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본문은 창세기 39장입니다.
설교의 문제는 항상 어떻게 그 당시와 오늘날을 서로 연결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과 같이 역사적 본문에 관해 설교 준비를 할때 우리는 두가지를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첫째는, 우리는 여기 묘사된 사람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며 둘째는, 우리 하나님은 그때 사역하신 하나님과 같은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묘사된 사람과 같지 않습니다. 우리도 요셉과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요셉이 사람이므로 우리는 요셉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셉의 고생도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요셉은 자유인의 아들이었으며 부자의 아들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형들의 미움때문에 외국에 팔려가게 되었고 지금은 노예가 되어 보디발의 집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또 요셉은 주인의 처에게서 유혹을 당하고 있고 그 결과를 그의 상황은 보다 더 나빠졌습니다. 이 모든 사건의 결과로 그는 몇 년 동안 감옥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요셉의 당한 이 여러가지 문제를 당해야 한다고 함축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노예로 일해야 할 가능성은 적습니다. 우리가 성적 유혹을 당할 가능성이 늘 있지만 그때에도 요셉의 상황과는 다를 것입니다. 또 요셉은 이 일의 결과로 감옥에 갇혔지만 우리도 같은 이유로 그런 벌을 받을 것이라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사실 요셉은 하나님의 계획에서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후에 요셉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요셉은 애굽으로 가서 기근때에 이스라엘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요셉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에서 아주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에 반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그만큼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생명이 우리 손에 달려 있지는 않습니다. 정말 우리는 요셉과 다른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요셉의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과 같은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항상 같은 분이시며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런 이야기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본문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그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계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이 표현은 창세기 39장에 두 곳에 나오는데 한 번은 2절이며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또 한번은 2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 하나님은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을 약속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오늘의 본문에서 요셉과 함께 계신 그 하나님을 만나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볼 것은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계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지금 애굽에서 노예로서 보디발의 집에서 일하고 있지만 거기서도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계십니다. 그 결과 요셉은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주인은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계신 것을 보고 요셉으로 가정총무로 삼았습니다. 요셉이 집안의 모든 것을 관리하고 부터 집의 상황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계셨고 요셉이 행한 일에도 축복하셨습니다. 보디발은 온 집안이 잘 되어 가는 줄 알고 가정 사무를 모두 요셉에게 맡겼습니다. 그래서 이제 요셉은 더 이상 노예 중 하나가 아니라 노예 관리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주인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그 주인의 아내로부터도 관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여러 노예들 중 하나인 요셉은 그 여자의 눈에 잘 뜨이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노예 관리인이 된 요셉은 그의 눈에 잘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또 요셉은 미남이었으므로 그 여자는 그를 원했습니다.
어느날 그 여자는 부끄러움도 없이 요셉에게 동침을 요구했습니다. 그것은 요셉에게 어려운 유혹이었을 것입니다. 요셉이 그 여자에게서 어떤 매력을 느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매력이 없어도 주인의 처에게 굴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적어도 그런 높은 지위의 사람을 거부하는 것은 아주 어렵습니다. 또한 청년으로서 요셉은 성욕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함께 계신바 된 요셉도 유혹을 당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안에서 오늘 우리와도 함께 게실 것을 오늘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활이 유혹없는 생활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성적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때의 유혹은 요셉과 다른 상황에서 일어날 있을 것입니다. 요셉은 노예였고 따라서 거부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주인의 노예가 아니지만 쉽게 전통을 따르거나 사회의 관습을 따르는 약점을 지니지고 있습니다. 전통이 말하기를 남자는 결혼하기 전에 성 경험을 가져야 한다고 한다면 그 유혹을 거부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또 학교 친구들이나 군인들이 그들의 경험을 자랑할때 혼자서 그렇게 하지 않는 일도 역시 어렵습니다. 이와같이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가운데 어려운 유혹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요셉은 그 유혹을 받고 주인의 처에게 두가지를 대답합니다. 요셉은 그 여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을 이야기 합니다.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자신에게 맡겼는데 자기가 어떻게 이러한 죄를 범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여자도 그런 일이 큰 죄라는 것을 인정하여야만 했습니다. 또한 요셉은 하나님을 언급하면서 그 여자에게 "내가 어찌 하나님께 득죄하리까"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런 일을 괜찮다고 했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런 일을 범죄로 여기십니다. 요셉은 이처럼 여자의 교양과 하나님의 계명에 호소하면서 그 유혹을 이겨내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의 괴로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주인의 처는 날마다 그에게 동참하자고 졸랐습니다. 요셉은 노예였으므로 그 집을 떠나 그 여자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유혹은 최고에 이르게 됩니다. 한 번은 다른 노예는 집에 아무도 없고 요셉이 혼자 일을 보기 위해 집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여자는 요셉에게 동침하자고 다시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요셉의 옷도 잡았습니다. 이제 여자는 요셉의 거부를 눌러 이기려고 합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때도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그는 거부했고 여자와 싸울 수 없으므로 그 옷을 여자의 손에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이처럼 요셉은 아주 어려운 시험을 당하고도 그것을 이겼습니다. 그것은 요셉에 대한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특별한 축복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또 하나님은 구속사에서 요셉을 사용하고자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요셉이 더 이상 심한 시험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요셉은 모든 시험 가운데 있었고 인간으로서 그가 거의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이 시험을 없애 주지는 않습니다. 신자는 항상 죄의 유혹을 느낄 것입니다. 오늘날 이것을 실제로 부인하는 삶들도 종종 있습니다. 그들은 보통신자는 죄의 유혹을 계속 느낄지 모르지만 완전한 사람은 죄의 유혹으로 부터 완전히 벗어난 사람임을 자처하는 사람도 항상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에게 범죄의 위험이 없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믿음의 생활이 쉬운 것처럼 아무런 문제없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계셔도 우리는 항상 유혹을 느끼게 됩니다.
약속대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그것은 우리의 생활이 쉬운 것임을 내포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지상생활은 어려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려운 분이시기에 때문이 아니라 우리 주위의 세상이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계셔도 시험을 받을 것이며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을 약속하셨지만 유혹없는 생활을 우리에게 약속하시는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두번째입니다.
이렇게 거부당한 보디발의 처는 이제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노예들은 그 여자가 요셉을 원했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또 지금 요셉의 옷이 그 여자의 손에 있는데 그 옷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무서움과 함께 그 여자에게는 요셉에 대한 증오심이 생겼습니다. 요셉은 그 여자의 소원을 거절했고 그 여자는 이제 상랑대신에 요셉을 미워하게 됩니다. 보디발의 처는 자기의 증오심을 충족시키시기 위해서 상황을 교묘히 이용했습니다. 그녀는 먼저 급간을 당한 것처럼 소리쳤습니다. 또 노예들이 급히 그 방에 들어갔을때 요셉이 자기와 동침하려 했다고 말합니다. 또 그여자는 요셉의 악행을 잘 꾸며 대었습니다. 요셉의 옷은 이제 여자의 손에 있지 않고 여자의 곁에 있습니다. 이 사실이 함축하는 것은 요셉이 그 옷을 동침하려고 할때 벗었다는 것입니다.
또 여자는 요셉의 성격도 비판합니다. 요셉을 히브리 사람이라고 부름으로서 말입니다. 여자는 요셉이 히브리 사람이므로 외국인으로서 그에게 그렇게 나쁜 것이 예상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악행은 다 요셉의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또 그 여자는 간접적으로 자기 남편에게도 책임을 묻습니다.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왔다." 이 나쁜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들어온 것은 보디발 자신의 행동이었습니다. 이처럼 여자는 요셉을 고발하여 남편의 근시안을 언급하므로 자기는 아무 잘못도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함께 계셨던 그런 사람인데 그것은 요셉이 거짓 고발을 당하지 않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또 요셉은 바르게 하나님의 율법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그는 세상의 눈에 행복한 사람이 아닌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하나님이 함께 계신 사람이 그대로 인정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보디발은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심히 노했습니다. 가기가 좋아하고 특히 후대했던 그 요셉이 부인을 강간하려고 하고 주인을 속이려고 든다면 요셉은 정말 심한 벌을 받아야 합니다. 요셉은 없어져야 합니다.
보디발은 바로의 시위대장이었으므로 국사범을 수용하는 감옥을 관장하고 있습니다. 보디발은 요셉을 그 감옥에 넣었습니다. 요셉은 살아 있기는 했으나 생활이 어려웠습니다. 요셉은 거부인 목자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먼저 노예가 되었는데 이미 그것이 고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보다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나쁜 것을 했기 때문이 아니고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생활은 그런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큰 축복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고생을 막아 주거나 행복한 생활을 제공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순종할때도 어려운 상황에도, 시험에 빠지지 않고 남에게 손해를 입히지 않는 경우에도 그 행동에 대해 칭찬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셔도 우리를 강적으로 부터 보호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그 사람도 거짓 고발과 불의한 벌을 다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자는 종종 많은 고생을 합니다. 또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이 이것을 바꾸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그 약속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축복이지만 행복한 삶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21절에 다시 그 표현이 나오는데 하나님은 어려움속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요셉과 함께 계신다고 말합니다.
그때 요셉은 감옥을 떠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로 요셉은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됩니다. 전옥은 요셉을 신뢰하게 됩니다. 요셉이 가진 조직력을 보고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겼습니다. 이제는 한집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감옥을 관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계속아여 미래의 임무를 준비시키십니다. 여기에 핵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미래의 임무를 준비하셨습니다.
요셉의 이후의 임무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애굽의 총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때 요셉은 애굽의 모든 곡식에 대한 모집 및 나눔을 관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 오랫동안 준비시키고 계십니다.
먼저 애굽에 가게 하시므로서 다음으로 요셉에게 보디발의 집에 관리를 맞게 하시므로 이제는 감옥의 관리들을 요셉에게 맡기시므로서 요셉이 미래의 임무를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시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의 결과는 먼저 보디발의 집에서, 감옥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기 위해 요셉이 꼭 감옥에 가야 하는 것은 아니죠. 하나님이 원하셨다면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도 바로 왕에게 꿈을 설명하는 자로 알려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 방식으로 당신의 계획을 성취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이 막히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요셉과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요셉으로 바로왕의 총리가 되게 하기 위해 또 자기 백성은 기근 가운데서 구원하기 위해 요셉과 함께 계신다는 말입니다. 요셉의 통치아래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살기 시작했고 그 백성은 수백년 동안 거기서 살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요셉의 사역을 통하여서 그리스도의 오심과 예수 그리스도가 이룩할 완전하신 구원을 향하여 일하십니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약속을 구속사 및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분리시켜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원전부터 결정하신 구원사역과 관련하여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그 약속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문제없이 행복한 생활을 누림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 약속은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구원사역에 사용하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요셉과 다른 위치에 있습니다. 우리는 요셉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고 요셉처럼 뛰어난 조직력을 가진 사람도 아니며 요셉처럼 노예가 되거나 감옥에 들어갈 가능성은 커지 않습니다. 요셉처럼 어떤 나라의 총리가 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그런 자리에서 일해야 했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그 위치에 놓으셨지만 하나님은 같은 구원사역에서 우리를 다른 위치에 놓으실 것이며 하나님은 그것을 위하여 우리와 함께 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 생활을 위한 중요한 결론이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게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당신의 구원사역에서 우리를 사용하시고 그때 우리는 구속사의 결과도 하나님과 함께 누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멘
(*고재수교수 ; 광주개혁신앙공동체에서 퍼온 글임)
설교의 문제는 항상 어떻게 그 당시와 오늘날을 서로 연결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과 같이 역사적 본문에 관해 설교 준비를 할때 우리는 두가지를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첫째는, 우리는 여기 묘사된 사람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며 둘째는, 우리 하나님은 그때 사역하신 하나님과 같은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묘사된 사람과 같지 않습니다. 우리도 요셉과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요셉이 사람이므로 우리는 요셉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셉의 고생도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요셉은 자유인의 아들이었으며 부자의 아들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형들의 미움때문에 외국에 팔려가게 되었고 지금은 노예가 되어 보디발의 집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또 요셉은 주인의 처에게서 유혹을 당하고 있고 그 결과를 그의 상황은 보다 더 나빠졌습니다. 이 모든 사건의 결과로 그는 몇 년 동안 감옥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요셉의 당한 이 여러가지 문제를 당해야 한다고 함축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노예로 일해야 할 가능성은 적습니다. 우리가 성적 유혹을 당할 가능성이 늘 있지만 그때에도 요셉의 상황과는 다를 것입니다. 또 요셉은 이 일의 결과로 감옥에 갇혔지만 우리도 같은 이유로 그런 벌을 받을 것이라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사실 요셉은 하나님의 계획에서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후에 요셉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요셉은 애굽으로 가서 기근때에 이스라엘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요셉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에서 아주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에 반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그만큼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생명이 우리 손에 달려 있지는 않습니다. 정말 우리는 요셉과 다른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요셉의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과 같은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항상 같은 분이시며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런 이야기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본문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그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계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이 표현은 창세기 39장에 두 곳에 나오는데 한 번은 2절이며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또 한번은 2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 하나님은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을 약속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오늘의 본문에서 요셉과 함께 계신 그 하나님을 만나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볼 것은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계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지금 애굽에서 노예로서 보디발의 집에서 일하고 있지만 거기서도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계십니다. 그 결과 요셉은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주인은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계신 것을 보고 요셉으로 가정총무로 삼았습니다. 요셉이 집안의 모든 것을 관리하고 부터 집의 상황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계셨고 요셉이 행한 일에도 축복하셨습니다. 보디발은 온 집안이 잘 되어 가는 줄 알고 가정 사무를 모두 요셉에게 맡겼습니다. 그래서 이제 요셉은 더 이상 노예 중 하나가 아니라 노예 관리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주인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그 주인의 아내로부터도 관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여러 노예들 중 하나인 요셉은 그 여자의 눈에 잘 뜨이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노예 관리인이 된 요셉은 그의 눈에 잘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또 요셉은 미남이었으므로 그 여자는 그를 원했습니다.
어느날 그 여자는 부끄러움도 없이 요셉에게 동침을 요구했습니다. 그것은 요셉에게 어려운 유혹이었을 것입니다. 요셉이 그 여자에게서 어떤 매력을 느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매력이 없어도 주인의 처에게 굴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적어도 그런 높은 지위의 사람을 거부하는 것은 아주 어렵습니다. 또한 청년으로서 요셉은 성욕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함께 계신바 된 요셉도 유혹을 당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안에서 오늘 우리와도 함께 게실 것을 오늘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활이 유혹없는 생활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성적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때의 유혹은 요셉과 다른 상황에서 일어날 있을 것입니다. 요셉은 노예였고 따라서 거부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주인의 노예가 아니지만 쉽게 전통을 따르거나 사회의 관습을 따르는 약점을 지니지고 있습니다. 전통이 말하기를 남자는 결혼하기 전에 성 경험을 가져야 한다고 한다면 그 유혹을 거부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또 학교 친구들이나 군인들이 그들의 경험을 자랑할때 혼자서 그렇게 하지 않는 일도 역시 어렵습니다. 이와같이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가운데 어려운 유혹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요셉은 그 유혹을 받고 주인의 처에게 두가지를 대답합니다. 요셉은 그 여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을 이야기 합니다.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자신에게 맡겼는데 자기가 어떻게 이러한 죄를 범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여자도 그런 일이 큰 죄라는 것을 인정하여야만 했습니다. 또한 요셉은 하나님을 언급하면서 그 여자에게 "내가 어찌 하나님께 득죄하리까"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런 일을 괜찮다고 했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런 일을 범죄로 여기십니다. 요셉은 이처럼 여자의 교양과 하나님의 계명에 호소하면서 그 유혹을 이겨내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의 괴로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주인의 처는 날마다 그에게 동참하자고 졸랐습니다. 요셉은 노예였으므로 그 집을 떠나 그 여자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유혹은 최고에 이르게 됩니다. 한 번은 다른 노예는 집에 아무도 없고 요셉이 혼자 일을 보기 위해 집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여자는 요셉에게 동침하자고 다시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요셉의 옷도 잡았습니다. 이제 여자는 요셉의 거부를 눌러 이기려고 합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때도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그는 거부했고 여자와 싸울 수 없으므로 그 옷을 여자의 손에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이처럼 요셉은 아주 어려운 시험을 당하고도 그것을 이겼습니다. 그것은 요셉에 대한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특별한 축복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또 하나님은 구속사에서 요셉을 사용하고자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요셉이 더 이상 심한 시험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요셉은 모든 시험 가운데 있었고 인간으로서 그가 거의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이 시험을 없애 주지는 않습니다. 신자는 항상 죄의 유혹을 느낄 것입니다. 오늘날 이것을 실제로 부인하는 삶들도 종종 있습니다. 그들은 보통신자는 죄의 유혹을 계속 느낄지 모르지만 완전한 사람은 죄의 유혹으로 부터 완전히 벗어난 사람임을 자처하는 사람도 항상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에게 범죄의 위험이 없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믿음의 생활이 쉬운 것처럼 아무런 문제없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계셔도 우리는 항상 유혹을 느끼게 됩니다.
약속대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그것은 우리의 생활이 쉬운 것임을 내포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지상생활은 어려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려운 분이시기에 때문이 아니라 우리 주위의 세상이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계셔도 시험을 받을 것이며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을 약속하셨지만 유혹없는 생활을 우리에게 약속하시는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두번째입니다.
이렇게 거부당한 보디발의 처는 이제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노예들은 그 여자가 요셉을 원했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또 지금 요셉의 옷이 그 여자의 손에 있는데 그 옷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무서움과 함께 그 여자에게는 요셉에 대한 증오심이 생겼습니다. 요셉은 그 여자의 소원을 거절했고 그 여자는 이제 상랑대신에 요셉을 미워하게 됩니다. 보디발의 처는 자기의 증오심을 충족시키시기 위해서 상황을 교묘히 이용했습니다. 그녀는 먼저 급간을 당한 것처럼 소리쳤습니다. 또 노예들이 급히 그 방에 들어갔을때 요셉이 자기와 동침하려 했다고 말합니다. 또 그여자는 요셉의 악행을 잘 꾸며 대었습니다. 요셉의 옷은 이제 여자의 손에 있지 않고 여자의 곁에 있습니다. 이 사실이 함축하는 것은 요셉이 그 옷을 동침하려고 할때 벗었다는 것입니다.
또 여자는 요셉의 성격도 비판합니다. 요셉을 히브리 사람이라고 부름으로서 말입니다. 여자는 요셉이 히브리 사람이므로 외국인으로서 그에게 그렇게 나쁜 것이 예상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악행은 다 요셉의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또 그 여자는 간접적으로 자기 남편에게도 책임을 묻습니다.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왔다." 이 나쁜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들어온 것은 보디발 자신의 행동이었습니다. 이처럼 여자는 요셉을 고발하여 남편의 근시안을 언급하므로 자기는 아무 잘못도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함께 계셨던 그런 사람인데 그것은 요셉이 거짓 고발을 당하지 않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또 요셉은 바르게 하나님의 율법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그는 세상의 눈에 행복한 사람이 아닌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하나님이 함께 계신 사람이 그대로 인정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보디발은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심히 노했습니다. 가기가 좋아하고 특히 후대했던 그 요셉이 부인을 강간하려고 하고 주인을 속이려고 든다면 요셉은 정말 심한 벌을 받아야 합니다. 요셉은 없어져야 합니다.
보디발은 바로의 시위대장이었으므로 국사범을 수용하는 감옥을 관장하고 있습니다. 보디발은 요셉을 그 감옥에 넣었습니다. 요셉은 살아 있기는 했으나 생활이 어려웠습니다. 요셉은 거부인 목자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먼저 노예가 되었는데 이미 그것이 고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보다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나쁜 것을 했기 때문이 아니고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생활은 그런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큰 축복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고생을 막아 주거나 행복한 생활을 제공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순종할때도 어려운 상황에도, 시험에 빠지지 않고 남에게 손해를 입히지 않는 경우에도 그 행동에 대해 칭찬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셔도 우리를 강적으로 부터 보호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그 사람도 거짓 고발과 불의한 벌을 다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자는 종종 많은 고생을 합니다. 또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이 이것을 바꾸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그 약속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축복이지만 행복한 삶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21절에 다시 그 표현이 나오는데 하나님은 어려움속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요셉과 함께 계신다고 말합니다.
그때 요셉은 감옥을 떠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로 요셉은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됩니다. 전옥은 요셉을 신뢰하게 됩니다. 요셉이 가진 조직력을 보고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겼습니다. 이제는 한집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감옥을 관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계속아여 미래의 임무를 준비시키십니다. 여기에 핵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미래의 임무를 준비하셨습니다.
요셉의 이후의 임무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애굽의 총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때 요셉은 애굽의 모든 곡식에 대한 모집 및 나눔을 관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 오랫동안 준비시키고 계십니다.
먼저 애굽에 가게 하시므로서 다음으로 요셉에게 보디발의 집에 관리를 맞게 하시므로 이제는 감옥의 관리들을 요셉에게 맡기시므로서 요셉이 미래의 임무를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시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의 결과는 먼저 보디발의 집에서, 감옥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기 위해 요셉이 꼭 감옥에 가야 하는 것은 아니죠. 하나님이 원하셨다면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도 바로 왕에게 꿈을 설명하는 자로 알려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 방식으로 당신의 계획을 성취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이 막히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요셉과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요셉으로 바로왕의 총리가 되게 하기 위해 또 자기 백성은 기근 가운데서 구원하기 위해 요셉과 함께 계신다는 말입니다. 요셉의 통치아래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살기 시작했고 그 백성은 수백년 동안 거기서 살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요셉의 사역을 통하여서 그리스도의 오심과 예수 그리스도가 이룩할 완전하신 구원을 향하여 일하십니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약속을 구속사 및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분리시켜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원전부터 결정하신 구원사역과 관련하여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그 약속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문제없이 행복한 생활을 누림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 약속은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구원사역에 사용하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요셉과 다른 위치에 있습니다. 우리는 요셉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고 요셉처럼 뛰어난 조직력을 가진 사람도 아니며 요셉처럼 노예가 되거나 감옥에 들어갈 가능성은 커지 않습니다. 요셉처럼 어떤 나라의 총리가 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그런 자리에서 일해야 했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그 위치에 놓으셨지만 하나님은 같은 구원사역에서 우리를 다른 위치에 놓으실 것이며 하나님은 그것을 위하여 우리와 함께 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 생활을 위한 중요한 결론이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게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당신의 구원사역에서 우리를 사용하시고 그때 우리는 구속사의 결과도 하나님과 함께 누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멘
(*고재수교수 ; 광주개혁신앙공동체에서 퍼온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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