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동무님.
동무라는 말이
얼마나 다정다감하며,
그래서 또한 친근한지요.
어릴적 동무라는 말이 있듯이
어렸을 적에는 자주 동무라는 말을 사용하곤 했었는데,
점점 성장해 가면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동무를
님의 닉네임을 부르는 것을 통해서
불러보니 참으로 좋습니다.
어릴 적 동무를 대하듯이....
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질문해 주셨습니다.
“간혹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한 복음3:16 말씀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같습니다.
그들의 말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못함은
말라기 1장에서의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셨다'는 말씀을 볼 때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출애굽기 33장에는
주께서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함을 입지 못한 사람들이 있고,
거꾸로 말하면 주님의 은혜나 긍휼함을 입지 못해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되죠.
혹 제게 그런 말을 한 사람들이
신약과 구약의 차이를 말할지 모르겠지만,
사도 바울은 이 말라기와 출애굽기 말씀을 로마서 9장에서 인용하면서
주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 대해 설명하죠.
요나서 4장을 보면
주께서 사람들은 물론 육축도 아끼심을 볼 수 있습니다.
해서 헷갈리고 모르겠습니다.
해서 제대로 알길 원합니다.
성경 말씀과 함께 답변 부탁드립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다음과 같이 답변을 드립니다.
요한복음 3:16인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를 가지고 하나님의 ‘만인 사랑’을 말하면서 ‘만인 구원’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여 모든 사람들이 영생을 소유하기를 원하신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3:16은 신앙고백적 요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이처럼 신앙고백적 요약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셔서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신다는 이 신앙고백에 있는 것이 하나님이 하신 그 일에 신앙이 있는 것에서입니다. 그러니까 말이죠. 하나님이 하신 일에 신앙이 없이는 그 누구에게서도 신앙고백이 나올 수가 없으며, 그 신앙을 함축적으로 요약하고 있는 고백에 있을 수도 없습니다.
요한복음 3:17-18에서는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자기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하면서 여기서 말하고 있는 ‘세상’이 어떤 것인지 그 성격을 알려주십니다. 그것은 말이죠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믿는 자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라고 말하여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신다’는 그 ‘세상’으로 말해지고 있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말이죠.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세상’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요한복음 3:16, 17-18에서 말해 주시고 있는 ‘세상’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인지를 정리하여 알아야겠습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이것이 언급되고 있는 구절이 있는 본문의 내용과 여기서의 의도를 먼저 파악하여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님은 요한복음 3:16 한 구절을 가지고 이것으로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것에 혼돈을 가집니다만, 성경을 보시는 것은 항상 본문 전체와 그 전후 문맥의 흐름에 따른 이해를 갖는 습관을 가지셔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 속에서 이 구절이 도대체 무엇을 말해 주시고자 하는지를 항상 보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 자기 계시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곳곳에서는 “나는…이다”라고 말씀하여 자신을 알려주시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자기 계시로 또한 여러 표적을 행하여 나타내십니다. 그 첫 번째 표적이 인류의 구속을 위한 공생애를 갈릴리에서 시작하시는 것으로 그리스도이신 모습을 처음 나타내는 것에서 있었는데, 가나의 혼인 잔치 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이적을 행하시는 것이었습니다(요 2:1-11). 그리고 또한 유월절에 절기를 맞이하여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인간에 의해 더럽힘에 있은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자신이 행하실 메시야 권능의 표적을 증거 하셨습니다(요 2:13-22). 그리고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계시면서 자신을 나타내셔서 증거 하시는 표적으로서 많은 능력을 나타내는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은 예수님의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서 단지 표적을 행한 그 능력만 보고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예수님을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으로서 얼마 안 있어 예수님을 부인하여 버리고 떠나게 될 것이라는 그들의 마음, 곧 인간의 악한 본성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요 2:23-24).
그런데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 하나의 중요한 사역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 이해하고자 하는 구절이 포함된 요한복음 3:1-21의 내용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유대인의 관원으로서 유대인의 지도자들의 한 부류인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으로서 산헤드린 공의회의 회원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가 이처럼 예수님을 찾아 나온 곳은 예수님이 그 동안 행하신 표적을 보고 몇몇 동료와 깊이 생각한 것에 대하여 이야기 하며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자 해서였습니다.
니고데모는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표적을 행하신 것을 보고선 자신들은 표적으로 행해진 기이하고 놀라운 능력 자체나 나타난 현상만을 본 것이 아니라 그 표적에서 하나님이 예수님과 함께 하시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표적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것이니 필연적으로 표적을 행하신 예수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생님<선지자>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니냐, 그러니 하나님이 보내신 선생님으로서 무슨 일을 하시고 계시는 것인지, 선생님이 행하신 표적이 어떤 진리를 말씀하여 주고자 하는 것인지 가르쳐 주십시오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행하신 표적을 보았지만 그것을 보고서 예수님께 나아와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진리를 받아 믿으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6:26)라고 지적하신 적도 있듯이 행해진 표적에 의해 나타난 육적인 혜택을 입고자 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표적을 보고서 예수님이 이처럼 표적을 행하신 것에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고 있는 선지자인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니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말씀해 주고자 하는 계시의 전달이 있지 않겠는가 하는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자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해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며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그에게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 하나님 나라를 보게 하고 그와 함께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세상에 온 목적인 하나님 나라를 전해 주시는 것으로 말씀의 시작을 끄집어내신 것입니다.
그러자 니고데모는 참으로 난감해 하였습니다. 그것은 그의 질문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듭나야 한다”는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니고데모가 지금까지 알고 있어 온 것은 사람이 태어난다는 것은 모태에서입니다. 어머니의 복중에 잉태하여 있다가 출생하는 것이 사람의 태어남입니다. 그래서 니고데모가 알고 있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있는 유대인은 그렇게 해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들에게서는 공식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사람이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유대인으로 있는 것으로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알게 해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니고데모와 그리고 그를 존경하며 따르는 유대인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잘못된 ‘천국관’(天國觀)을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질문에 ‘거듭남’과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며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에 의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진리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말이죠.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남’에 의해서 하나님 나라를 보며, 그 나라에 들어갑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말이죠. 육의 문제가 아닌, 그래서 육으로의 이해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닌 영적인 것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으로 되어지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즉 거듭남은 성령이 하시는 일에 관한 문제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바람이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으나 바람 부는 소리는 듣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성령의 주권적 능력으로서 되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입니다. 바람은 온 사방에서 임의로 불며, 그 바람이 부는 것을 사람은 소리를 들어서 압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서 불어오는 것이며 또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렇게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거기에는 큰 능력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처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성령의 주권적 능력에 의해서 되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예수님은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의 진리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다시 질문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 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 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하면 예수님이 지금까지 니고데모에게 해 준 말씀을 통해서 메시야가 하시는 일을 이해하여야 할 것이며, 그래서 메시야가 자신의 나라, 곧 하나님 나라를 자기 백성에게 세워 나가시는 일을 하시기 위해 어떤 일을 하실 것인지에로 관심의 초점이 가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민수기 21:9에 있는 놋뱀 사건을 들어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는 말씀을 들어 자신이 어떤 일을 당하실 것인가를 알려 주었습니다. ‘인자도 들려야 할 것이다“하시고서 하시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말이죠. 장대에 달려 높이 들려진 놋뱀과 같이 자신도 십자가에 달려 높이 들려지는 일을 당하시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믿음에 있는 자마다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십니다.
이것을 누가 믿는가? 즉, 누가 이렇게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믿음에 있는가? 그래서 누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가? 하는 것에 대한 대답을 예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사실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는 것이죠. 예수께서는 놋뱀에서의 사건과 같이 십자가에 달려 높이 들려지는 일을 당하시는 것에서 저를 바라보는 믿음에 있게 하시며, 그래서 그들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십니다. 이는 성령의 주권적 사역에 의해서 있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 사역도, 그리고 그 예수님을 바라보는 믿음에 있게 하여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는 일도 모두 성령께서 해 나가십니다. 그것은 말이죠. 이 일이 땅의 일이 아닌 하늘에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나는 십자가의 구속 사역도, 그리고 이 일을 통해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믿음에 있게 하여 그분의 나라에 들어가 영생하게 되는 것도 모두가 다 하늘의 일을 성령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말씀하면서 이제 예수님은 다음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문제 삼고 있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란 말에서의 ‘세상’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보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십자가의 구속 사역을 일으키실 ‘세상’을 염두에 두고서 하시는 말씀이요 또한 그로 인해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믿음에 있게 될 ‘세상’을 의미하는 것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의 세상은 우리가 알고 있으며 말하는 것에서의 우리가 발을 디딛고 사는 이 땅으로서의 개념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세계의 개념에서의 말해지고 것입니다. 즉 독생자 예수님이 들어오신 세상의 개념입니다.
마태복음 1:21에서는 하나님은 자신이 보내는 아들을 성령으로 잉태케 하시고 또한 성령으로 출생케 하시는 것에서 그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고 부르도록 하였습니다. 그것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일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오심인 성육신은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으로서의 세상이라는 개념에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오심인 성육신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정된 사람에게 한정된 것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세상의 개념을 띱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육신은 임마누엘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자기 백성)와 함께 계시다’는 것이죠(마 1:23).
이러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에 대하여 요한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1-4)라고 말하면서,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9-14)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있으며, 이 생명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그래서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빛입니다. 이 생명의 빛에 비추임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곧 모든 사람이 아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인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이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로, 이들에게는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이제 요한복음 3:16로 다시 돌아가서 여기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세상’이란 누구이겠는지요. 어떤 사람을 의미하는 것에서 사용하고 있는 말이었겠는지요. ‘만인 구원’에서의 세상이겠는지요. 아닙니다. 결코 전혀 아닙니다. 요한복음 3:17-18에서는 그 세상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줍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여기서 예수께서 의도하신 ‘세상’이란 말은 ‘저를 믿는 자’에서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 곧 하나님의 독생자를 믿지 않는 자는요. 그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에 있는 자가 아니죠. 그들은 말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함에도 님이 말한 바와 같이 간혹(님이 간혹 들어서이지 사실은 참으로 많은 사람에게서 듣는 것이) 요한복음 3:16을 들어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한데, 참으로 주께 감사드립니다. 이는 님은 그와 같이 알지를 않고, 그래서 그들이 말하는 것 같이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사랑할 자를 사랑하며 하나님이 미워할 자를 미워함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할 자를 사랑하였고 미워할 자를 미워하였다’는 사상은 성경 전반에 흐르는 중심 사상입니다. 왜냐하면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서 출발하고 있는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의 예정을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님이 이렇게 알고 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이며 주님의 크신 은혜입니다.
님은 이것을 근거 구절로 말라기 1:2-3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와 출애굽기 33:19에서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라고 말씀한 두 곳을 제시하였습니다만, 사실 창세 전의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따른 하나님의 선택의 은총과 구원의 예정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론적 사상은 창세기 3:15에서의 ‘여자의 후손’에 의한 구원 약속에 나타나고 있는 메시야 사상에서, 그리고 창세기 25:23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복을 성취해 가시는 것으로 쌍둥이 야곱과 에서에 의한 두 국민의 나뉨에서 있게 되는 복의 주체에 계시해 주시고 있는 ‘언약의 후사’에서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불려지고 또한 ‘이삭의 하나님‘으로 불려진 것처럼 또한 ’야곱의 하나님‘으로 불려지고, 야곱에게서 나오는 ’이스라엘‘은 ’야곱의 총회‘로 불려지며, 하나님은 이 야곱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이것은 구약성경 전체에 흐르는 사상입니다. 이에 대한 이해를 바울 사도는 잘 가지고 있었으며, 그런 그는 로마서 9:11-13에서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를 말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님은 지금 잘 알고 계신대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가 어떤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고, 그래서 그릇되게 말하고 있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이 사랑한다’는 것에서가 아닌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께서는 사랑할 자를 사랑한다’는 바른 관점에 의한 이해를 앞으로도 더욱 견고히 잘 가져나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님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함을 입지 못한 사람들이 있고, 거꾸로 말하면 주님의 은혜나 긍휼함을 입지 못해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 또한 잘 알고 있는 것이니 이에 대한 이해도 더욱 흔들림 없이 견고히 잘 가져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리 할 수가 있느냐?”는 것에 대하여 토기쟁이 비유를 들어 “하나님이 귀히 쓸 그릇을 만들고 그와 같이 또한 천히 쓸 그릇을 만든다고 해서 너희가 하나님을 힐난할 수 있느냐?”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말입니다. 하나님의 야곱 사랑은 야곱이 사랑받을 만한 자의 상태에서 있은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죄로 말미암아 죄값인 죽음의 형벌을 심판으로 받는 것에서 나타내시고 있는 하나님의 뜻인 긍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하므로 하나님을 힐난할 수 있는지요. 아닙니다.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님은 이에 대하여 잘 알고 그래서 잘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한편 혼란스러워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요나서 4장에서 주께서 사람들은 물론 육축도 아끼심을 볼 수 있으므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에서의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대상(세상)이 과연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입니다. 그래서 그럴 같기도 하는 생각에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님이 말한대로 헷갈려서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것이죠.
요나서는 말입니다. 여로보암 2세의 통치 기간에 활동한 선지자 요나가 기록하였습니다. 이때는 이스라엘이 부강하며 번영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여로보암 2세의 통치 속에 이스라엘은 죄가 만연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때에 하나님께서는 역시 죄악이 극심한 앗수르에 속한 니느웨 성에 요나를 보내 그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질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요나가 이 말을 전하자 그의 선포는 효력을 발휘하여 요나가 전하는 말을 들은 니느웨 성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며, 그들 중 높은 사람들로부터 낮은 사람들에게 이르기까지 굵은 베옷을 입었다. 그리고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러자 니느웨 왕은 그의 왕좌에서 일어나 그의 왕복을 벗고, 굵은 베옷을 걸치고 재 위에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칙령을 내려 공포하였습니다. 그것은 사람이든 가축이든 소 떼든 양 떼든 그 무엇이든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 것과 굵은 베옷을 걸치고 하나님께 힘써 부르짖으며 자신들의 악한 길에서 돌이키고 그 손으로부터의 범죄에서 돌아서라는 것이었습니다. 니느웨 왕이 이러한 칙령을 공포한 것은 자신들이 그와 같이 회개에 있으면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시고 그분의 맹렬한 진노를 거두어 자신들을 구원할지 누가 알겠느냐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이에 니느웨 성에 있는 모든 백성은 왕의 명을 좇아 그대로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니느웨 성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면서 이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요나의 기대와는 다르게 니느웨 성이 멸망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으며, 니느웨 성 사람들이 악한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셔서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요나는 이러한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재앙을 내리실 뜻을 돌이켜 거두심으로 크게 실망하고 자신이 거짓 예언자로 드러날 것으로 생각하고 차라리 자신의 목숨을 취하여 가실 것을 하나님께 구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하룻밤 사이에 크게 자라고 또한 하룻밤 사이에 시드는 박넝쿨을 통하여 요나에게 그가 뜨거운 태양으로 겪게 되는 열기를 막아줄 박넝쿨이 시드는 것을 안타까워하여 아끼면서도 십이여만명의 사람과 수많은 가축의 목숨은 아끼지 않고 사소한 식물인 박넝쿨마저도 못한 것으로 취급하며 차라리 죽는게 낫다고 불평하는 것이 과연 잘하는 것인지를 책망하면서 그가 아끼지 않는 니느웨 성에 있는 그 수많은 사람과 가축을 하나님께서 아끼심을 말씀합니다.
요나서의 이러한 주님을 보면서 님은 주께서 사람들은 물론 육축도 아끼심을 볼 수 있다면서 헷갈려 했습니다. 그것은 앞에서 본 요한복음 3:16을 비롯한 몇 곳의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랑할 자를 사랑하고 미워할 자를 미워하심을 언급하고 있는 것과 비교할 때 모순되고 충돌되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말이죠. 요나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성에 사는 사람(이방인)들의 생명을 아끼시는 것을 통해서 사실은 이것으로 이스라엘에게 경고를 주시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아끼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자들을 돌아보시는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내 백성’이라고 부르시며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지속적인 사랑을 나타내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려지는 자는 구약성경에서 ‘남은 자’ 사상으로 계시되고 있습니다. ‘남은 자’ 사상은 구약 곳곳에서 발견하게 됩니다(창 7:23; 왕상 19:18; 암 4:1-3; 사 10:22-23). 그런데 이 ‘남은 자’가 누구인가에 대하여 여러 견해가 있어왔습니다. 그러한 ‘남은 자’를 사도 바울은 로마서 9-11장에서 선지자 호세아에 나타난 하나님 백성의 선택적 사랑과 선지자 이사야가 말한 ‘남은 자’ 사상, 그리고 레위기와 신명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 의한 믿음의 의의 원리에 근거하여서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수가 바다 해변의 모래알처럼 많을지라도 남은 사람만 구원받을 것이며, 이를 주께서 말씀하심에 따라서 이 땅에서 속히 이루실 것인데 이를 위해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씨’에 의하여서 ‘남은 자’만 구원을 받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밖에 있던 이방인들도 믿음으로 의롭다함에 있게 하셨는데 하물며 이스라엘이겠으며, 그래서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차별이 없으시며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으므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그에 따라서 누구든지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너무나도 분명하지 않는지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에서의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이며, 이 사랑을 받는 '세상'이 무엇을 말하는지를요. 여기에서의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세상’은 온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이 말씀에 이어지고 있는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를 일컫는 것이며, 그래서 '멸망치 않고 영생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하나님의 뜻의 성취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말이죠.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셨으니 ’누구든지 그(독생자)를 믿기만 하면‘에 있는 사람, 즉, 모든 세상의 사방으로부터 나와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를 믿음으로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 사람을 일컫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되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
님이여,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 은혜의 선물을 주시기 위하여 사방의 모든 민족으로부터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불러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오게 하는 하십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는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을 단 한 사람도 악한 마귀에게 빼앗기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인 하나님의 참으로 견고하고 영원한 구원을 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주만 바라봄에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죽음 뒤에 오는 기쁨을 아시고 그 십자가를 수치로 여기지 않고 거기에 달려 죽으셨으며, 지금은 하나님의 보좌에 계시며 자신의 몸인 교회의 생명의 주로서 다스리는 일을 하십니다(히 12:1-4).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생각하고 늘 그분 위에 굳게 잘 서나가시기 바랍니다.
이상으로 답글을 마칩니다.
지금 잠시 멈칫 한 것 같은데,
연일 비가 계속 주룩 주룩 내립니다.
오늘도
주님 안에서 그분을 생각하며,
내일 주일을
복음 안에서 믿음의 형제들과 잘 지내실 것과
평안을
주께 구합니다.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김진구 작성시간 10.09.11 모든 사람이 예수님에 이름을 부르면 혹은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 하시는 분들 즉 모든 사람에게는 동일한 구원에 길이 열려 있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보시면 깜짝 놀라껬죠? 만인구원설 나도처음앤 감리교를 다녔죠.우리 부모님이나 형제들은 아직까지 감리교를 다닙니다.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 또는 구원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다보면...아휴...아시죠? 우리는 오직 감사뿐입니다.(전적인은혜 와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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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동무 작성시간 10.09.11 이 카페로 인도해주신 주께 감사드리며, 목사님 없는 시간 쪼개 주심과 친절하심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제 마음의 소원이 주님을, 말씀을 제대로 알고 싶고 100번 태어나 100번 죽어도 주님께 감사드릴 것 뿐이길 바라는 제 간절함에 더욱 더 그러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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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CRYSTAL 작성시간 10.09.12 하나님의 사랑.. 요한복음 3장 16절과 로마서 5장 8절을 같이 읽고 묵상하면 너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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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새누리 작성시간 10.09.25 성경에서 뭐라하든 나같은 놈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때 아부지께서는 모든자들이 구원 받기를 원하신다고 나는 믿습니다....얼마나 완악하여 못되게 구는 자식이 안타깝기에 난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절규하실까요??...나가 뒤지라고 소리치는 부모의 말에 나가서 죽는 자식이 있을까요?? ...... 한 사람도 지옥 가길 원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는 죽기까지 믿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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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새누리 작성시간 10.09.25 스스로 오셔서 목숨을 버리신 그 분이 가려가며 사랑하신다구요?? ..... 지독하신 사랑의 절규로 받아들이면 안될까요??...에서 같은 놈들아 회개하고 내게로 돌아오라시는 그 분의 피맺힌 절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