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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신앙

Re:성령의 은사

작성자이천우|작성시간05.10.10|조회수542 목록 댓글 0
제1강 : 성령의 은사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시는 기관이고(마16:18),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로서 하나님의 교회이다(고전1:2). 교회가 거룩함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게 된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대로 부어주신 성령의 선물의 결과이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신자들은 교회를 이룬다. 곧 그리스도의 몸이다(고전12:12-13). 즉 교회는 여러 지체들로 구성된 한 몸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계속 보존되고 건강하게 자라야 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각 신자들에게 다양한 은사들을 주셨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 성령의 선물인 이 은사는 균형을 잃고 있다. 오순절 교파와 은사주의자들은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이 은사의 사용을 남용하고 있다. 또 한편으로 개혁주의 진영에서는 오순절 교파를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은사에 대해 별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것 역시 잘못이다. 오늘날 교회들은 이미 오순절 교파에 의해 점령당한 듯하다. 성령의 은사에 관해서는 오순절 교파가 대장노릇을 하고 있고, 개혁주의 성령론은 시대에 뒤떨어지고, 낡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우리 시대에 개혁주의 성령론과 은사론은 인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이야기 축에도 끼지 못하는 분위기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서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우리 속담에 "지피지기, 백전백승"이라 했던가! 알아야 한다.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누구보다 우리가 더 잘 알아야 한다. 그래야 말할 수 있고, 싸울 수 있다.

그러나 이 싸움은 오순절 교파와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들은 저 알아서 살도록 내버려 두라.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한 싸움을 해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사도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하셨다(마28:19). 그러므로 진정한 사도적 교회는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교훈을 모두 배워야 한다. 여기에 성령의 선물 곧 은사도 포함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단 주님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배우기 위하여 이 은사들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고 배우도록 하자(고전12:31, 14:1). 배우되 개인이나 대중 경험이 아니라, 나타난 현상들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영감으로 된 성경으로부터 은사가 무엇인지 배우도록 하자.


1. 이 은사는 어떤 종류가 있는가?

먼저 성령의 은사들은 어떤 종류가 있는지 성경의 기록을 찾아보자. 우리는 제일 먼저 고린도전서12장에서 은사들의 목록을 발견한다. 고전12장은 두 가지 은사목록을 갖고 있다. 첫 번째 은사목록은 8-10절인데,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능력행함/ 예언/ 영들 분별함/ 각종 방언/ 방언들 통역함 등이다. 이 은사들을 다시 크게 구별해 보면,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첫째, 가르치는 은사들(지식의 말씀과 지혜의 말씀)
둘째, 표적의 기능을 하는 은사들(믿음, 병 고치는 것, 능력 행함)
셋째, 하나님의 비밀을 말하는 은사들(예언, 방언, 방언 통역, 영들 분별함)

그러면, 이 은사들의 기능(역할)이 무엇인지 간단히 정의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지혜의 말씀
이 은사는 다름 아니라 세상의 지혜와 대조를 이루고 있는 "하나님의 지혜"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킨다. 이것은 고전2:6-16에서 사도 바울이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둘째, 지식의 말씀
이 은사는 정의하기가 어렵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도움 없이는 결코 알려질 수 없는 초자연적인 지식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종종 선지자의 전통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영감된 가르침"과 비슷하다고 주장한다. 아마도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의 의미를 파악하는 통찰력을 말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지식"이라는 말을 13:2, 8-9 그리고 14:6에서 사용하고 있다. 13:2에서 볼 때, 바울은 자신이 예언하는 능력이 있는데,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안다고 말한다. 이 구절에서 지식은 "비밀"과 함께 예언하는 내용에 포함되어 있다. 또 14:6에서는 지식이 "계시"와 "예언"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13:8-9에서 지식은 예언과 함께 폐하여진다고 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성경의 의미를 파악하는 통찰력으로 이해하기는 곤란하다. 오히려 비밀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비밀을 아는 지식, 계시를 아는 지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온당할 것 같다.

셋째, 믿음.
사도 바울이 믿음이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구원으로 이끄는 의미로 사용하였다(예, 엡2:8-9). 그러나 이 구절에서 믿음은 초자연적인 특별한 선물을 말한다. 고전13:2에서 바울은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에 주목하자. 하나님은 특별한 상황에서 특별한 방법으로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실 수 있다. 이 믿음의 은사는 기적을 일으키는 은사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병 고치는 은사
이 은사는 말 그대로 육체적인 질병을 치료하는 것을 말한다.

다섯째, 능력 행함.
능력을 행한다는 것은 곧 기적을 행한다는 말과 동의어다. 이 능력은 병 고치는 것을 포함하여 귀신을 쫓아내는 것,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 또는 산 사람을 죽이는 것(행5장, 아나니아와 삽비라) 등을 말할 수 있다.

여섯째, 예언. 예언의 은사는 다른 장에서 상세하게 다룬다.

일곱째, 영들 분별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사도 요한이 언급한 "영들"인데("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요일4:1), 이때 "영들"은 "성령"이나 "귀신의 영"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말하는 사람이나 또는 마귀의 영에 미혹되어 말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요일4:2에서,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자요"라고 말한다. 이 구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영"은 다름 아닌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백하는 신자를 말하는 것이다. 또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3절)"은 바로 마귀의 미혹을 받아 예수를 거절하는 불신자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의 문맥에서 사용하는 "영들"의 의미를 살펴보자. 고전14:32에서 바울은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는다"고 말한다. 문맥은 26-33절로서, 고린도 교회의 공적 모임 곧 예배 때 이루어지는 예언이다. 당시 예배에는 찬송시, 가르치는 말씀, 계시, 방언, 방언통역 등이 있었다(26절). 이 때, 바울은 예언하는 자들은 두 명 혹은 세 명까지 예언하라고 하면서 다른 예언자들은 그 사람들의 예언을 분변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예언하던 사람은 잠잠하라고 한다(30절). 이 구절들을 볼 때,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언을 하는 그 사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요약하자면, 영들을 분변하는 은사는 요한의 문맥이 아니라 바울의 문맥에서 읽어야 할 것이다. 즉 예배에서 예언자들이 하는 계시를 분변하는 것이다.

여덟 번째, 다른 종류의 방언(언어).
상세한 설명은 방언을 다루는 장에서 할애하겠다.

아홉 번째, 방언을 해석하는 은사.
말 그대로,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방언을 알아들을 수 있게 해석해 주는 은사를 말한다.

사도 바울은 고전12:28이하에서 두 번째 은사 목록을 제시하고 있다. 즉 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 행함/ 병 고치는 은사/ 서로 돕는 것/ 다스리는 것/ 각종 방언 등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우리가 직분으로 알고 있는 사도, 선지자, 교사 등이 은사의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에베소서4장에서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전하는 자와 및 목사와 교사를 "그리스도의 선물"이라고 표현하고 있다(7, 8절). 그러므로 직분들도 넓은 의미에서 은사에 속한다. 그리고 고전12:4-6의 병행구절은 "은사"를 "직임( )"과 "역사( )"로 표현하고 있다. 즉 은사는 직임 즉 봉사하는 것이며, 역사 즉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로 우리는 로마서12장에 기록된 은사들을 발견한다. 즉 예언, 섬기는 일, 가르치는 자, 권위(위로)하는 자, 구제하는 자, 다스리는 자, 긍휼을 베푸는 자 등이 그것이다. 또 특이하게도 사도 바울은 결혼과 독신 역시도 "은사"라고 말한다.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7절). 결혼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모든 인류에게 명령한 것이다(창2:24, 마19:5). 그러나 어떤 "타고난 자들은"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사는 것이 허락되었다(마19:11-12). 그 중에 사도 바울과 같이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가 있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이 하나님의 은사라고 말한다. 반대로 결혼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은사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로마서5장15, 16절에서 은사에 관한 포괄적인 말씀을 읽게 된다.

"그러하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이 구절에서 우리는 "은사"라는 말이 "은혜"와 "선물"이라는 말과 상호 교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은사는 무엇인가?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않고,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않는 것이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은 것은 하나님의 심판과 정죄로 모든 사람이 사망에 이른 것이다. 이와 반대로 많은 사람에게 풍성하게 넘친 이 은사는 다름 아닌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인데, 그것은 의롭다하심이다. 그리고 죄 사함과 영생이며, 그것과 비슷한 거룩하심의 은혜와 하나님의 자녀됨의 선물들이다.

작은 결론

"은사(카리스마)"라는 말은 예언, 신유, 방언, 방언 통역과 같은 은사들에 제한되어 사용되지 않는다. 이런 것들만이 은사가 아니다. 은사라는 용어는 탄력적으로, 포괄적으로 사용되는 말이다. 사도와 선지자, 목사와 교사 혹은 집사와 같은 직분들도 은사이며, 죄 사함과 영생과 같은 것들도 은사들이다. 또한 독신도 은사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언이나 신유나 방언과 같은 은사에만 비상한 관심을 갖는 것은 비정상적이며 균형을 잃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 은사들을 구별할 필요는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에게 약속하신 구원의 선물로서 은사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사용되는 기능적 측면의 은사들이 그것이다. 고전12장과 롬12장 또는 벧전4:10에서 말하는 은사들은 분명히 구원의 선물로서 주어진 죄 용서나 영생과 같은 은사들과는 구별되는 것이 분명하다. 또 죄 용서나 영생과 같은 은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들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지는 은사들인 반면에, 지식의 말씀, 지혜의 말씀, 예언, 방언, 신유, 사도, 선지자, 목사와 교사 등과 같은 은사들은 모든 신자들에게 공통으로 주어지는 은사가 아니다. 이것들은 성령께서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시는 것들이다(고전12:11, 18). 그리고 더 나아가서 다양한 기능적 은사들로부터 직분적 은사들도 분리되어야 한다. 이른 바 사도와 선지자와 목사와 교사 등의 직분들은 교회 안에 다양한 은사들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은사들이다(엡4:11-12).


2. 이 은사는 누가 누구에게 언제 어떻게 주시는가?

사도 베드로는 오순절 날 약속하신 성령께서 강림하신 그 날에 유대인들을 향하여 설교할 때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각각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을 것이다"(행2:38). 이 약속은 세례 요한을 통하여 예언된 높아지신 그리스도의 사역이다. "....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눅3:16). 승천하시기 직전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눅24:49).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1:4-5).

이 약속은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 뿐만 아니라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는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다(행2:39). 그리스도께서 부어주신 성령을 통하여(성령세례) 풍성한 은사들이 다양하게 분배되었다. 기본적으로 사죄, 중생, 믿음, 의, 거룩함, 하나님의 자녀, 영생, 천국의 상속자 등의 은혜를 포함하여 가르치고 다스리는 은사, 섬기는 은사, 지혜와 지식의 은사, 믿음의 은사, 병 고치는 은사, 방언의 은사, 예언의 은사 등등이 그것들이다.

우리는 성령과 그 선물들을 돈이나 다른 어떤 우리의 노력으로 사거나 구할 수 없다. 행8:18-20에서 마술사 시몬이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선물을 돈을 주고 살 생각을 하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시몬이 이렇게 생각하게 된 이면에는 복음을 받아들인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게 한 것이 사도들의 능력에 기인한 것으로 오해한 것이다. 즉 시몬은 사도들이 성령의 은사를 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결코 사람이 성령의 은사를 줄 수 없다. 그 좋은 예가 행3:12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를 고쳤다. 이를 보고 놀라워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들이 행한 기적이 결코 자신들의 권능과 경건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이 사람을 낫게 하였다(16절).

오순절 교파와 은사주의자들은 몇 가지 조건을 갖추면 어떤 은사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또 은사들을 간절히 사모하면서 하나님께 구하면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들의 주장은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전12:11). 그리고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12:18). 은사들은 사람 편에서 하나님께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 편에서 그의 뜻대로, 그 원하시는 대로 분배하시는 것이다. 말 그대로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오늘날 오순절 교파 사람들은 간절한 기도나 정성으로 은사를 얻으려고 하는 것은 그 때 사마리아에서 사도들에게 돈을 주고 성령의 은사를 살려고 했던 마술사 시몬과 별 다를 바 없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 성령의 은사를 받는가? 사도 바울은 우리 각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각 지체라고 말한다(12, 27절). 그러므로 우리 각 사람은 이미 각종 은사를 받고 있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모친의 모태에 생성될 때, 우리 몸의 각 기관들이 생성이 되고, 각 기능과 역할을 분배받는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가 될 때 이미 각종 다양한 은사를 분배받은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13절).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에 참여할 때, 이미 우리는 다양한 은사를 부여받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신자가 되었지만 은사는 받지 않는 신자는 손이 그 모양은 있지만 손의 역할을 할 수 없는 상태로 존재하는 것만큼 상상할 수 없다. 태아가 어머니의 모태에 조성되는 그 순간 모든 기관이 기능을 부여받는 것과 같이 신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그 순간 은사들을 분배받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새로운 은사를 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그의 뜻대로 분배하여 주신 은사들을 발견하고 개발하여 봉사하는데 힘써야 할 것이다.

3. 은사를 주신 목적은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고전12:7에서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한다. 이 구절에서 "성령의 나타남"은 "은사들"을 말한다. 주 하나님께서 이 성령의 나타남, 즉 은사들을 주신 목적은 "유익을 위함( )"이다. 그런데, 이 구절은 무엇을 유익하게 하는지 말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 이 은사들은 무엇을 유익하게 하는 것인가? 고전12:12-30은 이 은사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설명하고 있다. 먼저 바울은 교회를 사람의 몸에 비유하면서 한 몸은 많은 지체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도 그러하다고 말한다. 즉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12절). 우리 신자들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13절). 우리 몸에 많은 지체들이 있는 것과 같이 교회는 여러 지체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다(18절). 그리고 이 지체들은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이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다."(25절). 그러므로 은사들은 몸의 지체들을 말한다. 지체들이 몸을 세우기 위하여 서로를 돌아보는 것처럼, 이 은사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다른 지체들을 서로 서로 돌아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은사들이 "유익하게 하는 것"이다.

또 바울은 엡4:11-12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 등의 직분들도 넓은 의미에서 일단 주님이 교회에 주신 은사들이다(고전12:28 참조). 주님께서 이 직분들을 주신 목적은 "성도를 온전케 하고, 봉사의 일을 하게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봉사의 일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몸의 세움을 위하여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는 것이다. 특별히, 여기서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 등의 직분들은 다른 은사들 중에서 더욱 큰 은사들로서(고전12:31), 성도들을 훈련시키고, 자격을 갖추게 하는 직분들이다. 그리하여 훈련된 성도들이 서로 봉사의 일을 하여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주님께서 각 지체들에게 주신 은사들은 서로 봉사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익하게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도 베드로는 은사와 관련하여 이렇게 말한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4:10-11)." 신자들은 각각 은사를 받았다. 즉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각 신자들에게 은사를 주셨다(고전12:11, 18, 28).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청지기( )들이다. 청지기는 원래 주인의 재산을 맡아 관리하던 종을 말한다. 이 용어가 은사와 관련해서 사용될 때의 뜻은 우리 각 신자들이 받은 은사들은 하나님의 재산으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두신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집의 선한 청지기로서 서로를 위하여 이 은사들을 잘 사용함으로 봉사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유익하게 하는 것"이다.


제2강 표적에 속하는 은사들
(병 고치는 은사/ 귀신을 쫓는 은사/ 능력 행하는 은사)

서론.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그의 몸된 지체들에게 주신 다양한 은사들이 있다. 이 은사들 중에서 어떤 은사들은 특별히 역할을 한다. 그것은 바로 표적의 역할이다. 병 고치는 은사, 귀신을 쫓는 은사, 능력을 행하는 은사 등이 그것들이다. 그렇다면, 이런 은사들이 표적의 역할을 하는 것인지, 그 표적의 의미는 무엇인지 알아보자. 그리고 그 표적이 오늘날에도 계속되는지를 알아봄으로써 이 은사들의 존속 여부를 조사하자.

1. 표적에 속하는 은사들과 표적의 기능

요2장, 가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행하신다. 성경은 이기적을 표적이라 부른다.

요4장, 갈릴리 가나에 왕의 신하의 아들이 있었다. 예수님은 이 죽은 아들을 살려주신다. 이것을 역시 표적이라 부른다.

요한복음에는 많은 이적들이 기록되어 있다.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된 병자를 고치주신 이적,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를 보게 하신 이적을 포함하여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고 12광주리가 남은 이적 등. 이 모든 것들을 요한은 표적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것들은 무슨 표적인가? 요20:30-31에서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 구절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들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심을 믿도록 하는 기능을 한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다. 즉, 병 고치는 은사나, 귀신을 내어쫓는 은사나 물로 포도주를 바꾼 사건과 오병이어와 같은 능력 행함 등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리스도이심을 확증하는 기능을 하는 표적이다.

또 마태복음11:2-6과 누가복음7:18-23 두 본문은 이와 같은 표적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분명하게 밝혀준다.

헤롯에 의해 감옥에 갇혀 있던 세례 요한이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3절). 즉 세례 요한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하였던 그리스도가 예수님인지 알기를 원했고, 만약 아니라면,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할지 물었던 것이다. 그때 예수님은 "내가 바로 그 오실 그리스도다"라고 직접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 대신에 요한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라"고 하신다. 곧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말해주라고 하신다. 이 말을 들으면, 요한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게 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을 행하는 이것들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표적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근거에서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고, 또 세례 요한도 어떤 근거에서 이 말씀을 통해서 이런 표적을 행하는 자가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할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이사야61:1-3의 예언이다. 선지자는 이렇게 말한다.

"주 야웨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야웨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야웨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야웨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령이 임하신 "나"는 이사야가 아니라 장차 오실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야웨께서 기름부으신 자이시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 곧 복음을 전파하는 자이다. 야웨는 그리스도를 보내어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한다. 이 예언의 말씀에 근거하여 예수님은 자신을 그리스도이심을 그런 표적으로 증거하셨고, 세례 요한 역시 그런 표적을 보고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된 것이다.

2. 사도들과 표적들의 관계

마가복음 16:19,20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쌔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이 구절에서 표적은 제자들이 말씀을 전파할 때, 그 말씀을 확증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히브리서2:2-4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시니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은 사도들이 주님께로부터 들은 말씀을 전할 때 확증하는 기능을 했다고 이 구절은 지적하고 있다.

3. 그렇다면, 실제로 그렇게 되었는가?

행2:43 ....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
행3장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를 일으켰다.
행4:29-30 사도들이 감옥에서 석방된 후 다른 사도들과 연합하여 기도하였다.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옵시고,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행5장 베드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거짓말을 알았고, 그들을 죽게 했다.
행5:12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었다...
행8:17, 18 시몬이 사도가 행한 권능을 돈 주고 사려고 했다. 이 때 성령의 선물이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행14:3 두 사도(바나바와 바울)가 표적과 기사를 행하였고 말씀을 증거하였다.
행16장 바울은 귀신들린 여종을 고쳤다.
행20 바울은 창터에 걸터 앉아 말씀을 듣다가 떨어져 죽은 유두고를 살렸다.

결론.

표적과 기사와 능력은 사도들의 표적이었다. 즉 사도들은 부활/승천하신 주님의 사도들이며 그들이 전한 말씀은 주님의 말씀인 것을 확증하는 기능을 하였다.

로마서15:18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고후12:12, 13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 병 고치는 은사 구별된 병을 고치는 일은 오늘날에도 계속된다.

오늘날 병 고치는 은사는 중단되었으나 주님은 여전히 우리의 질병을 고치신다. 야고보서5장에서 야고보는 병든 신자들은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고 병 낫기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질병은 분명히 언약의 저주로 온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서로 죄를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였다. 그러면 주께서 그 사람을 일으키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야고보는 믿음의 기도와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 하였는데, 우리와 성정이 동일한 엘리야를 예를 든다. 엘리야의 기도의 모범은 레위기26장과 신명기28장의 언약의 약속에 근거하고 있다. 즉 엘리야는 그 시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숭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하신 대로 비의 심판을 내려 주시기를 기도했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왔을 때 약속하신 대로 비의 축복을 내려 주시기를 기도했다. 이와 같이 오늘날 우리도 언약의 약속을 따라 불순종으로 인하여 벌로써 질병이 왔을 때,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께 기도하면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 주시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들의 말씀을 확증하는 기능을 가진 병 고치는 은사와는 별개이다.

오늘날 신자들 중에서 질병을 고치기 위하여 - 특별히, 병원에서 고칠 수 없는 암과 같은 병을 고치기 위하여 소위 신유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을 찾아가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신유의 은사는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확증하기 위하여 행한 특별한 사역이었지, 단순히 어떤 사람의 질병을 고쳐주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 그리고 사도들의 말씀 확증 사역은 끝났기 때문에 더 이상 소위 신유의 은사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친히 병 고치는 일은 계속 된다. 그것은 언약의 관점에서이다. 우리 신자에게 질병은 우선 불순종에 대한 언약적인 심판이다. 때라서 회개하고, 기도하면 주님께서 고쳐 주실 것이다. 물론 주님은 일반은총을 사용하시기도 하시며, 주권적으로 고치기도 하신다. 이것을 부인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또 신자에게 질병은 욥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과 신자의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서 주시는 시련이기도 하다. 이때는 참고 인내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작정의 때가 끝이 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치료하실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는 우리를 낮추기 위하여 질병을 주시기도 하는데, 바울과 같이 평생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시기도 하신다. 이것은 기도하여도 하나님께서 고쳐 주지 않으시는데, 왜냐하면 우리를 자고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고후12:1-10).


* 참고 자료 :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표적과 기사들

2장 - 성령이 강림하신 날 제자들이 방언을 했다. 3000명이 제자가 된 후에 많은 표적과 기사가 일어났다.
3장 -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앉은 뱅이를 일으켰다.
5장 - 베드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거짓말하는 것을 알았고, 그의 말에 두 사람이 죽었다(능력행함의 은사). 또 사도들이 솔로몬 행각에서 병든 사람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었다.
6장 - 스데반이 많은 표적과 기사를 행하였다.
8장 -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표적을 행하였다. 귀신을 쫓아내고 중풍병자를 고치고, 앉은뱅이를 일으켰다.
9장 - 아나니아는 바울의 눈을 안수함으로 뜨게 했다. 베드로는 룻다에서 9년동안 중풍병이 든 애니아를 고쳤고, 욥바에서는 죽은 다비다(도르가)를 살렸다.
10장 베드로가 환상을 보았다. 고넬료와 그의 친구, 친척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 방언을 말했다.
12장 -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 주의 천사가 나타나 쇠사슬을 풀고 문을 열어 베드로를 옥에서 나오게 하였다.
13장 - 바보섬에서 바울은 복음을 훼방하고 방해하는 박수 엘루마에게 얼마동안 소경이 되게 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14장 - 루스드라에서 바울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을 고쳤다(8-10). 또 그곳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19-20절)
16장 - 바울이 무시아에서 환상을 보았다. 마게도니아 사람들이 손짓하며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소리를 듣고, 바울은 전도지역을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바꾸었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귀신들린 여종을 고쳤고, 그 결과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갇혀 기도하며 찬미할 때, 홀연히 지진이 일어나고, 감옥의 문이 열리고, 착고가 풀렸다.
19장 - 에베소에서 요한의 제자들은 사도 바울의 안수로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방언과 예언을 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희한한 능력을 행하였는데, 바울이 사용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지고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갔다(11-12절). 비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자들과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악귀들린 자를 쫓아내려고 하다가 큰 봉변을 당하였다(13-16).
20장 - 드로아에서 청년 유두고가 삼층에서 떨어져 죽었을 때, 바울이 살렸다.
21장 - 가이사랴에 살고 있던 전도자 빌립의 네 딸(선지자들)이 예언을 하였다(9절). 또 가이사랴에서 선지자 아가보가 바울의 장래를 예언하였다(예루살렘에서 체포될 것을).
22장 -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날, 예수님이 바울 곁에 서서 "담대하라...로마에서 증거하여야 할 것이라"고 위로하셨다(11절).
27장 - 바울이 배를 타고 로마로 가는 도중 태풍, 유로굴라를 만나 살 소망이 없게 되었을 때, 주의 천사가 나타나 "생명에 지장이 없도록 하겠다"는 말씀을 들었다. 276명은 다 살았다.
28장 - 멜리데 섬에서 바울이 독사에게 물렸으나 전혀 상함이 없었다. 또 바울은 그 섬의 추장인 보블리오의 부친의 열병과 이질을 안수로 고쳐 주었다.



제3강 예언의 은사


'예언(豫言)'이라는 말을 단순히 풀이하자면, '미리 말하다'는 뜻이다. 즉 현재의 시점에서,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알고 알려주는 것이다. 그래서 흔히들 예언을 어떤 개인이나 공동체(교회)의 운명이나 미래의 길흉을 알려주는 것으로 편협하게 생각한다. 실제로 작금 한국교회 안에 자칭 예언자(선지자)로서 신자들과 교회, 심지어 국가의 길흉을 예언하는 자들이 있다(이들은 교회 안에 있는 점쟁이다!). 심지어 부흥집회에서 신자들의 장래에 대하여 신탁(神託)을 내리는 이들도 있고, 그래서 이들에게 예언 기도 받으러 가는 신자들도 있다. 혹은 종종 이단이나 사이비 교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을 예언하는 이들도 있다(예, 다미 선교회 등).

이제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과연 성경이 말하는 예언이 이런 성격인가? 성경에 나타난 예언의 은사가 이교세계에서 무당이나 점쟁이가 인간의 생사화복이나 길흉에 대하여 점치는 것과 같은 것인가? 성경은 '예언'이라는 말을 어떻게 사용할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우리는 성경 전체를 살필 것이다. 먼저 구약의 이스라엘 안에서 예언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피고, 다음에 신약의 교회에서 나타난 예언의 기능과 성격이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한다. 다음 세 가지 질문을 염두에 두는 것이 유익하겠다.

첫째, 이 예언의 은사는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어떤 봉사를 했는가?
둘째, 이 예언의 은사는 누구에게 주어졌는가?
셋째, 이 예언의 은사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가?

A. 구약에서 예언의 성격

구약에서 예언은 선지자라는 직분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예언하는 일은 일반 신자의 직무가 아니라 특별한 직분자 곧 선지자의 직무였다. 따라서 먼저 선지자들이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살펴보면서, 예언의 기능이 무엇인지 정의를 내려보자.

1. 선지자와 예언

선지자의 직분적 성격이 무엇인지를 잘 드러내 주는 본문 중에서 최초의 말씀은 출7:1,2에서 찾을 수 있다.

"야웨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선지자)가 되리니 내가 네게 명한 바를 너는 네 형 아론에게 말하고 그는 바로에게 말하여...."

이 구절은 잘 아는 대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바로의 압제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모세를 바로 앞에 보내는 장면이다. 모세가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면서 바로 앞에 가지 않으려 할 때, 하나님은 모세의 형 아론을 모세의 대언자[선지자]로 세우셨다. 그러면서 마치 모세와 아론의 관계를 신(하나님)과 선지자의 관계로 설정하신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아론에게 전달하면, 아론이 모세로부터 들은 것을 그대로 바로에게 전달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선지자(대언자)의 직분적 특성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 즉 선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들은 말씀을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달하는 사람"이다.

출4:10-16에서 더 자세한 것을 알 수 있다. 15절, 모세는 그의 형 "[아론]에게 말하고, 그 입에 말을 준다". 16절, "아론은 모세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같이 되리라." 여기서 우리는 선지자는 '하나님의 입을 대신하는 자'로서, 하나님께서 그 입에 주신 말을 전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레미야1:7과 17절에서도 이 사실은 분명히 증거된다. "야웨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그러므로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한 바를 다 그들에게 고하라....."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보내시든지 가야하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한 것을 다 말하고, 고하여야 한다. 이것이 선지자의 사명이고, 곧 예언 사역이다. 선지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을 말하는 것을 "예언"이라고 하는 것이다. 아모스3:8 "...야웨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셨는데, 누가 예언을 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2. 선지자의 예언 사역

2.1 선지자는 축복과 저주를 선포했다

아브라함의 경우

성경에서 제일 먼저 선지자라는 말이 나오는 곳은 창세기20:7이다. 아브라함은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이를 곧이 들은 아비멜렉은 사라를 취하였다. 그 날 밤 하나님께서 꿈으로 아비멜렉에게 나타나 모든 사실을 알게 하신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 대하여 말씀 하신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지니라."

이 구절에서 아브라함이 선지자(나비)로 기술되고 있다. 그리고 선지자는 기도하는 자로 설명이 되고 있다. 아비멜렉이 사라를 돌려보낼 때,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을 위하여(바아드카, 너를 위하여) 기도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을 살려두실 것이다. 그러나 만약 돌려보내지 않으면, 역시 아브라함은 기도할 것인데, 하나님은 아비멜렉을 죽일 것이다. 이때 주목할 것은 아브라함의 기도는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창12:3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하셨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단순히 개인적인 기도가 아니라 선지자 직무를 수행하는 기도이다. 즉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근거하여 자기를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고, 자기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를 돌려보내지 않는 것은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일이며, 돌려보내는 일은 그를 축복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후손을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루실 것이며, 또 장차 이 후손을 통하여 땅의 모든 민족에게 구원의 복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결코 사적인 축복기도가 아니라 선지자로서 직분적 기도였다.

엘리야의 경우

선지자의 기도하는 직무는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다른 선지자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엘리야이다. 엘리야 선지자는 아합 왕과 그의 백성들이 야웨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섬김으로 언약을 배반했을 때, 그 땅에 비가 오지 않기를 위해서 기도했고, 또 나중에 하나님께서 아합 왕과 그 백성들을 돌이키셨을 때, 다시 그 땅에 비가 오기를 위해 기도했다. 물론 엘리야 선지자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레위기26장, 신명기28장에 언약하신 것을 따라 기도드린 것이다(왕상17-18, 약5:17-18).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언약의 말씀에 불순종할 때, 여러 가지 저주를 내실 것인데, 그 중에 하나가 하늘의 문을 닫아 기근의 고통을 주시는 것이었다(26:19). 또 반대로 자기 백성들이 돌아올 때, 다시 하늘의 문을 열어 언약의 복을 주신다(26:4).

* 발람이 이스라엘을 축복했다(민수기23장)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 진을 쳤을 때, 모압은 심히 두려워했다(민22:1). 그때 모압 왕 발락은 발람 선지자를 보내어 이스라엘 자손을 저주하도록 부탁했다(11절). 그러나 하나님은 발람 선지자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축복하도록 명하셨다(23:5 이하, 8-10, 18-24, 24:1-25).

23:8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으신 자를 내 어찌 저주하며, 야웨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 어찌 꾸짖을꼬?"
23:20 "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

이삭의 축복(창27:27-29)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을 선포한 것은 역시 선지자로의 역할로 인정되어야 한다. 당연히 이 축복도 개인적인 행복과 번역의 축복기도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성취하는 관점에서 행한 축복이다.

"...축복하여 가로되 내 아들의 향취는 야웨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노아의 축복과 저주 선포(창9:18-27)
노아가 술을 먹고 취하여 벌거벗은 채로 누워 자고 있을 때 자기 아들들의 행위를 알고 난 후에 셈, 함, 야벳에게 각각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였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 셈의 하나님 야웨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2.2 미래에 일어날 일의 예언

에녹(창5장, 유다서)
에녹은 자기 시대의 타락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했다. 이 예언은 노하 시대의 홍수심판으로 성취되었다(창6-9장).

"아담의 칠 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는 자의 경건체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유9)."



야곱의 예언(창49장)
야곱은 죽기 전에 12아들을 자기 앞에 불러놓고, 그들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임을 예언했다. 그러나 이 예언은 단순히 12아들의 개인 운명에 관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언약과 관련되어 있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는데, 그 약속이 어떻게 12아들을 통해서 성취가 될 것인지에 대한 예언이다. 특별히, 유다에 관한 예언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지파를 통해서 나올 것이 예언되었다(10절,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
구약의 대표적인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장래와 더불어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하여 예언하였다. 특별히, 이들은 북쪽 이스라엘, 남쪽 유다의 멸망과 회복에 대하여 많은 예언을 하였다. 또 어떤 선지자들은 이방민족들의 멸망에 대하여 예언을 하였다. 이 멸망에 관한 예언은 단순히 한 민족이나 국가의 흥망성쇠의 예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언약하신 것을 어떻게 성취하시는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에 대한 예언은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에 따른 마지막 저주선포였다(레26장, 신28장). "... 너희가 들어가 얻는 땅에서 뽑힐 것이요. 야웨께서 너를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만민 중에 흩으시리니..."(신28:63-64). 동시에 이스라엘과 유다의 회복에 대한 예언도 언약에 따른 축복의 선포였다(레26:44-45). 회복에 대한 선포 가운데서 선지자들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예언하였다. 이 예언은 창3:15의 원시복음과 노아 언약, 아브라함 언약, 모세(시내산) 언약, 다윗 언약을 계승하고 성취하는 새 언약의 선포였다(렘31:31-34, 겔36:22-31).

2.3 회개를 촉구하는 책망과 저주를 선포하는 사역

갓과 나단
선지자들의 사역 중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책망과 격려이다. 대표적으로, 갓과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책망한 경우이다. 첫째로, 다윗은 갓 선지자로부터 책망을 받았는데(삼하24:11-19 대상21:9-19), 다윗 인구조사를 끝냈을 때, 하나님은 갓 선지자를 보내어 다윗의 죄를 지적하시고 책망하셨다. 그리고 갓은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세 가지 저주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했다. 7년 동안 기근, 3개월 동안 다윗이 원수로부터 도망 다니는 것, 3일동안 백성이 죽음의 역병이 임하는 것. 이 셋 중에 다윗은 세 번째를 택하였으며 그 결과 7,000명이 죽었다.

또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을 하고, 그의 충신 우리야 장군을 전쟁터에서 죽였을 때,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다윗의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였다. 이 책망의 목적은 다윗으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이끌기 위함이었다.

실로 사람 아히야
실로 사람 아히야(왕상14:2-28): 여로보암의 아들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그의 아내가 아히야를 찾아왔을 때, 아히야는 여로보암의 죄악으로 그 아들이 죽을 것이라고 선포했다.

스마야(대하12장)
르호보암이 자기 왕국이 두 개로 분열되는 것을 보고, 그것을 막기 위하여 유다와 베냐민 지파로부터 180,000명의 군대를 모아 여로보암을 치러 갈 때, 스마야는 이 모든 일이 하나님께로부터 허락된 일이기 때문에 전쟁을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하나니(왕상16장; 대하19:2)
유다 왕 아사가 이스라엘 왕 바아사로부터 경제적인 압박을 당하고 있었는데, 바아사가 예루살렘에 이르는 남북 통상로를 장악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의 북쪽 라마를 침략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아사는 다메섹에 도움을 요청한다. 다메섹이 이스라엘의 북쪽을 침략하는 바람에 바아사는 할 수 없이 라마를 철수하게 되었고, 아사는 오히려 바아사가 라마에 건축한 게바와 미스베를 증축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니 선지자를 보내어 아사 왕을 책망하였다. 왜냐하면 아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이방의 왕 다메섹을 의지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니는 과거에 아사 왕이 하나님을 의지하여 구스인 세라를 격퇴시킨 사실을 상기시키면서(대하15:1-8) "야웨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고 교훈하였다(대하16:9). 그러나 칭찬을 기대했던 아사왕은 하나니를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예후(왕상16:3, 대하18:28-34, 왕상22:29-40)
예후는 바아사에게 "하나님께서 너 바아사와 네 집을 쓸어버려 네 집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같이 되게 하리라"고 선포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의 죄로 인하여 바아사로 하여금 여로보암의 집을 파멸토록 하셨는데, 바아사도 역시 여러보암만큼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예후는 여호사밧을 책망한다. 여호사밧은 라못-길르앗에서 다메섹과 싸움에서 아합과 동맹을 맺어 그를 도왔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여호사밧에게 책망하신다.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야웨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가하니이까 그러므로 야웨께로 진노하심이 왕이에 임하리이다(대하19:2)"

마레사 사람 엘리에셀(대하20:37)
여호사밧 왕이 오므리의 집과 두 번째 동맹을 맺었을 때이다. 즉 여호사밧 왕이 아합 왕의 장남 아하시야와 동맹을 맺고, 통상을 하기 위하여 에시온게벨 항구에서 배를 건조하였다. 배가 건조되고 있는 중에 하나님은 엘리에셀을 보내어 "왕이 아하시야와 교제하는 고로 야웨께서 왕의 지은 것을 파하시리라"고 경고한다. 결국 배가 건조되었지만 파괴되었고, 통상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2.4 격려와 위로를 선포하는 사역.

야하시엘(대하20장)
유다 여호사밧 왕 때, 모압, 암몬, 에돔의 연합군이 침략하였다. 이때 연합군을 대항할 충분한 군사력을 보유하지 못한 여호사밧은 금식을 선포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했다. 기도가 끝났을 때, 성령이 야하시엘에게 임하여 "야웨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대하20:15)"고 말한다. 그리고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야웨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17)"고 격려한다.


3. 선지자들은 어떤 방식으로 계시를 받고 전하는가?

히1:1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3.1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때는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이 있었다. 즉 직접 말씀을 받을 때도 있고, 꿈으로나 환상을 통해서 받을 때도 있다.

창12:1 야웨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창15:1 이 후에 야웨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창17:1 아브람의 구십구 세때에 야웨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창18:1-2 야웨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출3:2 야웨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출6:2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야웨로라....
출19:19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수1:1 야웨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야웨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삿6:11 야웨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 앉으니라..... 야웨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삿13:3 야웨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삼상3: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야웨를 섬길 때에는 야웨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삼상3:4 야웨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10절).

사1:1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라.
렘1:2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다스린 지 십삼 년에 야웨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렘7:1 야웨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가라사대...

겔1:1 제삼십년 사월 오일에 내가 그발 강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이 내게 보이시니
겔8:1 제육년 유월 오일에 나는 집에 앉았고 유다 장로들은 내 앞에 앉았는데 주 야웨의 권능이 거기서 내게 임하기로...

욜1:1 야웨께서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이르신 말씀이라.
나1:1 느니웨에 대한 중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
합1:1 선지자 하박국의 묵시로 받은 경고라.

3.2 선지자들이 받은 계시를 전할 때 역시 여러 모양과 여러 방법이 있다. 직접 말로 전하기도 하고, 표적과 기사를 통해서 전하시고 하며,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전하기도 한다.

사7: 3. 이사야는 유다 왕 아하스를 직접 만나서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그 입의 말로써 전했다.
사37:1이하, 이사야는 유다 왕 히스기야 왕이 보낸 사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게 했다.

렘13:1-11,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베띠를 사서 허리에 띠고 있다가 그것을 유브라데 강가 바위틈에 감추었다가 여러 날 후에 그것을 취하라고 하셨다. 감추었던 띠를 파서 보니 그 띠가 썩어 있었다. 이것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교만을 이와 같이 썩게 할 것임을 보여주는 행위계시이다.
렘19:1-13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토기장이의 오지병을 사서 그것을 유다 왕과 예루살렘 거민 앞에서 깨뜨리게 하신다. 이것은 이 백성과 이 성이 파멸할 것을 보여주는 행위계시이다.
렘27:1-11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줄과 멍에를 만들어 그의 목에 얹고 예언하라고 하신다. 이 멍에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말한다.

4. 작은 결론:

구약 선지자들의 이 모든 사역들은 단순히 한 사람이나 한 민족의 운명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선지자들의 예언 사역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다스리는 방편이었다. 특별히 선지자들의 예언 사역은 항상 시내산에서 선포된 그 율법에 근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책망하고 저주하시는 것도, 반대로 자기 백성들을 회복시키고 축복하는 것도 다 언약의 말씀에 기초한 것이다. 선지자들은 백성들이 이 율법의 길을 벗어날 때, 책망하고, 죄를 지적하고, 율법의 길을 가르치고 회개의 길로 인도하였다. 때로는 불순종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저주를 선포하기도 했다. 가장 중요한 사역은 그리스도의 강림과 그로 인한 구속사역의 성취와 완성을 예언한 것이다.

구약에서 나타난 모든 예언활동은 선지자들의 직무와 관련되어 있다. 이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하시는 통로였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에게 자신의 말씀을 들려주셨고, 그들은 백성들에게 그대로 알렸다. 그리고 선지자들의 예언활동은 단순히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알리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 축복, 책망과 교훈, 격려와 위로 등 다양한 활동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B.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

1. 세례 요한

세례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실 메시야(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에 대하여 예언하였고, 백성들이 그를 맞이하도록 준비시켰다. 그의 사역은 백성들이 죄를 회개하도록 준엄하게 책망하고, 회개의 세례를 받도록 한 것이다. 이는 전형적인 선지자들의 사역으로서 앞 선 선지자들이 시내산 언약에 기초하여 백성들을 가르치고 지도한 사역과 동일하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유대인들에게 "임박한 진노"를 선포하였고(마3: 7절, 10절, 12절), 동시에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권면하였다(8절, 10절). 이것은 전형적인 선지자의 사역을 보여준다. 세례 요한은 특별히 바리새인들에게 "독사(뱀, 사탄)의 자식들"이라고 저주를 선언하면서 그들 위에 임할 진노가 임박했다고 선포했다. 왜냐하면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 있기 때문에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는 찍어 불에 던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저주 선포는 시내산 언약의 저주에 근거한다. 따라서 요한은 그들에게도 회개하라고, 회개의 열매를 나타내라고 설교했다. 요한은 바리새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유대인들에게 동일한 설교를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자복하였다(3:6). 세례요한은 백성들이 무슨 죄를 회개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지적해 주었다. 옷 두벌 있는 자는 옷이 없는 자에게 나누어주라고 했고, 세례들에게는 정한 세금 외에는 늑징(勒徵)하지 말라고 했으며, 군인들에게는 사람들에게 강포를 행하지 말고, 무소(誣訴)하지 말고, 받는 요(임금)에 만족하라고 가르쳤다(눅3:10-14). 이것은 가르치는 사역이다.

또 세례 요한은 구약의 선지자들 특히, 이사야가 예언한 그 예언이 곧 이루어질 것을 선포하면서 오실 메시야, 그리스도를 맞이할 것을 촉구했다.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방법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일이다. 그리고 세례 요한은 회개한 자들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다. 물로 세례를 받는 것은 죄를 씻을 때, 용서하신다는 언약의 표와 인침이다. 이 뿐 아니라 요한은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시며, 그가 하실 일을 예고했다. 즉 그리스도는 세례 요한 자신이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하지 못할 능력 많으신 분이시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이시다.

* 선지자로서 요한의 사역의 핵심은 심판과 회개를 촉구하는 사역이었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가르치는 사역이었다.

2. 예수 그리스도

가장 크고 위대한 선지자는 예수님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천국)를 선포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셨다(막1:14-15). 그가 전한 천국의 복음은 전에 감취었다가 이제 나타난 "비밀"이었다(마13:11). 선지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들을 저희의 죄에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의 모든 계획을 밝혀주셨다. 이를 확정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많은 표적과 기사를 행하셨다(눅7장, 마11장, 요20:30-31).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실 때, 그리스도로 임직하셨다(마3:13-17). 그 때 그는 왕과 제사장 직분과 함께 선지자 직분을 취하셨다. 그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실 때, 그것은 바로 선지자로서 행한 사역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천국복음의 선포(설교)와 가르침을 들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고백하였다.

마16:14,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마21:11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요6:14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요7:40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선지자로서 예수님은 결코 자의로 말씀하지 않으셨다.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씀하셨다(요8:28). 그리고 오직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요8:38),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전하신 것이다(요17:8, 14). 그는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 곧 하나님의 선지자였다(요8:40).

선지자로서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를 성취된 관점에서 가르쳐서 천국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대로 보여주셨다(예, 마5-7장). 또한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을 향하여 저주를 선포하셨고(예, 마23장), 장차 이루어 질 일 예루살렘의 멸망과 당신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성령강림과 재림을 예언하기도 하셨다(마16장, 24-28장). 또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자신이 전한 그 말씀이 진정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확증하기 위하여 다양한 표적과 기사를 행하셨다. 복음서에 나타나는 각종 병 고치는 일과 귀신을 쫓아내신 일 그리고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과 같은 능력행함은 모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표적들이다.


C. 성령강림 이후의 선지자

1. 신약 교회의 선지자

사도 바울은 에베소의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움을 입었다고 말한다(엡2:20). 여기서 말하는 선지자들은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이 아니라 신약 시대의 선지자들이다. 사도 시대 당시에 예수님께서 교회에 주신 직분적 은사 중에 선지자들이 있었다. 에베소서4장 11절,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고전12장 28절에서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요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선지자는 분명히 신약의 교회 안에 한 직분자로 임명을 받았다. 그래서 성경에 나타나는 각 지역 교회에는 선지자라는 직분이 있었다. 예를 들어 고린도 교회뿐만 아니라 그 전에 이미 세워진 안디옥 교회에도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는데, 곧 바나바 시몬(니게르), 루기오(구레네 사람), 마나엔(분봉왕 헤롯의 젓동생), 사울 등이다(행13:1). 또 이미 예루살렘 교회에도 선지자들이 있었다(행11:27).

2 신약성경에 나타난 선지자들과 그 활동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세우진 신약 교회의 선지자들의 활동에 관한 구절은 사도행전에 단지 3 곳이 있다.

아가보(행11:27-30)

아가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선지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가 다른 선지자들과 함께 안디옥에 와서 "천하가 크게 흉년이 들리라"고 성령으로 예언하였다. 이 예언은 글라우디오 황제 때에 성취되었다. 이 예언은 단순히 흉년 들 것임을 예언했다기 보다는 오히려 교회들이 이 흉년의 때를 미리 준비하여 가난한 형제를 위해 부조할 것을 지도할 목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안디옥에 있는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형제들을 위하여 부조를 준비하였기 때문이다.

유다와 실라(행15:32)

유다와 실라는 선지자였다. 이 두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사도들의 결정 -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지 않고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 - 을 안디옥 교회에 전달하고,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였다." 여기서 선지자의 직무는 교회의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고(설교), 그 믿음을 굳게 하는 사역으로 나타난다.

아가보(행21:10-14)

이 아가보는 아마도 예루살렘 교회의 그 선지자일 것이다. 그는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할 것을 예언하였다. 그는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손과 발을 잡아매고서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고 말한 것이다.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선지자들의 사역은 첫째, 장래에 일어날 일을 예언하는 것,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치는 사역(과 권면)으로 정리된다.

3 고린도전서14장에서 "예언 혹은 예언하는 자(선지자)"의 특징

3절,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4절,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31절,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헬: [호 데 프로패튜온 안뜨로포이스 랄레이 오이코도맨 카이 파라클래신 카이 파라뮈띠안] 직역: 그러나 예언을 하는 자는 사람들에게 세움과 격려와 위로를 말한다.

이 구절들은 방언의 은사와 대조하는 가운데 예언의 은사를 받은 선지자는 세 가지 사역을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첫째, 덕을 세운다[오이코도맨] - 헬라어 "오이코도메오"는 집과 같은 건물을 높고 견고하게 세우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종종 하나님의 집인 교회와 관련하여 사용된다. 대표적으로, 마16:18에서 예수님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오이코도메오)"고 하셨다. 사도 베드로는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오이코도메오)"라고 하였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우는 일을 "건축한다(오이코도메오)"는 말로 표현했다. 그러므로 예언을 하는 자가 "오이코도메오" 한다는 것은 선지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으로 사람들에게 가르쳐서 그 신앙의 지식과 인격이 성장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 권면한다[파라클래신] - 선지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으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서 더욱 그 신앙에 힘쓰도록 격려하는 것을 말한다.

셋째, 안위한다[파라뮈띠안] - 선지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으로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특별히, 신자들이 신앙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시련을 만나 고통받는 상황에서 필요하다.

넷째, 배우게 한다[만따노] -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내용을 가지고 사람들을 가르쳐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해야 한다.

4. 요한계시록에서 예언의 특징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서 어느 주의 날에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계시를 받는다(1:1). 요한은 자기가 본 이 계시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라고 말하면서(2절) 다시 이것을 "예언의 말씀"이라고 말한다(3절). 그리고 이 예언의 말씀을 편지로 받은 수신자들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이다(4절). 그러므로 "예언"은 단순히 어떤 개인이나 공동체의 장래 운명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이다.

물론 요한계시록의 예언은 "반드시 속히 될 일"을 말하고 있다(1:1). 그러나 이 속이 될 일은 영광을 받으신 교회의 머리요 온 세상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주를 저버린 옛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의 완전한 멸망과 함께 그 가운데서 새 언약의 백성인 교회를 어떻게 보전하시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예언의 말씀 속에 장차 될 일과 교훈과 책망과 위로와 격려, 축복과 저주가 포함되어 있다.

5. 성경 전체는 예언의 말씀이다.

사도 베드로는 그의 독자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라고 말한다(벧후1:16). 그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로서 존귀와 영광을 받으신 사랑하는 아들에게서 친히 들은 예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리하심에 대한 "더 확실한 예언"이 있다고 말한다(19절). 이 구절에서 알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능력이나 또 그의 강림과 같은 사건들이 "예언"으로 불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 베드로는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벧후1:20-21)고 말한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내용 전체가 "예언"으로 불려지고 있음을 뜻한다. 모세가 기록한 창세기부터 사도 요한에 의해 기록된 66권의 성경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계시의 말씀 곧 "예언"이다.


D. 예언의 은사는 오늘도 존재하는가?

예언의 은사는 오늘날 신약 교회에 여전히 존재하는 은사인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예언의 은사를 주시는가? 이 질문에 대답을 하기 위하여 질문을 바꾸어 보자. 즉, 오늘날에도 여전히 예언하는 자, 즉 선지자라는 직분이 있는가? 예언자, 선지자 직분의 존속 여부가 예언의 은사의 존속 여부를 결정할 것이다.

1. 사도 시대의 교회는 선지자 직분이 있었다.

고린도 교회는 분명히 선지자들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언의 은사가 주어졌고, 그 선지자들은 교회의 공적인 모임(예배)에서 예언을 하여 신자들을 배우게 하고(만따노), 덕을 세우고(오이코도메오), 권면하고(파라클레오), 위로하였다(파라뮈떼오).

26절.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또 (위에서 언급한) 안디옥 교회에도 선지자들이 있었고(행13:1), 예루살렘 교회에도 많은 선지자들이 있었다. 이들 역시 각 교회의 공적인 모임에서 예언(계시)을 하여 신자들을 가르치고 권면하며 위로하였다.

2 우리 시대의 교회는 선지자 직분이 사라졌다.

사도 시대의 교회는 분명히 선지자 직분이 있었고, 따라서 예언의 은사가 주어졌다. 그러나 우리 시대는 선지자 직분이 사라졌으며, 따라서 예언의 은사도 중단되었다. 그렇다면, 왜 선지자 직분이 사라졌는가? 선지자 직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기초를 세우기 위하여 임시적 기간 동안에 교회에 세우신 직분이었기 때문이다.

엡2:20 너희는 사도와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움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에포이코도메뗀테스 에피 토 떼멜리오 톤 아포스톨론 카이 프로패톤, 온토스 아크로고니아이우 아우투 크리스투 예수]

사도 바울은 교회를 하나의 건물에 비유한다. 그는 이 교회의 모퉁이 돌(기초석)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이 교회의 기초는 바로 사도들과 선지자들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선지자들은 사도들과 함께 교회의 기초를 놓은 직분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면, 교회의 기초는 다 놓아졌는가? 그렇다. 고전도전서3장 10-11절에서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다"고 말한다. 이 구절을 통하여 바울을 포함한 모든 사도들과 함께 선지자들은 교회의 터를 닦아 둔 직분자들이었다. 그리고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이 터를 닦았고, 그들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을 자가 없다고 못을 박는다. 그러므로 다른 터를 닦을 자는 이제 없는 것이다. 즉 교회의 터(기초)를 놓을 직분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예언의 은사도 주어지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교회의 기초를 세우는 이 일은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사도와 선지자들에게 예언을 통하여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주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아 교회를 가르치고 권면하고 위로하였다.

또 더욱 분명한 구절은 고린도전서13장 8-12절이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사도 바울은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한다"고 말한다. 이 시점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첫 번째 편지를 쓸 때이다. 그 당시에 여전히 예언의 은사가 있었고, 선지자들은 교회를 가르치기 위하여 예언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온전한 예언이 아니라 "부분적인 예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의 선지자들은 다른 선지자들에게 제재를 받았다(휘포타쎄타이, 14:32). 여기서 선지자들이 다른 선지자들에게 제재를 받는다고 할 때 사용된 헬라어 단어는 "휘포타쎄타이"인데, 아내들이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할 때 사용된 그 단어와 동일한 것이다. 당시 예언의 말씀이 주어졌을 때, 하나님은 다른 선지자들을 통하여 앞의 예언을 수정하기도 하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당시의 예언은 완전한 것이 아니었고, 부분적이었다.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예언하는 사역이 폐하여질 것이라고 사도는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장성한 사람이 되었을 때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린 것과 같다. 어린아이였을 때는, 말하는 것과 깨닫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 이것은 바로 부분적으로 예언하던 시대를 가리킨다. 장성한 사람은 완전한 것이 올 때를 가리킨다. 장성한 사람이 되었을 때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린다는 것은 완전한 것이 올 때는 부분적으로 하던 예언의 사역이 끝난다는 것이다. 바울은 또 부분적으로 예언하던 시대를 거울로 보는 것 같다고 말한다. 부분적으로 예언하던 시대는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이 희미했다. 그러나 "그 때에는" 즉 온전한 것이 올 때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 온전히 알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 교회는 어린아이인가? 아니면, 장성한 사람이 되었는가? 지금 교회는 거울을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보고 있는가? 아니면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 같이 보고 있는가? 지금의 교회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장성한 어른이고, 거울이 아니라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처럼 밝게, 온전하게 보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완전한 것이 왔기 때문이다. 즉 완성된 계시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완성된 계시 그것은 곧 우리 손에 들려진 성경이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시대는 성경이 완성되지 못했다. 여전히 성경이 기록되고 있었던 시대였다.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예언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성경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모든 계시를 다 알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더 이상 예언의 은사가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E. 결론

우리는 지금까지 구약에서 신약까지 성경 전체를 통하여 예언의 기능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예언은 선지자의 직분과 관련을 맺고 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혹은 이방인들에게 말씀하시는 통로였고, 하나님의 입이었다.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백성들 혹은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역, 그것이 바로 예언이었다.

구약에서 이 예언은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는 것이나 혹은 그 축복과 저주가 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는 것, 하나님의 백성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것,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멸망과 회복을 선포하는 것 등이었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의 멸망과 회복을 선포하는 문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실 것과 그가 행하실 사역을 예언하는 것이었다.

신약에서도 여전히 예언의 은사가 있었는데, 그것은 사도 시대에 한한다. 선지자들은 사도들과 함께 예언 사역을 행하였는데,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아 교회들을 가르치고,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위로하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 시대에는 예언의 은사가 중단되었는데, 그 이유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교회의 기초를 다 닦아 놓았기 때문이다. 그 때 부분적으로 예언하던 것이 이제 완성이 되었다. 더 이상 다른 터를 닦을 사람이 없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더 이상 필요 없다. 어린아이처럼 말하고 깨닫고 생각하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장성한 사람의 시대이다. 이제 우리는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하지 않고,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듯이 완전하게 보고 있다. 그러므로 온전한 것이 온 지금, 성경이 우리 손에 들려진 지금은 부분적으로 예언하던 것이 폐하여졌다!



제4강 방언의 은사


들어가는 말

우리는 이제 성령의 선물들 중에서 다루기 어려운 은사 곧 방언의 문제를 공부하려고 한다. 문제의 핵심은 방언의 은사가 성령의 선물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다. 논점은 이 은사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주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여부이다. 즉 성령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 방언의 은사를 그의 뜻대로 분배하시는가? (고전12:11).

전통적으로 개혁교회(와 장로교회)는 방언의 은사가 중단되었다고 가르쳐 왔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오늘날 큰 도전을 받고 있다. 왜냐하면 소위 오순절파에 속한 교회들이 방언의 은사를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순절주의자들과 은사주의자들은 방언의 은사를 전혀 무리 없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또 복음주의 계열에 속한 교회들도 이에 동조하는 분위기이다. 소위 개혁주의라고 자처하는 장로교회에 속한 수많은 신자들 가운데서 방언을 한다고 말하고 있고, 심지어 방언의 은사가 여전히 주어지고 있다고 말하는 목사들도 많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방언의 은사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취해야 할 것이다. 전통적인 입장 - 방언의 은사는 중단되었다 -을 고수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교파들의 입장을 수용할 것인가? 만약 전통적인 입장을 고수한다면, 우리는 단연코 다른 교파들의 입장을 배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전통의 견해를 수정한다면, 우리는 지난날 우리의 과오를 회개해야 하고, 동시에 소위 오순절 교파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또한 성령론에 관한 많은 부분에서 우리는 오순절 신학을 따라야 할 것이다.

따라서 방언의 은사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정리하는 것은 교리와 생활 양면에서 너무도 중대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방언의 은사에 대해 경솔하지 않고 신중하게 공부해야 한다. 우리의 신앙에서 경험(체험)이 무시될 수 없는 것이라 인정할지라도, 심지어 그것이 한 두 개인의 체험이 아니라 대중적, 집단적 경험의 보고가 있다할지라도, 오직 우리는 계시된 성경을 통해서만 이 은사를 연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규범은 오직 성경이기 때문이다. 경험은 계시된 말씀에 따라 평가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방언에 대한 우리의 (개혁주의) 입장은 사람의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근거해야만 한다. 이는 철두철미한 성경해석이 요구되는 작업이다.

이제 우리는 크게 두 가지 논점을 따라 공부를 하고자 한다.

1. 방언은 어떤 기능을 하였는가?
2. 방언은 중단되었는가?


A. 방언은 어떤 기능을 하는 은사였는가?

1.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

모두에서 밝힌 대로 "방언"이 성령의 은사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고린도 전서12장에서 사도 바울은 분명히 방언의 은사를 언급하고 있다("어떤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10절).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등과 함께 방언은 확실히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들 중의 하나이다(11절).

2. 일종의 언어로서 방언

방언(方言)이라는 말 그 자체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방언은 헬라어로 " (글로싸)"라고 하는데, 이 말은 말 그대로 사람이 사용하는 "말(word)", "언어(language)"를 가리킨다. 이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방언" 즉 언어가 있다. 바벨탑 이전에는 이 세상에 "구음과 언어"가 하나였었다(창11:1). 그러나 바벨탑 사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고(창11:7,9), 이 때로부터 온 세상에 각 나라와 민족이 제각기 사용하는 각종 방언이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성령의 은사로서 주어진 방언 역시 각 민족들이 사용하고 있던 언어였다. 대표적인 예는 사도행전2장이다. 오순절기에 약속대로 강림하신 성령님은 제자들에게 "다른 방언"으로 말하게 하셨다(4절). 그 때에 천하 각국으로부터 온 유대인들은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5-6절). 그래서 그들은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태어)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8절). 이 사람들이 들었던 언어는 바대어, 메대어, 엘람어, 메소보다미아어, 유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 밤빌리아, 애굽, 리비야 여러 지방, 로마 등의 언어였다(9-10절).

두 번째 예는 사도행전10장이다. 사도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예수 그리스도는 이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셨고, 그들은 방언을 했다(44-48). 이 때의 방언은 분명, 이 땅의 언어였다. 왜냐하면 그때 베드로와 그와 함께 사람들은 이들이 말하는 방언의 내용을 알아들었다. 즉 베드로와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은 고넬료 집의 사람들이 하나님 높임을 들었기 때문이다(46절). 사도행전11장에서 베드로는 다른 사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신지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은 사도행전2장의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 사건을 가리킨다. 우리는 이 말에서 처음에 주셨던 방언과 고넬료 가정에 주신 방언이 동일한 것을 정당하게 추론할 수 있다.

세 번째 예는 사도행전19장이다. 사도 바울의 안수로 말미암아 성령을 받은 에베소의 제자들이 방언을 했다(6절). 이 구절에서 이들의 방언이 어떤 언어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사도행전에 나타난 다른 구절을 통해서 이들의 방언 역시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언어로 말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방언이 반드시 이 세상의 언어였다고 주장할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13장에서 "천사의 말"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1절). 그 구절은 이렇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원문을 직역하면, "만약 내가 사람들의 방언들과 천사들의 방언들로 말한다면.."이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하늘의 천사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소위 오늘날 방언을 한다고 하는 자들이 자신들의 방언은 천사의 말이라는 주장에 대해 굳이 반대하기 위하여 천사의 말이라는 것이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의 주장과는 별개로 천사들 사이에 의사소통을 위한 말은 분명히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부정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그러나 천사들이 사용하는 언어라고 해서 특별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같은, 말 그대로 일종의 언어이다.

참고

사도 바울은 고후12장에서 자신이 경험한 하나의 환상을 이야기한다(1절). 그때 그는 낙원으로 이끌려 갔고, 거기서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4절). 이 구절에서 "말할 수 없는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 (아래타 흐래마타)"인데, 여기서 "아래타(arreta, arretos)"는 첫째, 사람의 능력을 초월하기 때문에 형언할 수 없는 것이라는 뜻과 둘째, 너무도 거룩하고 신성하기 때문에 말하지 말아야만 하는 것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 만약 첫째 의미를 취한다면, 사도 바울은 낙원에서 형언할 수 없는 말씀을 들었는데, 자신의 이해를 초월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줄 수 없었다는 뜻이 된다. 두 번째 뜻을 취한다면, 사도 바울은 낙원에서 너무도 신성하고 거룩한 말씀을 들었는데, 그것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합법적이지 않고 또 허락되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대부분의 영역본은 두 번째 뜻을 취하고 있다. 여기서 "아래타 흐래마타"는 천사들의 언어(방언)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말씀하신 "계시"적 내용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3. 방언의 기능

주 예수 그리스도는 "유익하게 하기 위하여" 은사들을 분배하셨다(12:7). 그가 다양한 은사들을 주신 목적은 "성도를 온전케 하고,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함"이다(엡4:11-12). 그러므로 각양 은사들을 받은 모든 신자들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해야 한다(벧전4:10). 이 은사의 원리를 따라, 방언의 은사 역시도 교회를 세우는 일에 한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면, 방언의 은사는 구체적으로 어떤 봉사를 하는가?

고전14: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이 구절은 두 개의 이유 부사절로 구성되어 있다. 즉, "왜냐하면 방언으로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말하기 때문이다"는 구절과 또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듣지 못하고, 그가 영으로 비밀을 말하기 때문이다"이다. 이 두 개의 이유 부사절은 1절에 대한 이유이다. 1절에서, 사도 바울은 두 개의 명령을 한다. 즉 첫째는 "너희는 사랑을 추구하라( - )"고 한다("사랑을 따라 구하라"가 아니다). 13장에서 강조한 대로, 모든 은사들은 제일 좋은 길인 사랑의 방식과 태도로 사용되어야 한다. 그래서 신자들은 이 사랑을 추구해야 한다( ). 두 번째 명령은 "영적인 것들을, 특별히 너희가 예언하는 것을 사모하라"는 것이다. "사모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 ( )"인데, 이 의미는 첫째로 무엇인가를 얻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strive), 무엇을 하기를 몹시 원하는 것(desire)을 나타내며, 둘째는, 어떤 일이나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이 구절은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영적인 은사들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뜻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영적인 은사들을 결코 우리가 기도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그의 뜻대로 나누어주시는 것이기 때문이고(고전12:11), 또 이 은사들은 우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에 참여할 때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고전12:13, 행2:37-38).

그러면, 이 구절은 무슨 뜻인가? 고전12:31 전반부에서 바울은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고 말한다. 이때 " (더욱 큰 은사들[복수])"는 흔히들 생각하는 "사랑(제일 좋은 길)"이 아니라 28절에 기록된 첫째, 둘째, 셋째 즉 사도들, 선지자들, 교사들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사도들이나 선지자들이나 교사들이 되기를 열망하거나 이 직분적 은사들을 얻기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그 대신에 이 은사들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지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은사들이 더욱 크고 중요하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 구절에서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라"고 말할 때, 신령한 것들, 영적인 은사들에 깊은 관심을 가지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강조점은 그 다음 구절이다. 즉 "특별히 예언하기를 사모하라( --- )." 우리말은 "특별히 예언하려고 하라"고 번역했는데, 틀렸다. "특별히 예언의 은사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지라"는 뜻이다. 이것은 12:31과 부합한다.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의 은사에 열심 내어야 하고, 열심히 사모해야 한다(갈4:17 참조).

그 이유는 무엇인가? 2절이다. 2절은 두 개의 이유를 나타내는 부사절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은 사람에게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 말하기 때문이다. 둘째, 방언으로 말할 때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한다. 여기서 바울은 방언과 예언을 대조한다. 대조하는 목적은 고린도 교회가 특별히 예언하는 것을 사모하도록, 방언보다는 예언의 은사에 더 깊은 관심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안위하는 기능을 하지만, 방언은 단지 자신의 덕만 세우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말한다.

그러면, 여기서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은 사람에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 말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3절에서 방언과 대조하여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한다. 그 목적(혹은 결과)은 교회의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안위하는 것이다. 예언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기능이다. 그러나 방언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기능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말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기도와 찬송의 기능을 한다고 말할 수 있다. 14-15절에서 바울은 방언으로(혹은 영으로) 기도한다고 하고, 또 영으로 (혹은, 방언으로) 찬미한다고 말한다. 일단, 여기서 우리는 방언의 구체적인 기능은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찬미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도와 찬미의 내용

이제 그러면, 방언으로 기도하고 찬미하는 것의 내용은 무엇일까? 오늘날 소위 방언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일반적인 기도와 같은데 단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하는 것뿐인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기도할 때 드리는 기도의 내용과 같은 것인가? 아니다. 2절을 다시 볼 때, 두 번째 구절에서 방언을 말하는 자는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한다".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먼저, "비밀( )"은 무슨 비밀인가? 첫째로, 고전2:7에서 바울은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한다. 즉 그것은 전에는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이다(9절). 그것은 바로 영광의 주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통하여 얻게 되는 구원의 은혜를 말한다(8절). 또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들이 그들을 위하여 바울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을 들었는데(3:2). 그 은혜의 경륜은 계시를 통하여 바울에게 알게 하신 비밀을 말한다(3절). 그 비밀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비밀이다(4절). 그리스도의 비밀은 다른 세대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가 이제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이다(5절). 그것은 구체적으로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게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것이다(6절). 이와 같은 이야기를 바울은 골로새에 보낸 편지에서도 말하고 있다(26-27).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이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이 외에도 장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있을 부활도 비밀이고(고전15:51),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차기까지 유대인들이 완악하게 되는 것도 비밀이다(롬11:25). 이 외에도 하나님께서 교회의 터를 놓기 위하여 주시는 많은 비밀이 있다.

두 번째로, "영으로"는 사람의 영(spirit)이 아니라 "성령으로"의 뜻이다. 왜냐하면 이 비밀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나타내시는 것이기 때문이다(고전2:10, 엡3:5). 사도들과 선지자들 혹은 복음전하는 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비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계시받을 때, 성령으로 말미암아 받게 된다. 다른 말로, 사도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 예언을 받는 자들은 성령에 감동하심을 입게 되는 것이다(벧후1:20-21). 예언 혹은 비밀은 성령의 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딤후3:16).

기도는 찬미, 축복, 감사이다.

그러므로 방언으로 기도하는 자의 그 기도 내용은 바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신 비밀, 그리스도의 비밀, 구원의 비밀이다. 그것을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방언으로 기도한다는 사람들의 주장은 전적으로 오해이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결코 우리 자신을 위해, 가족을 위해, 혹은 교회를 위해서 간구하는 기도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14-15절에서 "기도"와 함께 "찬미"가 나오는데, 이 찬미는 방언으로 하는 기도와 달리 방언으로 노래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찬미"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 (프살로)"이다. 말 그대로 노래하고, 찬송한다는 뜻이다. 엡5:19에서 "시( )와 찬미( )와 신령한 노래들( )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라는 구절이 있다. 초대교회는 확실히 구약의 시편들을 노래로 불렀다. 그렇다고 해서 이 구절이 고린도 교회의 방언하는 자들이 곡조가 있는 노래로 방언을 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 왜냐하면 15절에서 기도와 찬미는 병행구절로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 기도의 성격은 찬미이다. 이것은 16절에서 지지를 얻고 있다. 바울은 방언으로 기도한 것을 "영으로 축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축복( )"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축복하신다고 할 때도 사용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을 축복한다고 할 때가 있다. 16절은 후자로서 사용되었는데, 이 경우는 찬송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또 바울은 방언으로 하나님을 축복한 것을 다시 "감사( )"라고 표현한다. 그러므로 방언으로 기도한 것은 우리 하나님께 방언으로 찬미한 것 = 축복한 것 = 감사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도행전에서 두 가지 예

우리는 이 사실을 사도행전에서도 확인한다. 첫 번째는, 오순절날 약속하신 성령께서 강림하셨을 때이다. 제자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했다(2:4). 그때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이 방언으로 말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들이 들었던 방언의 내용은 무엇인가? 11절, "....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그렇다. 처음 제자들이 했던 방언의 내용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 일( )"을 말했다. "하나님의 큰 일"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위대하신 사역을 말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위대한 구원의 사역을 말한다. 베드로의 설교에 나타난 것과 같이 첫째로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베풀어 그를 증거하신 것이며(2:22), 둘째로, 예수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고, 이스라엘이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주셨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를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다는 것이며(23-32), 셋째로, 하나님께서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셨고, 다윗의 말한 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원수를 그의 발등상 되게 하시기까지 하나님의 우편에 앉히셨다는 것과 그렇게 높아지신 예수께서 이제 약속하신 성령을 부어주셨다는 것이다(33-35). 한 마디로, 이스라엘이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은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36절).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큰 일"이었고, 제자들이 방언으로 말한 내용은 이것이었다.

두 번째는, 고넬료와 그의 일가와 친구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 했던 방언이다. 그들이 방언으로 말을 할 때, 그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46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그렇다. 고넬료를 비롯한 자들이 방언을 말할 때, 그들은 하나님을 높였다.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 단어는 " (메갈뤼노)"인데, 찬양, 찬미하다, 높이 영예를 돌리다는 뜻이다. 이것은 사도행전2장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한 것과 동일한 내용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3의 결론

방언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성령으로 말미암아 "비밀"을 말씀드리는 것이다. 그것은 기도의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그 기도는 "일용할 양식을 주십시오"라는 어떤 간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신 일"을 찬미하고, 축복하고, 감사한 것이었다.


4. 방언이 교회에 어떤 봉사를 했는가?

모든 은사들은 교회를 "유익하게 하기 위하여" 주신 것이며(고전12:7),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하여 주신 은사이다(엡4:11-12). 그래서 방언의 은사를 받은 자도 각각 하나님의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로서 교회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벧전4:10). 그렇다면, 방언은 어떤 식으로 교회에 봉사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14:26-28에 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 할꼬 너희가 모일 때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방언은 흔히 생각하듯이 단지 개인 기도를 하기 위해 주어진 것만은 아니다. 고린도 교회가 공적으로 모였을 때, 그들의 예배 순서에 방언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이 예배에서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순서를 따라 방언으로 말할 것을 권면한다. 당연히 이 방언을 통역해야 한다. 만약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방언을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은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다(6절). 통역되지 않는 방언이 유익이 되지 않는 것은 저나 거문고와 같은 악기가 그 음을 분명하게 소리를 내지 않으면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것과 같다(7절). 또 나팔이 분명한 소리를 내지 못하면 전쟁을 준비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이해하지 못하는 방언은 허공을치는 소리에 불과하다(8-9절). 예배 모임에서 방언으로 기도할 때, 기도하는 그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를 잘 드렸지만, 다른 사람은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에 "아멘"할 수 없고(16절), 덕 세움을 받지 못한다(17절).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다섯 마디 깨달은 말을 하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19절).

그러나 역으로 말하자면, 이 방언이 통역만 된다면, 그것은 확실히 교회에 유익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방언으로 기도하는 그 내용은 바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비밀"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는 것을 다른 신자들이 알아듣는다면, 분명히 신자들은 그 축복의 감사, 찬미의 감사에 "아멘"하게 될 것이며(16절) 또 덕 세움을 입게 되는 것이다(17절). 이것이 방언이 교회에 봉사하는 길이다. 실제로 고린도 교회가 공적으로 모였을 때, 방언은 그 예배에서 한 순서를 차지하면서 통역을 통하여 회중을 위하여 봉사를 했다. 바울은 당시 방언의 은사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공적 예배 때 그 방언의 봉사를 인정하면서 그 지침을 주고 있다. 즉 예배 때 방언을 하는 사람의 수는 두 사람 혹은 많으면 최대한 세 사람까지 할 수 있고, 또 이들이 한꺼번에 방언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에 한 사람씩(" ") 방언을 하도록 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40절). 그리고 한 사람은 통역을 하도록 했다. 만약 통역하는 자가 없다면, 예배 모임 때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금지되었다(28절). 어디까지나 모든 은사는 교회를 세우고, 회중에게 직접적인 봉사를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 방언을 말하는 자는 그 의미를 모르는가?

오늘날 소위 오순절파와 은사주의자들은 방언을 하되 통역의 은사를 받지 못한 자는 자신이 하는 방언의 내용을 알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12:4에서 바울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운다"고 말한다. 이 구절에서 "자기의 덕을 세운다"는 말과 "교회의 덕을 세운다"는 말이 병행을 이루고 있다. "덕을 세운다(오이코도메오)"는 것은 건물을 견고하고 높이 건축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종종 하나님의 집으로 묘사되는 교회에 적용되는데,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사는 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움을 입은 자라( ). 그리스도께서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2:20-22). 이 구절은 분명히 교회를 하나의 건축물(특히, 성전)에 비유하고 있다. 이 건축물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이루어진다. 그 "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특징지워지는 신앙의 내용이다. 또 바울은 4장에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표현하면서 이 몸을 세우는 것(" ")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이라고 말한다(13절).

그렇다면, 방언을 말하는 자가 자신의 덕을 세운다는 말은 방언을 말하는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자라고 온전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또 고전14:3절에서 덕을 세운다는 것은 권면과 안위와 함께 표현되고 있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적어도 그 방언을 통하여 신앙의 격려와 위로를 얻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이제, 방언을 하는 자가 그 방언의 의미를 모를 수 있겠는가?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자신이 세움을 입고, 격려와 위로를 얻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다른 구절에서 "아니라"는 답을 충분히 얻을 수 있다. 바울은 6절에서 자신이 고린도 교회에 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않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또 7절에서 저나 거문고와 같은 악기가 그 음을 분별있게 소리내지 않으면, 무슨 소리인지 모른다고 한다. 8절에서 나팔이 분명한 소리를 내지 못하면, 전쟁을 예배할 수 없다고 한다. 결국 알아듣지 못하는 그 말은 허공에다 하는 소리에 불과하며(9절), 뜻을 알지 못하는 그 소리는 말하는 자와 듣는 자 모두 서로에게 야만이 된다(10절). 한 마디로, 이 구절들은 그 뜻을 알지 못하는 말은 결코 덕을 세우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운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분명히 그 의미를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이런 결론을 내릴 때, 14:13-15이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이 구절은 얼핏 방언의 은사를 받은 자가 방언을 말하지만 그 의미는 알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 이유는 첫째, 방언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통역하는 은사를 주시도록 기도하라는 것 같고, 둘째, 방언으로 기도할 때, 그것은 나의 영이 기도하는 것으로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13절을 헬라어로 읽으면 다음과 같다.

.

여기서 문제는 " "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이다. " "를 목적을 나타내는 부사절로 번역하면, "그는 통역하기 위하여 기도하라(let him pray that he may interpret)"는 뜻이 되고, 명사절로 번역하면, "그는 통역하는 것을 기도하라(let him pray that he interpret)"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오순절주의자들은 전자의 뜻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후자로 보아야 한다. 문법적으로 14장에서 명사적으로 사용된 " "는 다음과 같다. 1절에서 "너희는 영적인 것들을 사모하라. 그러나 특별히 예언하는 것을 사모하라( , )"고 할 때, 는 두말할 것도 없이 명사절이다(한글개역성경은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번역했는데, 틀렸다). 또 5절에서 "그러나 나는 너희 모두가 방언으로 말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특별히 너희가 예언하기를 바란다( , )"할 때 역시 명사절이다. 12절, "이와 같이 너희도, 영적인 것들을 사모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에서 는 명사절이다. 물론 목적을 이끄는 부사절로 사용된 경우도 있다(5절의 두 번째 구절과 19절).

우리는 후자의 경우로 취하면서, 방언을 하는 자가 그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방언 통역으 은사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의미로 이 구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면, 너희가 통역하기를 기도하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 구절의 첫 단어는 (그러므로)로 시작된다. 이 단어는 12절과 긴밀한 연관을 갖고 있다. 그리고 12절은 6-11(더 넓게는 2-11)절의 결론이다. 1절에서 바울은 이미 예언에 깊은 관심을 갖기를 명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방언과 예언을 대조하면서 밝혔다.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은 방언이 아니라 예언이기 때문이다(2-5절). 또 6-11절에서 바울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이해하지 못하는 방언은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고 명한다.

여기서 "풍성하기를 구하라"는 것은 무엇인가? 풍성한 것은 6-11절 문맥에서 이해할 때, 유익한 것(6절), 그 음의 분별을 내는 것(7절), 분명한 소리를 내는 것(8절),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는 것(9절), 뜻 없는 소리를 내지 않는 것(10절), 말하는 자와 듣는 자가 서로 야만이 되지 않는 것(11절) 등이다. 즉 한 마디로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 바로 풍성한 것이다. 이것을 구하라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말이 아니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힘써 노력하라는 말이다. 여기 사용된 "구하라( )"는 단어는 물론 하나님께 기도하다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마7:7 등).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 단어는 잃어버린 물건을 찾거나(마18:12, 눅19:10), 만나야 할 사람을 찾거나(딤후1:17), 악한 일을 도모할 때 방책을 연구하는 것(막11:18, 14:1 등), 목적하는 바를 얻기 위하여 힘써서 노력하는 것(고전7:27, 계9:6)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본 구절에서는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라 "힘써 노력하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바울은 13절에서 "그러므로 방언으로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하라"고 말한다. 방언의 은사를 받은 자들은 교회가 풍성할 것을 추구해야 하고,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그렇다면, 방언으로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해야 한다. 앞에서 우리는 방언은 하나님께 말하는 것 즉 기도하는 것을 배웠다. 따라서 방언으로 기도하는 자는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으로만 기도하지 말고, 통역해야 한다는 것이 이 구절의 의미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14절은 13절에 대한 이유를 밝히는 부사절이다. "왜냐하면 내가 만약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지만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 1인칭 "나"는 물론 바울 자신을 가리키겠지만, 고린도 교회의 방언하는 사람 전체를 대표하는 말이다. 이 문맥은 단순히 개인기도가 아니라 공적인 모임에서 행하는 방언기도를 가리키고 있다(26절, 참조, 물론 개인기도로도 사용되었다, 28절). 여기서 "나의 영이 기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육체와 대조를 이루는 개념으로써 내 영혼이 기도한다는 뜻일까? 아니면 성령께서 내 속에 역사하여 새롭게 창조한 새 사람이 기도한다는 것일까? 또 아니면 내 속에 계신 성령이 기도한다는 것일까? 마지막 세 번째이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지금 "내 영"과 "내 마음"을 대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 서신에서 사람의 영(혼)과 사람의 마음이 대조를 이루는 경우가 없다. 오히려 사람의 영혼은 사람의 육체와 대조를 이룬다. 그렇다면, 이 구절에서 "나의 영"은 "나의 마음"과 대조를 이루는 사람의 영혼이 아니라, 성령이시다. 이 사실은 15-16절의 병행구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한다"고 했을 때, 이 구절은 영과 마음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내가 영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확인했듯이 "내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비밀을 말한다"는 것이다(14:2). 이에 대조하여 "나는 마음으로 기도한다"는 것이다.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자. 이 구절은 정말 방언으로 기도하는 내가 그 의미를 모르는 것인가? 내 영이 기도할 때, 즉 내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비밀을 말할 때, 내 마음은 그 내용을 모른다는 뜻인가? 그래서 방언 통역의 은사를 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15절을 보자.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이 구절은 오순절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방언으로 기도하다가 또 우리말로 기도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보자, 먼저 방언으로(혹은 영으로) 이렇게 기도한다. "구푸풀라 수기빠빠 기기다다 우꾸살라 가빠일라(1)", 그 다음에 내 마음으로 기도한다: "하나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2)", 또 방언으로 기도한다: "비비삘라 마구꿀로, 루빨리사 하날로까(3)", 그리고 또 마음으로 기도한다: "주여,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4)".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나는 (1)과(3)의 내용은 전혀 모른다. 그러면서 (2)와 (4)의 내용으로 기도한다는 것이다. 과연, 우리 본문이 그것을 말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지금 14장의 주제는 은사들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방언을 하는 자들도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으로 말할 것이 아니라 그 방언을 통역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영으로 기도하는 것과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은 그 내용이 다를 수 없는 것이다. 위에 예로 언급된 (1)은 곧 (2)의 내용이어야 하고, (3)의 방언기도는 (4)의 마음의 기도와 동일한 것이다.

이러한 나의 주장은 16-17절에서도 지지를 얻는다.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 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입지 못하리라."

"그렇지 아니하면", 즉 영으로만 기도하고, 마음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면, 또 영으로만 찬미하고 마음으로는 하지 않으면,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한 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또 그가 방언으로 기도한 축복(찬양)과 감사에 "아멘"을 할 수 없게 된다. 방언으로 기도한 그 사람은 감사를 잘 하였지만, 다른 사람은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에 덕 세움을 입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영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은 결코 오순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을 뒷받침하지 않는다. 오히려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즉시 통역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야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들이 알아듣고 함께 아멘하게 되고, 덕 세움을 입게 된다.


5. 불신자들에게 표적으로써 방언

먼저 해당 본문을 읽어보자(14:20-25).

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21.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22.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23.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않겠느냐? 24.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25.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


바울의 인용구절에 문제가 있는가?
사도 바울이 인용하고 있는 "율법(21절)"은 이사야 28:11과 12절 하반절이다. 많은 주석가들은 바울의 인용문에 난제가 있다고 하는데, 나는 별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다. 그들은 맛소라 사본과 70인 역이 서로 다르고, 또 바울이 인용한 글도 이 두 사본과 각각 다르다고 말한다. 물론 바울은 사28:11-12을 전체 다 인용하지 않는다. 다만 12절의 전반부를 생략했을 뿐이다. 그러나 11절과 12절 후반부는 정확하게 인용한 것이다.

먼저 바울이 기록하고 있는 헬라어 본문을 보자



' .

"다른 방언들로 그리고 다른 입술로
내가 이 백성에게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고) 이와 같이 그들은 나를 듣지 않을 것이다."

이제 맛소라 사본을 읽어보자.

11절, "왜냐하면 외국인의 입술과 외국인의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12절 전반부, "그가 그들에게
'이것이 안식이다, 피곤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그리고 이것이 휴식이다'라고 말씀하셨다."

12절 후반부 "그러나 그들은 듣지 않을 것이다."

위 구절에서 차이점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사야가 "외국인의 입술", "외국인의 방언"이라고 한 것을 바울은 "다른 방언", "다른 입술"이라고 인용한 것이다. 여기서 일단 "입술"과 "방언"의 순서가 바뀌었고, "외국인"을 "다른"으로 번역했을 뿐이다. 이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두 번째는 이사야가 "'그가' 이 백성에게 말할 것이다"라고 한 것을 "내가 이 백성에게 말할 것이다"라고 번역하였는데, 3인칭에서 1인칭으로 바뀌었을 뿐 의미상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사야28:11-12의 의미

그렇다면, 이사야28장의 의미는 무엇인가? 보다 더 넓은 문맥을 보자. 이사야28-29장의 예언은 7-12장과 똑같은 배경을 하고 있고, 그 내용도 거의 병행을 이루고 있다. 즉 둘 다 북쪽 이스라엘의 침입을 앞두고 아하스 왕이 앗수르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에 대한 책망과 심판 그리고 미래에 대한 소망이 주어지고 있다. 그러나 7-12장은 아하스 왕에게 주신 말씀인 반면에 28-29장은 백성들과 그 지도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또 전자는 다윗 가문의 보존에 대하여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후자는 이스라엘 국가(백성)의 존속에 대해 종점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이것을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1. 에브라임의 교만한 면류관(28:1-6)
북쪽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인 사마리아 성이 현재의 부와 힘을 누리면서 교만해져 있다. 그러나 이 성은 곧 시들어 가는 꽃과 같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앗수르가 와서 북왕국 이스라엘을 짓밟을 것이다.

2. 유다 사람들도(28:7-8)
유다의 방백들, 제사장, 선지자들이 앗수르에 요청한 외교가 성공한 것을 인하여 축하연을 가지고 있다. 이 향연의 자리에 이사야가 유다의 백성들, 선지자들, 제사장들의 실수와 오류를 꾸짖는다.

3.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는 결과(28:9-13)
선지자가 말할 때에 이 백성들은 아예 듣지 않으려 한다. 마치 갓 젖을 뗀 아이에게 지식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과 같다면서 그들은 이사야를 비웃는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렇게 흉내를 낸다.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10절). 이 말은 의미가 있는 말이 아니라 단지 소리와 음률을 위한 표현일 뿐이다. 즉 '네(이사야)가 이러쿵 저러쿵...."지꺼리는 소리는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말이다.

그때 이사야는 장차 외국인들이 와서 실제로 그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를 할 것임을 예언한다(11절). "외국인(생소한)의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하나님은 전에 "이것이 너희 안식이다, 피곤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이것이 너희 휴식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의 배경은 이렇다. 유다의 아하스 왕이 아람과 에브라임(북왕국 이스라엘)이 동맹하여 침략할 것을 대비하고 있었다(7:1-3). 그때 하나님은 이사야를 보내어 하나님이 친히 다윗의 가문과 유다를 보호하실 것이라고 하면서(4-9), 그것을 확증하는 징조(표징)를 구하라고 하셨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유다 왕와 유다 백성들에게 주시는 안식이다. 그러나 아하스는 하나님의 제의를 교만히 거절한다(12절). 왜냐하면 그는 이미 앗수르와 동맹을 맺고 원조를 청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윗의 집이 유다의 백성들을 괴롭게 하고, 또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일이다(13절).

아하스와 똑같이 이스라엘의 선지자들, 제사장들, 방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앗수르와 언약을 맺고 그 나라를 의지하였다(28:14-15). 그래서 하나님은 아하스 왕뿐만 아니라 선지자들과 제사장들과 방백들과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사 그들로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잡히게 되리라."(13절).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자들이 가다가 뒤로 넘어지고 부러지고 걸리고 잡히도록 하기 위하여 '차오 라차오, 차오 라차오, 카오 라카오, 카오 라카오, 쯔이르 솸 쯔이르 솸'이라고 말씀하실 것이라는 말이다. '차오 라차오.... 솸'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무슨 뜻이 있는 말이 아니라 의미 없이 지껄이는 소리이다. 이것은 장차 앗수르 군대가 와서 유다가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로 말할 때, 사람들은 급하게 도망가다가 뒤로 넘어지고 걸리고, 사로잡히게 될 것을 말한다. 이것은 선지자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한 댓가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심판이다.

4. 사망/ 견고한 기초석(14-22)
유다가 앗수르와 언약을 맺은 것은 사실상 사망과 언약을 맺은 것이다. 그래서 앗수르가 올 때, 그 나라는 유다를 살려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다를 죽일 것이며, 짓밟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온에 한 돌,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석을 둘 것인데, 이를 믿는 자는 앗수르가 올 때에도 급절하게 않게 될 것이다.

5. 자기 백성을 채찍질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28:23-29)
이사야는 농부의 농사법을 비유로 들면서, 농부는 밭을 갈고, 파종하고, 추수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갈고, 심고, 자라게 할뿐 아니라 타작도 하신다. 여기서 타작은 심판의 상징어이다. 언약을 파기한 백성들을 향하여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은 저주를 내리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믿지 아니하는 자를 위한 표적

사도 바울은 이사야의 구절을 인용한 후에 그것을 방언과 연관을 시킨다.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다"(22절 상). '표적'이라는 말은 한글개역성경에서는 '표징', '징조'라는 말로 번역되었다. 헬라어로 ' (세메이온)', 히브리어로는 ' (오트)'라고 한다. 이 말은 보통 하나님의 약속을 표시하고 인치는 기능을 할 때 사용한다. 예를 들어보자.

- 하나님은 노아와 언약을 맺으신 후 무지개를 언약의 "표적"(한글개역은 '증거'로 번역함)으로 세우셨다(창9:17).
-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신 후 할례를 언약의 "표적"(한글개역은 '표징'으로 번역함)으로 시행하라고 명하셨다(창17:11).
- 하나님은 아하스 왕에게 그가 유다를 아람과 이스라엘의 손에서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신 후 한 "표적"(한글개역성경은 '징조'라고 번역함)을 구하라고 하셨다. 아하스가 구하지 않자 하나님은 친히 "표적"을 주셨는데, 그것이 곧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것이다(사7:13-14).
-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들"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을 확증하는 것이었다(요20:30-31).
-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할 때, 부가적으로 일어난 "표적들"은 그 말씀을 확증하는 기능을 하였다(막16:19-20, 히2:4).
- 신약의 세례는 구약의 할례를 대치하는 언약의 표적으로써 죄 용서(죄 씻음)와 영생에 대한 표와 확증의 역할을 한다(골1:11-12).

위의 예들을 통하여 확인하듯이, 표적은 하나님의 약속(말씀)을 표시하고 확증하는 기능을 한다. 방언이 표적이라고 할 때, 그 역시 그러한 기능을 한다.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표적이다. 여기서 '믿지 않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믿지 않는 자를 말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불신자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 무엇을 약속하셨는가? 언약이 저주요 심판이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행2:38)', 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회개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성령의 선물이 아니라, 구원이 아니라 영원한 진노와 멸망이 있다. 바로 이것을 표시하고 확증하는 것이 바로 방언의 은사였다. 방언의 은사는 믿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신다는 언약의 "표적"이다.

그러나 여기서 '믿지 않는 자들'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모든 시대의 불신자들을 말하는가? 아니다. 옛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 중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이에 대한 근거는 먼저 사도 바울이 율법을 인용하고 있다는 것이다(14:21). 바울이 인용했던 율법은 앞에서 살핀 대로 이사야28장이다. 유다 왕 아하스 뿐만 아니라 방백들과 선지자들, 제사장들까지 하나님과 언약을 파기하고 오히려 앗수르와 언약을 맺었다. 하나님은 자기의 도움의 약속을 믿지 않고, 의지하지 않는 자들을 그들이 믿고 의지하던 앗수르를 통하여 징계하고 심판하실 것이라고 하신다. 이때 하나님은 그 심판의 약속을 확증하기 위하여 "표적"을 주시는데, 바로 "생소한 입술과 외국의 방언"이었다.

하나님이 불신하는 언약의 백성을 심판하실 때, 다른 방언으로 사용하는 자들을 통하여 심판하신 것은 한 두 번이 아니다. 유다는 결국 주전 586년 바벨론이라는 또 다른 방언을 사용하는 자들에 의해 심판을 받는다. 이후 포로에서 돌아온 언약의 백성들이 또 다시 언약을 파기했을 때, 그들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자들에 의해 심판을 받는다. 그러다가 주후 70년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던 옛 언약의 백성들은 또 다른 외국 언어를 사용하는 로마 군대에 의해 완전히 짓밟힘을 당한다. 초대교회들 가운데 나타났던 이 방언은 바로 믿지 않는 유대인들, 언약의 백성들에 대한 심판에 대한 표적이었다.


6. 방언의 은사는 중단되었다.


우리는 결론부터 말하고자 한다. "방언의 은사는 중단되었다."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두 가지이다.

첫째, 방언의 기능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비밀"을 말씀드린 것이기 때문이다. "비밀"은,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이며, 천국(복음)의 비밀이며,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비밀이다. 이것은 "계시"의 내용이며, "예언"의 내용이다. 그런데, 사도와 선지자들을 통하여 "비밀"이 계시된 때가 끝이 났다. 예언의 은사가 폐지되었다. 사도와 선지자들은 교회의 터를 다 닦았다(엡2:20). 이제 그 터 위에 다른 터를 닦을 사람이 없다(고전3:1이하). 그러므로 예언의 은사의 폐지와 함께 자동적으로 방언의 은사도 중단되는 것이다. 그때에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였다.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여진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함으로써 구약과 함께 신약의 성경이 완성되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13:8에서 "...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제 온전한 것이 왔다. 예언이 온전히 주어졌고, 그래서 지식도 완전해졌다.

둘째, 방언의 기능은 믿지 않는 자들, 불순종한 옛 언약 백성들을 위한 표적이다. 하나님께 불순종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후70년에 완전히 멸망한다.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님의 예언을 따라 완전히 무너졌다(마24:2, 막13:2, 눅21:6). 셀 수 없이 많은 백성들이 로마의 군대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하고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한 옛 언약의 백성들은 주님이 말씀에 순종함으로 구원을 얻었다(눅21:21).

만약 방언이 모든 시대의 불신자들을 위한 표적이라면, 오늘날에도 여전히 방언은 존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방언은 예언의 은사와 함께 중단되었기 때문에, 모든 시대의 불신자들을 위한, 오늘 우리 시대의 불신자들을 위한 표적이라고 할 수 없다. 옛 언약의 백성들 중 믿지 아니하는 자들,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마지막 심판을 내리실 것인데, 그것에 대한 표적이 바로 방언의 은사였다.

7. 오늘날 현상적인 방언은 무엇인가?

이 모든 연구와 토론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생긴다. "오늘날 실제로 방언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이에 대해 더 이상 많은 말을 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경험이 우리의 신앙의 기초가 아니며, 신자의 체험이 성경을 검증하는 잣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신자의 경험은 오직 약속의 말씀을 확인하는 것일 뿐, 그것이 우리의 믿음을 견고히 세우는 것이 될 수 없다. 우리의 믿음의 근거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을 경험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상관없이 말이다.

그럼에도 현상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몇 가지 설명을 하고자 한다.

첫째, 오늘날 방언의 현상은 마귀의 역사이다.

마귀는 하나님과 그 언약의 백성들의 대적자로서 거짓된 진리를 가장하는 자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이 사실을 주지시켰다. 거짓 사도와 궤휼의 역군들이 자기들을 그리스도의 사도,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은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기 때문이다(고후11:13-15). 여기서 사용된 "가장"이라는 단어는 실제 내용이 아니라 모양을 바꾸는 것을 말한다(" "). 거짓 사도들은 실제로 그리스도의 사도와 일군이 아니라 단지 겉모양만 그렇게 나타내 보일 뿐이다. 또 사탄도 실제로 광명의 천사가 아니라 단지 겉모양만 그렇게 보일 뿐이다. 이와 같이 사탄은 방언의 은사도 그렇게 겉모양이 비슷하게 변형시킬 수 있다. 실제로 성령이 주시는 은사로써 하나님께 말씀 드리는 "비밀"의 내용은 없으면서, 단지 사람들에게 이상한 소리만을 말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사람들은 그것이 성령이 주시는 은사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사탄이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을" 행할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살후2:9). 이것들은 모두 '불의의 속임'이다(살후2:10). 사탄은 이렇게 이미 종결된 방언의 은사를 참된 것으로 가장하여 신자들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 전서에서 이렇게 경고한다. "성령께서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교회 역사 속에서 언약의 백성들이 바른 믿음에서 떠났다. 그들은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랐다. 분명히 예언의 은사와 함께 종결된 방언의 은사를 가르치는 것은 악한 영이 신자들을 미혹케 하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성령의 가르침이 아니다.

오늘날 '가장된 방언'이 거짓된 종교들 가운데서 발견된다. 이방종교의 의식행위에서 귀신들린 사람들이 스와힐리어나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기도 하고, 아프리카 통가(Thonga) 사람들은 귀신이 쫓겨나가게 될 경우 그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줄루(Zulu)어로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또한 사탄이 역사하는 가장된 방언은 모슬렘이나 에스키모, 티벳의 승려들 가운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방종교에서 사용하는 황홀경의 언어(가장된 방언)은 모두 사탄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것들로서, 오늘날 오순절파 교회와 은사주의들이 한다는 그 방언도 사탄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로, 방언은 심리적으로 야기될 수도 있다.

사탄의 역사로 가장된 방언을 받는 경우가 아닌 두 번째 경우는 무의식적인 신경작용으로 빠져 들어갈 때, 방언을 말할 수 있게 된다. 무의식적 신경작용이란 모든 수의근(voluntary muscles)이 의식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록 콘서트에 참여한 십대들이 열광의 함성 속에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드는 것을 종종 본다. 그들은 그야말로 의식의 통제를 상실한다. 그것이 극에 달할 경우 실신하기까지 한다.

방언도 이와 같은 상태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전에 부흥회에 참석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분명히 알 것이다. 특별히, 소위 은사 집회를 하는 경우, 사람들은 방언의 은사를 받기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다 못해 미친 듯이 기도하는 것을 보게 된다. 눈을 감고, 손을 흔들고, 몸을 앞 뒤로, 혹은 옆으로 흔들면서 고함을 지른다. 그리고 그들이 외치는 기도는 거의 주문에 가깝다. 흔들거나 박수를 치면서 '주여, 주여, 주여 주시옵소서, 방언의 은사를 주시옵소서, 주여, 방언, 은사, 주여, 주여, 주여, 주주주주주주....' 그리고는 넘어간다. 이것은 거의 최면상태와 같다. 어떤 연구가들은 이렇게 말한다. "최면 상태는 방언 경험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의 것으로 만약 누군가가 최면 상태에 빠져 있다면, 그 사람은 방언을 할 수 있는 적합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셋째로, 오늘날 방언은 학습된 경우가 많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학습으로 말미암아 방언을 하는 경우가 있다. 소위 방언을 한다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방언을 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하여 몇 가지 좋은 예가 되는 음운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 소리를 반복해서 말하게 한다. 주문과도 같은 소리를 반복해서 하게 될 때, 그 말이 그 사람의 입에 익숙해지면, 그와 같은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마치 성령으로부터 방언의 은사를 받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은사인가? 배워서 하게 되는 방언이 무슨 성령의 은사인가? 허기사 방언 세미나를 통하여 방언을 배운다고 하니 더 무엇을 말하리요? 성령의 은사, 특히 방언의 은사는 전혀 학습하지 않는 상태에서 초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비밀을 말하고,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는 것이 바로 방언의 은사이다.


*글쓴 이/김영환 목사, 언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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