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털쟁이님
주 안에서 잘 지내고 계신지요.
님은 질문하는 것에서 한 환자의 일을 이야기 했습니다. 님께서 5년전 진료를 맡았던 환자가, 그 환자는 수개월간 치료하지 못한 분이었는데 지금 나타나서 신유로 치유 받았다며 기독교로 개종한 이야기를 듣고 그에 대한 의문이 생겼습니다.
더욱이 님은 그 환자였던 분이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에는 하루 3시간씩 기도하는데 앞으로는 그 시간을 늘려서 하루 7시간정도 기도하실 계획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에 대한 자신을 놓고는 부끄럽게 생각하기 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님은 신유에 대해 갖게 된 자신의 생각을 말씀해 주시면서 이에 관하여 알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다음과 같이 답변을 드립니다.
신유란 말은 한문으로는 ‘神癒’ 입니다. 여기에서 ‘유’(癒)는 ‘나을 유’를 쓰고 있어서 그 지닌 뜻이 ‘낫는다’인데, ‘神’, 곧 하나님께서 낫게 하심으로 있는 일이기 때문에 ‘낫게 한다(해주신다)’로 이해하게 되어서 한자로 신유(神癒)의 뜻은 하나님께서 치료해서 병을 낫게 해주신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서 신유를 ‘병 고침을 받는다’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 신유라는 단어는 우리가 사용하는 일반적인 언어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한글 사전이나 성경 대백과 사전에는 이 말이 없습니다. 이 말은 주로 기독교에서 사용되고 있는 용어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 용어의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이적으로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는 등이 나오고 있는데, 이것을 가지고 기록상으로는 1887년에 길보른 선교사가 성결지침이라는 곳에서 처음 사용해서 말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이 지금은 신자들에게서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에게서는 신유란 말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주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신유를 은사로 다룹니다.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서의 이적 행하심이 무엇을 있는 일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이적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친 사건이 자주 나옵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이적을 왜 행하셨는가?에 관심이 가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 이적을 행하실 때는 단지 귀신을 쫓아내서 그 사람을 고쳐줌으로 그가 몸이 건강하고 온전하게 되어서 행복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에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관심을 갖고 유의해서 보게 되면 말이죠. 이 이적을 행하심에서는 항상 예수께서 무엇인가를 알게 해주시고자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가령, 마가복음 2장 1-10절에 나오는 한 중풍병자를 낫게 한 이적을 볼까요? 예수님은 침상에 매여 사람들에 의해서 많은 사람을 뚫고 들려 온 중풍병자를 보시고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환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병을 고치시면서 그의 ‘죄’ 문제를 거론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이 중풍병자와 함께 그를 데리고 온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와 관련하여 다루시고 있습니다. 여기서 ‘저희의 믿음을 보셨다’는 것은 이들이 어떤 자들로 예수님 앞에 있게 되었는가를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요한복음 6장 44절에서 보게 되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라고 하신 하나님의 이끄심에 의해서 지금 예수님 앞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 예수께서 갈릴리 지역을 다니시면서 하신 전도(傳道)인 천국 복음을 전해 들으면서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심과 함께 귀신을 쫓아내시며 병을 고치시는 권세를 행하시는 것에서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행하심에 의한 하나님의 자비의 베푸심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믿음이라는 것이 예수님을 온전히 알고 있는 것은 아닌, 그러니까 희미하게나마 어렴풋이 인식하고 있는 정도에 불과할지라도 예수님에게서 귀신도 복종하며 병도 복종하는 하나님의 권세를 보고 그 권세에 복종하는 것으로서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단지 병만 고치면 된다는 생각에서 예수님을 찾아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와 같은 죄인 된 자에게도 지금까지의 가르치심과 함께 이적 행하심에서 나타내 주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자비가 베풀어지기를 간절히 바람으로 예수님을 찾아 나와 그분이 자신을 만나 주시고 돌아보아 주시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만일에 말입니다. 병을 고침 받고자 하는 자나 병을 고치신 예수님이나 모두가 다 병 그 자체에만 목적이 있었다면,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는 일이나 예수님이 그들을 만나 주시는 일이나 병을 고치는 것에 있었다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을 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네 병이 나았으니 툴툴 털고 일어나 집에 가세요. 그리고 건강히 잘 사세요” 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중풍병자가 예수님 앞에 나오게 하여서 예수님이 그와 함께 하셔서 그의 병을 고치시는 자비를 베푸신 것은 이 일을 통해서 당시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신지, 이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어떤 일인지를 알게 하여 주시는 ‘예수님 자기 계시’ 사건으로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 사하시는 권세’가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당시에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이적을 행하시는 사건을 일으키신 것은 당시 유대종교 지도자들이 갖는 생각이 “죄 사하시는 권세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다”는 것인데, 이 죄를 사함 받으려면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잘 순종하여서 지켜야 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율법을 가지고 만들어 내는 자신들의 계명을 잘 따라서 지켜야만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그들에게서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의 모양이 되셔서 인간 세상에 들어오셔서 저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여서 되어진다는 것에 대하여서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또한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것을 통해서 예수께서 그들이 “하나님만이 죄 사하시는 권세가 있다”고 한 그 권세가 있으신 것을 드러내서 보이신 것입니다. 그것은 말입니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쉽겠느냐?“에서 분명해졌습니다. 왜냐하면 말입니다. 유대종교 지도자에게서는 이 둘 다 어려운 문제입니다. 죄를 사하시는 권세뿐만 아니라 병을 고치시는 권세도 하나님의 권세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참고. 막 1:27). 결국 병을 고치시는 것에서도, 죄를 사하시는 것에서도 예수님이 행하신 권세는 하나님의 권세임을 알게 해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막 2:10). 그럼으로써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는 분명해집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가 아니면 아무도 그 권세를 행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이적을 행하시는 것에서 자신이 죄 사하시는 권세가 있음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께서 왜 이처럼 병을 고치시는 이적을 행하시는 것에서 자신이 죄 사하시는 권세가 있음을 나타내시는 일을 하셨는가 하면, 사람이 병듦의 상태에 있는 것과 죄가 있음과는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죄의 비참한 상태에 있는 현상이 병이라고 하는 것이요 또한 온갖 고통의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병이라고 하는 것은 죄 때문에 겪게 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서 인간은 죽음의 해를 겪게 되며 그로 인해서 인간의 육체는 후패하게 됩니다. 병이란 그 한 현상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말이죠.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이적을 행하시는 것에서 인간에게 있는 병의 본질적인 문제인 죄를 해결하는 일을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것에서 그의 죄 사하시는 일을 하신 것은 이 죄 사함이 처리되지 않고 단지 병만 고친 상태에서는 인간이 안고 있는 죄로 인한 불행의 근원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가령 수백년 수령의 나무인 ‘죄 나무’가 있다고 합시다. 이 죄 나무에는 갖가지 죄의 열매인 병을 비롯해서 온갖 비참한 불행의 열매가 맺히고 떨어지고 또 다시 맺히고 합니다. 그런데 이 죄 나무에 주사를 놓아서 죄의 열매가 맺히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했다고 해서 죄의 열매가 해결을 본 것은 아닙니다. 주사 약의효과가 떨어지면 다시 죄의 열매가 맺힙니다. 죄의 열매가 맺히지 않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나무의 근원인 뿌리까지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 된 인간은 영원히 죽음의 해를 겪지 않으면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죄인 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그것은 그의 죄를 사하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선언은 그 말씀이 지닌 권세에 의해서 그대로 되어집니다. 이 선언에 의해서 있게 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 선언을 받는 인간은 자신의 죄를 알게 되고 그 죄를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드러나게 하시는 우리의 죄를 주 앞에 고백하게 됩니다. 즉 자신이 죄인 됨을 시인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주로 영접하지 않고 있음으로서 죄 밖에 낼 수 없었던 자신의 죄인된 상태를 인식하고 예수님의 자비를 바라보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주로 받아들이지 않는 그 죄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그저 죄에 있게 되고 그 죄값인 죽음의 형벌을 하나님의 저주의 심판으로 받게 됩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예수님은 말이죠.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이적을 통해서 예수님이 죄를 사하시는 권세가 있으신, 곧 하나님의 권세가 아니면 결코 이 이적을 행할 수 없는 권세 있는 분이심을 나타내 행하심으로써 당시의 예수님을 주로 영접하여 그 믿음에 있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유대종교 지도자들과 그의 말을 좇는 유대인들의 악한 죄를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따라서 말입니다. 비록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이적을 행하신 하나를 예로 들어 설명하였습니다만, 예수께서 이처럼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고 한, 오늘날 사람들이 말하는 ‘神癒’(신유) 그러니까 참된 신이신 하나님께서 병을 고치시는 이적을 행하신 것은 예수님의 의료 활동을 말씀해 주시는 것으로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적 행하심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그 가르침을 주시는 것과 함께 천국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 보게 하시는 것에서 입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께서 죄 사하시는 구원을 베푸시는 일을 하심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하나님께서 그들의 귀로 듣고 눈으로 보게 해 주시는 데도 예수님을 거부하는 그들의 악한 마음의 강팎함을 그들의 마음의 감추임으로부터 끌어내 낱낱이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병 고치심은 예수님의 자기 계시적 사건이요 또한 우리 인간의 실체를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인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자신을 복종해 나가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지닌 능력은 예수님의 이 죽음과 부활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온 세상에 구원의 도, 곧 구원의 복음으로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그러한 것을 교회는 소위 ‘신유 은사’란 명목으로 무당 장사를 해왔습니다. 그들이 말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을 고쳤으며,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 고침을 받는 기적을 경험하였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예수님의 능력이 아닙니다. 님은 다음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 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예수님의 이름으로도 얼마든지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함으로써 불법을 행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은 그 불법을 행한 일로 인해서 주님께로부터 떠날 것이 말씀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병 고치거나 예수의 이름으로 병 고침을 받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곧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며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그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그들이 하고 있는 짓인 병을 고침 받는 경험을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자신들이 한 일이나 그 경험을 가지고서 하고 있는 것은 예수의 이름으로 여전히 그 짓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서 예수님의 이름이 지닌 하나님의 구원이란 병 고침이나 귀신 쫓아냄에 있습니다. 그러한 그들의 행위는 결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인 하나님이 보내신 자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거부하는 일을 하는 것이요 그럼으로써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입니다. 기독교란 종교 외에도 다른 종교의 모두에 다 있습니다. 무속 신앙에도 있구요. 또는 반드시 살겠다는 인간의 굳은 의지로 인해서 다 죽을 병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약사, 의사 다 달려들어도 해결하지 못한 병이 고쳐지는 그러나 그러한 신비한 능력을 경험한 것에 의해서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는 기독교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믿는 것에서 예수님을 거부하는 악한 죄를 발휘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예수님의 이름을 ‘다른 복음의 예수’로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의 영’이 아닌 ‘다른 예수의 영’을 따르는 것입니다(참고. 갈 1:6-10). 이들은 자신들이 행하거나 겪은 일을 ‘신유 은사’라고 말합니다만, 그것은 그야말로 거짓된 신에 의한 은사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악한 자들은 그들의 그 악함으로 그들의 아비인 ‘마귀’(사단)과 더불어 멸망케 하십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은 그의 전파하심과 가르치심에 있었던 천국 복음으로서 입니다. 예수님이 전하신 천국 복음, 곧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그 나라에 들어와 있는 사람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복된 선언을 그의 죄가 발생하는 모든 죄에서 날마다 듣습니다. 우리에게 죄가 발생하여 그때마다 그 죄가 이끄는 대로 정죄와 심판을 받게 됨으로 그 비참함에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때마다 주님께로부터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를 듣습니다. 이 죄 사함을 베푸시는 자비로 인해서 인간은 자신들이 겪는 병이나 온갖 연약한 상태로 말미암아 그 육체가 후패함에도 결국 그것이 그의 몸을 무너뜨리게 하는 정복을 당하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세를 보게 됩니다. 죄를 이기신 하나님의 권세가 또한 그에게서 죄로 인하여 있게 된 병이 전혀 쓸데없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인줄 아십니까? 죄 없다 하신 그를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게 하시는 것을 통해서 하늘로부터 전혀 새로운 몸이 그에게 주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진정 그리스도인은 말이죠.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음을 당하게 하시고 또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게 하신 하나님의 권세를 통해서 죄에서 의로, 죽음에서 영생하는 생명으로 옮김의 복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죄 사함과 함께 인간이 겪는 병을 허무케 하신 하나님의 권세를 힘입고 그 믿음으로 있는 자인데 여전히 악한 죄의 불행한 상태에서의 병 문제에 매달려 오직 이것을 위한 것으로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다니요!. 그래서 자신의 죄에 관해서가 아니라 한갓 생명 없는 육체에만 매달리다니요!. 그럼에도 사람들이 그러한 것은 그가 믿는 예수의 이름이 참 복음이 아닌 거짓 복음이요 바른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으로서 그들이 믿는 예수의 영은 참 예수의 영이 아닌 다른 예수의 영이요 거짓 예수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들이 한 행위로 말미암아, 그래서 예수님을 거부한 행위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종종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병을 고쳐 주시는 이적을 전혀 행하시지 않는다는 말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예수님을 굳게 의지하며 기도하므로 나은 것을 모두 잘못되고 거짓된 것으로 돌릴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참으로 얼마나 어리석은 질문인지요? 그리스도인은 그가 믿는 그리스도 안에서 온갖 일을 겪으며 삽니다. 건강하게 활발히 움직이며 살고, 또한 건강을 잃고 병약하게 살고, 그러다가도 다시 기력을 찾고 온전한 몸이 되어서 또 건강하게 활발히 움직이며 삽니다. 반면에 한번 잃은 건강을 다시는 온전히 찾지 못한 상태에서 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의 몸이 어떤 상태를 겪으며 살든지 간에 그는 주님의 은혜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설사 병약한 상태에서 고통 중에 힘들게 살아서 여기서 벗어날 수만 있게 해달라는 기도를 수없이 가지나 전혀 그 응답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절망의 상태에 있어도 그에게서의 병은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여호와의 종이 우리의 온갖 질병을 대신 하여 앓고 우리가 당해야 할 고통을 대신 당함으로써 우리가 나음을 입고 우리 몸이 성하게 되었다”(사 53:4-5)의 성취 속에 있습니다. 그러니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서는 건강하고 병약하고 한 그가 어떤 상태의 몸에 있든지 간에 그는 그의 몸이 겪게 될 것인 구속에 의한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에 있습니다. 그래서 말이죠. 그리스도인은 지금 자신이 어떤 처지에서 어떤 상태에 있든지 간에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릅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 부딪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며 자신이 주님의 인도 속에 있는 그 처지대로 주님을 따르며 삽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처지가 어떠하든지 간에 자신이 있는 그 상태 그 모습 그대로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자인 것입니다(참고. 고전 7:17-24). 그런 그는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자로서 자신의 몸의 상태에 대하여 “주님의 은혜가 내게 족하다”는 것을 알고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자신의 몸에 있는 일에 감사하며 그분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그런데 병에서의 고침을 위해 광신적으로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비성경적이요 또한 비신앙적인지요. 만일에 말입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그분의 전적인 은혜로 살아가는 것을 믿는 것으로서의 믿음에 있다면, 예수께서 병에서 고쳐주실 것에 그가 하는 기도가 전부라면 이는 얼마나 불신앙인지요. 그를 병에서 고쳐주시는 능력을 행하시는 권세가 있으신 주께서 또한 그의 몸을 건강에서 끌어내려 병약한 상태에 있게 하시는 능력을 행하실 권세가 있으신 것을 모른단 말입니까? 그래서 하루아침에 건강을 잃고 오래 동안 병으로 고생하며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 주께서 그에게 주시는 은혜란 것을 모른단 말입니까? 그렇게 주의 은혜 속에 살고 있는데 그 은혜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는 것에 주님의 능력을 구하는 기도를 한다고 하면 그것은 주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불신앙이지 신앙이겠습니까? 우리는 말입니다. 건강함(부요)으로 자고하지 않도록 해야 하며, 또한 병약함(가난)으로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은혜에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왜냐하면, 인간의 몸은 건강함으로 자고하고 병약함으로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몸을 주의 권능이 함께 하여 오직 주님을 온전히 시인하며 그분을 의지해 나가게 하시는 힘을 입고 있는 것을 우리가 주를 부인할 수 있는 순간순간에서 경험한다면 그는 참으로 주님의 은혜의 크심을 입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것을 예수님이 병 고치시는 일을 하시는 분으로 몰고 갈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 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 일을 하시는 분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이 일을 행하시는 것으로 자신의 권세를 나타내시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그것이 병 낫기를 위한 것이며 이 능력을 입게 해달라는 것이라면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한편, 님이 소개한 진료했던 환자의 개종과 그로 인하여 그가 하고 있는 기도를 보면 참으로 정상이 아닙니다. 우선 그의 개종이 5년간 치료하여도 낫지 않았었는데 모교회에서 신유를 경험하고 개종하였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지도 않았는데 신유로 병 고치는 일을 한다는 말을 듣고서 교회에 가 보게 되어 병 고침을 받았다는 것이요 그래서 그 경험을 인하여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는 것이니 그의 병 고침은 믿음과 상관없이 있게 된 것이었으며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개종자가 되었다는 것이니 정작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복음과는 관계없는 개종입니다. 그런 그는 하루에 3시간씩 기도하는 생활을 살아왔고 이제는 그 시간을 늘려서 하루에 7시간씩 기도할 것이라고 하니 이것이 정상인에게서 있을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무슨 수도승으로서 수련생활로서 기도하는 것도 아니구요. 하루에 7시간씩 기도한다고 하면 그는 도대체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입니까? 다른 사람이 사회생활을 하는 시간의 대부분을 그는 기도로 보낸다고 하는 것이니 하는 말입니다. 아니면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렇게 기도로 보낸다고 하면 필시 새벽과 저녁 시간을 모두 기도하는 것으로 지낸다는 것이니 가정생활을 하기는 하는 것입니까? 이러한 억지와 무리는 기도가 무엇인지 그 본질을 알지 못하여서 주님과의 관계성에서 가져나가지를 않고 자신을 기도하는 시간에 묶어 두고서 단지 수단과 방법론적으로만 가져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도는 성경적인 기도가 아니며, 여기서는 이방인의 기도에서 보게 되는 중언부언하는 기도나 유대인에게서 보게 되는 자기 의를 드러내는 기도 밖에는 볼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기도 생활을 부러워하거나 이들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거나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작 부러워하고 부끄러워한다면 늘상 주님의 기도에 미치지 못하는 데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부끄러움을 씻어주실 주님의 의를 온전히 의지해 나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끝으로, 님은 신유에 대한 개혁신앙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였는데 이것에 대한 설명은 다음의 글을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글에서 개혁신앙의 입장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며, 그 글을 읽음으로써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소개하고자 하는 글은 전에 한 분이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이적)에 대하여 이와 관련한 것들과의 연계에서 질문한 적이 있었으며, 이에 대하여 답글을 써서 올린 것이 있었습니다. ‘질문과 답’에서 104번의 답글인 ‘기적에 대하여의 답글입니다’가 그것입니다. 이 답글을 보시면 지금 님의 질문에 대하여 답한 글인 이 글과 함께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상으로 답글을 맺겠습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님과 함께 하심으로 님이 복음의 진리에 견고히 잘 서나가실 것을 주께 구합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구주가 되심을 전해 나가시길 바랍니다. 바른 전도란 사도들이 주께로부터 받아 전한 복음을 우리가 그대로 받은 자로서 우리 또한 그 복음을 순전함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이런 저런 것으로 말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킨다면 그것은 자신도 속고 있는 것이며 또한 다른 사람도 속게 만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갈 1:7-9). 그러니 말입니다. 주께로부터 우리의 순결함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주신 복음과는 전혀 다른 것을 말하는 혼잡함으로부터 보호하여 지켜달라고 말입니다.
주 안에서 평안을 빕니다.
주 안에서 잘 지내고 계신지요.
님은 질문하는 것에서 한 환자의 일을 이야기 했습니다. 님께서 5년전 진료를 맡았던 환자가, 그 환자는 수개월간 치료하지 못한 분이었는데 지금 나타나서 신유로 치유 받았다며 기독교로 개종한 이야기를 듣고 그에 대한 의문이 생겼습니다.
더욱이 님은 그 환자였던 분이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에는 하루 3시간씩 기도하는데 앞으로는 그 시간을 늘려서 하루 7시간정도 기도하실 계획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에 대한 자신을 놓고는 부끄럽게 생각하기 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님은 신유에 대해 갖게 된 자신의 생각을 말씀해 주시면서 이에 관하여 알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다음과 같이 답변을 드립니다.
신유란 말은 한문으로는 ‘神癒’ 입니다. 여기에서 ‘유’(癒)는 ‘나을 유’를 쓰고 있어서 그 지닌 뜻이 ‘낫는다’인데, ‘神’, 곧 하나님께서 낫게 하심으로 있는 일이기 때문에 ‘낫게 한다(해주신다)’로 이해하게 되어서 한자로 신유(神癒)의 뜻은 하나님께서 치료해서 병을 낫게 해주신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서 신유를 ‘병 고침을 받는다’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 신유라는 단어는 우리가 사용하는 일반적인 언어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한글 사전이나 성경 대백과 사전에는 이 말이 없습니다. 이 말은 주로 기독교에서 사용되고 있는 용어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 용어의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이적으로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는 등이 나오고 있는데, 이것을 가지고 기록상으로는 1887년에 길보른 선교사가 성결지침이라는 곳에서 처음 사용해서 말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이 지금은 신자들에게서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에게서는 신유란 말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주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신유를 은사로 다룹니다.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서의 이적 행하심이 무엇을 있는 일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이적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친 사건이 자주 나옵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이적을 왜 행하셨는가?에 관심이 가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 이적을 행하실 때는 단지 귀신을 쫓아내서 그 사람을 고쳐줌으로 그가 몸이 건강하고 온전하게 되어서 행복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에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관심을 갖고 유의해서 보게 되면 말이죠. 이 이적을 행하심에서는 항상 예수께서 무엇인가를 알게 해주시고자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가령, 마가복음 2장 1-10절에 나오는 한 중풍병자를 낫게 한 이적을 볼까요? 예수님은 침상에 매여 사람들에 의해서 많은 사람을 뚫고 들려 온 중풍병자를 보시고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환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병을 고치시면서 그의 ‘죄’ 문제를 거론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이 중풍병자와 함께 그를 데리고 온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와 관련하여 다루시고 있습니다. 여기서 ‘저희의 믿음을 보셨다’는 것은 이들이 어떤 자들로 예수님 앞에 있게 되었는가를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요한복음 6장 44절에서 보게 되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라고 하신 하나님의 이끄심에 의해서 지금 예수님 앞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 예수께서 갈릴리 지역을 다니시면서 하신 전도(傳道)인 천국 복음을 전해 들으면서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심과 함께 귀신을 쫓아내시며 병을 고치시는 권세를 행하시는 것에서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행하심에 의한 하나님의 자비의 베푸심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믿음이라는 것이 예수님을 온전히 알고 있는 것은 아닌, 그러니까 희미하게나마 어렴풋이 인식하고 있는 정도에 불과할지라도 예수님에게서 귀신도 복종하며 병도 복종하는 하나님의 권세를 보고 그 권세에 복종하는 것으로서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단지 병만 고치면 된다는 생각에서 예수님을 찾아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와 같은 죄인 된 자에게도 지금까지의 가르치심과 함께 이적 행하심에서 나타내 주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자비가 베풀어지기를 간절히 바람으로 예수님을 찾아 나와 그분이 자신을 만나 주시고 돌아보아 주시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만일에 말입니다. 병을 고침 받고자 하는 자나 병을 고치신 예수님이나 모두가 다 병 그 자체에만 목적이 있었다면,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는 일이나 예수님이 그들을 만나 주시는 일이나 병을 고치는 것에 있었다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을 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네 병이 나았으니 툴툴 털고 일어나 집에 가세요. 그리고 건강히 잘 사세요” 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중풍병자가 예수님 앞에 나오게 하여서 예수님이 그와 함께 하셔서 그의 병을 고치시는 자비를 베푸신 것은 이 일을 통해서 당시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신지, 이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어떤 일인지를 알게 하여 주시는 ‘예수님 자기 계시’ 사건으로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 사하시는 권세’가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당시에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이적을 행하시는 사건을 일으키신 것은 당시 유대종교 지도자들이 갖는 생각이 “죄 사하시는 권세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다”는 것인데, 이 죄를 사함 받으려면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잘 순종하여서 지켜야 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율법을 가지고 만들어 내는 자신들의 계명을 잘 따라서 지켜야만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그들에게서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의 모양이 되셔서 인간 세상에 들어오셔서 저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여서 되어진다는 것에 대하여서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또한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것을 통해서 예수께서 그들이 “하나님만이 죄 사하시는 권세가 있다”고 한 그 권세가 있으신 것을 드러내서 보이신 것입니다. 그것은 말입니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쉽겠느냐?“에서 분명해졌습니다. 왜냐하면 말입니다. 유대종교 지도자에게서는 이 둘 다 어려운 문제입니다. 죄를 사하시는 권세뿐만 아니라 병을 고치시는 권세도 하나님의 권세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참고. 막 1:27). 결국 병을 고치시는 것에서도, 죄를 사하시는 것에서도 예수님이 행하신 권세는 하나님의 권세임을 알게 해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막 2:10). 그럼으로써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는 분명해집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가 아니면 아무도 그 권세를 행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이적을 행하시는 것에서 자신이 죄 사하시는 권세가 있음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께서 왜 이처럼 병을 고치시는 이적을 행하시는 것에서 자신이 죄 사하시는 권세가 있음을 나타내시는 일을 하셨는가 하면, 사람이 병듦의 상태에 있는 것과 죄가 있음과는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죄의 비참한 상태에 있는 현상이 병이라고 하는 것이요 또한 온갖 고통의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병이라고 하는 것은 죄 때문에 겪게 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서 인간은 죽음의 해를 겪게 되며 그로 인해서 인간의 육체는 후패하게 됩니다. 병이란 그 한 현상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말이죠.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이적을 행하시는 것에서 인간에게 있는 병의 본질적인 문제인 죄를 해결하는 일을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것에서 그의 죄 사하시는 일을 하신 것은 이 죄 사함이 처리되지 않고 단지 병만 고친 상태에서는 인간이 안고 있는 죄로 인한 불행의 근원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가령 수백년 수령의 나무인 ‘죄 나무’가 있다고 합시다. 이 죄 나무에는 갖가지 죄의 열매인 병을 비롯해서 온갖 비참한 불행의 열매가 맺히고 떨어지고 또 다시 맺히고 합니다. 그런데 이 죄 나무에 주사를 놓아서 죄의 열매가 맺히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했다고 해서 죄의 열매가 해결을 본 것은 아닙니다. 주사 약의효과가 떨어지면 다시 죄의 열매가 맺힙니다. 죄의 열매가 맺히지 않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나무의 근원인 뿌리까지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 된 인간은 영원히 죽음의 해를 겪지 않으면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죄인 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그것은 그의 죄를 사하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선언은 그 말씀이 지닌 권세에 의해서 그대로 되어집니다. 이 선언에 의해서 있게 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 선언을 받는 인간은 자신의 죄를 알게 되고 그 죄를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드러나게 하시는 우리의 죄를 주 앞에 고백하게 됩니다. 즉 자신이 죄인 됨을 시인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주로 영접하지 않고 있음으로서 죄 밖에 낼 수 없었던 자신의 죄인된 상태를 인식하고 예수님의 자비를 바라보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주로 받아들이지 않는 그 죄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그저 죄에 있게 되고 그 죄값인 죽음의 형벌을 하나님의 저주의 심판으로 받게 됩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예수님은 말이죠.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이적을 통해서 예수님이 죄를 사하시는 권세가 있으신, 곧 하나님의 권세가 아니면 결코 이 이적을 행할 수 없는 권세 있는 분이심을 나타내 행하심으로써 당시의 예수님을 주로 영접하여 그 믿음에 있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유대종교 지도자들과 그의 말을 좇는 유대인들의 악한 죄를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따라서 말입니다. 비록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이적을 행하신 하나를 예로 들어 설명하였습니다만, 예수께서 이처럼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고 한, 오늘날 사람들이 말하는 ‘神癒’(신유) 그러니까 참된 신이신 하나님께서 병을 고치시는 이적을 행하신 것은 예수님의 의료 활동을 말씀해 주시는 것으로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적 행하심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그 가르침을 주시는 것과 함께 천국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 보게 하시는 것에서 입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께서 죄 사하시는 구원을 베푸시는 일을 하심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하나님께서 그들의 귀로 듣고 눈으로 보게 해 주시는 데도 예수님을 거부하는 그들의 악한 마음의 강팎함을 그들의 마음의 감추임으로부터 끌어내 낱낱이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병 고치심은 예수님의 자기 계시적 사건이요 또한 우리 인간의 실체를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인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자신을 복종해 나가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지닌 능력은 예수님의 이 죽음과 부활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온 세상에 구원의 도, 곧 구원의 복음으로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그러한 것을 교회는 소위 ‘신유 은사’란 명목으로 무당 장사를 해왔습니다. 그들이 말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을 고쳤으며,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 고침을 받는 기적을 경험하였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예수님의 능력이 아닙니다. 님은 다음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 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예수님의 이름으로도 얼마든지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함으로써 불법을 행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은 그 불법을 행한 일로 인해서 주님께로부터 떠날 것이 말씀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병 고치거나 예수의 이름으로 병 고침을 받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곧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며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그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그들이 하고 있는 짓인 병을 고침 받는 경험을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자신들이 한 일이나 그 경험을 가지고서 하고 있는 것은 예수의 이름으로 여전히 그 짓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서 예수님의 이름이 지닌 하나님의 구원이란 병 고침이나 귀신 쫓아냄에 있습니다. 그러한 그들의 행위는 결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인 하나님이 보내신 자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거부하는 일을 하는 것이요 그럼으로써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입니다. 기독교란 종교 외에도 다른 종교의 모두에 다 있습니다. 무속 신앙에도 있구요. 또는 반드시 살겠다는 인간의 굳은 의지로 인해서 다 죽을 병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약사, 의사 다 달려들어도 해결하지 못한 병이 고쳐지는 그러나 그러한 신비한 능력을 경험한 것에 의해서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는 기독교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믿는 것에서 예수님을 거부하는 악한 죄를 발휘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예수님의 이름을 ‘다른 복음의 예수’로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의 영’이 아닌 ‘다른 예수의 영’을 따르는 것입니다(참고. 갈 1:6-10). 이들은 자신들이 행하거나 겪은 일을 ‘신유 은사’라고 말합니다만, 그것은 그야말로 거짓된 신에 의한 은사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악한 자들은 그들의 그 악함으로 그들의 아비인 ‘마귀’(사단)과 더불어 멸망케 하십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은 그의 전파하심과 가르치심에 있었던 천국 복음으로서 입니다. 예수님이 전하신 천국 복음, 곧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그 나라에 들어와 있는 사람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복된 선언을 그의 죄가 발생하는 모든 죄에서 날마다 듣습니다. 우리에게 죄가 발생하여 그때마다 그 죄가 이끄는 대로 정죄와 심판을 받게 됨으로 그 비참함에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때마다 주님께로부터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를 듣습니다. 이 죄 사함을 베푸시는 자비로 인해서 인간은 자신들이 겪는 병이나 온갖 연약한 상태로 말미암아 그 육체가 후패함에도 결국 그것이 그의 몸을 무너뜨리게 하는 정복을 당하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세를 보게 됩니다. 죄를 이기신 하나님의 권세가 또한 그에게서 죄로 인하여 있게 된 병이 전혀 쓸데없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인줄 아십니까? 죄 없다 하신 그를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게 하시는 것을 통해서 하늘로부터 전혀 새로운 몸이 그에게 주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진정 그리스도인은 말이죠.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음을 당하게 하시고 또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게 하신 하나님의 권세를 통해서 죄에서 의로, 죽음에서 영생하는 생명으로 옮김의 복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죄 사함과 함께 인간이 겪는 병을 허무케 하신 하나님의 권세를 힘입고 그 믿음으로 있는 자인데 여전히 악한 죄의 불행한 상태에서의 병 문제에 매달려 오직 이것을 위한 것으로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다니요!. 그래서 자신의 죄에 관해서가 아니라 한갓 생명 없는 육체에만 매달리다니요!. 그럼에도 사람들이 그러한 것은 그가 믿는 예수의 이름이 참 복음이 아닌 거짓 복음이요 바른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으로서 그들이 믿는 예수의 영은 참 예수의 영이 아닌 다른 예수의 영이요 거짓 예수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들이 한 행위로 말미암아, 그래서 예수님을 거부한 행위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종종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병을 고쳐 주시는 이적을 전혀 행하시지 않는다는 말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예수님을 굳게 의지하며 기도하므로 나은 것을 모두 잘못되고 거짓된 것으로 돌릴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참으로 얼마나 어리석은 질문인지요? 그리스도인은 그가 믿는 그리스도 안에서 온갖 일을 겪으며 삽니다. 건강하게 활발히 움직이며 살고, 또한 건강을 잃고 병약하게 살고, 그러다가도 다시 기력을 찾고 온전한 몸이 되어서 또 건강하게 활발히 움직이며 삽니다. 반면에 한번 잃은 건강을 다시는 온전히 찾지 못한 상태에서 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의 몸이 어떤 상태를 겪으며 살든지 간에 그는 주님의 은혜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설사 병약한 상태에서 고통 중에 힘들게 살아서 여기서 벗어날 수만 있게 해달라는 기도를 수없이 가지나 전혀 그 응답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절망의 상태에 있어도 그에게서의 병은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여호와의 종이 우리의 온갖 질병을 대신 하여 앓고 우리가 당해야 할 고통을 대신 당함으로써 우리가 나음을 입고 우리 몸이 성하게 되었다”(사 53:4-5)의 성취 속에 있습니다. 그러니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서는 건강하고 병약하고 한 그가 어떤 상태의 몸에 있든지 간에 그는 그의 몸이 겪게 될 것인 구속에 의한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에 있습니다. 그래서 말이죠. 그리스도인은 지금 자신이 어떤 처지에서 어떤 상태에 있든지 간에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릅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 부딪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며 자신이 주님의 인도 속에 있는 그 처지대로 주님을 따르며 삽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처지가 어떠하든지 간에 자신이 있는 그 상태 그 모습 그대로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자인 것입니다(참고. 고전 7:17-24). 그런 그는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자로서 자신의 몸의 상태에 대하여 “주님의 은혜가 내게 족하다”는 것을 알고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자신의 몸에 있는 일에 감사하며 그분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그런데 병에서의 고침을 위해 광신적으로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비성경적이요 또한 비신앙적인지요. 만일에 말입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그분의 전적인 은혜로 살아가는 것을 믿는 것으로서의 믿음에 있다면, 예수께서 병에서 고쳐주실 것에 그가 하는 기도가 전부라면 이는 얼마나 불신앙인지요. 그를 병에서 고쳐주시는 능력을 행하시는 권세가 있으신 주께서 또한 그의 몸을 건강에서 끌어내려 병약한 상태에 있게 하시는 능력을 행하실 권세가 있으신 것을 모른단 말입니까? 그래서 하루아침에 건강을 잃고 오래 동안 병으로 고생하며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 주께서 그에게 주시는 은혜란 것을 모른단 말입니까? 그렇게 주의 은혜 속에 살고 있는데 그 은혜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는 것에 주님의 능력을 구하는 기도를 한다고 하면 그것은 주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불신앙이지 신앙이겠습니까? 우리는 말입니다. 건강함(부요)으로 자고하지 않도록 해야 하며, 또한 병약함(가난)으로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은혜에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왜냐하면, 인간의 몸은 건강함으로 자고하고 병약함으로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몸을 주의 권능이 함께 하여 오직 주님을 온전히 시인하며 그분을 의지해 나가게 하시는 힘을 입고 있는 것을 우리가 주를 부인할 수 있는 순간순간에서 경험한다면 그는 참으로 주님의 은혜의 크심을 입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것을 예수님이 병 고치시는 일을 하시는 분으로 몰고 갈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 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 일을 하시는 분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이 일을 행하시는 것으로 자신의 권세를 나타내시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그것이 병 낫기를 위한 것이며 이 능력을 입게 해달라는 것이라면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한편, 님이 소개한 진료했던 환자의 개종과 그로 인하여 그가 하고 있는 기도를 보면 참으로 정상이 아닙니다. 우선 그의 개종이 5년간 치료하여도 낫지 않았었는데 모교회에서 신유를 경험하고 개종하였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지도 않았는데 신유로 병 고치는 일을 한다는 말을 듣고서 교회에 가 보게 되어 병 고침을 받았다는 것이요 그래서 그 경험을 인하여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는 것이니 그의 병 고침은 믿음과 상관없이 있게 된 것이었으며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개종자가 되었다는 것이니 정작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복음과는 관계없는 개종입니다. 그런 그는 하루에 3시간씩 기도하는 생활을 살아왔고 이제는 그 시간을 늘려서 하루에 7시간씩 기도할 것이라고 하니 이것이 정상인에게서 있을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무슨 수도승으로서 수련생활로서 기도하는 것도 아니구요. 하루에 7시간씩 기도한다고 하면 그는 도대체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입니까? 다른 사람이 사회생활을 하는 시간의 대부분을 그는 기도로 보낸다고 하는 것이니 하는 말입니다. 아니면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렇게 기도로 보낸다고 하면 필시 새벽과 저녁 시간을 모두 기도하는 것으로 지낸다는 것이니 가정생활을 하기는 하는 것입니까? 이러한 억지와 무리는 기도가 무엇인지 그 본질을 알지 못하여서 주님과의 관계성에서 가져나가지를 않고 자신을 기도하는 시간에 묶어 두고서 단지 수단과 방법론적으로만 가져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도는 성경적인 기도가 아니며, 여기서는 이방인의 기도에서 보게 되는 중언부언하는 기도나 유대인에게서 보게 되는 자기 의를 드러내는 기도 밖에는 볼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기도 생활을 부러워하거나 이들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거나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작 부러워하고 부끄러워한다면 늘상 주님의 기도에 미치지 못하는 데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부끄러움을 씻어주실 주님의 의를 온전히 의지해 나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끝으로, 님은 신유에 대한 개혁신앙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였는데 이것에 대한 설명은 다음의 글을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글에서 개혁신앙의 입장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며, 그 글을 읽음으로써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소개하고자 하는 글은 전에 한 분이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이적)에 대하여 이와 관련한 것들과의 연계에서 질문한 적이 있었으며, 이에 대하여 답글을 써서 올린 것이 있었습니다. ‘질문과 답’에서 104번의 답글인 ‘기적에 대하여의 답글입니다’가 그것입니다. 이 답글을 보시면 지금 님의 질문에 대하여 답한 글인 이 글과 함께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상으로 답글을 맺겠습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님과 함께 하심으로 님이 복음의 진리에 견고히 잘 서나가실 것을 주께 구합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구주가 되심을 전해 나가시길 바랍니다. 바른 전도란 사도들이 주께로부터 받아 전한 복음을 우리가 그대로 받은 자로서 우리 또한 그 복음을 순전함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이런 저런 것으로 말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킨다면 그것은 자신도 속고 있는 것이며 또한 다른 사람도 속게 만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갈 1:7-9). 그러니 말입니다. 주께로부터 우리의 순결함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주신 복음과는 전혀 다른 것을 말하는 혼잡함으로부터 보호하여 지켜달라고 말입니다.
주 안에서 평안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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