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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기도의 실례들

작성자이천우|작성시간03.02.12|조회수306 목록 댓글 0
열왕기상 18장 16-29절 / 16오바댜가 가서 아합을 만나 고하매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려 하여 가다가 17엘리야를 볼 때에 저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네냐 18저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좇았음이라19그런즉 보내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 오십인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인을 갈멜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오게 하소서 20아합이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로 보내어 선지자들을 갈멜산으로 모으니라 21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22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 오십인이로다 23그런즉 두 송아지를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저희는 한 송아지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며 나도 한 송아 지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고 24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25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많으니 먼저 한 송아지를 택하여 잡고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나 불을 놓지 말라 26저희가 그 받는 송아지를 취하여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가로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으므로 저희가 그 쌓은 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27오정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저희를 조롱하여 가로되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간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28이에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더라 29이같이 하여 오정이 지났으나 저희가 오히려 진언을 하여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를지라도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고 아무 돌아보는 자도 없더라


야고보서 4장 1-3절 / 1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2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고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3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들어가는 말

오늘날 기도에 대한 것만큼 미신적으로 잘못 가르쳐지고 있는 경우도 없는 것 같습니다. '기도'를 생각하면, 항상 '응답'이 먼저 떠오르고, 이때 응답이라는 것도 지극히 물질적이거나 혹은 신병 치유와 같은 것에 집중됩니다. 이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기도에 대한 이해가 지극히 단편적인 데서 오는 현상이겠습니다. 사실 좀더 깊고 넓은 차원에서 성경의 기도관을 잘 살펴보게 되면, 기독교의 기도는 이교들의 기도관과 질적으로 전혀 다른 차원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이런 식의 기도와 응답은 지극히 미신적이며 우상 종교적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번 강의를 통하여 충분히 입증되겠지만, 기독교의 기도는 간구의 측면보다는 감사와 찬양에 더 킨 비중을 두고 있고, 심지어 올바른 기도관은 구원론적인 증거로까지 연결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응답' 차원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사실상 얼마나 미신적인 신앙인지 모릅니다. 물론 기독교의 기도에서도 응답의 요소, 더욱이 물질에 대한 응답의 요소가 아주 없지는 않지만, 그런 경우 항상 하나님의 나라의 선양이라고 하는 동기와 내용과 목적에 연결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기도를 이렇게 정직하게 가르치는 경우가 과연 얼마나 되는지! 오히려 기독교의 진리들 중에서 가장 왜곡되이 가르쳐지는 분야가 기도일 것입니다.

특별히 부흥회와 같은 곳에 가보면, 강사가 거의 광란에 가까울 정도로 청중들의 기도를 몰아가는 것을 봅니다. 이를 위해서 악기를 요란하게 연주하는가 하면, '주여! 주여! 하면서 손을 들고 부르짖게' 만듭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사람들은 이성을 잃게 되고, 심지어는 바닥에 뒹굴기까지 합니다. 인위적으로 기도회를 몰아가는 가운데 어느덧 집단 최면의 분위기가 형성되어 버립니다.

하지만 약간만 의식이 있는 성도라면 기독교 기도관이 과연 이런 것일까 하는 의구심을 지울 길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몇 개의 주제 강의를 통하여 오늘날 우리에게서 시급히 회복되어야 할 올바른 기독교의 기도 모습이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 배워보려고 합니다. 다른 부분들도 마찬가지이지만, 특별히 기도와 관련하여 대다수 한국 교회가 빠져 있는 미신적인 성향은 도무지 상식의 틈이 비집고 들어갈 여지조차 없을 정도로 철옹성과도 같이 느껴집니다.

시작하기에 앞서 한 마디 더 하고 싶은 것은, 잘못된 신앙의 요소들을 바로 잡는 강의를 할 때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떼거리로 뭉쳐 있는 몰상식'을 상대로 '진리를 전개한다'는 것은, 마치 거대한 암벽을 작은 주먹으로 부숴보려고 시도하는 것과도 같다는 느낌을 항상 갖게 되어, 무겁고 아픈 마음을 갖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의 기독교 안에, 과거 종교 개혁자들이 로마 교회를 바라보았을 때 그렇게 느낄 수 밖에 없었던 것처럼,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몰상식들이 널려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시해도 거들떠 보지 않는 몰상식들이 도리어 상식으로 통용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상식으로 바로잡는 과정이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더욱이 과거 불행한 역사 속에서 많은 상처의 흔적을 갖고 있는 한국 국민들은 '힘의 논리' 앞에 아주 민감하여 상식과 몰상식을 구분하지 않고 무조건 힘이 센 쪽에 가담하는 성향이 짙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이런 작업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닙니다. 다수면 무조건 진리인줄 알고 쉽게 받아들여버리는 한국 국민들의 성향은, 이제 신앙의 영역에서도 거침 없이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 없이 복음의 본질을 흐려 놓는 죄의 권세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데로까지 발전해버렸습니다. "사람이 다수를 따르는 것은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힘이 더 세기 때문이다"라고 한 베이컨이 말처럼, 진리를 좇아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진리를 외면한 채, 단지 다수라는 이유 때문에 정신 없이 좇아가고 있는 것이 이 시대의 교회의 모습입니다.

현대 교회들, 특별히 8-90년대에 이상하게도(?) 급성장해버린 대형 교회들의 상식 없는 신앙 행위들은, 비록 표면상으로는 성경에 근거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내세웠지만, 실상 좀더 깊고 폭 넓은 성경 사상으로 비추어 보면, 대게의 경우 인본주의의 산물임을 부정할 수 없는 숱한 증거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원인을 만들어 낸 당사자로서의 대형 교회들만이 떨어져버린 불행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기에 문제는 더 심각합니다. 대부분의 부흥사들과 대형 교회들, 그리고 소위 유명하다고 이름난 목사들이 스스로 영웅(?)처럼 행세했던 몰상식한 신앙은, 상당수 성도들에게 선망의 대상 노릇을 하여 그들의 신앙의 질이 계속 바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풍토를 조성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렇게 바닥으로 떨어져 버린 탈선적인 신앙의 모습들에 대해서 시간을 쏟는다는 것은 필자로서는 시간 낭비입니다. 하지만 이 잘못된 신앙의 모습들이 무서운 기성을 부리면서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으므로 마냥 외면한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 생각해서 필을 듭니다.


사례 1 / 조용기 목사의 경우

먼저 기도를 잘못 가르치고 있는 한 실례, 그것도 한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정적인 측면에서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조용기 목사의 경우를 통하여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아래에 세계 37개 언어로 번역하여 5백만 크리스찬들의 삶을 변화시킨 책이라는 대대적인 허위 광고 하에 팔고 있는 조용기 목사의 '4차원의 영적 세계'란 책에서 인용한 글입니다. 이 책은 영어로도 출판하여 해외 조직망을 통하여 영어권 국가들에게까지 공급하고 있는데,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 너무도 비성경적이기 때문에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여기에 현혹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해당 내용 전문을 소개합니다. 이 부분은 기도가 얼마나 미신적이며 비성경적으로 행해지는가에 대한 전형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믿음을 사용하려면, 먼저 '분명한 믿음의 대상'을 마음 속에 그릴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바라는 것들(분명한 것들)의 실상'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에는 우리가 바라는 분명하지 않고 막연한 생각만 가지고 있으면, 그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원하는 것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분명하고 명확한 믿음의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나는 이 교훈을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배웠습니다.
내가 목회한 지 몇 달밖에 안 되는 아주 궁색한 때였습니다. 그 때는 결혼하기 전이었으므로 조그만 방에서 나 혼자 살았습니다. 방 안에는 책상은 물론 의자와 침대도 없어서 마룻바닥에서 그냥 먹고 자며 공부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도 영적으로는 승리감에 충만하여 매일 몇 십리씩을 걸어다니면서 열심히 전도하고 심방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의 약속하신 구절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 말씀은 내가 예수 안에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응답을 받는다는 말씀이었습니다(요 14:14). 또한 내가 하나님의 당당한 아들이며, 만왕의 왕, 만 주의 주 되신 '하나님의 자녀'(요 1:12)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었습니다. 나는 성경의 약속을 믿으면 내게 필요한 것을 주님께 요청할 수 있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저를 만왕의 왕, 만주의 주 되신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셨는데, 어째서 제게는 책상도 없고, 의자도 없고, 침대도 없습니까? 더구나 자전거 하나 없이 매일 몇 십리씩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 다녀야 합니까? 적어도 조그만 책상이나 앉을 만한 의자, 심방 할 때 타고 다닐 자전거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에게 책상과 의자와 자전거를 주십시오.'
나는 믿음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하나님께 기도한 물건들이 속히 내게 도착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응답도 없이 한 달이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두 달, 석 달, 넉 달, 다섯 달, 무려 여섯 달이 지나갔으나 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응답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비오는 날, 나는 정말 낙심되어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에는 아무 것도 먹지 못해 배도 고프고 너무나 지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께 하염없이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저는 여러 달 전부터 책상과 의자와 자전거를 놓고 기도했는데, 아직 하나도 응답 받지 못했습니다. 제가 이 가난한 동네에서 복음을 전하느라 얼마나 고생하는지 주님은 다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저 자신도 체험하지 못한 믿음이나 기도 응답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설교할 수 있겠습니까? 저도 이렇게 끼니도 해결하지 못하고 굶어 죽을 지경인데 저들에게 어떻게 인생이 빵만으로 살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 저는 지금 너무나 낙심되어서 아무 의욕도 없습니다. 저의 이번 기도가 왜 응답되지 않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며 시간이 지나면 다 응답된다는 것을 믿습니다. 하지만 제가 오래 전에 드린 기도가 언제, 어떻게 응답되는지를 지금 당장 분명히 확신 할 수 없으니 정말 답답합니다. 만일 제가 죽고 난 다음에 응답하시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왕 응답하시려면 지금 저의 형편을 보시고 제발 좀 빨리 응답해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를 하는데 눈물이 펑펑 쏟아졌습니다. 한참 울며 신세타령 반, 기도 반, 쏟아놓고 나니 마음이 아주 평안해지고 안정되었습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 평안이 넘쳐나기 시작했으며, 성령의 음성이 마음속에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나의 영혼의 깊은 곳에 말씀하시기 때문에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조용히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러자 조용하고 세미한 음성으로 성령께서 나의 영혼을 진동시키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들아, 나는 오래 전에 너의 기도를 들었다.'
그 말씀을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불쑥 말했습니다.
'그러면 제 책상과 의자, 자전거는 다 어디 있습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비롯한 내 자녀들이 온갖 부탁과 요구를 하지만 그들은 내가 응답하기에 합당치 않은 막연한 말로 달라고만 하는구나. 너도 마찬가지이다. 너는 책상과 의자와 자전거의 종류가 수십 종이나 되는 것을 모르느냐? 네가 언제 내게 책상과 의자와 자전거에 대한 분명한 종류나 내용을 구체적으로 말한 적이 있느냐? 단지 막연하게 달라고만 하지 않았느냐?'
나는 이 말씀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성령께서 책망하신 이 말씀은 나의 일생 일대에 놀라운 전환점을 가져왔습니다. 이런 것은 신학교에 다닐 때, 누구에게서도 배운 적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큰 실수를 했지만, 이것을 깨닫게 된 것은 엄청난 복이었습니다.
'주여, 당신은 진정 분명한 말로 구체적으로 기도하기를 원하십니까?'
이때 성령께서 나에게 히브리서 11장을 펴 보라고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1:1에는 서두부터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다시 무릎을 꿇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죄송합니다. 제가 큰 실수를 범했습니다. 기도를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그때부터 나의 기도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번에는 책상을 놓고 기도할 때 종류를 분명히 했습니다. 책상 종류는 내가 좋아하는 필리핀제 호마이카 책상이라야 하며, 크기는 어느 정도라고 상세히 말씀드렸습니다. 의자는 철로 테를 두른 것으로, 아래에 작은 바퀴가 달린 가장 좋은 것이라야 책상 주위를 밀고 다닐 수 있어 사용하기에 편리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자전거를 놓고 기도할 때에는 정말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제, 일본제, 대만제, 독일제 등등, 자전거의 종류가 너무 많아서 망설였습니다. 그런데 나는 아주 튼튼한 자전거가 필요했기에 그 당시 자전거의 품질 중 최고인 미국제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아버지, 저는 기어가 있어서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튼튼한 미국제 자전거를 갖고 싶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가 드린 기도대로 착오 없이 응답하시도록 분명한 말들로 항목들을 요청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는데 믿음이 뱃속에서부터 솟아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나는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떨렸습니다. 그날 밤, 나는 엄마 품에 안긴 아기처럼 깊이 잠을 잤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새벽 기도를 인도하기 위해 4시 30분에 일어났을 때에는 갑자기 가슴이 텅 빈 것 같았습니다. 그 전날 저녁에는 온 세상이 다 내 것 같은 믿음이 있었는데, 자고 나니 믿음은 날개를 치고 날아가 버려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나의 마음 속에 믿음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 이것은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아버지께서 응답을 주실 때까지 믿음을 간직한다는 것과는 정말 별개의 문제군요.'
이러한 일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다반사로 겪는 문제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어떤 집회에서 아주 은혜로운 강사의 설교를 들을 때에는 믿음이 강해져서 무엇이든지 다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집회가 끝나고 나면 미처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 믿음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과 같습니다. 그 날 새벽, 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적절한 성경 구절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의 눈길이 로마서 4:17에서 멈추었습니다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나는 이 말씀에 사로잡혔고, 이 말씀은 내 가슴 속에서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 나도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를 수 있다. 벌써 그렇게 한 것이다.' 하고 나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어떻게 믿음을 간직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 해답을 이 성경 구절에서 얻은 것입니다. 할렐루야! 나는 성도들이 이미 하나 둘씩 모여 기도하고 있는 천막교회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찬송을 몇 장 부른 후에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나는 로마서 4장 17절 말씀을 본문으로 하여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필리핀제 호마이카로 만든 아주 좋은 책상과 끝에 작은 바퀴가 달리고 쇠로 테를 두른 아름다운 의자와 또 기어가 달린 미제자전거를 제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저는 이런 것들을 다 받았습니다.'
성도들은 모두 다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성도들이 나의 형편이 어떤지를 다 잘 알고 있는데 너무 엄청난 말을 하니까 놀란 것입니다. 내가 계속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들을 자랑하자, 우리 성도들은 혹시 뭐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고 귀를 의심하는 듯했습니다. 나는 성경에 말씀하신 대로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믿음으로 말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나오는데 세 명의 청년들이 호기심이 가득 찬 얼굴로 따라 나왔습니다.
'전도사님, 전도사님께서 자랑하신 물건들을 보고 싶습니다. 좀 보여 주세요.'
나는 무척 당황했습니다. 나는 믿음의 고백을 했을 뿐,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 천막교회는 빈민촌에 있었기 때문에 내가 새벽 예배 때 한 이야기가 성도들에게 굉장한 간증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 성도들이 그 말이 사실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면 그로써 끝장입니다. 누가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들으려고 다시 교회에 오겠습니까? 나는 진퇴양난에 빠져 속으로 잠시 묵도했습니다.
'주여, 처음부터 이번 일은 제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말한 것은 순전히 당신 탓입니다. 저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단지 순종하여 이미 응답 받은 것처럼 말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곤란한 문제가 생겼으니 어떻게 설명해야 됩니까? 항상 도와 주셨으니 문제가 생겼으니 어떻게 설명해야 됩니까? 항상 도와 주셨으니 제발 지금도 좀 도와주십시오.'
그러자 성령께서 지혜로운 한 생각을 떠오르게 하셨습니다.
'아, 그래요? 모두 내 방으로 가 봅시다.'
그들은 방에 들어서면서 자전거랑 의자랑 책상을 찾느라 두리번거렸습니다.
'뭐 그렇게 둘러볼 것 없어요. 제가 나중에 보여 드리지요.'
나는 박 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습니다(그는 지금 한국에서 목사로 훌륭하게 시무하고 있습니다).
'내가 몇 가지 질문을 하겠소. 만일 박 군이 내 질문에 대답하면 여러분에게 그 물건들을 보여 주리다. 박 군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얼마 동안 어머니 뱃속에 있었소?'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습니다.
'음, 아홉 달이요.'
그러면 아흡 달 동안 어머니 뱃속에서 뭘 하고 있었을까요?"
'그야 자라고 있었겠지요.'
'그러나 아무도 당신을 보지 못 했잖소?'
'어머니 뱃속에 있었기 때문에 볼 수 없었던 거지요.'
'맞아요. 다른 사람들 눈에는 안 보여도 여러분들은 세상에 태어나기 전까지 분명히 어머니 뱃속에 있었어요. 저도 어제 저녁 이방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제 마음속에 아까 말한 책상과 의자와 자전거를 하나하나 그려가며 기도했어요. 그것들은 지금 눈에는 안 보여도 믿음으로 여기 내 마음속에 자라고 있어요. 이제 때가 되면 사람들이 보게 될 바로 그 책상과 의자와 자전거가 내 속에 들어 있어요.'
이렇게 말을 하자. 그들은 배를 잡고 뒹굴며 웃었습니다.
'아무리 그렇지만 책상과 의자와 자전거를 임신한 남자는 처음 본다구요'
그들은 방에서 뛰쳐나가자마자, 온 마을에 '남자 전도사가 의자, 책상, 자전거를 임신했다.'고 하더라는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나는 이 일 때문에 동네 아주머니들이 나를 보면 모여서 비웃을까봐 밖에 나다니기가 어려웠습니다. 개구쟁이 꼬마들은 주일이면 내게 와서 배를 만지며 놀려댔습니다.
'전도사님, 어디 좀 봐요. 얼마나 더 커졌는지요.'
나는 온 동네에 웃음거리였지만 그런 와중에도 지극히 담대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한 물건들이 믿음으로 내 속에서 자라고 있는 것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머니가 아이를 잉태해서 낳는데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여러분이 간절히 원하여 기도한 것이 응답되어 실제로 이루어지는 데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나는 이 원리를 되새기며 계속 기도한 물건들을 주실 주님께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미 받은 줄로 믿고 감사하고 입술로 줄기차게 시인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이 때가 되자. 내가 기도한 대로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응답하셨습니다. 기도한 내용과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바로 내가 원한 것을 모두 가질 수 있도록 어떤 사람을 통해 연락이 왔습니다. 가서 보니, 책상은 호마이카로 만든 것이었고, 의자는 일본 미쯔비시에서 만든 것으로 바퀴가 달려서 앉은 채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전거는 미국 선교사의 아들이 좀 쓰던 것이긴 했지만 기어가 달려 있는 튼튼한 것이었습니다.
이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아주 놀라운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때까지 나는 매우 막연한 말로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 교훈을 깨달은 이후로는 지금까지 한번도 막연한 말로 기도를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막연한 기도에 응답하시면, 여러분은 그것이 진정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것인지 아닌지를 잘 모를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도할 때, 분명하고 특별하게 요청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성경은 믿음으로 구체적인 기도를 해야 그대로 응답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 마가복음 10장에 기록된 사건입니다. 어느 날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큰소리로 주님을 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많은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그를 꾸짖었으나 그는 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보시고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즉각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바디매오에게 직접 물어 보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예수님께서는 그의 분명한 뜻을 듣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바디매오는 그 즉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디매오가 눈을 치료해 달라고 특별히 간청하기 전에는 치료의 말씀을 선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가 자신의 분명한 소원을 믿음으로 말했을 때, 바로 그때 주님께서는 그대로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하나님께 기도할 때, 막연히 중언부언하지 말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특정한 대상과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한번은 어떤 교회에서 말씀을 전해 달라고 나를 초청했습니다. 그 교회에 도착하자 그 교회 목사님의 부인이 나를 집무실로 안내했습니다. 목사님은 이런 저런 얘기를 하시던 중, 나에게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한 여 성도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기도할까요?'
'예, 그 자매님은 결혼해야 하는데 아직 남편감을 찾지 못했답니다.'
'그래요? 그러면 이리 들어오라고 하세요.'
그 때 갓 서른이 넘어 보이는 아름다운 자매님이 들어왔습니다. 나는 그 자매님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자매님, 남편감을 위해 얼마 동안 기도했나요?'
'십 년 이상 기도했습니다.'
'왜 십 년 이상이나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셨을까요? 자매님은 어떤 남편을 주십사고 하나님께 기도했나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담담하게 대답했습니다.
'예, 그건 하나님께 달려 있겠죠. 하나님께서는 제 소원을 다 알고 계실 테니까요.'
'자매님, 바로 그것이 자매님의 실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하실 수 있지만, 자매님의 기도를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 전능하신 분이지만, 자매님이 하는 기도에 응답하시기를 기뻐하는 분이기도 하십니다. 자매님은 정말 제가 기도하여 주기를 원합니까?'
'예.'
'좋습니다. 횐 종이와 연필을 좀 가지고 오십시오. 그리고 제 앞에 앉으십시오.'
그 자매님은 내 앞에 가까이 와 앉았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묻는 말에 대한 자매님의 솔직한 대답을 쓰시면 제가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첫째, 이제 당신은 진심으로 결혼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어떤 남편감을 원합니까? 한국인 또는 외국인입니까?'
'한국인입니다.'
'좋습니다. 그렇게 쓰십시오. 둘째, 당신 남편감의 키는 어느 정도라야 합니까? 1미터 80센티미터 정도였으면 합니까? 아니면 1미터 60센티미터 정도를 원합니까?'
'예, 저는 키가 큰 남편을 원합니다.'
'그렇게 쓰십시오. 셋째, 호리호리하고 잘생긴 사람을 원합니까? 아니면, 호감이 갈 정도의 체구가 좋은 사람을 원합니까?'
'호리호리한 사람이면 합니다.'
'그렇게 쓰세요. 넷째, 그 사람의 취미가 어떤 것이기를 원합니까?'
'저‥, 음악이요.'
'좋아요. 음악이라고 쓰세요. 다섯째, 직업은 어때요?'
'교사.'
'좋습니다. 교사라고 쓰세요.'
나는 그 자매에게 이런 식으로 열 가지를 쓰게 한 다음 말했습니다.
'자매님, 지금 적은 내용을 크게 한 번 읽어 주시겠어요?'
그 자매님은 첫째 항목부터 열 번째 항목까지 아주 큰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습니다.
'자, 눈을 감아 보세요. 이제 자매님의 남편감이 분명하게 보입니까?'
'예, 아주 똑똑하게 보입니다.'
'좋아요. 이제 그 사람을 그리며 하나님께 기도하세요. 자매님의 상상 속에, 장차 자매님의 남편 모습이 분명히 보이지 않으면 하나님께 분명하게 부탁할 수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결코 응답하실 수 없습니다. 자매님이 기도하기 전에 자매님이 원하는 남편감의 모습을 분명히 그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막연한 기도에는 결코 응답하시지 않으십니다.'
그 자매님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고 나는 손을 얹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자매님은 자신이 어떤 남편을 원하는지 이제 분명히 압니다. 저도 이 자매님의 남편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하나님께서도 이 자매님의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다 아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 이 자매님에게 남편을 허락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자매님, 이 글을 집으로 가져가셔서 거울에다 붙이세요. 매일저녁, 이 열 가지를 자기 전에 큰 소리로 읽으시고, 매일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크게 읽으세요. 그리고 응답해 주심을 믿고 하나님을 찬송하십시오.'
그때로부터 일 년이 지났습니다. 그 지역에 일이 있어 다시 들렀을 때, 이전의 목사님 부인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저희 집에 오셔서 점심이라도 같이 드시지 않겠어요?'
'네, 그렇게 하지요.'
내가 거기 도착하자마자 사모님이 아주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목사님, 그 자매가 결혼했어요! 그 자매가 결혼했다니까요!'
'누가 결혼했다구요?'
'아, 지난번에 오셨을 때 목사님께서 기도해 주셨던 그 자매 기억 안 나세요? 목사님이 남편감에 대해 열 가지를 써 붙이라고 했던 자매 있잖아요. 그 자매가 결혼했다니까요?'
'바로 그 해 여름이었어요. 저희 교회에 한 고등학교 음악 교사가 4중창 단원들을 이끌고 와서 찬양 집회를 하려고 일 주일간 머물렀지요. 그 교사는 아주 키가 호리호리한 독신이었는데, 처녀들이 모두 그를 보고 반하여 서로 데이트하려고 야단이었어요. 그런데 참 이상하게 이 음악 교사는 우리 교회의 젊은 아가씨들은 본체 만체했는데 유독 서른 살 먹은 그 노처녀에게 반해 버렸답니다. 그는 항상 그 자매 주위를 맴돌더니 드디어 우리 교회를 떠나기 전에 청혼을 했답니다. 마침내 그녀는 승낙했지요. 그래서 두 사람은 우리 교회에서 복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결혼식 날,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가 거울에 써 붙여 놓고 기도하던 열 가지 항목이 적힌 종이를 사람들 앞에 가져와서 공개적으로 크게 읽고 나서는 하나님이 응답하셨기에 더 이상 그 종이가 필요 없다고 찢어 버렸답니다.'
꼭 소설 같은 이야기지만 이 일은 사실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하는 기도에는 실제로 이런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 한 가지를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보통의 경우에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여러분 안에 거하시고 계시나, 여러분의 삶과 관련된 것을 여러분의 뜻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행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생각과, 믿음과, 명확하고 구체적인 간구를 듣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응답받기 원하면 언제나 분명한 대상과 목표를 정하시기 바랍니다.
'오, 하나님 제게 복 주소서! 복 주소서!' 라고 막연하게 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성경에 얼마나 많은 복이 기록되어 있는지 아십니까? 무려 8천 가지가 넘는 복된 약속이 들어 있습니다.
'오, 하나님 복 주소서.' 하고 여러분이 말하면 하나님 물으실 것입니다.
'8천 가지가 넘는 것 중에 무엇을 원하느냐?'
하나님께서 비록 여러분의 마음을 다 알고 계실지라도, 성경은 여러분이 간구해야 한다고 기록합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너회에게 열릴 것이니라'(마 7:7).
이 말씀은 여러분이 구하는 것을 '구체화'시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매우 구체적으로 분명하게 구해야 합니다. 먼저 기도하기 전에 공책을 꺼내서 기도 제목과 내용을 쓰고 분명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십시오. 나는 항상 교회 성장에 대해 하나님께 분명한 숫자를 제시하며 기도합니다. 나는 1960년부터 교회 부흥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매년 저에게 천 명씩 성도를 더 보내 주십시오.'
그때부터 1969년까지 매년 천 명씩의 성도들이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1969년을 보내면서 마음의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 년에 천 명씩 보내 주실 수 있는데 한 달에 천 명씩을 못 주시랴.' 그래서 1970년부터 나는 이렇게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올해부터는 한 달에 천 명씩을 보내 주십시오.'
첫 달에는 6백 명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러나 다음 달부터 하나님께서 매 달 천명 이상씩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1년이 지나자 우리 교회는, 한해 1만 2천 명 이상의 성도가 불어났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해에는 목표를 올렸는데, 그 해는 1만 5천 명이 더 불어났습니다. 이에 용기를 얻어 그 이듬해에 나는 쉽게 한 해 성장 목표로 2만 명을 놓고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 기도 드릴 때, 분명한 요구를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기도하면 그것을 가질 수 있다는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의도에 있는 현재의 우리 교회 건축이 시작되어 미처 콘크리트를 붓기도 전에 나는 우리 교회 본당의 좌석이 1만 석이라는 것을 환상 속에 분명히 그려보았습니다. 그 모습을 수백 번씩 마음 속에 그려보았고 거기에 성령께서 장엄하게 임재하여 계시는 것을 느껴보곤 했습니다. 나는 우리 교회의 크기를 가슴으로 느끼면서 감격에 떨었습니다. 여러분은 기도하실 때, 이런 심정을 느낄 수 있도록 여러분의 기도 대상과 목표를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그려보아야 합니다. 이 믿음의 법칙이 확고해지도록 지속적으로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나는 언제나 기도할 때 기도 대상을 명확하게 그려보려고 애씁니다. 가슴이 떨릴 정도로 생생하게 대상을 그려봅니다. 그럴 때 능력 있는 믿음의 첫 번째 조건이 갖추어지는 것입니다."

이상 조용기 목사의 저서 '4차원의 영적 세계'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해 보았습니다. 정말 어이없다는 느낌 밖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가진 기도관이 이런 차원인 것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기도를 이렇게 가르치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하여 사단의 미혹인 밖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더욱이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어떤 생각을 하거나 어떤 말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든 응답하실 수밖에 없다고 가르치는 이런 비논리적인 사상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제시한 성경 말씀들도 도무지 부정확하고 아전인수격의 자기 해석에 기초한 것입니다.


비평

이 글에서는 비 성경적이며 다분히 미신적인 부분들이 참으로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일일이 열거하여 평가하기에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이므로, 몇 가지만 대표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저자는 '자기 자신의 마음에 떠오르는 주관적인 자기 감정'을 가리켜 함부로 '하나님의 음성 혹은 성령의 음성'이라고 아주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표현이 여러 곳에서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런 표현을 쓰는 것은 참으로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요즈음 보면 하나님에 대한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생각을 하게 된 사실을 가지고 성령의 음성이니 하나님의 음성이니 하는 말들을 너무 자연스럽게 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모습은 신비주의자들은 물론이고, QT와 같은데 익숙한 사람들에게서 잘 나타납니다. 특별히 QT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다'고 하는 상당히 모호한 말을 자주 씁니다. 자신이 가진 하나님께 대한 감정과 느낌을 성령의 음성 운운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성경으로만 말씀하신다고 하는 개혁파 교회의 신앙과 근본적으로 대치됩니다.

개혁파 교회의 신앙고백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장 1절을 보면, "… 따라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당신의 뜻을 직접 계시해 주시던 과거의 방식들은 이제는 그쳐졌다"고 했습니다. 이런 까닭에 어떤 경우에도, 그가 제아무리 신비한 경험을 하였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음성 혹은 성령의 음성'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절대적으로 금할 일입니다. 종교 개혁기 이후에, 성경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일부 사람들에 의해서 경건주의가 나타나고 다시 이들로부터 신비주의가 나타나서 '성령의 음성' 운운함으로 교회를 혼란에 빠트린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느끼고 이해한 주관적인 종교적 감정과 깨달음은,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과 같은 권위로 취급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성도 개개인의 내적 심정에다 말씀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조용기 목사는 이런 표현을 아주 자연스럽게 쓰고 있습니다.

둘째, 저자는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고 한 성경 말씀을 자기 방식대로 해석하면서 이후의 이야기를 전개해 나갔습니다. 성경을 잘못 해석해 놓고는, 그 위에 계속해서 이야기를 쌓아나가는 이런 잘못은 의외로 많은 설교자들에게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제대로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이 스스로 발생시키는 적극적인 사고방식 내지는 상상력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바라보고 믿으면 그것을 얻게 된다는 의미로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이런 표현을 쓴 것이 아닙니다. 본 절은 히브리서 10:39에서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라고 했을 때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의 의미를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려는 의도로 등장했습니다. 즉 '믿음은 인내하는 것'이라고 한 10장 39절과 이어서 보아야 하는데, 그러면 히브리서 기자는 어떤 의미로 지금 믿음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까?

이곳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무언가 약속하신 것을 확신하는 성도가 종국에 얻게 될 실체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실체'라는 의미와 동일합니다. 현재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그러나 확실히 존재한다는 의미에서의 실상이요 혹은 실체입니다. 여기서 '존재한다'는 말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의 확실한 성취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믿음'이라는 말은 통상 '하나님의 약속의 내용'을 가리키는 동시에 '그것을 향한 신뢰'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지금 이 믿음은,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확신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는 복음의 내용들, 곧 '지체하지 않고 금방 오시겠다'고 하신 주님의 재림에 대한 확신입니다(10:37). 그래서 이 믿음은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이라 했고(39절). 이는 많은 선진들이 자신들의 믿음을 지키고 인내함으로 연단 받는 가운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소유하였던 바로 그것입니다(11:2). 이렇게 히브리서 11장 1장이 말하고 있는 믿음, 실상, 증거 등의 단어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신 구원을 가리키는 것이요, 그것의 궁극적인 완성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사람이 스스로 생각한 어떤 것'을 '확신하고 바라보면 반드시 성취되고야 만다'고 하는 차원에서 히브리서 11장 1절을 해석하는 것은 아주 잘못되었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런 까닭에 성경은 항상 믿음을 정의할 때, 사람이 주관적으로 스스로 불러일으킨 상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주신 믿음(고전 12:9),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믿음(엡 2:8),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나는 믿음(롬 10:17) 등등으로서 정의합니다.

셋째, 저자는 로마서 4장 17절 말씀, 곧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고 한 부분을 또 그릇 되이 해석하였고, 그릇 되게 잘못 해석한 기초 위에 계속해서 잘못된 적용을 해나갔습니다. 지금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이렇게 믿었다고 했을 때, 이는 처음부터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고 계셨던 약속의 말씀을 믿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지금 왜 아브라함의 경우를 제시하고 있는가 하면, 로마서 4장에서 계속 말하고 있는 '이신칭의'에 대한 이론을 보충하여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7절 말씀을 이어서 18절에서 계속하기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고 했고, 이에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신칭의'의 근거 혹은 수단(?)이 되었다고 한 것입니다(22절). 그러면서 이렇게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우리들 역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을 때,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신 속죄 사역을 믿는 방식으로서 이신칭의에 이르게 된다고 선포하려는 것이 바울의 의도입니다(롬 4:23-25). .

그러므로 이 구절에 근거하여, 성도 개개인이 주관적으로 바라보고 간구하는 것을 반드시 들어주시는 하나님으로 제시하는 데 사용한다는 것은 아주 잘못된 성경 해석이요 적용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전능자이십니다. 무에서 유를 내신 분이요, 말씀으로서 세상을 내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심에 틀림없지만, 인간이 자신의 욕구를 채워보려는 수단으로 삼아, 기도의 형식을 빌어 그 앞에서 온갖 말로 인정하고 아첨한다고 해서, 당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그들의 욕구를 채워주시는 그런 분은 결코 아니십니다. 사람이 아무리 조르고 또 조른다 할지라도, 당신의 뜻과 상관 없는 경우 결코 듣지 아니하시는 것도 하나님이 가지신 능력 중의 또 하나의 능력입니다.

넷째, 저자는 "하나님은 막연한 기도에는 결코 응답하지 않습니다"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기도하는 모습이 어떠해야 하겠는가를 하나의 실례를 들어 제시했습니다. 곧 어떤 처녀가 남편을 구할 때에 구체적인 기도를 드렸기 때문에 시집을 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실 이런 말은 얼른 듣기에 매우 그럴 듯해 보이는 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런 의문을 한번 가져봅니다. 만일 두 사람이, 어떤 똑같은 내용을 위하여 기도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또는 10가지가 아니라, 더 나아가서 100가지를 열거하면서 더더욱 구체적으로 기도하면 더 확실하게 응답된다는 말도 되겠습니다. 이런 허무맹랑한 주장에 대해서 일일이 논증한다는 것은 시간만 낭비할 뿐입니다.

정리해 본다면, 기도하는 사람이 스스로 자아내고 발휘하는 것으로서의 개인적으로 기도를 짜내는 능력은, 성경이 가르치는 기도의 정의와는 거리가 멉니다.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인간의 모든 병을 고치시는 만능의사로, 인간의 모든 필요와 요구를 만족시켜 주셔야만 하는 도깨비 방망이처럼 생각하는 사고로부터 나오는 기도들이란, 죄인의 기도인 밖에 그 이상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의인의 기도를 가르칩니다. 의인의 기도란 무엇인가 하면, 범사에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고 싶어서 안달인 사람, 그 일에 몰두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정의할 때에,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7-8)고 했습니다. 성령은 성도의 기도가 이렇게 되도록 도우시는 원천이십니다.
조용기 목사가 가르치고 있는, 이런 식의 기도는 전적으로 미신이라고 밖에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왜 이런 미신에 사로잡히는가 할 때, 구하는 것을 받는 수단 차원에서 기도를 생각하는 전형적인 미신적 사고방식을 그대로 성경의 세계로 끌어들여 적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령 예수님께서 장님 바디메오의 눈을 뜨게 해주신 사건도 순전히 '기도와 응답'의 차원에서 기계적으로 끌어 붙여서 해석하고 적용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무리한 해석들은 도처의 기도만능주의 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됩니다. 이 부분에 대한 비평은 이런 정도로 하고, 이제 다음에 제시한 또 하나의 예를 통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잘못된 기도의 모습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사례 2 / 기도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의 또 다른 경우

아래 내용은 기도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의 또 다른 실례입니다. 국민일보 오늘의 말씀에 실린 것으로 이 가르침 역시 전형적인 기도만능주의의 미신 세계가 어떠한가를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을 행복하게―석걖] 기도를 드리자(국민일보 2002년 8월 31일)

어린아이가 모태에서 나와 탯줄을 끊고 정상적으로 자라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호흡을 해야 하고 엄마의 젖을 먹어야 하며 운동을 해야 합니다.

영적 성장도 그렇습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영적 호흡인 기도를 해야 하고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또 영적 운동인 봉사를 해야 합니다. 이중 특별히 기도는 성도들의 영적 생명을 이어가는 생명선임과 동시에 우리 성도들이 이 땅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응답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도 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강력한 기도의 능력입니다. 기도를 통해 회개하고, 기도를 통해 성령을 받고, 기도를 통해 능력을 받고, 기도를 통해 기적을 체험하고 기도를 통해 건강을 회복합니다.

1970년 4월11일 미국에서 우주선 아폴로13호가 달을 향해 발사됐습니다. 우주선의 실패 확률은 100만분의 1로 완벽했습니다. 그런데 지구에서 20만 마일 떨어졌을 때 이상이 생겼습니다. 우주선의 산소탱크가 파손돼 지구로 돌아올 수 없는 처지에 놓인 것입니다. 비행사들은 항공우주국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어떤 처방도 내릴 수 없었습니다. 그때 닉슨 대통령은 아폴로호의 무사귀환을 위해 전 국민이 기도해주기를 요청했습니다. 백악관과 국회의사당, 시골의 가정에 이르기까지 전 미국인이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아폴로 13호 캡슐이 태평양 한가운데 떨어졌습니다.

우주비행사들은 미 해군 군함에 오르자 안도의 숨을 내쉰 뒤 군목의 손을 잡고 기도했습니다. 그 당시 타임지의 표지에는 우주비행사의 손을 붙들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군목의 모습이 실렸습니다. 그리고 주일 아침 닉슨 대통령은 미국의 전 교회를 향하여 "우주비행사들이 무사히 귀환한 것을 감사하는 기도를 드리자"고 제안했습니다. 우주비행사들은 "고장난 우주선에서 우리는 간절히 기도했다"고 말했습니다. 오직 기도만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를 가장 완전하게 해결해줄 수 있는 능력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첫째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야고보는 교회의 장로들이 병든 자를 위하여 기도할 때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라고 했습니다(약 5:14). 여기에서 강조하는 것은 '주님의 이름'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해 간구해 보십시오. 하늘 문이 열리고 기적이 일어납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앉은뱅이에게 "은과 금이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6)고 했을 때 즉시 일어나 걷고 뛰며 성전에 들어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있게 의지하고 기도할 때 하늘 문이 열리고 응답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둘째,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세계적으로 기도를 많이 하는 교회로 알려져 있습니다. 새벽에 나와 기도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교회마다 열심히 기도합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응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왜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할까요. 기도는 열심히 하는데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의심을 가지고는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야고보는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약 1:6-7)고 했습니다.

셋째, 의인이 되어 기도해야 합니다.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 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잠 15:29). 의인의 간구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시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망망대해에 조각배를 타고 항해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삶에 대해 모르는 철부지라 할 수 있습니다. 바람이 조금만 거세게 불면 조각배는 물결에 휩싸여 파손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순경에서나 역경에서나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주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의심 없는 믿음으로, 또 의롭게 된 마음으로 기도하며 응답 가운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석00목사(중계동 00 교회)


비평

기도에 대한 이 설교는 한 눈에 드러나 보이듯이 성경의 가르침과 맞지 않는 '기도만능주의 사상'을 전하는 한국 교회 대부분의 신앙형태를 재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국 교회가 빠져 있는 기독교 기도관에 대한 몰이해가 여기서도 여실히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설교자는 처음부터 '기도는 … 우리 성도들이 이 땅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응답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도 합니다"라고 시작했고, 아폴로 13호선의 사건을 '기도 응답의 실례'로 제시했습니다. 이후 전개된 논조는 누구든지 기도하기만 하면, '이 땅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응답 받을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렇게 설교 전체를 통해서 '기도만능주의' 사상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먼저 설교자가 채용한 예화 문제부터 짚어보겠습니다. 사람이 곤경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하고, 그럴 때 약간의 신앙심만 있다면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심리라고 하겠습니다. 설교자는 아폴로 13호 사건을 기도 응답의 실례로서 제시했는데, 문제는 그렇게 해서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하신 응답이라고 어떻게 보장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성도의 기도에 응답하실 때에는, 기본적으로 당신의 나라가 선양되는 일과 관련하여 그렇게 하시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그 사건이 하나님의 나라를 선양한 증거가 어디에 있다고 기도 응답의 예화로 사용했는지 의문스럽습니다. 사실 이런 식으로 두루뭉실한 예화를 사용해서 성경의 사상 입증을 시도하는 경우는 다른 설교자들에게서도 많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곳의 설교 역시 두루뭉실한 예화를 제시하고는 그것을 진리라고 전제한 후, "오직 기도만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를 가장 완전하게 해결해줄 수 있는 능력임을 알아야 합니다."라고 결론을 이끌어갔습니다. '기도만이', '모든 문제를 가장 완전하게 해결' 등등의 용어를 서슴없이 사용함으로 역시 '기도만능주의'를 강력하게 부르짖었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라고 한 부분을 보겠습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한다고 하는 이 말의 의미는, 한국 교회의 성도들 대부분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설교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한 데 대한 실례로 베드로의 경우를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38년된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의 경우는 교회가 이 땅에 데뷔하는 역사와 연결되어 있는 특별한 사건입니다. 더욱이 당시의 사도들은 교회 창설 사역을 수행하는 특별한 사역자들이었기에,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위임 받은 전권을 행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직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교회 창설기에 내셨던 임시직으로서, 이후 교회가 완성되게 되자 사라져버렸습니다.)

이런 까닭에 사도들은 그야말로 초월적인 권능을 행사했습니다. 심지어는 필요한 경우 죽은 자까지도 다시 살리는 권능을 베풀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일으킨 이 특별한 사건을 기도 응답의 보편적인 실례로서 제시하는 것은 적절치 않고, 또 그렇게 하면 당시 앉은뱅이가 일어난 사건이 오순절 성령 강림 역사와 함께 연결되어서 드러내 보이고자 하는 본래의 의미까지 엉망진창을 만들어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말 그대로 '사건', 곧 교회 창설 사역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초월적인 사건인 것이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식의 기도는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성경에서 특별한 사건과 보편적인 원리를 구분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혼란이 적지 않습니다. 만일 지금 설교자가 전개한 이런 식의 논리가 정당하다고 한다면, 가령 엘리야나 엘리사가 각기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린 사건에 근거하여, 사람이 죽었을지라도 믿음으로 기도하면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하는 논증도 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병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경우는 있어도 죽은 사람을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는 법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이 없어서입니까? 그렇기도 하겠지만, 죽은 자를 위해서는 다시 살아나라고 기도하지 않는 것이, 비록 막연한 생각이지만 하나의 불문율의 법칙인 듯이 생각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 해석과 적용에는 바로 이 지켜야 할 '법칙'이란 것이 있습니다. 사건과 원리를 잘 구별해야지, 덮어놓고 아무 사건이나 다 갖다 붙여서 예화나 실례로 사용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한다'는 말의 의미는, 마치 주문이나 주술을 외우듯이 그렇게 사용하라는 것인 양 이해되면 안됩니다. 평소에 예수님과 맺고 있는 관계성, 예수님과 나누고 있는 교통, 바로 이러한 신앙적인 삶의 연장선상에서 '기도'의 의미와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고 적용해야 옳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기도한 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고 하는 말로서 마무리를 하지만, 사실 엄격하게 따져보자면 그렇게 겉으로 그와 같은 소리를 표현해내는 행위 그 자체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이해는, 본래 기도가 이미 언어나 표현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평소의 일상적인 삶에서부터 자신의 삶의 모든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과 교통하면서 살아나온 실질이 있는 사람이 이런 기도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평소에 자기 생활 반, 신앙 생활 반 하는 식으로 겨우 신앙인인 척하는 티나 내는 정도로 살아나오다가, 갑자기 어떤 문제점 하나를 해결받기 위하여 기도라고 하는 형식을 취한 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고 하면서 순서 갖다 붙이듯이 하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는 참된 신앙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설교자는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는 것의 의미를 마치 주문을 외우는 것과도 같은 것인 양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베드로가 그런 표현을 했던 경우를 실례로 제시하면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있게 의지하고 기도할 때'라고 하는 표현도 쓴 것입니다.

'믿음으로 기도해야 한다'고 한 표현도 그렇습니다. '기도는 열심히 하는데 믿음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현상이 왜 생깁니까? 그것은 목사들이 기도를 위한 기도를 부추기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위한 기도에 매달리고 있습니까? 교회들마다 마치 경쟁하듯이 개최하고 있는 인위적인 기도회들의 경우를 보십시오, 이런 곳에 가보면, '오래도록', '간절히', '끊기 있게', '많이' 등등이 그들을 지배하는 사고방식입니다.

더욱이 설교자는 야고보서의 말씀을 잘못 인용했습니다. 여기서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성도가 '지혜'를 얻는 것과 관련된 문제이고(약 1:5), 기타 일상생활에서의 필요와 관련된 것은 뒤에서 언급합니다. 그러면서도 야고보 기자는 거기서 말하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고 했습니다(약 4:3). 그러니까 기도와 관련하여 성경이 관심을 갖는 것은, 기도하라는 권고 못지 않게 '올바른 기도'의 문제도 있는 것입니다. (뒤에서 또 말하겠지만) 기도를 바르게 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성경은 어디에서도 '무엇이든지 구하면 얻는다'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물론 이 말은 '무엇이든지'라는 말 자체가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마 21:22). '무엇이든지'라는 말은, '그의 뜻대로'라는 말에 의하여 성격이나 범위가 정해진다는 뜻입니다(요일 5:14-15). 즉 성경은 '그의 뜻대로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가르치고 있지, "기도는 … 이 땅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응답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입니다"고 한 말과도 같이 모든 것이 무지막지하게 다 이루어진다는 차원에서의 무엇이든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채, 단지 '기도하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다'라고 몰아가는 것은, 자의든 타의든지의 여부를 떠나서 성경의 숭고한 사상을 훼손하고 오염시키게 됩니다. 그리고 제대로 알지 못하는 성도들을 더 무지에 빠트리면서 기독교를 기복신앙으로 변질시킵니다. 사실 이런 식의 기복주의적인 기도관이 난무하기 때문에 지금 한국 교회들이 이렇게도 타락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그러면 '믿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설교자는 지금 어떤 의미로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했는가 하면, 소위 말하는 '강한 확신'이요, '심리적으로 자기 생각을 굳게 의지하는 것'을 가리켜 믿음이라고 한 것 같습니다. 자기가 구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응답을 '의심하지 말고, 분명히 받는다고 하는 확신을 갖고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받는다'는 것이 설교문 전제에서 풍겨나오는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어디에서도 이런 식의 '자기 확신' 혹은 '자기 최면'을 '믿음'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먼저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의 큰 골격을 보자면, 믿음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행하신 일에 대한 응답과 자기 적용이요, 자기 의존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행하신 일에 자신을 적용하여 사는 것이 믿음의 의미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말한다면, 구원 받은 성도가 지금까지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나왔던 데서 돌이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현하면서 살아나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런 삶의 변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역을 대할 때, 현세를 넘어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데 대한 확신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즉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하게 됩니다. 성도가 이렇게 살아나가는 삶의 모습이 어떤 것이냐 하면, 자신의 삶의 목표와 가치를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데 두는 것이요, 범사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사는 형식입니다.

그런데 성도가 이렇게 '구원 받은 자다운 삶'을 살다 보면, 나름대로 때로는 막히거나 어려움을 겪는 일도 만나기 마련이고, 따라서 어떻게 문제를 풀어가야 할 것인가 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필요로 하기도 하고, 때로는 물질과 같은 것을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셔야만 되겠다고 하는 상황과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성도는 평소에 그래왔던 것처럼 여전히 자애로우신 아버지께 나아감으로 믿음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믿음으로써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이때 이러한 과정 전체가 바로 '믿음의 행위', '믿음이 있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말입니다. 따로 기도회와 같은 형식을 취하면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밥 몇 끼니 굶으면서 금식 기도한다고 요란을 떨지 않아도, 이미 그러한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그런 실질의 믿음에 성립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의 믿음이란, 심리적인 자기 확신이나 자기 최면 따위의 두루뭉실한 것들과는 차원이 달라서, 그야말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의 자리에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런 신앙적 확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는 믿음으로 구할 수 있게 되고, 의당히 구한 바를 얻게도 됩니다. 이때 그가 구하는 것은 여전히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는 것'과 연결되어 있음이 당연하고, 또한 그렇게 응답 받은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선양하는 결과도 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사는 성도들의 삶을 가리켜, 이제 뒤에서 다루게 될 '의인의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믿음의 기도의 모습은, 흔히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길게, 간절히, 많이, 소리 높여, 애절하게 등등의 기도만능주의자들이 가르치고 행하는 인위적인 기도와는 차원이 다르다 하겠습니다. 평소부터 하나님을 자신의 가정의 아버지로 대우해드리면서, 그가 인도하시는 바에 순종하면서 그리스도인다운 인격 활동을 하고, 그러한 품성에 맞게끔 살림도 꾸려 나온 사실에 근거하고, 그것에서 뻗어져 나오는 데서 자연스럽게 되어지는 기도 생활도 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의인이 되어 기도해야 합니다'라고 한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좀 난해합니다. 설교자는 말은 이렇게 해놓고서도 정작 의인에 대한 해석을 하지 않았고, 그러다가 끝부분에 가서 앞서의 내용들을 요약하는 시점에서 이 부분을 요약하여 '의롭게 된 마음으로 기도하며'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이것이 정확하게 무슨 의미인지는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의인'이라는 말을 쓴 후 뒤에 전개시킨 내용에서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한 것을 보면, '항상 기도하는 자세를 가진 사람'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앞에서도 잠깐 비췄듯이 성경이 가리키는 '의인'이란, '전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길로 행하려고 발버둥치며 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소위 성공한 사람으로서 살 수 있을 것인가 하여, 온갖 세상적인 일들을 쫓아 다닌다거나, 그러다가 하나님의 힘까지도 얻어보려는 차원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그런 정도의 사람이 결코 '의인'일 수 없습니다.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기에, 살든지 죽든지 일편단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는 사람, 그래서 그렇게 살려는 것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조롱도 받고 손해도 받으며 비난도 받고 핍박도 받지만, 여전히 굴복하지 않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면서, 그러한 삶을 더욱 굳건히 살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을 가리켜 지금 잠언서는 의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반복하지만 평소에는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다가 어려운 위기나 상황을 만나면, 마치 이방인들이 무당이나 귀신을 찾아 나오듯이, 그렇게 유별나게 큰 소리를 내서 하나님을 찾는 그런 사람이라면, 분명 의인이 아닐 것입니다.

의인은 자기를 아는 사람이요,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신약적인 표현을 써서 좀더 구체적으로 묘사해 보자면, 하나님의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에게 어떻게 베풀어졌는가를 아는 사람이 의인인 것이요, 그러한 은혜를 베푸실 때에 이후로는 전적으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현하는 삶을 살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그래서 먹든지 마시든지 범사에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일에 발버둥치는 사람이 바로 의인입니다.


정리

지금까지의 비평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설교자들은 기도에 대해 설교할 때에, 지금처럼 '간절하게 기도하여 모든 것을 응답 받자'는 식으로 몰아갈 것이 아니고, 어떻게 바르게 기도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실제로 한국 교회 성도들의 보편적인 기도관이 심각할 정도로 미신화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현실적인 필요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성경이 가르치는 기도의 근본 정신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사람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간절히 기도하고 의심 없이 확신을 갖고 기도하기만 하면, 반드시 얻고야 만다'고 하는 사상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사단이 심어놓은 '기도만능주의' 사상을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칼빈은 올바른 기도의 규칙으로, 경외, 참회, 겸손, 소망 네 가지를 제시하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을 넘어서 구하는 잘못'을 경고했습니다. "항상 우리의 부족을 느끼고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게 과연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를 진심으로 생각한 뒤 그것을 얻으려는 진실한, 아니 강렬한 소원을 가지고 기도해야 된다."(3.20.6)

사실 올바른 기도의 문제를 다룬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주제라는 것부터 깨달아야겠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당시 그의 제자들까지도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할 정도였던 것을 볼 때 자명합니다(눅 11:1).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할 지를 알지 못한다고 하는 이 문제가 너무도 중요하기에, 성령께서는 기도의 영역에 있어서까지도 그렇게 성도를 도우시는 것입니다(롬 8:26).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받을 수 있다는 식으로 가르치는 것은 기독교를 새로운 미신 종교로 전락시키게 됩니다. 성령께서 성도를 대신하여 기도해 주시는가 하면(롬 8:26), 기도를 성령 안에서 드리라고 할 정도로(엡 6:18 유 20절), 올바른 기도생활의 문제는 어렵고 또한 중요한 것입니다. 기도 문제와 관련하여 이런 중요한 말씀들이 명확하고 또한 산적해 있는데, 왜 그렇게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어 말씀을 왜곡하고 신앙을 왜곡하는 인본주의 설교를 하는가 말입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문방구에 가서 말하기를, "네가 원하는 것은 다 사줄게. 무엇이든지 말해라"고 했다면, 비록 '무엇이든지'라는 용어는 썼지만, '문방구에 있는 것들 중에서 무엇이든지'라는 의미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자신의 학습에 도움이 되는 것을 사게 하려는 의도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이 이 말뜻을 못 알아 듣고, "무엇이든지라고 하셨죠? 약속 지키셔야 해요"라고 하면서, 그것도 자신의 학습과는 상관도 없는 것을 요구하면서, "오토바이 사주세요. 사 주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하는 식으로 떼를 쓴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이 아들은 얼마나 아버지의 말 뜻을 못 알아 듣는 '잘난 아들'(?)입니까? 오늘날 기도만능주의자들이 가르치는 기도에 대한 생각이 꼭 이와 같은 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기에 덧붙여 한 가지 중요하게 알아야 할 것은, 기도는 언어와 내용의 문제이기 이전에, 그분 앞에 엎드린 자가, 자기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신 창조주 하나님께 대해 취해야 할 마땅한 경외심, 의뢰심, 그리고 예의 바른 자세와 태도도 갖춰져야 한다는 것을 함께 명심하는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간 사람은, 마음의 자세가 반듯하고 진실해야 하고, 혀를 함부로 놀려서 말을 아무렇게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도자는, 죽은 신 혹은 관념이나 심리적인 기분으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살아계신 신이신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선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무 까다롭고 조심스럽다구요? 당연히 까다롭고 조심스러워야지요. 지금 어느 존전에서 아뢰는 것인데 이만한 최소한의 기초 의식도 없이 함부로 한단 말입니까? 기도란, 사람을 대상으로, 사람끼리 벌이는 '종교 놀음'이 아니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뵈옵는 교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아버지 앞에 나아간다 한들 이만큼의 예의도 안 갖추겠습니까?

그러면 좀더 현실적인 대안의 문제로 들어가서, 이런 혼란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그나마 '기도의 모범'을 생각해 본다면, 어떤 것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감사하게도 성경에는 이미 이것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기도문과 같은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 기도문의 중요성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이라는 데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실제로 주기도문의 내용은 우리가 미신에 빠지지 않도록 돕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 주기도문을 강조한다고 해서, 마치 이것을 주문처럼 반복하라는 의미는 아니고, 이 기도문의 내용이 함축하고 있는 사상을 따라서 기도하자는 것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칼빈은 말하기를, "주기도문의 기도 사상은 우리에게 항구적인 구속력을 갖는다"고 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사람다운 고백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강의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장수민, 하나님의 큰 일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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