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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과답

Re:관상기도에 대한 답글입니다.

작성자이천우|작성시간08.09.06|조회수413 목록 댓글 3
관상기도(觀相祈禱;n)에 대하여





안녕하세요 elijah님.



주 안에서 잘 지내시는지요.



님의 질문에 대한 답글을 이제야 드리게 되었습니다. 님이 질문한지가 날수가 꽤나 되었는데 가능한 한 빨리 해드리고 싶었습니다만, 이런 저런 일과 형편으로 쉽게 빨리 해 드리지를 못하였습니다. 이에 님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하며 양해를 구합니다. 그리고 이제서라도 답글을 써 올리게 된 것에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님은 관상기도에 영성신학, 헨리나우웬 등이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안다고 하면서 이 관상기도를 한국의 유명한 목사님들과 많은 교회들이 한다고 들었는데 과연 이것이 올바른 것인지, 그리고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질문하였습니다. 이에, 다음과 같이 먼저 관상기도에 대하여 설명을 드리고, 이어서 과연 많은 교회들이 하는 관상기도가 올바른 것인지와 그 문제점은 무엇인지를 답변 드립니다.





Ⅰ. 관상기도에 대하여

 

관상기도란 말은 우선 개신교에서는 생소한 용어입니다. 왜냐하면 이 용어는 개신교에서 쓰는 말이 아닌 카톨릭교회에서 쓰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제는 한국의 유명한 목사님들과 많은 교회들이 이 관상기도를 하며 또한 이것에 대하여 말한다고 하니 이제는 개신교에서도 더 이상 생소한 용어가 아닌 것이 된 듯 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관상기도는 카톨릭교회에서 쓰고 있는 용어입니다. 그러니까 카톨릭교회에서 해 오고 있는 기도의 한 방식입니다.



그런데 관상기도란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용어가 갖는 단어의 의미와 이것이 언제 어떻게 해서 생기게 되었는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관상기도는 영어로는 ‘Contemplation Prayer’입니다. 이 단어는 본래 ‘묵상’, ‘명상’, ‘숙고’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뜻으로의 기도, 곧 ‘묵상기도’ ‘명상기도’ 라는 식으로 기도를 말하지 않고, 이와는 차별되게 ‘관상기도’란 독특한 용어를 쓰고 있습니다. 그것은 명상기도가 성경의 어떤 한 구절이나 또는 어떤 주제를 가지고서 깊은 생각에 잠기며 하나님과의 대화를 추구하는 형식으로 기도를 하는 것이지만, 관상기도는 그러한 것에 의한 기도를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그 자체를 말하는 기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관상기도는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그분 안에 있는 신성(神性)을 발견하여 하나님과 자신의 일치를 이루는 기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는 카톨릭에서 성인으로 말하는 빅토르 리챠드(Richard of victor)가 관상을 정의한 말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관상을 “지혜의 나타남에 대해 놀라움으로 정지된, 마음의 자유롭고 보다 통찰적인 응시”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명상과 대조하여 정의하기를, “관상은 지각된 사물 안으로 확장된 통찰력이고 자유로운 영혼의 응시인 반면에 명상은 사물에 대하여 열심히 추구하는 마음의 주목이며 진리를 열심히 추구하기 위해서 사용된 영혼의 주의 깊은 응시”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관상기도는 한문으로는 ‘觀相祈禱’, 즉 ‘상(기도의 대상)을 바라보는 기도’ 입니다.

  

관상기도가 언제부터 유래되었는가 하는 그 기원은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습니다만 관상기도를 말하는 자들에 의하면, 예수님의 기도에서부터 찾으며, 또한 이후의 초대교부 시대로까지 올라간다고 보고 있습니다. 관상기도는 초대교부들이 사용하던 기도의 한 형태이며, 이후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오리겐, 니사의 그레고리 등은 신플라톤파에서 theoria(관상)라는 단어를 가져와 사용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theoria의 원뜻은 지식의 지적 시각(視角)을 뜻하며, 그리스 철학자들은 이 theoria를 지혜를 가진 사람들의 최고의 활동으로 간주하였는데 이 용어에다 교부들은 사랑을 통하여 얻어지는 일종의 경험적 지식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da'ath의 뜻을 가미하였으며, 이 theoria를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가 라틴어 ‘contemplatio’(관상)으로 번역하였고, 관상이란 용어를 처음 정리한 사람은 6세기의 니사의 그레고리 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관상을 ‘사랑으로 가득히 충만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라고 하면서 ’하나님 안에 쉼‘이라고 불렀습니다. 



관상기도는 이후 카톨릭교회에서 기독교 전통으로 내려오고 있으면서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관상기도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카톨릭교회에서 이것과 함께 행하고 있는 관련된 몇 가지의 기도와 더불어서 알 필요가 있습니다. 카톨릭교회에서는 기도를 단계별로 구분하고 있으며, 이 기도의 단계들을 다음의 3단계로 나누고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1. 구송 기도(Vocal Prayer) :  구송기도는 입술의 기도라고도 합니다. 이 기도는 기도하는 내용의 말을 강조하고, 읽거나 노래로 합니다. 구송기도의 내용은 기도문으로 미리 만들어 놓은 것으로서, 보통으로 아름답고 영감을 주는 시적인 표현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기도자가 자유로이 하는 구송기도도 있습니다. 



2. 묵상 기도(명상 기도, Meditative Pryer or Meditation) :  명상 기도는 정신이 중심이 되어 하는 기도입니다. 따라서 기도자는 마음을 모아 집중하여 고요히 침묵하는 속에서 그가 가진 정신은 하나님과 그의 경이로우심을 생각하고 상상하고 성찰하고 숙고합니다. 이때의 기도자의 정신은 이해와 통찰을 추구합니다. 묵상에서는 입술은 조용하나, 정신은 활동적입니다. 



3. 관상 기도(Contemplative Prayer or Contemplation) : 관상 기도는 마음과 의지의 기도입니다. 마음과 의지는 하나님의 향하지만 입술과 정신은 쉽니다. 이 기도는 기도자가 하나님을 찾아가 기도하는 형태가 아니라 기도자의 열린 마음의 내면에 하나님께서 자유롭게 찾아 들어오도록 하여서 기도자의 마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갖는 기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상기도는 하나님과 기도자가 하나가 되는 일치경험 상태를 강조합니다. 즉 신적인 일치(하나님과의 일치, Divine Union)을 꾀합니다. 관상기도에서 기도자의 마음은 말없는 기도로 하나님께로 나아가고 의지는 하나님의 의지와 하나 되기를 추구하면서 다만 단순히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 이유는 관상기도는 기도자가 자기가 구하는 것을 주장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상태의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관상기도의 목적은 기도자의 소원을 말하는데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과 그 분의 뜻에 귀를 기울이는 데 있습니다. 



관상기도가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카톨릭교회에서 널리 사용하고 있는 기도의 형태가 되었지만, 그러나 이 기도는 수도승으로서의 사역에서 수사가 수도승으로서의 영성 사역을 중시하는 것으로 가져나간 것이 관상기도에 힘쓰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혼연일체가 되는 것인데, 기도는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는 것에서 가져나가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라고 하는 기도를 하는데 기도는 기도를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관상기도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박노열은 ‘관상기도’에서 “관상은 사람의 존재의 중심에서 알려지고 사랑받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자각이다. 우리가 이러한 자각을 신앙으로 추구할 때, 이것을 습득적 관상(acquired contemplation)이라고 한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자각을 실질적인 체험으로 우리에게 주실 때, 우리는 이것을 주부적 관상(ifused contemplation)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관상기도에는 두 가지가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관상기도의 두 가지인 습득적 관상과 주부적 관상이 무엇인지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습득적 관상(acquired contemplation)

“믿음과 희망과 열망하는 사랑으로 우리가 그분의 현존을 향해 나아갈 때 이 관상은 우리가 믿음으로 그분이 진정으로 현존하심을 아는 것으로 시작하여,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해서 그분과의 접촉을 계속 추구하는 것이다.” 



2. 주부적 관상(ifused contemplation)

“그분이 대가 없이 거저 주신 은총으로 기도할 때 그분께서 우리에게 그분의 현존에 대한 진정한 자각을 주신다. 예를 들면, 그분은 사랑, 평화, 기쁨과 같은 성령의 열매(갈 5:22)를 체험하게 함으로써 그분의 현존을 참으로 자각하게 해주신다. 우리의 마음 안에 계신 그분의 현존에 대한 자각을 통해서, 또는 다른 방법들을 통해서 자각하게 해주신다.” 



그런데 관상기도에 이르기 위해서는 훈련(수련)을 해 나갑니다. 그래서 크게는 다음의 두 단계에 의한 세부적인 단계를 거쳐 구체적인 관상기도에 들어갈 수 있다고 봅니다. 



1.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

관상기도에 이르는 첫 번째 방법은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라고 합니다.  이 거룩한 독서는 그리스 교부 오리겐으로부터 시작하여 그레고리와 귀고 2세(1188년)를 통하면서 체계화되고 집대성되었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Lectio  Divina는 1132년부터 사용되었다가 그 후 1300년경부터 교회 전통에서 약화되기 시작하다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다시 햇빛을 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거룩한 독서의 과정은 네 단계로 나눕니다. 



(1) 읽기 단계 : Lectio Divian(거룩한 읽음) - 성경을 읽는 단계 

(2) 묵상 단계 : Meditation(묵상) - 읽은 성경을 묵상하는 단계 

(3) 기도 단계 : Oratio(기도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 묵상한 것을 놓고 기도하는 단계

(4) 관상 단계 : Contemplatio(관상 기도) - 관상기도 단계



그러나 거룩한 독서에서의 네 단계는 반드시 순차적인 순서에 따른 단계에 의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첫 번째의 읽기 단계 후 두 번째의 묵상 단계와 세 번째의 기도 단계의 과정은 반드시 그 순서대로 일어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순서가 뒤바꿔서 일어날 수도 있고, 동시에 함께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또 관상기도에 익숙해지면 첫 번째에서 네 번째의 단계를 모두 차례로 거쳐야만 관상이 이뤄지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으로 들어갔는데, 그 즉시 마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네 단계를 모두 다 거쳤는데도 아무런 관상이 일어나지 않는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관상기도가 중요시 하는 것은 관상이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2. 향심기도(Centering Prayer)

관상기도에 이르는 것으로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 거룩한 독서와 함께 향심기도 입니다. 향심기도는 바질 페닝턴(Basil Pennington)과와 토마스 키팅(Thomas Keating)이 가르친 기도라고 하는데 이 기도는 사람을 관상의 차원으로 이끈다고 가정한 기도 방법입니다. 이 향심기도는 ‘마음의 기도’를 의미합니다. 이 기도의 원천은 삼위일체이시고, 그 초점은 그리스도라고 보는 이 기도 방법은 거룩한 독서와는 다른 측면으로 처음부터 마음을 비우고 시작하는 관상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조건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마주보고 앉는 것이요, 또한 내안에 있는 신성한 내재로 움직여 가는 것으로, 그때 우리 안에 내재하는 성령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가슴 속으로 넣어 주시므로 시작되는 기도의 한 형태입니다. 이 기도는 단순하게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도달하려고 애쓰는 단순히 겸손한 방법으로 이 기도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 하나님과의 교재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향심기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또한 여기에 필요한 지침에 따르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향심기도의 지침이란 것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에 동의한다는 지향을 상징하는 거룩한 단어를 선택한다. 

(2) 편안한 자세로 앉아 눈을 감고 잠시 마음을 정리한 다음 하나님께서 내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것에 동의한다는 상징으로 거룩한 

     단어를 마음에 떠 올린다.

(3) 어떤 사고가 마음속에 들어온 것을 인식하게 되면, 아주 부드럽게 그 거룩한 단어로 돌아간다. 

(4) 기도시간이 끝나면 눈을 감고 약 2분간 침묵 속에 머문다.



관상기도에 이르기 위해서 이러한 단계를 생각하고 또한 거치기에 관상기도에서는 침묵을 중요시 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 안에서 자아를 철저히 무(無) 가 되게 하는 일체의 내, 외적 행위를 침묵(沈黙)이라고 하는데, 이 침묵은 사욕을 억제하고 분심 잡념을 물리치는 육신 내적침묵과, 오관을 통한 욕망의 구름을 침묵시키며 기거 동작을 차분히 수렴하는 외적침묵, 하나님께 자신의 이성과 의지를 완전히 순종 시키는 이성침묵과 의지침묵이 있다고 봅니다.



이 중에서 관상기도에서의 기도의 뿌리는 내적 침묵입니다. 박노열은 “기도의 뿌리는 내적 침묵이다. 사람들은 기도를 생각과 느낌을 말로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것은 기도 형태의 하나일 뿐이다. 에바그리우스(Evagrius)에 의하면 ‘기도란 생각을 벗어나는 것’이다. 이 정의에 의하면 기도 속에 생각들이 끼어든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관상기도는 사고의 공백이라기보다는 사고로부터 이탈이다. 그것은 절대 신비이신 하나님께 우리의 언어와 사고와 정서와 같은 심리적 상태를 넘어서 우리의 마음과 정신과 몸과 정서를, 즉 우리의 전 존재를 열어 드리는 것이다. 이때에 우리 의식(意識) 속에 있는 것을 거부하거나 억압하지 않는다. 우리는 의식 속에 있는 것을 그대로 단순히 받아들이고는 그것들을 노력함으로써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면서 그 너머로 가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관상기도가 이러한 것이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기도자가 침묵 속에서만 관상기도를 가져나가도록 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관상기도에서는 하루종일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람도 관상할 수가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하루종일 바쁘게 돌아다니기만 해도 관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향심기도에 충실하기만 하면 비록 몸은 움직일지라도 관상에 이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관상기도를 하는 사람이 누워있든, 앉아있든, 걷든, 침묵하든, 그러한 외부적인 행위는 부차적인 것이며, 기도자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서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그분 안에 있는 신성(神性)을 발견하여 그분과의 일치를 이루는 기도가 관상기도이기 때문에 활동 중에도 관상기도에 있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활동 중의 관상기도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미는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마 25:35)는 주님과의 관계성(주님과의 일치)에서 가져지는 활동을 말하는 것에 있어 보입니다. 



하여간, 카톨릭교회에서의 관상기도가 이러한 것이지만, 어느덧 이 관상기도는 개신교에서도 널리 알려지고 그래서 또한 많이 사용하고 있는 기도의 방법이 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관상기도를 말하고 또한 가르치며, 이 기도를 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신교에서 관상기도는 보다 더 세부적인 단계의 지침을 만들어 놓고 이것을 훈련시켜 여기에 숙련된 사람이 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한 인터넷 까페에 올려져 있는 관상기도를 하는 방법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관상가가 되는 길은 한 가지밖에 없다. 매일 정규적으로 참되고, 개인적이고, 관상적인 기도를 하기 위해서 시간과 장소를 확보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관상기도를 하지 않는다면, 어떤 개인도 어느 공동체도 관상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아무리 다른 종류의 기도를 많이 하고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이런 것들이 관상기도의 몫을 대신해 주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정말 관상가가 되기를 원한다면, 매일 관상기도를 실제로 해야만 한다. 



그런데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여기에 몇 가지 유용하고 실질적인 제안들이 있다. 기도 시간의 과정에는 우리가 통과하거나 머물러야 하는 몇 가지 단계들'이 있다. 현실적인 여건이나 개인의 필요에 따라, 어떤 사람들은 얼마 동안 어떤 한 단계에 머물 수 있다. 또 어떤 이는 단지 한 단계에만 자신을 국한시킬 수도 있다. 



시작할 때에, 처음 며칠 동안은 주님의 현존을 깨닫기를 추구하면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하루에 한 단계를 택하는 방법으로 여러 단계들을 통과할 수 있다. 그 다음에는 각자 자기의 필요에 따라 인도되어야 한다. 처음부터, "당신의 삶의 질"이라는 제목 하에 있는 이 글의 마지막 문단에서 말한 것을 항상 마음에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여기에 12단계가 있다. 



1-3단계들(긴장을 풀고 쉬기와 침묵, 믿음으로 그분의 현존을 자각하기, 열망하는 사랑)은 그분을 찾고, 그분께로 나아가기에 관한 것이다. 

4-7단계들(자기 봉헌, 수용, 마음으로부터 용서하기, 참회)은 마음과 정신의 정화에 관한 것이다. 마음과 정신은 그분을 향해 자유롭고 투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8-11단계들(믿음으로 청하기, 관상, 받기, 감사와 찬양)은 그분으로부터 받기와 그분을 사랑하기에 관한 것이다. 

12단계(전구, 즉 다른 이들을 위한 중재의 기도)는 맨 나중에 온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런 것들도 다 곁들여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다음의 것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 관상기도에서는 당신이 가장 깊이 개인적으로 열중해야 한다는 것, 당신은 당신의 가장 깊은 자아, 당신의 참자아로 열중하기를 배우게 되리라는 것, 하나님의 영은 언제고 당신이 원하실 때에 불어오신다는 것, 그리고 이 기도는 당신을 언제나 주님의 현존을 갈망하면서 길을 가는 성령의 순례자로 만들 것이라는 것, 그리고 당신은 이 제안들이 참으로 다만 제안일 뿐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따르면, 관상기도는 마치 소림사의 무예를 닦는 수도승들이 한 관문 한 관문을 통과하며 어떤 무예의 경지에 이르는 것과 같은 단계의 착각을 갖게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봄에서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룬다는 기도를 한다는 것이 과연 이렇게 자신을 이런 방식에 묶어 두고서 수련(훈련)의 단계를 거치듯이 하는 것이겠습니까? 

 



Ⅱ. 관상기도는 올바른 것인가? 이것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살펴 본 관상기도는 과연 많은 목사와 교회들이 하고 있으며, 또한 하도록 말하고 가르칠 만한 올바른 것인지를 말씀드립니다. 나는 왜 관상기도를 하고자 하게 되었는지 관상기도란 용어를 갖게 된 그 자체가 올바르고 그릇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기도’, ‘하나님과의 일치’를 관상기도라는 용어로 말하며 기도를 가져왔는데 이것을 가지고 시시비비를 가리고자 할 마음은 없습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나는 다만 관상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관상기도를 하는 행태에 대해서 올바른 것인지를 보지 못하며, 따라서 올바르지 못하다고 답변을 드립니다. 



왜냐하면 말입니다. 우선 관상기도에 의해서 가져나가는 기도가 올바르지 못합니다. 관상기도를 하는 사람은 그 유래를 예수님의 기도에서부터 찾았으며, 또한 초대 교부들의 기도에서 관상기도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에서 관상기도를 보고 있는 그들은 기도를 관상기도라고 하는 ‘기도의 형태’로 만들고 이것을 또한 하도록 하게 하기 위해서 ‘기도의 방법화’ 시켰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서 관상기도에 이르기 위해서는 자기들이 만들어 낸 단계에 의해서 지극히 작의적인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그렇게 형태론적으로 가져나가고 방법론적으로 행하고 작의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기도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지신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진 구원론적인 본질적 이해이며 그 믿음이며 그 찬양이며 그 감사이며 그 영광에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도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구원에 믿음이 있으면서 이에 대한 신앙고백에 있는 것이며, 세상 끝 날까지 이루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있게 될 성령님의 인도를 따르며 그분의 다스림을 받는 은혜의 구함 속에 있는 것입니다.         



카톨릭교회는 관상기도를 구송기도와 묵상기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발전한 기도로 보고 있으며, 개신교회에서도 관상기도를 도입하여서 여기에 나름대로의 독특성을 띤 기도로 만들어 신자들에게 하도록 권하고 있습니다만, 온갖 어떤 형태와 어떤 방법으로 기도를 가져나가게 하든지 간에 이런 식의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 그리고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오해하고 있는 것이며 또한 심히 비뚤어지게 왜곡시킨 기도로 변형시키고 있는 것으로서 단지 종교생활로서의 기도로 ‘전통화’시켜 남게 할 뿐입니다. 그래서 카톨리교회는 관상기도를 기독교의 전통 있는 기도로 가져나가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개신교회는 이용하여서 여기에 신자를 훈련화 하여서 교회를 부흥시키는 수단으로 삼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는 개신교회가 관상기도를 하게 하여서 신자들에게 하나님을 바라보는 하나님과의 일치를 갖게 한다는 것이 결국은 자신이 어떤 행위에 잘못하고 죄를 지었는지를 알고 이를 회개하게 하여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 헌신하게 한다며 결국은 신자를 헌신제물이 되는 희생양으로 삼고 일군화 하는 것에 그 목적을 두고 있는 것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한편, 관상기도는 기도자가 하나님을 찾는 기도를 하는 것에 기도의 의미와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찾아와 기도자의 열린 마음에 들어오시도록 하여서 그 들어오신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그분 안에 있는 신성을 발견하여서 하나님과 기도자의 마음이 일치를 이루는 것에 기도의 의미와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관상기도를  하나님을 바라보는 기도요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기도 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얼마나 잘못된 인식인지요. 



우선 말입니다. 관상기도를 한다는 것은 비성경적이요 비신학적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의 관점에서나 신학의 관점에서 모두 틀린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이죠. 기도는 기도자가 하나님을 찾아가거나, 또는 하나님이 기도자를 찾아오거나 해서 되어지는 것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알고 있어서 그러한 기도를 하고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그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인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한 몸(하나된 몸)’인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인은 말입니다. 그리스도와 떠나 있는 적이 없으며, 그래서 그리스도와 떨어져 있는 적이 결코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며, 교회는 그의 머리로 있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와 그를 믿는 그리스도인은 항시 ‘일체’이며, 따라서 ‘일치’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와 교회가 어찌 관상기도를 통하여 ‘일치’를 이루고자 해야만 하는 그런 떨어져 있는 것으로 있을 수 있습니까? 무슨 말인가 하면,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주이신 그리스도를 찾아가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주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에게 찾아와 그가 하는 기도를 받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그와 일치를 이루는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관상기도 라고 하는 기도의 형태나 기도의 방법을 쓸 필요가 없으며, 이런 기도를 해 나가기 위하여 이런 저런 기도의 단계를 만들고 여기에 따르는 일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는 말입니다.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께로부터 받아 품으신 뜻을 우리에게 어떻게 다 이루었는지를 알게 해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기도를 한다는 것은 그 주님의 뜻을 알고 주님께 온전히 자신을 의존하는 것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새벽이든, 아침이든, 낮이든, 저녁이든, 한 밤중이든, 주님과 나와의 관계성을 말해주는 것이 기도입니다. 누워서 하든, 앉아서 하든, 무릎을 끓고 하든, 서서 하든, 걸으면서 하든, 그리고 말로서 하든, 이 말을 기도문의 암송으로 하든 노래로 하든, 아니면 묵상으로 있든지 간에 이것에 기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교회)의 주가 되신 것에, 그리고 우리(교회)는 그분을 믿음의 주로 섬겨 따르는 것에 기도가 있는 것입니다. 



개신교회가 교회나 또는 어떤 집회에서 기도하는 법으로 관상기도법을 말하며 이것을 가르치고, 이것을 할 것을 권한다면, 왜 그렇게 하는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왜 성도들을 관상기도라는 명목으로 기도하도록 유도하며 유인하는 일을 하는지를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단언하건대, 성도들에게 올바른 기도를 가르치며 이 기도를 하게 하기 위해서는 아닙니다. 기도를 관상기도로 만들어서 하게 하는 것 자체가 비성경적이요 비신학적인 것인데요. 그런데 관상기도를 내세워서 기도를 훈련시키며 숙련된 기도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려고 한다면, 이것을 내세워서 사실은 다른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이것으로 관심을 갖게 하여서 끌어 모으는데 아주 좋은 적절한 수단이 되기 때문이요 또한 이것으로 사람을 묶어 놓음으로써 교회의 부흥을 꾀하는 기회로 삼아 목회에 성공해보려는 탐심이 발동하는 것으로서 입니다. 만일에 이것이 아니라면, 이것 외에 또 다른 선하지 못한 저의가 깔려 있을 것입니다.





님이여, 



이상으로 관상기도에 대한 답글을 마칩니다.  질문자의 질문에 대한 답글에 임하는 자세는 가능하면 질문자가 궁금해 하여 질문하는 것인 만큼 그 궁금함이 풀려질 수 있도록 자세한 설명을 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까 대개는 답글이 길어지는 형식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답글 형식이 반드시 긍정적이지만은 아닐 것이라 여깁니다. 읽는 분들에게 지루함을 줄 수도 있고, 그렇다보니까 읽기가 힘들 수도 있으며, 때로는 읽기를 포기하는 현상도 생길 수 있으니깐요.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설명을 가능하면 자세히 하고자 해서 생각보다 글을 길게 쓰게 되더라도 질문자가 알고자 원하는 답변을 드렸는가에 있습니다. 본 답글에서는 관상기도를 영성신학, 헨리나우웬과의 연관에서는 답변을 해드리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관상기도에 한해서 이것이 어떤 것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충분한 설명과 함께 답변의 본질인 이것이 올바른 기도인지, 그 문제점은 무엇인지에 초점을 갖고 집중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비록 님이 알고자 하는 것의 모든 답변을 드리지는 못했을지라도, 이 답글로서 작금에 개신교회에서 유행하듯이 행해지고 있는 관상기도에 대한 님이 알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설명이 되어서 이해를 도왔으면 하는 바람을 갖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기회가 되어서 님에게, 그리고 이 답글을 읽는 회원들에게도 무엇보다도 기도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게 하여서 혹, 있을 수도 있는 그릇된 기도를 잘못 좇을 수 있는 위험성으로부터 보호되었으면 합니다.    



주 안에서 평안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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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elijah | 작성시간 08.09.26 목사님 자세한 답변에 너무 감사드립니다.. 이해가 잘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축복합니다^^
  • 작성자루디아 | 작성시간 08.10.01 목사님..저도 잘 배웠습니다.
  • 작성자이철민 | 작성시간 09.01.14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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