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신앙을 지켜주는 목회자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참된 종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를 언급하기를 저들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누리는 자유를 의심하고 우리를 율법의 종으로 삼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은 단 한순간도 그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갈라디아 교회가 오직 복음의 진리 속에 항상 있게 하려는 마음에서였습니다(갈라디아서 2장 4-5절 참조).
오늘날의 교회 안에도 사람들의 관심에 초점을 두고 사람들을 모으려고 하고 자기 목적을 기독교를 이용해 이루려는 무리들이 매우 많습니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쉽게 호감을 사고 인정을 받을만한 여러 가지 매력과 인간적 보이는 관심에 아주 능합니다. 가령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거짓된 교사들은 다른 복음을 가르치며 교인들을 카리스마적으로 휘어잡고 이끌었는데 대다수의 고린도 교인들은 그런 자들을 잘 따랐습니다. 반면에 오직 복음의 진리를 나타내기 위해 수고한 바울에 대해서는 그의 사도직을 의심했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매력이 없는 말이나 하는 어리석은 자로 여기며 비방했습니다. 그래도 사도 바울은 교인들을 휘어잡고 인기를 얻으며 대우받고 있는 잘못된 거짓 교사들에게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해서 인기를 끌며 사람들을 끌어 모아 따르게 하는지에 대해서는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복음의 진리였으며, 성도들을 진리 중심의 신앙으로 이끌어 오염되지 않는 순수한 신앙으로 지켜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보기에 내가 보잘 것 없고 어리석게 여겨져도 용납해 달라"고 하면서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와가 뱀에게 미혹 당한 것처럼 너희가 그리스도 중심의 진실한 신앙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렵다"고 했습니다(고린도후서 11장 1-3절).
갈라디아 교회는 변질된 복음, 인간 중심에 맞춘 잘못된 가르침에 쉽게 빠졌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런 것에 큰 관심과 기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런 것에 조금도 관심의 시선을 두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 갈라디아 교회는 누가 가르친 것이 옳고 그릇된 것인지를 분별하지 못하는 혼란에 빠져 거짓 교사들의 미혹된 말에 넘어갈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사실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신앙이 복음의 진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는 데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은 교회들의 신앙을 복음 중심으로 바로 지켜 주려는데 전념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선교 여행에서 잘 나타납니다. 그는 1차 선교여행 때 복음으로 세우진 교회들을 제2차 선교여행 때도 다시 돌며 방문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된 성도들의 신앙을 굳게 세워 나갔던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기독교 신앙이 혼합주의 신앙으로 혼란의 극치에 이르렀던 때도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순수하고 건전한 신앙이 이상하게 되어 버린 상태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신앙을 잡다한 음식처럼 취급하여서 교인들을 아무 데나 데리고 다니며 이것저것 막 먹게 합니다. 이게 잘못된 것인지 사이비인지 인본주의인지 파악도 제대로 못한 채 마냥 가서 은혜 받고 오라고 합니다. 자기 교인의 신앙이 잘못된 신앙에 오염된다는 것에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부흥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 같은 참된 종은 성도의 신앙이 진실과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오염되지는 않을까를 언제나 염려하였습니다.
물론 자신도 그렇지만 교회의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온갖 방해와 도전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들의 신앙이 늘 깨지고 치우치고 넘어지고 엉뚱한 것에 빠지고 젖어드는 것을 느끼면서 우리 신앙을 누가 지켜 줄 수 있다고 하겠습니까?
목회자가 교회의 신앙을 순수하게 지켜 나가는 데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같은 동역자들로부터 오는 도전부터가 힘들게 합니다. 대체적으로 오늘날 교회들의 일반적인 흐름은 대교회 중심입니다. 예배당이 크고 교인들이 많아야 합니다. 그게 자랑이요 성공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능한 자요 목회자답지 못합니다. 어디 가서나 큰 교회의 목회자가 되야 대우받고 존경합니다. 또한 그렇게 외적 성장이 있어야 목회를 잘하는 것으로 당연시 여기는 풍조가 언제부터인지 만연해졌습니다.
그렇다 보니까 거의 모두가 어떻게 해서라도 교회를 크게 하려고 애씁니다. 그러다 보니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방법이 난무하여 교회는 점점 세상 냄새가 납니다. 심지어는 이단 사이비들이 사람을 미혹하는 방식까지 아무런 비판 없이 포용되고 전수되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교회는 오염 될 대로 되어 있어 아주 심각합니다. 그래도 그런 것이 더 인기 끌고 당연시 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인본적인 것이 판치는 실정과 형편 속에서 이런 것을 배제하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외면하고 하나님 중심으로 목회 해 나간다는 것은 참으로 외롭고 힘든 싸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대다수의 목회자들의 틈바구니에서 바보짓처럼 보여지며 한심한 자처럼 여겨지기가 일쑤입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큰 문제는 교인들입니다. 교인들은 순수한 신앙이어야 하는데 너무나 무지하고 무관심합니다. 편안한 신앙 생활을 하게 하고 자기들의 유익과 소원에 맞게 해주면 좋아합니다. 부흥회에 길들여져 있어서 은사적이고 기복적이며 당장 기분에 느낌에 감정에 와 닿는 것만 신앙처럼 여기는 풍토가 초교파적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가운데서 분별력을 가지고 교인들의 신앙을 복음 중심으로 돌아가도록 목회를 한다는 것은 어쩌면 막연한 일인지도 모를 것입니다. 교인들이 "그렇게 해서 부흥하나 보아라"고 악담하기가 일쑤인데, 그런 저런 것에 부딪히고 도전과 방해를 받는 속에서 누가 바보스럽고 고집스런 길을 끝까지 묵묵히 갈 수 있겠습니까? 때문에 견디다 못해 할 수 없이 교인들이 원하는 대로 맞추어 따라가 주고, 잘못된 것인 줄 뻔히 알면서도 교인들에게 인정받는 중심으로 가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 같은 목회자는 어떤 형편과 비난과 도전 속에서도 교회의 신앙이 순수한 복음 중심으로 지켜지고 구원을 누리도록 해나갔습니다. 그것은 바로 거룩한 그리스도의 교회로 세워 가시는 성령의 역사가 그를 강하게 붙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교회의 신앙을 복음 중심으로 순수하게 지켜주는 목회자가 진정 참된 주의 종입니다.
교회의 신앙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그의 몸 된 성도가 되어 거룩한 그리스도의 교회로 온전히 서가는 것으로서의 구원을 이루는 믿음인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합당한 신앙으로서 인본주의의 철학과 사상과 샤마니즘의 기복과 미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세상 문화와 비전 같은 것에서 순전하게 지켜져야 할 생명의 신앙인 것입니다.(*)
황부일. '우리, 이제 순전한 신앙으로 돌아가자'에서.
오늘날의 교회 안에도 사람들의 관심에 초점을 두고 사람들을 모으려고 하고 자기 목적을 기독교를 이용해 이루려는 무리들이 매우 많습니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쉽게 호감을 사고 인정을 받을만한 여러 가지 매력과 인간적 보이는 관심에 아주 능합니다. 가령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거짓된 교사들은 다른 복음을 가르치며 교인들을 카리스마적으로 휘어잡고 이끌었는데 대다수의 고린도 교인들은 그런 자들을 잘 따랐습니다. 반면에 오직 복음의 진리를 나타내기 위해 수고한 바울에 대해서는 그의 사도직을 의심했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매력이 없는 말이나 하는 어리석은 자로 여기며 비방했습니다. 그래도 사도 바울은 교인들을 휘어잡고 인기를 얻으며 대우받고 있는 잘못된 거짓 교사들에게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해서 인기를 끌며 사람들을 끌어 모아 따르게 하는지에 대해서는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복음의 진리였으며, 성도들을 진리 중심의 신앙으로 이끌어 오염되지 않는 순수한 신앙으로 지켜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보기에 내가 보잘 것 없고 어리석게 여겨져도 용납해 달라"고 하면서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와가 뱀에게 미혹 당한 것처럼 너희가 그리스도 중심의 진실한 신앙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렵다"고 했습니다(고린도후서 11장 1-3절).
갈라디아 교회는 변질된 복음, 인간 중심에 맞춘 잘못된 가르침에 쉽게 빠졌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런 것에 큰 관심과 기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런 것에 조금도 관심의 시선을 두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 갈라디아 교회는 누가 가르친 것이 옳고 그릇된 것인지를 분별하지 못하는 혼란에 빠져 거짓 교사들의 미혹된 말에 넘어갈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사실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신앙이 복음의 진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는 데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은 교회들의 신앙을 복음 중심으로 바로 지켜 주려는데 전념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선교 여행에서 잘 나타납니다. 그는 1차 선교여행 때 복음으로 세우진 교회들을 제2차 선교여행 때도 다시 돌며 방문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된 성도들의 신앙을 굳게 세워 나갔던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기독교 신앙이 혼합주의 신앙으로 혼란의 극치에 이르렀던 때도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순수하고 건전한 신앙이 이상하게 되어 버린 상태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신앙을 잡다한 음식처럼 취급하여서 교인들을 아무 데나 데리고 다니며 이것저것 막 먹게 합니다. 이게 잘못된 것인지 사이비인지 인본주의인지 파악도 제대로 못한 채 마냥 가서 은혜 받고 오라고 합니다. 자기 교인의 신앙이 잘못된 신앙에 오염된다는 것에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부흥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 같은 참된 종은 성도의 신앙이 진실과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오염되지는 않을까를 언제나 염려하였습니다.
물론 자신도 그렇지만 교회의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온갖 방해와 도전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들의 신앙이 늘 깨지고 치우치고 넘어지고 엉뚱한 것에 빠지고 젖어드는 것을 느끼면서 우리 신앙을 누가 지켜 줄 수 있다고 하겠습니까?
목회자가 교회의 신앙을 순수하게 지켜 나가는 데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같은 동역자들로부터 오는 도전부터가 힘들게 합니다. 대체적으로 오늘날 교회들의 일반적인 흐름은 대교회 중심입니다. 예배당이 크고 교인들이 많아야 합니다. 그게 자랑이요 성공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능한 자요 목회자답지 못합니다. 어디 가서나 큰 교회의 목회자가 되야 대우받고 존경합니다. 또한 그렇게 외적 성장이 있어야 목회를 잘하는 것으로 당연시 여기는 풍조가 언제부터인지 만연해졌습니다.
그렇다 보니까 거의 모두가 어떻게 해서라도 교회를 크게 하려고 애씁니다. 그러다 보니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방법이 난무하여 교회는 점점 세상 냄새가 납니다. 심지어는 이단 사이비들이 사람을 미혹하는 방식까지 아무런 비판 없이 포용되고 전수되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교회는 오염 될 대로 되어 있어 아주 심각합니다. 그래도 그런 것이 더 인기 끌고 당연시 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인본적인 것이 판치는 실정과 형편 속에서 이런 것을 배제하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외면하고 하나님 중심으로 목회 해 나간다는 것은 참으로 외롭고 힘든 싸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대다수의 목회자들의 틈바구니에서 바보짓처럼 보여지며 한심한 자처럼 여겨지기가 일쑤입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큰 문제는 교인들입니다. 교인들은 순수한 신앙이어야 하는데 너무나 무지하고 무관심합니다. 편안한 신앙 생활을 하게 하고 자기들의 유익과 소원에 맞게 해주면 좋아합니다. 부흥회에 길들여져 있어서 은사적이고 기복적이며 당장 기분에 느낌에 감정에 와 닿는 것만 신앙처럼 여기는 풍토가 초교파적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가운데서 분별력을 가지고 교인들의 신앙을 복음 중심으로 돌아가도록 목회를 한다는 것은 어쩌면 막연한 일인지도 모를 것입니다. 교인들이 "그렇게 해서 부흥하나 보아라"고 악담하기가 일쑤인데, 그런 저런 것에 부딪히고 도전과 방해를 받는 속에서 누가 바보스럽고 고집스런 길을 끝까지 묵묵히 갈 수 있겠습니까? 때문에 견디다 못해 할 수 없이 교인들이 원하는 대로 맞추어 따라가 주고, 잘못된 것인 줄 뻔히 알면서도 교인들에게 인정받는 중심으로 가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 같은 목회자는 어떤 형편과 비난과 도전 속에서도 교회의 신앙이 순수한 복음 중심으로 지켜지고 구원을 누리도록 해나갔습니다. 그것은 바로 거룩한 그리스도의 교회로 세워 가시는 성령의 역사가 그를 강하게 붙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교회의 신앙을 복음 중심으로 순수하게 지켜주는 목회자가 진정 참된 주의 종입니다.
교회의 신앙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그의 몸 된 성도가 되어 거룩한 그리스도의 교회로 온전히 서가는 것으로서의 구원을 이루는 믿음인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합당한 신앙으로서 인본주의의 철학과 사상과 샤마니즘의 기복과 미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세상 문화와 비전 같은 것에서 순전하게 지켜져야 할 생명의 신앙인 것입니다.(*)
황부일. '우리, 이제 순전한 신앙으로 돌아가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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