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shalom!님
주 안에서
평안하옵신지요.
정말 날씨가 덥습니다. 더위가 절정일 때는 “덥다”가 아니라, “뜨겁다”란 말이 저절로 나올 정도입니다. 이러한 더위 때에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님께서는 기도에 대해서 질문을 하였습니다. 내용인즉, “과연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기도에 대한 접근과 응답을 동일하게 보아야 하는 것인지?말입니다. 어설프게 공부를 해보니 성경 66권의 완전한 계시를 가진 우리는 구약성도들처럼 부르짖어 기도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응답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가 해야 하는 기도는 어떤 것인지? 응답은 어떻게 받고 알게 되는 것인지? 너무 알고 싶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님이 질문한 내용을 보면 (1) 하나는, 과연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기도에 대한 접근과 응답을 동일하게 보아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요 (2) 또 하나는, 성경 66권의 완전한 계시를 가진 우리는 구약성도들처럼 부르짖어 기도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응답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가 해야 하는 기도는 어떤 것인지? 응답은 어떻게 받고 알게 되는 것인지?
이에 다음과 같이 답변을 드립니다.
먼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기도에 대한 접근과 응답을 동일하게 보아야 하는 것인가? 에 대한 질문의 답변은 분명하게 “그렇습니다.”입니다.
이러한 답변을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기도가 무엇이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기도(祈禱) 란 단어가 지닌 국어사전적인 의미는, 곧 기도란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빈다’는 것인데, 이는 사람보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어떤 신이나 절대적 존재에게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기를 빈다, 또는 구한다는 것입니다. 이 ‘빈다’는 것은 사람이 소원하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가 지닌 이러한 의미를 그대로 성경의 기도에다가 적용하여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기도하여서 하나님의 마음을 열어 나라와 민족, 교회와 자신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 받는 방법, 또는 비결로 삼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성경에서의 기도는 그러한 것을 비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찬양 형식의 기도로 종종 말해지고 있는 시편에서 한 곳인 148편을 예로 보면, 이곳의 주제는 “하나님을 찬양하라.”입니다. 하늘과 바다와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동원되어서, 세상 나라의 모든 왕들과 백성들, 남녀노소, 처녀와 총각, 노인과 어린 아이들의 입에서 나올 것은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에 그 모든 것이 있는가 하면요. 그 모두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들이요, 그 모두에게서 하나님은 주가 되셔서 그 이름이 홀로 높으시고, 그 위엄이 천지에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 곧 주님을 가까이하는 이스라엘 자손의 찬양을 받으실 것이다. 그래서 말입니다. ‘할렐루야’, 곧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합니다.
구약성경에서의 기도는 하나님이 온 세상의 주가 되심을 말하며, 그분이 자기 백성 삼으신 이스라엘의 주이심을, 이스라엘은 주 하나님의 백성이심을, 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인 구원이 알게 해주고 있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나타내는 것에 있습니다. 세상은요. 그러한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신 일을 듣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신 일을 나타내며 이를 전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의 중심 사상은 이 모두는 ‘메시야 - 그리스도 - 언약’에 따른 것이라는 것에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의 기도도 구약성경에서의 기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자신을 따름에 있게 한 제자들에게 그들에게 있게 될 기도, 곧 그들이 어떤 기도에 있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높임을 받으시며 그분의 나라가 임하시는 것에서 그분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는 것이며, 이는 우리에게 날마다 필요한 생명이 되는 양식을 공급하시고 우리를 죄에서 사하시며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원하실 것에 두실 것에서 있게 됩니다. 여기에서 나타내 보이게 되는 아버지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사역은 제자들을 이 기도에 두신 그대로였습니다. 그러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는, 그래서 제자들을 이 기도에 있게 하신 것은, 곧 제자들이 구함에 있게 하신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하시고 또한 이루실 것을 알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예수님이 가지신 기도는 그러한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시며 예수님이 하실 일에서 나타내시게 되는 예수님의 자기 계시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기도에 있게 하신 그 기도의 내용을 십자가의 구속 사역을 통해 온전히 성취하시는 것에서 기도의 응답이 되셨습니다.
사도들의 복음 전파 사역에서 보게 되는, 특히 사도 바울의 서신에서 보게 되는 기도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으로 가득함과 이렇게 찬양하게 되는 까닭이 하나님의 복음인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차별없이 온 세상에 전파됨으로 인해서 그리스도 안에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죄로부터의 구원에 의하여 그리스도와 한몸인 교회로 서 나감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으로 가득합니다. 이 은혜로운 하나님의 일에 있으며,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을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생명이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인지를 말하며, 그러한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주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그들에게 주어진 영생하는 생명에 있는 운명을 같이 하는 것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으면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것의 각오에 있다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알게 해주며 하나님의 은혜를 의존하는 것에 기도의 내용이 가득합니다.
님이여.
구약성경에서의 하나님의 백성의 기도와 신약성경에서의 하나님의 백성의 기도는 다르지 않습니다. 별반 다르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과연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기도에 대한 접근과 응답을 동일하게 보아야 하는 것인지?” 라고 하며 궁금해 하셨는지요. 그렇습니다. 동일하게 보셔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기도가 말이죠. 하나님께서 구함에 있게 하신 기도에 있다면 분명히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는 기도는 자의적인 욕구의 충동에 의한 구함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갖는 욕망대로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는 기도에 우리의 기도가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는 기도는 말이죠.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구하게 하신 기도에, 그리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신 구원 사역에 우리의 믿음이 있어 그 고백에 있는 기도에 근거합니다.
님이여.
이제, 두 번째 질문에 대하여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님은 “어설프게(성경을) 공부를 해보니 성경 66권의 완전한 계시를 가진 우리는 구약성도들처럼 부르짖어 기도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응답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가 해야 하는 기도는 어떤 것인지? 응답은 어떻게 받고 알게 되는 것인지? 너무 알고 싶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님이 하는 기도가 어떤지요. 성경을 읽으면, 구약성경을 읽고 신약성경을 읽으면, 그 모든 성경에서 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께 님의 믿음이 뿌리 내려 견고히 서 있는 것에서 님이 그리스도께 대하여 가지고 있는 부요함에 있는 지식과 지혜로 가져지는 생각과 여기에서 말해져 나오는 말, 이것이 님이 기도에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지요. 기도는 말이죠.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인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보며 그분을 이해하는 생각에 깊이 잠겨 있으며 그 묵상에 있는 것에서도 님은 기도에 있는 것이며, 그리스도와 하나 된 생각에서 이런저런 일에 있는 것에서도 님은 기도에 있는 것입니다. 님이 그리스도를 존귀히 여김에 있는 것에서 님의 몸을, 일생을 드려가고자 하며, 그 은혜를 구함에 있는지요. 그리고 그 은혜를 좇아 살아가시는지요. 그렇다면 말입니다. 님은 참으로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님이 믿음의 지체들과 함께 성령의 교통케 하심에 의한 친밀한 복음의 교제에 있는지요. 그렇다면 말이죠. 성령님이 구하시는 기도에 님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는 말이죠.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기도는 ‘자기 의’로서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도는 말이죠. 말을 많이 하면 응답받을 줄 알고 주문(呪文)하듯이 ‘중언부언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기도는 이런 것에서 보게 되는 기도와는 전혀 다릅니다. 왜냐하면 그 모두는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께 하는 기도가 아니며, 또한 하나님이 구하게 하신 기도도 아닌 한갓 자기 욕심에서 가져지는 탐심으로 세상에서 취한 생명 없는 우상에게 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기도한다면 거기에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구하게 하신 기도의 응답이란 결코 있을 수가 없습니다. 단지 자기 욕심에서 가져지는 탐심으로 구한데 따라 되어지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하는 상태에 있을 뿐이죠.
우리는 성경에서의 기도를 보고 배움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육에 있는 인간의 기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몸을 입고 있는 한에는 어찌 이 육의 기도를 벗어날 수 있겠는지요. 그러니 성경에서의 기도를 알면서도 말이죠. 육이 부딪치고 있는 현실에서 육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고 삽니다. 그래서 육에서 나오는 기도에 있고 있습니다. 이걸 부정하고 싶은지요. 그래서 부정하고 싶은 대로 또한 부정할 수 있겠는지요. 우리 입에 단 몇 끼니의 음식과 음료만이라도 들어가지 않으면 우리 몸이 도무지 견디지 못하고 그것을 구함에 있는데 말입니다. 이렇게 육이 구하는 것은 의식주에 있으며, 사회, 경제, 교육, 정치 등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것에서 여실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만을 존귀히 여기며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시는지요. 과연 그러해야 하지 않겠는지요. 그것을 사도 바울이 말해주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한 존재가 그리스도인인데,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하여서 온갖 자기 영광을 취하고자 함에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 육이란 몸에서 죄는 활동하며 그 힘을 발휘합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몸으로 있는 우리에게서 말이죠. 이 몸에서 나오는 육의 기도가 아닌, 우리 안에 내주해 계신 성령님의 간구하심으로 말미암은 영의 기도에 있는 자신을 보는 기쁨에 있습니다. 육의 기도에 있는 것에 비하여 이 영의 기도에 있는 것이 참으로 미미하여 보이는지요. 그러나 말입니다. 참으로 어느 한 순간 순간에 가져지는 기도인 것 같은데, 그 기도에서 우리가 사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에 있음을 말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요. 육의 기도로 나 자신이 소망 없게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는 그러한 자신을 전능하신 하나님이 일으키십니다. 그 은혜를 매일 매일, 곧 날마다, 그리고 순간마다 입고 있는 우리입니다. 곧,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언제까지이겠는지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 재림 - 그 날까지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에 온전히 사로잡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는 다스림에서 죄가 아무리 그 힘을 세도 있게 발휘할지라도 어떻게 무기력한지,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죄를 이김에 있는지 말입니다.
그러기에 말입니다. 기도는 ‘말’에 있지 않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와의 싸움에 있는 우리에게 어떻게 능력있게 행하시는지, 그래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는지를 말해주며 그 믿음에 있게 해주시고 있는 것이 기도 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님은 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모두가 그렇습니다.
님이여.
이상으로
답글을 마칩니다.
본 답글이
기도에 대해 바르게 알고자 하며,
바른 기도에 있고자 하는 님에게
도움이 되는
유익한 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 안에서
평안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