살펴서 그렇지 못하면 말씀으로 권면하여 믿음에 올바르게 서나가도록 권면하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목사는 목사의 사역을 하고, 장로는 장로의 사역을 함으로써 다같이 '교회를 다스리는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말이죠. 직분이 목사로 또한 장로로 각각 그 봉사하는 일의 성격과 역할이 다름으로 인해서 서로 독립적입니다만,'사역상 동등'(parity ministry)한 자로 있습니다. 이 동등의 원리로 인해서, 목사와 장로는 교회의 봉사를 위하여 서로 형제되는 처지에서 봉사해야 한다는 것이 개혁교회가 가져온 교회 직분에 대한 이해입니다. 이러한 교회 직분의 관계를 만일 수직적이고도 계급적인 종속적 관계로 가져나간다면, 이는 주님께서 교회에 세우신 직분에 갖는 질서의 원리를 깨뜨리는 것으로서 해악이 될 것입니다.무엇보다도 말이죠. 목사와 장로는 각각 자신들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속한 한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 아무런 권위도 없다는 것을 알고, 의의 종된 자세로 함께 협력하여 온유하게 그리스도와 그의 몸된 교회를 봉사하여 섬겨나가야 합니다.
이상으로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을 마치겠습니다.
이제 두 번째 질문에 대하여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질문의 내용을 보겠습니다. "그리고 22절에 이르러서는 다른 이야기가 나오는데 아무에게나 함부로 안수하지 말라고 이르고 있습니다. 여기서 “아무에게나”라는 말은 불신자를 뜻하는지, 아니면 성도를 뜻하는지 궁금합니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안수를 남발하는 것 같아서 한번 여쭈어 봅니다." 하면서 질문의 요지가 '안수에 관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구절을 보겠습니다.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 여기서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라고 말하여서 '안수'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장로를 선택하여 세우는 일과 관련하여서 하신 권면입니다. 장로를 선택하여 세울 때 서둘러서 함으로써 경솔히 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를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의 임직을 위한 안수를 가볍게 하지 말라는 의도에서 '경솔히 안수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수에 대해서'는 전에 한 분이 질문해 주셨기에 답변해 드린 적이 있으며, 그 답글이 73번에 올려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답글을 가지고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안수란 말은 한문으로는 '安手'입니다. 그러니까 그 뜻만 보면 "머리나 기타 신체 부위에 손을 얹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안수하는 광경은 여러 곳에서 기록되고 있는데, 구약에서는 특별히 모세 율법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때 사용이 되었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제사의 종류에 의해서 정해진 데 따라서 희생제물을 드립니다. 이때 속죄 제사에서는 희생되어진 제물 위에 손을 얹는 행위를 하는데, 이것이 안수입니다. 여기서 안수는 희생제물에 손을 얹는 것에서 대표적인 개념을 갖는데, 희생의 제물을 바치는 사람은 제물이 되는 짐승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자신의 죄를 옮긴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인 죄를 전가시키는 표시였습니다.
구약에서 또한 안수는 하나님의 일을 맡아서 할 자에 대한 구별의 의미도 지니고 있습니다. 가령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안수를 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안수를 함으로써 자신에게 임하였던 하나님의 능력이 여호수아에게 계승되어 계속되어질 것을 나타냈습니다(민27:18, 신34:9). 그런가하면, 레위인들은 백성들에 의하여 안수 받는 것을 통하여서 그들을 대신하여 성전 봉사의 책임을 감당할 자들로 세워졌습니다. 이런 그들은 속죄 제물에 안수함으로써 그들 자신이 속죄되었으며, 그들 자신의 속죄로 말미암아 그들과 함께 하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또한 여호와께 받아들여져 거룩해졌다는 것을 나타냈습니다.
안수의 행위는 신약에서도 나타납니다. 안수를 행하신 분은 예수님이신 데, 그분의 안수 행위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 전파와 함께 나타낸 메시야 능력을 나타내시는 사역으로 행하신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것에서 있었습니다(막6:5). 예수님은 이 안수에서 안수 기도가 지닌 신기하고도 신비스러운 능력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 아니라, 지금 자신이 한 이적이 하나님이 보내주신 메시야에 의해서 행해지는 능력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해 주고자해서 였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님이 행한 안수의 행위는 반드시 "머리 위에 손을 얹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자기 딸이 병들어 죽게 되자 예수님을 찾아와 예수님께 자기 딸을 위하여 안수해 줄 것을 간청한 적이 있습니다.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막5:23). 이에 예수님은 그의 집으로 향하여 갔습니다. 그런데 가는 중에 열 두 해를 혈루병으로 앓으며 고생하는 여인을 만났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께 가까이 다가가 옷에 손을 대어 만졌습니다. 여인이 이러한 행동을 한 것은 "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는 믿음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여인은 혈루병에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그녀의 믿음이 그녀를 구원하였으므로 평안히 갈 것과 함께 그녀가 병에서 고침 받아 완전히 해방되었다는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일이 있고서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그의 딸이 죽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 딸에게 예수님은 그의 머리에 손을 얹은 것이 아닌 손을 잡고 "달리다굼" 하였으며, 죽은 딸이 곧 일어나서 걸어다녔습니다(막 5:24-42). 이러한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이 병 고치는 능력을 행함에서는 안수 행위가 단지 머리에만 한정되지는 않았으며, 또한 예수님이 직접 손을 얹거나 손을 대는 것으로만 행해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안수는 축복하시는 기도로도 행해졌습니다. 예수님을 좇아 따르는 무리들이 자기들의 어린 자녀를 데리고 나와서는 안수해 줄 것을 구한 적이 있었는데(마19:13-15), 여기서의 안수를 구한 것은 "손을 얹어 기도해 달라"고 청한 것을 이름입니다. 여기서의 안수의 핵심은 기도였습니다.
신약에서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성령 강림으로 인해 유대인에게만 아니라 온 세상의 이방인들에게도 생명이 주어지는 일과 관련하여서 안수가 행해졌습니다. 이때 사도행전 6장 6절과 디모데전서 4장 14절, 5장 22절, 디모데후서 1장 6절에서는 집사와 장로 직분의 임명과 관련하여서, 사도행전 8장 17절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자들에게 그들에게도 성령이 임하셨다는 것을 확증하는 표의 의식으로, 사도행전 9장17절에서는 아나니아가 사울[바울]을 찾아가 다메섹에서 사울에 나타났던 주께서 자신을 그에게 보내셔서 그가 눈을 다시 보게 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려 그로 하여금 그를 부르셔서 사도 삼으신 주님에게 순종하는 믿음에 있게 하는 표의 의식으로, 사도행전 13장 3절에서는 성령께서 바나바와 사울[바울] 두 사람을 따로이 세워 특별한 일[전도]을 맡겨 파송하는 일을 하는 표의 의식으로 이들을 보내신 이를 성령이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도행전 19장 6절에서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통해서 주 예수의 이름을 믿음으로 영접하고 세례를 받는 에베소인들에게 성령께서 임하시는 방편으로 안수가 행해졌는데, 이 모두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임하시기를 기원"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고 그를 도우시는 것으로서 그가 지금 한 일은 하나님께서 그의 기쁘신 뜻대로 하신 일이다"라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것의 의미에서 기도와 더불어 행해져서 안수는 항상 상징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안수에서 어떤 가시적인 것을 기대하고 보려고 할 것이 아니라, 여기에 담겨져 있는 내용과 그 의미를 살펴볼 것이었습니다.
그런 안수를 오늘날에서는 특권 계층에 있는 분들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잘못 인식이 되어 있습니다. 가령 목사만이 안수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에 오래 전에 친분이 있던 어느 분으로부터 목사 임직을 받는다는 연락이 있어서 참석하였을 때 설교에서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목사 임직을 받기 전)그동안에는 강단에서 설교는 할 수 있었지만 치리권도 없고 축복의 안수권도 없었는데, (목사 임직을 받는)이제는 설교권과 함께 치리권과 안수권을 다 지녔으니, (목사 임직을 받은)이제 이 교회는 복 받아서 성장하는 일만 남았다!." 그리고 그 날 목사 임직을 받은 그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목사님, 그동안 목회 하는데 참 지장이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안수 기도를 할 수가 없어서 답답했었습니다." 이런 실정입니다. 안수를 하나님의 능력을 베푸는 권한으로 갖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얼마든지 축복과 기적의 능력을 베풀어주는 것으로 쓰여지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잘못된 생각에서 안수 기도를 남용하는 것은 목사만이 아닌 신자들에게서도 보게 되며, 교회와 기도원과 부흥집회와 기타의 자리에서 가리지 않고 행해지고 있는 것을 보고 듣게 됩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오늘날에 있어서 안수는 교회 직분을 임명하는 것에 관련한 공교회적인 의식(儀式) 외에는 쓰여질 까닭이 없습니다. 여기서도 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교회의 직무를 받았다는 것과 그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로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외에는 다른 뜻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혹 믿는 자를 위해 안수 기도를 한다고 했을 때도(안수 기도라는 말을 쓸 이유가 없지만) 내용은 기도에 있습니다. 손을 머리에 얹고 기도하든지 손을 붙잡고 기도하든지 아니면 아무 손도 대지 않고 기도만 하든지, 그 차이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은혜가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말입니다. 기도도 그렇습니다. 상대방 앞에 앉아서 말로 기도하든지 아니면, 전혀 한마디의 기도 말도 하지 않고 단지 상대방을 바라만 보는 중에 돌아왔을지라도 그가 상대방을 향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구하는 마음을 가지고서 그리했다고 하면 그것은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보아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안수하는 그 행위 자체입니까? 아니면 기도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까? 지금 기도자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하는 것이며, 그 기도에 한 믿음으로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기도하는 사람이나 기도 받는 사람이나 같은 믿음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안수에 관한 글을 맺겠습니다. 안수는 '손을 얹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체의 머리이든, 아니면 신체의 다른 어떤 곳이든, 손을 얹고 기도하면 그것이 안수입니다. 또한 손을 얹거나 대지 않아도 손을 얹고 기도하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안수는 기도의 방식, 방법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안수를 기도의 방식이나 방법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안수는 결코 기도의 방법으로 제시되고 그래서 방법론적으로 사용된 적이 결코 없습니다. 안수가 이렇다면, 굳이 우리가 기도하면서 안수 기도와 그 용어를 고집할 까닭이 없습니다. 기도를 구할 때, 기도의 필요성을 가질 때 그냥 기도해주면 되는 것이며, 안수 기도를 한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이 그냥 기도란 말을 사용하면 됩니다. 안수란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안수 기도와 다른 기도가 아니며, 또한 그 기도가 안수 기도가 아닌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안수란 용어를 사용해야 할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공교회가 갖는 교회 직분의 임직에서는 안수를 함으로써 임직을 받는 분이 주님께로부터 받아 맡은 사역을 마칠 수 있기까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동행하시고 이끌어주실 것 구하는 기도를 교회가 갖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이 정도로 안수에 대한 답변도 마치고자 합니다.
본 답글이 님에게 도움이 되는 유익한 것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 평안을 빕니다.(*)
날씨가 점차 겨울로 들어선 티가 나는데, 잘 지내시는지요. 일기예보를 보니 강원도 지역에 대설주의보가 떨어졌다고 합니다. 님이 계신 곳은 우리나라 지역에서 유난히 춥고 눈이 많이 오는 지역인데, 건강에 유의하셔서 주님께서 주신 몸을 주의 일을 위해 쓰는 의로운 도구가 되시기 바랍니다.
님의 질문을 받은 지가 벌써 오래되었는데 이제야 답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많이 기다리셨을 텐데 미안한 마음을 갖습니다.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님은 디모데전서 5장을 읽으시면서(님이 "에베소서 5장을 읽다가"라고 하신 것은 읽으신 바울의 서신을 순간적으로 가장 많이 읽으며 다른 서신서에 비해서 기억에 깊이 각인이 되어 있을 듯 싶은 에베소서로 착각했거나 오기 했지 않나 싶습니다.) 17절 이하의 내용에서 현재의 교회실정과 다른 부분을 발견하고는 다음의 두 가지를 알고자 하셨습니다.
1) 목사와 장로의 관계, 그리고 장로의 사역(또는 직무) 특히 "다스린다" 에 관하여
2) 안수에 관한 것
먼저 첫 번째인 "목사와 장로의 관계, 그리고 장로의 사역(또는 직무), 특히 '다스린다'에 관하여"에 대하여 보겠습니다. 디모데전서 5장 17절입니다.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디모데전서는 바울이 1년 반 동안 고린도에 있을 그의 믿음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는 디모데에게 써보낸 것으로서 목회서신의 하나입니다. 이 서신을 받을 당시 디모데는 에베소교회에서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서신에서 에베소교회에 사역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권면합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17절) 여기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장로들을 존경하라"고 권면합니다만, 장로의 직임에 있으면 그들은 모두가 존경받을 자라는 차원에서 하고 있는 권면은 아닙니다. 장로들들을 존경해야 할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이라고 하였으며, 둘째는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욱 존경하라고 하였습니다.그러니까 말입니다. 장로가 존경을 받는 이유는, 장로라는 직임에 있음으로 해서가 아니고 장로의 직임을 통하여 교회에 봉사하여 섬기는 사역 때문입니다.
이때 '잘 다스리는 장로들'과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이 어떤 자들인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님은 이를 '다스리는 장로'와 '말씀과 가르침을 주는 장로'로 구분하여 이해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러니까 치리장로와 교훈장로, 곧 치리 사역을 하는 장로와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역을 하는 장로로 말입니다. 그래서 장로와 목사의 관계에서 구분되어 이해하고 있는 듯 하며, 그래서 님은 "본 구절이 목회자와 장로의 관계에 관하여 아주 구체적인 설명으로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장로는 목사를 돕기만 하는 자가 아닌 '함께 동역하는 자' 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비단 님의 경우에서만이 아니라, 우리네 교회에서 대부분 이렇게 해석하여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이죠. 교회에서 장로들을 존경해야 하지만, 특별히 말씀을 전하는 목사를 더욱 존경해야 한다는 식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그 구절은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러니까 치리장로와 교훈장로를 구분하여서 그 관계성을 말해주면서 말씀과 가르침을 주는 장로를 더욱 존경할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실은 말이죠. 먼저 언급하신 '잘 다스리는 장로들'이란 장로의 직무를 훌륭하게 수행하는 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앞 절인 5장 1-16절과의 관계에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연로한 어른들을 친부모를 대하듯이 존경하는 태도를 가질 것과 나이 어린 사람은 친동생처럼 대할 것을 이야기하면서, 교회는 아무도 돌보아줄 사람이 없는 과부가 있거든 사랑으로 돌보아 줄 것을 말합니다. 이때 어떤 사람이 존경받을 자로서 교회의 돌봄의 대상이어야 하는지를 교회의 규칙으로 갖게 하여 실행하도록 합니다. 또한 교회에 봉사하는 부인들의 모임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면서 여기에 필요한 주의점도 줍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다시 한번 믿는 자에게 과부가 있는 사람은 그를 도와 주어 교회에 짐을 지우지 않게 하여서 교회가 진정 아무도 의지할 데 없이 외로이 사는 과부들을 도와줄 수 있게 해야 할 것을 권면합니다.
바울은 이 권면을 하면서 장로들을 언급합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따라서 17절에서의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치리장로만을 따로이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장로의 직임을 맡아서 그 직무를 잘 수행하여 감당하는 모든 장로들을 다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교회를 잘 다스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또한 교회를 잘 다스리는 것으로써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이 있었던 것이며, 이들을 언급하여서 설교와 가르치는 사역에 수고하는 장로들은 알아줄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렇게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존경할 것을, 그리고 또한 말씀과 가르침의 수고를 하는 장로들을 더욱 존경할 것을 권면한 것은 장로들이 존경을 받아야 하는데 어떤 종류의 장로들이 존경받고 보수(생활비 지원)를 받아야 할 것이냐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에서의 '배나 존경할 것으로 알되'는 충분히 보수하여 생활을 지원하고 존귀히 여길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이분들은 말씀과 가르치는 일의 수고를 위하여서 자기 생업을 포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분들을 알아주고, 그래서 마땅히 존경하는 마음 속에서 섬겨야 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만일에 말입니다.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수고를 하는 장로의 직무(목사)를 수행하는 자가 교회로부터 생활비의 지원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재산과 넉넉한 경제적 여건을 갖추고 있다면, 또는 생업을 놓지 않고 종사하고 있어서 생활에 아무런 곤란을 겪지 않고 있다면, 그는 교회로부터 생활비의 지원을 받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장로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그들이 말씀과 가르침의 수고를 하는 장로의 직무를 수행한데 따른 보수(대우)를 해주라는 권면을 결코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들'은, 이 사역을 위하여 생업에 종사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교회가 이들의 기업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구약 백성들이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인들의 기업이 되었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는 갑절의 두 배로 존경하는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것에서가 아니라, 그분들이 말씀과 가르침으로 사역하고 있는 교회 봉사의 직무로 인해서 교회는 그들에게 충분한 생활비의 지원을 하고 높은 존경으로 대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18절에서 신명기 25장 4절과 예수님이 말씀하신 마태복음 10장 10절을 인용하였습니다.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의 요지는, 오직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일을 함으로써 이것으로써 교회의 성도들이 받을 하늘의 기업을 위하여 일하고 있는 장로들에게, 교회의 성도들은 마땅히 그들이 소유하고 있지 못한 땅의 기업이 되어서 공정히 평정(評定)하여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함께 평균을 이루어 '남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하나님의 은혜의 공급 속에서 함께 돌봄의 살핌을 받고 있습니다. 이는 '말씀과 가르침의 수고를 하는 장로들'과 교회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 있는 '한 백성'이요, 하나님의 '한 자녀' 라는 특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7절은 님이 알고 있듯이 "장로를 일컬어 '다스린다' 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말씀과 가르치는 일' 이라는 장로의 사역에 관하여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개혁교회에서는 이미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목회자와 장로의 관계에 관하여 아주 구체적인 설명으로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장로는 목사를 돕기만 하는 자가 아닌 '함께 동역 하는 자' 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의 개념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치리장로와 목사와의 관계를 말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만일에 그렇게 알게 되면 말이죠. 님이 우려하기를 "이 부분은 제도권교회에서는 매우 도전적인 불순한 이론으로 받아들여지는 부분입니다. 특히 감리교의 교리와 장정에서는 결코 용납이 안 되고 있는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목사와 장로를 수직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로 나아갈 가능성이 농후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아야 할 것이지만", 그러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목사들을 더욱더 존경해야 할 것이다." 라고 말하여서, (치리사역)장로보다 (말씀사역)목사에 더 큰 비중과 가치를 두고서 장로보다 목사를 더욱더 알아주어야 한다고 말하여서 목사를 높이 잘 대우하여 줄 것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목사와 장로의 관계는 이런 수직적이고 계급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목사란 직분도 장로란 직분도 또한 집사란 직분도 사실은 교회의 일을 봉사하여 섬기는 직무를 수행하는 것에서 불려지고 있는 직분적 사역의 호칭일 뿐이며, 이들 모두는 다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된 믿음의 형제요 자매로서 '성도'입니다.
목사와 장로의 관계는 각각 주님으로부터 받아 맡고 있는 일에 의해서 서로 협력적 관계입니다. 목사는 '말씀과 가르침'을 맡은 직분자입니다. 목사는 오직 이 사역을 위해서만 그리스도의 주신 은사에 따라서 세움을 입었습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에서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사를 온전히 사용하여야 하며, 그것은 '복음의 순전한 전파'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하나님의 본의의 이해 속에서 올바르게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으로서의 설교를 하여야 하고 또한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장로는 목사와 함께 교회의 감독을 맡은 직분자입니다. 여기서 장로가 맡고 있는 교회의 감독이란 것은 '말씀의 감독자(감시자)' 역할을 하는 것에서입니다. 장로는 목사의 설교가 복음에 순전함으로 전파되도록 설교에 책임있게 참여함으로써 말씀을 살피는 일을 하여야 하며, 또한 목사의 설교를 들은 성도가 설교를 통하여 주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는지를 살펴서 그렇지 못하면 말씀으로 권면하여 믿음에 올바르게 서나가도록 권면하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목사는 목사의 사역을 하고, 장로는 장로의 사역을 함으로써 다같이 '교회를 다스리는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말이죠. 직분이 목사로 또한 장로로 각각 그 봉사하는 일의 성격과 역할이 다름으로 인해서 서로 독립적입니다만,'사역상 동등'(parity ministry)한 자로 있습니다. 이 동등의 원리로 인해서, 목사와 장로는 교회의 봉사를 위하여 서로 형제되는 처지에서 봉사해야 한다는 것이 개혁교회가 가져온 교회 직분에 대한 이해입니다. 이러한 교회 직분의 관계를 만일 수직적이고도 계급적인 종속적 관계로 가져나간다면, 이는 주님께서 교회에 세우신 직분에 갖는 질서의 원리를 깨뜨리는 것으로서 해악이 될 것입니다.무엇보다도 말이죠. 목사와 장로는 각각 자신들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속한 한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 아무런 권위도 없다는 것을 알고, 의의 종된 자세로 함께 협력하여 온유하게 그리스도와 그의 몸된 교회를 봉사하여 섬겨나가야 합니다.
이상으로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을 마치겠습니다.
이제 두 번째 질문에 대하여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질문의 내용을 보겠습니다. "그리고 22절에 이르러서는 다른 이야기가 나오는데 아무에게나 함부로 안수하지 말라고 이르고 있습니다. 여기서 “아무에게나”라는 말은 불신자를 뜻하는지, 아니면 성도를 뜻하는지 궁금합니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안수를 남발하는 것 같아서 한번 여쭈어 봅니다." 하면서 질문의 요지가 '안수에 관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구절을 보겠습니다.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 여기서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라고 말하여서 '안수'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장로를 선택하여 세우는 일과 관련하여서 하신 권면입니다. 장로를 선택하여 세울 때 서둘러서 함으로써 경솔히 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를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의 임직을 위한 안수를 가볍게 하지 말라는 의도에서 '경솔히 안수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수에 대해서'는 전에 한 분이 질문해 주셨기에 답변해 드린 적이 있으며, 그 답글이 73번에 올려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답글을 가지고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안수란 말은 한문으로는 '安手'입니다. 그러니까 그 뜻만 보면 "머리나 기타 신체 부위에 손을 얹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안수하는 광경은 여러 곳에서 기록되고 있는데, 구약에서는 특별히 모세 율법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때 사용이 되었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제사의 종류에 의해서 정해진 데 따라서 희생제물을 드립니다. 이때 속죄 제사에서는 희생되어진 제물 위에 손을 얹는 행위를 하는데, 이것이 안수입니다. 여기서 안수는 희생제물에 손을 얹는 것에서 대표적인 개념을 갖는데, 희생의 제물을 바치는 사람은 제물이 되는 짐승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자신의 죄를 옮긴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인 죄를 전가시키는 표시였습니다.
구약에서 또한 안수는 하나님의 일을 맡아서 할 자에 대한 구별의 의미도 지니고 있습니다. 가령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안수를 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안수를 함으로써 자신에게 임하였던 하나님의 능력이 여호수아에게 계승되어 계속되어질 것을 나타냈습니다(민27:18, 신34:9). 그런가하면, 레위인들은 백성들에 의하여 안수 받는 것을 통하여서 그들을 대신하여 성전 봉사의 책임을 감당할 자들로 세워졌습니다. 이런 그들은 속죄 제물에 안수함으로써 그들 자신이 속죄되었으며, 그들 자신의 속죄로 말미암아 그들과 함께 하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또한 여호와께 받아들여져 거룩해졌다는 것을 나타냈습니다.
안수의 행위는 신약에서도 나타납니다. 안수를 행하신 분은 예수님이신 데, 그분의 안수 행위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 전파와 함께 나타낸 메시야 능력을 나타내시는 사역으로 행하신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것에서 있었습니다(막6:5). 예수님은 이 안수에서 안수 기도가 지닌 신기하고도 신비스러운 능력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 아니라, 지금 자신이 한 이적이 하나님이 보내주신 메시야에 의해서 행해지는 능력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해 주고자해서 였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님이 행한 안수의 행위는 반드시 "머리 위에 손을 얹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자기 딸이 병들어 죽게 되자 예수님을 찾아와 예수님께 자기 딸을 위하여 안수해 줄 것을 간청한 적이 있습니다.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막5:23). 이에 예수님은 그의 집으로 향하여 갔습니다. 그런데 가는 중에 열 두 해를 혈루병으로 앓으며 고생하는 여인을 만났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께 가까이 다가가 옷에 손을 대어 만졌습니다. 여인이 이러한 행동을 한 것은 "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는 믿음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여인은 혈루병에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그녀의 믿음이 그녀를 구원하였으므로 평안히 갈 것과 함께 그녀가 병에서 고침 받아 완전히 해방되었다는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일이 있고서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그의 딸이 죽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 딸에게 예수님은 그의 머리에 손을 얹은 것이 아닌 손을 잡고 "달리다굼" 하였으며, 죽은 딸이 곧 일어나서 걸어다녔습니다(막 5:24-42). 이러한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이 병 고치는 능력을 행함에서는 안수 행위가 단지 머리에만 한정되지는 않았으며, 또한 예수님이 직접 손을 얹거나 손을 대는 것으로만 행해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안수는 축복하시는 기도로도 행해졌습니다. 예수님을 좇아 따르는 무리들이 자기들의 어린 자녀를 데리고 나와서는 안수해 줄 것을 구한 적이 있었는데(마19:13-15), 여기서의 안수를 구한 것은 "손을 얹어 기도해 달라"고 청한 것을 이름입니다. 여기서의 안수의 핵심은 기도였습니다.
신약에서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성령 강림으로 인해 유대인에게만 아니라 온 세상의 이방인들에게도 생명이 주어지는 일과 관련하여서 안수가 행해졌습니다. 이때 사도행전 6장 6절과 디모데전서 4장 14절, 5장 22절, 디모데후서 1장 6절에서는 집사와 장로 직분의 임명과 관련하여서, 사도행전 8장 17절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자들에게 그들에게도 성령이 임하셨다는 것을 확증하는 표의 의식으로, 사도행전 9장17절에서는 아나니아가 사울[바울]을 찾아가 다메섹에서 사울에 나타났던 주께서 자신을 그에게 보내셔서 그가 눈을 다시 보게 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려 그로 하여금 그를 부르셔서 사도 삼으신 주님에게 순종하는 믿음에 있게 하는 표의 의식으로, 사도행전 13장 3절에서는 성령께서 바나바와 사울[바울] 두 사람을 따로이 세워 특별한 일[전도]을 맡겨 파송하는 일을 하는 표의 의식으로 이들을 보내신 이를 성령이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도행전 19장 6절에서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통해서 주 예수의 이름을 믿음으로 영접하고 세례를 받는 에베소인들에게 성령께서 임하시는 방편으로 안수가 행해졌는데, 이 모두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임하시기를 기원"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고 그를 도우시는 것으로서 그가 지금 한 일은 하나님께서 그의 기쁘신 뜻대로 하신 일이다"라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것의 의미에서 기도와 더불어 행해져서 안수는 항상 상징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안수에서 어떤 가시적인 것을 기대하고 보려고 할 것이 아니라, 여기에 담겨져 있는 내용과 그 의미를 살펴볼 것이었습니다.
그런 안수를 오늘날에서는 특권 계층에 있는 분들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잘못 인식이 되어 있습니다. 가령 목사만이 안수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에 오래 전에 친분이 있던 어느 분으로부터 목사 임직을 받는다는 연락이 있어서 참석하였을 때 설교에서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목사 임직을 받기 전)그동안에는 강단에서 설교는 할 수 있었지만 치리권도 없고 축복의 안수권도 없었는데, (목사 임직을 받는)이제는 설교권과 함께 치리권과 안수권을 다 지녔으니, (목사 임직을 받은)이제 이 교회는 복 받아서 성장하는 일만 남았다!." 그리고 그 날 목사 임직을 받은 그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목사님, 그동안 목회 하는데 참 지장이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안수 기도를 할 수가 없어서 답답했었습니다." 이런 실정입니다. 안수를 하나님의 능력을 베푸는 권한으로 갖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얼마든지 축복과 기적의 능력을 베풀어주는 것으로 쓰여지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잘못된 생각에서 안수 기도를 남용하는 것은 목사만이 아닌 신자들에게서도 보게 되며, 교회와 기도원과 부흥집회와 기타의 자리에서 가리지 않고 행해지고 있는 것을 보고 듣게 됩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오늘날에 있어서 안수는 교회 직분을 임명하는 것에 관련한 공교회적인 의식(儀式) 외에는 쓰여질 까닭이 없습니다. 여기서도 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교회의 직무를 받았다는 것과 그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로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외에는 다른 뜻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혹 믿는 자를 위해 안수 기도를 한다고 했을 때도(안수 기도라는 말을 쓸 이유가 없지만) 내용은 기도에 있습니다. 손을 머리에 얹고 기도하든지 손을 붙잡고 기도하든지 아니면 아무 손도 대지 않고 기도만 하든지, 그 차이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은혜가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말입니다. 기도도 그렇습니다. 상대방 앞에 앉아서 말로 기도하든지 아니면, 전혀 한마디의 기도 말도 하지 않고 단지 상대방을 바라만 보는 중에 돌아왔을지라도 그가 상대방을 향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구하는 마음을 가지고서 그리했다고 하면 그것은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보아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안수하는 그 행위 자체입니까? 아니면 기도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까? 지금 기도자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하는 것이며, 그 기도에 한 믿음으로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기도하는 사람이나 기도 받는 사람이나 같은 믿음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안수에 관한 글을 맺겠습니다. 안수는 '손을 얹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체의 머리이든, 아니면 신체의 다른 어떤 곳이든, 손을 얹고 기도하면 그것이 안수입니다. 또한 손을 얹거나 대지 않아도 손을 얹고 기도하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안수는 기도의 방식, 방법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안수를 기도의 방식이나 방법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안수는 결코 기도의 방법으로 제시되고 그래서 방법론적으로 사용된 적이 결코 없습니다. 안수가 이렇다면, 굳이 우리가 기도하면서 안수 기도와 그 용어를 고집할 까닭이 없습니다. 기도를 구할 때, 기도의 필요성을 가질 때 그냥 기도해주면 되는 것이며, 안수 기도를 한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이 그냥 기도란 말을 사용하면 됩니다. 안수란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안수 기도와 다른 기도가 아니며, 또한 그 기도가 안수 기도가 아닌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안수란 용어를 사용해야 할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공교회가 갖는 교회 직분의 임직에서는 안수를 함으로써 임직을 받는 분이 주님께로부터 받아 맡은 사역을 마칠 수 있기까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동행하시고 이끌어주실 것 구하는 기도를 교회가 갖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이 정도로 안수에 대한 답변도 마치고자 합니다.
본 답글이 님에게 도움이 되는 유익한 것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 평안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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