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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성찬

작성자이천우|작성시간02.08.03|조회수269 목록 댓글 0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이에 잔을 받으사 사례하시고 가라사대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누가복음 22장 14-20절)


교회의 성장과 부흥이라는 미명하에 복음의 본질이 왜곡되고 성례로서의 세례와 성찬이 심각한 고민과 주도면밀한 사전의 검증없이 대충대충하는 식으로 베풀어지는 이 시대에 특별히 성찬의 본질과 구속사적인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찬은 '보이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 사역을 현재적으로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성례전입니다. 그러기에 이를 본의를 좇아서 정당하게 시행하지 않을 때, 성경은 심지어 죽음에 처해진 사실에 대해 기록함으로써 성찬에 대한 바른 시행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고전11:29-30).

따라서 성찬이 복음의 본의를 떠나서 수단과 방편으로 그릇되게 시행될 때, 이는 마치 말씀을 왜곡되게 해석하고 편의적으로 적용시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의 자의적 숭배신앙을 부추기는 경우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찬예식의 바른 시행이 어느 때보다 시급히 요구되는 때입니다.

역사적 개혁주의자들은 '말씀의 올바른 선포' 및 '권징의 정당한 집행'과 더불어 '성례의 올바른 시행'을 바른 교회의 삼대 표지로까지 설정해서 실천하는 일에 최선을 경주했던 것입니다. 오늘 날 이 삼대 표지는 '성공 제일주의'라는 세속적 기치 아래 우리의 현실 속에서 거의 무시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본의가 희석되고 본질이 실종된 상태입니다.

차제에 성경적 성찬의 본래적 의미가 성경적으로 재정립 되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1.도입

기독교 안에서 사용하는 성례(聖禮)에는 '세례'(침례)와 '성찬'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주님께서 친히 세우신 데서 기독교회의 특별한 의식(儀式)이 되었습니다. 마28장 마지막 부분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계 만방에 나가서 모든 사람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8:19-20). 이렇게 세례는 우리 주께서 명령하신 제도로서 거룩한 예식입니다. 성찬도 우리 주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직접 제자들에게 베푸시면서 제정하셨습니다. 이것이 지금 읽은 누가복음 본문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례가 오늘날 우리의 눈으로 볼 때는 하나의 예전(禮典)인 까닭에 역시 성례(聖禮)라고 하는 우리말이 틀린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가 이것을 두 가지로 지키라고 명령하셨으니(마28:19-20, 고전11:23-29), 곧 세례(침례)와 성찬입니다. 교회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이 두 성례를 부지런히 시행해야 합니다.

2.전개

성찬(聖餐)은 세례(洗禮)와 마찬가지로 그 예전적 의식 속에 복음의 내용이 담겨 있는 바, '보이는 말씀' 혹은 '가시적(可視的) 설교'로서 은혜의 방편으로 작용합니다. 이는 이 예식을 말씀을 좇아 바르게 시행할 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풍성하게 체험하게 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성례전이 자주 행해진다는 이유에서나, 또는 교회 성장을 위한 수단으로 남용되어 의식(意識)없이 함부로 집행돼서는 안 된다는 사실에 각별히 유의해야 합니다. 성경은 특별히 성찬을 그릇되게 행할 때 심지어는 병든 자와 죽은 자까지 나타났던 초대교회의 사실을 기록으로 남김으로서 우리의 주의(注意)를 촉구하고 있습니다(고전11:29-30).

그런데 이 두 성례(聖禮)는 사람이 구원을 얻는 데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이 사실은 성례가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만을 대상으로 시행되는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 금방 이해가 됩니다.

성례는 구원의 수단이 아님

하나님의 구원의 수단인 말씀은 신자와 불신자의 여부를 떠나서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선포합니다. 그러나 성례는 오직 구원받은 사람만을 대상으로 시행되는 것입니다. 가령 교회에서 구도자(求道者)에게 세례 혹은 침례를 베푼다고 할 때, 그렇게 세례나 침례를 받음으로서 비로소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구원을 받은 사실이 입증되었기 때문에 그 사실에 근거하여 세례나 침례를 베풂으로서 그도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사실을 하나님과 온 회중(會衆) 앞에서 인(印)치는 것입니다. 특별히 세례를 생각할 때는 이 점을 각별히 주의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이렇게 세례나 성찬이 되었든지 간에 성례는 사람을 구원하는 수단이 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성경은 구원의 조건으로 오직 믿음만을 이야기하지 성례를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나가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요5:24에서 주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믿음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권적으로 선택하신 사실을 말합니다.

둘째 성례는 믿음을 일으키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전혀 믿음이 없던 사람이 성례로부터 믿음이 생긴다는 법은 없습니다. 오히려 성례는 그것이 공급되기 전에 벌써 믿음이 선재(先在) 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성례는 그에게 믿음이 있다는 전제하에서 베풀어집니다. 언제나 믿음이 받아들여진 전제하에서 시행되는 것이지 믿음이 없는 데도 그것을 받으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행16장에 보면 빌립보 성의 자주 장사 루디아가 바울로부터 세례를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녀가 세례를 받았던 것은 주께서 먼저 그녀의 마음을 열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청종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었기 때문에 세례를 받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세례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베푸는 것이지 세례를 베풂으로 믿음이 생기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순서에 대하여 오해가 있으면 안됩니다.

셋째 세례나 성찬이 없이도 구원받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성례라는 것이 구원에 절대로 필요하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례가 우리에게 주는 독특한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성례에서 우리가 받는 은혜라고 할 때는 우리의 구원의 가장 기본이 되는 '믿음의 보강'이라는 것이 먼저 오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역 안에서 구원하셨다고 하는 복음의 사실에 대한 신뢰이며 확신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란 복음의 사실이 주는 큰 소망을 생명처럼 붙잡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례는 복음의 사실(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를 구원하신 사건)을 우리로 하여금 더욱 명료하게 깨닫게 하고 또 우리에게 힘을 주어서 튼튼하게 하는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례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내리신 명령인 까닭에 우리는 이것을 의무적인 차원에서 시행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준수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자로서 주께서 제정하시고 지시하신 명령에 신성한 의무감을 가지고 성례를 집행하는 것입니다. 만일 의도적으로 성례를 태만히 하거나 소홀히 하게 되면 여기에서 오는 은혜로부터 멀어짐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빈곤에 이르게 됩니다. 나아가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결과로까지도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심을 내어 성례를 시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구원의 수단인 것처럼은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찬 제정의 배경인 유월절

그러면 성례는 어떻게 해서 신약교회에서 시행하게 되었을까요? 이미 말씀드렸듯이 신약 교회는 두 가지 성례를 갖고 있습니다. 곧 '세례'와 '성찬'입니다. 세례는 한 사람의 개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면서 받는 개인적인 의식인 것이고, 성찬은 성도들이 함께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단체적인 의식입니다. 구약 교회에도 두 가지 성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할례가 있고, 단체적으로 시행하는 유월절이란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유월절이 되면 양을 잡습니다. 이때 피와 고기를 분리하여 다루는데 피는 사방에 뿌리고 고기는 먹습니다. 이때 고기를 먹을 때 떡을 곁들여 먹고 또한 포도주를 곁들입니다. 이렇게 해서 유월절 의식을 저녁에 치르고 다음날부터는 무교절이라고 해서 누룩이 없는 떡을 이레 동안 먹는 의식을 계속합니다(레23:4-6). 즉 유월절은 그날 저녁에 한번 지내는 것으로 끝나고, 다음날부터는 무교절이 칠일간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유월절에 양의 피를 뿌리고 그것의 고기를 먹는 것이 나타내는 상징(象徵)이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이 공급된다는 의미입니다. 유월절에 양을 잡아 뿌린 피를 통해서는 죽음을 대속적으로 막는 것을 상징하고(레17:11), 고기를 먹는 것을 통해서는 생명이 자양분을 얻는 것을 상징합니다.

성찬을 제정하실 당시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유월절 잔치에서 잡수시고 계셨습니다(눅22:14-16). 예수님은 십자가의 사역을 바로 목전에 둔 시점에서 이 잔치에 참여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유월절의 피와 고기가 상징하고 있던 바가 어떻게 당신을 통해 실체로서 완성되게 되는가 하는 것을 가르치시고, 이제는 유월절 잔치의 규례를 폐지하시며, 이후 신약교회가 시행해야 할 새로운 예식인 성찬식을 영원토록 제정하시려 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바로 내일이 닥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돌아가심으로 지금까지 유월절 잔치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나고 있던 피와 고기의 실체가 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피와 고기가 상징하고 있던 바의 실체가 되시게 되면 더 이상 상징은 필요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친히 베드로와 요한을 시켜서 유월절 잔치를 준비하게 하셨고(눅22:7-13), 그런 다음 잔치가 한창 진행될 때에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눅22:15)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눅22:16)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후 떡과 잔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심으로 성찬식을 제정하시게 됩니다. 이렇게 옛 것을 폐하시고 새 것을 세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성찬의 특징

눅22:14-20에 나타난 예수님의 유월절 참석 장면을 자세히 보면 몇 가지 특징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잔을 처음에 배분하시고(17절), 다음으로 떡을 배분하셨으며(19절), 다음에 또 다시 잔을 배분하신 사실입니다(20절). 17절에 보면 "이에 잔을 받으사 사례하시고 가라사대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고 하심으로 잔을 첫 번째로 배분하셨습니다. 이후 18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고 하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떡을 배분하시게 되는데, 곧 19절에 보면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20절을 보면 저녁 식사가 끝난 후 다시 잔을 배분하셨습니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이렇게 잔이 두 번 배분되었고(17절, 20절), 떡이 한 번 배분되었으며(19절), 여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18절)고 하는 의미 심장한 말씀까지 곁들이셨습니다.

이 상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첫 번째로 잔을 배분하심과 동시에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지금을 끝으로 유월절 규례가 완전히 종결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포도나무에서 난 것이 가리키는 바는 유월절 잔치에서 나누는 포도주를 가리킵니다. 이것을 더 이상 다시 마시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언제까지 그러시는가 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통하여 세워진 교회가 이 세상에서 복음의 확장 사역을 다 마치게 될 때에 최종적으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심으로 세워지는 나라를 가리킨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재림하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최종적으로 완성하실 때까지 더 이상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새로운 성례인 성찬식을 제정하시는 일과 관련하여 말씀하신 까닭에, 곧 지금을 마지막으로 유월절이 최종적으로 종결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떡을 분배하셨습니다. 이때로부터 성찬식이 제정됩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이 떡의 의미를 부여하시는 말씀을 덧붙이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19절)고 하셨습니다. 이는 성찬을 제정하신 것입니다. 앞에서 첫 번째 잔을 주실 때에는 포도주에 관해서만 언급하심으로 유월절 잔치의 종결을 말씀하셨습니다. 이후 떡을 주실 때에는 이렇게 오늘날 신약 교회가 지키는 성찬의 의미를 부여하셨습니다. 이후 저녁 식사가 끝나게 되었을 때, 예수님은 다시 잔을 배분하십니다. 이때 이것에도 성찬의 의미를 부여하십니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20절). 여기 '이와 같이 하여'의 의미는 앞에서 떡에다 성찬의 의미를 부여하셨듯이 여기 잔에다가도 성찬의 의미를 부여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해서 성찬의 두 요소, 곧 떡(몸)을 떼고 잔(피)을 나누는 형식이 완성되었습니다.

형식과 절차의 문제

예수님께서 떡과 잔을 분배하시고 의미를 부여하심으로 성찬식을 제정하실 때에, 이때 친히 보이신 행동과 관련해 몇 가지 생각해 볼 점이 있습니다.

첫째 떡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떡은 무교병입니다. 이는 누룩을 넣지 않고 만든 떡을 가리킵니다. 과거에 누룩은 가루를 부풀리는 목적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유월절에 사용하는 떡을 만들 때에는 이것을 넣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누룩을 넣어서 만든 떡은 오래 두면 금방 부패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일부러 딱딱하게 만든 떡을 먹는 것을 통해서 애굽에서 살았던 고난의 때를 추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곁들여 나물을 먹을 때에도 일부러 쓴 나물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과거 고난의 시절을 기억하고,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자유 가운데 있게 된 것을 기억하는 중에 하나님께 감사드리게 했던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교병을 만들어 먹는 것은 보편적인 생활 습성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의미를 부여하시기 위하여 무교병을 만들라고 특별하게 지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무교병 떡을 성찬의 떡으로 제정하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교회가 성찬식에 사용하는 떡을 만들 때에 역시 이스트나 베이킹 파우더 같은 것을 넣지 않고서 만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상징이니까 반드시 어떤 부풀리는 것도 넣어서는 안 된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가급적이면 이렇게 하는 것이 더 좋다고 하겠습니다.

둘째 잔에 관한 문제입니다. 성찬식을 할 때, 떡을 뗀 후에 이어서 잔을 돌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잔을 제정하실 때에 당시 유월절 잔치에서 사용하던 포도주를 그대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아주 보수적인 교회의 경우를 보면 포도주는 술이니 안 된다고 하면서 포도즙을 사용합니다. 서양의 경우와는 달리 우리 나라의 경우 술이 주는 인상이 아주 부정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옛날 어른들은 술을 마시는 것을 신앙생활의 큰 죄가 되는 것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술이란 것은 성도가 절제의 정신과 건덕을 세우는 차원에서 마시지 않을 때에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것 자체를 죄악시 여겨서 억지로 금주(禁酒)하는 것이 되면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술 그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이것을 잘 못 쓰는 까닭에 죄악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주 그 자체를 사용하셨고 역사적인 개혁파 교회 역시 예로부터 이렇게 해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제정하신 것인 만큼 자기 생각을 섞지 말고 그대로 따르는 것이 더 옳다고 하겠습니다.

셋째 양의 문제입니다. 즉 성찬식 때 나누는 떡과 잔의 양을 어느 정도로 하면 좋겠는가 하는 측면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경우를 보면 이것의 양이 지나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많이 먹어서 배부르고 많이 마셔서 취한 상태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왜 이랬는가 하면 애찬(愛餐)을 나누는 자리에서 겸하여 성찬식까지 치렀기 때문입니다. 즉 초대교회 성도들은 서로 사랑을 나누어 음식을 함께 먹는 '애찬'이 습관이었습니다. 이렇게 애찬을 나누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성찬식을 거행했습니다. 그래서 음식을 먹을 때 가졌던 자유분방한 기분과 포만감의 상태에서 성찬식이 베풀어진 것입니다(고전11:18-22). 성찬식에서 사용하는 떡과 포도주의 양의 문제는 이렇게 생각하면 쉽게 대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곧 성찬식은 하나의 형식이고 상징입니다. 성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것이 떡과 포도주요, 이 주님의 대속적 죽으심을 감사하며 기념하는 것이 성찬식의 의미입니다(고전11:26). 그러므로 형식과 상징이 살아나는 효과가 있으면 되는 차원에서 양을 적절하게 생각하면 됩니다. 즉 떡은 한 조각 입에 넣으면 되고, 포도주 역시 한 잔 입에 닿으면 됩니다. 물론 씹는 의미가 있어야 하고, 마시는 의미도 있어야 하므로, 떡을 콩알만큼 적게 뗀다거나, 포도주를 한 방울만 입에 넣는 정도라면 곤란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떡은 보통 크기의 밤알 정도면 적당하겠다 싶고, 잔은 한 모금 넘길 수 있는 정도인 작은 소주 잔 크기면 적당할 것입니다.

넷째 떡과 잔을 분배하는 방식의 문제입니다. 떡은 성도들 각인이 떼어서 나누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떡을 주실 때에 먼저 하나님 아버지께 사례하신 후 떼어서 나누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이것을 받아서 서로 자기의 분량을 떼어서 취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이렇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먼저 떡이 자기 앞에 오면 이것을 자기가 취할 만큼 떼어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 사례하고 입에 넣습니다 떡을 들고 잠시 기도한 후 입에 넣어도 되고, 아니면 입에 넣을 때에 사례하는 심정을 가져도 됩니다. 떡을 들고 한참 동안 기도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럴 때 한 가지 조심할 것은 떡 자체를 예수님의 몸으로 받는 식으로 기도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일입니다. 떡과 포도주는 표상(表象)일 뿐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물질은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루터란이나 로마 카톨릭적인 생각으로, 개혁파 교회에서 취하는 입장이 아닙니다. 그것이 뜻하는 내용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어야 하고, 곧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희생을 회상하며 거기에 감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어찌되었든지 이렇게 서로 서로 떡을 떼게 되면 참석자들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한 의미가 크게 살아날 것입니다. 한 덩어리를 각자가 나누어서 떼었으니, 결국은 참석자들 모두가 한 떡을 뗀 것이요, 곧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성찬이 갖는 신학적 의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인성으로 인해 이루어진 구속의 은혜가 성찬에 어떻게 임재하느냐 하는 문제는 오랫동안 논쟁이 되어 왔으며 지금도 상당한 견해의 차이를 가져오고 있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개혁파 교회의 입장은 '영적 임재설'을 주장합니다. 순전히 기념설로만 보는 견해는 바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성만찬은 은혜의 방편이므로 이를 합당하게 시행하는 때에 실제적인 은혜가 분명히 임해오기 때문입니다. 물론 물리적으로 혹은 마력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영적으로 임합니다. 은혜가 분명히 임해 옵니다. 성찬은 한낱 기념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구속사를 되돌아보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면서 성만찬을 행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분명히 임합니다. 말씀 선포를 통해서 임하는 은혜와 동일한 은혜가 성만찬을 집례할 때에도 옵니다. 그러므로 기념설로만 그치지 말고 영적 임재설을 겸해야 합니다.

기념설과 영적 임재설의 입장에 의하면 성찬시에 실제로 그리스도의 육체가 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만찬을 합당하게 말씀대로 시행할 때에 그리스도의 모든 구속의 은혜가 영적으로 우리에게 전달되어집니다. 그래서 실제로 모든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선포된 그 은혜가 성만찬 시에 실제로 우리에게 옵니다. 성찬을 믿음으로 받으면 영적인 은혜가 옵니다.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이 이룬 그 모든 구속의 은혜가 영적으로 우리에게 임합니다. 은혜만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그 성만찬에 임재하십니다. 몸으로가 아니라 영으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성만찬으로 오십니다. 이를 믿음으로 받으면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받습니다. 무엇보다도 주님과의 연합을 더욱 강화하게 됩니다. 성만찬이 제일 강조하는 진리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다 연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답게, 곧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루터교에서는 칭의만 강조하고 성화는 그리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늘 죄짓고 회개하고 용서받고 해서 제자리로 되돌아갑니다. 그러나 칭의는 성화를 위한 출발입니다. 죄를 지으면 회개해야 되지만 이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죄 자체와 멀어짐으로 우리의 신앙이 점점 더 자라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함 분량에 충만한 데까지 자라면서 선을 행해야 합니다. 성만찬을 행하므로 우리는 보다 더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의 결심을 다시 하게 됩니다. 그냥 떡만 먹고, 잔만 비우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아울러 성찬을 행할 때에 반드시 덧붙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만일 성찬 시에 말씀을 곁들이지 않고 떡만 나눠주고 포도주만 나눠주는 것으로 그친다면 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곧 죽은 성례가 됩니다. 우리가 단순히 물 속에 들어갔다가 나온다거나 혹은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신다고 해서 은혜가 발생하겠습니까? 오로지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는 자리에서 그것을 진정한 믿음으로 받을 때에 비로소 성령께서 그러한 은혜를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성례가 시행될 때에 동시에 말씀도 수반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말씀을 전달해야 합니다. 가령 "우리가 떼는 이 떡을 먹음은 우리의 온전한 구속을 위하여 찢기신 주의 몸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 떡을 받아먹으면서 주께서 우리의 온전한 구속을 위해 그 몸을 찢기셨음을 믿고 기념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는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이렇게 해서 주께서 찢기신 살을 직접 먹는다고 할 때 얼마나 은혜가 넘치겠습니까? 주님의 살을 먹으니까 주님의 몸에 연합하여 생명을 공급받고 주님과 같이 자라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찬의 주된 의미는 주님의 거룩한 몸에 동참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찬 시에는 습관적으로 죄짓는 사람인 경우 참여시키면 안 됩니다(고전11:27-30).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은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곧 거룩하게 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일주일 내내 죄만 짓다가 주일날 예배에 참석하여 아무렇게나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또 한편으로 성찬은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켜 줍니다. 귀로 말씀의 선포를 듣는 것만 해도 은혜를 받고 믿음이 자랍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연약한 것을 아시고 우리의 신앙에 더 확실하게 날인(捺印)하는 감각적인 은혜의 수단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성찬입니다. 이를 통해 주님의 구속의 사건을 우리의 손으로 만지게 하셨고, 입으로 씹게 하셨으며, 목으로 삼켜서 주님의 죽으심에 참여케 하셨습니다.

자주 시행해야 하는 성찬

오늘날 칼빈주의를 표방하는 한국의 장로교회는 성찬을 이해함에 있어서 칼빈의 견해보다는 쯔빙글리의 기념설의 견해를 더 따르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쯔빙글리는 성찬을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상징 정도로 가볍게 보았으므로 성찬은 한 해에 네 번 정도 베풀면 족하다고 보고 그렇게 시행하였습니다. 쯔빙글리의 성찬 이해는 말씀을 중요시하고 강조하는 복음주의의 여러 교회들이 따르고 있습니다.

반면 성찬을 훨씬 더 의미 있는 것으로 이해하였던 칼빈은 이를 매주일 행하기를 원했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일년에 한번만 성찬에 참여하게 만든 관습은 마귀가 만든 것이라고 하면서 그리스도교의 회중은 적어도 매주 한번은 성찬을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제네바 시에서는 이미 칼빈이 오기 전부터 쯔빙글리의 영향을 받아 시행하던 대로 일년에 네 번 행하는 관습을 고수하려고 했으므로 칼빈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이것이 오늘날 개혁주의 교회가 성찬을 대체로 일년에 네 번 정도 행하는 관행의 근거가 된 것입니다. 한국 장로교회의 경우는 일년에 두 번 정도 성찬식을 거행해 왔으므로 개혁주의 교회의 일반적인 관례에조차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역사가들의 증언에 의하면 처음 한국에 들어온 개신교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파하여 침례를 베푼 후에도 십 년이 넘도록 성만찬을 거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초기 한국 개신교 예배는 청교도의 후예였던 선교사들의 예배에 대한 미흡한 수준에 따라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습니다. 청교도들의 예배의 특징은 성만찬이 없는 말씀 중심의 예배와 은혜의 체험과 경건을 중시하는 형태였습니다. 이런 신앙 노선을 전수 받은 한국의 개신 교회는 일제의 탄압과 민족상잔의 비극을 체험하면서 말세론과 기복신앙에 편승하여 예배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예배의 형태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온 무리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구체적인 행위를 부여하지 못하는 과오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위와 같은 과오 속에 자라온 한국의 많은 교회는 성만찬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였기에 성만찬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올바른 섬김의 방법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구원은 성례를 통해 얻기보다는 믿음을 통해 얻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복음주의 영향을 받아서 설교를 중심하는 예배로 만족한 데서 온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찬은 교회론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교회가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바 된 결과로 출현한 것(행20:28)이기에 교회와 성찬은 불가분의 관계성을 맺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초대교회의 경우를 보더라도 안식 후 첫 날에 예배와 더불어 성찬을 나눈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행20:7).

3.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은 그 분의 백성이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는 두 가지 방편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곧 '말씀'과 '성례'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기를 원하는 교회는 말씀을 충실하게 증거하는 것 못지 않게 성례의 신실한 집행도 성실하게 매주 시행해야 합니다. 교회는 이 두 가지 중 어느 한가지라도 등한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례는 우리의 구원에 절대적으로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례에 참여하고 아니하는 것이 구원의 문제와는 직접 관계가 없습니다. 주님은 구원의 수단으로 이 성례를 세우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의 연약성을 우리 자신보다도 더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복음을 청각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시각, 촉각, 미각을 통해서도 복음에 대한 더욱 깊은 이해를 하고 즐기도록 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 가견적(可見的)인 은혜의 수단, 곧 '유형적인 말씀'을 '성례전'을 통해 주심으로 우리들의 신앙이 더욱 더 자라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과 칼빈은 성례를 '가견적인 말씀'(Visible Word)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성례가 사실상 '눈으로 보는 설교'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귀중히 여기고 그 분의 말씀에 진실하게 순종하는 교회는 말씀 외에 성례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성례를 등한시하는 것은 곧 주님의 말씀을 신중히 받아들이지 않고 충실하게 순종하지 않는 것을 가리킴에 다름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연약성을 아시고 도와주시기 위해서 성례를 세워주셨는데 우리가 이것을 등한시한다면 우리들이 스스로를 과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은혜로운 배려를 외면하고 사는 일이 될 것입니다.(*)

(김성주, 언약공동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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