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거의 모든 교회들이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기 보다는 내 생각을 먼저 내세워서 그것에 맞추어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하나님께 구한다거나 또한 기도할때에도 어떤 구체적인 밑그림을 그려놓고 거기에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길 바라는 구상화 등등 아주 잘못된 형태의 모습을 보곤합니다.
실로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수님들이나 예배시간에 설교하는 목사님들 또한 항상 저희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보다 넓은 미래를 바라보고 큰 꿈을 가지고 큰 비전을 가져야 하나님께서 쓰시는 일군이 되는 것이지 그런 포부도 안가지면 안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우물안 개구리가 되지 말고 보다 넓은 세계 곳곳으로 가서 선교하고 목회하고 그런 큰 꿈을 가지라고 합니다(조용기 목사의 긍정적 사고 방식과 같은..). 과연 이것이 합당한 것입니까가? 말들어보면 그럴싸 하고 그렇게 되어야지 합니다. 그러나 저는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제 머리 속에는 분명 이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직 제 것으로 소화하기엔 정립이 들 되어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성경적으로 가르져 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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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제가 질문한 내용의 요지는 오늘날 우리네 교회가 가지고 있는 그릇된 신앙관에서 독버섯처럼 퍼져 있는 '긍정적인, 그리고 적극적인 사고 방식'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를 묻고 있습니다.
이 사고 방식은 그동안 이것이 마치 '좋은 믿음'인양 가르쳐져 왔기에 그 그릇됨을 지적해도 잘 수긍하려 들지를 않습니다. 과연 긍정적인, 그리고 적극적인 사고 방식은 성도들이 가져야 할 합당한 것일까요? 이런 식의 사고 방식으로 믿음을 가져가야 할까요?
기독교 신앙에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으로는 믿음이 아닌 데도 마치 믿음인 것으로 알고 있는 것들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적입니다. 왜냐하면 이단이나 사이비 종교의 신앙은 그 옳고 그릇됨의 가늠이 분명합니다. 우선 진리의 지식의 표준이 되는 교리에서 참된 기독교 신앙과 현저한 차이를 드러내 보이고 있기에 주의를 기울이고 대처를 합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역사적 전통 속에서 기독교가 고수해온 교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기독교 신앙이 이교화 된 혼합적인 신앙은 참된 기독교 신앙을 혼란케 하며 복음을 어지럽혀 종내는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생명에서 떠나게 하는 무서운 독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단은 이 전략을 쓰는 것을 가장 좋아하며 즐겨 사용합니다. 그 중에 온 세계에 널리 퍼져 그리스도인에게 깊이 뿌리내려져 있는 것이 긍정적이요 적극적인 사고 방식의 신앙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를 복음적인 입장에서 다루어 그 실체를 앎으로써 참된 신앙을 지켜 나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1. 긍정적인, 그리고 적극적인 사고 방식의 신앙이 갖는 주 내용을 봅니다.
이 사고 방식의 신앙을 강조하는 설교를 보면, 첫째, "나는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라고 합니다. 그 주된 이유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불가능이 없는 역사를 일으키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나는 할 수 없다, 나는 못한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라고 합니다. 그것은 그러한 생각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불신앙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자는 마음의 생각을 처음부터 끝까지 긍정적으로 바꾸고 적극적인 사고 방식으로 "하나님께 구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구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다 이루실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생각한대로 다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긍정적인 사고로 대처할 때 성공에 이른다고 봅니다
2. 그러면 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 방식의 신앙이 어떻게 해서 우리네 교회 전체에 그렇게도 널리 퍼졌고 뿌리 깊게 내려져 있는가를 봅니다.
긍정적인, 그리고 적극적인 사고 방식의 신앙관을 우리네 교회에 소개하고 확산시킨 사람은 조용기입니다. 조용기는 인간의 존재를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4차원적인 영적 존재이다"라고 하면서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처럼 인간은 자기의 상상력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해 나가느냐 하면 우리의 입으로 예수는 그리스도이심을 시인하여서 우리 안에 예수의 임재를 가져오게 하고, 그분이 우리를 통해서 일하실 수 있도록 생각을 긍정적으로 갖고, 일을 긍정적으로 구상하고, 말을 긍정적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한 대로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이러한 조용기의 신앙관은 노만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hill)의 '적극적인 사고 방식'과 로버트 슐러(Robert H. Schuller)의 '가능적 사고'의 영향에 따른 것입니다. 이들이 말하고 있는 부분적인 말로 그들이 가진 견해의 전체를 다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이 전체의 사상을 집약한 것일 수 있으므로 유의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노만 빈센트 필은 적극적인 사고 방식을 기독교에 적용시켜 큰 영향을 끼친 사람입니다. 그는 습관적으로 우리 자신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사고 방식이 우리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신앙은 인간에게서 자기 능력의 수단이며 자기 개발에 자신감을 주는 수단이라고 보면서 빌립보서 4장 13절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를 들어 성령님을 인간이 갖는 열등감과 부정적인 마음을 제거시켜 주는 가장 강력한 해독제가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창조적인 기도를 강조하였습니다. 그는 기도할 때 확신에 찬 마음으로 미래에 대한 그림을 아주 구체적으로 자세히 그리고서 바라보라고 하였습니다.
로버트 슐러는 모든 성공의 비결은 가능적 사고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긍정적 사고자들은 모든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성실하고 정직하게 그들을 명랑하게 만드는 원칙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나의 태도는 열려 있고 하나님의 모든 가능성에 대해서도 항상 준비된 자세입니다. 그 어떤 환경에서도 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가능적 사고의 중요성을 견해의 차이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가능성을 사고하는 사람들도 많은 문제와 고통의 존재를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가능성을 사고하는 사람들과 비관론자의 차이점이 있다면 관점의 차이입니다. 그것은 문제 자체에 집중하는 대신, 문제의 해결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할 수 있으십니다. 그리고 믿음은 희망을 줍니다." 그는 이 가능적 사고를 가지고서 현재의 직면한 문제에 대해서 대처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는 그의 것이 된 것이기 때문에 그때부터 그 사람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된 것이라고 합니다. 미래에 누구나 갖게 되는 그림에 떡처럼 공허한 희망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난 할 수 없다. 그건 불가능하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짐으로써 모든 인간에게는 잠재적으로 상상하고, 꿈꾸고, 날고 싶어하는 자유를 누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조차 한계선을 긋는 이 사슬을 끊음으로써 하나님의 권세에 모든 것을 전적으로 맡기라고 합니다. 그랬을 때 그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삶이 된다고 합니다. 해서, 그는 모든 문제에 부딪힐 때 긍정적으로 대처하라고 합니다. 사실 어떤 문제에 부딪힌다는 것은 사실 성공의 기회를 갖는 것으로써 긍정적인 사고로 대처한다면 부딪힌 어려운 문제로부터 커다란 몫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합니다. 만일 기회가 함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하실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일을 겪는다는 것은 그에게 기회가 함께 주어지는 것이며, 그리고 그 기회를 성공으로 이끌 수 있는 열쇠는 그가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긍정적으로 대처하는데 달려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는 자기에게 주어지는 일상에서 하루하루를 긍정적으로 시작할 것과 아무런 목표 의식이 없는 인생은 죽은 인생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자신이 목표로 하는 것 앞에서 자신의 장차의 모습인 자화상을 그릴 것과 자신의 잠재해 있는 자질을 최대한 개발하여 사용하라고 합니다.
로버트 슐러의 견해는 인간이 당면한 모든 문제의 해결과 그에 따른 성공의 비결이 가능적 사고 안에 있다고 보는데서 갖는 것입니다. 그는 가능적 사고를 신앙으로 끌고 들어가서 믿는 자들에게 가능적 사고를 가진 데 따른 결단의 믿음을 가지라고 합니다. 그는 이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 필요한 것은 부정적인 사고를 버리고 긍정적인 사고를 갖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해서 그는 목회의 성공 요인도 긍정적인 사고에 있다고 합니다.
3. 긍정적인, 그리고 적극적인 사고 방식이 잘못된 기독교 신앙에 접목되어 정착된 데 따른 폐해를 봅니다.
앞서 조용기의 신앙관은 노만 빈센트 필과 로버트 슐러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조용기는 이 두 사람에게서 받은 영향을 '삼박자 구원론'과 접목시켰습니다(필자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소위 삼박자 구원이란 조용기의 구원관입니다. 이 구원론은 요한삼서 2절에 있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를 인용하여서 신앙 사상화(또는 교리화) 시킨 것입니다. 조용기는 말하기를, "삼박자 구원이란 수상집…삼박자 구원은 제 자신의 신앙 사상이요 복음 증거의 철학적인 바탕입니다"라고 한 데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모기독교신문의 편집 부국장과의 대담에서 삼박자 구원을 보수 계통의 토앙적인 신앙 사상을 도식화한 것이라고 말하여 마치 정통 기독교의 구원관인 것처럼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가 "우리가 삼박자 구원의 깊은 의미를 분명히 깨닫고 나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모든 성경 말씀을 삼박자 구원의 기초에 서서 해석하게 됩니다"라고 언급한데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조용기는 삼박자 구원에서 우선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심을 강조합니다. 그는 삼박자 구원을 받기 전에 먼저 좋으신 하나님을 뵈어야 한다고 합니다. 좋으신 하나님은 생명, 풍성, 평안을 주시며 죽은 자까지도 살려 주시는 정말 좋으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부정적인 신앙을 다 던져 버리고 '긍정적인 신앙'만을 가져야 삼박자 구원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오늘날 너무도 많은 강단에서 하나님을 잘못 소개하고 있습니다. 엄하고 무서운 얼굴로 오직 심판만 하기 위해서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을 소개합니다.…좋은 하나님을 믿었으니 좋은 것을 주시면 좋아서 좋고 나쁜 일이 오면 또 좋게 만들어 주실 터이니 좋고, 이러므로 절대 긍정적인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시기에, 그래서 좋은 것만을 주시는 분이시기에 그런 분 앞에서 믿는 자들은 오직 긍정적인 신앙만을 가지라고 하는 논리입니다.
조용기가 긍정적인 신앙만을 가질 강조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생각에도 있습니다. 그는 좋으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셨고, 바로 그 하나님이 지금 당신의 백성이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고 계시다는 말합니다. 거기서 그가 말하고 있는 영혼의 잘 됨은 영혼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영혼의 구원을 받은 자는 또한 범사에 잘 되는 축복을 누린다고 하는데 이는 믿는 자의 생활 환경을 저주에서 축복으로 바꾸어 주시는 것으로, 그리고 영혼이 잘 되고 범사에 잘 된 자는 또한 강건하는 축복을 누린다고 하는데 이는 믿는 자의 육체를 질병과 죽음에서 건강과 생명으로 바꾸어 놓는 축복을 의미하였습니다. 이렇게 구원을 영혼의 구원(조용기가 말하는 인간론은 영, 혼, 육이란 삼분설로서 영과 혼과 육을 인간의 삼위일체로 보면서 그 영과 혼과 육이 각각 맡은 바 사명을 다해 질서가 잡힌 상태를 영혼의 잘 됨으로 보았다. 즉 영은 하나님의 지배를 받고 그 영은 혼을 지배하고, 그러한 혼은 또한 육을 지배함으로써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는 것이다라고 보았다)과 물질에서의 구원과 육체가 강건하는 구원으로 보았습니다.
조용기는 그 세 가지의 구원에 한결같이 긍정적인 신앙을 가질 것을 요구합니다. 그는 현관문을 열고 삼박자 구원의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오직 긍정적인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하였는데 그렇게 해서 영혼의 잘 됨을 본 그는 또한 가령 "왕이라면 왕으로서의 위엄도 갖추어야 하고 재물도 얻어야 하고 권세도 있어야 하는 것이어야 하듯이 두 번 째 방에서는 왕으로서 갖추어야 할 부와 권세와 위엄을 찾는 작업을 하여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범사에 잘 되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그저 좋기만 하신 분이다. 무엇이든지 우리가 긍정적인 신앙을 갖고 원하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은 어떤 무엇도 주실 것임을 믿는다. 이것이 범사에 잘 되는 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논리는 "영혼육이 잘 되면 당연히 범사에 잘 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창조적인 질서요 법칙이다"는 것이며, 그에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로 구원을 받은 자는 필연적으로 의식주를 비롯하여 가정 생활의 안정과 기쁨이나 자녀 교육 문제, 사업과 직장 문제, 인간 관계 문제 등 과연 인간이 당면한 모든 문제에서 잘 되어야 합니다. 이는 그 다음의 세 번째 방에서 육체가 강건하는 구원의 복을 얻는다는 것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는 질병의 근원을 범죄, 마귀, 저주로 나누어 설명하면서 예수님을 병을 짊어지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분으로 묘사하는가 하면 예수님을 믿는 좋은 믿음의 성격을 병과 귀신에서 구원받는 것으로 끌고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그의 설교에서는 많은 부분이 병에서 낫고 귀신에서 놓임을 받고 하는 내용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가령 그는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란 설교에서 "이 세상 모든 앉은뱅이 성령충만 받고 일어나라!, 일어나라!, 일어나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믿는 자들이 이 삼박자 구원에 큰 호기심을 갖고 믿음으로 구하도록 충동시킵니다. "우리들은 지금까지 좋으신 하나님의 현관을 들어서서 영혼이 잘 되는 첫째 방과 범사에 잘 되는 둘째 방을 지나고 마지막으로 강건케 되는 셋째 방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여러분이 둘러 본 이 집의 세 방들,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축복의 방들입니까? 이 집은 여러분의 집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좋으신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며, 그 믿음을 긍정적인 사고 방식으로 가지라고 합니다.
조용기의 이러한 삼박자 구원은 곳곳에서 긍정적이요 적극적인 사고 방식의 신앙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는 가령 우리를 실패케 하는 마음의 자세, 마음의 평화를 잃지 말라, 입으로 성공을 시인하라, 좌절감이란 설교에서 삼박자 구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조용기가 삼박자 구원으로 내세우는 요한삼서 2절은 사도 요한이 장로의 위치에서 '가이오'에게 보낸 기원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이오에 대해 가진 사도 요한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 여기에 세 가지 형식의 구원관이 가르쳐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 방식을 동원하여서 하나님의 복을 끌어내려고 하는 것은 전혀 믿음의 성격이 아닙니다.
문제는 조용기 식의 구원론과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 방식의 신앙관이 그 한 사람의 생각으로 묻혀 버리지 않고 다른 교단에도, 심지어는 소위 자타가 공인하는 복음주의요 보수주의요 전통주의요 정통주의라고 하는 교단에까지, 그래서 기독교 전반에 대단한 영향을 끼쳤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는 교회를 세상적 관점에서 성공주의로 나가려고 하는 목회자들에게 맞아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조용기 식의 목회가 새로운 큰 물줄기의 흐름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지금까지 한국 교계에 큰 후유증으로 남아 있습니다. 더욱이 학생들을 바른 신앙으로 양성해 가야 할 신학자(신학교수)들까지도 채플 시간에서나 교단에서 공공연하게 학생들에게 비젼을 갖게 한다는 명분으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을 가져서 미래를 성공적으로 펼쳐나갈 것을 가르치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하나님께서 크게 쓰시는 일군이 될 수 없는 것처럼 강요 아닌 강요를 합니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 부당성을 인식하고 있지를 못하고 있기에 거기에 매료가 됩니다. 그리고 졸업하고 목사 임직을 받아 목회를 하면서 목회 성공과 결부하여서 성도들에게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을 가질 것을 성도들에게 요구합니다.
그에 따라서 크고 작건 간에 성공(?)한 교회와 그 목회자의 영향은 성도들의 신앙의 형태를 이루고 있습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성공한 목회자들이 "나는 할 수 있다"는 인간의 긍정적 사고를 좋은 믿음으로, 기도의 능력으로 동원하여 만능으로 부각시킴으로써 성도들에게는 깊이 각인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대다수의 성도들이 추구하는 신앙을 볼 때 분명히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이런 믿음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아무리 믿음으로 말할지라도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굳이 이런 믿음을 구분한다고 하면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거짓된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우선 이런 믿음은 기독교 신앙에 변질을 가져옵니다. 기독교 신앙은 성경의 계시관에 따르는데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해하고 예수님을 주로 섬기며 그분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있습니다. 물론 성경의 총체적인 이해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가며 그분의 의로운 백성으로 사는데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참된 신앙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의 백성에게 알게 하신 진리의 지식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전제로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으로서가 아닌 인간의 사고 방식을 동원하여서 인간의 잘 됨을 보려고 하다니요!.
이런 그릇된 신앙에서는 성도들이 무엇을 해도, 예컨대 예배를 드리고 그 외의 시간에서도 틈틈이 성경을 보고 기도를 하고 찬송을 하고 봉사를 하고 하여도 다 자기 중심적입니다. 형제가 안타까워하며 의문시하고 있는 대로 하나님의 뜻을 본의를 알고 그래서 구하기보다는 인간적인 생각을 먼저 내세워서 그것에 맞추어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하나님께 구한다거나 또한 기도 할 때에도 어떤 구체적인 밑그림을 그려놓고 거기에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길 바라는 등등 아주 잘못된 형태의 모습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4. 그리스도인이 참된 신앙 속에서 가질 사고 방식을 생각해 봅니다.
사람이 삶에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 방식을 갖는 그 자체는 아무런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사람이 처한 어떤 일이든지 간에 거기에는 항상 양면성이 있기 마련입니다. 되는 일이 있고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사람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도 되지 않는 일이 있으며, 도무지 될 것 같지 않은 일이 의외로 쉽게 풀려나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일에서는 부정적이고 그래서 소극적인 자세를 취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일을 대처해 나가는 사람으로서는 희망을 갖고 그래서 보다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자세를 취합니다. 그래서 힘을 내어서 나아갑니다. 설사 안 되는 일이 뻔한 대도 "한번 해 보자!"고 합니다. 나름대로 미래에 대한 계획도 세우고 준비도 하고 자신감을 갖고 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무능력하다는 것을 느끼는 상태에 처하기도 합니다. 가령 치료가 힘든 상태에 있는 환자에게 의사의 치료나 가족이나 친지나 친구나 이웃은 병 문안을 통해 위로의 말과 함께 격려도 빼놓지 않습니다.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환자는 낙심한 상태에 있었는데 의사의 권고도 받고 병 문안도 받고 하는 중에 힘을 내서 어떻게 해서든지 낫고자 하는 희망을 갖습니다. 마음에 긍정적인 사고를 갖고 적극적인 자세를 취합니다. 분명히 그래야 하지요. 그런데 온갖 노력이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하기도 하고, 또한 생각한 이상으로 호전되는 결과를 갖기도 합니다.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환자의 비관적인 상태를 예로 들었습니다만, 모든 사람은 각 자가 처한 상태에서 어떤 일에 대한 계획과 그에 따른 비젼을 갖고 그 목표에 이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은 어떤 상황이나 일 앞에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 방식을 갖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너무나도 분명한 현실 앞에서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사고 방식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당연한 일로 겸허하게 받아들여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과 대조하여서 크게 잘못된 것이겠습니까?
기독교 신앙이 없는 사람은 이러한 사고 방식이나 자세가 요구되지 않는가요? 그런가 하면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은 또 어떻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사고 방식을 기독교 신앙과 접목해서 "내게 능력 주신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는 등의 말씀을 이 말씀이 뜻하고 있는 참된 의미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이를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을 말해 주는 것인 줄로 알고서 현재 당면한 문제의 해결이나 장래 일에 대해 자기가 구상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전제로 온갖 믿음의 행태를 갖는 비신앙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설사 아무리 큰 포부 속에서 큰 계획을 가지고 큰 구상을 그린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또한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온 힘을 다하여 기도하며…할지라도 말입니다.
어떤 등반가가 세계 최고봉을 오르기 위하여 죽음을 넘나드는 위험을 겪으면서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 것은 이해가 가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가족의 경우는 자기 남편과 아버지와 형제의 생명이 달린 일입니다. 그래서 "도무지 이해 못한다"고 말하며 등반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며 말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등반가도 그의 가족도 모두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지만 등반가 외의 다른 가족들은 등반이 아닌 다른 일 속에서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에 긍정적이고도 적극적인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들 나름대로 펼쳐나가고자 하는 원대한 구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들이 등반가이든 어떤 직종 속에서 살아가든지 간에 그들이 놓치지 않고 붙잡고 살아가는 것이 있습니다. 참 신이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으로 살아가는 형편이 어떻든지 간에 말입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부유한 형편에 있어도, 아니면 가난한 형편에 있어도 그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설사 죽음의 위험이나 그러한 시기에 직면해 있어도 하나님을 생명의 주로 붙들고 의존하는 열망은 더욱 커져갑니다. 이것이 진정 그리스도인이 가질 사고 방식이 아닐까요?
목회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목회를 하는 분들은 교회에 대한 욕망이 대단합니다. 그래서 이름도 거창하게 사용합니다. 한국중앙교회, 세계제일교회 등 유난히 '중앙'이란 말과 '제일'이란 말을 즐겨 사용합니다. 가령 서울 어느 한 지역에 교회가 세워질 때 서울중앙교회, 서울제일교회라고 합니다. 서울에서 한국에서 세계에서 중앙에 우뚝 선 그런 유명한 교회로, 또는 서울에서 한국에서 세계에서 제일 가는 그런 유명한 교회에 대한 부푼 기대를 갖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 말했듯이 중앙이나 제일은 단 하나 뿐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무엇입니까? 똑같이 그런 교회를 구상하고 열심을 가졌는데 말입니다. 반면에 저 지방 시골에서, 그것도 오지에서 몇 사람을 놓고 목회를 하는 분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외면 당한 믿음 없는 목회자입니까?
목회에는 성공도 실패도 없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가 보편의 거룩한 공교회의 속성을 알면 목회의 성공을 자기 나름대로 구상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긍정적이고도 적극적인 사고 방식으로 이루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서울에서나 한국에서나 세계에서나 제일 가는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믿음의 그릇이 작아서 저 오지에나 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있게 하신 그 교회에서 우리에게 알게 하신 교회적 속성에 대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를 가질 뿐입니다. 주님의 교회를 교회다웁게 이루기 위해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복음을 오직 순전한 마음으로 전할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구원 얻은 생명을 맡겨 주셨다면 그 생명을 양육하는 일에 힘을 다하여 충성할 뿐입니다. 그 교회가 어떤 것이든지 간에, 즉 어떤 형편 속에서 우리가 목회자로 있든지 간에 우리에게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목회를 할뿐입니다. 그와 같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에게서는 전부입니다. 이는 그분 안에서 자기 생명을 보기 때문입니다.
명복 형제, 언제나 글을 쓰고 나면 대답이 미미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복음적인 다른 분들의 의견과 글도 참조하여서 더욱 자세한 도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럼 안녕히.....
실로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수님들이나 예배시간에 설교하는 목사님들 또한 항상 저희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보다 넓은 미래를 바라보고 큰 꿈을 가지고 큰 비전을 가져야 하나님께서 쓰시는 일군이 되는 것이지 그런 포부도 안가지면 안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우물안 개구리가 되지 말고 보다 넓은 세계 곳곳으로 가서 선교하고 목회하고 그런 큰 꿈을 가지라고 합니다(조용기 목사의 긍정적 사고 방식과 같은..). 과연 이것이 합당한 것입니까가? 말들어보면 그럴싸 하고 그렇게 되어야지 합니다. 그러나 저는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제 머리 속에는 분명 이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직 제 것으로 소화하기엔 정립이 들 되어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성경적으로 가르져 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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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제가 질문한 내용의 요지는 오늘날 우리네 교회가 가지고 있는 그릇된 신앙관에서 독버섯처럼 퍼져 있는 '긍정적인, 그리고 적극적인 사고 방식'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를 묻고 있습니다.
이 사고 방식은 그동안 이것이 마치 '좋은 믿음'인양 가르쳐져 왔기에 그 그릇됨을 지적해도 잘 수긍하려 들지를 않습니다. 과연 긍정적인, 그리고 적극적인 사고 방식은 성도들이 가져야 할 합당한 것일까요? 이런 식의 사고 방식으로 믿음을 가져가야 할까요?
기독교 신앙에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으로는 믿음이 아닌 데도 마치 믿음인 것으로 알고 있는 것들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적입니다. 왜냐하면 이단이나 사이비 종교의 신앙은 그 옳고 그릇됨의 가늠이 분명합니다. 우선 진리의 지식의 표준이 되는 교리에서 참된 기독교 신앙과 현저한 차이를 드러내 보이고 있기에 주의를 기울이고 대처를 합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역사적 전통 속에서 기독교가 고수해온 교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기독교 신앙이 이교화 된 혼합적인 신앙은 참된 기독교 신앙을 혼란케 하며 복음을 어지럽혀 종내는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생명에서 떠나게 하는 무서운 독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단은 이 전략을 쓰는 것을 가장 좋아하며 즐겨 사용합니다. 그 중에 온 세계에 널리 퍼져 그리스도인에게 깊이 뿌리내려져 있는 것이 긍정적이요 적극적인 사고 방식의 신앙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를 복음적인 입장에서 다루어 그 실체를 앎으로써 참된 신앙을 지켜 나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1. 긍정적인, 그리고 적극적인 사고 방식의 신앙이 갖는 주 내용을 봅니다.
이 사고 방식의 신앙을 강조하는 설교를 보면, 첫째, "나는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라고 합니다. 그 주된 이유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불가능이 없는 역사를 일으키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나는 할 수 없다, 나는 못한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라고 합니다. 그것은 그러한 생각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불신앙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자는 마음의 생각을 처음부터 끝까지 긍정적으로 바꾸고 적극적인 사고 방식으로 "하나님께 구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구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다 이루실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생각한대로 다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긍정적인 사고로 대처할 때 성공에 이른다고 봅니다
2. 그러면 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 방식의 신앙이 어떻게 해서 우리네 교회 전체에 그렇게도 널리 퍼졌고 뿌리 깊게 내려져 있는가를 봅니다.
긍정적인, 그리고 적극적인 사고 방식의 신앙관을 우리네 교회에 소개하고 확산시킨 사람은 조용기입니다. 조용기는 인간의 존재를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4차원적인 영적 존재이다"라고 하면서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처럼 인간은 자기의 상상력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해 나가느냐 하면 우리의 입으로 예수는 그리스도이심을 시인하여서 우리 안에 예수의 임재를 가져오게 하고, 그분이 우리를 통해서 일하실 수 있도록 생각을 긍정적으로 갖고, 일을 긍정적으로 구상하고, 말을 긍정적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한 대로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이러한 조용기의 신앙관은 노만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hill)의 '적극적인 사고 방식'과 로버트 슐러(Robert H. Schuller)의 '가능적 사고'의 영향에 따른 것입니다. 이들이 말하고 있는 부분적인 말로 그들이 가진 견해의 전체를 다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이 전체의 사상을 집약한 것일 수 있으므로 유의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노만 빈센트 필은 적극적인 사고 방식을 기독교에 적용시켜 큰 영향을 끼친 사람입니다. 그는 습관적으로 우리 자신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사고 방식이 우리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신앙은 인간에게서 자기 능력의 수단이며 자기 개발에 자신감을 주는 수단이라고 보면서 빌립보서 4장 13절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를 들어 성령님을 인간이 갖는 열등감과 부정적인 마음을 제거시켜 주는 가장 강력한 해독제가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창조적인 기도를 강조하였습니다. 그는 기도할 때 확신에 찬 마음으로 미래에 대한 그림을 아주 구체적으로 자세히 그리고서 바라보라고 하였습니다.
로버트 슐러는 모든 성공의 비결은 가능적 사고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긍정적 사고자들은 모든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성실하고 정직하게 그들을 명랑하게 만드는 원칙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나의 태도는 열려 있고 하나님의 모든 가능성에 대해서도 항상 준비된 자세입니다. 그 어떤 환경에서도 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가능적 사고의 중요성을 견해의 차이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가능성을 사고하는 사람들도 많은 문제와 고통의 존재를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가능성을 사고하는 사람들과 비관론자의 차이점이 있다면 관점의 차이입니다. 그것은 문제 자체에 집중하는 대신, 문제의 해결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할 수 있으십니다. 그리고 믿음은 희망을 줍니다." 그는 이 가능적 사고를 가지고서 현재의 직면한 문제에 대해서 대처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는 그의 것이 된 것이기 때문에 그때부터 그 사람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된 것이라고 합니다. 미래에 누구나 갖게 되는 그림에 떡처럼 공허한 희망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난 할 수 없다. 그건 불가능하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짐으로써 모든 인간에게는 잠재적으로 상상하고, 꿈꾸고, 날고 싶어하는 자유를 누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조차 한계선을 긋는 이 사슬을 끊음으로써 하나님의 권세에 모든 것을 전적으로 맡기라고 합니다. 그랬을 때 그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삶이 된다고 합니다. 해서, 그는 모든 문제에 부딪힐 때 긍정적으로 대처하라고 합니다. 사실 어떤 문제에 부딪힌다는 것은 사실 성공의 기회를 갖는 것으로써 긍정적인 사고로 대처한다면 부딪힌 어려운 문제로부터 커다란 몫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합니다. 만일 기회가 함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하실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일을 겪는다는 것은 그에게 기회가 함께 주어지는 것이며, 그리고 그 기회를 성공으로 이끌 수 있는 열쇠는 그가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긍정적으로 대처하는데 달려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는 자기에게 주어지는 일상에서 하루하루를 긍정적으로 시작할 것과 아무런 목표 의식이 없는 인생은 죽은 인생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자신이 목표로 하는 것 앞에서 자신의 장차의 모습인 자화상을 그릴 것과 자신의 잠재해 있는 자질을 최대한 개발하여 사용하라고 합니다.
로버트 슐러의 견해는 인간이 당면한 모든 문제의 해결과 그에 따른 성공의 비결이 가능적 사고 안에 있다고 보는데서 갖는 것입니다. 그는 가능적 사고를 신앙으로 끌고 들어가서 믿는 자들에게 가능적 사고를 가진 데 따른 결단의 믿음을 가지라고 합니다. 그는 이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 필요한 것은 부정적인 사고를 버리고 긍정적인 사고를 갖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해서 그는 목회의 성공 요인도 긍정적인 사고에 있다고 합니다.
3. 긍정적인, 그리고 적극적인 사고 방식이 잘못된 기독교 신앙에 접목되어 정착된 데 따른 폐해를 봅니다.
앞서 조용기의 신앙관은 노만 빈센트 필과 로버트 슐러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조용기는 이 두 사람에게서 받은 영향을 '삼박자 구원론'과 접목시켰습니다(필자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소위 삼박자 구원이란 조용기의 구원관입니다. 이 구원론은 요한삼서 2절에 있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를 인용하여서 신앙 사상화(또는 교리화) 시킨 것입니다. 조용기는 말하기를, "삼박자 구원이란 수상집…삼박자 구원은 제 자신의 신앙 사상이요 복음 증거의 철학적인 바탕입니다"라고 한 데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모기독교신문의 편집 부국장과의 대담에서 삼박자 구원을 보수 계통의 토앙적인 신앙 사상을 도식화한 것이라고 말하여 마치 정통 기독교의 구원관인 것처럼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가 "우리가 삼박자 구원의 깊은 의미를 분명히 깨닫고 나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모든 성경 말씀을 삼박자 구원의 기초에 서서 해석하게 됩니다"라고 언급한데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조용기는 삼박자 구원에서 우선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심을 강조합니다. 그는 삼박자 구원을 받기 전에 먼저 좋으신 하나님을 뵈어야 한다고 합니다. 좋으신 하나님은 생명, 풍성, 평안을 주시며 죽은 자까지도 살려 주시는 정말 좋으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부정적인 신앙을 다 던져 버리고 '긍정적인 신앙'만을 가져야 삼박자 구원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오늘날 너무도 많은 강단에서 하나님을 잘못 소개하고 있습니다. 엄하고 무서운 얼굴로 오직 심판만 하기 위해서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을 소개합니다.…좋은 하나님을 믿었으니 좋은 것을 주시면 좋아서 좋고 나쁜 일이 오면 또 좋게 만들어 주실 터이니 좋고, 이러므로 절대 긍정적인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시기에, 그래서 좋은 것만을 주시는 분이시기에 그런 분 앞에서 믿는 자들은 오직 긍정적인 신앙만을 가지라고 하는 논리입니다.
조용기가 긍정적인 신앙만을 가질 강조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생각에도 있습니다. 그는 좋으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셨고, 바로 그 하나님이 지금 당신의 백성이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고 계시다는 말합니다. 거기서 그가 말하고 있는 영혼의 잘 됨은 영혼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영혼의 구원을 받은 자는 또한 범사에 잘 되는 축복을 누린다고 하는데 이는 믿는 자의 생활 환경을 저주에서 축복으로 바꾸어 주시는 것으로, 그리고 영혼이 잘 되고 범사에 잘 된 자는 또한 강건하는 축복을 누린다고 하는데 이는 믿는 자의 육체를 질병과 죽음에서 건강과 생명으로 바꾸어 놓는 축복을 의미하였습니다. 이렇게 구원을 영혼의 구원(조용기가 말하는 인간론은 영, 혼, 육이란 삼분설로서 영과 혼과 육을 인간의 삼위일체로 보면서 그 영과 혼과 육이 각각 맡은 바 사명을 다해 질서가 잡힌 상태를 영혼의 잘 됨으로 보았다. 즉 영은 하나님의 지배를 받고 그 영은 혼을 지배하고, 그러한 혼은 또한 육을 지배함으로써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는 것이다라고 보았다)과 물질에서의 구원과 육체가 강건하는 구원으로 보았습니다.
조용기는 그 세 가지의 구원에 한결같이 긍정적인 신앙을 가질 것을 요구합니다. 그는 현관문을 열고 삼박자 구원의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오직 긍정적인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하였는데 그렇게 해서 영혼의 잘 됨을 본 그는 또한 가령 "왕이라면 왕으로서의 위엄도 갖추어야 하고 재물도 얻어야 하고 권세도 있어야 하는 것이어야 하듯이 두 번 째 방에서는 왕으로서 갖추어야 할 부와 권세와 위엄을 찾는 작업을 하여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범사에 잘 되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그저 좋기만 하신 분이다. 무엇이든지 우리가 긍정적인 신앙을 갖고 원하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은 어떤 무엇도 주실 것임을 믿는다. 이것이 범사에 잘 되는 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논리는 "영혼육이 잘 되면 당연히 범사에 잘 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창조적인 질서요 법칙이다"는 것이며, 그에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로 구원을 받은 자는 필연적으로 의식주를 비롯하여 가정 생활의 안정과 기쁨이나 자녀 교육 문제, 사업과 직장 문제, 인간 관계 문제 등 과연 인간이 당면한 모든 문제에서 잘 되어야 합니다. 이는 그 다음의 세 번째 방에서 육체가 강건하는 구원의 복을 얻는다는 것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는 질병의 근원을 범죄, 마귀, 저주로 나누어 설명하면서 예수님을 병을 짊어지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분으로 묘사하는가 하면 예수님을 믿는 좋은 믿음의 성격을 병과 귀신에서 구원받는 것으로 끌고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그의 설교에서는 많은 부분이 병에서 낫고 귀신에서 놓임을 받고 하는 내용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가령 그는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란 설교에서 "이 세상 모든 앉은뱅이 성령충만 받고 일어나라!, 일어나라!, 일어나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믿는 자들이 이 삼박자 구원에 큰 호기심을 갖고 믿음으로 구하도록 충동시킵니다. "우리들은 지금까지 좋으신 하나님의 현관을 들어서서 영혼이 잘 되는 첫째 방과 범사에 잘 되는 둘째 방을 지나고 마지막으로 강건케 되는 셋째 방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여러분이 둘러 본 이 집의 세 방들,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축복의 방들입니까? 이 집은 여러분의 집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좋으신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며, 그 믿음을 긍정적인 사고 방식으로 가지라고 합니다.
조용기의 이러한 삼박자 구원은 곳곳에서 긍정적이요 적극적인 사고 방식의 신앙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는 가령 우리를 실패케 하는 마음의 자세, 마음의 평화를 잃지 말라, 입으로 성공을 시인하라, 좌절감이란 설교에서 삼박자 구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조용기가 삼박자 구원으로 내세우는 요한삼서 2절은 사도 요한이 장로의 위치에서 '가이오'에게 보낸 기원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이오에 대해 가진 사도 요한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 여기에 세 가지 형식의 구원관이 가르쳐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 방식을 동원하여서 하나님의 복을 끌어내려고 하는 것은 전혀 믿음의 성격이 아닙니다.
문제는 조용기 식의 구원론과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 방식의 신앙관이 그 한 사람의 생각으로 묻혀 버리지 않고 다른 교단에도, 심지어는 소위 자타가 공인하는 복음주의요 보수주의요 전통주의요 정통주의라고 하는 교단에까지, 그래서 기독교 전반에 대단한 영향을 끼쳤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는 교회를 세상적 관점에서 성공주의로 나가려고 하는 목회자들에게 맞아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조용기 식의 목회가 새로운 큰 물줄기의 흐름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지금까지 한국 교계에 큰 후유증으로 남아 있습니다. 더욱이 학생들을 바른 신앙으로 양성해 가야 할 신학자(신학교수)들까지도 채플 시간에서나 교단에서 공공연하게 학생들에게 비젼을 갖게 한다는 명분으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을 가져서 미래를 성공적으로 펼쳐나갈 것을 가르치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하나님께서 크게 쓰시는 일군이 될 수 없는 것처럼 강요 아닌 강요를 합니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 부당성을 인식하고 있지를 못하고 있기에 거기에 매료가 됩니다. 그리고 졸업하고 목사 임직을 받아 목회를 하면서 목회 성공과 결부하여서 성도들에게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을 가질 것을 성도들에게 요구합니다.
그에 따라서 크고 작건 간에 성공(?)한 교회와 그 목회자의 영향은 성도들의 신앙의 형태를 이루고 있습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성공한 목회자들이 "나는 할 수 있다"는 인간의 긍정적 사고를 좋은 믿음으로, 기도의 능력으로 동원하여 만능으로 부각시킴으로써 성도들에게는 깊이 각인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대다수의 성도들이 추구하는 신앙을 볼 때 분명히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이런 믿음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아무리 믿음으로 말할지라도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굳이 이런 믿음을 구분한다고 하면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거짓된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우선 이런 믿음은 기독교 신앙에 변질을 가져옵니다. 기독교 신앙은 성경의 계시관에 따르는데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해하고 예수님을 주로 섬기며 그분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있습니다. 물론 성경의 총체적인 이해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가며 그분의 의로운 백성으로 사는데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참된 신앙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의 백성에게 알게 하신 진리의 지식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전제로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으로서가 아닌 인간의 사고 방식을 동원하여서 인간의 잘 됨을 보려고 하다니요!.
이런 그릇된 신앙에서는 성도들이 무엇을 해도, 예컨대 예배를 드리고 그 외의 시간에서도 틈틈이 성경을 보고 기도를 하고 찬송을 하고 봉사를 하고 하여도 다 자기 중심적입니다. 형제가 안타까워하며 의문시하고 있는 대로 하나님의 뜻을 본의를 알고 그래서 구하기보다는 인간적인 생각을 먼저 내세워서 그것에 맞추어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하나님께 구한다거나 또한 기도 할 때에도 어떤 구체적인 밑그림을 그려놓고 거기에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길 바라는 등등 아주 잘못된 형태의 모습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4. 그리스도인이 참된 신앙 속에서 가질 사고 방식을 생각해 봅니다.
사람이 삶에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 방식을 갖는 그 자체는 아무런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사람이 처한 어떤 일이든지 간에 거기에는 항상 양면성이 있기 마련입니다. 되는 일이 있고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사람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도 되지 않는 일이 있으며, 도무지 될 것 같지 않은 일이 의외로 쉽게 풀려나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일에서는 부정적이고 그래서 소극적인 자세를 취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일을 대처해 나가는 사람으로서는 희망을 갖고 그래서 보다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자세를 취합니다. 그래서 힘을 내어서 나아갑니다. 설사 안 되는 일이 뻔한 대도 "한번 해 보자!"고 합니다. 나름대로 미래에 대한 계획도 세우고 준비도 하고 자신감을 갖고 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무능력하다는 것을 느끼는 상태에 처하기도 합니다. 가령 치료가 힘든 상태에 있는 환자에게 의사의 치료나 가족이나 친지나 친구나 이웃은 병 문안을 통해 위로의 말과 함께 격려도 빼놓지 않습니다.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환자는 낙심한 상태에 있었는데 의사의 권고도 받고 병 문안도 받고 하는 중에 힘을 내서 어떻게 해서든지 낫고자 하는 희망을 갖습니다. 마음에 긍정적인 사고를 갖고 적극적인 자세를 취합니다. 분명히 그래야 하지요. 그런데 온갖 노력이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하기도 하고, 또한 생각한 이상으로 호전되는 결과를 갖기도 합니다.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환자의 비관적인 상태를 예로 들었습니다만, 모든 사람은 각 자가 처한 상태에서 어떤 일에 대한 계획과 그에 따른 비젼을 갖고 그 목표에 이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은 어떤 상황이나 일 앞에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 방식을 갖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너무나도 분명한 현실 앞에서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사고 방식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당연한 일로 겸허하게 받아들여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과 대조하여서 크게 잘못된 것이겠습니까?
기독교 신앙이 없는 사람은 이러한 사고 방식이나 자세가 요구되지 않는가요? 그런가 하면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은 또 어떻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사고 방식을 기독교 신앙과 접목해서 "내게 능력 주신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는 등의 말씀을 이 말씀이 뜻하고 있는 참된 의미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이를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을 말해 주는 것인 줄로 알고서 현재 당면한 문제의 해결이나 장래 일에 대해 자기가 구상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전제로 온갖 믿음의 행태를 갖는 비신앙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설사 아무리 큰 포부 속에서 큰 계획을 가지고 큰 구상을 그린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또한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온 힘을 다하여 기도하며…할지라도 말입니다.
어떤 등반가가 세계 최고봉을 오르기 위하여 죽음을 넘나드는 위험을 겪으면서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 것은 이해가 가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가족의 경우는 자기 남편과 아버지와 형제의 생명이 달린 일입니다. 그래서 "도무지 이해 못한다"고 말하며 등반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며 말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등반가도 그의 가족도 모두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지만 등반가 외의 다른 가족들은 등반이 아닌 다른 일 속에서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에 긍정적이고도 적극적인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들 나름대로 펼쳐나가고자 하는 원대한 구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들이 등반가이든 어떤 직종 속에서 살아가든지 간에 그들이 놓치지 않고 붙잡고 살아가는 것이 있습니다. 참 신이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으로 살아가는 형편이 어떻든지 간에 말입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부유한 형편에 있어도, 아니면 가난한 형편에 있어도 그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설사 죽음의 위험이나 그러한 시기에 직면해 있어도 하나님을 생명의 주로 붙들고 의존하는 열망은 더욱 커져갑니다. 이것이 진정 그리스도인이 가질 사고 방식이 아닐까요?
목회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목회를 하는 분들은 교회에 대한 욕망이 대단합니다. 그래서 이름도 거창하게 사용합니다. 한국중앙교회, 세계제일교회 등 유난히 '중앙'이란 말과 '제일'이란 말을 즐겨 사용합니다. 가령 서울 어느 한 지역에 교회가 세워질 때 서울중앙교회, 서울제일교회라고 합니다. 서울에서 한국에서 세계에서 중앙에 우뚝 선 그런 유명한 교회로, 또는 서울에서 한국에서 세계에서 제일 가는 그런 유명한 교회에 대한 부푼 기대를 갖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 말했듯이 중앙이나 제일은 단 하나 뿐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무엇입니까? 똑같이 그런 교회를 구상하고 열심을 가졌는데 말입니다. 반면에 저 지방 시골에서, 그것도 오지에서 몇 사람을 놓고 목회를 하는 분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외면 당한 믿음 없는 목회자입니까?
목회에는 성공도 실패도 없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가 보편의 거룩한 공교회의 속성을 알면 목회의 성공을 자기 나름대로 구상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긍정적이고도 적극적인 사고 방식으로 이루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서울에서나 한국에서나 세계에서나 제일 가는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믿음의 그릇이 작아서 저 오지에나 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있게 하신 그 교회에서 우리에게 알게 하신 교회적 속성에 대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를 가질 뿐입니다. 주님의 교회를 교회다웁게 이루기 위해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복음을 오직 순전한 마음으로 전할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구원 얻은 생명을 맡겨 주셨다면 그 생명을 양육하는 일에 힘을 다하여 충성할 뿐입니다. 그 교회가 어떤 것이든지 간에, 즉 어떤 형편 속에서 우리가 목회자로 있든지 간에 우리에게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목회를 할뿐입니다. 그와 같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에게서는 전부입니다. 이는 그분 안에서 자기 생명을 보기 때문입니다.
명복 형제, 언제나 글을 쓰고 나면 대답이 미미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복음적인 다른 분들의 의견과 글도 참조하여서 더욱 자세한 도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럼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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