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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신앙을 찾아서

작성자이천우|작성시간02.11.21|조회수201 목록 댓글 0
[*본 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면 반드시 생각 해 보아야 할 글입니다]

참된 신앙을 찾아 "나그네"의 삶을 떠난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평안하십니까?
이 글은 사도행전 강해를 이제 얼마 남겨 두지 않은 시점에서 그 동안 우리가 함께 배우며 생각했던 내용들을 정리하기 위해서 작성한 것입니다. 아니, 여러분이나 저나 한 세기를 마감하고 이제 새로운 1,000년을 맞이하면서 우리의 지나간 역사를 돌아보고 다가오는 역사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정리하기 위한 글이기도 합니다. 부디 아래의 글을 깊이 새겨서 읽으시고 여러분 자신을 바르게 돌아보는 기회가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 드립니다.

이처럼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는 글을 작성하게 된 것은 이미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제시했던 중요한 신앙정신이기도 합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살펴보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점검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내가 믿는 신앙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아는 것)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13:5). 우리는 이 물음에 분명한 대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즉 내가 믿고 고백한 신앙의 내용이 무엇인지?,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참된 것인지?, 참되다면 어떤 근거에 의해서 그것을 확신할 수 있는지? 등등 우리의 신앙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하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의 성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라면 교회는 다니고 있지만 자신이 왜 교회를 다니고 있는지, 또는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이 과연 참된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단지 종교적인 모습만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이런 모습에 있지나 않은지 자신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문제는 참된 생명의 길을 알았을 때 과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제시하기 위해서 이 글을 여러분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약 3번에 걸쳐서 이런 내용들을 함께 생각 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는 지난 2,000년의 교회의 역사를 짤막하게 살펴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여러분 자신이나 또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교회가 이 역사적인 기독교의 전통 속에서 과연 어떤 쪽에(참된 쪽, 거짓된 쪽, 혼합적인 쪽) 서 있는지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것이며, 두 번째로는 역사적으로 참된 교회의 순수한 정신이 무엇이고 또한 이 순수한 정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살펴볼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왜 이 땅에 순수한 교회를 남겨 주시고 또한 각 성도가 이 순수한 교회의 지체로 공동체를 왜 이루며 살아가도록 하셨는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위와 같은 역사적 교회의 순수한 신앙정신과 그러한 정신으로 세워진 교회를 세워 가기 위해서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정리 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장로교회의 중요한 신학자인 워필드는 2,000년 기독교 역사는 여러 갈래로 나누어질 수 있지만 이 모든 분파들을 정리 해 보면 가장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어 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역사적으로 참된 신앙의 내용을 지켜 온 교회역사와 그리고 이 참된 신앙을 깨뜨리려고 한 교회역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그 신앙의 정신에 따라서 다시 정리 해 보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여기서 발견하고 깨닫게 된 하나님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며 경외하는 형태와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오직 성경을 통해서 알게된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완전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기 때문에 성경을 버리던가 아니면 성경외에 다른 것을 추가해서 알게 된 하나님을 섬기는 형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 더 추가 해 본다면 이 둘을 혼합적으로 갖고 있는 형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2,000년의 특이한 기독교 역사는 그냥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님을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확인 해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창세기에서부터 이 역사는 소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유혹에 의해서 죄를 범한 이후에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한 구원자를 준비 해 주시면서 다음과 같은 역사를 드러내 주셨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창3:15). 여기서 이미 하나님의 구원자를 소망하는 참된 신앙의 백성과 이 신앙을 더럽히고 또한 깨뜨리기 위해서 다가오는 거짓된 백성의 큰 역사가 밝혀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역사의 갈림이 바로 가인과 아벨에게서 분명히 나타나지며, 또한 같은 아버지의 자녀 이였지만 이 속에서도 이스마엘과 약속의 자손인 이삭이 구분되어지며, 더 나아가 에서와 야곱에 와서는 쌍둥이에게서조차도 더욱 치열한 두 역사의 갈등 모습이 소개되어 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런 두 역사의 흐름은 예수님 당시에 와서는 더욱 명확하게 밝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역사의 갈등을 다음과 같이 드러내 주셨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요16:1-3) 즉 하나님의 약속인 말씀을 신뢰하지 않고 단지 외형적으로 종교적 모습만을 갖추고 있는 유대인의 역사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약속 해 주신 구원자로 믿는 제자들의 역사로 구분되어진다는 것입니다.1) 그래서 이 거짓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오히려 참된 신앙을 지키는 자들을 죽이면서 마치 자신들의 행위가 가장 참된 신앙의 모습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이 이 두 역사의 갈등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지난 2,000년의 기독교회의 역사를 살피려고 하는 내용은 이미 성경의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흘러 내려왔던 역사의 연속임을 먼저 알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고백하는 신앙과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다른 신비적인 경험이나 아니면 자신들의 종교적인 전통 등을 통해서 내려온 하나님에 대한 내용을 믿는 신앙의 형태는 바로 초대 교회의 역사속에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을 우리는 초기 기독교 역사 자료들을 통해서 확인 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초대 교회들은 철저하게 사도들을 통해서 전해 받은 신앙을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겨 왔지만 이미 이들에게도 사도들로부터 전해지지 않은 다른 신앙의 형태가 이들을 유혹하고 또한 괴롭히고 있었던 것입니다.2) 특히 당시에 가장 문제가 심각했던 이단들은 "영지주의"라는 이단입니다. 이들은 물질적이고 세상 적인 것은 더럽고 죄악된 것으로 여기고 오직 영적인 세계의 영에 관한 내용만이 가장 거룩하다고 하는 이원론적이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3)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것은 악한 것인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런 죄악된 육체에 거하실 수 있느냐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이단들이 요한복음과 요한1-3서에 나오는 자들입니다.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요이1:7) 이런 자들의 기본 정신을 요한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면서 이런 자들을 교회 가운데서 철저하게 배격해야 함을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요이1:9-10)

그리고 이들은 계속해서 성경 말씀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그것을 바르게 마음 속에 소유하기보다는 "영적인 존재"가 더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이 영적 존재는 순수하고 죄로 물들지 않아서 성령께서는 이 영적존재에게 계속해서 직접적으로 계시를 주시고 말씀 해 주시기 때문에 성경보다는 기도나 묵상이나 환상 중에 느껴지는 영적인 느낌을 더욱 중요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결국 이런 정신은 오늘날 순복음 교회나 은사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신비주의의 정신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들도 성경을 배우기보다는 자신이 기도 중에나 묵상 중에, 또는 환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면서 이 들은 음성을 절대적으로 믿고 신앙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한 이 영지주의의 이단과 함께 "말시온"이란 이단자가 있었는데 이 사람도 영지주의와 동일하게 "이원론"적인 사고를 갖고 있으면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사람은 성경 중에서 구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는 아주 구체적으로 성경을 버리는 형태를 취하기도 했습니다. 이 사람은 구약의 하나님은 매우 무섭고, 복수하시고, 진노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신약에 나타난 사랑의 하나님과 조화를 이룰 수 없다고 하여 신약만 강조하면서 구약을 무시하고 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정신은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 가운데 구약보다는 신약을 많이 강조해서 설교하는 풍토로 들어와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교회에서 제시되고 있는 설교 내용 중에서 어떤 내용이 더 많다고 생각하십니까? 대부분 구약보다는 신약에 더 많은 강조를 두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초기 2-4세기까지 이런 이단들을 중심으로 성경의 하나님을 순수하게 믿고 고백하는 교회가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는지 초대 교회역사의 자료를 살펴보면 더 깊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4-5세기에 와서는 영지주의의 그리스도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기초가 되어서 "아리우스", "사벨리우스"라는 이단자들이 더욱 교회를 괴롭히게 됩니다. 이들은 모두 그리스도에 대한 오해와 함께 "삼위일체"에 대한 내용 전체를 변질시키는 엄청난 일을 교회에 남겼습니다. 이들이 가르치는 잘못된 내용은 성경에서 말하는 성부, 성자, 성령은 참된 삼위일체가 아니라 성부만이 하나님이라던가, 또는 성부나 성자나 성령은 각각 구분되어져 있는 인격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모양만 다른 동일한 하나님이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삼위일체의 내용이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 90%이상 들어와 있습니다. 의식 있는 신학자들은 우리 한국 교회의 삼위일체에 대한 고백이 이처럼 이단의 삼위일체로 표현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신비주의자들이 구약은 성부 하나님시대, 신약은 성자 예수님시대, 오늘날은 성령 하나님시대라고 하면서 성령의 은사나 능력을 강조하는 정신에 의해서 물들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내용은 이미 초기 "사벨리우스"라는 사람이 제시했던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이단자들은 역사적으로 사도들의 신앙을 바르게 지켜 왔던 교회에 의해서 이단으로 정죄를 당해서 목사 파면을 당하고 추방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과 목숨을 걸고 성경의 참된 내용을 지키려고 했던 사람들이 "아다나시우스나", "어거스틴"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분들을 통해서 신앙이란 오직 성경의 내용을 참되게 깨닫고 그것을 통해서 알게 된 하나님을 바르게 경외하는 것이 참된 신앙이란 것이 지켜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5세기가 지나면서 교회는 여러 지역에 세워지게 되고 급기야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서 로마가 정식으로 기독교를 국가 종교로 채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교회가 국가의 중요한 위치에 자리잡게 되자 그 동안 교회를 괴롭혔던 이단들이 급속도로 교회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참된 신앙의 내용이 변질되면서 교회는 국가의 힘을 등에 업고 강력한 권세를 행사하는 국가종교적인 형태를 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1,000년의 타락한 중세교회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이 1,000년 동안 기독교는 철저하게 변질되고 더렵혀지는 것을 우리는 교회 역사를 통해서 낱낱이 확인 해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시기에 목사와 평신도를 계급적으로 나누는 구조가 정립이 되었고 교황 숭배나, 마리아 숭배, 여러 가지 교회 절기들(성탄절, 부활절: 참된 교회에서는 비성경적이라하여 지키지 않음)등등이 교회 의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교회 음악도 성가대를 중심으로 성가곡이 편찬되면서 사도시대때부터 내려온 시편 찬송 등은 거의 무시되는 변질을 보게되며4), 신앙을 가시적이고 외적인 형태로 표현하려고 베드로 성당을 중심으로 거대한 성전 건축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으며5), 그리고 삼위 하나님이나 성경의 인물이나 역사를 그림으로 형상화해서 제시하기 시작했으며6), 각종 교회 물건들에 성스러운 가치를 두고 매매하기 시작했으며, 그리고 각종 성자들의 유물을 통해서 기적과 신비한 환상이나 영적 경험을 강조해서 이것을 소유하는 것이 신앙에 있어서 절대적인 형태로 자리잡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몇 가지만 살펴보았지만 이 보다 더 많은 내용이 교회 역사를 살펴보게 되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매우 심각한 것은 이런 내용들이 오늘날 우리 교회에 거의 90%이상 교회의 특징으로 그대로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참된 신앙 내용이 변질되어 가던 때에 역사적으로 사도들의 신앙 정신이었던 오직 말씀을 통한 신앙을 지키려고 하던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분들이 죤 위클리프(1329-1384)나, 죤 후스(1373-1415)등과 같은 분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로마카톨릭의 부패된 내용들을 반대하고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며 성경의 내용을 바르게 믿을 것을 가르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성경을 번역해서 자국민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성경을 직접 읽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로마카톨릭의 거대한 힘에 눌려 모두 끔직한 화형식으로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이들의 정신을 이어 받은 사람들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틴 루터(1483-1546), 쯔빙글리(1484-1531), 죤 칼빈(1509-1564)등과 같은 분들이 있습니다. 이 분들 중에서 죤 칼빈과 같은 분은 교회역사 1,500년의 흐름을 다시 정리 해 주고, 또한 여러가지 고대 문헌들을 찾아서 번역 해 주는 놀라운 신학작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노력으로 당대의 많은 목사님들이 고대의 참된 신앙의 정신들을 소개받게 되고 이 정신을 통해서 교회를 바르게 세우고자 목숨을 걸고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오직 성경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참된 성경의 정신을 표어로 제시하면서 이것이 교회의 참된 신앙의 내용임을 외치며 당대의 부패해 있던 로마 카톨릭을 향해서 싸웠던 것입니다. 그리나 이 분들도 대부분 로마 카톨릭에 의해서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들의 값진 희생을 통해서 교회는 참된 신앙 내용을 되찾았고 그래서 이 참된 교회를 바르게 세워 나가기 위해서 수많은 후손들이 로마카톨릭의 시민권과 권리를 포기하고 방랑자의 삶을 살아가면서 그 순수한 정신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온 심혈을 기울이게 되는 놀라운 기독교 역사가 전개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소중한 참된 신앙의 내용이 회복되고 있던 시대에도 여전히 이런 신앙을 변질시키고 또한 파괴하려는 무리들이 끊임없이 교회를 위협했습니다. 먼저는 로마카톨릭이 가장 대표적이고, 다음으로는 "재세례파"라는 무리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로마카톨릭에서 받은 세례를 죄악된 의식이며 더렵혀진 것이기에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면서7) 모든 세상 적인 삶의 수단을 더럽고 악한 것으로 여기고 자신들만의 고립된 생활을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모든 삶의 내용들을 더러운 것으로 여기고 오직 자신들만이 가장 영적으로 거룩한 것으로 여기면서 그런 거룩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음성과 계시를 받는 것을 가장 중요한 신앙의 내용으로 강력하게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정신은 초기 영지주의와 연결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이 시기에 대표적인 이단자로 등장하는 사람으로 "아르미니우스"(1560-1609)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매우 중요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을 기점으로 해서 참된 신앙과 거짓된 신앙을 혼합하는 형태가 더욱 구체화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사람은 이런 내용을 철저하게 신학 자료를 통해서 그 작업을 이루어 놓고, 또한 교리적인 세부 내용을 통해서 참된 신앙의 내용을 거의 변질시켰으며, 또한 오늘날 한국 교회에 교리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주의해야 할 사람입니다.8)

이들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과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직 인간의 공로와 행위를 통해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내용들을 가르쳤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제한된 선택된 백성만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자신의 힘으로 예수님을 고백하기만 하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만인구원설을 가르쳤으며,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거부하고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제시했으며, 성도가 마지막까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 보다는 자신이 열심히 행하면 끝까지 구원을 받을 수 있고, 또한 자신이 잘못하면 나중에 버림받을 수도 있다고 가르쳐서 성도에게 있어서 신앙의 확신과 위로를 변질시켰던 것입니다. 이들은 성경의 교리적 내용들 중에서 아주 중요하고 핵심적인 부분을 하나님 중심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직 인간 중심으로(휴머니즘) 모든 신앙의 정신을 바꾸었던 것입니다. 이들의 인간 중심적인 사고는 오늘날 우리의 교회 위에 오직 자신의 구원과 행복과 축복만을 생각하는 아주 이기적인 성도들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즉 더 이상 성도들은 온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또한 그분의 영광이 모든 곳에서 존귀함을 받도록 모든 영역에 들어가서 일하지 않고 오직 자신들의 교회와 가정과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람들로 변질된 것입니다.

아르미니우스의 정신은 그의 제자들을 통해서 당시의 전 유럽과 로마카톨릭까지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9) 그렇지만 사도들의 정신을 이어받고 어거스틴과 칼빈을 통해서 순수한 참된 신앙의 정신을 지켜 오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역에서 이 아르미니우스적 정신을 가진 목사들을 교회회의를 통해서 이단자로 정죄하고 모두 그 지역에서 추방을 시켰습니다.10) 바로 이런 과정에서 인간 중심적인 정신에 의해서 하나님 중심적으로 신앙하는 참된 신앙을 철저하게 지키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서"였던 것입니다. 특히 소요리문답 같은 경우는 이런 참된 정신을 어린 시절부터 아이들이 철저하게 배울 수 있도록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작성한 것으로 매우 뛰어난 신앙 교육서입니다. 이처럼 참된 신앙을 지키고자 했던 이들은 어린아이조차 이런 신앙에 바로 세워지기를 소망하는 그런 모습에서 이 거룩한 정신이 그들에게 얼마나 깊이 배어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심각한 것은 오늘날 우리의 교회가 참된 신앙에 있지 않고 당시 바른 정신을 지키던 교회에 의해서 이단으로 정죄된 혼합적이고 거짓된 신앙 정신에 머무르고 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이제는 더 이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나 요리문답서를 소개받을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니 한 걸음 더 나가서 이런 교육서를 교회에서 가르치려고 하면 오히려 많은 욕을 먹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보다는 전도하는 법이나, 부흥시키는 방법, 은사 받는 방법, 문제 해결을 받는 방법에 더 집중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미 칼빈은 자신의 시대에 이런 교리문답서의 중요성과 가치를 무시하는 자들을 향해서 다음과 같이 경고한바 있습니다. "이 교리문답은 옛적부터 교회 위에 준수되어 왔고, 교회가 『완전히 부패했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코 포기된 적이 없는 관례적인 것이다"(제2차 제네바 교리문답서 서문중에서). 이런 정신에서 오늘날 우리의 교회를 바라보면 우리의 교회가 참된 신앙의 정신을 얼마나 많이 벗어나 있는지를 너무나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언급하자면 17세를 중심으로 더욱 구체화된 "경건주의"운동을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은 위에서 제시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또한 교리문답서와 같은 신앙 방식을 통해서 성경의 내용을 바르게 깨닫고 또한 그 깨달은 내용을 따라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말씀의 내용을 삶에 실천하려는 방식을 거부하고 좀더 신앙적으로 뜨겁고 강렬한 체험을 중심으로한 신앙적 형태를 요구하면서 이런 정신을 체계화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성경의 내용을 신앙하는 것보다는 직접적인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들은 것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인식하며 살아가는 신앙의 형태를 더욱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런 정신은 영지주의와 재세례파에서 이미 있었던 것임을 우리는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이 경건주의는 초기 필립 야콥 스페너에 의해서 소개되었지만 후에 죤 웨슬레의 부흥운동의 성격과 교류를 하면서 감리교와도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웨슬레 자체가 이 경건주의 모임에 참석했다가 회심의 뜨거움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그후 이런 경건주의 운동은 주로 18-19세기의 부흥운동과 연결이 되면서 급속한 발전을 맞이하게 됩니다. 여기에 소위 말하는 "부흥회"의 기초를 마련한 챨스 피니(1729-1875)를 통해서 더욱 구체와 되었으며, 이런 운동은 "무디", "빌리그레함"의 전도운동으로 그 동일한 성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장로교와 이 부흥운동을 혼합시킨 사람으로는 죠지 휫필드나 죠나단 에드워드, 스펼죤등이 있기도 합니다. 결국 이런 부흥운동은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일어나 한국의 초기 부흥운동의 성격과 동일한 모습과 동일한 신학적 내용을 가지고 한국의 신앙 전체에 기반을 놓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의 은사주의 운동이나 신비주의 운동, 거의 전 선교단체(특히 예수 전도단: 로렌 커닝햄의 "하나님 음성 듣는 법"이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다)들이 모두 이런 신학적 영향의 기초 위에서 자신들의 신앙의 형태를 구성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치 17-19세기 까지의 역사는 참된 신앙의 교회가 거짓된 신앙의 이름으로 끝임 없이 교회에 다가오는 거센 물결을 대항해서 싸워야 하는 그런 역사이었음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로마카톨릭이나, 아르미니우스주의나, 경건주의 등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들은 결국 역사적으로 사도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신앙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이미 참된 교회에서 이단으로 정죄한 초기의 이단 교회들의 신앙적 내용을 그대로 이어 받아서 자신들의 신앙으로 체계화 시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현대의 역사는 과거의 사상과 뗄 레야 뗄 수 없는 아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미 전도서 기자가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전1:9)라고 고백하는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현재의 역사는 반드시 과거의 역사와 연결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두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역사에 대한 바른 인식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지금 내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참된 곳인지 아니면 과거에 끊임없이 거짓된 것으로 정죄된 곳인지를 분간할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제 19-20세기로 넘어오게 되면 이 거짓된 신앙의 내용의 정신들이 얼마나 더 구체화되고, 또한 끊임없이 참된 교회의 신앙을 어지럽히고 파괴하려고 하는지를 우리는 더욱 가까이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 오게 되면 "슐라이어막허"(1768-1834)라는 사람을 통해서 종교적 감정과 체험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더욱 구체화되고, "벨하우젠"(1844-1918)라는 사람을 통해서는 성경이 갈기갈기 찢겨져 나가는 심각한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을 통해서 성경이 소설이나 또는 여러 일반 사회적 문서로 취급을 하는 성경비평시대가 구체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칼 바르트"(1896-1968)라는 사람을 통해서는 아주 교묘하게 아르미니우스와 같이 혼합적인 신앙 정신을 갖게 하는 것이 더욱 구체화됩니다. 즉 이 사람은 성경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그 속에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이 포함되었다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묵상을 통해서 성경을 읽어 가는 중에 자신의 마음에 은혜를 주고 감동을 주는 것만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방식이 오늘날 온 누리 교회를 통해서 "Q.T"라는11) 형태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즉 이 성경 말씀 묵상 방식이 철저하게 바르트의 신학적 사고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시기에도 사도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신앙인 오직 성경만을 통해서 하나님을 참되게 신앙하는 정신을 지키려고 하는 무리들이 계속 고분 분투하며 자신의 신앙을 지키려고 온 심혈을 기울인 역사를 우리는 만나게 됩니다. 이 당시 미국은 "프린스톤 신학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중심으로 이런 정신이 이어져 내려 왔습니다. 이들은 "우리는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며 또한 우리의 신앙과 삶의 제1 원리로 고백한다,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제2의 원리로 받아들이고 가르치를 원한다"라고 명백한 고백을 끊임없이 외쳤으며 이 정신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좋은 것들을 포기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 나라의 역사를 잠시 살펴보면서 이 글을 마감하고자 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이미 우리 나라는 선교 초기부터 미국의 여러 가지 교파의 영향을 받으면서 교회가 자리잡게 됩니다. 즉 장로교, 감리교, 천주교, 성공회, 오순절주의(순복음 교회), 침례교등이 복합적으로 한국에 자리를 잡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치 기독교 2,000년 역사의 모든 종교 분파들이 한국에는 종합적으로 뿌려지는 그런 역사적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장로교(1885년 알렌과 언더우드)와 감리교(1885년 아펜젤러)가 가장 먼저 19세기말을 중심으로 터전을 마련하게 됩니다.

여기서 장로교는 아직 프린스턴 신학교의 영향을 힘입어 이런 정신을 가진 목사들이 계속 자리를 잡게 되었지만 그 영향력은 매우 적은 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곧 역사는 뒤바뀌게 되었습니다. 당시 한국은 일제 식민지의 상태에 있었고, 또한 국가적으로도 매우 어려운 시기며, 그리고 '독립운동'이란 공동적 관심사가 가장 큰 영향을 발휘하고 있던 때였으며, 또한 감리교의 목사들이 이런 사회적인 관심사를 자신들의 신앙적 내용으로 흡수하면서 외국의 원조와 관심을 국제적으로 표명하기 시작하자 이들은 교세는 급속도로 자리를 잡으면서 급기야는 1903년 원산에서 감리교 선교사들이 기도회를 주도하면서 이 운동이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까지 영향을 끼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일어나게 된 부흥운동의 성격은 전형적인 미국의 부흥운동(죠나단 에드워드)과 영국의 부흥운동(죤 웨슬레)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다가 놓은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그렇지만 당시 장로교를 중심으로 이 운동에 깊이 관여하지 않은 이들을 중심으로 1907년 장로교 노회가 조직되면서 12개 내용의 신앙고백서가 작성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기초를 갖고 있었으나 당시의 주된 부흥회 세력에 의해서 중요한 내용들이 많이 삭제되는 형태로 만들어 졌습니다. 아무튼 더욱 순수하고 철저하게 정립되지는 않았으나 그나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정신을 세우려고 했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활동들은 부흥회를 통해서 연합적인 선교운동이 벌어지는 흐름에 의해서 금세 가리워지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장로교도 장로교의 특징을 모두 잃어버리고 역사적으로 바르지 않은 신앙의 모습으로 전환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한국 교회의 초기 모습인 것입니다. 즉 처음부터 이미 우리는 역사적인 기독교회의 모습 중에서 그토록 끊임없이 이단으로 정죄하고 배격했던 내용을 마치 참된 신앙인 것처럼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공부하신 몇몇 목사님들을 통해서 이런 정신이 그나마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즉 1938년 2월 한국 교회는 일제가 국가적인 의례로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것을 결국 수용하게 되는 부끄러운 역사적 사건이 있었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여기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님과 같은 몇몇 분들은 이것이 십계명의 제2계명의 우상 숭배에 해당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를 거절하다가 결국 순교를 당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역사의 현장 속에서 해방과 6. 25전쟁을 맞게 되었고 이후 1960-70년대의 교회 확장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즉 가장 주된 세력으로 역사적 기독교회에서 늘 성경을 바르게 믿지 않는 그런 신앙의 정신을 가진 형태가 한국 교회의 전체를 차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흐름에 연결되어 1980-90년에 와서는 각종 새로운 종교적 운동들이 계속해서 자리를 잡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중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선교 단체를 통해서 교회와 단절된 선교운동이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고(이로 인해서 기독교의 공동체에 대한 내용이 흔들렸으며), 각종 찬양 집회를 통해서 경건주의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종교적 체험과 느낌을 중요시하는 풍토들이 자리를 잡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대부분 주일 오후 예배는 "찬양 예배"라고 불려질 정도로 그 파급은 엄청납니다. 이 외에도 각종 은사집회, 기도원 운동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 기도원 운동은 중세 시대의 수동원운동이나, 재세례파의 정신을 모체로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한 요즘은 "열린 예배"라는 것도 유행하는데 이것은 기존의 2,000년 교회 예배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는 그런 비성경적인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한창 인기를 얻고 있는 치유목회, 상담목회, 맨토링(1:1관계 강조)목회등 주로 심리학적인 인간 중심의 전형적인 목회 구조가 성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현대적인 흐름에 반하여 아직도 오직 성경 말씀만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우리의 신앙과 삶에 있어서 제2 원리로 생각하고 이런 신앙의 방식을 계속해서 지켜 가려고 하는 참된 교회가 있기도 하지만 그 세력이 너무 미약하고 찾아보기 힘든 그런 시대에 우리 자신이 놓여져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지금 우리가 처한 교회적 형편은 너무나 심각하고 어려운 상황입니다. 도대체 참된 신앙이 무엇이고 또한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옳은 것인지 전혀 알 수 없는 그런 시대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일전의 '고급 옷 로비 사건'은 이런 한국 교회의 전형적인 바르지 못한 신앙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었습니다. 모두 권사님, 또는 목사님 사모등이 관련된 사건이었습니다. 이들은 오늘날 한국 교회의 가장 큰 교회에 속해 있으면서 전체의 교회에 가장 영향력 있는 교회이며 또한 교회 성장의 모델로 제시되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처지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즉 이와 같이 거짓되고 모순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는 신앙이 과연 참된 신앙입니까? 과연 이런 하나님을 생명을 걸고 믿을 수 있습니까? 그 누구도 이런 하나님은 선 듯 믿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이런 혼란된 모습을 통해서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참된 분이신지, 아닌지를 알 수 없는 그런 처지에 우리는 놓여 있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모습은 미가 선지자가 예언했던 하나님의 진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암8:11-13). 즉 우리는 설교가 넘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정작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듣지 못하는 굶주림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가슴아픈 현실은 칼빈이 자신의 시대를 향해서 외쳤던 표현 속에도 다음과 같이 제시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이 가공할 만한 신성 모독을 감히 입밖에 토해 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혐오(책망)를 가지고 그들에게 대항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다"

지금까지가 지난 2,000년 동안의 교회의 두 큰 역사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이 글을 읽으시고 처음에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자신을 깊이 돌아보시고 과연 자신이 어떤 자리에 서 있는지를 분명하게 확인하시고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즉 자신이 현재 누리고 있는 편안함과 또한 여러 가지 종교적 유익을 잃지 않기 위해서 계속 그대로 머물러 있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참된 신앙의 정신을 지키려고 목숨을 걸고 이 길을 걸어갔던 선조들의 길을 걷기 위해서 모든 편안함과 유익을 포기하고 마치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아갈 것인가?를 말입니다.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시고 참된 생명의 길을 찾아 우리 함께 진리를 위해서 나그네의 삶을 떠납시다. 바로 이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고 말입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8:35)


미주

1)여기서 하나님의 약속(말씀)을 참되게 신뢰하는 신앙이 명확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계시록에서는 이런 신앙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 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하니"(계20:4)

2)당시에 참된 신앙과 반대되는 신앙의 형태가 성경에 다음과 같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고후11:4)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갈1: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3)이런 사고 방식은 오늘날 우리 모습 속에서 교회 일은 영적이고 거룩하지만 세상 적인 직업이나 가정, 학교일들은 그렇게 영적이지 않은 것처럼 여기는 방식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4)오늘날 복음 송가나 CCM(대중 음악을 교회에 그대로 들여온 것)등은 역사적으로 참된 교회와 전혀 상관이 없는 형태들입니다.

5)오늘날 개신교에서 모든 교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교회가 개척되고 나면 최고의 목표로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 가장 큰 신앙적 목표로 제시되어 있는 것도 성전 건축을 신앙화한 로마카톨릭의 정신인 것입니다.

6)하나님과 성경의 사건이나 인물을 그림으로 나타내거나 형상화하는 오늘날의 교육적 풍토는 이 정신에서 온 것입니다. 참된 교회에서는 이것이 2계명을 거역하는 죄로 여기고 철저하게 거부했습니다. "형상이 있는 곳에는 결코 종교가 존재할 수 없다"(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 4장)

7)재세례파는 이외에 유아 세례도 거부합니다. 이런 전통에서 오늘날 침례교가(초기 침례교는 1612년 정도에 조직화 됨)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침례교회로 옮기면 일반 교회에서 받은 세례는 무시되고 그 교회에서 침례식(물 속에 몸을 완전히 담구는 방식)으로 다시 받게 합니다. 물론 유아 세례도 주지 않습니다.

8)오늘날 한국 교회에 참된 신앙의 내용을 위협하는 가장 큰 두 세력을 든다면 바로 감리교의 기본정신인 아르미니우스주의와 순복음 교회의 기본 정신인 신비주의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비주의자들은 경험을 많이 강조하기 때문에 신학적인 교리 작업에 있어서는 매우 약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성경적인 구체적인 내용을 제시하면 이런 것은 거부하고 오직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해서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참된 신앙의 내용과는 쉽게 구별이 됩니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신학적으로 교리 작업을 완성해 놓았기 때문에 참된 신앙을 통해서 성경적인 근거를 제시해도 이들은 끝까지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참된 신앙의 내용을 공격하고 변질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겉으로 보아서는 참된 신앙과 비슷하게 보이기도 하는 등 가장 무서운 자들이기도 합니다.

9)이런 전통에 의해서 뿌리를 내리고 조직화된 교파들이 다음과 같습니다. 죤 웨슬레를 기점으로 감리교(1787), 그리고 감리교에서 갈라져 나온 성결교(1901), 여기서 조직 방식에 변화를 가져온 구세군(1878)등이 있습니다.

10)이와 같은 역사적 자료가 도르트 논쟁을(1618-1619) 통해서 신앙고백서로 작성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혼합적이고 변질된 신앙의 내용을 거부하고 오직 참된 신앙의 내용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정리했습니다. 1) 하나님께서는 무조건적인 은혜로 자신의 백성을 선택하셨다. 2)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신의 백성들만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 3)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구원의 일을 행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부패되었다. 4)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는다. 5)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은 결코 멸망하지 않으며 반드시 보호받고 구원을 이룰 것이다. 오늘날 교단과 상관없이 거의 모든 교단에서 90%이상 위에서 제시한 내용을 완전히 반대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즉 아르미니우스적 정신에 그만큼 깊이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11)성경 본문 자체의 뜻과 내용을 살피기 보다는 성경을 읽어 가다가 그날 자신의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이나 은혜를 주는 말씀을 오늘 자기에게 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하는 그런 정신입니다.

*개혁파신앙(한마음교회;www.reformedfaith.or.kr), 신원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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