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에베소서 6장 1-4절)
사랑으로 충만하는 원리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 15-16절에서 우리는 언제나 진리를 따라 진실하게 말하고 행동하고 생활하여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더욱더 닮은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지휘에 따라 온몸이 서로 완전히 어울려서 각 지체는 각기 다른 지체를 도우라고 권면합니다. 그럴 경우 온몸이 건강하게 성장하여 사랑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원리는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교회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로서 그 구성원인 가족은, 그러니까 부모와 자녀들은 그리스도의 한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들입니다. 이 말은, 부모와 자녀들의 관계는 그들 각 자가 머리(주)이신그리스도의 몸의 한 일부인 까닭에 그리스도와 가진 부모로서의 위치, 그리스도와 가진 자녀로서의 위치에서 각기 제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부모는 자녀 앞에서 그리스도와 같은 자입니다. 그것은 부모는 자녀들에게서 그리스도의 대리인의 자격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권위와 심정을 가지고 자녀를 잘 양육해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자녀는 부모들에게 그리스도를 대하듯 모시고 섬겨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부모와 자녀는 단지 혈통과 그에 따라서 가지는 본성적인 애정에 의해서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의 가정과는 확연하게 구별이 됩니다.
자기 자녀가 잘 되는 것을 보고자 하는 것이 부모의 심정이고, 그래서 자녀에 큰 관심을 가지고 양육하는 것이 부모이며, 또한 자기를 낳아주셨을 뿐만 아니라 고생하시면서 자신을 먹이시고 입히시고 교육시키면서 잘 자랄 수 있게 해 주신 부모를 존경하며 섬기는 것이 자녀들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들이 사는 인생의 목적을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데에 두는 데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높이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온 가족이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일에 온전한 사람이 되어 가는 일에 힘씁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으로 양육하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자녀들이 부모를 존경하며 힘써 섬기는 것은 그가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천성적 성질에 의해서 갖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일에 온전한 사람이 되어 가는 일에 온 가족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더욱더 닮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가정에서 보는 것은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서로를 돕고 섬기는 사랑으로 충만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가정을 이룬 자들의 삶의 원칙과 생활의 법칙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받은 새생명을 소유한 자들이기 때문에 삶에는 언제나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는 절대적인 원칙을 가지고 삽니다. 그리고 여기에 있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생활의 법칙대로 삽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구원받지 못할 자들이 사는 방식대로 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참조. 엡 4:17-5:5). 구원받지 못할 자들은 죄에 의한 타락의 근성으로 인해서 어둠에 속한 성질을 띠며 삽니다.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닫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서 보여지는 것은 온갖 악한 생각에 따른 육신의 욕망이요 불결한 행동입니다. 이런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거룩한 속성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가정 안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시대가 흐를수록, 그래서 세상의 마지막 때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런 현상은 더욱 두드러지게 심화됩니다. 세상이 발전하고 잘 사는 시대가 왔다고 해서, 또한 그런 시대가 더욱 나아질 것이라고 해서 둔화되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심해집니다. 가정의 질서와 도덕성이 무너지는 현상은 그 속도가 가속력을 띨 것입니다. 오늘날에 학교에서 어린 학생들이 보이는 행동은 이미 가정에서부터 터져 나온 현상에 불과하며, 이는 어른들의 사회 구조가 그렇게 변화된 데 따른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시며 선한 분인지가 말과 행동에 없는 데에서는,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지 않는 곳에서는, 그곳이 가정이란 울타리이든 사회란 울타리이든, 학교란 울타리이든지간에 인간의 악한 모습이 자리잡기 마련입니다. 사람이 그 죄악성을 발휘하는데 있어서 경중이 있겠지만, 인간은 다 악합니다. 우리는 한 예로 우리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서도 그러한 모습을 보지 않습니까? 이제 몇 살 되지 않은 유아들에게서도, 철부지 소년에게서도, 머리가 다 큰 청소년에게서도 말입니다. 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베풉니다만 이것은 유아들이 구원받을 만큼 선해서가 아닙니다. 그 어린것들이라고 해서 지옥 가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선한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어린 자녀라 할지라도 그들도 죄인이란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담의 범죄에 의한 죄책의 전가와 전적 부패의 유전으로 인해서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원의(原義)를 상실하였으며, 부패한 근성을 가지고 삽니다. 이런 사실은 어른 값을 해야 할 성인에게서 더욱 뚜렷합니다. 인간의 부패한 근성은 죄의 힘을 발휘할 기회를 많이 만들어주는 오늘날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그 위력을 더욱 발휘합니다. 앞으로 더 하겠지요. 하나님이 없는 가정이 이렇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그리스도의 가정을 이루고 있는 가족 구성원은 분명히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른 차별성을 띠고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둠에 속한 자들이 아닙니다. 빛의 자녀 된 자들입니다. 우리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빛으로 충만해 있으니 생활로 그것을 증명해 가야 하는데, 선한 일과 옳은 일과 진실한 일만 해야 합니다(엡 5:8-9).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만을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성령 충만'으로 설명해 나갑니다. 우리 몸을 악과 어둠의 무가치한 쾌락에 맡기지 말고 성령의 지배를 받아 시편과 찬송가를 암송하고 거룩한 노래를 부르라고 말합니다. 마음속에서 우러난 노래를 불러 주님을 찬양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말합니다(엡 5:10-20).
그리고 말입니다. 서로 순종하면서 그리스도를 높이라고 말합니다(엡 5:21). 그 구체적인 언급을 남편과 아내를 들어서(엡 5:21-33), 그리고 자녀와 부모를 들어서(엡 6:1-4), 또한 종과 주인을 들어서(엡 6:5-9) 말해줍니다.
우리는 이 중에서 두 번째 부분인 자녀와 부모에게 해 주고 있는 말씀을 대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자녀들에게 권면합니다. "자녀들아 부모에게 순종하라. 하나님께서 자녀를 감독할 권리를 부모에게 주셨으므로 자녀들은 마땅히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다. 부모를 공경하는 자에게 준 약속이란 '네 부모를 공경하면 너는 복을 받고 오래 살리라'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나서 부모들에게도 당부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자녀들을 너무 꾸짖지 마십시오. 또 잔소리를 늘어놓아 반항심을 일으키거나 분노를 품게 하지 마십시오. 그보다는 주님의 사랑이 담긴 훈계와 조언과 충고로 키우십시오."라고 말하였습니다.
부모에게
1. 훈계와 매
여기서 먼저 순서를 부모들에게 한 당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자녀를 둔 부모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녀가 그리스도를 높이는 자가 되어가도록 양육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양육하는데 있어서는 두 가지 방편이 사용됩니다. 하나는 훈계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매입니다. 이 중 어느 하나는 필요하고 어느 하나는 필요 없다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부모에게 자녀를 양육하는 데 있어서 너무 꾸짖거나 잔소리를 늘어놓지 말라고 합니다. 그보다는 주님의 사랑이 담긴 훈계와 조언과 충고로 키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잠언 기자는 "꾸짖고 매를 들어야 자식이 슬기롭게 살 것 아니냐? 그런데 그러지를 않고 자식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면 오히려 그 자식의 장래를 망쳐 자식이 어미의 속만 끓일 것이다"(잠 29:15)라고 꾸짖음과 매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자식을 매로 다스려라, 그래야 걱정이 없어질 것이며 흐뭇한 마음으로 살 수 있을 것이다"(잠 29:17)라고 하였습니다. "부모의 훈계를 받는 것을 싫어하고 우습게 여기며 거부하는 자는 아주 어리석은 자로서 스스로 자기의 영혼(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것이다"(잠 15:5, 32)라고 하였습니다. 부모의 훈계를 받는 것을 싫어하는 자녀가 하물며 매를 달게 받겠습니까? 그렇지만 부모가 그것을 염려하여 매를 들지 않으면 자기 자식을 망하게 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습니다. 요즘 아이들이 어떤지를 아십니까? 며칠 전에 집 앞에서 교복을 입은 학생이 손에는 운동화를 들고 있으면서 실내화로 거리를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학생이 한 둘이 아닙니다. 교복 윗도리를 꺼내놓고 다니고, 넥타이는 풀어 헤쳐 있고, 게다가 교실과 복도에서 신고 다니는 실내화를 버젓이 집에서 학교를 갈 때나 학교에서 집에 갈 때 신고 다닙니다. 보기에 아주 좋지 안잖습니까? 품행 단정이라고 그들 머리 속에는 아예 의식이 없습니다. 그것을 보고는 도저히 가만 있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네가 지금 신고 있는 것은 학교 실내화 아니냐?"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학생이 가당찮은 듯이 빤히 쳐다봅니다. 그래서 다시 좀더 큰 소리로 거듭 물었습니다. "네가 지금 신고 있는 것 학교 실내화냐? 아니냐?" 그랬더니 그제서야 "실내화입니다" 대답합니다. 그래서 "그래, 학교 실내화를 거리를 다닐 때 신고 다니고 거리를 다닐 때 신으라고 있는 운동화는 들고 다니냐?"고 나무랐습니다. 그리고는 "학생이 학교에서 집에 올 때는 운동화를 신고 제대로 다니고, 실내화는 교실에서 신으라고 있는 것이니까 거기에 맞게 교실에서 신고 다녀야지 이게 뭐냐?"고 말하면서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학생은 그러한 충고가 아주 못 마땅해 하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래 집으로 올라오면서 온갖 생각이 듭니다. "도대체 저 아이의 부모는 자기 자식에게 저런 꼴을 보면서도 용납하는가? 아무 소리도 못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내 버려 두는가?"라고 말입니다. 남의 아이가 문제가 있어도 못 보겠는데, 정작 내 자식이 그와 같은 행동이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서 훈계와 매를 들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정말 부모가 자식에게 매를 들지 않습니다. 훈계하는 것조차 꺼려합니다. 그 결과 이 아이들이 커서 장래가 어찌될 것인지를 우려할만한 현실이 온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양육하는데 있어서는 훈계와 함께 매가 좋은 교육의 수단으로 사용이 됩니다. 부모가 훈계와 함께 매를 사용하는 것은 자식의 영혼과 그 장래를 염려해서입니다. 그러니 자식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에서이죠.. 그리스도의 가정에서 부모는 자기 자식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되는 일에 있어서 한 구성원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인도자요 선생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를 주신 것은 그러한 일을 맡아서 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런 자녀가 될 수 있도록 부모는 부모로서 받아 가지고 있는 권리를 행사해야 하고, 그만큼 책임 있게 자녀를 양육해야 합니다.
2. 자식에 대한 부모의 두 가지 희생
자식에게 갖는 부모의 훈계와 매는 사실 자식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부모의 사랑이 크고 올바른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는 기대가 크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옳은 길로 인도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자식의 영혼이 잘 될 수 있게 하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서 부모는 희생합니다. 희생은 위대한 사랑의 행위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행히도 우리 인간들이 이런 위대한 사랑을 보편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자식에 대한 부모의 희생입니다. 참으로 세상에서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마다하는 부모가 있을까요? 자식이 아픈 것보다 차라리 내가 아프길 원하고 자식이 좀더 잘되고 자식에게 유익되고 자식이 좋아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어렵고 힘들고 괴로운 것이라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 백일하에 드러난 부모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을 보면 자식을 위한 부모의 아름답고 숭고하며 때론 애틋한 희생적인 사례들이 많이 들려오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부모들의 희생적인 사례들이 정말 지극하고 특별한 경우라 할지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한 듯이 여깁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부모의 보편적인 책임으로 그렇게 자식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고 여기며 또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거의 모두가 그렇게 자식을 위해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면 오늘날 대개의 부모들이 자기 자식이 적어도 남만큼 먹고 입고 배우도록 한 것으로 부모의 책임을 다 한 듯이 여기고 있으며, 때로는 남보다 더 잘 먹이고 입히고 더 많이 가르친 것을 책임 이상으로 공로화 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니까 가만히 보면 자식들을 위한 부모들의 희생은, 공통적으로 자식이 잘먹고 잘입고 남만큼 되는 수준 가운데서 부족함이 없이 배우고 성장하여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적어도 남 못지 않게 살고 때론 출세하고 입신양명하여 잘되는 것을 위한 희생으로 대개 국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많은 신앙의 부모들도 이런 일반적인 희생으로 그쳐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인들이 자식들을 위해 아끼지 않고 투자하는 것에 대해 자신들이 하지 모사는 것을 비관하고, 그래서 부러워하고, 그러다보니까 그들을 따라가 무리를 해서라도 자기도 자식들에게 남부럽지 않게 해 주어 그들처럼 되어보려고까지 합니다. 오히려 일반인들보다 더 극성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식이 성공하고 잘되었으면 그것을 자랑스러워합니다. 자식을 위해서 부모로서 할 일을 다했다는 자부심이 작용했을 것입니다. 전에 어느 탤런트의 아들이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수석을 하고 몇 가지 상을 타고 했습니다. 그 소식이 뉴스를 통해서 우리 나라에 알려지고 나서 사람들은 그것을 부러워하면서 자기 자식들도 잘 가르쳐서 서울대를 보내고 외국에 유학 보내고 해서 훌륭하게 키우겠다고 합니다. 이러한 풍조는 자식을 거느리고 있는 우리 나라 부모라면 누구나 그렇습니다. 문제는 성도들도 일반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 학군을 찾아 정든 교회를 떠납니다. 자식 공부를 위해서 세를 얻어(자기 집을 팔거나 세를 주고) 이사하는 성도도 있고, 자식을 서울에 두고 시골서 상하행하며 때론 주일도 잘 못지키면서까지 고생하며 정성을 다하는 신앙의 부모들도 있습니다. 또한 자식 교육 문제 때문에 시골 목회 짐싸고 도심으로 나와 개척교회를 세워 특별히 헌신하는 목회자도 있는가 하면 산간벽지 낙도 등지에 목회지가 생겨도 자식 교육 문제 때문에 도심지에서 버티는 목회자들도 있습니다. 충남 서천 지방 시골교회의 한 장로님에 의하면 그 교회에 오셨던 대개의 목회자들이 자녀들 교육 문제 때문에 얼마를 못 계시고 기회만 생기면, 형편만 되면 떠나갔다고 했습니다.
자식을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어떻게 해서든지 공부를 잘시키려는 것은 모든 부모들의 마음입니다. 모든 부모는 이를 위해서 정말 희생적입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그렇게 희생하면서 자식을 양육하는 목적의 본질에서 신앙의 부모된 성도는 일반인들과는 분명 달라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리스도를 높이는 가정이란 분명한 목적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가정을 이룬 자들로서 분명한 삶의 원칙을 가지고 생활의 법칙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 면에서 온 가족이 함께 도우며 섬기는 사랑으로 충만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자식 교육 문제에 대해서도 분명히 신앙의 부모된 성도는 일반인들과는 다른 모습을 띠어야 할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에 대한 양육을 맡고 있는 한에는, 분명히 생활의 여건이 허락하는 한에서는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잘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신앙의 부모된 성도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자식을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잘 가르치면서 자식을 교회에 나가게 하며 신앙생활 하게 한다는 생각 말입니다. 정말 그런 것입니까? 아닙니다. 신앙의 부모 된 성도가 자식에 대해 일차적으로,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갖는 관계는 자식이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자,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높이는 자가 되게 만드는데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높이는 자로 살게 하면서 그에 필요한, 먹이는 일도 해야 하고 입히는 일도 해야 하고 가르치는 일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식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그리스도를 높이는데 삶의 목적을 갖고 거기에 삶의 의욕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단지 무엇을 먹이며, 무엇을 입히고, 어떻게 가르칠까?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가득 차 있는 사람은 이방인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먼저 갖는 생각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그의 나라요,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들에게 있어야 할 신앙 지식을 채워줄려고 해서 성경을읽게 하고, 생각하게 하고, 말하게 하고 해서 신앙인으로 올곧게 키우고자 하는 욕망과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으로 디모데의 어머니와 할머니를 봅니다. 디모데는 그의 어머니 유니게와 할머니 로이스에게서 물려받은 신앙이 있었습니다. 디모데가 주님을 의지하는 거짓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고, 그의 마음이 진정으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고, 생각이 정결한 것은(딤전 1:5, 딤후 1:5), 신앙 교육이란 유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이런 신앙 교육에는 뜻밖에도 관심을 갖지 않고 있습니다. 우선 자식의 신앙 교육을 위해서는 전혀 투자를 하지 않습니다. 감독을 하지 않고, 교육을 시키지도 않고, 신앙 교육을 접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하지도 않습니다. 학교 교육을 위해서는 학교 수업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해서 과외다, 학원이다 해서 한 달에 피땀 흘려 번 돈을 적게는 수 십 만원에서 많게는 수 백 만원, 또는 그 이상의 지출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는 의당히 부모로서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식의 신앙 교육에는 관심이 없으며 무시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중3, 고3만 되면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모른척합니다. 자식으로서는 오늘날의 교육 환경에 의해 공부에 쫓기는 마음에서 철없이 그런 행태를 보일 수 있는데, 부모가 그것을 당연시하며 훈계를 하지 않으며 매를 들지 않습니다. 왜 신앙 교육을 위해서는 자식들에게 부모가 가르치지 못하고, 혹 그럴 처지가 되지 못하면 교회 선생을 붙이는 일이라도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자식이 그리스도를 높이는 생각으로 마음이 차 있도록 가르쳐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자식이 신앙에 무지하고, 세상 지식에 해박하여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잘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정말 성공하고 잘된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인용하면, 범죄한 손과 발과 눈을 가지고 지옥갈 자식으로 만들면 그게 자신을 위한 것입니까? 오히려 세상적으로 부족하고 미미한 자식 같아도 신앙 교육을 잘 시켜서 신앙인으로 훌륭하게 키웠어야 그게 성공한 것이며 참으로 잘된 것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인으로 존경하는 분들이 누구입니까? 입만 열면 거론하는 아브라함입니까? 다윗입니까? 베드로입니까? 바울, 요한 이런 사람입니까? 이들에게서 어떤 점이 유명하던가요? 다윗은 나라를 통치하는 왕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당시에 동료나 어떤 사람들보다도 참으로 잘 나가는 출세가도를 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만큼 그는 인정을 받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점이 그들에게서 유명한 점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그분들에게서 보고 듣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만을 가장 존귀히 여기면서 그렇게 하나님을 잘 믿으며 산 것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우리가 존경하며 그분들이 보인 본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들과 같이 성경에는, 특별히 바울의 서신들 말미에서 인사 부분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는 무명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참으로 유명히 여김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든 교우들로부터 참으로 존경을 받고 있었으니까요.
신앙의 부모된 성도는 가정에서 한 알의 밀알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의 자녀는 그 한 알의 밀알로 인해서 결실되어지는 열매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 한 알이 죽는 희생으로 인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희생에는 두 가지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는 육적인 희생이요, 또 하나는 영적인 희생입니다.
육적인 희생이란 자식을 위해서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수고시키는 것입니다. 신앙의 부모된 성도가 육적인 희생을 자기 몸을 사리지 않고서 하는 것은, 물론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일념에서입니다. 이렇게 부모는 자식을 양육하는데 있어서 자식이 올바르지 못할 때 훈계와 매만 쓰는게 아니라, 그럴 때라도 부모는 자기 희생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서 이 희생은 누누이 강조하였듯이, 자식이 그리스도를 높이는 가족의 한 구성원으로 제대로 자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거기에 필요한 먹이는 일과 입히는 일과 가르치는 일을 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수고하는 것으로 갖는 것입니다. 이 희생을 언제까지 하면 자식이 결혼하여 가정을 갖고 독립할 때까지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일생을 희생적 사랑을 베풀며 삽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만일 부모의 육적인 희생이 자식의 영혼을 생각하는 것이 없이 갖는 것이라면, 그 희생이란 세상에 한하는 세상 사람들의 보편적인 희생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는 오로지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고 인정하는 기준에서 잘됨을 위해 밑거름이 되어 주고 발판이 되어 주고 하는 것이며, 특출하게 잘되지 못해도 남만큼의 수준까지라도 올려 놓기 위해 자기 몸을 수고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희생은 결국 육체를 위해 심은 것으로서 그 결과는 순간적이요 잠시적인 자식을 위한 헌신으로 결국 헛된 희생이 됩니다. 이런 식의 부보의 자녀에 대한 헌신과 정성은 실로 아무리 지극했어도 결국 세상에서 반짝하고 마는 자녀로 되어지는 수고요 희생인 것입니다.
신앙의 부모된 성도는 자식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는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일차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다루는 것은 자식의 영혼을 생각하는 까닭에 영적인 희생에 많은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영적인 희생은 내 자녀가 영원한 복됨에 들어가는 것이요 하나님의 은혜와 그 안에서 잘되고 복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영적인 희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이것은 자식을 위해 예수를 믿고 자식의 잘됨과 복됨을 위해 힘쓰는 신앙 생활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신의 영원함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고 자신에게 자녀의 생명을 맡겨주신 데 따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될 수 있는 일에 힘쓰면서 자신은 힘써 부정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 오직 자식의 영혼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가령 아브라함을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후 하나님의 약속에서 보이신 거룩한 뜻을 받들어 나가는 모습을 온 가족에게 보이며 살아갔습니다. 훗날 이삭에게서 보는 모습은 그가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그도 섬기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는 야곱에게서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은 조상이 섬기는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아브라함은 훗날 그의 후손에게서 보게 되는 그런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식을 양육하는 일을 위하여 그 자신은 하나님의 뜻대로 충성하며 힘써 자신을 부정시키며 살았습니다. 그는 어디를 가든지, 그리고 그가 하는 모든 일에서 항상 자기에게 두고 계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거기에 순종하여 살았습니다. 아직 온전한 신앙에 이르지를 못하여서 자기 생각과 계획대로 사는 모습을 보일 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그를 돌이키셨고 그런 하나님께 그는 순종하였습니다. 아브라함 당시에 이러한 그의 모습은 교육의 현장이었습니다. 삶의 교육이란 말 그대로입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함께 많은 가축을 거느릴 때입니다. 그 수가 많다 보니까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조카 롯의 목자들간에 다툼이 잦았습니다. 서로 목좋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해서입니다. 보다 좋은 풀을 자기 가축들에게 많이 먹이려고 하려다 보니까 서로간에 충돌이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일을 보면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의도를 헤아립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약속 안에서 부르셨습니다만,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함께 길을 떠났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목자들과 조카 롯의 목자들간에 다툼이 생기는지 그 원인을 이해하고, 조카 롯에게 이제는 나누일 때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그가 삼촌의 명분을 이용하여 우선적으로 조카 롯보다 더 나은 곳을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그는 기름진 땅인 소돔과 고모라를 포기하는 신앙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런 그였기에 심지어는 모리아에 있는 한 산에 이삭을 제물로 바칠 것을 명령받았을 때도 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약속의 내용이 어떤 것인가를 알기에 순종하는 신앙의 모습을 그와 함께 동행하며 제물로 바쳐지는 이삭에게 보였으며, 이삭 또한 아버지가 가진 신앙에 참여하여 순종으로 제물이 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이요 그 명령이라면 자신은 물론 자기의 생명인 자식까지 희생시키려는 그런 중심의 생활을 사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자기 자식이 주안에서 잘되는, 그러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을 만드는 영적인 희생인 것입니다.
이렇게 영적인 희생을 하여서 내 자녀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잘된다고 하면, 내 자녀는 이 세상 사람들은 감히 생각하지도 못하는 귀한 것을 얻은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얻지 못하는 영생하는 생명을 얻고, 하나님에게서 귀히 여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믿음의 선진들이 그러한 복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교훈하시며, 또한 우리에게 그렇게 약속하고 계십니다(시 112:1-3, 128:1-3)
세상의 역사 가운데서도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진실하게 살아간, 그래서 때론 세상에서 어려움과 비방까지도 당했지만 역시 그들의 자녀 가운데는 세상에서 귀한 빛과 소금의 역할 - 하나님과 그 나라의 선양 - 을 하게 된 아름다운 사람들이 풍성히 맺어져 나타나게 된 것을 봅니다. 가까운 데서도 우리는 이런 실제를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상당히 귀하게 나타나지만 말입니다.
부모들이여, 자녀를 사랑합니까? 참으로 자녀가 잘되기를 바라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자신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좀더 말씀 중심적인 신앙 생활을 순전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이 신앙은 나와 내 가정에서 모든 장래에 그 어떤 것보다 귀하고 아름다우며 영원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자녀를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십시오. 필요하면 매를 금하지 마십시오. 정말 그렇게 하십시오. 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께 받은 영감으로 기록되어져 우리 손에 주어진 책이라고 하면서 이 성경은 진리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또한 우리 생활에서 악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해주는데 유익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을 바르게 하고 옳은 일을 행할 힘을 준다고 하였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를 모든 면에서 온전하게 하시고 남에게 착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해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신앙 교육 시켜서 양육하면, 그렇게 해서 자란 자녀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있어 하나님의 구원을 얻는 지혜를 소유하게 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점점 온전해져 갑니다.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선한 일을 행하게 됩니다. 그렇게 온전한 신앙인이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녀를 맡은 부모의 책임이 막중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녀에게
사도 바울은 이제 자녀들에게 부모를 공경할 것을 권면합니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자녀를 감독할 권리를 부모에게 주셨으므로 자녀들은 마땅히 부모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이 십계명 중에서 약속이 붙어 있는 첫째 계명입니다. 그 약속이란 '네 부모를 공경하면 너는 복을 받고 오래 살리라'는 것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살펴보겠습니다.
1. 십계명에서 부모 공경의 계명이 갖는 의미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십계명 중 제 5계명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이스라엘 백성과 시내산에서 언약식을 가졌습니다. 그 언약의 내용이 십계명에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참 신이 될 것이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라는 것인데, 그 관계로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고 섬기는 이을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제1계명). 그리고 우상을 만들고 거기에 절하고 섬겨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제2계명). 또한 하나님의 이름을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고 존귀케 하는 일 외에 인간의 육체적 쾌락이나 자기 만족을 위하여서 사용함으로 더럽혀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제3계명). 또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였습니다(제4계명). 하나님은 그런 자기 백성들과 그 후손들에게 복을 준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명을 주어서 준수하게 한 것은 종교를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는 하나님의 백성이 자기들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을 모시고 섬기는 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숭배하는 것인데,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좇아서 살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이 내신 계명을 지키는 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종교적 관계를 가짐으로 해서 대인관계에 있어서 참 도덕이 실현되어집니다. 도덕의 이상(理想)은 '사랑'에 있는데 하나님을 신앙하는 자는 그 마음 안에 사랑을 성품적으로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제5계명에서 하나님을 신앙하는 자가 성품적으로 대인관계를 어떻게 해 나가는지를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부모와 자녀라는 가족 관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만, 가족 내의 관계를 넘어서서는 모든 인간 상호간의 관계에 적용되어지는 계명으로서 '권위'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가정은 물론이고 사회와 국가와 교회에 있어서의 권위에 대한 교훈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교리문답 64문은 "제5계명에 명하는 것이 무엇인가?"에서 답하기를 "제5계명에 명하는 것은 각 사람에게 그 속한 지위와 인륜관계 곧 상하와 평등을 따라 높일 자를 높이고 행할 일을 하라 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며, 65문은 "제5계명에 금하는 것이 무엇인가?"에서 답하기를 "제5계명에 금하는 것은 각 사람에게 그 속한 지위와 인륜관계를 따라 마땅히 높일 것과 행할 일을 하게 하지 아니하는 것이나 막는 것입니다"라고 답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자신의 권위를 대리시키고 계십니다. 즉, 부모는 자녀에 대해서, 위정자는 국민에 대해서, 교회의 제직원은 성도들에 대해서 각각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권위가 존중되어야 하지 경시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권위를 경시하는 악행이 되기 때문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자녀는 부모에게, 국민은 위정자에게, 성도는 제직원에게 복종하며 존경하며 감사하며 경애하며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여 봉사할 것을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장 1절에서 이 사실을 다루며 부모를 공경할 것을 권면하였습니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자녀를 감독할 권리를 부모에게 주셨으므로 자녀들은 마땅히 부모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자녀를 감독하는 부모의 권리를 존중하여서 부모의 말에 복종하는 것이 부모의 권위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2. 부모에 대한 자녀의 도리
따라서 가정에서 마땅히 자녀는 부모의 권위를 존중하여 복종하고 공경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공경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며 부모에 대해서 그 자녀가 갖는 마땅한 도리는 공경해야만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의 부모님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분이시기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을 좇아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글나 이것은
3. 부모 공경의 바른 이해
자녀들은 부모를 공경할 것을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무조건, 그러니까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무조건 복종할 것을 뜻하진 않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을 떠나서 부모 자신들만을 위하여 복종하라고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시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하나님의 법을 어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우리가 공경해야 할 부모님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을 우리에게 명령한다고 할 때에는 결코 우리는 하나님을 불순종하는 일을 저질러서는 안 됩니다. 에베소서 6장 4절에서 부모들에게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한 것은 자녀들에게 비신앙적, 불신앙적인 것을 명령하고 강요하여 그로 인해 자녀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분노케 하는 일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자식을 주님 안에서 바른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부모에 대하여 그 자녀가 갖는 자태는 그 또한 주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부모에게 공경하고 복종하여야 합니다. 부모님이 하시는 말씀과 교훈에 복종하여 부모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는 곧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이 됩니다. 그것은 부모가 하는 말에서, 그래서 부모가 가진 뜻에는 곧 부모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복종하여 그 자식에게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자녀는 부모가 자기에게 하는 말에서 항상 하나님의 뜻을 찾습니다. 이런 까닭에 하나님을 잘 모시고 잘 섬기는 자는 부모 공경 또한 잘하기 마련이요, 부모 공경을 잘 하는 자는 사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입니다.
4. 부모 공경의 두 가지 면
자녀가 부모에게 갖는 공경에는 두 가지 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부모의 명예를 훼손해서는 안 됩니다. 종종 우리가 자신의 생각과 입장만을 내세워서 부모를 무시하는 언행을 함으로 해서 부모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체면을 손상시키는 일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식구들 앞에서이든지 간에, 또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이든지 간에 부모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이 됩니다. 그런가 하면 부모를 부모 대우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고부간에, (계)부모와 자식간의 갈등과 그로 인한 험담은 부모의 명예를 무시하고 손상시키는 행위입니다. 종종 여인네들이 모여서 시부모의 험담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게 하면서 웃으며 속에 있는 스트레스를 해소한다고 하지만, 그 또한 부모의 명예를 무시하고 손상시키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서로 모여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고 있는 말, 없는 말을 꺼내기 마련이지만 부모를 높이는 말과 부모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말을 가려서 해야 합니다.
둘째, 자식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보양하는 것은 자식의 의무요 책임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다만 물질로서 섬기는 것만이 아니라, 영적으로 심적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행복한 삶을 살도록 섬김을 다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5. 부모 공경에서 자녀가 부모에 대해 갖는 사랑을 봄
타락한 인간의 죄성은 하나님의 뜻을 위배하며 삽니다. 부모님이 살아 있을 때는 불효하고 위선으로 섬기고 돌아가시자 효도하겠다고 하는 것이 우리네 인간입니다. 그래서 불효한만큼 위선으로 섬긴만큼 묘자리를 크게 하나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의 불효와 위선을 감추기 위해서입니다. 부모에게 복종하고 공경하려고 하는 것이 도덕이고 선입니다만, 순간 순간적으로(어떤 사람의 경우는 지속적이지만) 불효하는 것에서 죄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 사랑으로 하나님을 공경(숭배)합니다. 이제 그 사랑과 공경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부모님에게 가지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부모를 사랑으로 공경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우리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골 3:20)이므로 부모를 사랑으로 공경하여야 합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에서 '옳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6. 부모를 잘 섬기는 일은 공경의 기본 도리임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는 데는 부모가 자녀를 양육하는데서 보인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잘 가르치기 위하여 헌신적인 희생을 보인 본을 그대로 따릅니다. 그러니까 자녀들도 부모를 공경하는데 있어서는 여건이 허락하는 한에는 부모가 건강하고 평안하게 지내실 수 있도록 잘 잡숩게 하고, 의복을 잘 챙겨주고, 그 마음을 기쁘고 즐겁게 해 드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부모 공경의 기본 도리입니다. 누구든지간에 자신의 형편 속에서 힘써서 부모를 잘 섬겨야 합니다. 때때로 사회에서 부모를 무시하며 심지어는 학대하고 현대판 고려장까지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그런 죄악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는 하늘의 선한 성품으로 살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선한 성품을 부모를 잘 섬기는 일을 하지 않고서 다른 더 좋은 것으로 할 수는 없습니다.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는 일은 일상에서 행할 일입니다. 그렇지 않다가 어떤 특정한 날이나, 가끔 크고 좋은 선물로 대신 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닙니다. 더욱이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야 매년 제사를 후하게 지내니 하는 따위의 어리석음이란…. 오늘날 성도들이 변형된 제사인 추도식을 갖는 그 속마음을 꼬집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꼭 '추도예배'란 말을 고집하는 이유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7. 부모 공경은 약속 있는 첫 계명임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에게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복으로 약속하셨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말한 것은,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금생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을 보호하시고 복있게 하시는가 하면, 내세에서 영생복락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가 누리는 장수의 축복입니다.
지상에서 장수라는 축복이 약속되어 있는 것은, 이 계명이 우리들에게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장수라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인 것에 한해서 약속되어지는 것이다」라고 칼빈은 제5계명의 해설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이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은혜를 하나님의 사람들의 죽음에 의해서, 더욱 풍부하게, 더욱 굳게 증거하고 제시하시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과거 구약 시대의 경륜하에서 보고 있는 믿음의 사람들의 무덤,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무덤은 그분들이 부모를 공경하고 복종하여 부모의 신앙 안에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진실한 믿음을 가짐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생복락하는 증거가 되고 있었습니다.
맺는 말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녀에게 부모를 공경할 것을 권면하고, 부모에게는 자녀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잘 양육할 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가정을 이루고 있는 온 가족은 그리스도를 높이는 가정으로 만드는 일에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더욱더 닮은 자가 되기를 바라서입니다. 부모와 자녀는 각각 그리스도의 지휘에 따라 온몸이 서로 완전히 어울려서 각 지체는 다른 지체를 돕는 그런 관계성 속에서 존재를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나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단지 인륜의 차원에서만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가족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높이는 일에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써 공동의 목표를 위하여 마땅히 힘써 수고하여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일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까 혈통의 관계와 그 정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온 가족이 함께 그리스도의 몸의 한 부분으로 있는 관계의 이해 속에서 부모로서 가지고 있는 마땅한 책임과 의무를 그리스도를 본 받아서 다하는 것이고, 자녀는 부모에 대해 마땅히 가져야 하는 도리를 그리스도를 본 받아서 다하는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가정은 사랑으로 충만합니다. 자녀의 양육과 부모의 공경은 '사랑으로' 행해지기 때문입니다.아멘(*)
사랑으로 충만하는 원리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 15-16절에서 우리는 언제나 진리를 따라 진실하게 말하고 행동하고 생활하여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더욱더 닮은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지휘에 따라 온몸이 서로 완전히 어울려서 각 지체는 각기 다른 지체를 도우라고 권면합니다. 그럴 경우 온몸이 건강하게 성장하여 사랑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원리는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교회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로서 그 구성원인 가족은, 그러니까 부모와 자녀들은 그리스도의 한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들입니다. 이 말은, 부모와 자녀들의 관계는 그들 각 자가 머리(주)이신그리스도의 몸의 한 일부인 까닭에 그리스도와 가진 부모로서의 위치, 그리스도와 가진 자녀로서의 위치에서 각기 제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부모는 자녀 앞에서 그리스도와 같은 자입니다. 그것은 부모는 자녀들에게서 그리스도의 대리인의 자격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권위와 심정을 가지고 자녀를 잘 양육해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자녀는 부모들에게 그리스도를 대하듯 모시고 섬겨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부모와 자녀는 단지 혈통과 그에 따라서 가지는 본성적인 애정에 의해서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의 가정과는 확연하게 구별이 됩니다.
자기 자녀가 잘 되는 것을 보고자 하는 것이 부모의 심정이고, 그래서 자녀에 큰 관심을 가지고 양육하는 것이 부모이며, 또한 자기를 낳아주셨을 뿐만 아니라 고생하시면서 자신을 먹이시고 입히시고 교육시키면서 잘 자랄 수 있게 해 주신 부모를 존경하며 섬기는 것이 자녀들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들이 사는 인생의 목적을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데에 두는 데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높이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온 가족이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일에 온전한 사람이 되어 가는 일에 힘씁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으로 양육하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자녀들이 부모를 존경하며 힘써 섬기는 것은 그가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천성적 성질에 의해서 갖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일에 온전한 사람이 되어 가는 일에 온 가족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더욱더 닮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가정에서 보는 것은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서로를 돕고 섬기는 사랑으로 충만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가정을 이룬 자들의 삶의 원칙과 생활의 법칙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받은 새생명을 소유한 자들이기 때문에 삶에는 언제나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는 절대적인 원칙을 가지고 삽니다. 그리고 여기에 있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생활의 법칙대로 삽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구원받지 못할 자들이 사는 방식대로 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참조. 엡 4:17-5:5). 구원받지 못할 자들은 죄에 의한 타락의 근성으로 인해서 어둠에 속한 성질을 띠며 삽니다.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닫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서 보여지는 것은 온갖 악한 생각에 따른 육신의 욕망이요 불결한 행동입니다. 이런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거룩한 속성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가정 안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시대가 흐를수록, 그래서 세상의 마지막 때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런 현상은 더욱 두드러지게 심화됩니다. 세상이 발전하고 잘 사는 시대가 왔다고 해서, 또한 그런 시대가 더욱 나아질 것이라고 해서 둔화되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심해집니다. 가정의 질서와 도덕성이 무너지는 현상은 그 속도가 가속력을 띨 것입니다. 오늘날에 학교에서 어린 학생들이 보이는 행동은 이미 가정에서부터 터져 나온 현상에 불과하며, 이는 어른들의 사회 구조가 그렇게 변화된 데 따른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시며 선한 분인지가 말과 행동에 없는 데에서는,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지 않는 곳에서는, 그곳이 가정이란 울타리이든 사회란 울타리이든, 학교란 울타리이든지간에 인간의 악한 모습이 자리잡기 마련입니다. 사람이 그 죄악성을 발휘하는데 있어서 경중이 있겠지만, 인간은 다 악합니다. 우리는 한 예로 우리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서도 그러한 모습을 보지 않습니까? 이제 몇 살 되지 않은 유아들에게서도, 철부지 소년에게서도, 머리가 다 큰 청소년에게서도 말입니다. 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베풉니다만 이것은 유아들이 구원받을 만큼 선해서가 아닙니다. 그 어린것들이라고 해서 지옥 가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선한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어린 자녀라 할지라도 그들도 죄인이란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담의 범죄에 의한 죄책의 전가와 전적 부패의 유전으로 인해서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원의(原義)를 상실하였으며, 부패한 근성을 가지고 삽니다. 이런 사실은 어른 값을 해야 할 성인에게서 더욱 뚜렷합니다. 인간의 부패한 근성은 죄의 힘을 발휘할 기회를 많이 만들어주는 오늘날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그 위력을 더욱 발휘합니다. 앞으로 더 하겠지요. 하나님이 없는 가정이 이렇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그리스도의 가정을 이루고 있는 가족 구성원은 분명히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른 차별성을 띠고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둠에 속한 자들이 아닙니다. 빛의 자녀 된 자들입니다. 우리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빛으로 충만해 있으니 생활로 그것을 증명해 가야 하는데, 선한 일과 옳은 일과 진실한 일만 해야 합니다(엡 5:8-9).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만을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성령 충만'으로 설명해 나갑니다. 우리 몸을 악과 어둠의 무가치한 쾌락에 맡기지 말고 성령의 지배를 받아 시편과 찬송가를 암송하고 거룩한 노래를 부르라고 말합니다. 마음속에서 우러난 노래를 불러 주님을 찬양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말합니다(엡 5:10-20).
그리고 말입니다. 서로 순종하면서 그리스도를 높이라고 말합니다(엡 5:21). 그 구체적인 언급을 남편과 아내를 들어서(엡 5:21-33), 그리고 자녀와 부모를 들어서(엡 6:1-4), 또한 종과 주인을 들어서(엡 6:5-9) 말해줍니다.
우리는 이 중에서 두 번째 부분인 자녀와 부모에게 해 주고 있는 말씀을 대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자녀들에게 권면합니다. "자녀들아 부모에게 순종하라. 하나님께서 자녀를 감독할 권리를 부모에게 주셨으므로 자녀들은 마땅히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다. 부모를 공경하는 자에게 준 약속이란 '네 부모를 공경하면 너는 복을 받고 오래 살리라'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나서 부모들에게도 당부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자녀들을 너무 꾸짖지 마십시오. 또 잔소리를 늘어놓아 반항심을 일으키거나 분노를 품게 하지 마십시오. 그보다는 주님의 사랑이 담긴 훈계와 조언과 충고로 키우십시오."라고 말하였습니다.
부모에게
1. 훈계와 매
여기서 먼저 순서를 부모들에게 한 당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자녀를 둔 부모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녀가 그리스도를 높이는 자가 되어가도록 양육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양육하는데 있어서는 두 가지 방편이 사용됩니다. 하나는 훈계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매입니다. 이 중 어느 하나는 필요하고 어느 하나는 필요 없다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부모에게 자녀를 양육하는 데 있어서 너무 꾸짖거나 잔소리를 늘어놓지 말라고 합니다. 그보다는 주님의 사랑이 담긴 훈계와 조언과 충고로 키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잠언 기자는 "꾸짖고 매를 들어야 자식이 슬기롭게 살 것 아니냐? 그런데 그러지를 않고 자식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면 오히려 그 자식의 장래를 망쳐 자식이 어미의 속만 끓일 것이다"(잠 29:15)라고 꾸짖음과 매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자식을 매로 다스려라, 그래야 걱정이 없어질 것이며 흐뭇한 마음으로 살 수 있을 것이다"(잠 29:17)라고 하였습니다. "부모의 훈계를 받는 것을 싫어하고 우습게 여기며 거부하는 자는 아주 어리석은 자로서 스스로 자기의 영혼(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것이다"(잠 15:5, 32)라고 하였습니다. 부모의 훈계를 받는 것을 싫어하는 자녀가 하물며 매를 달게 받겠습니까? 그렇지만 부모가 그것을 염려하여 매를 들지 않으면 자기 자식을 망하게 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습니다. 요즘 아이들이 어떤지를 아십니까? 며칠 전에 집 앞에서 교복을 입은 학생이 손에는 운동화를 들고 있으면서 실내화로 거리를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학생이 한 둘이 아닙니다. 교복 윗도리를 꺼내놓고 다니고, 넥타이는 풀어 헤쳐 있고, 게다가 교실과 복도에서 신고 다니는 실내화를 버젓이 집에서 학교를 갈 때나 학교에서 집에 갈 때 신고 다닙니다. 보기에 아주 좋지 안잖습니까? 품행 단정이라고 그들 머리 속에는 아예 의식이 없습니다. 그것을 보고는 도저히 가만 있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네가 지금 신고 있는 것은 학교 실내화 아니냐?"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학생이 가당찮은 듯이 빤히 쳐다봅니다. 그래서 다시 좀더 큰 소리로 거듭 물었습니다. "네가 지금 신고 있는 것 학교 실내화냐? 아니냐?" 그랬더니 그제서야 "실내화입니다" 대답합니다. 그래서 "그래, 학교 실내화를 거리를 다닐 때 신고 다니고 거리를 다닐 때 신으라고 있는 운동화는 들고 다니냐?"고 나무랐습니다. 그리고는 "학생이 학교에서 집에 올 때는 운동화를 신고 제대로 다니고, 실내화는 교실에서 신으라고 있는 것이니까 거기에 맞게 교실에서 신고 다녀야지 이게 뭐냐?"고 말하면서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학생은 그러한 충고가 아주 못 마땅해 하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래 집으로 올라오면서 온갖 생각이 듭니다. "도대체 저 아이의 부모는 자기 자식에게 저런 꼴을 보면서도 용납하는가? 아무 소리도 못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내 버려 두는가?"라고 말입니다. 남의 아이가 문제가 있어도 못 보겠는데, 정작 내 자식이 그와 같은 행동이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서 훈계와 매를 들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정말 부모가 자식에게 매를 들지 않습니다. 훈계하는 것조차 꺼려합니다. 그 결과 이 아이들이 커서 장래가 어찌될 것인지를 우려할만한 현실이 온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양육하는데 있어서는 훈계와 함께 매가 좋은 교육의 수단으로 사용이 됩니다. 부모가 훈계와 함께 매를 사용하는 것은 자식의 영혼과 그 장래를 염려해서입니다. 그러니 자식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에서이죠.. 그리스도의 가정에서 부모는 자기 자식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되는 일에 있어서 한 구성원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인도자요 선생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를 주신 것은 그러한 일을 맡아서 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런 자녀가 될 수 있도록 부모는 부모로서 받아 가지고 있는 권리를 행사해야 하고, 그만큼 책임 있게 자녀를 양육해야 합니다.
2. 자식에 대한 부모의 두 가지 희생
자식에게 갖는 부모의 훈계와 매는 사실 자식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부모의 사랑이 크고 올바른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는 기대가 크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옳은 길로 인도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자식의 영혼이 잘 될 수 있게 하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서 부모는 희생합니다. 희생은 위대한 사랑의 행위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행히도 우리 인간들이 이런 위대한 사랑을 보편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자식에 대한 부모의 희생입니다. 참으로 세상에서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마다하는 부모가 있을까요? 자식이 아픈 것보다 차라리 내가 아프길 원하고 자식이 좀더 잘되고 자식에게 유익되고 자식이 좋아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어렵고 힘들고 괴로운 것이라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 백일하에 드러난 부모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을 보면 자식을 위한 부모의 아름답고 숭고하며 때론 애틋한 희생적인 사례들이 많이 들려오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부모들의 희생적인 사례들이 정말 지극하고 특별한 경우라 할지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한 듯이 여깁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부모의 보편적인 책임으로 그렇게 자식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고 여기며 또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거의 모두가 그렇게 자식을 위해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면 오늘날 대개의 부모들이 자기 자식이 적어도 남만큼 먹고 입고 배우도록 한 것으로 부모의 책임을 다 한 듯이 여기고 있으며, 때로는 남보다 더 잘 먹이고 입히고 더 많이 가르친 것을 책임 이상으로 공로화 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니까 가만히 보면 자식들을 위한 부모들의 희생은, 공통적으로 자식이 잘먹고 잘입고 남만큼 되는 수준 가운데서 부족함이 없이 배우고 성장하여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적어도 남 못지 않게 살고 때론 출세하고 입신양명하여 잘되는 것을 위한 희생으로 대개 국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많은 신앙의 부모들도 이런 일반적인 희생으로 그쳐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인들이 자식들을 위해 아끼지 않고 투자하는 것에 대해 자신들이 하지 모사는 것을 비관하고, 그래서 부러워하고, 그러다보니까 그들을 따라가 무리를 해서라도 자기도 자식들에게 남부럽지 않게 해 주어 그들처럼 되어보려고까지 합니다. 오히려 일반인들보다 더 극성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식이 성공하고 잘되었으면 그것을 자랑스러워합니다. 자식을 위해서 부모로서 할 일을 다했다는 자부심이 작용했을 것입니다. 전에 어느 탤런트의 아들이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수석을 하고 몇 가지 상을 타고 했습니다. 그 소식이 뉴스를 통해서 우리 나라에 알려지고 나서 사람들은 그것을 부러워하면서 자기 자식들도 잘 가르쳐서 서울대를 보내고 외국에 유학 보내고 해서 훌륭하게 키우겠다고 합니다. 이러한 풍조는 자식을 거느리고 있는 우리 나라 부모라면 누구나 그렇습니다. 문제는 성도들도 일반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 학군을 찾아 정든 교회를 떠납니다. 자식 공부를 위해서 세를 얻어(자기 집을 팔거나 세를 주고) 이사하는 성도도 있고, 자식을 서울에 두고 시골서 상하행하며 때론 주일도 잘 못지키면서까지 고생하며 정성을 다하는 신앙의 부모들도 있습니다. 또한 자식 교육 문제 때문에 시골 목회 짐싸고 도심으로 나와 개척교회를 세워 특별히 헌신하는 목회자도 있는가 하면 산간벽지 낙도 등지에 목회지가 생겨도 자식 교육 문제 때문에 도심지에서 버티는 목회자들도 있습니다. 충남 서천 지방 시골교회의 한 장로님에 의하면 그 교회에 오셨던 대개의 목회자들이 자녀들 교육 문제 때문에 얼마를 못 계시고 기회만 생기면, 형편만 되면 떠나갔다고 했습니다.
자식을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어떻게 해서든지 공부를 잘시키려는 것은 모든 부모들의 마음입니다. 모든 부모는 이를 위해서 정말 희생적입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그렇게 희생하면서 자식을 양육하는 목적의 본질에서 신앙의 부모된 성도는 일반인들과는 분명 달라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리스도를 높이는 가정이란 분명한 목적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가정을 이룬 자들로서 분명한 삶의 원칙을 가지고 생활의 법칙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 면에서 온 가족이 함께 도우며 섬기는 사랑으로 충만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자식 교육 문제에 대해서도 분명히 신앙의 부모된 성도는 일반인들과는 다른 모습을 띠어야 할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에 대한 양육을 맡고 있는 한에는, 분명히 생활의 여건이 허락하는 한에서는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잘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신앙의 부모된 성도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자식을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잘 가르치면서 자식을 교회에 나가게 하며 신앙생활 하게 한다는 생각 말입니다. 정말 그런 것입니까? 아닙니다. 신앙의 부모 된 성도가 자식에 대해 일차적으로,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갖는 관계는 자식이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자,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높이는 자가 되게 만드는데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높이는 자로 살게 하면서 그에 필요한, 먹이는 일도 해야 하고 입히는 일도 해야 하고 가르치는 일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식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그리스도를 높이는데 삶의 목적을 갖고 거기에 삶의 의욕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단지 무엇을 먹이며, 무엇을 입히고, 어떻게 가르칠까?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가득 차 있는 사람은 이방인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먼저 갖는 생각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그의 나라요,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들에게 있어야 할 신앙 지식을 채워줄려고 해서 성경을읽게 하고, 생각하게 하고, 말하게 하고 해서 신앙인으로 올곧게 키우고자 하는 욕망과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으로 디모데의 어머니와 할머니를 봅니다. 디모데는 그의 어머니 유니게와 할머니 로이스에게서 물려받은 신앙이 있었습니다. 디모데가 주님을 의지하는 거짓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고, 그의 마음이 진정으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고, 생각이 정결한 것은(딤전 1:5, 딤후 1:5), 신앙 교육이란 유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이런 신앙 교육에는 뜻밖에도 관심을 갖지 않고 있습니다. 우선 자식의 신앙 교육을 위해서는 전혀 투자를 하지 않습니다. 감독을 하지 않고, 교육을 시키지도 않고, 신앙 교육을 접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하지도 않습니다. 학교 교육을 위해서는 학교 수업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해서 과외다, 학원이다 해서 한 달에 피땀 흘려 번 돈을 적게는 수 십 만원에서 많게는 수 백 만원, 또는 그 이상의 지출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는 의당히 부모로서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식의 신앙 교육에는 관심이 없으며 무시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중3, 고3만 되면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모른척합니다. 자식으로서는 오늘날의 교육 환경에 의해 공부에 쫓기는 마음에서 철없이 그런 행태를 보일 수 있는데, 부모가 그것을 당연시하며 훈계를 하지 않으며 매를 들지 않습니다. 왜 신앙 교육을 위해서는 자식들에게 부모가 가르치지 못하고, 혹 그럴 처지가 되지 못하면 교회 선생을 붙이는 일이라도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자식이 그리스도를 높이는 생각으로 마음이 차 있도록 가르쳐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자식이 신앙에 무지하고, 세상 지식에 해박하여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잘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정말 성공하고 잘된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인용하면, 범죄한 손과 발과 눈을 가지고 지옥갈 자식으로 만들면 그게 자신을 위한 것입니까? 오히려 세상적으로 부족하고 미미한 자식 같아도 신앙 교육을 잘 시켜서 신앙인으로 훌륭하게 키웠어야 그게 성공한 것이며 참으로 잘된 것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인으로 존경하는 분들이 누구입니까? 입만 열면 거론하는 아브라함입니까? 다윗입니까? 베드로입니까? 바울, 요한 이런 사람입니까? 이들에게서 어떤 점이 유명하던가요? 다윗은 나라를 통치하는 왕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당시에 동료나 어떤 사람들보다도 참으로 잘 나가는 출세가도를 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만큼 그는 인정을 받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점이 그들에게서 유명한 점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그분들에게서 보고 듣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만을 가장 존귀히 여기면서 그렇게 하나님을 잘 믿으며 산 것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우리가 존경하며 그분들이 보인 본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들과 같이 성경에는, 특별히 바울의 서신들 말미에서 인사 부분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는 무명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참으로 유명히 여김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든 교우들로부터 참으로 존경을 받고 있었으니까요.
신앙의 부모된 성도는 가정에서 한 알의 밀알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의 자녀는 그 한 알의 밀알로 인해서 결실되어지는 열매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 한 알이 죽는 희생으로 인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희생에는 두 가지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는 육적인 희생이요, 또 하나는 영적인 희생입니다.
육적인 희생이란 자식을 위해서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수고시키는 것입니다. 신앙의 부모된 성도가 육적인 희생을 자기 몸을 사리지 않고서 하는 것은, 물론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일념에서입니다. 이렇게 부모는 자식을 양육하는데 있어서 자식이 올바르지 못할 때 훈계와 매만 쓰는게 아니라, 그럴 때라도 부모는 자기 희생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서 이 희생은 누누이 강조하였듯이, 자식이 그리스도를 높이는 가족의 한 구성원으로 제대로 자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거기에 필요한 먹이는 일과 입히는 일과 가르치는 일을 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수고하는 것으로 갖는 것입니다. 이 희생을 언제까지 하면 자식이 결혼하여 가정을 갖고 독립할 때까지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일생을 희생적 사랑을 베풀며 삽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만일 부모의 육적인 희생이 자식의 영혼을 생각하는 것이 없이 갖는 것이라면, 그 희생이란 세상에 한하는 세상 사람들의 보편적인 희생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는 오로지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고 인정하는 기준에서 잘됨을 위해 밑거름이 되어 주고 발판이 되어 주고 하는 것이며, 특출하게 잘되지 못해도 남만큼의 수준까지라도 올려 놓기 위해 자기 몸을 수고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희생은 결국 육체를 위해 심은 것으로서 그 결과는 순간적이요 잠시적인 자식을 위한 헌신으로 결국 헛된 희생이 됩니다. 이런 식의 부보의 자녀에 대한 헌신과 정성은 실로 아무리 지극했어도 결국 세상에서 반짝하고 마는 자녀로 되어지는 수고요 희생인 것입니다.
신앙의 부모된 성도는 자식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는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일차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다루는 것은 자식의 영혼을 생각하는 까닭에 영적인 희생에 많은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영적인 희생은 내 자녀가 영원한 복됨에 들어가는 것이요 하나님의 은혜와 그 안에서 잘되고 복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영적인 희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이것은 자식을 위해 예수를 믿고 자식의 잘됨과 복됨을 위해 힘쓰는 신앙 생활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신의 영원함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고 자신에게 자녀의 생명을 맡겨주신 데 따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될 수 있는 일에 힘쓰면서 자신은 힘써 부정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 오직 자식의 영혼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가령 아브라함을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후 하나님의 약속에서 보이신 거룩한 뜻을 받들어 나가는 모습을 온 가족에게 보이며 살아갔습니다. 훗날 이삭에게서 보는 모습은 그가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그도 섬기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는 야곱에게서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은 조상이 섬기는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아브라함은 훗날 그의 후손에게서 보게 되는 그런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식을 양육하는 일을 위하여 그 자신은 하나님의 뜻대로 충성하며 힘써 자신을 부정시키며 살았습니다. 그는 어디를 가든지, 그리고 그가 하는 모든 일에서 항상 자기에게 두고 계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거기에 순종하여 살았습니다. 아직 온전한 신앙에 이르지를 못하여서 자기 생각과 계획대로 사는 모습을 보일 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그를 돌이키셨고 그런 하나님께 그는 순종하였습니다. 아브라함 당시에 이러한 그의 모습은 교육의 현장이었습니다. 삶의 교육이란 말 그대로입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함께 많은 가축을 거느릴 때입니다. 그 수가 많다 보니까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조카 롯의 목자들간에 다툼이 잦았습니다. 서로 목좋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해서입니다. 보다 좋은 풀을 자기 가축들에게 많이 먹이려고 하려다 보니까 서로간에 충돌이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일을 보면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의도를 헤아립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약속 안에서 부르셨습니다만,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함께 길을 떠났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목자들과 조카 롯의 목자들간에 다툼이 생기는지 그 원인을 이해하고, 조카 롯에게 이제는 나누일 때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그가 삼촌의 명분을 이용하여 우선적으로 조카 롯보다 더 나은 곳을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그는 기름진 땅인 소돔과 고모라를 포기하는 신앙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런 그였기에 심지어는 모리아에 있는 한 산에 이삭을 제물로 바칠 것을 명령받았을 때도 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약속의 내용이 어떤 것인가를 알기에 순종하는 신앙의 모습을 그와 함께 동행하며 제물로 바쳐지는 이삭에게 보였으며, 이삭 또한 아버지가 가진 신앙에 참여하여 순종으로 제물이 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이요 그 명령이라면 자신은 물론 자기의 생명인 자식까지 희생시키려는 그런 중심의 생활을 사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자기 자식이 주안에서 잘되는, 그러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을 만드는 영적인 희생인 것입니다.
이렇게 영적인 희생을 하여서 내 자녀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잘된다고 하면, 내 자녀는 이 세상 사람들은 감히 생각하지도 못하는 귀한 것을 얻은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얻지 못하는 영생하는 생명을 얻고, 하나님에게서 귀히 여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믿음의 선진들이 그러한 복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교훈하시며, 또한 우리에게 그렇게 약속하고 계십니다(시 112:1-3, 128:1-3)
세상의 역사 가운데서도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진실하게 살아간, 그래서 때론 세상에서 어려움과 비방까지도 당했지만 역시 그들의 자녀 가운데는 세상에서 귀한 빛과 소금의 역할 - 하나님과 그 나라의 선양 - 을 하게 된 아름다운 사람들이 풍성히 맺어져 나타나게 된 것을 봅니다. 가까운 데서도 우리는 이런 실제를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상당히 귀하게 나타나지만 말입니다.
부모들이여, 자녀를 사랑합니까? 참으로 자녀가 잘되기를 바라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자신이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좀더 말씀 중심적인 신앙 생활을 순전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이 신앙은 나와 내 가정에서 모든 장래에 그 어떤 것보다 귀하고 아름다우며 영원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자녀를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십시오. 필요하면 매를 금하지 마십시오. 정말 그렇게 하십시오. 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께 받은 영감으로 기록되어져 우리 손에 주어진 책이라고 하면서 이 성경은 진리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또한 우리 생활에서 악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해주는데 유익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을 바르게 하고 옳은 일을 행할 힘을 준다고 하였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를 모든 면에서 온전하게 하시고 남에게 착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해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신앙 교육 시켜서 양육하면, 그렇게 해서 자란 자녀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있어 하나님의 구원을 얻는 지혜를 소유하게 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점점 온전해져 갑니다.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선한 일을 행하게 됩니다. 그렇게 온전한 신앙인이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녀를 맡은 부모의 책임이 막중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녀에게
사도 바울은 이제 자녀들에게 부모를 공경할 것을 권면합니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자녀를 감독할 권리를 부모에게 주셨으므로 자녀들은 마땅히 부모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이 십계명 중에서 약속이 붙어 있는 첫째 계명입니다. 그 약속이란 '네 부모를 공경하면 너는 복을 받고 오래 살리라'는 것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살펴보겠습니다.
1. 십계명에서 부모 공경의 계명이 갖는 의미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십계명 중 제 5계명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이스라엘 백성과 시내산에서 언약식을 가졌습니다. 그 언약의 내용이 십계명에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참 신이 될 것이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라는 것인데, 그 관계로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고 섬기는 이을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제1계명). 그리고 우상을 만들고 거기에 절하고 섬겨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제2계명). 또한 하나님의 이름을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고 존귀케 하는 일 외에 인간의 육체적 쾌락이나 자기 만족을 위하여서 사용함으로 더럽혀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제3계명). 또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였습니다(제4계명). 하나님은 그런 자기 백성들과 그 후손들에게 복을 준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명을 주어서 준수하게 한 것은 종교를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는 하나님의 백성이 자기들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을 모시고 섬기는 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숭배하는 것인데,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좇아서 살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이 내신 계명을 지키는 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종교적 관계를 가짐으로 해서 대인관계에 있어서 참 도덕이 실현되어집니다. 도덕의 이상(理想)은 '사랑'에 있는데 하나님을 신앙하는 자는 그 마음 안에 사랑을 성품적으로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제5계명에서 하나님을 신앙하는 자가 성품적으로 대인관계를 어떻게 해 나가는지를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부모와 자녀라는 가족 관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만, 가족 내의 관계를 넘어서서는 모든 인간 상호간의 관계에 적용되어지는 계명으로서 '권위'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가정은 물론이고 사회와 국가와 교회에 있어서의 권위에 대한 교훈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교리문답 64문은 "제5계명에 명하는 것이 무엇인가?"에서 답하기를 "제5계명에 명하는 것은 각 사람에게 그 속한 지위와 인륜관계 곧 상하와 평등을 따라 높일 자를 높이고 행할 일을 하라 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며, 65문은 "제5계명에 금하는 것이 무엇인가?"에서 답하기를 "제5계명에 금하는 것은 각 사람에게 그 속한 지위와 인륜관계를 따라 마땅히 높일 것과 행할 일을 하게 하지 아니하는 것이나 막는 것입니다"라고 답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자신의 권위를 대리시키고 계십니다. 즉, 부모는 자녀에 대해서, 위정자는 국민에 대해서, 교회의 제직원은 성도들에 대해서 각각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권위가 존중되어야 하지 경시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권위를 경시하는 악행이 되기 때문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자녀는 부모에게, 국민은 위정자에게, 성도는 제직원에게 복종하며 존경하며 감사하며 경애하며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여 봉사할 것을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장 1절에서 이 사실을 다루며 부모를 공경할 것을 권면하였습니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자녀를 감독할 권리를 부모에게 주셨으므로 자녀들은 마땅히 부모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자녀를 감독하는 부모의 권리를 존중하여서 부모의 말에 복종하는 것이 부모의 권위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2. 부모에 대한 자녀의 도리
따라서 가정에서 마땅히 자녀는 부모의 권위를 존중하여 복종하고 공경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공경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며 부모에 대해서 그 자녀가 갖는 마땅한 도리는 공경해야만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의 부모님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분이시기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을 좇아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글나 이것은
3. 부모 공경의 바른 이해
자녀들은 부모를 공경할 것을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무조건, 그러니까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무조건 복종할 것을 뜻하진 않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을 떠나서 부모 자신들만을 위하여 복종하라고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시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하나님의 법을 어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우리가 공경해야 할 부모님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을 우리에게 명령한다고 할 때에는 결코 우리는 하나님을 불순종하는 일을 저질러서는 안 됩니다. 에베소서 6장 4절에서 부모들에게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한 것은 자녀들에게 비신앙적, 불신앙적인 것을 명령하고 강요하여 그로 인해 자녀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분노케 하는 일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자식을 주님 안에서 바른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는 부모에 대하여 그 자녀가 갖는 자태는 그 또한 주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부모에게 공경하고 복종하여야 합니다. 부모님이 하시는 말씀과 교훈에 복종하여 부모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는 곧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이 됩니다. 그것은 부모가 하는 말에서, 그래서 부모가 가진 뜻에는 곧 부모가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복종하여 그 자식에게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자녀는 부모가 자기에게 하는 말에서 항상 하나님의 뜻을 찾습니다. 이런 까닭에 하나님을 잘 모시고 잘 섬기는 자는 부모 공경 또한 잘하기 마련이요, 부모 공경을 잘 하는 자는 사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입니다.
4. 부모 공경의 두 가지 면
자녀가 부모에게 갖는 공경에는 두 가지 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부모의 명예를 훼손해서는 안 됩니다. 종종 우리가 자신의 생각과 입장만을 내세워서 부모를 무시하는 언행을 함으로 해서 부모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체면을 손상시키는 일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식구들 앞에서이든지 간에, 또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이든지 간에 부모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이 됩니다. 그런가 하면 부모를 부모 대우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고부간에, (계)부모와 자식간의 갈등과 그로 인한 험담은 부모의 명예를 무시하고 손상시키는 행위입니다. 종종 여인네들이 모여서 시부모의 험담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게 하면서 웃으며 속에 있는 스트레스를 해소한다고 하지만, 그 또한 부모의 명예를 무시하고 손상시키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서로 모여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고 있는 말, 없는 말을 꺼내기 마련이지만 부모를 높이는 말과 부모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말을 가려서 해야 합니다.
둘째, 자식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보양하는 것은 자식의 의무요 책임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다만 물질로서 섬기는 것만이 아니라, 영적으로 심적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행복한 삶을 살도록 섬김을 다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5. 부모 공경에서 자녀가 부모에 대해 갖는 사랑을 봄
타락한 인간의 죄성은 하나님의 뜻을 위배하며 삽니다. 부모님이 살아 있을 때는 불효하고 위선으로 섬기고 돌아가시자 효도하겠다고 하는 것이 우리네 인간입니다. 그래서 불효한만큼 위선으로 섬긴만큼 묘자리를 크게 하나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의 불효와 위선을 감추기 위해서입니다. 부모에게 복종하고 공경하려고 하는 것이 도덕이고 선입니다만, 순간 순간적으로(어떤 사람의 경우는 지속적이지만) 불효하는 것에서 죄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 사랑으로 하나님을 공경(숭배)합니다. 이제 그 사랑과 공경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부모님에게 가지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부모를 사랑으로 공경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우리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골 3:20)이므로 부모를 사랑으로 공경하여야 합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에서 '옳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6. 부모를 잘 섬기는 일은 공경의 기본 도리임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는 데는 부모가 자녀를 양육하는데서 보인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잘 가르치기 위하여 헌신적인 희생을 보인 본을 그대로 따릅니다. 그러니까 자녀들도 부모를 공경하는데 있어서는 여건이 허락하는 한에는 부모가 건강하고 평안하게 지내실 수 있도록 잘 잡숩게 하고, 의복을 잘 챙겨주고, 그 마음을 기쁘고 즐겁게 해 드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부모 공경의 기본 도리입니다. 누구든지간에 자신의 형편 속에서 힘써서 부모를 잘 섬겨야 합니다. 때때로 사회에서 부모를 무시하며 심지어는 학대하고 현대판 고려장까지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그런 죄악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는 하늘의 선한 성품으로 살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선한 성품을 부모를 잘 섬기는 일을 하지 않고서 다른 더 좋은 것으로 할 수는 없습니다.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는 일은 일상에서 행할 일입니다. 그렇지 않다가 어떤 특정한 날이나, 가끔 크고 좋은 선물로 대신 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닙니다. 더욱이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야 매년 제사를 후하게 지내니 하는 따위의 어리석음이란…. 오늘날 성도들이 변형된 제사인 추도식을 갖는 그 속마음을 꼬집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꼭 '추도예배'란 말을 고집하는 이유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7. 부모 공경은 약속 있는 첫 계명임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에게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복으로 약속하셨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말한 것은,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금생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을 보호하시고 복있게 하시는가 하면, 내세에서 영생복락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자녀가 누리는 장수의 축복입니다.
지상에서 장수라는 축복이 약속되어 있는 것은, 이 계명이 우리들에게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장수라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인 것에 한해서 약속되어지는 것이다」라고 칼빈은 제5계명의 해설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이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은혜를 하나님의 사람들의 죽음에 의해서, 더욱 풍부하게, 더욱 굳게 증거하고 제시하시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과거 구약 시대의 경륜하에서 보고 있는 믿음의 사람들의 무덤,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무덤은 그분들이 부모를 공경하고 복종하여 부모의 신앙 안에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진실한 믿음을 가짐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생복락하는 증거가 되고 있었습니다.
맺는 말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녀에게 부모를 공경할 것을 권면하고, 부모에게는 자녀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잘 양육할 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가정을 이루고 있는 온 가족은 그리스도를 높이는 가정으로 만드는 일에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더욱더 닮은 자가 되기를 바라서입니다. 부모와 자녀는 각각 그리스도의 지휘에 따라 온몸이 서로 완전히 어울려서 각 지체는 다른 지체를 돕는 그런 관계성 속에서 존재를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나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단지 인륜의 차원에서만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가족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높이는 일에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써 공동의 목표를 위하여 마땅히 힘써 수고하여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일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까 혈통의 관계와 그 정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온 가족이 함께 그리스도의 몸의 한 부분으로 있는 관계의 이해 속에서 부모로서 가지고 있는 마땅한 책임과 의무를 그리스도를 본 받아서 다하는 것이고, 자녀는 부모에 대해 마땅히 가져야 하는 도리를 그리스도를 본 받아서 다하는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가정은 사랑으로 충만합니다. 자녀의 양육과 부모의 공경은 '사랑으로' 행해지기 때문입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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