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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과답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의 정체성과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해석적 의미에 관한 글입니다.

작성자이천우|작성시간06.11.30|조회수515 목록 댓글 1
강가애님의 질문을 받고
성도의 정체성과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해석적 의미를
답변드리겠다고 하였기에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이에,
그동안 이 질문과 관련하여 올려져 있던
이런 저런 이야기의 글은
본 답글로 인해서 있어야 할 까닭이 없기에
삭제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아울러,
본 답글은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의 정체성과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해석적 의미와 관련하여서
질문한 것에 대한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것일 뿐이므로,
본 답글을 읽고
도움이 되시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반면에,
달리 생각하며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면
독자께서 더욱더 나은 바른 이해로
잘 가져나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에 대한 독자들이 갖는 생각이나 견해의
꼬리글이나 기타의 글은 달아주지 마시기 바라며,
이에 대한 양해를 구합니다.
............................................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의 정체성과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해석적 의미에 관하여


1. 성도의 정체성

첫사람 아담 안에서 인류는 모두다 죄인입니다. 아담의 죄 안에 그의 모든 후손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담으로부터 모세의 율법 때까지입니다(롬5:13). 이때는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않은 모든 자들에게도 사망이 왕 노릇 합니다.

그러나 둘째 사람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습니다(롬5:18). 우리가 아직 죄인이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받고 하나님의 저주에서 구원을 받아 그분 안에서 생명을 누리기 때문입니다(롬5:8).

이런 사람을 바울 신학의 구원론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은 그 아들을 맏아들이 되게 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들로 미리 정하심과 그런 그들을 부르심과 의롭다 하심과 영화롭게 하심으로 설명합니다(롬8:30).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는 ‘산 자’요 ‘의인’입니다. 그런데 이 용어의 사용에 있어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또는 '주 안에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요 의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고서는, 곧 그리스도 밖에서는 산 자가 아닌, 죽은 자이며, 의인이 아닌 죄인입니다.

그렇다면 신자의 정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이니 죽은 자가 아닌 산 자이고, 죄인이 아닌 의인이 아닌가요? 분명히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것에서도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신자에게서 이 산 자의 특성이 나타나고, 의로운 자의 특성이 나타나는 것은 신자에 의해서가 아니고, 신자 안에 계신 그의 주이신 그리스도에 의해서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신자에게서 산 자인 생명이 나오고 의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자의 주이신 그리스도에게서 생명이 나오고 의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자 자신에게서는 아무리 경건을 연습하며 경건하게 살아도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은 육체의 죄성에서 나오는 죄와 그에 따른 죽음만 나옵니다.

구약 성경이 일관되게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언약 관계에 두시고,“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요,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출16:2, 레11:45, 18:4, 신4:20, 29:13)는 것이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다”(레11:45) 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일컬으시며, 거룩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며, 우리가 죄가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소유 삼으신 데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관계는, 그래서 하나님이 거룩하신 자이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한 자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지키시고 이를 실행하신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12장 1-3절에서 아브라함에게 그에게 주는 땅에서 그의 후손으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하시면서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주가 되실 것을 말씀하셨고, 17장 7절에서 아브라함에게 그에게 주신 약속이 변치 않을 것임을 재확인시켜 주시는 것에서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이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의 하나님이 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이루어 가시는 것으로 하나님은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하여 이끌어 내셔서 시내산에서 언약식을 맺고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들과 분별하여서 애굽에서 불러내시고 애굽 사람들로부터 분리하여 이 일을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게 하시면서 그들을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내 백성' 되게 하시는, '열국 중에서 특별한 하나님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의 개념입니다(출19:1-6, 20:1). 그리고 이는 이방인에게로 확대됩니다. 그래서 스가랴서 2장 11절에서는 많은 나라가 여호와이신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며 8장 8절에서는 하나님은 그런 그들에게 성실과 정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을 예언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제사와 함께 절기와 성전을 주신 것도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며, 그들의 하나님이 되셔서 그들을 자기 백성 삼으시고 거룩케 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똑같은 장막으로 된 성막을 짓게 하여 이스라엘의 장막과 분별시키시고 거룩한 곳이 되게 하여 그들 한 가운데 두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레위 지파를 따로이 세워 분별하시고 이들로 성막의 일을 할 수 있게 함으로써 성별한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레위 지파에서 아론과 그 자손에게서 제사장의 일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서 그들을 따로이 세워서 기름 부어 성별 시키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봉사하여 섬기는 ‘거룩한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을 제사로 맺어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삼으시는 ‘거룩한 관계성’을 형성해 나가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임재해 계시는 성막을 중심으로 제사를 드리며 살게 함으로써 제사장이 입은 거룩에 들어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심으로써 하나님의 거룩에 들어와 있게 하여서 하나님이 거룩하신 자이신 것처럼 이스라엘도 함께 거룩한 자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그러나 이스라엘이 거룩하다는 것이, 이스라엘이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언제나 죄인으로 있어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스라엘은 언제나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또한 거룩한 자인 것은 그들이 그럴 만한 상태에 있고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는 은혜에 의한 주권에 따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과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언약에 의해서 애굽에서 불러내 이스라엘이 되게 하여 자기의 소유로 삼으셨습닙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인 것이며, 이 이스라엘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실로 인해서 거룩한 자가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비록 하나님께서 거룩한 자가 되게 해 주셨어도 여전히 인간의 악한 죄성을 나타내며 살며,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 죄를 인하여 그들을 거룩한 자로 삼으신 것을 변개치 않으시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한에는 언제나 거룩한 자로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성막을 중심으로 하여서 이스라엘을 언약으로 맺어진 제사에 참여시키심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인 관계를 지속시켜 나가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거룩한 자의 관계성을 가지고 있으나, 그들이 드러낸 것은 거룩한 자된 거룩이 아니라, 만물보다 부패한 인간의 죄성입니다. 이들은 한번도 제대로 하나님의 언약을 지켜나간 적이 없습니다. 늘 거듭된 악한 죄성의 발휘입니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쏟아내실 저주를 발하시기까지 오래참음으로 계시면서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거듭해서 돌이켜 하나님의 언약 아래 놓으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이 갖는 토로가 무엇인가요? 선지자 이사야는 말하기를,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사1:2-3) 하면서,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우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부패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 뿐이어늘 그것을 싸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사1:4-9)고 처절하게 부르짖었습니다. 그는“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사6:5)라고 자신을 말하는 것에서 이스라엘의 처지를 드러냈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패역한 죄악상을 말하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렘2:19)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언약의 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하나님의 백성이요 거룩한 자인 이스라엘이 보인 것은 악한 죄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위하여 새 언약을 세울 것을 예언으로 주셨습니다(렘31:32).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을 돌비에서가 아닌, 그들의 마음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렘31:33). 그에 따라서 그 일을 위하여 새 영을 그들의 마음 속에 두고 새 마음을 주어서 그들의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겔36:26-27). 선지자 요엘이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예언한 것은 그러한 배경에서 있게 된 것입니다(욜2:23).

그 약속에 따라 성령의 강림이 있었습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택한 백성들의 마음을 기경(起耕)하여, 강팍한 어른들의 마음을 어린아이의 마음처럼 부드럽게 하고 거역하여 복종하지 않는 마음을 변화시켜 의로운 자의 지혜를 갖도록 만들어 가심으로써(눅1:16, 17), 많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를 차별 없이 말입니다.

로마서 5-8장에 의하면, 성령님이 전하는 주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은, 그래서 그리스도를 전하는 성령을 받은 사람은 그 마음이 새 마음으로 있게 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한 분의 순종하심을 통해서 의인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의인이 된 것을 말합니다(롬6:19). 아담 한 사람의 죄로 모든 사람은 죄인 되었고, 그 죄가 모든 사람에게 죽음의 형벌을 가져다 주었는데, 두 번째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순종하여 그 의로 많은 사람을 의인되게 하셨고, 그 의가 그들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러기에 칭의와 영생의 교리가 뚜렷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의인이 되게 하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우리를 위해서 피흘려 주심에 의해 우리를 죄 없다고 선언하셔서 다시는 정죄 받지 않게 해 주신 것이요, 그럼으로써 우리의 악한 욕망에서 나오는 죄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었기 때문에 죄의 유혹과 세력이 우리를 더 이상 구속(拘束)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롬6:1-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의인이 되게 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더 이상 악한 욕망에 이끌려 살지 않으며, 그래서 더 이상 악한 죄를 안 짓게 되었다는, 그래서 어떤 죄도 안 짓고 오직 착하고 의로운 일만 하는 선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할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거에는 죄가 모든 사람을 지배하여 죽음을 가져왔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지배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의롭다 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됩니다. 이런 그에게서는 그를 지배하던 죄의 세력은 더 이상 구속력(拘束力)이 없으므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지배를 받거나 죄의 노예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죄가 존재하는데, 죄의 세력이 우리를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더 이상 우리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짓지 않고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그럴 수 있게 해 주셨는데 계속 죄를 지어서야 되겠는가? 바울은 그럴 수 없다고 단언하여 말합니다(롬6:1-2, 15).

그런데 그런 우리가 자신의 육신을 죄의 지배에 내맡겨 악한 죄의 도구가 되어 삽니다. 그것은 인간의 죄성에서 나오는 육신의 욕망을 인해서 입니다. 우리는 율법의 속박을 받으며 사는 죄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로운 몸이 되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로 거룩하며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기 때문에(롬6:14), 이제는 우리 자신의 몸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롬6:15-23), 우리 속에 있는 악한 죄성에서 나오는 죄는 우리가 원치 않는 일을 하며 살게 합니다. 그래서 선을 원하나 선을 행하지 않고, 악한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나 그게 아무리 애를 써도 생각하고 마음먹은 만큼 되지를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하고 삽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죄가 아직도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아직도 죄에 붙잡혀 그 지배를 받으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마음으로는 늘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기를 원하면서도 실제로는 여전히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정체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속, 곧 속죄하신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서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받아 영생을 얻었지만, 이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 안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지, 우리 자신의 악한 육에서는 죄만 나옵니다.

그런데 이것은 구약 시대와는 차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다른가 하면, 구약 시대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인 아담으로부터 모세의 율법 때까지는 죄인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에 의한 율법의 저주 아래 놓여져 있는데 그들의 육체로는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육체로는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죄의 지배를 벗어나 구원받을 수가 없으며, 또한 육체로도 율법을 다 지킬 수도 없거니와 하나님의 뜻(의도)를 따라서 지키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구약 시대에서 이스라엘은 윱법의 언약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거룩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언약을 지키지 못하고 항상 범죄한 백성으로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 관계에 의해서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과 거룩한 자의 관계 속에 두시고서 항상 함께 하시면서 언약 가운데 남은 자들이 있게 해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영원한 작정을 실행해 나가셨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사람의 몸을 취하게 하여서 죄인의 한 사람이 되게 하여 우리의 죄를 사하는 속죄의 희생제물로 삼으심으로써 우리를 지배하는 죄의 세력을 멸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죽음도 우리에게서 더 이상 왕 노릇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의 새 생명과 함께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다시 죽는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죽음이 그리스도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죄가 우리를 지배하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며, 죽음이 왕 노릇하지 못하는 것이지, 죄 그 자체가 우리에게서 없어지고 죽음이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 부패한 우리의 육은 죄성에 의해서 끊임없이 악한 죄가 나와 죄를 행하여 그 본성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죄가 우리를 정죄하지 못하고 죽음이 저주스런 형벌이 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구속의 피와 부활로 죄와 죽음 문제를 처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자기를 믿는 자들의 주가 되셔서 그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죄가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하고 죽음이 왕 노릇하지 못하게 피의 공효와 부활의 권능 속에 두고 그들의 생명을 보전(保全)해 나가십니다. 이런 우리 몸은 하늘에 시민권을 두고 있기 때문에, 죄와 죽음을 이긴 자로 이 땅에 존재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육은 아직 완전한 구속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즉 부활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우리 몸은 죽음을 앞에 둔 인간의 몸이어서 죄를 행하고 살아갑니다. 그러한 우리의 악한 죄의 정욕을 그리스도께서는 날마다 십자가에로 끌고 가서 자신이 못 박힌 그 십자가에 함께 못 박아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게 하시고 또한 부활한 자신의 생명에 연합한 자가 되게 하여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자가 되게 하심으로써 산 자가 되게 하십니다. 우리는 육에서 나오는 악한 죄 때문에 날마다 죽음에 직면하고 있으며, 그래서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날마다 죽는 저주를 겪은 뒤에 그리스도와 함께 날마다 죽음에서 살아나는 권능의 은혜를 입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죄가 날마다 드러나는 것이요 그런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께서는 피 흘려 영원히 세운 속죄의 십자가로 끌고 가서 못 박음으로 죄가 우리에게 어떤 주장도 하지 못하도록 멸하시는 것을 날마다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의 악한 죄에 대하여 날마다 그리스도의 용서가 베풀어지고 그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의 역사가 행해집니다. 이를 그리스도께서는 약속한 대로 자신이 다시 세상에 오실 재림의 날까지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결코 죄와 죽음의 세력이 우리를 멸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 그분의 의를 힘입고 새 생명을 얻어 살게 되었다는 것은 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행하신 구속의 은혜가 가져다 준 의 안에서 의롭게 되었으며 영생을 얻어 살게 되었지만,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요 거룩한 자이지만, 그런 우리에게서 나오는 신앙은 날마다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이요 죄와 허물로 죽었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없이 다만 악한 정욕적인 육으로만 사는 죽은 자의 특성만을 나타내고 사는 것을 회개하여 영으로 날마다 새롭게 함을 받는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 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0-24)고 권면하신 것은 그런 의미에서입니다. 바울을 통해서 주신 이 가르침은 사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산상설교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으로, 그리스도는 자신 안에 있는 믿는 자에게 그대로 실천하여 성취케 하신다. 따라서 의를 행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요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분이 하신 일을 말하여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의를 행하는 것은 '나'가 아니요,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주신 말씀을 성취해 나가시는 것으로 의를 행하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자랑하는 자는 주만 자랑하는 것이며, 십자가의 구속의 복음만 자랑하는 것입니다.


2. 성도의 정체성과 관련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해석적 의미의 설명

성도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해석적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 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본 구절은 이 한 구절로서만 그 해석적 의미를 이해하려들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다른 구절과 별개의 독립적인 구절이 아니라, 앞 뒤 문맥과의 연결 속에서 말씀되고 있는 구절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인가? 아니면 '죽은 자'인가? 사실 이에 대한 구분과 논쟁은 무의미합니다. 무가치합니다. 지금 성도가 산 자인지, 또는 죽은 자인지, 이것의 구분으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언급하시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본 구절에서는 이것의 구분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다만, 갈라디아서 2장 15-19절에서 말해 온, "우리가 죄에서 구원을 받은 것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되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되어진 것입니다. 육체로는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롬3:20, 갈2:16),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의 연결 속에서, 20절에서 자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죄(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 살고 계시는 것이라는 것이요, 21절에서는 육체로는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도무지 얻을 수 없는 그런 자신을 사랑하여서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참생명을 얻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헛된 말을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일 따위는 결코 하지 않겠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금 바울은 구원을 얻는 것이 율법에 있느냐? 아니면 믿음에 있느냐?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20절에서의 바울은(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어떤 자인가? 하는 것이 말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죄(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었기 때문에 죄(율법)에 대하여 살아있지를 않습니다. 즉 율법 앞에서 살아 있는 자가 되어서 율법을 다 지켜야만 하는 그런 존재로 있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죄(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라고 하는 것은 율법의 관점에서 우리는 이미 죽은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에서 흘린 구속의 피에서 확증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 대한 실증적인 효험, 곧 구속의 피 공로를 우리는 날마다 입고 있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날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를 말이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십자가에로 끌고 가서 우리의 육체에서 나오는 악한 정욕을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그 죽음과 함께 못 박아 죽이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의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는 만찬의 자리에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인자의 살을 먹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습니다"(요6:53)고 하신, 인자의 살과 피를 가지고 세우신 "죄 사함을 얻게 하는 언약 관계"(마25:26-28, 고전11:26)에 의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죄 사함, 곧 죄 용서라고 하는 것은 단지 "죄를 용서합니다"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게 하시는, 곧 죄를 없애심으로써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저주를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기 때문에 죄가 전혀 그 세력을 행사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육체에서 나오는 악한 죄가 십자가에 못 박혀 흘리신 속죄의 피에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꼬리를 내리는 것이며, 속죄의 피에 닿자마자 멸해지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서 날마다 나오는 것이 무엇이겠는지요?. "나는 죄인입니다!."가 아니겠는지요. 이는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살고 계신 데 따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살고 있는 자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사랑하여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내어주신 것을 믿는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얻었기 때문에, 그 믿음으로 얻은 구원의 은혜만을 말하게 됩니다. 이를 성령께서 말하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말하게 하심으로 믿음으로 얻은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 갈라디아서 3장 1절 이하입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말하는 것이 성령으로 시작하여서 되어진 것이 있는가 하면, 육체로 시작하여서 되어진 것이 있습니다. 그에 따라서 그 말하는 것이 다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그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리스도인이 되겠다고 하면서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율법의 행위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끌고 가려는 것으로 육체로 그리스도를 믿으려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육체로 시작한 자에게서는 필연적으로 그리스도를 내세워 이런 저런 자기 의를 내세우는 것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시작한 자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눈 앞에 밝히 보이기 때문에 자신이 보고 듣고 아는 것을 성령이 말하고자 하시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의만이 말해지는 것입니다.

이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해석적 의미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의 정체성은 무엇인지를 설명드리고자 합니다. 성도는 '산 자'입니까?, 아니면 '죽은 자'입니까? 앞서 말하였습니다만, 본 구절은 이런 구분을 하여서 그 중에 하나를 말해주고 있는 것으로 있는 구절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말한 것과의 연계 속에서 이 둘이 갖는 의미상의 차이를 말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먼저 '산 자'라는 말은 어떻게 쓰여지고 있는가에서 보겠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인 우리는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서는 산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 같이 그분 안에 있는 우리들도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얻어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의롭다 하심을 받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얻음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육체의 행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인 십자가의 구속에 근거하여서 의롭다 함과 영생을 주셨습니다. 그러니 성도는, 곧 우리는 의인이요 산 자이지요. 그러나 이는 지금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서 지금 하늘 보좌에 승리하신 왕으로 계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 있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고 있는 사실로 인해서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말하기를, "때가 차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늘에 있든지 땅에 있든지 사방에서 모아 영원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게 하신다"(엡:10) 하여서, 하늘에 있는 자나 땅에 있는 자 모두를 '통일성'있게 보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우리 대신 죽게 하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는 작정에 있기 때문입니다(엡1:5). 그러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세계 속에 있는 자로서 살아있는 자, 곧 산 자일 수밖에 업습니다.

그런 성도는 말입니다. '죽은 자'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에 대하여 어떤 반응도 보이지 못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선한 일에 아무런 반응도 갖지 못한다는 차원에서 시작하면서, 그가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명에 대하여 산 자가 되었기 때문에 날마다 죽음을 통과하는 은혜를 입고 있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육에서 나오는 것은 육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은 성도는 "영의 사람이다"라고만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가 영의 사람이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육을 벗지 않으면 안 됩니다. 즉 육의 구속(부활)을 입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말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하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인해서 '영의 사람'이지만, 부활에 이르기까지는 '육'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입고 삽니다만, 육으로 난 자는 단지 육이어서 영의 세계인 하나님의 나라에 전혀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영(성령)으로 난 자가 되게 하십니다. 그런데 그 영(성령)으로 나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면,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시는 믿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과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믿음에 있는 것과는 동격입니다(요3:1-17). 이는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는가?"란 질문에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신다"는 예수님의 답변과 같은 것입니다.(마19:25-26)

그러나 세상은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는 것으로 그들이 하늘의 빛을 싫어하고 어둠을 더 사랑하는 죄를 드러내서 악한 죄인임을 판단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요3:18-20). 그들은 말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서는 죽은 자입니다. 도무지 하나님을 보지 못하며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의 마음은 내버려진 상태에 있으며, 자기들 생각에 좋은 대로 여기는데 따라서 멋대로 행하며 삽니다. 이런 그들은 말이죠. 문 앞에 바짝 엎드러져 있어서 문이 조금이라도 열리는 틈만 생기면 들어와 공격하고자 하는 야수처럼 죄성에서 나오는 악한 욕망을 좇아서 기회만 주어지면 죄를 짓습니다. 그렇게 죄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도 육의 특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삽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죽은 자의 생각이요 행동을 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우리 육은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을 생각하고 행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치 않으면서도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행하며 삽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인으로 삼으셨으며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해 주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해 주셨기에 하나님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만, 우리 몸은 죄를 저지르며 삽니다.

이런 우리의 육에서 나오는 악한 정욕을 성령께서 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가로 끌고 가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 대신 못 박혀 죽음을 당하심으로 흘리신 속죄의 피로 우리를 깨끗이 씻으시는 것에 의해서 우리를 죄에 대하여서는 죽은 자가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죄가 더 이상 우리 몸을 주장하지 못하게 합니다. 정죄하고 심판을 주장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입니다. 이 죽음을 당하는 것이 없이는 또한 다시 살아나는 것이 없습니다.

대개의 경우는, 자신들이 성령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성령의 소욕을 좇아서 산 자로서의 특성을 발휘하면서 의롭게 살 수 있게 해주셨다는 것으로 생각을 몰아갑니다. 그리고 이런 것으로 성화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소욕을 좇아서 행한 이 행함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행위로 인정되는 의가 되는 것으로 여깁니다. 뿐만 아니라 이 행함은 비록 우리 안에는 죄성이 있지만,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기 때문에 그분의 능력으로 산 자다운 특성을 발휘하여 행동하면서 살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자신의 능력으로 우리가 죄와 더불어 싸워서 이기게 하시며, 하나님의 선한 일을 좇아서 행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이렇게 되면, 우리는 죄를 항상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항상을 좀 양보하더라도 가끔씩이라도 죄를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기지 못한 것은요? 그에게 믿음이 없어서 이기지 못한 것이 됩니다. 이길 만한 믿음이 없어서 이기지 못한 것이 되며, 자신이 가진 믿음보다 상대한 죄가 더 강해서, 그래서 상대의 죄가 지닌 세력보다 믿음의 능력이 적어서 이기지 못한 것이 됩니다. 그리고 이긴 것은요? 자신이 그리스도께 대하여 가진, 곧 그리스도께서 주신 능력을 힘입은 믿음으로 이긴 것이 됩니다. 그러면 지금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죄와 싸우고 있는데 죄에게 지면 그리스도를 믿는 자기의 믿음이 적거나 없어서 진 것이요, 이기면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은 믿음으로 이긴 것이 되는 것입니까?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더러 명하여 옮겨져서 바다에 심기우라 하여도 심겨질 것이라고 하는 말씀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어느 때는 죄와 싸워서 이겼고, 그래서 그리스도를 잘 믿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때는 자신이 믿음이 없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으며, 따라서 도무지 죄에 진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죠. 그런데 죄와 싸워서 집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어떤 믿는 자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능력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우리들에 의해서 아무런 능력이 되지 못한다고 하는 고발이 되고 있습니다. 즉 우리 스스로 그리스도의 능력 없음을 나타내는 꼴이 되고 있으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우리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과연 그리스도의 능력이란 것이 그렇게 우리의 믿음의 여부에 따라서 부정될 수 있는 그런 것이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에 대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십니다(빌2:13).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고 이를 받들어 섬기게 하십니다(살전5:18). 우리는 과연 우리 안에 소원으로 품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잘 이해하고 받들어 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못하기도 합니다. 또는 행하되 결코 의롭지 못한 모습으로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의 일곱 교회를 통해서 알려 주시듯이 칭찬과 책망이 함께 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일곱 교회가 행한 것으로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약속을 가지고 이야기하며(계2-3장), 그래서 하나님과 그 곁에 계신 어린양이 흘리신 구속의 피를 가지고, 또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서 흘러나오는 생명수를 가지고 이야기합니다(계7:14, 17).

우리의 믿음은 말이죠. 교회의 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주신 약속 안에서 가져나가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의 실상은 약속을 주신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갑니다. 우리의 행위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서 잘 이해하고 받들어 섬겨야 합니다. 참으로 믿음 있는 생활을 잘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 믿음 있는 생활을 해 나간다고 하는 것은 육체의 소욕을 좇은 결과이기도 하고 또한 성령의 소욕을 좇은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하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이 갖는 행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사람이 갖는 행함에 불과한 것으로서 육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소욕을 좇아서 아무리 경건하게 살고 의를 행하여도, 그래서 성령의 소욕을 좇은 결과로 성령의 소욕에 합당한 열매인 이런 저런 의로운 열매들을 맺었다고 할지라도, 그 행함과 열매를 맺은 것이 우리에게 전혀 의가 되지 못하는 것은 첫째는 그것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행하신 능력인 까닭이요 둘째는 그것을 행한 우리의 행함이라는 것은 육의 죄성에서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소욕을 좇아서 거룩하게, 의롭게 행동하며 살았는데 그것조차도 육의 죄성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부활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육의 온전한 구속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행한 믿음 있는 생활을 한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모든 행함을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로 가져나가서 구속하신 피를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행한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주신 약속에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주신 약속에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와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인데,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지상에 있는 동안에 하늘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어떻게 일해 나가시는지를 보고 아는 것이요 경배의 찬송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 드러냅니다.

그러니 말이죠. 우리는 우리가 믿음 있는 생활을 한 것을 결코 조금이라도, 정말 조금이라도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원하시는 것을 알면서도 하지 않고 하나님이 미워하시며 싫어하시는 것인 줄 알면서도 육체의 소욕을 좇아 행하였던 악한 죄를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의 피 공로 앞에 가져나가지 않으면 안 되고, 성령을 좇아 가진 생각과 행함으로 쓴 면류관도 다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의 피 공로 앞에서 던지고서(계4:10), 온전히 그리스도의 피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되는데요. 그러니 자랑하는 자는 다만 주님과 그분이 지신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자랑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그리스도의 의만 나타나져야 합니다.

주 안에서 평안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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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루디아 | 작성시간 06.12.02 비늘이 한 장 벗겨졌습니다.감사합니다. 초신자로 돌아가서 말씀을 처음부터 다시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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