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님이 올린 글을 잘 보았습니다. 님이 질문을 올린 날에 비해서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에서야 답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만 그럼에도 이제서라도 답글을 올릴 수 있게 되어서 기쁩니다.
자살!. 님이 표현한대로 이 자살 소식을 심심찮게 듣는 정도의 시대적 상황에 처해 있으니 사회는 그만큼 심각한 병폐 속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자살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에 의할 경우 빚 문제가 가장 크다고 할 것입니다. 특히 카드를 돌려막기를 하다 하다 더 이상 다른 방도를 찾지 못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이 자살을 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럴 경우 가족 동반 자살까지 이어지고 있는 형편이니, 사실은 무절제하고 무분별한 카드 사용의 경우보다는 생활고가 그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 사업 실패로, 또는 이성의 갈등으로, 또는 가정 불화로, 또는 학교에서나 사회에서의 불합리한 구조적 문제로 겪는 육체적이고도 정신적 피해로, 그리고 얼마 전에 한강 다리에서 투신하여 자살한 사람의 경우와 같이 자신의 이름에 심각한 타격을 입은 사람의 경우까지 사람이 자살하는 이유는 참으로 다양합니다. 그러니까 온갖 형편에서 사람이 자살에 이를 수 있는 요인은 잠재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살하는 사람의 연령은 제한이 없습니다. 어린 초등학생으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자살하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르겠습니다만, 그들 모두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어떤 희망을 갖지 못하고 절망한 상태에서 자살한다는 점은 아마도 동일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하여 사실 그 누가 손가락질을 하고 탓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에게서는 "죽을 용기가 있으면 그 용기 가지고 얼마든지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해 준다 한들 정작 그들이 자살 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없는 한에는 그들 귀에는 다만 소리가 쟁쟁거릴 뿐일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에게서는 자살을 막다른 골목에 처한 자가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최후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서는 자살이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얻는 것이라고 여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 님은 사람들이 자살하는 것과 관련하여서 정작 알고 싶어하는 것은 자살의 일반론적 개념이나 그 옳고 그릇됨의 판단 여부가 아닌, "하나님을 믿는 다는 성도들 가운데에도 보면 심심잖게 자살의 소식을 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때에 그들은 진정 구원받지 못한 자들인가요? 구원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고 생명의 원천 또한 하나님께 있기에 함부로 구원을 받았느니 못받았느니 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지백적인 견해로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다 라고 말을 합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서 단정적으로 구원을 받았느니 못받았느니 결론짓고 싶지는 않지만 목사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성경적인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라고 질문한데서 알 수 있듯이 "믿는 자의 자살에 대하여"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다시 "믿는 자가 자살할 경우, 그들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인가?, 아니면 구원받은 믿는 자인데도 자살한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것인가?"라는 내용으로 요점을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성도가 자살 할 수 있는가? 또는 자살할 수 없는가?" 라는 것에 대하여서는 답을 접어두겠습니다. 자칫하면 자살 허용론자로 오해받으며 자살을 방조하는 것이 될 수 있는데다가, 무엇보다도 성경에서 자살을 허용하고 있다든지 아니면 자살을 금지하고 있다든지 하는 식의 답으로는 결코 어느 곳에서도 말씀하고 있는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다만, 님의 질문에 충실한 답변이 될 수 있기 위하여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다루며 언급하고자 합니다.
첫째, 자살은 성경적인가? 하는 사실입니다. 자살이 성경적인가 할 때 이 부분은 신중히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생명을 자연적이고도 생물학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 안에서 봅니다. 님 또한 그럴 것이라고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는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믿습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그 생명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신 영원한 계획에 따라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것으로서의 생명인 것을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과 그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과 연계해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자신의 생명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의한 피 값으로 되어진 사실을 믿음으로 갖고 있겠군요. 그러면 이 믿음을 가진 님은 자신의 생명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적인 고백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어떻게 하셨나요? 주님의 보편적 교회의 신앙고백의 원천이요 원리가 되는 사도 베드로의 신앙고백에서 보듯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하셨지요? 그리고 이 신앙고백 안에서 "내 생명은 주님의 것입니다. 내 몸도 내가 소유한 모든 것도 다 주님의 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것이니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자신의 생명과 삶을 주님과 연계하지 않았나요?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생명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해서입니다. 내 생명과 주님의 생명, 내가 소유한 모든 것과 주님의 것, 그리고 내 삶과 주님의 삶은 같이 보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여기서 사람이 살아가는 생활은 그 분야가 어떤 것이며 또한 취득되는 수입이 얼마로 생활 수준이 어느 정도의 것이든지간에 주님과의 관련 속에서 다루어져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생활이 넉넉하며 여유 있고 부요 할 수 있으나, 어떤 사람은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가난으로 곤핍한 생활을 겪을 수 있습니다.
이때 자살은 비단 가난한 환경에 처한 사람만이 하는 것은 아닙니다. 현대 그룹의 정○○회장에게서 보듯이, 또한 대우그룹의 전 사장이었던 남○○에게서 보듯이 가난이란 결코 생각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자살을 합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자살의 요인은 온갖 형편에서 잠재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살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이것이 사회적 이슈가 되고 그래서 문제 제기가 될 수 있으며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버리는 일을 한 개인의 마음대로 결정으로 할 수가 있느냐고 하며 남의 생명을 죽이는 일이 살인죄를 저지르는 것이듯이 또한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자살을 하는 것 또한 살인죄와 동일한 죄를 저지르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결국 사람의 궁극적 종말이 죽음의 해(害)를 받는 것이기에 종말론적 관점에서는 그 자신에게서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살이 사회적인 문제점을 부각시킬 수는 있어도 정작 자살한 당사자에게서는 살인죄를 적용할 수도 없는 것이며, 인생의 종국인 종말론적 관점에서는 자살한 사람과 자살하지 않는 사람과의 차이점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주로 모시고 섬기는 성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생명이 왕노릇합니다. 이에 이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서 나오는 힘에 의하여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자신들이 살아가는 생활에서 해 나갑니다. 이 생명을 소유한 자의 행복함을 아십니까?
성도도 여느 일반 사람들처럼 온갖 환경에 처합니다. 심지어는 정말 참기 힘든 절대 극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자살 할 수 있을까요? 자살만 놓고 말한다면 자살 할 수밖에 없는 피치 못할 환경과 그 처지를 누가 이해하고 또한 그래서 막을 수 있겠습니까? 역설적으로 누가 그의 자살을 비난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가령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독거 노인이나 소년 소녀 가장이나 여러 식구가 함께 있어도 부양 능력이 전혀 없는 가정이거나 기타 말 못할 형편에 처한 그들이 자살을 하였을 때 성도들은 애석해 하면서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그렇게 어려운 형편에 처한 것을 진작에 알고서 조금씩이라도 도와줘 힘이 되었으면 자살로까지는 나아가지 않았을 텐데..... ." 그래요 분명히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런 아쉬움은 항상 일이 벌어진 후에 갖기 마련입니다.
자살은 자살한 사람과 그들과 함께 믿음의 형제와 자매를 이루었던 믿음의 공동체요 생명의 공동체인 교회적 관점에서 다루어져야 합니다. 가령 자살한 사람을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포기한 믿음 없는 행위요 죄 문제로 다루어 간다면, 그 죄의 책임은 그의 믿음의 형제와 자매로 함께 생명의 몸을 이루고 있었던 교회의 몫인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지만 불행하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도 극한 상황을 견디지 못해서 그래서 이기지 못해서 자살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하여 믿는 자가 자살 할 수 있느냐 라거나 자살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 하는 논쟁과 이에 대한 변론으로 끌고 나가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성도가 생명의 주와 가진 관계에 의한 자신의 존재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지고서 자신의 생명을 자신의 것만으로 여기지 않고 주님의 것으로 여기고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생명을 기꺼이 내놓아 죽을지라도 주를 위한 것으로 하고 있는 믿음에 있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이 믿음은 단지 성도에게 "너희는 그 믿음에 있어야 한다"고 해서 있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교회 실상에서 보듯이 성도를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으로 끌고 나가는 한에는 결코 전혀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가령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기복신앙의 성격으로만 가르쳐서 "하나님께서 진짜 살아 계시다면 물질과 성공의 복을 주십시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믿을 수 없기에 믿지 않겠습니다"라는 식으로 있게 한다고 하면, 그런 거짓된 믿음에 있었던 신자가 하나님을 불신하고 원망과 불평하는 것이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며, 또한 자살할지라도 이 또한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생명의 주와의 관계성에서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 것에 상관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장이라고 일컬어지는 히브리서 11장에서 열거되고 있는 믿음의 인물들에게서 보는 것은 그들이 죽음의 해를 당할지라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받아들인 그 믿음이 어디서 나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름 아닌 생명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사로잡고 계셨으며, 그러한 그들의 마음은 그들이 받은 약속에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는 자의 자살을 이제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믿는 자의 자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자살 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의 관점에서 다루어질 성격의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설사 여느 일반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자살하여 죽음으로써 더 이상 고통을 겪거나 불행을 겪지 않고 끝내고 싶은 상황적 현실 속에서도 자신이 살아가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우리는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온갖 현실에서 이겨나가게 합니다.
그런데 자살은 성경적인가?에서 사람이 살고 죽는 일을 자기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도 함께 다루어 봐야 합니다. 이에 대한 답을 우리는 바울의 가르침에서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4장 7-9절에서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우리가 살고 죽는 문제를 자기 마음대로 선택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까닭은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은 우리가 살든지 죽든지 언제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님이 되시기 위한 데에 그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자살하는 사람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언론 매개체 등을 통해서 우리가 소식을 통해서 듣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도 분명 자살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고 해서 자살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자살을 할 수 있어도 그 자살이 성경적인 정당성을 갖지 못하는 것은, 그래서 성경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것은 만일 그가 분명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는 사람이라고 할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자신은 살든지 죽든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서 섬기며 산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서 자신의 살고 죽는 모든 문제를 언제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아 나가면서 해 나간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과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기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자살을 하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조차도 주님의 생각과 의지를 좇아서 해야 하는데 주님께서는 자신을 믿는 자가 자신과 함께 고난도 함께 받게 해 나가게 하시며 그로 인해서 죽음에도 처하게 하시는 것이지, 단지 삶의 의욕이 없음으로 해서 스스로 죽는 자살로 그를 이끌어 가지는 않습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어떤 경우에서도 삶의 의욕 자체를 잃어버리는 경우는 없습니다. 오히려 삶의 의욕을 강하게 갖고 있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어떤 형편에서도 약속에 따라 자신이 들어갈 참된 본향을 바라보는 것이요 이를 이루실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과연 이런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이기에 그들의 삶의 중심에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생명과 그 생명의 주이신 주님께서 계십니다. 그러기에 자신이 사는데 대한 책임과 의무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듯이 만일 자신이 죽으면 그 또한 죽는데 대한 생명의 가치와 그 역할을 생각해야 합니다. 가령 님이 주님 때문에 불 섶에 뛰어들어가서 죽어야 한다면 그래야 하지요!. 님이 주님의 생명체인 교회, 그 교회를 이루고 있는 생명을 구하고 돕는 일이라면 목숨을 마다하지 말아야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그분 안에서 받은 생명이란 것은 이런 것입니다.
둘째, "믿는 자가 자살할 경우, 그들은 구원받지 못한 자인가?, 아니면 구원받은 자인데도 자살한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것인가?"하는 문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와 관련하여서 님은 "구원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고 생명의 원천 또한 하나님께 있기에 함부로 구원을 받았느니 못 받았느니 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지배적인 견해로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다 라고 말을 합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서 단정적으로 구원을 받았느니 못 받았느니 결론짓고 싶지는 않지만"이라고 조심스럽게 언급을 하였는데,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자살 그 자체를 그의 구원 여부 문제로 끌고 가서 결론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마음의 고통이 얼마나 심하면 그렇게까지 생각할까 하고 이해는 갑니다만 과연 성경적으로 구원받은 자의 생명이, 그러니까 중생하여 하나님의 자녀 된 자의 생명이 자살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는 것이겠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살이 성경적인가 하는 것과 함께 성도가 자살할 경우 구원을 받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갖고 있습니다만, 성경에서는 개인의 구원과 관련하여 자살을 다루고 있는 경우는 없습니다. 성경에서 자살한 사람을 볼 수는 있습니다. 가룟 유다의 경우입니다. 그렇지만 가룟 유다의 경우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신 자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어나가는 방식에 있어서 그를 사용하시는 것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가 돈에 욕심을 품고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하고, 그래서 돈 몇 푼에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 넘기고 나서 그것이 마음에 걸려 목매어 자살하였습니다만(마 27:5), 그래서 비참하게 죽었습니다만, 이를 한 개인의 구원이나 멸망과 관련하여서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겪은 정황을 보아서 가인에게서 보듯이 그의 행위는 악하고 이것이 사망에 거하는 것임을 우리는 익히 알 수 있습니다.(요일 3:12) 그런 가룟 유다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마 26:24)라고 말씀하셨으나, 그러한 가룟 유다가 행한 악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그 한 개인이 처한 불행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여서 온 세상에 나타내신 자기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에 기꺼이 따르는 아들의 순종이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속의 피 입니다.
상황은 다르지만 구약에서 사울 왕의 경우도 볼 수 있습니다. 사울 왕의 말로는 참으로 불행했습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영 또한 사울 왕을 떠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울 대신에 다윗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통치해 나갈 수 있는 준비를 하십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울 왕은 블레셋의 공격을 받아 전쟁을 하게 되었을 때 적의 화살을 맞아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런 사울 왕은 블레셋에 체포될 수 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이에 다급해진 사울 왕은 자신을 경호하는 군사에게 자기를 칼로 쳐서 죽여 달라고 명령을 하였습니다. 사울 왕은 할례받지 못한 자들에게 잡혀서 조롱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군사는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을 감히 죽일 마음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머뭇거리자 사울 왕은 그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 자결을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을 한 것입니다. 사울 왕이 이렇게 자결하자 이를 막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왕을 지켜야 할 책임을 지고 있는 군사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못한 자책으로 그 군사도 왕을 따라서 똑같이 자결하였습니다. 이 사울 왕의 중상과 죽음의 기록은 사무엘상 31장 3-5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사무엘하 1장 1-16절에서 다시 한번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기록은 사울 왕의 죽음을 서로 다르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상에서는 사울 왕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사무엘하에서는 아말렉 족속의 소년[젊은이]이 사울 왕의 부탁을 듣고 사울 왕을 대신하여 그의 목숨을 끊어준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상이해 보이는 두 기록은 그러나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사울 왕이 자결하여 죽은 것을 보고 아말렉 족속의 소년이 공을 내세워 상을 타기 위하여 왕의 부탁을 듣고 왕의 죽음을 도와주었다고 거짓말을 하였거나 아니면 사울 왕이 자결을 하였으나 그가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 한 것이기 때문에 바로 죽음에 이르지 못하고 큰 상처를 입고 고통 중에 있는 것을 아말렉 소년이 발견하자 사울 왕이 다시 그에게 자신을 죽여주기를 명령하였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손으로 직접 목숨을 끊었든지 아니면 남의 손을 빌어서 목숨을 끊었든지간에 그 어떤 경우도 사울 왕의 죽음은 자결하였거나 자결하고자 도움을 받은 것으로 자살의 성격을 띱니다. 이러한 사울 왕의 죽음은 가룟 유다의 죽음에서 보듯이 한 개인의 죽음이 갖는 불행 여부를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울을 버리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워 그와 언약을 맺고 언약의 왕국인 이스라엘을 견고하게 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실천으로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울 왕의 죽음에서도 그 죽음이 갖는 성격이 그 한 개인의 구원 여부를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자살한 하나님을 믿는 사울 왕은 과연 구원을 받았겠는가?" 라거나 "하나님을 믿는 사울 왕은 구원을 받은 사람인데 어찌 자살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자살한 것을 보니 사실은 그는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이다. 더욱이 사울 왕은 자살함으로써 그의 생명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마저 잃어버렸으므로 그는 구원을 받지 못하였을 것이다!"라는 것으로 사울 왕의 자살을 운운해서는 안 됩니다.
님이여!, 성도가 자살하였어도 그는 구원을 받은 사람일까요? 아니면 자살한 그는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일까요? 이 질문을 다음과 같이 해 봅시다. 님이여!, 성도는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생명을 자신의 구원과 관련하여서, 그리고 자신을 향하여 품으신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관련하여서 어떻게 그 가치와 능력을 발휘해야 할까요? 라고 말입니다. 성도된 우리의 생명은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생명으로서 이제 그 생명으로 자신의 삶을 주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살아가야 할 것을,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받들어 가야 할 그 생명을, 고작 자살하여서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으로 삼아서야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인 성도가 과연 자살해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를 떠나 그 생명이 과연 구원받은 생명으로서 합당하게 처신해 나가는 것이겠습니까?
사람들은 말하기를 자살할 용기가 있으면 그 용기 가지고 이 세상을 헤쳐 나가지 못할 일이 없다고 하는데, 비록 자살하고자 할 수 밖에 없는 환경적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는 그런 말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이겠지만, 굳이 그런 말을 빌리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성도를 이 땅에 두신 이유를 바로 깨달아서 거기에 맞게 행동하고 걸어가는데 자신의 생명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목숨을 잃어도 그렇게 해서 목숨을 잃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자살한 사람을 놓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과연 그럴 수 있는가?"라고 하거나, "자살한 사람이 과연 구원을 받았겠는가?"라는 것으로 논쟁할 것이 아니라, 그 자살한 사람에게서 우리의 생명이 그렇게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분명한 인식과 함께 진정 우리가 소유한 생명이 어떤 것인지를 바로 인식하고서 이 생명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꼬리말에 한분이 " 그런데 만약, 그런 비 양심적 가책이나 다른 어떤 문제로 인한 타의적 죽음이 아니라, 순수한(?) 동기의 자살이라면 어떻게..."라고 의문을 달으셨군요.
자살이란 것은 자기 스스로 자기를 죽이는 일을 하는 것이니까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인데, 순수한 동기의 자살에 대한 구체적 제시가 없기 때문에 말하기가 어렵습니다만,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가령 사는 것에 불가항력적인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중병으로 도저히 살아날 가망성이 없는 데다가 너무나 고통이 심해서 죽음을 자처하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환자가 산소호흡기에 의지하고 있는 것을 빼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든지, 또는 몸을 그렇게도 움직일 수 없을만큼일 때 가족에게와 의사에게 이제는 자신을 편안히 죽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이 경우도 자살입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환자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행동을 하는 것을 불가항력적이어서 막을 수는 없었을지라도 우리 나라 법적으로는 환자의 죽음을 그 누구도 도와 줄 수는 없습니다. 만일 이 경우가 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정말 누구라도 도와주어서 죽을 수만 있다면....그래서 더 이상 고통을 겪지 않고 참 안식의 상태에 들어갈 수 있다면....나에게 판단을 요구한다면 정말 참기 힘든 그 고통까지도 받아가면서 죽음을 맞이하여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신을 비롯하여서 온 가족이 그 죽음에서 죄의 상태와 죄를 벌하시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현상적으로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는 것이며 또한 육신의 완전한 구속에 이르게 하시는 생명의 부활의 능력을 기다리는 믿음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참을 수 없을만큼의 고통이 밀려와서 이를 감당하여 이겨나가지 못하고 결국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그렇게 해서는 안되지만 이러한 (스스로)자살과 정당성 판단 여부는 그 누구도 내릴 수 없는 자신만의 것입니다(앞에 언급한 사울 왕의 죽음과 연계해서 보십시오).
그런가 하면 다음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가령 논개가 있을 당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 땅에 전파되어서 논개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인데 그가 왜장을 품고 깊고 깊은 강물에 떨어져 죽었다고 합시다. 이 또한 분명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로서 자살일 것입니다.그런데 이 자살은 왜장을 죽이기 위한 것이요 왜군에 대항하는 것으로서 입니다. 이런 자살은 분명 있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할 수만 있으면 해야겠지요. 이 자살이 안중근 의사의 죽음과 무슨 차이가 있나요? 없습니다. 논개는 왜장을 품고 강물에 뛰어들어서 그 자리에서 죽었다는 것이요 안중근 의사는 일본 총독을 총으로 죽이고 그 자리에서 스스로 총을 머리에 겨눠 죽지 않고 당당히 체포되어서 자신이 한 일의 정당성을 만 천하에 알리며 재판을 받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는 것입니다.이럴 경우 안중근 의사는 자살이 아닌 일본의 정식 재판에 의해 처형된 것이니 법에 의해서 죽은 타살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스스로 의로운 일에 죽음도 기꺼이 원해서 죽음을 받아들인 것이니 자살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또한 지하철역에서 잘못 헛디뎠거나 자살하고자 뛰어든 사람을 구하기 위해 한 시민이 몸을 던져 구하고 자신은 미처 빠져나오지 못해 전동차에 치여 죽음을 당했다고 할 때 이 죽음은 자신의 목숨을 던져 잃어버린 것입니다만 자살로 규명되지 않고 의로운 일에 목숨이 쓰인 의사자로 처리가 됩니다. 이런 의로운 일에는 기꺼이 우리 스스로 목숨을 던져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도 자기 목숨을 잃음으로써 다른 사람의 목숨을 구하고자 하여야 합니다.친구(죽마고우도 동료도 이웃도 국가도 될 수 있다)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이 많지 않으나 만일 그런다면 그는 참으로 친구에 대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모두에서는 자기의 생명을 기꺼이 버리는 의도가 분명합니다."의로운 일"에 자기 목숨이 쓰여진 것이죠.
이런 경우들 외에는 순수한 동기의 자살을 찾아 볼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만일 의로운 일에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면, 그래서 단지 어떤 사유로 인해서 더 이상 세상을 살기 싫어서 삶을 포기하는 것이라면 어떤 경우에서도 순수한 동기를 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습니다. 얼마 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한 여중생이 자살을 하였습니다. 그 까닭은 그 집안이 등록금조차 낼 수 없을만큼 가정 형편이 어려운 참으로 극빈의 가난한 상태에서 자신이 죽어 없는 것이 그만큼 돈을 쓸 일을 줄이는 것이요 이것이 병든 어머니와 동생들을 돕는 일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이런 생각을 품고 자살한 여중생의 죽음은 순수한 동기일까요? 왜 이렇게 어리석은 질문을 오히려 하는가 하면, 여중생의 자살은 그 자살로 인해 물의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우선 가장 직접적인 고통과 피해는 가족입니다. 딸을 잃고서 억만금의 효과를 얻는다 한들 이것은 기쁨과 유익이 아니라 고통과 피해입니다. 어머니와 동생들의 가슴은 딸과 언니의 무덤으로 그들 일생에 존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학교 동료와 교사, 이웃들에게도 아픔과 슬픔을 안겨 주었습니다. 수많은 국민들에게도 말입니다. 한 예를 들었습니다만, 비단 이것만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경우에서도 이와 유사한 성격의 자살이라면 결코 순수한 동기를 이끌어 낼 수는 없을 것이니다.
논개, 안중근, 의사자를 비롯한 많은 의로운 자의 죽음은 내가 하여야 하며 내가 못하면 다른 사람이라도 하여야 하고 다른 사람이 못하는 것을 내가 하여야 합니다.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면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나 또는 세상에서나 무론하고 더욱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죽음은 사람들이 원하고 사회가 요구하고 국가가 요구하는 죽음일 뿐만 아니라 사람의 생명을 생각하고 국민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본능적 욕구 입니다. 그러나 이런 의로운 죽음 외에의 다른 죽음에서는 결코 순수한 동기를 이끌어 낼 수가 없습니다. 누구도 그의 죽음을 원하지 않으며 그래서 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두 분 님의 질문에 충실한 답변이 되었는지요. 부디, 생명의 주께서 님과 함께 하시기를.....
님이 올린 글을 잘 보았습니다. 님이 질문을 올린 날에 비해서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에서야 답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만 그럼에도 이제서라도 답글을 올릴 수 있게 되어서 기쁩니다.
자살!. 님이 표현한대로 이 자살 소식을 심심찮게 듣는 정도의 시대적 상황에 처해 있으니 사회는 그만큼 심각한 병폐 속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자살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에 의할 경우 빚 문제가 가장 크다고 할 것입니다. 특히 카드를 돌려막기를 하다 하다 더 이상 다른 방도를 찾지 못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이 자살을 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럴 경우 가족 동반 자살까지 이어지고 있는 형편이니, 사실은 무절제하고 무분별한 카드 사용의 경우보다는 생활고가 그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 사업 실패로, 또는 이성의 갈등으로, 또는 가정 불화로, 또는 학교에서나 사회에서의 불합리한 구조적 문제로 겪는 육체적이고도 정신적 피해로, 그리고 얼마 전에 한강 다리에서 투신하여 자살한 사람의 경우와 같이 자신의 이름에 심각한 타격을 입은 사람의 경우까지 사람이 자살하는 이유는 참으로 다양합니다. 그러니까 온갖 형편에서 사람이 자살에 이를 수 있는 요인은 잠재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살하는 사람의 연령은 제한이 없습니다. 어린 초등학생으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자살하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르겠습니다만, 그들 모두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어떤 희망을 갖지 못하고 절망한 상태에서 자살한다는 점은 아마도 동일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하여 사실 그 누가 손가락질을 하고 탓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에게서는 "죽을 용기가 있으면 그 용기 가지고 얼마든지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해 준다 한들 정작 그들이 자살 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없는 한에는 그들 귀에는 다만 소리가 쟁쟁거릴 뿐일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에게서는 자살을 막다른 골목에 처한 자가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최후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서는 자살이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얻는 것이라고 여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 님은 사람들이 자살하는 것과 관련하여서 정작 알고 싶어하는 것은 자살의 일반론적 개념이나 그 옳고 그릇됨의 판단 여부가 아닌, "하나님을 믿는 다는 성도들 가운데에도 보면 심심잖게 자살의 소식을 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때에 그들은 진정 구원받지 못한 자들인가요? 구원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고 생명의 원천 또한 하나님께 있기에 함부로 구원을 받았느니 못받았느니 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지백적인 견해로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다 라고 말을 합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서 단정적으로 구원을 받았느니 못받았느니 결론짓고 싶지는 않지만 목사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성경적인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라고 질문한데서 알 수 있듯이 "믿는 자의 자살에 대하여"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다시 "믿는 자가 자살할 경우, 그들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인가?, 아니면 구원받은 믿는 자인데도 자살한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것인가?"라는 내용으로 요점을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성도가 자살 할 수 있는가? 또는 자살할 수 없는가?" 라는 것에 대하여서는 답을 접어두겠습니다. 자칫하면 자살 허용론자로 오해받으며 자살을 방조하는 것이 될 수 있는데다가, 무엇보다도 성경에서 자살을 허용하고 있다든지 아니면 자살을 금지하고 있다든지 하는 식의 답으로는 결코 어느 곳에서도 말씀하고 있는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다만, 님의 질문에 충실한 답변이 될 수 있기 위하여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다루며 언급하고자 합니다.
첫째, 자살은 성경적인가? 하는 사실입니다. 자살이 성경적인가 할 때 이 부분은 신중히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생명을 자연적이고도 생물학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 안에서 봅니다. 님 또한 그럴 것이라고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는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믿습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그 생명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신 영원한 계획에 따라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것으로서의 생명인 것을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과 그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과 연계해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자신의 생명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의한 피 값으로 되어진 사실을 믿음으로 갖고 있겠군요. 그러면 이 믿음을 가진 님은 자신의 생명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적인 고백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어떻게 하셨나요? 주님의 보편적 교회의 신앙고백의 원천이요 원리가 되는 사도 베드로의 신앙고백에서 보듯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하셨지요? 그리고 이 신앙고백 안에서 "내 생명은 주님의 것입니다. 내 몸도 내가 소유한 모든 것도 다 주님의 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것이니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자신의 생명과 삶을 주님과 연계하지 않았나요?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생명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해서입니다. 내 생명과 주님의 생명, 내가 소유한 모든 것과 주님의 것, 그리고 내 삶과 주님의 삶은 같이 보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여기서 사람이 살아가는 생활은 그 분야가 어떤 것이며 또한 취득되는 수입이 얼마로 생활 수준이 어느 정도의 것이든지간에 주님과의 관련 속에서 다루어져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생활이 넉넉하며 여유 있고 부요 할 수 있으나, 어떤 사람은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가난으로 곤핍한 생활을 겪을 수 있습니다.
이때 자살은 비단 가난한 환경에 처한 사람만이 하는 것은 아닙니다. 현대 그룹의 정○○회장에게서 보듯이, 또한 대우그룹의 전 사장이었던 남○○에게서 보듯이 가난이란 결코 생각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자살을 합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자살의 요인은 온갖 형편에서 잠재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살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이것이 사회적 이슈가 되고 그래서 문제 제기가 될 수 있으며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버리는 일을 한 개인의 마음대로 결정으로 할 수가 있느냐고 하며 남의 생명을 죽이는 일이 살인죄를 저지르는 것이듯이 또한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자살을 하는 것 또한 살인죄와 동일한 죄를 저지르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결국 사람의 궁극적 종말이 죽음의 해(害)를 받는 것이기에 종말론적 관점에서는 그 자신에게서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살이 사회적인 문제점을 부각시킬 수는 있어도 정작 자살한 당사자에게서는 살인죄를 적용할 수도 없는 것이며, 인생의 종국인 종말론적 관점에서는 자살한 사람과 자살하지 않는 사람과의 차이점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주로 모시고 섬기는 성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생명이 왕노릇합니다. 이에 이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서 나오는 힘에 의하여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자신들이 살아가는 생활에서 해 나갑니다. 이 생명을 소유한 자의 행복함을 아십니까?
성도도 여느 일반 사람들처럼 온갖 환경에 처합니다. 심지어는 정말 참기 힘든 절대 극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자살 할 수 있을까요? 자살만 놓고 말한다면 자살 할 수밖에 없는 피치 못할 환경과 그 처지를 누가 이해하고 또한 그래서 막을 수 있겠습니까? 역설적으로 누가 그의 자살을 비난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가령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독거 노인이나 소년 소녀 가장이나 여러 식구가 함께 있어도 부양 능력이 전혀 없는 가정이거나 기타 말 못할 형편에 처한 그들이 자살을 하였을 때 성도들은 애석해 하면서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그렇게 어려운 형편에 처한 것을 진작에 알고서 조금씩이라도 도와줘 힘이 되었으면 자살로까지는 나아가지 않았을 텐데..... ." 그래요 분명히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런 아쉬움은 항상 일이 벌어진 후에 갖기 마련입니다.
자살은 자살한 사람과 그들과 함께 믿음의 형제와 자매를 이루었던 믿음의 공동체요 생명의 공동체인 교회적 관점에서 다루어져야 합니다. 가령 자살한 사람을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포기한 믿음 없는 행위요 죄 문제로 다루어 간다면, 그 죄의 책임은 그의 믿음의 형제와 자매로 함께 생명의 몸을 이루고 있었던 교회의 몫인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지만 불행하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도 극한 상황을 견디지 못해서 그래서 이기지 못해서 자살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하여 믿는 자가 자살 할 수 있느냐 라거나 자살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 하는 논쟁과 이에 대한 변론으로 끌고 나가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성도가 생명의 주와 가진 관계에 의한 자신의 존재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지고서 자신의 생명을 자신의 것만으로 여기지 않고 주님의 것으로 여기고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생명을 기꺼이 내놓아 죽을지라도 주를 위한 것으로 하고 있는 믿음에 있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이 믿음은 단지 성도에게 "너희는 그 믿음에 있어야 한다"고 해서 있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교회 실상에서 보듯이 성도를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으로 끌고 나가는 한에는 결코 전혀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가령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기복신앙의 성격으로만 가르쳐서 "하나님께서 진짜 살아 계시다면 물질과 성공의 복을 주십시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믿을 수 없기에 믿지 않겠습니다"라는 식으로 있게 한다고 하면, 그런 거짓된 믿음에 있었던 신자가 하나님을 불신하고 원망과 불평하는 것이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며, 또한 자살할지라도 이 또한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생명의 주와의 관계성에서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 것에 상관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장이라고 일컬어지는 히브리서 11장에서 열거되고 있는 믿음의 인물들에게서 보는 것은 그들이 죽음의 해를 당할지라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받아들인 그 믿음이 어디서 나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름 아닌 생명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사로잡고 계셨으며, 그러한 그들의 마음은 그들이 받은 약속에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는 자의 자살을 이제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믿는 자의 자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자살 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의 관점에서 다루어질 성격의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설사 여느 일반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자살하여 죽음으로써 더 이상 고통을 겪거나 불행을 겪지 않고 끝내고 싶은 상황적 현실 속에서도 자신이 살아가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우리는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온갖 현실에서 이겨나가게 합니다.
그런데 자살은 성경적인가?에서 사람이 살고 죽는 일을 자기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도 함께 다루어 봐야 합니다. 이에 대한 답을 우리는 바울의 가르침에서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4장 7-9절에서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우리가 살고 죽는 문제를 자기 마음대로 선택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까닭은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은 우리가 살든지 죽든지 언제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님이 되시기 위한 데에 그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자살하는 사람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언론 매개체 등을 통해서 우리가 소식을 통해서 듣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도 분명 자살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고 해서 자살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자살을 할 수 있어도 그 자살이 성경적인 정당성을 갖지 못하는 것은, 그래서 성경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것은 만일 그가 분명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는 사람이라고 할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자신은 살든지 죽든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서 섬기며 산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서 자신의 살고 죽는 모든 문제를 언제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아 나가면서 해 나간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과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기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자살을 하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조차도 주님의 생각과 의지를 좇아서 해야 하는데 주님께서는 자신을 믿는 자가 자신과 함께 고난도 함께 받게 해 나가게 하시며 그로 인해서 죽음에도 처하게 하시는 것이지, 단지 삶의 의욕이 없음으로 해서 스스로 죽는 자살로 그를 이끌어 가지는 않습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어떤 경우에서도 삶의 의욕 자체를 잃어버리는 경우는 없습니다. 오히려 삶의 의욕을 강하게 갖고 있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어떤 형편에서도 약속에 따라 자신이 들어갈 참된 본향을 바라보는 것이요 이를 이루실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과연 이런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이기에 그들의 삶의 중심에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생명과 그 생명의 주이신 주님께서 계십니다. 그러기에 자신이 사는데 대한 책임과 의무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듯이 만일 자신이 죽으면 그 또한 죽는데 대한 생명의 가치와 그 역할을 생각해야 합니다. 가령 님이 주님 때문에 불 섶에 뛰어들어가서 죽어야 한다면 그래야 하지요!. 님이 주님의 생명체인 교회, 그 교회를 이루고 있는 생명을 구하고 돕는 일이라면 목숨을 마다하지 말아야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그분 안에서 받은 생명이란 것은 이런 것입니다.
둘째, "믿는 자가 자살할 경우, 그들은 구원받지 못한 자인가?, 아니면 구원받은 자인데도 자살한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것인가?"하는 문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와 관련하여서 님은 "구원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고 생명의 원천 또한 하나님께 있기에 함부로 구원을 받았느니 못 받았느니 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지배적인 견해로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다 라고 말을 합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서 단정적으로 구원을 받았느니 못 받았느니 결론짓고 싶지는 않지만"이라고 조심스럽게 언급을 하였는데,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자살 그 자체를 그의 구원 여부 문제로 끌고 가서 결론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마음의 고통이 얼마나 심하면 그렇게까지 생각할까 하고 이해는 갑니다만 과연 성경적으로 구원받은 자의 생명이, 그러니까 중생하여 하나님의 자녀 된 자의 생명이 자살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는 것이겠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살이 성경적인가 하는 것과 함께 성도가 자살할 경우 구원을 받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갖고 있습니다만, 성경에서는 개인의 구원과 관련하여 자살을 다루고 있는 경우는 없습니다. 성경에서 자살한 사람을 볼 수는 있습니다. 가룟 유다의 경우입니다. 그렇지만 가룟 유다의 경우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신 자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어나가는 방식에 있어서 그를 사용하시는 것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가 돈에 욕심을 품고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하고, 그래서 돈 몇 푼에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 넘기고 나서 그것이 마음에 걸려 목매어 자살하였습니다만(마 27:5), 그래서 비참하게 죽었습니다만, 이를 한 개인의 구원이나 멸망과 관련하여서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겪은 정황을 보아서 가인에게서 보듯이 그의 행위는 악하고 이것이 사망에 거하는 것임을 우리는 익히 알 수 있습니다.(요일 3:12) 그런 가룟 유다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마 26:24)라고 말씀하셨으나, 그러한 가룟 유다가 행한 악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그 한 개인이 처한 불행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여서 온 세상에 나타내신 자기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에 기꺼이 따르는 아들의 순종이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속의 피 입니다.
상황은 다르지만 구약에서 사울 왕의 경우도 볼 수 있습니다. 사울 왕의 말로는 참으로 불행했습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영 또한 사울 왕을 떠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울 대신에 다윗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통치해 나갈 수 있는 준비를 하십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울 왕은 블레셋의 공격을 받아 전쟁을 하게 되었을 때 적의 화살을 맞아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런 사울 왕은 블레셋에 체포될 수 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이에 다급해진 사울 왕은 자신을 경호하는 군사에게 자기를 칼로 쳐서 죽여 달라고 명령을 하였습니다. 사울 왕은 할례받지 못한 자들에게 잡혀서 조롱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군사는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을 감히 죽일 마음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머뭇거리자 사울 왕은 그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 자결을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을 한 것입니다. 사울 왕이 이렇게 자결하자 이를 막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왕을 지켜야 할 책임을 지고 있는 군사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못한 자책으로 그 군사도 왕을 따라서 똑같이 자결하였습니다. 이 사울 왕의 중상과 죽음의 기록은 사무엘상 31장 3-5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사무엘하 1장 1-16절에서 다시 한번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기록은 사울 왕의 죽음을 서로 다르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상에서는 사울 왕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사무엘하에서는 아말렉 족속의 소년[젊은이]이 사울 왕의 부탁을 듣고 사울 왕을 대신하여 그의 목숨을 끊어준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상이해 보이는 두 기록은 그러나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사울 왕이 자결하여 죽은 것을 보고 아말렉 족속의 소년이 공을 내세워 상을 타기 위하여 왕의 부탁을 듣고 왕의 죽음을 도와주었다고 거짓말을 하였거나 아니면 사울 왕이 자결을 하였으나 그가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 한 것이기 때문에 바로 죽음에 이르지 못하고 큰 상처를 입고 고통 중에 있는 것을 아말렉 소년이 발견하자 사울 왕이 다시 그에게 자신을 죽여주기를 명령하였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손으로 직접 목숨을 끊었든지 아니면 남의 손을 빌어서 목숨을 끊었든지간에 그 어떤 경우도 사울 왕의 죽음은 자결하였거나 자결하고자 도움을 받은 것으로 자살의 성격을 띱니다. 이러한 사울 왕의 죽음은 가룟 유다의 죽음에서 보듯이 한 개인의 죽음이 갖는 불행 여부를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울을 버리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워 그와 언약을 맺고 언약의 왕국인 이스라엘을 견고하게 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실천으로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울 왕의 죽음에서도 그 죽음이 갖는 성격이 그 한 개인의 구원 여부를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자살한 하나님을 믿는 사울 왕은 과연 구원을 받았겠는가?" 라거나 "하나님을 믿는 사울 왕은 구원을 받은 사람인데 어찌 자살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자살한 것을 보니 사실은 그는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이다. 더욱이 사울 왕은 자살함으로써 그의 생명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마저 잃어버렸으므로 그는 구원을 받지 못하였을 것이다!"라는 것으로 사울 왕의 자살을 운운해서는 안 됩니다.
님이여!, 성도가 자살하였어도 그는 구원을 받은 사람일까요? 아니면 자살한 그는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일까요? 이 질문을 다음과 같이 해 봅시다. 님이여!, 성도는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생명을 자신의 구원과 관련하여서, 그리고 자신을 향하여 품으신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관련하여서 어떻게 그 가치와 능력을 발휘해야 할까요? 라고 말입니다. 성도된 우리의 생명은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생명으로서 이제 그 생명으로 자신의 삶을 주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살아가야 할 것을,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받들어 가야 할 그 생명을, 고작 자살하여서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으로 삼아서야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인 성도가 과연 자살해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를 떠나 그 생명이 과연 구원받은 생명으로서 합당하게 처신해 나가는 것이겠습니까?
사람들은 말하기를 자살할 용기가 있으면 그 용기 가지고 이 세상을 헤쳐 나가지 못할 일이 없다고 하는데, 비록 자살하고자 할 수 밖에 없는 환경적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는 그런 말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이겠지만, 굳이 그런 말을 빌리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성도를 이 땅에 두신 이유를 바로 깨달아서 거기에 맞게 행동하고 걸어가는데 자신의 생명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목숨을 잃어도 그렇게 해서 목숨을 잃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자살한 사람을 놓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과연 그럴 수 있는가?"라고 하거나, "자살한 사람이 과연 구원을 받았겠는가?"라는 것으로 논쟁할 것이 아니라, 그 자살한 사람에게서 우리의 생명이 그렇게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분명한 인식과 함께 진정 우리가 소유한 생명이 어떤 것인지를 바로 인식하고서 이 생명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꼬리말에 한분이 " 그런데 만약, 그런 비 양심적 가책이나 다른 어떤 문제로 인한 타의적 죽음이 아니라, 순수한(?) 동기의 자살이라면 어떻게..."라고 의문을 달으셨군요.
자살이란 것은 자기 스스로 자기를 죽이는 일을 하는 것이니까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인데, 순수한 동기의 자살에 대한 구체적 제시가 없기 때문에 말하기가 어렵습니다만,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가령 사는 것에 불가항력적인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중병으로 도저히 살아날 가망성이 없는 데다가 너무나 고통이 심해서 죽음을 자처하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환자가 산소호흡기에 의지하고 있는 것을 빼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든지, 또는 몸을 그렇게도 움직일 수 없을만큼일 때 가족에게와 의사에게 이제는 자신을 편안히 죽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이 경우도 자살입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환자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행동을 하는 것을 불가항력적이어서 막을 수는 없었을지라도 우리 나라 법적으로는 환자의 죽음을 그 누구도 도와 줄 수는 없습니다. 만일 이 경우가 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정말 누구라도 도와주어서 죽을 수만 있다면....그래서 더 이상 고통을 겪지 않고 참 안식의 상태에 들어갈 수 있다면....나에게 판단을 요구한다면 정말 참기 힘든 그 고통까지도 받아가면서 죽음을 맞이하여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신을 비롯하여서 온 가족이 그 죽음에서 죄의 상태와 죄를 벌하시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현상적으로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는 것이며 또한 육신의 완전한 구속에 이르게 하시는 생명의 부활의 능력을 기다리는 믿음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참을 수 없을만큼의 고통이 밀려와서 이를 감당하여 이겨나가지 못하고 결국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그렇게 해서는 안되지만 이러한 (스스로)자살과 정당성 판단 여부는 그 누구도 내릴 수 없는 자신만의 것입니다(앞에 언급한 사울 왕의 죽음과 연계해서 보십시오).
그런가 하면 다음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가령 논개가 있을 당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 땅에 전파되어서 논개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인데 그가 왜장을 품고 깊고 깊은 강물에 떨어져 죽었다고 합시다. 이 또한 분명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로서 자살일 것입니다.그런데 이 자살은 왜장을 죽이기 위한 것이요 왜군에 대항하는 것으로서 입니다. 이런 자살은 분명 있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할 수만 있으면 해야겠지요. 이 자살이 안중근 의사의 죽음과 무슨 차이가 있나요? 없습니다. 논개는 왜장을 품고 강물에 뛰어들어서 그 자리에서 죽었다는 것이요 안중근 의사는 일본 총독을 총으로 죽이고 그 자리에서 스스로 총을 머리에 겨눠 죽지 않고 당당히 체포되어서 자신이 한 일의 정당성을 만 천하에 알리며 재판을 받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는 것입니다.이럴 경우 안중근 의사는 자살이 아닌 일본의 정식 재판에 의해 처형된 것이니 법에 의해서 죽은 타살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스스로 의로운 일에 죽음도 기꺼이 원해서 죽음을 받아들인 것이니 자살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또한 지하철역에서 잘못 헛디뎠거나 자살하고자 뛰어든 사람을 구하기 위해 한 시민이 몸을 던져 구하고 자신은 미처 빠져나오지 못해 전동차에 치여 죽음을 당했다고 할 때 이 죽음은 자신의 목숨을 던져 잃어버린 것입니다만 자살로 규명되지 않고 의로운 일에 목숨이 쓰인 의사자로 처리가 됩니다. 이런 의로운 일에는 기꺼이 우리 스스로 목숨을 던져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도 자기 목숨을 잃음으로써 다른 사람의 목숨을 구하고자 하여야 합니다.친구(죽마고우도 동료도 이웃도 국가도 될 수 있다)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이 많지 않으나 만일 그런다면 그는 참으로 친구에 대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모두에서는 자기의 생명을 기꺼이 버리는 의도가 분명합니다."의로운 일"에 자기 목숨이 쓰여진 것이죠.
이런 경우들 외에는 순수한 동기의 자살을 찾아 볼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만일 의로운 일에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면, 그래서 단지 어떤 사유로 인해서 더 이상 세상을 살기 싫어서 삶을 포기하는 것이라면 어떤 경우에서도 순수한 동기를 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습니다. 얼마 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한 여중생이 자살을 하였습니다. 그 까닭은 그 집안이 등록금조차 낼 수 없을만큼 가정 형편이 어려운 참으로 극빈의 가난한 상태에서 자신이 죽어 없는 것이 그만큼 돈을 쓸 일을 줄이는 것이요 이것이 병든 어머니와 동생들을 돕는 일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이런 생각을 품고 자살한 여중생의 죽음은 순수한 동기일까요? 왜 이렇게 어리석은 질문을 오히려 하는가 하면, 여중생의 자살은 그 자살로 인해 물의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우선 가장 직접적인 고통과 피해는 가족입니다. 딸을 잃고서 억만금의 효과를 얻는다 한들 이것은 기쁨과 유익이 아니라 고통과 피해입니다. 어머니와 동생들의 가슴은 딸과 언니의 무덤으로 그들 일생에 존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학교 동료와 교사, 이웃들에게도 아픔과 슬픔을 안겨 주었습니다. 수많은 국민들에게도 말입니다. 한 예를 들었습니다만, 비단 이것만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경우에서도 이와 유사한 성격의 자살이라면 결코 순수한 동기를 이끌어 낼 수는 없을 것이니다.
논개, 안중근, 의사자를 비롯한 많은 의로운 자의 죽음은 내가 하여야 하며 내가 못하면 다른 사람이라도 하여야 하고 다른 사람이 못하는 것을 내가 하여야 합니다.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면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나 또는 세상에서나 무론하고 더욱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죽음은 사람들이 원하고 사회가 요구하고 국가가 요구하는 죽음일 뿐만 아니라 사람의 생명을 생각하고 국민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본능적 욕구 입니다. 그러나 이런 의로운 죽음 외에의 다른 죽음에서는 결코 순수한 동기를 이끌어 낼 수가 없습니다. 누구도 그의 죽음을 원하지 않으며 그래서 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두 분 님의 질문에 충실한 답변이 되었는지요. 부디, 생명의 주께서 님과 함께 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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