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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에 대한 주님의 경계

작성자이천우|작성시간03.02.12|조회수101 목록 댓글 0
마태복음 6장 5-8절 / 5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 시리라 7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기도의 바른 자세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서 6장 1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여기서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는 말씀은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천국에 들어가는 의가 되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는 의도로 의를 행하게 되면, 이런 태도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런 태도로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사람에게 보이려는 의도로 의를 행치 않도록 조심할 것을 선언하신 후, 구체적인 실례 몇 가지를 제시하십니다.


여기서 세 가지 실례가 제시되었습니다. 첫째는, 구제하는 것과 관계되고(2-5절), 둘째는, 기도하는 태도와 관계되며(5-15절), 세 번째는, 금식하는 자세와 관계됩니다(16-18절). 구제할 때에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면,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는 자세로 해서는 안 되고, 오로지 은밀하게 해야 합니다. 심지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3절)고 하실 정도로 은밀하게 해야 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는 의도로 기도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자는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는 것이 옳습니다. 또한 중언부언하지 않아야 합니다. 세 번째로 말씀하신 금식도 같은 맥락입니다. 금식하는 사람은, 자기가 금식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드러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슬픈 기색을 하고 얼굴을 흉하게 꾸미는 것은 사람에게 자기를 의롭게 보이려는 데서 나오는 외식하는 태도입니다. 이렇게 세 가지 사항을 지적하셨습니다. 이 세 가지 사항에는 각기 '외식하는 자'라고 하는 평가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고 하는 평가가 공통적으로 붙어 있습니다.

여기서 특별히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5-8절에 나타난 두 번째 사항, 곧 기도와 관련된 것입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것은, '기도를 외식으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외식(外飾, hypocrite)'이라는 말은 한문으로 '밖외(外) 꾸밀식(飾)'자를 씁니다. 이 단어의 원래의 뜻은 '다른 사람을 흉내내는 배우', '통역인' 등을 가리키는데, 성경에서는 위선자를 상징하는 단어로 사용됩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은 기도를 외식하는 태도, 곧 위선적으로 하는 태도를 꾸짖으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두 번째로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기도의 그릇된 태도 두 가지를 지적하셨습니다. 첫째는, 외식하는 위선자가 되지 말라는 것이요, 둘째는,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적하신 것으로 끝나지 아니하시고, 대안을 제시하셨습니다. 첫째 사항인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아야 할 것과 관련해서는, "네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다음으로 중언부언하지 말아야 할 것과 관련해서는,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기도와 관련하여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하셨고, 그 대안을 각기 제시하셨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말씀들의 좀더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입니까?


유대교의 그릇된 메시아 왕국 사상

여기서 잠깐 산상수훈을 해석할 때에 염두에 두어야 하는 중요한 전제가 있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베푸실 때에 한 가지 중요한 전제를 갖고 계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신앙생활의 그릇된 자세 몇몇 가지를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지적하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은 하나의 거대한 사상 체계와 맞서고 계십니다. 그것은 유대교라고 하는 종교 체계입니다. 유대교의 그릇된 사상 체계와 맞서는 차원에서 산상수훈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유대교는 모세로부터 시작된 구약종교의 변형 집단입니다. 유대교가 시작된 것은 구약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부터 귀환하게 된 이후의 시점부터입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의해서 신앙 각성 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이 열심이 잘못됨으로 말미암아 이후 서서히 구약 종교의 핵심으로부터 빗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유대교의 큰 잘못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메시아 왕국의 본질을 그릇되이 가르쳐 정치적인 색채를 부각시켜 나왔던 점입니다. 특별히 로마의 지배기에 이르러서는 정치적인 메시아 왕국 사상이 극치에 달했습니다. 유대교의 특징은 인본주의 종교운동이라는 데서 찾아집니다. 이 그릇된 사상 체계를 염두에 두고, 이것을 바로잡으시는 차원에서 산상수훈이 베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을 해석할 때에 이 점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마태복음 5장 20절에는 예수님께서 유대교의 그릇된 사상 체계를 대표적으로 지적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여기서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가 있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유대교를 대표하는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은 백성들에게 천국 사상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이 가르친 방식대로 따르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유대교가 가르친 천국 사상과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천국 사상의 두 가지 큰 대립이 산상수훈을 통하여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의 주제는 천국입니다. 곧 구약 종교를 통하여 줄곧 예시되어져 나온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을 시작하는 마태복음 5장의 팔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3절)라고 하는 말로서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과연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다루신 것입니다. 마지막 여덟번째 복도 보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quot;고 하는 말씀으로 마쳐집니다. 이렇게 천국에 들어가는 문제가 산상수훈의 중요한 관점입니다. 유대교도 이 문제를 가지고 백성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가르침은 결정적으로 잘못되었고 왜곡되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예수님은 20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는 말씀으로서 분명한 선을 그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 천국에 들어가는 의의 문제를 유대교의 경우와는 달리 새로운 관점으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까지 받들어 나왔던 모세의 율법을 일거에 폐하고 무슨 획기적인 이론을 새롭게 가지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더욱 철저하게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받드셨습니다. 문제가 발생한 것은 유대교 때문입니다. 유대교가 율법과 선지자를 오해하고 왜곡시켰던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17-18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심으로 항간의 오해를 미리 막고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율법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무슨 획기적인 이론을 새롭게 가르치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율법과 선지자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혼란은 유대교 때문에 왔습니다. 유대교가 백성들에게 율법과 선지자를 그릇되이 가르쳤던 것입니다. 이 그릇된 가르침의 영향이 심각한 것은, 이것이 천국에 들어감에 있어서 단순히 부족의 문제가 아니고, 결핍의 문제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교 지도자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가르친 의를 전적으로 배척하십니다.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신 말씀을 통하여 단호하게 선포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선언하신 다음에 5장 21절 이하에서 당시 유대교가 가르쳤던 율법의 그릇된 가르침들을 몇 가지 대표적으로 바로 잡는 말씀을 베푸시게 됩니다.


새로운 의

유대교는 이렇게 예수님에 의해서 철저하게 배척될 정도로 사이비적인 천국 사상, 곧 하나님의 나라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유대교의 가르침 역시 여전히 율법과 선지자들의 가르침과 연속선상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질을 떠나버린 까닭에 사이비일 뿐입니다. 유대교는 정통(正統)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쳤지만, 그것은 원래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은혜의 왕국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 사상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바, 순전히 인간의 노력과 수고에 근거를 두는 사실상 하나의 종교 운동에 불과했습니다.

지금 천국은 이미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하여 도래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천국에 들어가려면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가르친 의를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천국은 예수님과 연합하는 데서 소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바로 이 사실을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치십니다. 그래서 앞서 팔복을 가르치실 때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10절)고 하셨는데, 곧 이어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의 의미를 밝혀 말씀하시기를, 11-12절에서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좇을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인격과 연합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다른 어떠한 방법으로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강조하시기 위하여 산상수훈을 마치실 때에도 다시 한번 천국에 들어가는 자격이란 것이 오직 당신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반복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21-23절을 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여기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인 유대교를 따라 종교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분명히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22절)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을 철저하게 외면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23절)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21절)가 아니면 어느 누구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당신이 사람들을 천국으로 입성시키는 권세를 행사하는 분으로 묘사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들의 종교적인 행위를 내세우는 사람들의 주장을 일축하시고,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였는가를 기준으로 제시하십니다.

그러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미 역사 속에서 율법과 선지자를 통하여 충분히 계시되어져 나왔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장차 도래하시는 메시아께서 십자가의 사역을 통하여 성취하시는 구속의 은혜를 힘입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에 들어가는 일이 있게 된다고 한결 같이 예언해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하면 예수님께로 나아와야 합니다. 마태복음 16장 18-19절, 요한계시록 1장 18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예수님이 천국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의 온 역사를 통하여 이 사실을 부단히 계시해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유대교는 이를 왜곡했습니다. 이들의 왜곡은 급기야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라는 것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들은 종교적인 노력을 의지하여 천국에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종교적인 노력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이들은 의의 척도와 기준을 하나님의 관점이 아니요 자신의 관점에서 찾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단호하게 거부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누가복음 18장 9-14절에 나오는 그 유명한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입니다. 여기서 바리새인은 자신의 의를 세리와의 비교에서 찾습니다. 세리보다 낫기 때문에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레에 두 번씩이나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다고 하는 사실에 근거하여 스스로 자신을 의롭다고 판단했습니다. 의의 기준이 자기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 세리의 자세는 어떠했습니까? 그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했습니다. 다만 가슴을 치며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탄식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신을 바라볼 때에 도무지 의를 내세울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로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만을 의지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만을 의지하는 자세가 진정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의를 소유하는 비결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의의 척도와 기준을 자기들의 종교 행위에서 찾았습니다. 산상수훈의 전체 메시지는 바로 이와 같은 왜곡된 유대교의 하나님의 나라 사상을 배척(排斥)하는 관점에서 베풀어진 것입니다. 이런 배경을 충분히 염두에 두고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도리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외식하는 위선자의 기도

첫째, 외식하는 기도를 책망하신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말씀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의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여기에 보면 기도하는 모습을 의도적으로 사람들 앞에 드러냈다는 데서 외식의 실상이 드러납니다.

기도란 두말할 필요 없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한 것이요, 하나님과의 교통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의 처지를 아뢰기도 하고, 자신의 심정을 살피기도 하며 혹은 무엇을 간구하기도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또는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과의 교제 및 교통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기도하는 자가 이 사실 이외의 것을 염두에 두고 기도하게 된다면, 바로 그 순간부터 이미 기도라고 하는 것은 성립되지 않게 됩니다.

가령 자신이 기도하는 경건한 사람인 것을 사람들에게 과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기도하게 된다면, 그는 이미 기도로부터는 떠난 사람이요, 외식하는 자로 전락되어버린 것입니다. 자신이 기도한 일체의 것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여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기도가 이런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왜 이렇게 했는가 하면, 순전히 종교적인 목적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구약 종교를 계승하여 정통 메시아 왕국을 받들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알리고 선전하려고, 그런 식으로 '경건한 모습'을 취하여 사람들 앞에 나아갔던 것입니다.

유대교는 자신들이 경건하다는 것을 과시하고, 또한 사회에서 소외당한 자들을 돌보는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을 통하여, 당시 백성들로부터 신뢰와 경외를 받으려고 했습니다. 기도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면 백성들이 자신들을 경건한 사람으로 평가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경건성을 드러내는 것을 통하여 영적인 지도력을 확보해서 백성들의 종교 지도자 노릇을 계속해 나가겠다는 의도를 가졌던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수단으로 기도 형식을 사용했습니다. 자기네가 고도의 영적인 경건성과 지도력을 가졌음을 기도 형식을 빌어 과시한 것입니다.

이들이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함으로 사람들에게 보이는 기도를 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기도를 통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기도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의도적으로 드러내기만 했을 뿐 아니라, 기도하는 내용도 의도적으로 큰 소리로 드러냈습니다. 크게 소리 내어 통성으로 기도했습니다. 이들은 크게 소리 내어 기도하는 것을 통하여 사람들이 자신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게 했습니다. 이때 무슨 내용을 드러냈는가 하면, 자기네가 구약 종교를 받들어 나가는 정통파인 것을 과시했습니다. 자기네가 전개하는 일체의 종교적 활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한다는 것을 기도 형식을 빌어 백성들에게 알렸던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하나님과 교통하기 위하여 기도했던 것이 아니라, 기도를 자기네 종교를 확장시키는 목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요즈음 모 선교단체에서 '21세기 일일일 기도운동'이라는 것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매일 한 사람이 한시에 일분간씩 기도하자는 운동입니다. 시계의 시침이 오후 1시를 가리키는 바로 그 순간에 당시 무슨 일을 하고 있던지 간에 일단 멈추고, 일분 동안 민족의 복음화와 세계의 복음화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기도가 폭발적인 능력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 이 운동을 전개해 나갑니다. 자기네만 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운동을 적극 권장하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운동을 전개하는 것을 통하여 이 선교단체가 얻고자 하는 바가 있습니다. 핵심은 자기네가 정통 기독교 신앙을 받들어 나가는 선교단체인 것을 사람들 앞에 과시하려는 것입니다.

물론 이들이 일분간 기도할 때에, 의도적으로 사람들 앞에 서서 기도한다거나 혹은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각종 팜플렛을 만들어 홍보하고, 방송 매체를 통하여 캠페인을 벌이는 식으로 이 운동을 전개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통하여 자기네가 정통 기독교 신앙을 받들어 나가는 신령한 단체인 것을 주장하고 과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는 신령한 사람이라면, 이렇게 자기네가 전개하는 운동에 가담해야 할 것이라는 압력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를 하나의 종교 운동으로 펼쳐나가고 있고, 또한 이것을 공개적으로 전개해 나가고 있으며, 이를 통해서 외부로부터 신령한 단체라고 하는 평가를 얻으려고 하는 사실 등이, 여기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전개했던 기도 운동과 흡사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것을 신령하다고 평하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외식하는 자라고 꾸짖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상관없는 인본주의 신앙운동일 뿐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오늘날의 지역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가령 교회가 40일 작정 새벽기도회와도 같은 운동을 전개하고, 이를 과시하기 위하여 프랑카드를 만들어 교회당 벽에 척하니 내걸게 될 때에 이런 현상이 되풀이되는 것입니다. 이들이 자기네가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밖에 알리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기도를 많이 하는 신령한 교회이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령한 교회이니까, 좀더 신령하게 신앙생활을 하기를 원한다면 우리에게 오라!'는 것입니다. 혹은 '우리를 신령한 교회인 것으로 알아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외식하는 기도입니다. 교회적인 차원이든지 개인적인 차원이든지를 무론하고 자기네가 기도하는 교회요 기도하는 사람인 것을 밖으로 드러내는 의도를 가지게 되면, 이것이 바로 외식하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만일 교회적으로 기도할 필요가 있게 되면, 그냥 내부적으로만 알리고 자기네들끼리 조용히 하면 될 것입니다.

이런 기도 현상들에 대해서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서두에서도 말했듯이 이 말씀은,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상을 주겠다'는 의미가 아니고, '그런 기도는 아예 내가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곧 '천국에 들어가는 의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우리들의 기도는 대부분이 그분 앞에서 잡동사니 취급을 당하고 있다"라고. 외식하는 기도가 대부분인 사실을 들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골방기도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처방이 무엇이냐 하면,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골방에서 은밀하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바른 정신이요 바른 자세입니다. 핵심은 기도시에는 오직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통 관계에만 모든 초점을 맞추고 모든 신경을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기도의 대상은 전적으로 하나님이십니다. 즉 기도하는 사람은 일체 다른 사람과 상관해서는 안됩니다. 다른 사람을 의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이 기도하는 사람인 것을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신경을 쓰고, 기도의 언어로서 다른 사람이 듣게 하여 그로부터 호의를 얻으려 한다거나, 다른 사람을 교육하여 영향을 끼치려고 하는 등등의 것들에 신경을 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기도시에는 오직 하나님만을 생각해야지, 호리만큼이라도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려는 의도를 가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또는 자신의 경건성을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기도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일편단심의 심정으로 정성과 마음을 집중하여 오직 하나님만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가급적이면 골방에 들어가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들 앞에 자신이 노출되어 있으면 자유롭게 기도할 수 없을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 상태라면 외식하는 기도에 미혹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자신의 심정을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드러내는 데 있어서도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위의 사람들이 신경이 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에 가능하면 골방에 들어가야 하고, 이것이 여의치 않아 부득이 할 때에는 소리를 내지 않고 속으로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눈을 감고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기도할 때에는 반드시 눈을 감으라고 하는 법칙이 성경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눈을 감고 주위를 보지 않으면, 그만큼 다른 사람들과의 인간적인 관계로부터 오는 산란함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눈을 뜨고 기도한다고 해서 기도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가급적이면 하나님과의 관계만이 성립되기를 바라는 심정이 있어서 그렇게 눈을 감는 것입니다. 눈을 뜨고 기도하게 되면, 여간 기도에 훈련이 되지 않은 한에는 십중팔구 주위의 현상으로 인하여 기도에 방해를 받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아예 눈을 감는 것입니다. 그러나 눈을 감은 이것이 때로는 육체의 피로와 겹쳐서 졸음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에는 차라리 눈을 뜨는 것입니다. 눈을 뜨고 기도하게 되면 졸음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눈을 감는 의미를 좀더 깊이 들어가게 되면, 아무도 안보는 데서 기도하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연약한 존재인고로 옆에 사람이 있어서 자신의 기도를 듣게 되면, 신경이 쓰이기 마련이고, 이내 미혹을 받게 됩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들을까 봐 신경이 쓰여서 하나님께 자신의 심정을 자유롭고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기도하고 싶은 경우에는 최우선적으로 기도하는 환경부터 먼저 신경을 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기도가 방해와 미혹을 받지 않는 환경을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골방이 최고인 것은 당연합니다.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게 되면, 기도하기에 최적의 조건이 수립된 것입니다. 이제는 힘써서 기도하기만 하면 됩니다.

사람이 이렇게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게 되면, 그리고 기도를 진실하게 하려는 한에는, 그는 참으로 좋은 여건에 놓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는 심정이 참으로 애절해지겠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지금 하나님만이 들으시는 상태에서 기도하고 있는 고로, 기도에 힘이 있게 되고 애절함도 있게 됩니다. 지금 그의 의식에는,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은밀한 중에 보시고 응답하시는 분이시다"라고 하는 의식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까닭에 지금 은밀한 곳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심정이 애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면, 자신의 그러한 기도가 아무런 의미가 없겠기에 말입니다. 그래서 그야말로 간절하고 애절한 심정으로 기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골방에서 홀로 기도하는 때에 누리는 유익이란 것이 이렇게도 큽니다.

사람이 골방에서 기도하지 않을 때에는 이런 애절한 심정을 갖기가 쉽지 않습니다. 가령 여러 사람들과 함께 모여서 식사를 할 때에 식사를 위한 기도를 드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하나님께서 양식을 공급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이때 감사하는 심정이 얼마나 애절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 거의 십중팔구는 형식적이며 습관적인 의례로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대접해 주는 사람이 듣기에 좋으라고 아첨하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식사 기도 때만 이런 것이 아니고, 기타 대표 기도 때라든지 혹은 미리 정해진 식순에 따라서 기도할 때에 이런 의례적인 기도가 나타나기 쉽습니다. 우리는 이런 일에 쉽게 미혹될 정도로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골방에 있어서 혼자 기도를 드리게 되고, 또한 이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셔야만 한다는 심정이 있게 되면, 사정은 아주 좋아지는 것입니다.


현대의 중언부언하는 기도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꾸짖으신 기도의 자세는 중언부언(重言復言)하는 기도입니다. 중언부언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한 말을 또 하고, 한 말을 또 하고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렇지만 여기 중언부언한다는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바, 억지로 기도할 때, 곧 기도를 위한 기도를 하는 때에 흔히 나타나는 현상과도 같은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현상을 포함하기는 하지만, 지금 예수님께서는 좀더 깊은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곧 자기 자신은 기도할 필요를 못 느낀다거나 혹은 기도할 마음이 없는데, 어쩔 수 없이 기도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가령 무슨 모임에 참석했을 때, 갑자기 지목을 당하여 기도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있는 데서 갑자기 기도할 것을 요구받게 되면, 못하겠다고 하면서 달리 물러서기가 쉽지 않습니다. 못하겠다고 하면서 사양하거나 물러서게 되면, 공연히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보일 것 같기도 하고, 또 평소에는 아예 기도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비쳐질까 봐서 염려스럽기도 하고 해서, 정작 마음은 내키지 않지만 부득불 억지로 응하게 됩니다.

이런 경우 자꾸만 말이 헛나오거나 더듬으며, 중복되어 같은 말을 자꾸 되풀이하게 됩니다. 또는 마음에도 없는 말이 자꾸 튀어나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무언가 한 마디 해놓고는, '…에 하나님 아버지, …에 하나님 아버지' 하면서 자꾸만 의미 없는 말을 쏟아놓게 됩니다. 평소에는 말을 참 잘하고, 무슨 이야기를 하나 하더라도 매우 논리적으로 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지금 기도하는 소리를 듣노라면, 마치 두 세 살짜리 어린아이가 말을 배우듯이 하는 식으로 더듬거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함께 기도에 동참한 사람들이 듣기에, 저 사람이 도대체 무슨 내용을 기도하는가 싶은 마음이 듭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은 정작 기도할 마음이 없는데, 지금의 형편상 억지라도 기도를 해야겠기에, 어쩔 수 없이 기도하게 될 때에 이런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더욱이 구역 모임이나 성경 공부 모임이 아니고, 특별히 기도 모임, 곧 기도를 하기 위한 모임으로 모였을 경우 이런 현상은 더욱 심하게 나타납니다. 이런 때는 순전히 '기도하기 위하여 모였다'고 하는 명분이 앞서기 때문에, 그야말로 기도를 위한 기도행위가 될 가능성이 참으로 많습니다. '기도 모임'이라고 하는 명분 하에 참석하게 되면, 참석한 사람들 모두가 한번씩은 의무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자기 차례가 돌아오는 것이 상당히 부담스럽지만 여간해서 피하기가 어렵습니다. 결국 순서가 되어 자기 차례를 맞게 되는데, 이런 경우에는 '내가 기도를 잘 해야 한다'고 하는 심리적인 압박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순전히 기도를 위한 기도에 치중하게 되고, 연결되지 않는 내용, 헛소리, 반복되는 언어, 습관적으로 끼여드는 가성 등의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의 기도는 추상적인 기도 혹은 막연한 기도가 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추상적인 기도나 막연한 기도는 그야말로 기도를 위한 기도를 하는 데서 나오게 됩니다. 자기 자신이 기도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면서도 억지로 기도하게 되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기도 중에 "하나님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라고 했다고 볼 때, 순전히 추상적으로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자기 자신이 정말로 마음에 깊이 생각하고 깨닫기를, "아!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이번 일이 얼마나 큰 일 날 뻔했는지 모른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돌보아 주셨기에 내가 이렇게 안전하다. 이 일은 정말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하는 심정을 실제적으로 가지지 않았으면서도, 그냥 말로만 그렇게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추상적인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정성(精誠)이 없고 성의(誠意)가 없는 기도입니다.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개인의 측면에서 드려지는 기도조차도 이렇게 성의가 없고, 추상적이며 막연한 기도로 일관하게 된다면, 기타 남을 위하여 하는 기도에 있어서는 더더욱 형편이 나쁠 것입니다. 가령 오늘날과 같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때에 국가를 위해서 기도한다고 봅시다. 이런 경우 이 나라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하고, 자신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태도를 고쳐야 하겠는가 하는 것을, 자신이 지금 현실적으로 인식하거나 아는 바가 있는 데서 나오는 기도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서도 억지로 이런 기도를 드리게 되면, 그야말로 습관적으로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수준으로 하게 됩니다.

만일 교회를 위해서 기도한다면, 이 문제는 더더욱 심각해집니다. 자신이 지금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중이라면, 그렇게 교회를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실제로 인식하는 데서 되어지는 기도여야 하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 교회가 좀 부흥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여 이를 위해서 기도한다고 봅시다. 그러면 왜 지금 우리 교회에 부흥이 필요한가 하는 이유를 분명히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나는 어떻게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하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교회를 부흥시키실 때에는, 우리들 자신을 전도의 도구로 쓰시는 방식으로 그렇게 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 못지않게, 자신을 전도의 도구로 드리는 일에도 의당히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실과 실제의 기반에 입각하여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간구하고 요청하는 기도를 드렸다면,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시는가 하는 것을 살피는 데까지도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응답해 달라고 요청했고,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엇 무엇을 해달라'고 간절히 부르짖고 매달렸다면, 당연히 그 결과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끝나고 일상생활로 돌아가서도, 지금 교회가 부흥되는 조짐이 있는가, 하나님께서 교회를 부흥시켜 주시기 위해서 지금 어떤 일들을 진행하고 계시는가, 부흥되기 위해서 지금 나는 어떻게 쓰여져야 하겠는가 하는 생각을 계속 간직해 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기도할 때는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열렬히 기도했지만, 정작 기도가 끝나고 눈을 뜨는 순간부터는 '내가 언제 그런 일을 위하여 기도를 했는가!' 싶은 정도로 무관심해져 버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가 다 무성의한 기도요 추상적인 기도이며 막연한 기도입니다.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는 기도

이상 살펴본 기도의 모습들을 가리켜 중언부언하는 기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상당히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것입니다. 그러나 그나마도 지금 예수님께서 염두에 두신 것은 이런 차원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당시 유대교가 이런 차원에서 잘못되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기도를 외식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실제로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간절히 기도하는 일이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때 중언부언했다는 데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어떤 의미로 중언부언이란 말씀을 하셨는가 하면, '이방인과 같이'라고 하신 데서 대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방인들의 세계에 보면 그들 나름대로 기도 행위가 있습니다. 이방인들 역시 자기네 종교의 가르침을 따라 기도를 합니다. 대표적으로 불교(佛敎)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이들은 부처를 염(念)한다고 해서, 곧 부처를 생각하고 기원한다고 해서 염불(念佛)이란 것을 합니다. 불자들이 염불하는 것은 부처를 염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부처의 이름을 계속해서 부릅니다. 부처의 이름을 불러가면서 자신의 정신을 거기로 집중시킵니다. 이렇게 정신을 집중시켜 나가노라면 마침내 통일된 정신세계에 이르러 자신을 응시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소위 말하는 득도(得道)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득도에 이르는 것이 불자들의 기도 목적입니다.
이 목적을 위하여 기도하고, 또한 기도한 결과 이런 효력을 얻어 어떤 경지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어떤 때에는 기도의 행위가 되고 또 어떤 때에는 주문(呪文)의 형식을 취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이교도의 기도나 주문이라는 것은 계속해서 반복한다는 특성이 있습니다. 한 말을 또 하고, 한 말을 또 하고…, 계속해서 하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하는가 하면, 응답을 받거나 종교적인 효과를 누릴 때까지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심리로 기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응답을 받을 때까지 중언부언하면서 기도합니다. 또는 응답을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기도를 한 사실을 통하여 자신의 마음이 후련하다든지 혹은 무언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간 것 같은 심정에 사로잡힌다든지 하는 데서 만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기도가 비록 지금은 응답이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언젠가는 반드시 응답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여 스스로 자위하면서 만족하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에 가지고 나아왔던 여러 가지 고통스러운 문제들을 다 잊어버리고, 마음이 후련한 느낌을 받으면서 기도의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이렇게 간절히 기도한다거나 오래도록 기도한다는 사실에 집착한 사람의 경우, 심하면 이따금씩 황홀경(ecstasy)의 경계에까지 이르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면 스스로 만족히 여깁니다.

이렇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에서 얻는 종교적인 삼매효과(三昧效果)로 만족하는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三昧(삼매) 혹은 三昧境(삼매경)이란, 잡념을 버리고 한 가지 일에만 정신을 집중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기도가 이런 삼매효과를 얻는 데서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오래도록 기도하는 것을 통하여 기독교적인 종교효과(宗敎效果)의 경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응답 여부를 떠나서, 기도 그 자체가 가져오는 정신적이며 심리적인 효과란 것이 실제로 있습니다. 만일 이런 것이 아예 없다면, 이교 세계에서도 기도라는 것이 이렇게 오래도록 계승되어져 내려올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생각을 통일하여 오래도록 기도한 결과, 정신이 어떤 높은 경지에 이르게 되고, 마음이 안정을 얻어 시원하고 후련함을 느낀다고 하는 이런 일이 실제로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기도의 형식을 취하여 자기 자신을 한곳에 집중시키게 되면, 거기에서 얻어지는 심리적이며 정신적인 효과라는 것이 생기게도 됩니다. 그래서 이따금씩 성도들이 오래도록 기도한 끝에 말하기를, '아, 오래도록 기도했더니 속이 다 후련하다!'고 한다거나 혹은 '아, 이제 마음이 좀 평안하다'고 하는 식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도 일조의 종교적인 삼매효과인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이방인과 같이'라고 하셨을 때 지적하신 바가 이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기도할 때에, '반복해서 하는 기도는 응답을 받는다'고 생각한다거나 혹은 '끈질기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실 수밖에 없다'고 하는 심리로 기도를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하면서 그야말로 끈질기게 기도를 반복하는 행위를 단호하게 배척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간절하게 기도하면 응답받는다'고 하는 전제 하에, 같은 내용의 기도를 오늘도 하고 내일도 하고, 이렇게 마치 주문을 외우듯이 계속하는 것을 분명히 꾸짖고 계십니다. 시험에 빠져서 외식으로 기도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기도를 이방인과 같은 심리로 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주술이나 주문의 차원에서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리 만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는 응답이요,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받는다'고 하는 도식에만 사로잡혀 있는 까닭에, 실제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응답을 받지 못하는 기도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는 상당히 힘써서 기도하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기도를 하는 척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열심히 기도합니다. 그런데 정작 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만족해합니다. '언젠가는 들어주시겠지'라고 하면서 만족하는가 하면, '속이 후련하고, 마음이 평안하다'고 하면서 만족해합니다.


교통하는 기도

이런 기도가 이방인의 기도요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기도를 '응답'의 관점에서만 생각하게 되면 이방인의 기도의 오류에 빠지고 맙니다. 기독교의 기도에 '응답'이라는 측면이 아주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실 기도는 응답 받기 위해서도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얻고 싶어서 기도하였다고 할 때, 만일 응답받지 못한다면 그런 기도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앞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기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응답 받지 못하고 순전히 '종교적인 삼매효과'로 끝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도 기도란 응답을 받아야 한다고 하는 전제 하에 응답 받을 수 있는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6절에 보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8절에서는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들이 다 기도에는 응답이 있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물론 이 응답이라는 개념 속에는, 교통(交通) 혹은 교제(交際)의 요소를 전제합니다. 기도란 응답만을 얻기 위해서 하는 것이 전부는 아니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도 기도의 중요한 목적입니다. 그리고 실상 응답도 교통이라고 하는 주제에 속해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할 수 있게 하시고, 여기에 응답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입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더더욱 효과 있게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속의 은혜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낳으셨는데, 이후로는 기도의 관계를 통하여 우리와 늘 교통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교통을 통하여 우리를 돌보시고 먹이시며 부지런히 장성해 나가도록 도우십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통하여 지혜를 얻고 능력을 얻어서 말씀을 통하여 깨닫게 된 새 사람의 태도를 좀더 발전적으로 장성시켜 나갈 수 있게 됩니다. 즉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곳곳에 드러내게 되는 십자가의 군병 노릇을 날이 갈수록 더 효과적으로 수행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라는 것을 일방적으로 내가 하나님께 나의 소원만을 쏟아내는 차원에서 생각하게 되면 이는 대단히 좁은 소견입니다. 일방적으로 내 말만 하고 마치는 것이 이방인의 기도의 특성입니다. 무엇을 따내고 얻어내는 수단 차원에서 기도를 생각하면 이방인의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기도는, 기도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시든지 대부분 응답하신다고 하는 사실에서 찾아지는 것입니다. 기도한 것을 들어주시면 들어주시는 방식으로 응답하시고, 안 들어주시면 왜 안 들어주시는가를 깨닫게 해주시는 방식으로 또한 응답하십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기도를 좀더 자세히 말한다면, '교통이 수반된 응답'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는 '교제를 전제한 응답'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기도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교통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항상 기도의 전제 조건이요, 기도의 반석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내신 의의를 염두에 둘 때에, 기도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과 교통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사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도는 기도할 때에 사실은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교통의 관계라는 것이 없이, 내 쪽에서 일방적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말을 쏘아대는 식으로 전개되는 기도는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아닙니다. 기도에는 교통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이 교통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응답이란 것이 옵니다. 기도가 교통을 수반한 기도로 드려졌다면, 반드시 거기에는 하나님의 응답이 있기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 묵묵무답으로 계시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기도로 간구한 것을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이 때에는 왜 들어주시지 않는가에 대한 대답까지도 들려주심으로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가령 기도를 간절히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대개 말하기를, "무응답도 응답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젠가는 들어주신다. 지금은 들어주지 않으실지라도 언젠가는 들어주신다. 지금은 때가 아닌가 보다. 그러니 때가 되면 응답하실 것이다"라고 하면서 넘어가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사실 기도가 정상적으로 드려진 한에는 하나님께서 묵묵무답으로 계시는 법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께는 무응답으로 스리슬쩍 넘어가는 법이 없는 것입니다. 만일 응답을 아니하시게 되면, 왜 지금 응답을 아니하시는가에 대한 깨달음을 반드시 주심으로, 사실은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응답도 응답이다. 언젠가는 들어주신다"는 식으로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고, "아, 내가 기도를 하다 보니, 사실상 지금까지 내가 아뢴 것을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 것이 옳구나! 내가 열심히 기도하기는 했지만, 잘못 구했구나. 내 생각이 짧았구나. 내가 의미 없는 것을 구했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깨달음을 반드시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통을 수반한 응답 차원에서 기도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에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교통한다고 하는 사실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이방인들의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신 후, 바로 이어서 올바른 기도의 예를 하나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9절 이하에서부터 나타나고 있는 '주기도문'입니다. 이 주기도문의 특징은, '교통' 혹은 '교제'의 특성이 두드러진다는 데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놓고 혹은 이것을 위하여 하나님께 여쭙는 것이요, 필요한 것을 요청하기도 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교통이 수반된 기도를 하려면 첫째, 외식하는 기도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하고, 둘째, 이방인의 기도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응답 받는 기도의 조건

지금 예수님은 우리가 응답 받는 기도생활을 할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여기서 강조점은 '응답'이라기 보다는 '올바른 기도'입니다. 올바른 기도가 전제되어야 응답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거니와 기도가 응답되려면 조건이 맞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때에는 조건이 맞아야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가령 자신이 경건한 사람인 척 내세우기 위해서 기도를 외식의 수단으로 사용하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겠습니까? 기도를 이방인의 경우처럼 주술이나, 주문처럼 사용한다거나 혹은 기독교적 삼매효과를 누리는 것으로 만족하는 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겠습니까? 이런 식의 기도에는 응답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양심적으로 보거나 논리적으로 보아도 도무지 응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외식하는 기도를 하는 한에는, 응답을 기대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이미 자신의 양심에서부터 알려지는 까닭에 응답을 기대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신의 경건성을 남들에게 과시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으니, 무슨 염치로 하나님의 응답이란 것을 기대하겠습니까? 이런 경우 스스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미 자기 상을 받은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주신 상이 아니고, 스스로 상을 누린 것입니다. 기도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과시했으니, 사람들이 자기를 가리켜 '참 경건한 사람이다'라고 평가해 주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기도를 유창하게 하여 자신의 경건성을 과시했으니, 이 역시 사람들로부터 '참 경건한 사람이다'라고 하는 평을 받았을 것입니다. 아니 평을 받았던 안 받았던, 자기가 내심 원하는 바를 했으니, 자기 자신이 자기 스스로에게 상을 베푼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식의 저급한 외식적 기도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응답까지 기대한다는 것은, 도무지 염치가 없는 태도입니다.

문제는 실제로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한 사람들의 경우입니다. 일단 기도했다는 사실이 있는데, 응답이 없는 사람들의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는 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런 다음에 8절에서 말씀하실 때,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부분을 좀더 자세히 분석해 보면, 응답 받는 기도생활의 첫째 조건은 이방인과 같이 기도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고, 이렇게 중언부언하지 않으려면 하나님께 대한 인식을 명확하게 가져야 하는데, 곧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이미 우리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를 먼저 아시는 분이라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에 이런 사실을 마음에 깊이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되기 십상입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를 열심히 한 후, 그야말로 간절히 기도한 후에 이렇게 말하는 것을 봅니다. 즉 "내가 하나님께 이렇게까지 자세하고도 간절하게, 아주 간절하게 아뢰었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소위 말하는 바, '떼를 쓰는 기도'의 형태들이 이런 것인데, 이렇게 억지를 부리듯이 일방적으로 기도해 놓고는, 그렇게 억지를 낸 사실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수밖에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바로 이런 것이 미신적인 기도의 전형입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열렬하게 기도한 사실, 자기가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체적이며 자세히 직고한 사실, 그리고 이런 기도를 한번이나 서너 번 드린 것이 아니라, 몇 십번이 될 정도로 거듭거듭 드린 사실, 바로 이런 사실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응답을 끌어내는 효력 내지는 일종의 공로로 생각하게 되면, 바로 이것이 미신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많이 기도했고, 내가 간절히 기도했으니,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태도가 바로 미신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기도란 이쪽에서 무조건 일방적으로 해대는 데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르게 기도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하려면 이방인과 같이 하는 중언부언하는 기도의 태도를 말끔히 벗어버려야 합니다. '간절은 곧 응답이다'는 식의 도식을 버려야 합니다. '떼를 쓰듯이 매달리면 응답하실 것이다'고 하는 기계적인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기도란 하나님께 자기의 소원을 말로써 아뢰는 것이기는 하지만, 무턱대고 말을 많이 하고, 홍수처럼 아무렇게나 쏟아내는 것이어서는 무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먼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미리 아는 분이십니다. 마치 하나님은 아무 것도 모르시는 분인 것처럼 생각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일깨워 드리려는 것처럼, 하나님께 정보를 드리려는 듯이 미주알고주알 쏟아내는 식으로 기도하면 안 됩니다.

지금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는 까닭에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앞에서 지적하신 바, 중언부언하는 태도와 맞서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이므로 잘못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얻으려면 구하고 아뢰어야 합니다. 구하지 않는 자는 얻지 못합니다. 야고보서 4장 2절 하반절에 보면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구해야만 얻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미리 알고 계시지만, 그러나 구하지 않으면 주지 아니하십니다. 구할 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구하는 데에는 법칙이 있는 것이어서 그냥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는 식으로 구해서는 안 됩니다. 전적으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에 합당한 차원에서 구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자신이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차지하는 의의 혹은 의미나 가치가 이렇고 저렇다 하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는 데서 아뢰는 간구여야 한다 말입니다. 자신이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하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셔야만 되는 일이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필요를 느끼는 데서 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정확하게 인식해야지 두루뭉실하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기도자가 기도하려 할 때에는 성급하게 말부터 쏟아내는 것을 멈추고, 먼저 조용히 생각부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을 구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려고 하는 기도의 내용이, 지금 현재 자신이 담당해 나가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한 부분과 현실적으로 어떻게 상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뒷받침 되지 아니한 기도는 이방인의 기도와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의 육체의 부귀나 쾌락을 구하는 것이면, 그러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먼저 자신의 마음을 살펴야 할 부분이 이것입니다. 신앙 양심적으로 여기에 걸리면, 다시 생각하는 것이 지혜롭지, 고집을 앞세워 돌이키지 않고 억지를 부리면서 기도에 제아무리 힘을 쓴다 한들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전제 하에 성경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라. 믿음으로 구한 것은 받은 줄로 알라"고 가르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15)고도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을 구한다고 하는 이 원리를 마음에 깊이 명심하는 것은 참으로 지혜롭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린 기도를 생각해 봅시다.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 예수님도 순간적으로 당신의 고통을 아뢰었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여기서 '잔'이란 예수님께서 감당하시기로 되어 있는 십자가의 고통스러운 형벌과 죽음입니다. 바로 눈 앞에 이런 엄청난 고통이 있다는 것을 아셨을 때 얼마나 무서우셨겠습니까? 그래서 일순간 그런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러나 이내 돌이키셨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런 다음 제자들에게 갔다 오신 후 드리신 두번째 기도에서는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단호하게 기도를 드리셨습니다(마 26:42). 이후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사히 십자가의 사역을 감당하셨고, 이후 부활하시는 것을 통하여 오늘날 우리를 위한 구원자가 능히 되신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에서 간구와 응답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의'와 일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새 사람을 입어나가는 것이 지지부진하고, 그리스도의 분량의 충만한 데까지 나아가는 장성함이 더디게 되면, 생각이 부족한 상태에서 기도하는 일이 얼마든지 있게 됩니다. 보통 이런 경우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아예 교통까지 아니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실하게 기도하는 자에게는 교통으로 응답해 주셔서 '아, 이것이 아니고, 저것이구나, 내가 지금까지 부족한 방향 혹은 잘못된 것을 구했구나,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이렇게 구해야겠구나!' 하는 깨달음을 갖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부터는 좀더 하나님의 나라의 현실에 맞는 것을 구하게 하시는 것이며, 그렇게 구한 데 대해 응답하시는 것이고, 이때에도 당신의 그 높고 깊으신 지혜에 근거하여 가장 합당한 방식으로 응답하시기 마련이고, 그렇게 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도 해주십니다.

중보 기도, 합심기도도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어야지 인위적으로 이런 상황을 만들면 안되겠습니다. 마치 기도해 주는 사람을 많이 모으면 모을수록 그 기도가 잘 응답될 것이라고 보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엘리야와 갈멜산에서 대결했던 바알 선지자들의 기도가 이런 사고방식에서 되어진 아주 전형적인 우상 숭배자들의 기도인 것을 보게 됩니다(왕상 18장). 요즈음도 일부 성도들이 이렇게 잘못 생각하기 때문에 연말 연초가 되면 자신의 기도의 내용을 적은 종이를 촛불에 태워서 그 재를 하늘로 올려보내는 정말 우스꽝스러운 행동도 하게 됩니다.

기도가 죄로 오염되지 않으려면, 기도에 대한 분명한 정의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기도에 대한 정의가 훼손되는 까닭은 성경이 기도에 대해서 언급하기 이전부터 이미 세상은 기도를 알고 있었다는 데 있습니다. 복음이 역사의 무대로 데뷔하기 이전부터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에게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세속적인 개념을 복음이 가르치는 기도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까닭에 온갖 혼란이 야기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와 세상 사람들의 기도에서, 둘 사이를 명확하게 갈라놓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기독교의 기도에는 감사의 고백이 필연적으로 내포되어 있다는 데서 찾아집니다. 이런 까닭에 개혁파 교회는 기도에 있어서의 감사의 성격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즉 기도의 특성을 '간구와 응답'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감사와 고백'에서 찾는다 말입니다. 가령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116문에 보면, "왜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해야 합니까?" 라고 묻고 대답하기를,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감사의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요, 또 하나님께서는 쉬지 아니하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을 구하고, 그에 대한 감사를 돌리는 방법을 통해서만이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화란의 유명한 칼빈주의 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가 기도의 정체성을 분석한 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구약에서 모세의 기도인 시편 90편을 대표적으로 취하여, 첫째, '간구와 고백'으로,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이니까 주의 종들을 긍휼히 여기소서'를, 둘째, '감사'로,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를, 셋째, '찬양'으로,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를, 넷째, '토로'로,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분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로 분석했습니다.

신약에서는 주님의 대제사장의 기도에서, 첫째, '간구와 고백'으로,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서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와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로, 둘째, '감사'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로, 셋째, '찬양'으로,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삽나이다'로, 넷째, '토로'로,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와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분석했습니다.

이렇게 살펴볼 때에, 과연 오늘날 우리의 기도는 뭔가 획기적인 선을 긋는 차원에서의 변화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게 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지금까지 기도자가 가져야 할 바른 태도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첫째, 외식하는 기도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진실하고 간절하게 교통하는 일 이외의 것을 염두에 두고 기도하게 되면 외식하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둘째,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말을 많이 하고, 간절하게 하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을 설득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자기 자신이 간절히 기도하고 힘써서 기도한 사실, 바로 여기에 근거하여 기도가 응답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제아무리 40일 금식하면서까지 애절하게 기도하고, 목이 쉬어 터지도록 부르짖음으로 간절하게 기도한다 해도, 그렇게 기도에 힘쓴 사실 그 자체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일과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셋째, 기도에는 반드시 교통의 요소가 수반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 쪽에서 일방적으로 기도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듣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되려면 기도의 내용이나 목적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물론 이 역시 막연하거나 추상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구체적이며 정확하게 '이 일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라고 명확하게 이해하고 확신하는 차원의 하나님의 나라 일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적절한 방식으로 응답하실 것입니다. 만일 응답하시지 않는다면, 교통해 주시는 것을 통하여 그 이유를 반드시 깨닫게 해주십니다. 이렇게 훈련해 나가노라면 마침내 우리의 기도생활은 경지에 올라서게 될 것입니다. 곧 기도다운 기도생활에 익숙해질 것이고, 늘 하나님과 교통하는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환경이 바뀔 때마다 영향을 받아서 우리의 인생길이 유리 방황하는 따위의 일은 일어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이와 같은 기도의 바른 수준과 자세에 올라설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장수민, '하나님의 큰 일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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