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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그 영원성과 신령함

작성자이천우|작성시간02.08.03|조회수75 목록 댓글 0
1. 오늘의 개혁 교회, 과연 그 본질을 유지하고 있는가?

오늘의 신학의 쟁점은 성경 해석학과 교회론으로 집중되고 있다. 그것은 그럴 수밖에 없다. 도무지 성경을 어떤 관점으로 해석하느냐는 신학의 핵심적인 쟁점이 될 수밖에 없다. 거기에 신학의 생명이 달려 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신학의 쟁점이 바로 교회론 이다. 성경해석학이 신학의 출발점이라며 교회론은 신학의 마지막 열매에 해당한다. 어떤 성경관과 해석적 관점을 취하느냐에 따라 교회에 대한 이해는 천양지차를 지니게 된다. 역사적으로 교회에 대한 이해는 개혁교회와 카톨릭 교회간에 양립할 수 없는 입장의 차이를 지녀왔다.

카톨릭 신학은 한마디로 규정한다면 교회론 중심 신학이다. 즉 교회의 권위가 모든 신학적 진리판단의 최고 법정이라고 보며 따라서 교회론이 성경의 권위보다 우위에 있다. 그것은 성경의 권위를 최고 우위에 놓는 개혁교회의 신학 원리와 정면에서 충돌한다.

카톨릭에서의 교회와 신은 철두철미 주객이 전도되어 있다. 카톨릭 신학에서의 신은 성경이 말하는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으로 이어지는 언약 성취의 살아 계신 하나님이 아니다.

카톨릭 신학의 대부 격인 아퀴나스의 대표적인 저작 {신학 대전}에서 말하는 신은 인간의 이성에 근거한 철학적 존재증명에 의한 관념적인 신이다. 모든 사물에는 원인이 있지 않는가?

이 우주에도 원인자로서의 신이 있지 않겠는가? 라고 질문을 던지면서 신의 존재를 증명한답시고 희랍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를 빌어온다. 신을 철학의 논리에 의해 설명하는 것이다. 그때의 신은 역사를 지배하거나 자기 백성을 사랑하는 살아 있는 신이 아니다. 그저 현상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는 관념적 허구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카톨릭 신학에 의하면 신은 교황의 절대 권력을 수행하기 위한 도구로서 조작된 허수아비일 뿐이며 모든 실질적인 권세는 교회의 수장으로 간주되고 제도적으로 보장해놓은 교황에게 주어진다. 인간의 죄사함 그리고 교회정치의 모든 권한 행사의 실질적인 원천도 인간 교황과 신부에게 주어져 있다. 그러나 어디 성경에 교황이라는 직책을 인정하고 있는가?

그리고 인간 신부에게 나아가서 자신의 죄고백을 하고 용서함을 구하라는 가르침이 있는가? 그들은 신이 교회라는 기관에 구원의 사역을 완전히 위임해 주었고 제도적인 교회는 그 권한을 소유하고 있다고 본다. 이 때문에 교회 제도 자체가 구원을 위한 신적 권능을 가진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이는 모든 교회의 권세가 머리되신 그리스도 혹은 말씀 그 자체로부터 나오며 교회의 제도적인 직분 자체에 권세가 있음을 부정하는 개혁 교회의 원리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개혁 교회는 지금도 머리되신 그리스도가 성령을 통하여 신령한 교회의 구성원들을 장악하고 구원의 사역을 행하시고 있으며 교회의 직분은 그에 의해 주어지는 선물이며 말씀 수호와 전파를 위한 봉사의 직분이라고 본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성경의 진리를 모르면 인간은 그러한 허구적인 종교적 권력집단 안에 의존하고 기생하여 살기를 원한다. 여기에 거짓 종교가 융성 하는 원인이 있다. 진리를 모르는 인간은 참이든 거짓이든 상관없이 자신의 생존과 미래의 운명에 대한 안전 보장을 받기를 원한다. 그래서 오히려 자신을 절대적으로 지배하고 장악해줄 거짓 카리스마를 요청한다.

따라서 '절대 권력을 소유한 거짓 종교 지도자'와 '무지하고 어리석은 대중'은 서로가 서로의 유익을 위하여 상대를 이용한다. 거짓 종교 지도자는 신의 영광을 위한다는 그럴듯한 명분아래 자기의 욕망을 실현하고자 한다. 즉 어리석은 대중의 돈을 노리고 그들의 복종으로부터 권력향유의 맛을 즐긴다.

반면에 대중은 거짓 지도자의 절대 권세가 부여하는 세속적인 축복과 인정을 받으며 지도자를 이용한다. 그러니까 대중도 언제나 어리석은 것만은 아니며 자기 유익을 위해 지도자를 이용할 줄 아는 간교함이 있다. 그러다가 베짱이 틀어지면 서로를 무시하고 경멸한다.

그들은 철저히 자기 유익을 위하여 상대를 이용하고 있다. 지도자는 대중을 자기 권력의 노리개로, 대중은 지도자를 자기 안전보장의 도구로 이용한다. 이 관계가 최악의 비인격적 인간관계이다. 이것이 종교 타락의 죄악된 모습이며 디모데의 말씀처럼 속고 속이는 관계이다(딤후 3:13).

적어도 16세기 종교 개혁의 정신을 따르는 개혁신학은 교황 권위를 타파하고 말씀의 절대권위를 표방하면서 교회는 오직 말씀의 힘만이 그 통치력을 가진다고 하는 너무도 건전한 원리를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성경에 근거한 진리의 개혁을 통해 교회의 개혁을 염원하였다. 그들은 교황중심주의를 전면적으로 혁파했다. 그리고 교회의 표지는 말씀의 올바른 선포에 있음을 제창하면서 성경에 근거한 교회관을 주장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교회 안에 성도신앙 양심의 자유의 보장과 더불어 신앙에 근거한 아름다운 질서의 확립을 위한 헌법들을 만들어 감으로써 현실적인 교회의 올바른 기틀을 잡아갔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의 소중한 교회 개혁의 작업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성경해석의 미진함과 미숙함으로 말미암아 종교 개혁은 아직 미완의 개혁으로 오늘 이 시대에 과제를 남기고 있다.

개혁자들은 거대한 당대의 카톨릭 교회의 사제중심의 교회관을 혁파하고 말씀 중심의 교회관을 세우는데 모든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회의 근원적인 성격이나 기원을 밝히는데는 여력이 미치지 못했다. 말하자면 개혁자들은 카톨릭의 교회관과는 상대적인 차원에서 대비되는 교회관,

즉 사제중심이 아닌 말씀 중심의 건전한 교회관을 제시하기는 하였으나 교회의 더 본질적인 기원과 의미를 성경해석을 통해 온전히 드러내지는 못했다. 그 결과 50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개신교가 다시 카톨릭화 되는 역류현상을 보게 된다.

개혁자들이 충분히 주목하고 강조하지 못한 교회의 기원과 본질은 과연 무엇일까? 이는 실로 성경적 교회를 염원하는 우리의 중대한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16세기 종교 개혁의 소중한 전통을 따르는 개혁 교회는 오늘날 과연 그 전통의 진정한 의미를 보존하거나 발전시키고 있는가? 필자의 눈으로 볼 때 이미 너무도 훼손되고 그때에 비해서 오히려 퇴행현상을 빚고 있다.

끝없이 높아만 가는 목사들의 허위적인 권위의식과 교권주의 그리고 목사직의 직업화 현상, 중세 말기에 유행했던 예배당의 치장과 예배의 의식주의화, 교회의 사유화 현상 그리고 그로 말미암는 세습현상, 세속 정치가 오히려 혀를 내두르는 총회장 선거에 나타난 타락현상, 교회 성장이라는 미명아래 도입되는 마켓팅 전략적 교회 경영, 교회 지도자들 즉 목사와 장로간의 정치적인 암투와 줄다리기 혹은 맹목적 종속현상, 목사가 세속적 복을 빌어줌으로 자기 자리를 유지하고 성도는 그 거짓 주술적인 축복을 통해 환상을 즐기는 기복주의화, 진리를 통한 신령한 교제가 아니라 세속적 유익을 주고받는 세속적 친교 모임화, 등등

이루다 열거하기 어려운 교회의 본질 왜곡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일부 교회 개혁론자들이 이런 점들을 비판하기는 하지만 확고한 성경적인 대안의 제시가 없다. 그저 도덕적인 수준에서 비판하는 것이 대세이다. 그러한 피상적이고 도덕적 차원의 비판적 지적과 대안의 제시는 오히려 문제의 본질을 흐리게 하거나 더욱 왜곡한다.

질병의 치료는 먼저 병의 근원을 정확하게 찾아내는 일이다. 잘못 진단한 뒤에 아무렇게나 이루어지는 처방과 투약은 질병을 더욱 고질화시킬 뿐이다. 위에서 열거한 교회의 병적인 징후는 보다 근원적인 문제의 뿌리에서 나타난 지엽적인 현상일 뿐이다.

문제의 근원적인 자리는 드러난 현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의 뿌리는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교회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거나 왜곡됨으로부터 말미암는다. 여기에 성경진리에 근거한 교회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의미 천착의 필요성이 너무도 절실하다.

2. 진정한 교회, 그것의 기원과 본질은 무엇인가?

이 글에서는 교회의 기원을 창세전 혹은 영원 안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 본질을 신령함으로 보고 이를 성경의 논리를 따라 간략하게 밝히고자 한다. 이는 교회를 올바르게 이해함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리고 이 점에 대한 성경적인 확증은 오늘의 너무도 훼손되고 오염된 교회의 의미를 새롭게 하는데 있어서 핵심적인 요체가 될 것이다.

교회, 그 거룩한 이름과 실체는 과연 어디로부터 말미암는 것일까? 우리는 이의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 교회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기존 잡다한 선입견적인 생각들을 완전히 제거해 버리고 인간의 경험과 세상적인 지식과는 전혀 무관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계시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교회에 대한 장엄하고도 거룩한 진리를 통해 하나님을 계시하는 에베소서에 의하면 교회는 도무지 역사 안에 그 기원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해 교회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기획과 의도에 의해 시공간의 역사 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엡 1:4-6). 교회는 창세전에 하나님이 그 기쁘신 뜻을 따라 예정해 놓으신 대로 이루어진다고 증거 한다.

즉 현상적으로 보이는 교회의 기원이 창세 전 혹은 영원 안에서 라는 것이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교회에 대한 통념과는 너무도 다른 것이 아닌가!

분명히 지상의 어느 특정의 교회는 역사 안에 그 교회의 출발점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어느 진리를 깨달은 전도자가 복음의 열정을 가지고 있었고 그 뜻을 같이 하는 성도들이 만난다. 그리하여 교회를 세우기를 합심하고 어느 곳에 예배처소를 얻어 설립예배를 드리고 그래서 교회가 출발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교회설립 10주년 혹은 20주년이 되면 그 역사의 시점을 매우 중시하고 부각시킨다. 그리고 현상적으로 교회 설립에 투여된 인간 공로를 부각시킨다. 이런 역사 內的인 교회 이해로부터 교회가 지니고 있는 거룩성과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계시적인 의미는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교회의 진정한 기원은 그러한 역사의 시점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과연 교회는 그 기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 진리의 근원적인 성격인 영원성을 꼼꼼하게 되짚어 보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는 분명 역사가운데 오신 그리스도를 믿으며 따라서 여타 이방종교에 비해서 뚜렷한 역사의식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진정한 성격은 그 역사성을 포함하면서 초월하는 영원성에 있다. 바울에 의하면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함이라고 한다(고후 4:18). 이 얼마나 통상적인 인간의 사고 방식을 혁명적으로 뒤집어엎는 발언인가!! 통상적이고 상식적인 사고 방식에 의하면 보이는 세계야말로 무궁하게 지속이 되어 왔고 또한 앞으로는 그렇게 길게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기나긴 시간을 바울은 잠시 잠깐으로 말한다. 모세 역시 마찬가지의 증거를 한다. 시편 90편에 의하면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면 밤의 한 경점과도 같다고 노래함으로써 보이는 이 세상의 순간성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계시록에 의하면 더욱 급진적인 표현이 나타난다. 그리스도에게는 처음이 곧 나중이요 알파가 곧 오메가인 것임으로써 세상의 태초와 종말이 영원하신 그리스도에게는 동일한 지점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시간은 영원함에 비추어 보면 길이가 있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얼마나 기이한 일인가? 아니 그렇게도 기나긴 시간의 연속이 분명하며 태초와 종말은 시간의 개념상으로는 명백하게 멀리 떨어져 있음이 분명한데 어찌 그것이 하나로 통합되고 동일한 것으로 보인단 말인가?

그래서 결국 시간이란 없는 것처럼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를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해 내고 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감이라(롬 11:36)"

즉 만물의 기원은 영원하신 존재자이신 주님이시다. 그리고 결국은 주께로 돌아가게 된다. 따라서 만물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존재성과 그 능력의 계시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런 영원함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할 때 교회의 기원 역시 그 영원함 안에 있음이 너무도 분명하다. 바울은 교회에 대한 비밀을 말하는 에베소서에서 이를 역점을 두어 강조한다. 그래서 그 교회는 세상이 다 무너진다 하여도 결코 영원히 무너지지 않으며 견고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엄밀하게 말해 한 개인이 교회의 지체가 되는 것은 인간이 전도해서 비로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드러난 역사적 차원에서만 볼 때 가능한 주장이다. 실상을 따지면 역사적 차원 이전 즉 영원 안에서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하나님의 백성이 이미 되어있는 자들이 때가 차매 역사가운데서 성령의 사역을 통해 전도의 말씀을 듣고 교회의 일원으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드러난다' 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성도가 역사 가운데서 죄인이 되고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함을 얻어 교회의 지체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예정된 뜻에 의해 이미 영원 안에 선택된 교회의 지체인 성도가 역사가운데 그러한 과정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아야 교회의 영원성과 그에 근거하는 교회의 역사성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드러나는 교회의 역사적 현실' 은 '보이지 않는 영원성'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바울의 증거를 들어보자.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 엡 3:8~12 )

위의 성경은 교회의 기원이 영원한 때로부터임을 명백히 증거하고 있다. 이를 깨달은 바울은 교회의 일원이 되거나 일꾼으로서 살아가는 일이 도무지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영원 안에부터 주어진 은혜의 선물임을 확신했고 이 때문에 영원성과 더불어 기독교 진리의 또 하나의 핵심인 은혜에 붙들린 종이 되었다.

더 나아가 11절에 나타난 대로 영원한 예정의 뜻이 드러나고 실현되어 가는 것으로서의 교회를 확신한 바울은 12절의 표현대로 옥중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을 유지할 수가 있었고 하나님께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었다.

오늘날 교회는 이런 교회의 영원성, 혹은 창세전 예정사상에 대한 가르침이 사라져 버린 지 오래다. 16세기 종교 개혁자들은 이를 언급하기는 했으나 충분히 주목하지 못했다. 지금에 와서는 아예 설교 강단에서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이를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은 교회의 뿌리를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것은 교회를 통한 영원하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과 영원한 은혜를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모든 교회 타락과 왜곡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이 점을 다시 성경에 근거하여 부각하지 않고서는 현실의 교회 회복은 불가능하다. 뿌리가 썩어 있는데 어떻게 좋은 열매 맺기를 기대할 수 있는가? 교회의 영원성을 배제하고 역사적 모습만을 중시할 때 현실의 교회는 하나님의 뜻의 경륜보다는 인간의 인위적인 조작과 지배하에 놓여지게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분명하며 진정한 영생의 누림을 회복할 수 없다. 여기에 교회의 영원성이라는 명제의 중대성이 있다.

두 번째로 검토하고자 하는 것은 교회의 진정한 본질로서의 교회가 지니는 신령함이다. 성경은 말하기를 교회는 혈육을 가진 보이는 인간 집단의 모임이 아님을 선언하고 있다. 그것의 본질은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교통(사귐)으로 이루어진 신령한 모임이다.

성경은 이를 비유로 표현하기를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교회를 그의 지체로 나타낸다. 이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는 교회의 본질을 이해함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보이는 수준의 제도적인 교회는 실상 보이지 아니하는 그리스도와의 교통의 질적 수준에 따라 나오는 것이며 후자의 건실함이 없이는 전자의 아름다움은 없다.

그리스도의 지체로 신령한 교제를 이루어간다는 말이 지니는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교회의 신령함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이는 매우 중요한 질문이 된다. 교회의 신령함을 신비주의자들은 말씀을 떠난 모종의 신비적인 체험으로 오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신령함이란 성령의 사역과 불가분의 관련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의 핵심은 진리를 깨달아 가는 일이다. 그리스도가 부활 승천하신 지금 교회의 시대에는 예수의 영이신 성령의 지배아래 놓여있다. 성령께서는 자신이 기록해 놓으신 성경의 진리를 택한 백성이 깨달아 가도록 역사하신다.

성경을 깨달아 간다는 것은 하나님이 여호와이시며 예수는 그리스도이심을 알아간다는 말이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 즉 예수가 성도들을 지배하는 왕이심을 배우고 깨닫게 되면 그의 통치를 느끼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지체로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이에 따라 성도간에도 진리 되신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하게 되면 각 성도는 그리스도의 통치를 서로간에 고백하고 그에게 감사하는 삶을 나누게 된다. 그리하여 진리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는 곳에 성도간에는 인간적인 생각과 욕망이 배제되어 가고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일치된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신령한 교회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이는 진리에 의한 신령함이 없는 세속에서는 있을 수 없는 신령한 천국의 모습이다. 요컨대 성령과 진리 그리고 신령한 교제는 삼자가 불가분의 긴밀한 관련을 지니고 있게 된다.

이런 내적인 신령함이 이루어 갈 때 속사람의 신앙이 자라게 되고 그에 따라서 제도적인 수준의 직분을 아름답게 수행할 수가 있게 된다. 신령한 하나됨이 기관차에 해당한다면 제도적인 직분의 수행은 객차에 해당한다. 즉 진리의 깨달음에 의한 신령한 속사람의 성장과 그로 말미암는 신령한 교제의 삶이 제도적인 직분의 실질적인 수행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진리의 풍성한 깨달음과 신령한 속사람의 성장이 없다면 어떤 교회의 직분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수행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보이는 화려한 꽃이 보이지 않는 뿌리로부터 말미암듯이 보이는 제도적인 교회의 아름다움은 보이지 않는 신령한 교제의 구축 위에서 이루어진다. 여기에 제도적인 직분론의 논의 이전에 신령한 교회의 우선적인 중요성이 거론되는 이유가 있다.

교회의 제도적인 직분들 예컨대 목사와 장로, 권사와 집사 등은 무교회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불필요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작정하신 은혜의 선물로서 너무도 소중하다. 그것들은 속사람의 신령한 교제의 바탕에서 이루어 가는 실질적인 하나님의 사역의 손길을 체험케 하는 수단일 뿐 아니라 아름다운 질서와 구체적인 봉사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은혜의 도구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의 실질적인 수행의 힘은 언제나 그 이전의 신령한 내면의 성장의 농도에 따라 나온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드러난 제도적인 수준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교회 개혁론자들의 결정적인 한계가 이 점의 간과에 있다. 교회 제도 운영상의 갈등과 혼란은 근본적으로 그 이전 교회의 신령함의 미숙으로 부터 말미암는다. 다시 교회의 신령함의 부족은 진리의 깨달음의 미숙으로 부터 말미암는 것이다.

요컨대 진리만이 신령한 교제의 삶을 가능케 하고 그 내면적인 토대 위에 보이는 교회 제도나 체제의 성숙되고 아름다운 운영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드러난 한국 교회의 수많은 문제가 극복되기를 바라는가? 그것은 교회의 영원성에 대한 확인과 진리 깨달음에 기초하는 신령함을 회복함으로써 가능하다.

이는 인위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 될 수 없다. 오직 성령 하나님이 성경의 진리를 진리답게 해석하여 깨닫게 하시는 신령한 사역으로부터 말미암는다. 여기에 교회를 절대적으로 주관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주권성이 강조되어야 하며 또한 올바른 성경해석의 중차대 함이 있다. 16세기 종교개혁이 그랬던 것처럼 교회의 개혁,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하나님 나라의 회복과 복된 누림은 정당한 성경해석으로부터 시작됨을 재확인할 수 있다. 성경은 말하기를 교회란 역사 안에 그 기원을 가지거나 인간들의 의기투합과 노력에 의한 산물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그것은 창세전 영원 안에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며 예수님의 약속대로 오신 성령이 직접 진리의 신령한 통치를 수행하시며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의 드러내고 계신다. 즉 교회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의 도구이시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1:4~5 -


*장안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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