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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로보암의 종교에서 자의적 숭배신앙의 전형을 봄

작성자이천우|작성시간03.02.12|조회수294 목록 댓글 0
여로보암의 종교
(왕상12:25-33)


1.들어가면서

다윗과 솔로몬 통치 초기까지, 엄밀하게 말해서 통일 이스라엘이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 왕국으로 나눠지기 전까지(왕상11장) 통일 이스라엘은 명실공히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시는 신정적 왕국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를 대 내외에 가장 극명하게 천명했던 영광스러운 태평성대의 시기였습니다. 당시 역사적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 그 자체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통치의 근간인 모세 언약의 내용(율법)이 본래적 목적대로 막힘 없이 시행되고 있었음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정통치는 말씀의 능력이 권세 있게 발휘되고 시행되는 것을 통해 확증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죽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즉위하면서부터 이스라엘은 국론이 분열하는 것으로 인해 마침내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나뉘게 됩니다. 자연히 신정적 왕국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의 모습도 점차 쇠락하기에 이릅니다. 이는 처음부터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로서 신정적 왕국을 계시하기 위한 도구와 방편으로 사용되고 있었음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실체가 아니었다는 지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은 신적 기원이라는 특성상 어떤 이유로라도 중간에서 변개 되거나 파기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민23:19). 그러나 지금 통일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리는 비극적 운명을 맞는 것을 통해 처음부터 이스라엘이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로서의 종말론적 신정왕국이 아니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련의 진행과정을 통해 언약계시의 점진성과 점진성에 포함된 모형과 실체로서의 계시의 이중성에 대해 간과해서는 아니 될 줄 압니다. 이런 사실은 역사적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최종적으로 성취될 새 이스라엘인 교회 안에서 그림자요 예표로서의 모형적인 구약의 하나님 나라로서의 계시적 역할을 마감하게 될 것임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 안에서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된 신약의 교회는 하나님의 전 구속사적 경륜에 있어서 계시의 꽃이며 면류관인 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창세 전부터 만물을 주님의 몸 된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통일되게 하실 것을 작정하시고 때가 차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를 세상 가운데 계시하신 것입니다(엡3:9-11).

이제 남북으로 분열된 이스라엘은 남 유다의 경우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에 의해 다윗 언약(삼하7:11-17)은 모형적 계시로서 다윗 왕조를 여전히 계승해 나가게 됩니다. 신적 언약의 특성인 주권성과 은혜성, 불변성과 실현성의 원리에 입각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 결국은 참 다윗 왕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으로 인해 종말론적 성취를 보게 될 것입니다.

반면 북 이스라엘 왕조는 다윗 언약과는 무관하게 르호보암에게 반기를 든 열 지파에 의해 추대된 여로보암을 초대 왕으로 세워 남 유다와는 같은 동족임에도 불구하고 대적관계를 이루는 가운데 분열된 두 개의 왕국으로 공존하기에 이릅니다. 이때 여로보암은 북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즉위하자마자 반역으로 잡게 된 권력을 장기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을 갖고 일련의 종교개혁을 시도합니다. 그 내용이 '여로보암의 길과 죄'로 흔히 명명되고 있는 저 유명한 '여로보암 종교'(왕상12:25-33)입니다. 그의 이런 종교개혁은 이후 이스라엘 열왕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올무가 돼 마침내 전 이스라엘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머리에 쌓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기에 이릅니다. 후에 그 결국은 앗수르에 의한 국가적인 멸망을 자초하게 됩니다. 무슨 일에든지 바르게 시작하는 일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신정왕국에 있어서 왕의 신분과 지위는 백성들 전체를 대표하는 사실로 인해 왕의 타락은 곧바로 백성들의 타락으로 연결되기 마련입니다.

여로보암이 실시한 일단의 종교개혁 속에 나타난 특징적 성격이 바로 다름 아닌 유사성의 문제입니다. 유사성이란 겉으로 보기에는 좀처럼 차이점을 발견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지만 내용적으로는 전혀 다른 두 종류를 비교해서 일컫는 말입니다. 당초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으로 말미암는 북 이스라엘의 건국을 허락하심으로 남 유다의 불순종을 책망해 영적 회복을 시도하려 하셨습니다(왕상11;30-36). 그러나 사단은 여로보암의 어두운 인격을 오히려 역이용 악용하기에 이릅니다. 여로보암을 도구 삼아 여호와 중심의 구약종교를 변질시킴으로 전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진노와 멸망으로 유도함으로 당초 에덴에서부터 시작해 노아 시대를 거쳐 애굽의 바로 시대를 통해 전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한결 같이 시도해 왔었던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 했던 것입니다. 곧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 계보의 단절을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언약적 구속사 진행의 통시적 관점을 가지고 여로보암의 개인적 종교개혁 속에 담긴 본래적 사단의 저의를 파악해야 할 줄 압니다.

왜냐하면 창3:15의 여자의 후손 언약이 선포된 이후 세상 역사의 본질은 결국 하나님의 언약적 구속사의 성취라는 독특한 종말론적 성격을 띠고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의 적대적 투쟁과 갈등은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 양자간의 싸움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사단과 그의 졸개들이 불못에 처해지기까지는 역사 속에서 다양한 모습을 통해 중단 없이 지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로보암의 종교 속에 나타난 유사성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2.펼치면서

여로보암이 실시한 일단의 종교개혁은 장기집권을 위한 정치적 목적을 실현시키기 위해 종교를 방편 삼은 전형적인 경우입니다. 외관상 여로보암의 종교에는 모세로 말미암는 시내산 언약에 근거해 출발 된 구약종교의 모습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봅니다. 다시 말해 거기에는 신앙의 대상으로 여전히 하나님께서 예배의 중심에 서 계십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대신하고 있는 산당에서는 제사장이 일체의 제의에 수종들고 있음을 봅니다. 또한 초막절을 연례적으로 지켜 행하도록 결정한 사실을 보게 됩니다. 외견상 다윗과 솔로몬 치세 하에서 시행했던 예루살렘 성전예배와 비교해서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내면을 들여다보면 거기에 구약종교의 실질과는 전혀 다른 허상(虛像)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있으나 거기에는 사람의 손으로 만든 황금 송아지가 여호와를 대신하고 있음을 봅니다. 제사장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으나 저들은 율법으로 제한하고 있는 레위인이 아닌 보통사람들이었습니다. 자원하는 자를 아무나 제사장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또한 초막절을 지켰으나 율법에 명시된 날짜(7월 15일)가 아니었습니다. 8월 15일로 변경해서 지켰던 것입니다. 여로보암 종교의 성격이 유사성인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겉과 속이 다른 이중성의 문제 말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예배하며 신앙하는 일에 있어서 유사성의 문제는 하나님의 본의를 이탈해 여호와 신앙을 이기적 목적으로 수단화시킴으로 사실상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상 숭배적 신앙관에 성립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사이비 구약종교로서 여로보암 종교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이런 유사성을 각별히 경계해야 하는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하나님의 도구화(28-30절)

본 절은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의 북쪽 단과 남쪽 벧엘에 각각 예루살렘 성전을 모방해 산당을 짓고 황금 송아지 두 마리를 만들어 안치한 후에 이를 여호와로 대치함으로 십계명의 제일, 제이, 제삼 계명을 동시적으로 어기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황금 송아지로 대체해 섬기려는 이러한 우상 숭배적 신앙의 발상은 멀리 출애굽 당시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출애굽 일 세대는 시내산으로부터 모세가 더디 내려옴을 기다리지 못하고 황금 송아지 상을 만들어 이를 여호와로 대체해 섬겼던 사실이 있었습니다(출32:1-6). 이는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비록 하나님의 율법을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지킬 수 없음으로 인해 끊임없이 하나님을 대적하며 불순종하는 방향에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부패한 자임을 고발하는 계시적 사건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진정한 순종은 율법에 대한 자의적 순종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적나라하게 시사하는 내용입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3:24).

하나님의 형상화 사건을 통해 여로보암이 의도했던 바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과 권좌의 장기집권을 꾀하기 위해 하나님을 이익의 재료로 삼았다는 사실입니다(왕상12:27). 개인의 이기적 목적과 세속적인 성공을 위해 하나님을 형상화시켜 도구 삼은 사실 말입니다. 이는 권력에 대한 탐심의 발로에 다름 아니며, 결국 하나님을 우상과도 같이 섬기는 경우의 극치를 보여주는 실례입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 또한 과거 출애굽 역사 속에서 그들의 조상들이 저지른 우상 숭배적 신앙으로 말미암는 시내산 언약의 배반을 반복해서 자행하기에 이릅니다. 실로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해서(렘17:9) 스스로 하나님을 찾거나 순종하는 일에 있어서 전적으로 무능할 뿐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입니다(롬3:10-12).

오늘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심의 성격이 자기 중심적인 사실로 인해 인간의 행복과 안녕에 집중돼 있으며, 방향성에 있어서 세속적 목적달성을 위해 성공과 출세 지향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면 심각히 자신의 신앙의 정체성에 대해 진단해 봐야 할 줄 압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은 하나님 중심적이며 천상 지향적으로 계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전12:13, 고전10:31, 마6:33). 물론 기복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로되 그것이 결코 우상 숭배처럼 기독교 신앙의 목적으로 제시되고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생명으로 접촉된 자들이 일생 빚진 자와 무익한 종의 심정을 가지고 감사함으로 반응하는 데서 비로소 성립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전인격적인 수납과 이에 대한 반응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참된 기독교 신앙의 성립은 절대로 불가능 할 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개인의 사사로운 동기와 목적달성을 위한 도구로 삼으려는 발상은 처음부터 우상 숭배적 신앙에 성립되는 것으로 인해 올바른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 아닙니다. 유사성의 가장 위험한 요소는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사유화시키려는 발상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우리를 넘어지게 하려는 사단의 계략일 뿐입니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31절, 왕상13:33-34)

첫 단추를 잘못 채우면 이후의 모든 단추도 잘못 채우게 될 뿐입니다. 하나님을 형상화시켜 개인의 정치적 입지와 목적을 위해 도구를 삼은 여로보암은 성전제사와 관련된 제반 부분에 있어서도 불의와 불법을 자행하기에 이릅니다. 열왕기 기자는 본 절에서 이 부분을 언급하면서 "저가 또 산당을 짓고 레위 자손이 아닌 보통 백성으로 누구든지 자원하면 그 사람으로 제사장을 삼았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율법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처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레위인을 통해서만 성전의 제반 일을 맡게 했으며 더욱이 대제사장의 직분은 오직 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그의 후손들을 통해서만 담당하도록 제한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이를 무시한 채, 아무라도 자원하기만 하면 제사장 직분에 봉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엄위하신 율법을 개인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 임의대로 변개해 적용시켰던 것입니다. 결국 이런 행동은 하나님을 정면으로 무시하는 처사로서 곧 하나님을 만홀이 여기는 범죄행위가 성립됩니다.

이런 사실의 현대적 적용은 이렇습니다. 교회의 물리적 부흥과 성장의 욕심을 앞세운 나머지 한 영혼의 신앙의 진위성 여부를 말씀과 행동을 통해 세밀하게 관찰해서 검증하고 진단하는 충분한 기간이 없이 '일정한 형식'을 통해 세례문답을 하고 이에 동의하면 이내 교인으로 쉽게 받아들인다는 사실입니다. 더구나 이런 식으로 정식 세례교인이 된 사람이 세상적으로 많은 학식과 부와 명예를 더불어 갖고 있는 소위 엘리트 교인일 경우에는 신앙 안에서의 지속적인 성장과 성숙에 대한 깊은 고려와 분별없이 교회의 현실적인 필요성에 의해 대부분 즉각적으로 교회의 중직에 선임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과정에서 형식적으로는 당회 내지 교회의 중직회의를 거치기 마련이지만 목회자의 마음가짐 여부가 결정권을 행사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기정 사실로 작용합니다. 소위 개척교회일수록 이런 폐해는 다반사로 일어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만 않습니다. 이런 결정이 당장에는 일말의 효과를 발휘하는 듯 합니다. 그러나 교회란 사람의 뜻을 좇아 세속적인 방식으로 운영되는 세상의 어느 유사기관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지상적 임재 방식으로 존재하는 독특하고도 탁월한 천상적 기관이며 공동체이기에 오직 천상적 가치관과 말씀의 법도를 통해서만 경영돼야 하며, 이럴 때만 구원의 기관으로서 그 본래적 가치와 사명과 존재이유가 성립될 뿐입니다.

따라서 진리 안에서 풍성히 자라감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아 갈 뿐 아니라, 분명한 은사의 발휘가 객관적으로 확인되는 것을 통해 비로소 직분이 수여돼야 함이 마땅한 도리인 것입니다. 성경이 교회의 직분자를 세울 때 '새로 입교한 자'를 경계시키며(딤전3:6) '외인에게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로 제한시키는 배경(딤전3:7)이 이런 위험성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차원에서입니다. 때문에 심지어는 '선의적으로 시험해 봄'(딤전3:10)으로써 책망할 것이 있는지의 여부를 심각히 고려할 것을 당부하고 있기까지 합니다. 이런 식으로 교회의 직분자를 세우는 일은 간단하고 단순하게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천상적 기관으로서 교회의 거룩성과 순결성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된 지체로서의 진위여부와 은사의 객관적 확증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사람적 품격 함양의 여부가 직분자를 세우는 절대적인 기준과 지침으로 참고돼야 할 것입니다. 세상적인 신분과 업적과 기준은 하나님 나라로서의 교회공동체를 이루는 일에 결코 결정적인 근거로 작용할 수 없음이 성경의 지적입니다. 고전1:26-28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 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복음은 세상적인 온갖 불균형과 불평등을 평균케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실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외적 성장이라는 현실적인 필요성과 편의성만을 앞세워 당사자의 영적 상태에 대한 깊은 성찰과 세심한 주의를 기울임이 없이 성급하게 세례를 베풀고 성도로 받아들일 뿐 아니라, 단기간 내에 교회의 직분자로 선임하게 될 때, 뒤늦게 확인된 부족과 결핍으로 인해 교회 안에 심각한 불화와 분란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이 현실입니다.

이 시대는 신앙주의가 만연하고 있는 것이 복음과 관련한 시대적 특징입니다. 다시 말해 복음에 대한 지적동의와 입술의 고백만으로 구원을 조건적으로 수여하는 행위 말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성취된 '하나님의 큰 일'로서의 구원의 은혜가 하나님의 택자들에게 무조건적이고 불가항력적으로 베풀어짐으로서 '믿어지는 신앙고백'을 자의적 신앙고백으로 오해하고 있는 데서 나와진 왜곡된 관점입니다.

따라서 신앙주의적 관점에서 믿음을 고백하는 주체는 언제나 복음을 전해들은 당사자의 독립된 의지가 차지하게 됩니다. 이때 이런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공식과도 같은 성경 구절이 롬10:9-10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그러나 본 절의 말씀은 이런 식으로 구원이 믿음을 조건으로 해서 단계적으로 임한 다는 사실을 공식화시켜 증거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유대인들, 특별히 종교지도자들이 복음의 본의를 자의적으로 오해해서 해석한 나머지 율법의 조항들을 문자적으로 철저히 실천하는 것을 통해 구원을 행위에 근거해 조건적으로 받게 되는 줄로 잘못 알고 왜곡되게 가르치는 것을 교정시키는 가운데, 참 된 구원은 율법의 완성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속죄사역과 이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의 도리를 전인격적으로 수납하게 되는 것을 통해 은혜로 주어지는 것임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택자로서 내 안에서 절대 타자에 의해 불가항력적으로 수여되는 것을 통해 자연스럽게 믿어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원에 이르는 신앙은 내가 '믿는 신앙'이 아니라, 외부의 절대타자에 의한 '믿어지는 신앙'인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과 전인격이 총체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했다고 성경은 고발하고 있습니다(엡2:1, 렘17:9, 창6:5).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의 자력으로 하나님을 더듬어 찾거나 복음에 반응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일에 집중합니다(롬1:21-23). 따라서 죄와 허물로 죽었던 본래적 영혼(하나님을 인식하고 교제하는 기능)의 '거듭남'이 우선돼야 합니다(요3:3). 이를 주관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복음에 대한 믿음의 고백은 거듭난 새 사람적 새 인격이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에 정상적으로 반응하게 됨으로 그 동안 죄로 인해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이로 인해 영적 교제 또한 회복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과 새로운 영적 관계가 재정립된 사람은 이후 그의 삶을 하나님과 원수 되게 했던 죄를 혐오해서 멀리하는 가운데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새 성품의 삶을 전개시켜 나가는 것을 통해 자신이 구원받은 새사람이요 하나님의 백성인 사실을 확증시켜 나가게 됩니다.

신앙주의의 폐해는 결과적으로 교회 내에 자의적 숭배신앙자의 만연을 초래하기에 이릅니다. 이런 사실은 교회 안에 많은 신자를 불러들임으로 교회의 외적 성장과 물량적 비대함을 키우는 일에 일조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복음의 본의에 깊이 접촉되지 못함으로 인해 야기된 자의적 숭배신앙은 자연히 타락한 본성의 충동으로 말미암는 종교적 열심의 방식을 통해 기복주의적 신앙을 배태하게 되는 결과에 이르게 되는 것이 기정 사실입니다. 이런 식으로 처음부터 복음으로 말미암아 생성돼야 할 여호와 중심의 신앙이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기복주의적 성향을 띠고 나타나게 될 때 이는 하나님의 도구화로 인한 우상 숭배적 신앙에 다름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서 열심을 내면 낼수록 이는 지식을 좇아 행하는 하나님의 열심과는 무관하게 될 뿐 아니라(롬10:2-3) 보다 적극적으로 불법과 불복종의 신앙을 야기 시킬 뿐입니다. 이런 결국은 멸망에 이를 뿐임을 성경은 경고합니다(마7:21-23, 잠16:25). 이런 이유로 해서 자의적 숭배신앙은 이 시대에 우리가 경계해야 할 유사기독교의 전형이며 망령된 신앙행위의 모범인 것입니다.

자의적 해석(32-33절)

여로보암은 개인적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도구화와 자의적 숭배신앙을 유도했을 뿐 아니라 성전 절기를 임의로 변경해서 지킬 것을 요구함으로써 신정왕국으로서 전(全)이스라엘의 정치적 종교적 통일성을 와해시키려는 의도 속에 북이스라엘을 철저히 사유화시키며 우상화시키려고 혈안이 돼 있었습니다. 이런 불의하고 불법적인 종교개혁의 시행과정에서 여로보암에게 속했던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이 남 유다의 르호보암에게 귀속했으며, 이들 외에도 여호와를 신실히 섬기던 일단의 무리들이 레위인들을 좇아서 남쪽 유다 행에 가담했습니다(대하11:13-17). 이런 사실은 어느 시대 건 아무리 진리가 왜곡되고 종교가 타락해서 우상 숭배적 신앙이 만연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신실히 섬기는 남은 자들은 여전히 존재해서 하나님의 각별하신 인도와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웅변으로 보여주는 실례입니다(왕상19:18, 롬11:4-5).

그렇습니다. 율법에 명시된 절기의 날짜(레23:34)를 변경함은 말씀의 자의적 해석과 편의적 적용에 다름 아닙니다. 비록 북쪽과 남쪽의 계절의 차이로 인해 수확의 시기에 다소 차이가 있을지라도 신정왕국으로서의 전(全)이스라엘은 오직 시내산 언약에 명기된 율법에 근거해서 절기를 지킴으로 신앙의 통일성과 하나님 나라로서의 정체성을 부단히 보존해 나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이미 정권욕에 눈이 먼 나머지 정치적 야심을 지속적으로 보존해 나가기 위해 정통 구약종교를 정치의 시녀로 삼기 위해 우상화작업을 시도했던 것입니다. 절기의 변경은 이런 식으로 구약종교를 말살하려는 고도의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권모술수이며 신정왕국을 해치려는 사단적 계략인 것입니다. 이후 북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여로보암의 종교개혁을 일컬어 '여로보암의 죄와 길'로 표현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혐오하시는 범죄의 악의적 모범과 전형으로 지적하고 있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왕상14;16, 15:34).

이런 일은 역사 속에서 항상 있어 왔고 앞으로도 지속될 것입니다. 말씀의 자의적 해석과 왜곡 및 임의적용은 성경 역사 속에서 사단이 즐겨 사용하던 미혹의 고전적 수법입니다. 그 기원은 창세 초 에덴에서부터입니다. 아담에게 금령법으로 주신 선악과 행위언약을 하와가 불순종하게 되는 과정에서 사단은 말씀의 왜곡과 자의적 적용이라는 수법을 통해 접근했던 것입니다(창3:1-5). 이 사건 이후 인류의 역사 속에서 이런 수법은 속이는 자의 대명사로 불리는 사단의 전유물이 되어 하나님의 백성들은 물론 심지어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까지도 동일한 방식으로 접근해 시험했던 것입니다(마4:5-7).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시험을 말씀에 순종하심으로 승리로 이끄시는 것을 통해 첫째 아담 안에서 불순종으로 범죄 해 죽음에 처한 인류를 당신님의 순종 안에서 의인 되게 해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롬5:18-19).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이 시대의 기독교 신앙의 문제점은 하나님의 도구화와 자의적 신앙으로 말미암는 우상 숭배적 신앙화의 문제뿐만이 아닙니다. 나아가 이런 사실을 함의하고 있는 데서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말씀의 왜곡과 편의적 적용의 문제는 더욱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는 여호와 중심의 계시 의존적 신앙이 삶의 궁극적 목적이 아닌 수단과 방편으로 재해석되는 데서부터 나와진 폐해입니다. 물량주의의 만연과 개인주의의 팽배는 신앙을 더 이상 목적으로 삼지를 않습니다. 개인적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교양이나 종교적 문화활동정도로 폄하해 이해합니다. 이는 이 시대에 하나님에 대한 각별한 인식과 경외감이 철저히 실종됐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신 물질문명의 발달과 첨단과학의 진보 및 생명공학의 눈부신 발전은 인간의 지혜와 지식의 무한한 가능성과 능력을 적극적으로 신뢰하고 예찬하는 것을 통해 상대적으로 신의 존재와 간섭은 설자리를 잃어 가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다시 말해 피조물로서 인간의 본분이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는 데서 찾아진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전12:13)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명제는 오늘날 화석화 돼버린 사문서(死文書)에 불과할 뿐입니다. 경건마저도 인간을 위한 이익의 재료로 삼는 것(딤전6;5)이 이 시대의 보편적인 풍조가 돼버린 지 이미 오래입니다.

이제 성경의 자의적 해석과 이익의 재료로 삼는 편의적 적용과 관련해 헌금의 경우를 예로 들어봅니다. 헌금은 농경사회에서 농작물을 제물로 드리는 경우와 방불합니다. 이 시대의 생명적 활동의 대가는 대부분 화폐로 대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일년의 농사를 마치고 수확한 열매와 농작물을 제물로 바침은 모든 생명과 생명적 활동의 대가가 하나님의 절대보호와 보존과 인도와 통치로 말미암은 결과임을 감사함으로 표현해 내는 구원론적 근거로서의 예배적 활동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형태의 기복적 요소가 개입해 있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날 성도가 헌금을 드리는 이유는 동일한 구속사적 원리와 원칙 하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여전히 선하신 뜻 가운데서 우리의 생명을 보존해 주심으로 일체의 생명적 활동을 전개시켜 나갈 수 있음에 대해 감사의 표를 나타내는 예배적 행위로서, 모든 삶의 전 내용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음임을 절대적으로 인정하는 바, 구원의 연장선상에서 표현해 내는 신앙 고백적 행위에 다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십일조를 비롯한 여러 명목으로 헌금이 드려질 때 은연중에 보상심리가 발동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입니다. 다시 말해 드리는 것에 비례해서 돌아 올 대가를 기대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목회자들에 설교 속에서 간단(間斷)없이 강조되는 것이 일반입니다. 특별히 성전건축이라는 기상천외(?)한 미명하에서 가장 극명하게 강조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 때 천편일률적으로 거론되는 구절이 고후9:6과 말3;10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고후9:6).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3:10).

전자의 경우는 고후9장 전체의 문맥 속에서 해석해야 하는 바, 곧 '연보란 성도를 섬기는 구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랑의 마음을 갖고 미리미리 준비하는 가운데 보다 풍성한 것으로 드릴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연보 또한 구원론적 근거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공유성과 관련해서 말입니다. 경제적 불균형으로 인해 구원의 실질을 공유하지 못하는 것은 과거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나 신약의 교회공동체 속에서 동일하게 공동의 책임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입니다. 때문에 면제년과 희년제도를 통해 구원의 실질을 지속적으로 공유하며 체험할 것을 제도적 장치로 보장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신약의 교회공동체 속에서 연보를 구제에 사용함으로 교회 내 절대 극빈자들의 경제적 필요를 공급해 주는 것을 통해 여전히 구원의 공유성을 보장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의 강림과 복음사역으로 인해 예루살렘 교회가 설립될 때 믿는 자들이 모든 물건을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공유함으로써 평균케 하는 원리가 크게 역사했던 기록은 구약적 희년제도가 성령의 역사로 인해 온전히 회복된 실질을 일시적으로나마 보여주는 계시적 사건인 것입니다(행2:43-47). 이를 통해 사도행전의 저자는 신약의 교회가 공동체적으로 누리는 구원의 방식이 어떻게 표출돼야 하는지를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행5장에 기록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경우는 바로 이런 구원의 공유성이 훼방을 받을 때 나타나는 하나님의 진노를 명백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구원은 교회공동체적으로 소유하고 누리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일부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를 이루는 구원인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를 떠나서 구원의 진정한 의미는 사라집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전 구속의 경륜의 꽃이며 면류관인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생명으로 살아가는 신앙공동체이며 천상적 생명공동체입니다. 때문에 본 절(고후9:6) 어디에도 이 말씀의 의미가 드리는 분량에 비례해서 돌아올 하나님의 축복을 보증하고 담보한다는 요지는 찾을 수 없습니다.

후자(말3:10)의 경우 이렇게 말씀하실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심정을 바르게 분별할 줄 아는 통찰력을 간과하면 단순히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통해 십일조가 물질적 축복의 가장 확실한 보증으로 여기기가 십상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 또한 십일조의 여부를 축복의 대가로 약속하신 내용이 아닙니다. 더구나 십일조의 현대적 적용에 있어서는 단순논리로 해석해 의무적으로 책임을 지게 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철저히 자율적이고 자의적 의사에 의해 행동해야 할 부분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그돌라 오멜과 그의 연합군과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고 돌아오던 중 살렘 왕 멜기세덱을 만나 그의 승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에서 비롯된 사실을 전해 듣고는 그에게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자원해서 감사함으로 드린 경우와 방불합니다(창14:17-20).

그렇습니다. 신약시대의 십일조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매일의 삶이 하나님의 섭리적 간섭과 인도하심의 연고로 진행된다는 섭리 의존적 신앙의 관점에서 자율적으로 자원해서 드리는 최소한의 감사의 예물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더구나 이 시대에 구약적 성전의 모형적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체로 성취된 사실을 감안하면(요2:19-21, 고전3:16, 6:19) 성전 안에서 행했던 일체의 구약적 제사행위와 절기와 의식법 또한 실체화 됐으며 따라서 레위인 또한 사라진 것으로 인해 사실상 율법에 근거한 의무적 십일조의 의미는 사라진 것에 다름 아닙니다.

그러나 의무규정으로 인한 강제성이 사라졌다고 해서 신약의 성도가 하나님 앞에 일체의 헌금을 드리는 일에서 면책(免責)됐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참 된 의미를 진심으로 깨달아 누리는 자들에게 헌금은 그것이 십일조가 아니라 십의 팔조, 구조의 분량이라 할지라도 일생 빚진 자의 심정에서는 감사를 숫자로 제한해 환산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다시 말해 신약의 성도는 구약적 십일조의 의무에서 벗어난 사실로 인해 더 적게 드리거나 극단적으로 해석해서 안 드려도 된다는 자유 방임권이나 면책 특권을 제공받는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오히려 제한이 없어짐으로 인해 더욱 감사의 표식을 풍성히 나타내야 함을 함의합니다. 고후9:7은 이런 상황에서 유효 적절하게 선용할 수 있는 구절입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그렇다면 말3:10에서 '축복의 약속과 이의 보증으로 시험해 볼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진의는 무엇일까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일단의 귀환자들은 그들의 포로생활이 시내산 언약에 대한 불순종의 대가로 주어진 하나님의 심판이며 채찍임을 깨닫고 귀환 직후 얼마의 기간은 회개하며 순종할 것을 다짐합니다. 성전 재건에 온 힘을 기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이들은 다시 과거의 악습을 재현하며 여전히 불순종하는 일에 집착하기에 이릅니다.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되었던 다윗 왕조의 회복과 이로 인한 이스라엘의 영광은 기대했던 만큼 빨리 임하지 않음으로 형식적 율법주의의 타성에 여전히 깊이 빠져버린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말라기 선지자는 고난과 시련의 원인이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형식적 신앙에 있음을 지적하며 영적이며 도덕적인 각성과 회복을 촉구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주신 말씀이 본 절의 내용입니다.

본 절에서 '온전한 십일조'란 율법에 명시된 네 경우의 십일조(제사장, 레위인, 절기시 성막에서의 교제, 고아와 과부를 위한 구제용 등)를 정당하게 드릴 것에 대한 요구사항입니다. 따라서 '축복을 담보로 한 시험의 제기'는 십일조가 축복의 수단이 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불순종의 대가가 얼마나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지를 경험했으면서도 여전히 율법에 분순종함으로 마땅히 드려야 하는 십일조를 자원해서 드리지 않는 것에 대한 안타깝고 답답한 심정을 역설적으로 토로하는 표현입니다.

이는 마치 부모의 입장에서 말로 타이르고 매를 때려도 여전히 타성에 젖어 자율적으로 공부하기를 싫어하는 자녀에게 하루 삼십 분 정도라도 알아서 스스로 공부한다면 '매일이라도 업어주겠다'고 약속하는 경우와 다를 바 없습니다. 이는 공부한다고 해서 꼭 업어주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러고 싶을 정도로 자녀가 알아서 공부해 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부모의 소망이 담긴 표현에 다름 아닙니다. 공부는 학생으로서 마땅히 행할 바의 도리입니다. 학생에게 있어서 공부는 어떤 이유로라도 피할 수 없는 것으로서 포기와 흥정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의무이며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십일조는 율법에 명기된 의무이며 동시에 자율적 조항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수확할 수 있도록 모든 환경과 여건을 마련해 주셨을 뿐 아니라, 레위인들에게 분배해 주지 않은 가나안의 땅 까지도 기업으로 주심으로 이스라엘에게 은혜로 베푸신 구원의 공유성이라는 측면에서 저들의 경제적 자립을 공동으로 책임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편의적으로 적용시킴으로 말씀의 본의를 왜곡시킬 때 성경은 더 이상 성도의 신앙의 궁극적 관심과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단지 인간의 이기적 목적과 세속적 욕심을 충족시키는 수단과 방편으로 전락 될 뿐입니다. 여로보암은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채우기 위한 목적으로 구약종교를 도구화시키는 것을 통해 전 이스라엘을 우상화의 늪으로 몰아갔습니다. 백성들 또한 자신의 일신상의 안일과 현세적 행복을 위해 타협과 절충으로 여로보암의 제의를 기꺼이 받아들임으로 인해 국가적 범죄와 배도에 동참했던 것입니다.

3.맺으면서

여로보암의 종교개혁은 개인의 목적을 위해 종교를 철저히 도구화시킨 우상 숭배적 신앙의 전형(典型)입니다. 자의적 숭배신앙의 실체가 이렇습니다.그러나 거기에 여전히 구약종교의 흔적을 남겨 둠으로 백성들을 미혹케 한 혼합종교의 전범(典範)이기도 합니다.

이 시대의 기독교 신자들이 개인의 사사로운 목적과 현세 지향적인 성공제일주의를 표방함으로써 하나님을 우상과도 같이 섬김으로 기독교를 기복종교로 변질시키는 모습은 지극히 위험한 처사입니다. 아울러 신앙주의를 성경적 복음과 구원의 실질인 양 오해함으로 교인을 대량으로 생산해 내듯이 물량주의적 성공과 외적 교회부흥에 치심(置心)하고 있음은 심히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사실을 가속화시키는 현상 중에 하나가 바로 말씀의 성경적 본의를 왜곡해서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임의대로 적용시키는 나머지 경건을 사사로운 이익의 재료로 삼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불법적 범죄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는 패역한 행실입니다. 당장 성공과 부흥이 보장되는 듯 하지만 결국은 파멸입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과 지옥의 형벌만이 기다릴 뿐입니다(마7:21-23, 롬10:2-3). 막7:6-8입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본 글은 언약교회를 섬기시는 김성주목사님의 까페에서 퍼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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