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상(床)을 베푸셨나이다!
시편23편
시편 23편에서 5절의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1)에서의 "상"에서 말해 주고자 하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여기에서 언급된 "상"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즉 여기서 말하는 상의 용도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식사할 때마다 사용하는 "밥상"의 용도인 상(床)일까요? 아니면 경기에 임하는 운동 선수가 타는 금상(金賞)이니 은상(銀賞)이니 동상(銅像)이니 하는 그런 상(賞)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는 성경에서 국한문 혼용의 성경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한글과 한문 혼용 성경에서는 상을 "床"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 상(床)은 어머니께서 아침밥을 지으시고 여러 가지 반찬을 담고서 방에 있는 식구들이 들으라고 하는 말로서 편하게 "얘야 상 들어간다!"라고 말하는 그 상입니다. 그러면 식구들 중에서 얼른 알아듣고 문을 열어 드리죠. 그러니까 이런 경우에는 "밥상"으로 부르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회갑이나 기쁜 잔칫날에는 "잔칫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가 여기서 말할 때의 "상"의 의미는 "상을 베푸는" 자체에서 그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상"이란 단어에 강조점과 중요한 뜻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상이란 것을 사용하여서 이것을 통하여 ""베풀어 주시는 것"에 강조점과 중요한 뜻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는 앞 뒤 문맥의 연결에서 볼 때 원수의 압제로 인해 궁핍한 삶을 살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로 풍족한 삶을 제공받은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풍족한 은혜를 제공받고 있음을 알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주변의 대적하는 국가와 그 원수들로부터 안전히 생명을 지킴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삶은 그야 말로 푸른 초장으로 인도 받고 있으며 쉴만한 물가에서 안락과 평온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런 까닭은 그들이 "목자이신 여호와"와 함께 하며 그분의 인도를 받는데 따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목자이신 여호와의 곁을 떠나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자기들의 마음과 생각에 좋은 대로 행동할 때는 여지없이 원수의 칼이 휘둘러졌으며 기근으로 생활은 피폐해지고 곤핍을 겪었습니다. 그렇지만 정신을 차리고 목자이신 여호와에게로 돌아와서 그분의 의지하고 인도를 받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안전히 보호하셨습니다. 그리고 풍족한 은혜가 제공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풍족한 은혜를 잘 차려진 밥상이나 또는 잔칫상을 연상케 하는 것을 통해서 알려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상은 원수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가운데에서 귀한 손님에게 대접하듯 기름 발라 주시며 잔이 흘러 넘치게 부어주어서 베풀어집니다. 그들 두 눈으로 보란 듯이 말입니다. 아무리 죽음의 그늘이 드리운 깊은 골짜기를 지난다고 해도 아무런 두려움 없이 가게 하십니다. 목자이신 여호와께서 곁에 함께 계시니 그분의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와 막대기처럼 인도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든든한 마음을 갖게 합니다.
시편 23편은 단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풍족함을 노래하는 것으로 그 의미를 다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시편 23편은 훗날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자신 안에 들어와 함께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베풀어지는 "성찬을 위한 상"에서 상의 진정한 의미가 드러납니다. 주님의 구속의 은혜를 기리며 주님 안에서 한몸의 살과 피를 이룸으로써 갖는 "교제의 상"인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의 몸을 이루고서 사는 이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에게 넉넉함으로 느껴지고 인식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쁨이요 즐거움으로서의 행복함이어야 합니다.
이 상이 어떻게 베풀어졌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의 사역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상을 베푸시고"의 의미는 여기에 담겨져 있는 풍족한 은혜만을 생각하게 된다면 단지 떡을 먹고 잔을 마시고 하는 기분 외에는 느껴지지 않고 이것 외에는 갖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상을 베푸시고"의 참된 의미는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에 의해서 되어졌다는 사실로 우리의 눈과 귀가 가야 하고 가슴이 뛰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속사적 의미로 직접 연결시켜서 봐야 하는 것입니다.
과거 구약 시대에서 온갖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 오셨던 하나님께서는 이제 독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모든 원수들이 똑똑히 보는 가운데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크신 은혜를 베푸시는가를 알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라고 노래함으로써 앞으로 있게 될 메시아 사역을 예언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셨는가를 창세기 3장 15절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과 함께 연계해서 보아야 합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는 모든 사람과 뱀의 후손이 오고 오는 세대에서 내내 철천지 원수지간의 관계에 있습니다만, 마침내 깨끗이 정리가 되고 맙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는 자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에 예언한 "한 아들"을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보게 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뱀의 머리를 부숴 버려 치명적인 상처를 입혀 패망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발꿈치를 상하게 되는 고난을 겪습니다. 이렇게 해서 베풀어진 상입니다.
애굽에서나 가나안에서 하나님께서 숱하게 보여 오셨던 하나님의 구원에 의한 풍족한 상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사역에 의해서 베풀어 주셨는데, 이 상으로 베풀어지는 구원의 은혜는 그분과 함께 날마다 풍족하게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상을 베푸시고"에서의 "상"은 단한번 베풀어지는 단회적인 "상"이라는 데 우리는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NIV 영어 성경은 "You prepare a table before me in the presence of my enemies"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는 "상"을 "a table"이라고 단수형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상이 "원수"의 목전에서 베풀어집니다. 여기서 쓰고 있는 원수는 "enemies"로 복수형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원수들은 단지 베풀어지고 있는 상을 보는 원수의 수가 그만큼 많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원수들이라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거은 "단 하나"의 상으로서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에서 모든 시대의 사람들이 풍족한 은혜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는 죄의 권능이 압제를 하지 못합니다. 죽음이 왕노릇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시는 슬픔이 없으며 곡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다시는 어두움이 세계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세계를 다스리는 것을 봅니다. 생명이 왕노릇합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있으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찬양의 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해와 달과 별이 쓸데없이 빛이 세계를 지배합니다. 이 은혜의 풍족함을 영원히 제공받습니다. 교회는 그 풍족한 은혜를 지금 성도간에 갖는 교제에 의해서 누리고 확인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성에 들어오셔서 보낸 마지막 한 주간에서 목요일에 제자들과 유월절의 마지막 만찬을 베푸시고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셔서 기도하신 후 산에 내려오셔서 체포되어 산헤드린의회 앞과 헤롯과 빌라도 법정을 오가며 재판을 받으신 후 사형 판결을 받고 마침내 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려 6시간의 고난의 해를 받으시고 오후 3시에 운명하셨습니다. 지금 영화로 상영되고 있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는 바로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마지막 기도 후 체포되어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기까지의 12시간 정도를 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직 내가 보지는 못했지만 얼마나 역사적 사실에 충실했는가를 떠나서 성도들이 갖는 감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하시며 아파하셨을까?" "얼마나 참기 힘든 고난을 견디셨으며, 이겨내셨을까?"하는데 의미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화를 본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예수님께서 잔혹하고 처절하게 고난을 당한 것을 보고, 우리가 죄가 저렇게 컸구나!"하는 것이었답니다. 그래서 어떤 짓을 하려고 합니까? "우리 잘못이 크고 우리 죄가 참으로 크구나!" 하면서 그 잘못으로 죄로 느낄 수 있는 고통을 가져보고 느껴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다시피 고난주간 기간 동안에 직접 십자가를 지고 가는 고통을 겪고 채찍도 맞아보고 십자가에 달려 직접 못에 찔려 아픔을 겪어보고 한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처절한 고통의 일그러진 얼굴에서 보는 것은 무엇입니까? 또 우리가 직접 십자가에 달려보고 그 처절한 고통의 일그러진 얼굴을 가져보는 것에서 달라지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다름 아닌 죄 값이요 죄의 형벌입니다. 이 죄 값과 이에 의한 형벌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내가 직접 십자가에 달려보더라도 말입니다.
성도들이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저렇게 참기 힘든 것을 당하셨구나" 하거나 "예수님께서 저러한 과정을 거쳐서 죽음을 당하셨구나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놓여져 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죄인된 우리의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고 저주하시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이 나서서 친히 자신의 몸을 드림으로써 희생하여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으시는 것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다음과 같은 진리의 사실을 알게 해 줍니다. 그것은 우리에게는 다시는 정죄에 이르지 않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죄로 심판을 받을 일이 없게 하신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서 죄의 권능은 무력하기만 합니다. 죄를 이길 힘이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죄를 이기는 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처절함을 보신다고 하면, 그 잔혹한 현장으로 인해서 몸서림을 친다면 분명 그래야 합니다. 이는 가령 요즘 개봉되어서 특히 많은 기독교 신자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the passion of the Christ" 란 영화나 이와 같은 내용의 기독교 영화를 보고서 비로서 그 사실을 몸으로 느끼고 깨닫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또는 저 예루살렘 지역에서 보듯이 고난주간을 정해 놓고 이 기간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중에 겪은 일과 십자가에 달려 겪은 고난의 해를 자신의 몸으로 직접 경험적으로 겪어 본다며 "그 때" 있은 십자가를 지는 현장을 재현(이런 일은 우리네 교회에서도 종종 본다. 가령 '세족식'을 행한다든지 '겟세마네 동산과 같은 기도"를 행한다든지, 이번에 한국교회 부활절 연합예배위원회가 부활절을 앞둔 9일 서울 시내에서 벌인 십자가 대행진 행사에서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행사를 재연을 한 것에서 보듯이(2004.4.9.연합뉴스) '십자가'를 만들어서 져 본다든지.....)해 보며 느끼고 깨닫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해를 받는 길을 가신 것에서 위대한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깨달아 그에 대한 믿음에 있는 것에서여야 합니다. 모세와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 곧 성경에 의해서가 아니면, 그 누구의 말에 의하거나 책에 의하거나 드라마나 영화나 재현에 의하거나 다른 그 무엇에 의해서도 결코 믿음에 이르지를 못합니다(눅 24:44).(*)
1)본 글은 이광호 목사의 싸이트인 "Salt House"의 서신강좌에서 9번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시편 23:5의 의미(2000. 7. 12)를 읽고, 공감을 갖고 이를 텍스트로 하여 쓴 것임을 밝힙니다.
시편23편
시편 23편에서 5절의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1)에서의 "상"에서 말해 주고자 하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여기에서 언급된 "상"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즉 여기서 말하는 상의 용도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식사할 때마다 사용하는 "밥상"의 용도인 상(床)일까요? 아니면 경기에 임하는 운동 선수가 타는 금상(金賞)이니 은상(銀賞)이니 동상(銅像)이니 하는 그런 상(賞)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는 성경에서 국한문 혼용의 성경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한글과 한문 혼용 성경에서는 상을 "床"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 상(床)은 어머니께서 아침밥을 지으시고 여러 가지 반찬을 담고서 방에 있는 식구들이 들으라고 하는 말로서 편하게 "얘야 상 들어간다!"라고 말하는 그 상입니다. 그러면 식구들 중에서 얼른 알아듣고 문을 열어 드리죠. 그러니까 이런 경우에는 "밥상"으로 부르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회갑이나 기쁜 잔칫날에는 "잔칫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가 여기서 말할 때의 "상"의 의미는 "상을 베푸는" 자체에서 그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상"이란 단어에 강조점과 중요한 뜻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상이란 것을 사용하여서 이것을 통하여 ""베풀어 주시는 것"에 강조점과 중요한 뜻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는 앞 뒤 문맥의 연결에서 볼 때 원수의 압제로 인해 궁핍한 삶을 살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로 풍족한 삶을 제공받은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풍족한 은혜를 제공받고 있음을 알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주변의 대적하는 국가와 그 원수들로부터 안전히 생명을 지킴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삶은 그야 말로 푸른 초장으로 인도 받고 있으며 쉴만한 물가에서 안락과 평온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런 까닭은 그들이 "목자이신 여호와"와 함께 하며 그분의 인도를 받는데 따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목자이신 여호와의 곁을 떠나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자기들의 마음과 생각에 좋은 대로 행동할 때는 여지없이 원수의 칼이 휘둘러졌으며 기근으로 생활은 피폐해지고 곤핍을 겪었습니다. 그렇지만 정신을 차리고 목자이신 여호와에게로 돌아와서 그분의 의지하고 인도를 받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안전히 보호하셨습니다. 그리고 풍족한 은혜가 제공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풍족한 은혜를 잘 차려진 밥상이나 또는 잔칫상을 연상케 하는 것을 통해서 알려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상은 원수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가운데에서 귀한 손님에게 대접하듯 기름 발라 주시며 잔이 흘러 넘치게 부어주어서 베풀어집니다. 그들 두 눈으로 보란 듯이 말입니다. 아무리 죽음의 그늘이 드리운 깊은 골짜기를 지난다고 해도 아무런 두려움 없이 가게 하십니다. 목자이신 여호와께서 곁에 함께 계시니 그분의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와 막대기처럼 인도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든든한 마음을 갖게 합니다.
시편 23편은 단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풍족함을 노래하는 것으로 그 의미를 다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시편 23편은 훗날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자신 안에 들어와 함께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베풀어지는 "성찬을 위한 상"에서 상의 진정한 의미가 드러납니다. 주님의 구속의 은혜를 기리며 주님 안에서 한몸의 살과 피를 이룸으로써 갖는 "교제의 상"인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의 몸을 이루고서 사는 이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에게 넉넉함으로 느껴지고 인식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쁨이요 즐거움으로서의 행복함이어야 합니다.
이 상이 어떻게 베풀어졌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의 사역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상을 베푸시고"의 의미는 여기에 담겨져 있는 풍족한 은혜만을 생각하게 된다면 단지 떡을 먹고 잔을 마시고 하는 기분 외에는 느껴지지 않고 이것 외에는 갖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상을 베푸시고"의 참된 의미는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에 의해서 되어졌다는 사실로 우리의 눈과 귀가 가야 하고 가슴이 뛰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속사적 의미로 직접 연결시켜서 봐야 하는 것입니다.
과거 구약 시대에서 온갖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 오셨던 하나님께서는 이제 독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모든 원수들이 똑똑히 보는 가운데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크신 은혜를 베푸시는가를 알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라고 노래함으로써 앞으로 있게 될 메시아 사역을 예언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셨는가를 창세기 3장 15절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과 함께 연계해서 보아야 합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는 모든 사람과 뱀의 후손이 오고 오는 세대에서 내내 철천지 원수지간의 관계에 있습니다만, 마침내 깨끗이 정리가 되고 맙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는 자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에 예언한 "한 아들"을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보게 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뱀의 머리를 부숴 버려 치명적인 상처를 입혀 패망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발꿈치를 상하게 되는 고난을 겪습니다. 이렇게 해서 베풀어진 상입니다.
애굽에서나 가나안에서 하나님께서 숱하게 보여 오셨던 하나님의 구원에 의한 풍족한 상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사역에 의해서 베풀어 주셨는데, 이 상으로 베풀어지는 구원의 은혜는 그분과 함께 날마다 풍족하게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상을 베푸시고"에서의 "상"은 단한번 베풀어지는 단회적인 "상"이라는 데 우리는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NIV 영어 성경은 "You prepare a table before me in the presence of my enemies"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는 "상"을 "a table"이라고 단수형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상이 "원수"의 목전에서 베풀어집니다. 여기서 쓰고 있는 원수는 "enemies"로 복수형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원수들은 단지 베풀어지고 있는 상을 보는 원수의 수가 그만큼 많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원수들이라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거은 "단 하나"의 상으로서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에서 모든 시대의 사람들이 풍족한 은혜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는 죄의 권능이 압제를 하지 못합니다. 죽음이 왕노릇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시는 슬픔이 없으며 곡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다시는 어두움이 세계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세계를 다스리는 것을 봅니다. 생명이 왕노릇합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있으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찬양의 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해와 달과 별이 쓸데없이 빛이 세계를 지배합니다. 이 은혜의 풍족함을 영원히 제공받습니다. 교회는 그 풍족한 은혜를 지금 성도간에 갖는 교제에 의해서 누리고 확인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성에 들어오셔서 보낸 마지막 한 주간에서 목요일에 제자들과 유월절의 마지막 만찬을 베푸시고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셔서 기도하신 후 산에 내려오셔서 체포되어 산헤드린의회 앞과 헤롯과 빌라도 법정을 오가며 재판을 받으신 후 사형 판결을 받고 마침내 금요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려 6시간의 고난의 해를 받으시고 오후 3시에 운명하셨습니다. 지금 영화로 상영되고 있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는 바로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마지막 기도 후 체포되어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기까지의 12시간 정도를 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직 내가 보지는 못했지만 얼마나 역사적 사실에 충실했는가를 떠나서 성도들이 갖는 감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하시며 아파하셨을까?" "얼마나 참기 힘든 고난을 견디셨으며, 이겨내셨을까?"하는데 의미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화를 본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예수님께서 잔혹하고 처절하게 고난을 당한 것을 보고, 우리가 죄가 저렇게 컸구나!"하는 것이었답니다. 그래서 어떤 짓을 하려고 합니까? "우리 잘못이 크고 우리 죄가 참으로 크구나!" 하면서 그 잘못으로 죄로 느낄 수 있는 고통을 가져보고 느껴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다시피 고난주간 기간 동안에 직접 십자가를 지고 가는 고통을 겪고 채찍도 맞아보고 십자가에 달려 직접 못에 찔려 아픔을 겪어보고 한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처절한 고통의 일그러진 얼굴에서 보는 것은 무엇입니까? 또 우리가 직접 십자가에 달려보고 그 처절한 고통의 일그러진 얼굴을 가져보는 것에서 달라지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다름 아닌 죄 값이요 죄의 형벌입니다. 이 죄 값과 이에 의한 형벌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내가 직접 십자가에 달려보더라도 말입니다.
성도들이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저렇게 참기 힘든 것을 당하셨구나" 하거나 "예수님께서 저러한 과정을 거쳐서 죽음을 당하셨구나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놓여져 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죄인된 우리의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고 저주하시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이 나서서 친히 자신의 몸을 드림으로써 희생하여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으시는 것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다음과 같은 진리의 사실을 알게 해 줍니다. 그것은 우리에게는 다시는 정죄에 이르지 않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죄로 심판을 받을 일이 없게 하신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서 죄의 권능은 무력하기만 합니다. 죄를 이길 힘이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죄를 이기는 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처절함을 보신다고 하면, 그 잔혹한 현장으로 인해서 몸서림을 친다면 분명 그래야 합니다. 이는 가령 요즘 개봉되어서 특히 많은 기독교 신자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the passion of the Christ" 란 영화나 이와 같은 내용의 기독교 영화를 보고서 비로서 그 사실을 몸으로 느끼고 깨닫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또는 저 예루살렘 지역에서 보듯이 고난주간을 정해 놓고 이 기간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중에 겪은 일과 십자가에 달려 겪은 고난의 해를 자신의 몸으로 직접 경험적으로 겪어 본다며 "그 때" 있은 십자가를 지는 현장을 재현(이런 일은 우리네 교회에서도 종종 본다. 가령 '세족식'을 행한다든지 '겟세마네 동산과 같은 기도"를 행한다든지, 이번에 한국교회 부활절 연합예배위원회가 부활절을 앞둔 9일 서울 시내에서 벌인 십자가 대행진 행사에서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행사를 재연을 한 것에서 보듯이(2004.4.9.연합뉴스) '십자가'를 만들어서 져 본다든지.....)해 보며 느끼고 깨닫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해를 받는 길을 가신 것에서 위대한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깨달아 그에 대한 믿음에 있는 것에서여야 합니다. 모세와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 곧 성경에 의해서가 아니면, 그 누구의 말에 의하거나 책에 의하거나 드라마나 영화나 재현에 의하거나 다른 그 무엇에 의해서도 결코 믿음에 이르지를 못합니다(눅 24:44).(*)
1)본 글은 이광호 목사의 싸이트인 "Salt House"의 서신강좌에서 9번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시편 23:5의 의미(2000. 7. 12)를 읽고, 공감을 갖고 이를 텍스트로 하여 쓴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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