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1:13-17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
갈라디아서 6:3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
빌립보서 3:4-9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 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
히브리서 6:4-6 "한번 비침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 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
신앙으로 포장된 헛된 열심
신앙생활에 열심을 낼 수 있다는 것은 복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일평생 지칠줄 모르는 뜨거운 열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진실로 복됩니다. 이런 사람은 참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사람이리라!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가 반드시 고려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그 열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합치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전혀 무관하게 행해지는 열심이란 얼마나 비극적인 것이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거듭나기 이전인 사도 바울의 전반부 생애가 바로 이러한 모순을 보여주는 삶이었습니다.
바울은 대단히 열심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열심은 사실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었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적함에 있어서 열심이었습니다.
이로 보건대 열심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과연 그 열심이 얼마만큼이나 바른 것이냐의 여부가 더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바른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되어지는 열심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바울이 사도로써 활동하게 되었기 이전에 행했던 기독교에 대한 열정적인 핍박과 그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뵈옵게 되는 것을 통하여 그 동안 헛된 열심의 본당이었던 '유대교'를 과감하게 떠난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거기서 바울이기 이전의 사울은 과연 부정적인 평가만을 받기에 합당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사울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일에 열심내고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지 못하였다고 잘못 생각하는 경우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구원을 받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았다고 잘못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과거의 사울은 바로 이같은 모순된 상태에 있었던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확실히 정상적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의 모습과는 먼 거리에 있었습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스로 를 하나님의 일에 열심내는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자신이 누리고 있는 구원의 문제를 한번쯤 진지하게 재검토해 보는 것은 대단히 유익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종교적인 일에 열심을 내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결코 구원받은 결정적인 증거가 되지 않음에도 북구하고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잘못 안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재확인의 문제는 결코 어줍잖은 자존심으로 말미암아 무시되어야 할 성격의 것이 아니며, 가볍게 취급할 것은 더 더욱 아닙니다. 참으로 바울과 같은 위대한 사람이 한 때 잘못된 '복음의 헛된 열심자'였다면, 우리와 같은 사람은 더 더욱 그럴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구원의 확신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핵심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당시의 바울은 분명 구원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자신이 행하고 있는 열심으로 구원받은 자라고 스스로 착각하고 사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자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왜곡된 유대주의 신앙
바울은 '내가 유대교에 있을 때에'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에 '유대교'에 있었습니다. 이 종교는 이스라엘이 70년간의 포로 생활을 끝내고 귀환한 이후부터 시작된 종교 운동으로부터 형성된 종파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구약적 종교가 변질된 종교입니다. 그 발전 과정을 간추려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은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성전을 건축하였습니다. 그들에게서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제사 제도의 복원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남기를 원하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에 있어서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제사의 발전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되어졌습니다.
첫째로 모세의 성막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이후 시내산에 머물러 있으면서 받은 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 설계를 보이신 특성으로 인하여 정교함과 섬세함에 있어서 대단히 뛰어난 성막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보였던 불신앙적 삶으로 말미암아 엘리 제사장 때에 블레셋에 의하여 파괴되었습니다.
둘째로, 솔로몬의 성전입니다. 이것은 가나안 땅에서 굳건한 국가를 수립하게 되었을 때 세워진 매우 장엄하고 화려하며 튼튼하기로 이름난 성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성전도 끝내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이 초래한 하나님의 징계로 바벨론의 침공을 받아 B. C. 586년에 철저하게 파괴당하였습니다.
셋째로, 스룹바벨 성전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70년간의 포로 생활을 끝내고 본토로 돌아온 뒤 건축한 성전입니다. 그러나 솔로몬 때의 성전을 간단하게 복원한 외형만의 초라한 성전이었습니다.
넷째로, 헤롯 성전입니다. 헤롯 왕이 정치적인 계산 하에 스룹바벨의 성전을 웅장하게 증축한 것이었습니다. A D. 70년에 로마의 디도에 의하여 철저하게 파괴당하였고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지금 그 자리에는 모하멧교의 사원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들 성전이 보여주고 있는 신학적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율법에 대하여 신실하게 순종하게 하려는 데에도 있습니다. 즉 성전에서 행해지는 외적인 의식 못지 않게 여타 다른 도덕 계명들에 대한 순종 또한 요구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할 때 저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이라는 특성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운동이 유대교의 등장과 함께 서서히 빗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외형과 형식만이 대두되어 사실상 중요하고도 핵심인 내면적인 도덕성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외식과 형식의 위선만이 난무하였습니다.
그런 식으로 율법을 보다 엄격하게 지키려는 운동은 변질된 상태에서 점점 그 도를 더하여만 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유대교의 출발이 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유대교는 구약의 종교사상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근간이었던 '구약의 신앙적인 역사' 그 자체가 유대교인 것은 아닙니다. 말하자면 유대교는 구약 종교의 변질된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교를 지탱하고 있었던 세 기둥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성경의 확정 작업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부하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자신들의 신앙 원리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확정하는 일은 이 시기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둘째, 회당의 건축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70년간의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면서 성전에서 행하지 못하는 제사 의식을 대신하여 성경을 읽고 기도를 드리기 위하여 회당을 건축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에서 귀환한 후에도 이 회당 운동을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해 나갔습니다.
셋째, 유대인은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제사장들과 부자들이 세속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시대적으로 조상의 율법에 진지하기를 원하는 일단의 반대작용적인 운동도 역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운동은 자연히 랍비 계급의 형성으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랍비들은 이스라엘이 보유하고 있었던 고유한 레위 제사장들의 가르치는 직무를 대신하였습니다.
이런 식의 과정 안에서 이스라엘은 점차 고유한 신앙을 잃어버리고 훗날 유대교로 불리우는 종교로 변질되어 갔습니다. 처음에 좋은 의도에서 시작된 개혁 운동이 점차 그 본질적인 특성이 상실되어가는 중에 본질을 변질시키는 데까지 나아갔던 것입니다.
이처럼 왜곡된 길로 나아가기 시작한 잘못된 개혁 운동은 점차 여러 가지 부작용도 낳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많은 당파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시에 다음과 같은 부류의 당파 - 교단 - 가 형성되었습니다.
첫째, 사두개파입니다. 이들은 주로 세력 있는 지도 계층의 제사장들과 뼈대있는 가문들로 이루어졌습니다. 저희는 '모세오경'만을 성경으로 여기면서 엄격한 정치체제로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고자 하였습니다.
둘째, 엣세네파입니다. 경건한 삶의 고도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동굴에 집단으로 운둔하였던 은둔주의자들입니다. 엄격한 규율 하에 고행을 추구하였습니다.
셋째, 바리새파입니다. 서기관들의 가르침을 추종하여 율법의 엄격한 준수를 추구하였던 종파입니다. 훗날 위선과 외식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넷째, 열심당입니다. 바리새파외 사두개파의 중간 정도의 노선을 걷는 파벌인데 악인을 제거하기 위하여는 살인까지도 서슴치 않았던 과격한 집단이었습니다. 저들은 무력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도래시키고자 하였습니다.
바울의 무익한 열심
바울 당시 '바리새파'는 '샴마이 학파'와 '힐렐 학파'라고 하는 두 기둥과도 같은 학파가 지배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중 힐렐 학파의 후계자인 '가말리엘' 밑에서 엄격한 율법 교육을 받았습니다.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교법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간 밖에 나가게 하고"(행 5:34),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행 22:3).
바울은 당시 스데반의 죽음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스데반은 유대교의 핵심이요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성전의 무용론'을 감히 부르짖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일을 과감히 부르짖다가 유대교도들로부터 폭행을 당하여 돌에 맞아 죽음을 당했습니다. 스데반은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건물 안에 계시는 분이 아니시라고 역설하였습니다. 성전은 계시적 의미를 가지는 상징물일 뿐이었습니다. 그림자가 사라지고 몸이 도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유대교의 성전과 회당이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부르짖었습니다. 사도행전 7장 1-60절을 보십시오. 그중에서 특히 48-50절을 주의깊게 보십시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바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사실 신학적으로 보건대 이스라엘에게 허락되었던 성전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중에 대속적 죽음으로 죄인들을 구속하실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등장하였던 것이기에 모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 2:19-22).
성막과 성전, 그리고 그것을 중심으로 해서 전개되었던 일체의 종교적 행위 - 성막 그 자체의 계시와 그 안에서 드려졌던 모든 제의법 등등 - 의 상징이 모형적으로 계시되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영원한 구속의 진리를 드러내어 믿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구약의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과 만나시는 교제의 장소로써 의미가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은 그가 계시하셨던 각종 제사를 통하여 저희의 거룩하신 분과 교제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제사와 예배의 장소가 한 곳에만 있어야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단일성과 하나로 통일된 백성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하나라는 것을 실증해 보이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우셔서 특별한 방법으로 그것에 임재하신 중에, 그의 백성이 드렸던 기도를 들으셨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겠다는 그의 언약의 약속을 지키신다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궁극적인 성취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성전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이러한 시도 - 즉 물리적 건물로서의 성전을 건축하는 일 - 를 할 경우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그 고귀한 구속 사역의 의미를 흐려놓는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참된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자기 몸을 깨뜨리심으로써 성전의 모형적인 사역을 완성시키신 지금에는, 더 이상 성전의 제사가 반복될 필요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히 9:10).
그러나 십자가에서 있은 예수님의 대속의 희생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교의 입장에서 스데반의 설교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스데반의 설교는 자신들을 향한 강한 부정으로밖에 들려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급기야 스데반을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 스데반의 핍박에 가표를 던졌던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은 이와 같은 백주의 테러가 공개적으로 자행될 수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스데반의 안타까운 순교는 억울하게도 율법을 빙자한 인민 재판식의 폭력에 의하여 이루어졌고, 바울이 바로 거기에 가세하였습니다. 다음 성경 구절들을 보십시오.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행 7:58),"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행 8:1), "예루살렘에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사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행 26:10).
인민 재판식의 판결과 형벌을 함부로 자행하였던 일단의 예는, 한 간음한 여인을 현장에서 즉결 처벌하고자 하였던 사건을 통하여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저들은 이런 식의 행동에 민감한 반응을 보임으로서 상대적으로 자신들은 전혀 그렇지 않은 아주 경건한 사람들인 척 했습니다(요 8:1-11).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던 사건 역시 동일한 차원에서 되어진 불법적인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각본에 짜인 형식적인 재판을 받으셨을 뿐입니다. 저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하여 거짓 증인을 고용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제 스데반도 이런 식에 의해서 무법자들에 의하여 돌에 맞아 죽는 비운을 겪었습니다. 문제는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하나님께 열심내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는 데 있습니다. '헛된 열심자'들의 '거짓된 열심'이 어이없게도 참된 하나님의 종을 비참하고도 처참한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이 일에 바울이 간여하였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무익한 열심의 한 전형을 보게 됩니다. 사울의 열심은 그야말로 무익한 열심이었습니다. 그의 열심은 분명히 하나님을 위해서 행해졌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열심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순되게도 그 열심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결과를 내는 행위였을 뿐이었습니다. 사울의 열심은 참으로 헛된 열심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당시 자신의 행위를 가리켜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고 잔해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왜 당시 그러한 엄청난 착각 속으로 빠져들었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대단히 안타까운 착각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는 분명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는 사실과 연관된 일체의 성경 말씀에 정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오셔서 감당하시게 될 십자가의 사역에 대해서는 잘못 이해함으로 말미암아 착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알았으나 실제적인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하여서는 참으로 크게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오해는 비단 바울에게서만 보여졌던 현상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다른 많은 사람이 동일한 오해 속에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은 이에 대한 구체적인 실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2절인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에 보면, 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믿는 사람이니까, 자기도 따른다는 식의 생각으로 그리스도를 따라 다니는 사람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계속 2절에 보면, 어떤 신비한 역사가 베풀어지는 것을 보고는 그것이 예수님의 메시야되심의 증거라고 생각하였던 사람들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다음 14-15절인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에 보면, 그리스도의 사역의 성격을 정치적 측면에서 생각하는 사람들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26절인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에 보면, 그리스도의 사역의 성격을 이해함에 있어서 물질적 측면에서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음을 봅니다.
과연 이런 식으로 오늘날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고는 말하지만, 정작 그분을 따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이야기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의 성격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바울의 착각은 성경을 알기는 하지만 잘못 깨달았던 데서 온 것이었습니다. 즉 그는 고의적이었든지 혹은 그렇지 않았든지의 여부를 떠나서 잘못된 것으로서의 거짓된 가르침을 받았던 것입니다.
만일 성경을 바르게 깨달았다면, 성경이 그렇게도 일관성 있게 예언하고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리스도를 핍박하였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당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 믿지 않았으면서도 스스로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여기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바울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 사역하시던 당시의 유대인들의 상태가 그러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는 삶을 살지 않는 가운데 있으면서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게 될 경우 같은 적용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믿음'과 '순종'은 언제나 같은 의미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형식과 외식으로 치장된 의
바울은 예수님을 배척하면서까지 대단한 열심을 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열심은 전혀 의미 없는 헛된 열심이었습니다. 여기에 오늘날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똑같은 적용될 수 있는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단지 열심이 있다는 단순한 사실 하나만으로 자신의 사역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것으로 인해 큰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몇 가지 추론되는 사실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하고서도 열심을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었다'고 말하였으며, '더욱 열심이 있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시로서는 사실 구원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과연 구원을 받지 못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명목하에 진행되는 각종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한 새벽기도나 작정기도와 같은 일련의 기도 행사에 열심을 내는가 하면, 각종 종교적인 일에 열심을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헛된 열심은 형식과 의식에 치중하는 것으로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실 거기에서 그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사실이 보여집니다. 이러한 모습의 구체적인 사항들은 대충 다음과 같이 나타납니다.
첫째, 복음의 오묘한 진리가 커다란 오해 속에 엉망으로 변질되어 버리는 일이 있기 마련입니다. 형식과 내용을 혼돈하여 내용 없는 형식 그 자체에만 매달리는 현상을 보입니다.
둘째, 영적인 진리의 체계를 매사에 유형적이며 현상적으로 가시화하기를 좋아하는 어리석음에 빠져듭니다.
셋째, 항상 내적이고 본질적인 핵심은 도회시한 채 부수적이며 종속적인 것에 과도히 집착합니다.
넷째,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오묘하고도 신비한 사역 안에서 되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중시되는 때는 거의 드물고, 언제나 외적이며 형식적인 의식만이 선두에 나섭니다.
다섯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범적으로 보여 주셨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의 원칙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고, 언제나 자신의 명예와 이득을 추구하는 기복적 신앙만이 나타납니다.
과연 이상의 것들은 헛된 열심에 사로 잡혀 있는 거짓된 그리스도인에게서 보여지는 감출 수 없는 자기 노출인 것입니다. 바울 역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신앙을 가지기 전에는 결단코 하나님 영광 중심의 신앙 생활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항상 먼저 등장하는 것은 자신의 영광이요 자랑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민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4-9).
구원과 관계없는 종교적인 현상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하고서도 종교적인 용어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하고, 또한 그것으로 말미암은 여러 가지 환경에 속하는 일에 능숙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구체적인 성경적 논증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6장 4-6절을 보십시오. "한번 비침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 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첫째, '한 번 비췸을 얻고'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구체적으로 복음 진리의 빛을 받았습니다. 이 용어는 이들이 복음의 빛을 받았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만, 이것이 중생을 말하는 의도에서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즉 이 말은 신학적 입장에서 중생의 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군가가 처음 복음을 받았을 때 그것을 믿는다고 말했던 사실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중생인을 말할 때면, 언제든지 '거룩히 여김을 받은'이라든가 또는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인치심을 받은'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여기에서와 같이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라는 식으로는 묘사되지 않습니다. '한 번'의 의미는 어떤 일순간의 순간적인 경험을 뜻하지 아니합니다. 이것은'모두, 충분히'의 의미입니다. 즉 '더 이상 반복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으로서의 모두'를 뜻합니다. 따라서 그들이 받았던 '진리의 지식'은 부족하기는커녕 충분한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의 의미를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중생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그 진리에 대해 듣고 이해를 하였습니다.
둘째,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라고 했습니다. 역시 구체적으로 맛보았습니다. 즉 실제적인 맛을 경험하였습니다. 이 말은 히브리서 2장 9절에서도 사용되고 있는데, 거기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의 강조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죽음의 경험을 가지셨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이곳에서의 강조점 역시 같은 농도를 가진다. 즉 이 사람은 중생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하늘의 은사를 충분히 경험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3절에서도 같은 단어가 나옵니다.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 사실에 근거 -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던 사실 - 하여 그의 독자들이 충분히 자라가도록 권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말은 '하늘의 은사에 대한 어떤 것'을 실제로 체험하였다거나, 혹은 이해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저들은 하늘의 신령한 은사로서의 영적 축복을 '맛보았습니다'. '한 번'이라는 말이 역시 이곳도 수식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셨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구원의 진리를 확실하게 이해한 중에 그것을 기쁨으로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중생하지 못한 상태에서 단지 맛본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정작 결단이 요구되는 결정적인 순간이 왔을 때에는 그에 반응하기를 포기하였습니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모른척 하였습니다(눅 14:16-24).
셋째,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성령과 함께 동행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이 표현 역시 얼른 보기에 '성령에 의하여 거듭난 사실'을 말하는 듯이 보여 중생한 사실을 의미하는 것처럼 오해하기 쉽습니다. '참여'라는 말은 '무엇을 따라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이 말은 '소유'의 개념과는 제법 차이가 있습니다. '함께 동참한다'는 것이 반드시 '소유'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공동적인 일이라든가 또는 사업 등등에 협력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사람은 성령의 역사에 참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소유를 온전히 받지는 못하였습니다. 즉 그는 성령님을 소유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성령께서는 그 사람을 중생으로 인도하지 않으시면서도 그에게 충분히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그 사람은 신비한 체험 그 자체만을 중히 여기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기 마련이어서 어떤 때가 이르면 지금까지의 자신의 모습을 일거에 포기하기 마련입니다. 중생과는 상관없으면서도 중생인이 경험하는 것과 같은 것을 발휘할 수 있었던 다양한 예증들을 성경에서 발견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발람, 사울, 그리고 유다의 경우는 그 좋은 예입니다. 다음 성경 구절은 그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해 줍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마 12:27).
넷째,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라고 했습니다. 내세에 속한 어떤 진리의 내용을 이해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 말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 복음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축복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을 의미합니다. 즉 결과적인 의미에서, 또는 복음이 약속하고 있는 축복의 총론적 입장에서 볼 때,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내세에 속한 어떤 것'을 맛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중생하지 못한 사람이 교회라고 하는 다중의 무리 속에 속해 있으면서, 자신을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내세우며 내세의 능력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가 맛본 것은 그야말로 능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생하지 못한 상태에서 맛본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어떤 날인가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이 사실을 부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이제까지 자신이 취해온 입장을 포기하고 주를 부인합니다.
그런데 '타락하면'이라고 했습니다. 신약에서는 오직 이곳에서만 발견이 되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어떤 구체적인 악한 행위와 행실들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즉 죄를 범하는 악한 행동 속으로 빠져들었다는 의미에서의 '타락'이 아닙니다. 이 말은 진리를 부정한다는 의미에서의 '타락'입니다. 한 때 기쁨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던 진리를 일순간에 배척해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지 악한 행위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진리를 부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더 나아가 배척하는 데까지 발전합니다.
히브리서 6장 4-6절의 의도는, 저들이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는 것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깨달았다고 말하였으면서 다시 유대교로 되돌아가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굳이 유대교가 아니라도 동일합니다. 과거로, 혹은 다른 것으로 옮겨가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같은 대상입니다.
히브리 기자는 그러한 자들에 대해서 말하기를,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새롭게 하는 주체는 성령님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는 성도들의 마음에 회개를 불러 일으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여기의 새롭게 하는 주체는 히브리서 기자와 유대교로 되돌아 간 그 사람 자신을 말합니다. 그가 진리의 지식을 배척하는 한, 유대인은 물론이요 히브리서 기자 자신까지도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더 이상의 기회가 없다는 뜻에서 그처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다시 성령님의 음성에 순종하여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면, 그는 얼마든지 중생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주님을 부인하고 유대교로 돌아간다면 결코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캐 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어렵다'라는 식으로 뜻이 약화되지 않습니다. '결코 할 수 없다'의 의미입니다. 이들의 죄가 중한 이유는 바로 성령님께서 베푸시는 모든 것들을 친히 경험하였다는 데 있습니다. 보고 경험하고서도 부정하니, 그 죄가 큽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 9:41).
이상의 의미를 볼 때, 본문은 일순간 그리스도인이었던 사람들을 향하여 묘사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진리를 이해한다고 공언하였고, 특별하게 눈에 드러나는 체험을 하였으며, 어떤 특이한 은사를 발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저들의 구원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분을 보장하는 필연적인 증거는 그런 것들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인 것처림 보이는 것이긴 하지만 반드시 그것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한 때 그리스도인이었으나, 구원을 확증시켜주는 것과 관련하여 어떤 현실을 만날 때 신앙을 저버리는 것에서 잘 나타납니다. 한 때 열심이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불신앙인으로 변해버리는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만일 저희가 우리 주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벧후 2:20-22),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요일 2:19).
그들은 결코 히브리서 6장 7-8절에서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라고 말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하고야 맙니다. 저들은 중생한 것 같은 모습은 보여주었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중생하지 못하였습니다. 겉으로 드러나고 있는 어떤 선한 증거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드러나지 않고 있는 감추인 악이 차고 넘치는 자였습니다. '네 종류의 땅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결국 '이는 저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고 했습니다. 본 절에서는 '다시'의 의미가 거의 살아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그냥 단순히 '십자가에 못 박아'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본절의 해석이 보다 명료해집니다. 이런 사람들의 행위는 결국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의의'를 부정하는 결과를 낳는 것이기에 그 자신이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과 마찬가지의 결과를 만듭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의 구속 사역을 이해 하기는 커녕, 그처럼 당연히 십자가에 못 박힘을 받아야 하는 죄인으로서의 형벌 받을 자로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진리를 부인하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의 모든 행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현저히 욕을 보입니다.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은 데서 멈추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 심한 모욕 속에 있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의 진리를 부인하는 자들은 십자가에서 처형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세상에 공개합니다. 즉 세상으로 하여금 그를 능욕하도록 의도적으로 내어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저들 '타락한 자들'은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았고' 또한 '현저하게 욕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예수를 영접한자의 결과
바울은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비로소 구원을 받았습니다. 누구든지를 불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다는 사실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대단히 많은 혼란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다음과 같은 사실의 연속적인 발전에서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그가 성취하신 십자가의 사역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한 확실한 이해가 없이는 어느 누구도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둘째,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삶 속에 실제로 영접하였습니다. 이 실제적인 영접은 상투적인 입술만의 고백에 의해서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인으로 섬기는 '로드쉽'(Lordship)을 떠나서는 입증할 수 없습니다. 자기 안에서 그리스도가 계심을 이해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7),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내 안에 주님이 계신 사실을 믿는 믿음은 성경을 아는 지식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진정으로 순종하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순종의 동기 역시 순종의 행위 자체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순종은 진정으로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행해져야 합니다. 순종의 범위 역시 중요합니다. 자신의 자아가 허용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만 순종하는 것은 진정한 순종이 아닙니다. 어렵고 힘들며 손해나는 것 같아 보이는 때에도 기꺼이 순종할 수 있는 것이어야 진정한 순종입니다.
셋째,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영접한 결과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자기의 주장은 갈수록 사라지고 그 분의 주장만이 앞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자신을 죽이는 삶이란 죽으면 죽는 만큼 사실상 사는 삶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기부정의 원리를 철저하게 적용시켰습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3).
넷째,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결과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주로 믿고 영접한 바울에게서 세상은 비록 제아무리 값진 것이라 할지라도 십자가에 비추어 볼 때, 한갖 배설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만을 가장 고상히 여기면서 계속해서 자원하여 그리스도의 일군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의 서신 도처에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그중 로마서 1장 1절을 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여기서 바울이 사용한 '종'이라는 이 말은 자신이 자발적으로 그분의 노예가 되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부르는 것을 통하여 드러내고자 했던 의미는, 자기에게 감격적인 사랑을 베푸신 분에게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종이나 노예의 개념에 대하여서 자세하게 논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의미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노예는 전적으로 주인의 소유물로서 오직 주인만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삽니다. 그에게는 자신을 위한 개인적인 삶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불렀던 사실을 통하여 말하고자 했던 의미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자발적으로 노예가 된 것은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향하여 그렇게 하셨던 삶을 본받은 데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자발적인 노예였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심에 있어서 억지로 마지못하여 그 길을 걸으셨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였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았습니다(빌 2:5-8). 과연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삶을 사시되,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셨던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분의 생애는 오직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셨고, 따라서 세상으로부터 모진 수모와 비방을 받는 삶이셨습니다. 사실 사람이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자 하면 이같은 반동은 필연적으로 겪기 마련입니다(요5:43 롬15:3). 바울은 자발적으로 종이 된 자신의 그같은 삶의 의미에 대해 말하기를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며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롬14:8). 그리스도께서 희생하신 피 값으로 사신 몸이므로 바울은 더 이상 사람의 종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이 사실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더 이상 자신의 자아가 자신을 주장하도록 해서는 안됩니다(고전7:23).
사도 바울의 구원은 이러한 원리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초기에 사울이라 불리웠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자신을 구속해 주시기 위하여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사람이라고 하는 종의 형체를 기꺼이 취하셨다는 사실을 바르게 깨달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대가로 지불되신 생명이 놀랍게도 하나님 그분 자신이셨음을 알고 경악했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본체이신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거승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예수님께서는 바울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죄의 대가로 지불하기를 기꺼이 자원하셨습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 기꺼이 세상에 오셨고, 또한 십자가의 사역을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죄인들을 구속하고자 하시는 그분의 자발적인 의지를 볼 수 있습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많은 사람의 대속물이 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을 이 세상에 보내셨음을 분명히 인식한 가운데서 자발적으로 순종의 삶을 사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과연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써 바울을 구속하는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즉 주님은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서 내어 놓으시는 것을 통하여 죄인인 바울이 죄값으로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하여 지불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교회원이 될 수 있었던 근거가 되었습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 20:28).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자신을 기꺼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바울은 이제 더 이상 어제의 복음의 헛된 열심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복음의 동행자였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헛된 열심자가 되는 것처럼 불행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 뜻과 마음에 있어서 하나님과 일치하는 내적인 통일성은 전혀 없으면서 단지 교회라고 하는 외형적인 공동체 안에 속해 있다는 단순한 사실 하나만을 붙잡고서 그 안에서 행해지는 일체의 의식과 행사와 그리고 판에 박힌 관습에 사로잡히는 일을 되풀이하는 그것을 구원의 증거로 확신하는 어리석음에서 하루 속히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되어지는 일체의 열심은 참으로 '헛된 열심'에 불과할 뿐입니다. '복음의 헛된 열심자'는 자신의 영혼을 파멸로 몰아넣습니다.
헛된 열심은 왜곡된 진리로부터 나옵니다. 무엇보다 헛된 열심에서 돌이키는 것은 바른 복음의 이해입니다. 복음을 아는 자의 삶은 자기를 부인하고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주님의 말씀에 진리에 철저히 순종함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본 글은 '개혁사경회;BIC'에서 공부했던 내용입니다.)
갈라디아서 6:3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
빌립보서 3:4-9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 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
히브리서 6:4-6 "한번 비침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 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
신앙으로 포장된 헛된 열심
신앙생활에 열심을 낼 수 있다는 것은 복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일평생 지칠줄 모르는 뜨거운 열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진실로 복됩니다. 이런 사람은 참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사람이리라!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가 반드시 고려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그 열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합치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전혀 무관하게 행해지는 열심이란 얼마나 비극적인 것이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거듭나기 이전인 사도 바울의 전반부 생애가 바로 이러한 모순을 보여주는 삶이었습니다.
바울은 대단히 열심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열심은 사실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었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적함에 있어서 열심이었습니다.
이로 보건대 열심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과연 그 열심이 얼마만큼이나 바른 것이냐의 여부가 더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바른 것이라는 전제하에서 되어지는 열심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바울이 사도로써 활동하게 되었기 이전에 행했던 기독교에 대한 열정적인 핍박과 그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뵈옵게 되는 것을 통하여 그 동안 헛된 열심의 본당이었던 '유대교'를 과감하게 떠난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거기서 바울이기 이전의 사울은 과연 부정적인 평가만을 받기에 합당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사울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일에 열심내고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지 못하였다고 잘못 생각하는 경우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구원을 받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았다고 잘못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과거의 사울은 바로 이같은 모순된 상태에 있었던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확실히 정상적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의 모습과는 먼 거리에 있었습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스로 를 하나님의 일에 열심내는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자신이 누리고 있는 구원의 문제를 한번쯤 진지하게 재검토해 보는 것은 대단히 유익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종교적인 일에 열심을 내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결코 구원받은 결정적인 증거가 되지 않음에도 북구하고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잘못 안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재확인의 문제는 결코 어줍잖은 자존심으로 말미암아 무시되어야 할 성격의 것이 아니며, 가볍게 취급할 것은 더 더욱 아닙니다. 참으로 바울과 같은 위대한 사람이 한 때 잘못된 '복음의 헛된 열심자'였다면, 우리와 같은 사람은 더 더욱 그럴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구원의 확신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핵심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당시의 바울은 분명 구원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자신이 행하고 있는 열심으로 구원받은 자라고 스스로 착각하고 사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자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왜곡된 유대주의 신앙
바울은 '내가 유대교에 있을 때에'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에 '유대교'에 있었습니다. 이 종교는 이스라엘이 70년간의 포로 생활을 끝내고 귀환한 이후부터 시작된 종교 운동으로부터 형성된 종파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구약적 종교가 변질된 종교입니다. 그 발전 과정을 간추려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은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성전을 건축하였습니다. 그들에게서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제사 제도의 복원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남기를 원하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에 있어서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제사의 발전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되어졌습니다.
첫째로 모세의 성막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이후 시내산에 머물러 있으면서 받은 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 설계를 보이신 특성으로 인하여 정교함과 섬세함에 있어서 대단히 뛰어난 성막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보였던 불신앙적 삶으로 말미암아 엘리 제사장 때에 블레셋에 의하여 파괴되었습니다.
둘째로, 솔로몬의 성전입니다. 이것은 가나안 땅에서 굳건한 국가를 수립하게 되었을 때 세워진 매우 장엄하고 화려하며 튼튼하기로 이름난 성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성전도 끝내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이 초래한 하나님의 징계로 바벨론의 침공을 받아 B. C. 586년에 철저하게 파괴당하였습니다.
셋째로, 스룹바벨 성전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70년간의 포로 생활을 끝내고 본토로 돌아온 뒤 건축한 성전입니다. 그러나 솔로몬 때의 성전을 간단하게 복원한 외형만의 초라한 성전이었습니다.
넷째로, 헤롯 성전입니다. 헤롯 왕이 정치적인 계산 하에 스룹바벨의 성전을 웅장하게 증축한 것이었습니다. A D. 70년에 로마의 디도에 의하여 철저하게 파괴당하였고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지금 그 자리에는 모하멧교의 사원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들 성전이 보여주고 있는 신학적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율법에 대하여 신실하게 순종하게 하려는 데에도 있습니다. 즉 성전에서 행해지는 외적인 의식 못지 않게 여타 다른 도덕 계명들에 대한 순종 또한 요구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할 때 저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이라는 특성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운동이 유대교의 등장과 함께 서서히 빗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외형과 형식만이 대두되어 사실상 중요하고도 핵심인 내면적인 도덕성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외식과 형식의 위선만이 난무하였습니다.
그런 식으로 율법을 보다 엄격하게 지키려는 운동은 변질된 상태에서 점점 그 도를 더하여만 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유대교의 출발이 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유대교는 구약의 종교사상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근간이었던 '구약의 신앙적인 역사' 그 자체가 유대교인 것은 아닙니다. 말하자면 유대교는 구약 종교의 변질된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교를 지탱하고 있었던 세 기둥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성경의 확정 작업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부하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자신들의 신앙 원리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확정하는 일은 이 시기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둘째, 회당의 건축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70년간의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면서 성전에서 행하지 못하는 제사 의식을 대신하여 성경을 읽고 기도를 드리기 위하여 회당을 건축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에서 귀환한 후에도 이 회당 운동을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해 나갔습니다.
셋째, 유대인은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제사장들과 부자들이 세속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시대적으로 조상의 율법에 진지하기를 원하는 일단의 반대작용적인 운동도 역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운동은 자연히 랍비 계급의 형성으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랍비들은 이스라엘이 보유하고 있었던 고유한 레위 제사장들의 가르치는 직무를 대신하였습니다.
이런 식의 과정 안에서 이스라엘은 점차 고유한 신앙을 잃어버리고 훗날 유대교로 불리우는 종교로 변질되어 갔습니다. 처음에 좋은 의도에서 시작된 개혁 운동이 점차 그 본질적인 특성이 상실되어가는 중에 본질을 변질시키는 데까지 나아갔던 것입니다.
이처럼 왜곡된 길로 나아가기 시작한 잘못된 개혁 운동은 점차 여러 가지 부작용도 낳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많은 당파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시에 다음과 같은 부류의 당파 - 교단 - 가 형성되었습니다.
첫째, 사두개파입니다. 이들은 주로 세력 있는 지도 계층의 제사장들과 뼈대있는 가문들로 이루어졌습니다. 저희는 '모세오경'만을 성경으로 여기면서 엄격한 정치체제로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고자 하였습니다.
둘째, 엣세네파입니다. 경건한 삶의 고도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동굴에 집단으로 운둔하였던 은둔주의자들입니다. 엄격한 규율 하에 고행을 추구하였습니다.
셋째, 바리새파입니다. 서기관들의 가르침을 추종하여 율법의 엄격한 준수를 추구하였던 종파입니다. 훗날 위선과 외식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넷째, 열심당입니다. 바리새파외 사두개파의 중간 정도의 노선을 걷는 파벌인데 악인을 제거하기 위하여는 살인까지도 서슴치 않았던 과격한 집단이었습니다. 저들은 무력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도래시키고자 하였습니다.
바울의 무익한 열심
바울 당시 '바리새파'는 '샴마이 학파'와 '힐렐 학파'라고 하는 두 기둥과도 같은 학파가 지배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중 힐렐 학파의 후계자인 '가말리엘' 밑에서 엄격한 율법 교육을 받았습니다.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교법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간 밖에 나가게 하고"(행 5:34),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행 22:3).
바울은 당시 스데반의 죽음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스데반은 유대교의 핵심이요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성전의 무용론'을 감히 부르짖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일을 과감히 부르짖다가 유대교도들로부터 폭행을 당하여 돌에 맞아 죽음을 당했습니다. 스데반은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건물 안에 계시는 분이 아니시라고 역설하였습니다. 성전은 계시적 의미를 가지는 상징물일 뿐이었습니다. 그림자가 사라지고 몸이 도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유대교의 성전과 회당이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부르짖었습니다. 사도행전 7장 1-60절을 보십시오. 그중에서 특히 48-50절을 주의깊게 보십시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바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사실 신학적으로 보건대 이스라엘에게 허락되었던 성전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중에 대속적 죽음으로 죄인들을 구속하실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등장하였던 것이기에 모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 2:19-22).
성막과 성전, 그리고 그것을 중심으로 해서 전개되었던 일체의 종교적 행위 - 성막 그 자체의 계시와 그 안에서 드려졌던 모든 제의법 등등 - 의 상징이 모형적으로 계시되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영원한 구속의 진리를 드러내어 믿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구약의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과 만나시는 교제의 장소로써 의미가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은 그가 계시하셨던 각종 제사를 통하여 저희의 거룩하신 분과 교제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제사와 예배의 장소가 한 곳에만 있어야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단일성과 하나로 통일된 백성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하나라는 것을 실증해 보이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우셔서 특별한 방법으로 그것에 임재하신 중에, 그의 백성이 드렸던 기도를 들으셨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겠다는 그의 언약의 약속을 지키신다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궁극적인 성취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성전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이러한 시도 - 즉 물리적 건물로서의 성전을 건축하는 일 - 를 할 경우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그 고귀한 구속 사역의 의미를 흐려놓는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참된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자기 몸을 깨뜨리심으로써 성전의 모형적인 사역을 완성시키신 지금에는, 더 이상 성전의 제사가 반복될 필요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히 9:10).
그러나 십자가에서 있은 예수님의 대속의 희생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교의 입장에서 스데반의 설교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스데반의 설교는 자신들을 향한 강한 부정으로밖에 들려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급기야 스데반을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 스데반의 핍박에 가표를 던졌던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은 이와 같은 백주의 테러가 공개적으로 자행될 수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스데반의 안타까운 순교는 억울하게도 율법을 빙자한 인민 재판식의 폭력에 의하여 이루어졌고, 바울이 바로 거기에 가세하였습니다. 다음 성경 구절들을 보십시오.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행 7:58),"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행 8:1), "예루살렘에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사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행 26:10).
인민 재판식의 판결과 형벌을 함부로 자행하였던 일단의 예는, 한 간음한 여인을 현장에서 즉결 처벌하고자 하였던 사건을 통하여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저들은 이런 식의 행동에 민감한 반응을 보임으로서 상대적으로 자신들은 전혀 그렇지 않은 아주 경건한 사람들인 척 했습니다(요 8:1-11).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던 사건 역시 동일한 차원에서 되어진 불법적인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각본에 짜인 형식적인 재판을 받으셨을 뿐입니다. 저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하여 거짓 증인을 고용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제 스데반도 이런 식에 의해서 무법자들에 의하여 돌에 맞아 죽는 비운을 겪었습니다. 문제는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하나님께 열심내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는 데 있습니다. '헛된 열심자'들의 '거짓된 열심'이 어이없게도 참된 하나님의 종을 비참하고도 처참한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이 일에 바울이 간여하였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무익한 열심의 한 전형을 보게 됩니다. 사울의 열심은 그야말로 무익한 열심이었습니다. 그의 열심은 분명히 하나님을 위해서 행해졌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열심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순되게도 그 열심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결과를 내는 행위였을 뿐이었습니다. 사울의 열심은 참으로 헛된 열심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당시 자신의 행위를 가리켜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고 잔해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왜 당시 그러한 엄청난 착각 속으로 빠져들었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대단히 안타까운 착각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는 분명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는 사실과 연관된 일체의 성경 말씀에 정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오셔서 감당하시게 될 십자가의 사역에 대해서는 잘못 이해함으로 말미암아 착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알았으나 실제적인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하여서는 참으로 크게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오해는 비단 바울에게서만 보여졌던 현상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다른 많은 사람이 동일한 오해 속에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은 이에 대한 구체적인 실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2절인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에 보면, 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믿는 사람이니까, 자기도 따른다는 식의 생각으로 그리스도를 따라 다니는 사람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계속 2절에 보면, 어떤 신비한 역사가 베풀어지는 것을 보고는 그것이 예수님의 메시야되심의 증거라고 생각하였던 사람들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다음 14-15절인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에 보면, 그리스도의 사역의 성격을 정치적 측면에서 생각하는 사람들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26절인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에 보면, 그리스도의 사역의 성격을 이해함에 있어서 물질적 측면에서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음을 봅니다.
과연 이런 식으로 오늘날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고는 말하지만, 정작 그분을 따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이야기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의 성격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바울의 착각은 성경을 알기는 하지만 잘못 깨달았던 데서 온 것이었습니다. 즉 그는 고의적이었든지 혹은 그렇지 않았든지의 여부를 떠나서 잘못된 것으로서의 거짓된 가르침을 받았던 것입니다.
만일 성경을 바르게 깨달았다면, 성경이 그렇게도 일관성 있게 예언하고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리스도를 핍박하였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당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 믿지 않았으면서도 스스로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여기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바울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 사역하시던 당시의 유대인들의 상태가 그러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는 삶을 살지 않는 가운데 있으면서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게 될 경우 같은 적용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믿음'과 '순종'은 언제나 같은 의미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형식과 외식으로 치장된 의
바울은 예수님을 배척하면서까지 대단한 열심을 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열심은 전혀 의미 없는 헛된 열심이었습니다. 여기에 오늘날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똑같은 적용될 수 있는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단지 열심이 있다는 단순한 사실 하나만으로 자신의 사역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것으로 인해 큰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몇 가지 추론되는 사실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하고서도 열심을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었다'고 말하였으며, '더욱 열심이 있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시로서는 사실 구원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과연 구원을 받지 못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명목하에 진행되는 각종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한 새벽기도나 작정기도와 같은 일련의 기도 행사에 열심을 내는가 하면, 각종 종교적인 일에 열심을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헛된 열심은 형식과 의식에 치중하는 것으로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실 거기에서 그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사실이 보여집니다. 이러한 모습의 구체적인 사항들은 대충 다음과 같이 나타납니다.
첫째, 복음의 오묘한 진리가 커다란 오해 속에 엉망으로 변질되어 버리는 일이 있기 마련입니다. 형식과 내용을 혼돈하여 내용 없는 형식 그 자체에만 매달리는 현상을 보입니다.
둘째, 영적인 진리의 체계를 매사에 유형적이며 현상적으로 가시화하기를 좋아하는 어리석음에 빠져듭니다.
셋째, 항상 내적이고 본질적인 핵심은 도회시한 채 부수적이며 종속적인 것에 과도히 집착합니다.
넷째,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오묘하고도 신비한 사역 안에서 되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중시되는 때는 거의 드물고, 언제나 외적이며 형식적인 의식만이 선두에 나섭니다.
다섯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범적으로 보여 주셨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의 원칙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고, 언제나 자신의 명예와 이득을 추구하는 기복적 신앙만이 나타납니다.
과연 이상의 것들은 헛된 열심에 사로 잡혀 있는 거짓된 그리스도인에게서 보여지는 감출 수 없는 자기 노출인 것입니다. 바울 역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신앙을 가지기 전에는 결단코 하나님 영광 중심의 신앙 생활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항상 먼저 등장하는 것은 자신의 영광이요 자랑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민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4-9).
구원과 관계없는 종교적인 현상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하고서도 종교적인 용어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하고, 또한 그것으로 말미암은 여러 가지 환경에 속하는 일에 능숙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구체적인 성경적 논증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6장 4-6절을 보십시오. "한번 비침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 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첫째, '한 번 비췸을 얻고'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구체적으로 복음 진리의 빛을 받았습니다. 이 용어는 이들이 복음의 빛을 받았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만, 이것이 중생을 말하는 의도에서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즉 이 말은 신학적 입장에서 중생의 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군가가 처음 복음을 받았을 때 그것을 믿는다고 말했던 사실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중생인을 말할 때면, 언제든지 '거룩히 여김을 받은'이라든가 또는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인치심을 받은'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여기에서와 같이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라는 식으로는 묘사되지 않습니다. '한 번'의 의미는 어떤 일순간의 순간적인 경험을 뜻하지 아니합니다. 이것은'모두, 충분히'의 의미입니다. 즉 '더 이상 반복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으로서의 모두'를 뜻합니다. 따라서 그들이 받았던 '진리의 지식'은 부족하기는커녕 충분한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의 의미를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중생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그 진리에 대해 듣고 이해를 하였습니다.
둘째,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라고 했습니다. 역시 구체적으로 맛보았습니다. 즉 실제적인 맛을 경험하였습니다. 이 말은 히브리서 2장 9절에서도 사용되고 있는데, 거기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의 강조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죽음의 경험을 가지셨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이곳에서의 강조점 역시 같은 농도를 가진다. 즉 이 사람은 중생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하늘의 은사를 충분히 경험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3절에서도 같은 단어가 나옵니다.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 사실에 근거 -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던 사실 - 하여 그의 독자들이 충분히 자라가도록 권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말은 '하늘의 은사에 대한 어떤 것'을 실제로 체험하였다거나, 혹은 이해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저들은 하늘의 신령한 은사로서의 영적 축복을 '맛보았습니다'. '한 번'이라는 말이 역시 이곳도 수식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셨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구원의 진리를 확실하게 이해한 중에 그것을 기쁨으로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중생하지 못한 상태에서 단지 맛본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정작 결단이 요구되는 결정적인 순간이 왔을 때에는 그에 반응하기를 포기하였습니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모른척 하였습니다(눅 14:16-24).
셋째,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성령과 함께 동행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이 표현 역시 얼른 보기에 '성령에 의하여 거듭난 사실'을 말하는 듯이 보여 중생한 사실을 의미하는 것처럼 오해하기 쉽습니다. '참여'라는 말은 '무엇을 따라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이 말은 '소유'의 개념과는 제법 차이가 있습니다. '함께 동참한다'는 것이 반드시 '소유'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공동적인 일이라든가 또는 사업 등등에 협력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사람은 성령의 역사에 참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소유를 온전히 받지는 못하였습니다. 즉 그는 성령님을 소유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성령께서는 그 사람을 중생으로 인도하지 않으시면서도 그에게 충분히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그 사람은 신비한 체험 그 자체만을 중히 여기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기 마련이어서 어떤 때가 이르면 지금까지의 자신의 모습을 일거에 포기하기 마련입니다. 중생과는 상관없으면서도 중생인이 경험하는 것과 같은 것을 발휘할 수 있었던 다양한 예증들을 성경에서 발견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발람, 사울, 그리고 유다의 경우는 그 좋은 예입니다. 다음 성경 구절은 그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해 줍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마 12:27).
넷째,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라고 했습니다. 내세에 속한 어떤 진리의 내용을 이해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 말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 복음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축복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을 의미합니다. 즉 결과적인 의미에서, 또는 복음이 약속하고 있는 축복의 총론적 입장에서 볼 때,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내세에 속한 어떤 것'을 맛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중생하지 못한 사람이 교회라고 하는 다중의 무리 속에 속해 있으면서, 자신을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내세우며 내세의 능력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가 맛본 것은 그야말로 능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생하지 못한 상태에서 맛본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어떤 날인가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이 사실을 부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이제까지 자신이 취해온 입장을 포기하고 주를 부인합니다.
그런데 '타락하면'이라고 했습니다. 신약에서는 오직 이곳에서만 발견이 되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어떤 구체적인 악한 행위와 행실들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즉 죄를 범하는 악한 행동 속으로 빠져들었다는 의미에서의 '타락'이 아닙니다. 이 말은 진리를 부정한다는 의미에서의 '타락'입니다. 한 때 기쁨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던 진리를 일순간에 배척해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지 악한 행위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진리를 부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더 나아가 배척하는 데까지 발전합니다.
히브리서 6장 4-6절의 의도는, 저들이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는 것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깨달았다고 말하였으면서 다시 유대교로 되돌아가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굳이 유대교가 아니라도 동일합니다. 과거로, 혹은 다른 것으로 옮겨가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같은 대상입니다.
히브리 기자는 그러한 자들에 대해서 말하기를,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새롭게 하는 주체는 성령님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는 성도들의 마음에 회개를 불러 일으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여기의 새롭게 하는 주체는 히브리서 기자와 유대교로 되돌아 간 그 사람 자신을 말합니다. 그가 진리의 지식을 배척하는 한, 유대인은 물론이요 히브리서 기자 자신까지도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더 이상의 기회가 없다는 뜻에서 그처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다시 성령님의 음성에 순종하여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면, 그는 얼마든지 중생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주님을 부인하고 유대교로 돌아간다면 결코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캐 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어렵다'라는 식으로 뜻이 약화되지 않습니다. '결코 할 수 없다'의 의미입니다. 이들의 죄가 중한 이유는 바로 성령님께서 베푸시는 모든 것들을 친히 경험하였다는 데 있습니다. 보고 경험하고서도 부정하니, 그 죄가 큽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 9:41).
이상의 의미를 볼 때, 본문은 일순간 그리스도인이었던 사람들을 향하여 묘사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진리를 이해한다고 공언하였고, 특별하게 눈에 드러나는 체험을 하였으며, 어떤 특이한 은사를 발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저들의 구원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분을 보장하는 필연적인 증거는 그런 것들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인 것처림 보이는 것이긴 하지만 반드시 그것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한 때 그리스도인이었으나, 구원을 확증시켜주는 것과 관련하여 어떤 현실을 만날 때 신앙을 저버리는 것에서 잘 나타납니다. 한 때 열심이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불신앙인으로 변해버리는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만일 저희가 우리 주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벧후 2:20-22),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요일 2:19).
그들은 결코 히브리서 6장 7-8절에서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라고 말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하고야 맙니다. 저들은 중생한 것 같은 모습은 보여주었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중생하지 못하였습니다. 겉으로 드러나고 있는 어떤 선한 증거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드러나지 않고 있는 감추인 악이 차고 넘치는 자였습니다. '네 종류의 땅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결국 '이는 저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고 했습니다. 본 절에서는 '다시'의 의미가 거의 살아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그냥 단순히 '십자가에 못 박아'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본절의 해석이 보다 명료해집니다. 이런 사람들의 행위는 결국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의의'를 부정하는 결과를 낳는 것이기에 그 자신이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과 마찬가지의 결과를 만듭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의 구속 사역을 이해 하기는 커녕, 그처럼 당연히 십자가에 못 박힘을 받아야 하는 죄인으로서의 형벌 받을 자로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진리를 부인하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의 모든 행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현저히 욕을 보입니다.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은 데서 멈추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 심한 모욕 속에 있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의 진리를 부인하는 자들은 십자가에서 처형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세상에 공개합니다. 즉 세상으로 하여금 그를 능욕하도록 의도적으로 내어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저들 '타락한 자들'은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았고' 또한 '현저하게 욕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예수를 영접한자의 결과
바울은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비로소 구원을 받았습니다. 누구든지를 불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다는 사실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대단히 많은 혼란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다음과 같은 사실의 연속적인 발전에서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그가 성취하신 십자가의 사역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한 확실한 이해가 없이는 어느 누구도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둘째,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삶 속에 실제로 영접하였습니다. 이 실제적인 영접은 상투적인 입술만의 고백에 의해서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인으로 섬기는 '로드쉽'(Lordship)을 떠나서는 입증할 수 없습니다. 자기 안에서 그리스도가 계심을 이해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7),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내 안에 주님이 계신 사실을 믿는 믿음은 성경을 아는 지식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진정으로 순종하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순종의 동기 역시 순종의 행위 자체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순종은 진정으로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행해져야 합니다. 순종의 범위 역시 중요합니다. 자신의 자아가 허용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만 순종하는 것은 진정한 순종이 아닙니다. 어렵고 힘들며 손해나는 것 같아 보이는 때에도 기꺼이 순종할 수 있는 것이어야 진정한 순종입니다.
셋째,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영접한 결과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자기의 주장은 갈수록 사라지고 그 분의 주장만이 앞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자신을 죽이는 삶이란 죽으면 죽는 만큼 사실상 사는 삶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기부정의 원리를 철저하게 적용시켰습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3).
넷째,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결과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주로 믿고 영접한 바울에게서 세상은 비록 제아무리 값진 것이라 할지라도 십자가에 비추어 볼 때, 한갖 배설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만을 가장 고상히 여기면서 계속해서 자원하여 그리스도의 일군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의 서신 도처에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그중 로마서 1장 1절을 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여기서 바울이 사용한 '종'이라는 이 말은 자신이 자발적으로 그분의 노예가 되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부르는 것을 통하여 드러내고자 했던 의미는, 자기에게 감격적인 사랑을 베푸신 분에게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종이나 노예의 개념에 대하여서 자세하게 논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의미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노예는 전적으로 주인의 소유물로서 오직 주인만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삽니다. 그에게는 자신을 위한 개인적인 삶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불렀던 사실을 통하여 말하고자 했던 의미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자발적으로 노예가 된 것은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향하여 그렇게 하셨던 삶을 본받은 데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자발적인 노예였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심에 있어서 억지로 마지못하여 그 길을 걸으셨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였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았습니다(빌 2:5-8). 과연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삶을 사시되,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셨던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분의 생애는 오직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셨고, 따라서 세상으로부터 모진 수모와 비방을 받는 삶이셨습니다. 사실 사람이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자 하면 이같은 반동은 필연적으로 겪기 마련입니다(요5:43 롬15:3). 바울은 자발적으로 종이 된 자신의 그같은 삶의 의미에 대해 말하기를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며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롬14:8). 그리스도께서 희생하신 피 값으로 사신 몸이므로 바울은 더 이상 사람의 종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이 사실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더 이상 자신의 자아가 자신을 주장하도록 해서는 안됩니다(고전7:23).
사도 바울의 구원은 이러한 원리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초기에 사울이라 불리웠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자신을 구속해 주시기 위하여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사람이라고 하는 종의 형체를 기꺼이 취하셨다는 사실을 바르게 깨달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대가로 지불되신 생명이 놀랍게도 하나님 그분 자신이셨음을 알고 경악했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본체이신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거승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예수님께서는 바울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죄의 대가로 지불하기를 기꺼이 자원하셨습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 기꺼이 세상에 오셨고, 또한 십자가의 사역을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죄인들을 구속하고자 하시는 그분의 자발적인 의지를 볼 수 있습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많은 사람의 대속물이 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을 이 세상에 보내셨음을 분명히 인식한 가운데서 자발적으로 순종의 삶을 사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과연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써 바울을 구속하는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즉 주님은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서 내어 놓으시는 것을 통하여 죄인인 바울이 죄값으로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하여 지불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교회원이 될 수 있었던 근거가 되었습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 20:28).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자신을 기꺼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바울은 이제 더 이상 어제의 복음의 헛된 열심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복음의 동행자였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헛된 열심자가 되는 것처럼 불행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 뜻과 마음에 있어서 하나님과 일치하는 내적인 통일성은 전혀 없으면서 단지 교회라고 하는 외형적인 공동체 안에 속해 있다는 단순한 사실 하나만을 붙잡고서 그 안에서 행해지는 일체의 의식과 행사와 그리고 판에 박힌 관습에 사로잡히는 일을 되풀이하는 그것을 구원의 증거로 확신하는 어리석음에서 하루 속히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되어지는 일체의 열심은 참으로 '헛된 열심'에 불과할 뿐입니다. '복음의 헛된 열심자'는 자신의 영혼을 파멸로 몰아넣습니다.
헛된 열심은 왜곡된 진리로부터 나옵니다. 무엇보다 헛된 열심에서 돌이키는 것은 바른 복음의 이해입니다. 복음을 아는 자의 삶은 자기를 부인하고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주님의 말씀에 진리에 철저히 순종함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본 글은 '개혁사경회;BIC'에서 공부했던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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