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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계별학습

예배론(禮拜論) 2강 예배의 바른 자태(姿態)①

작성자이천우|작성시간05.05.23|조회수335 목록 댓글 1
예배론(禮拜論) 2강 예배의 바른 자태(姿態)①
- 예배의 의미와 예배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 -
(역대상 16장 23-36절, 느헤미야 8장 5-6절)


여기서는 '예배의 바른 자태'와 관련해서 『예배의 의미와 예배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각종 신행들을 주신 의도는, '바른 신앙의 표현'을 하도록 하기 위함이며, 또 '은혜의 방편'으로 주셨습니다. 우리가 각 신행들을 사용할 때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방식대로 행하여야 바른 신앙의 표현이 될뿐더러 은혜를 바르게 누릴 수가 있습니다. 각 시대마다 하나님께서 신행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에 대하여 계시하신 바가 있었는데도 그 방식대로 하지 않고 인위적인 방식으로 신행을 행했던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러면 어떻게 신행을 행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순수하게 신행을 행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내신 신행의 의미와 정신을 충분히 담지 않고 행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은헤를 누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바른 신앙이 형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래서 항상 어떤 신행을 행할 때는 그 의미와 정신을 충분히 담아서 행하여야 정상적인 신자입니다.


들어가는 말

이제 예배에 대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는데 먼저 예배에 대하여 바르게 알기 위해서 예배에 대한 의미와 예배자가 어떤 자세를 갖추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된 백성이 가장 먼저 하는 신행이 예배입니다. 교회에 막 발을 들여놓기 시작하면서부터 바로 예배부터 하게 되는데, 그래서 예배는 신자가 고도한 수준에 도달해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되는 그 순간부터 행하게 되고 그것도 평생토록 행하게 됩니다. 이렇게 교회에 첫발을 내디딜 때부터 시작해서 평생을 예배하는 이 예배문제를 우리는 그저 별 생각 없이 평소에 막연하게 생각했던 대로 드린다거나, 혹은 먼저 믿는 신자들이 하는 것을 보고 '아, 예배는 저렇게 하는가 보다'하고 그저 눈치로 보고 따라하는 정도로 해서는 많이 잘못하는 것인줄을 알아야 합니다. 예배를 안 드리면 몰라도 일단 예배를 드린다고 할 때는 예배에 대한 의미를 제대로 잘 알고 그 의미를 잘 담아서 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자가 어떤 것을 갖추어서 예배를 해야 하는지를 잘 배워서 알고 행해야 합니다.


예배에 대한 단어의 뜻

예배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니까 우선 예배라는 단어의 뜻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 의미를 잘 알고 거기에 합당하게 갖춰야 할 것들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예배는 이런 것이다'하고 한마디로 말해 놓은 곳은 성경에 없습니다.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서 각기 달리 사용하였습니다. 그 중에서 구약의 대표적인 어휘 가운데 하나가 바로 『아바드』( )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의 뜻은 '봉사 ', 또는 '섬김'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봉사하는 일련의 행위를 총칭하여 '아바드'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어휘는 『샤하아』( )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굴복하는 것' 또는 '자신을 엎드리는 것'으로써 숭배, 순종, 봉사의 종교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개념은 마음과 몸을 가지고 최대한으로 '존경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약에서는 주로 사용된 용어가 『프로스퀴네오』( )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의 뜻은 존경의 표시로 '절한다', 또는 '굽어 엎드린다', '입맞춘다'라는 뜻으로서 지상의 통치자들에게 신체적으로 굴복, 또는 순종한다는 의미를 지녔습니다. 왕 앞에 나아가 경배(敬拜)하는 행위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신약에서는 이 단어가 약 24회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 『라트레이아』( )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것은 종으로서 자신의 상전만을 섬겨야 함을 나타낼 때 쓰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세 가지 시험을 받으실 때,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4:10)에서 사용한 단어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레이투르기아』( )인데 예전의 의식과 관계를 맺는 말입니다. 특히 성례전 의식이나 그 외 특수한 의식을 집례할 때 활용되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예배의식(행13:20)을 표시하는 구체적인 단어가 되었습니다.


예배의 의미에 대한 성경적인 표현

이처럼 예배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쓰일 때 한마디로 말하지 않고 그때 그때에 따라서 각기 달리 쓰여졌습니다. 각기 그 상황에 따라서 다양하게 쓰여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각기 다양하게 쓰여진 내용들 가운데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대체적으로 '공경하는 마음으로 엎드리거나 절하는 행위'를 나타낸다는 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나라 말로 해석된 '예배'(禮拜)나, '경배'(敬拜)라는 단어는 매우 적합하게 해석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란 한 마디로 말한다면, '예를 갖추어서 공경하는 마음으로 절하는 것'입니다.

예배란 단어의 뜻이 말하는 것과 같이 예배란 한 마디로 말하면 '예를 갖추어서 절(경배)을 하는 것'입니다. 시편 29편 2절에 보면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했고, 역대상 16장 25-29절에 보면 "…여호아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했고, 요한계시록 5장 12절에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했습니다. 이렇게 표현한 내용은 모두가 '예를 갖추어서 공경하는 마음으로 절하는 것'과 일치하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예배란 하나님께 예를 갖추어서 공경하는 마음으로 합당한 경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자가 갖추어야 할 요건(1)

예배란 예를 갖추어서 하나님께 절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절을 하는 대상이신 하나님께 합당하게 절하기 위해서 먼저 그 절을 받으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알고 예배를 해야지 절하는 대상이신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절을 하게 되면 실례를 범할 수도 있고 그릇되게 절을 하여 큰 낭패를 범할 수도 있게 됩니다.

우리가 사람 앞에 절할 때도 친구에게 하는 절과 어른에게 하는 절이 다르고 또 어른이라도 자신의 아버지와 절친한 친구 분에게 하는 절과 매일 지나치는 이웃 분에게 하는 절이 다릅니다. 절하는 대상에 따라서 거기에 합당하게 해야 하고 절하는 대상에 따라 절의 의미나 태도가 달라집니다. 이와 같이 우리 하나님 앞에 절을 한다고 할 때는 하나님께 합당하게 절을 해야 하고 그 하는 절의 의미나 태도를 거기에 부합하게 갖춰서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예배를 받으시는 분에 대해서 제대로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절을 받으시는 분이 흡족히 받으실만하게 예배를 할 수 있습니다. 예배를 받으시는 분의 값과 자격을 제대로 알고 마땅히 드려야 할만큼 드려야 예배가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예배가 되질 않습니다. 그 분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 절을 한다면 절을 하고서도 큰 실례를 범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절을 해야지 하나님을 그저 막연하게 세상에서 가장 높은 어떤 분 정도로 알고서 절을 한다면 그 정도의 의미 가지고는 하나님께 절하는 것으로는 부족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세상에서 제일 좋으신 분, 높으신 분, 훌륭한 분 정도로만 알고 절을 해서는 대단히 부족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아야 합니다. 막연한 지식을 가지고 대해서는 대단한 실례를 범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일찍이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숭배한 사건을 보면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출32:1-10). 금송아지 사건은 구약 성경에서 주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얼마나 큰 실례를 범한 사건인지를 보여줍니다. 애굽에서 온갖 고난을 다 당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 시내산 앞에서 언약식을 맺고 이제 하나님 나라의 법인 율법을 받아 거룩한 하나님 나라로 출범하는 시점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젠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성격을 취하여 전진하여야 할 위치에 서 있어야 할 것인데 전혀 그렇지 못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시내산에서 하나님 나라의 법인 율법을 받고 내려오는 그 시간에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구원해 준 신(神)을 스스로 만들어서 자작품의 신인 금송아지를 자신들을 구원해 준 하나님이라고 하며 섬기고 예배하였던 것입니다. 자신들을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이 바로 금송아지라고 생각하고 그 앞에 예배하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을 자행하였습니다. 이들이 우상을 섬긴다고 하고 우상 앞에 절한다고 하며 한 것이 아니리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면서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닌 금송아지로 만든 우상에게 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이들의 신관이 많은 결핍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그릇된 신관을 지닌 데 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조상 때부터 대대로 약 430년 동안 거하면서 애굽 민족들이 섬기는 금송아지 우상 숭배를 보고 자라서 거기에 철저히 익숙해 있었습니다. 그런 몸으로 비록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로 출애굽하여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언약 관계를 맺었지만, 그래서 이젠 거룩하신 하나님이 자신들의 구원주요 왕으로 모시고 예배하여야 했었지만, 애굽에서 종살이하면서 듣고 보고 배워서 거기에 익숙해 있었던 그릇된 신관을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한 것이 그만 금송아지 숭배를 한 결과를 초래하고야 말았습니다. 이들이 애굽에서 그동안 듣고 배우고 익숙해져 있었던 그릇된 신관을 그대로 가지고, 설사 구원은 되었으나 과거에 가졌던 그릇된 신관을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하였기 때문에 금송아지를 자신들의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성심껏 예배하는 결과에 빠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도 과거에 가졌던 그릇된 신관을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하고 하나님께 예배를 하거나 혹은 하나님을 믿기 전에 가졌던 그릇된 신관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이름만 하나님이라고 바꾸어서 예배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초신자들의 경우나 혹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 신자들이 조심하지 않으면 그릇된 신관을 그대로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면서 그릇되게 절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막연하게 알고 있었던 신(神) 개념이나, 그릇되게 알고 있었던 신관을 그대로 가지고서 이름만 바꾸어 예배하면서 곧 하나님께 예배하였다고 착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 신자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오래도록 신앙생활을 해오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별로 자라가지 않은 가운데서 예배하면 그릇된 예배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초보적인 데에 머물러 있으면서 오래도록 신자로 지내왔기 때문에 많은 부분에 있어서 그릇된 거시 달라붙어서 자신에게 그릇된 신관이 자리잡고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지만 하나님은 능치 못할 일이 없는 분으로 생각하여 인간의 모든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 혹은 만사형통케 하시는 분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데, 하나님을 그 정도의 신으로 생각하고 예배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을 알기를 우리를 지키시는 수호신(守護神) 정도의 지식으로 생각하고 예배해서는 바른 예배가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그릇된 신관을 가지고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 그 예배는 예의를 갖춘 절로서의 의미가 전혀 없게 됩니다.

이를테면 대통령 앞에 나가서 절을 한다면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뚜렷하게 인식하고 거기에 맞는 태도를 취해서 해야 결례(缺禮)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친구 정도로 생각하고 그 정도의 예만 갖추어서 대통령에게 나갔다면 그것은 절을 하고도 큰 실례를 범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웃 어른에게 절을 할 때도 그분의 값에 맞는 절을 해야 예의에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고 어디서 많이 본 분 같이 스쳐가듯이 절을 한다고 하면 안될 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어디서 많이 본 분 같아서 절을 꾸벅하고 나서 돌아보니까 자기의 아버지와 절친한 친구가 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얼른 다시 되돌아가서 막연하게 어디서 많이 본 분으로 알고 절을 했던 것이 큰 잘못인 줄아 사죄를 하고 다시 예를 갖추어서 정중하게 절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만 저의 아버지의 친구 분이신줄 몰라 뵙고 큰 실례를 범하였으니 용서하여 주십시오.'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정중하게 그분의 값에 맞게 절을 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로 알지 못하고 막연히 전능하신 분이라거나 사랑이 풍성하신 분으로 알고 그 정도에 맞게 절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큰 실례를 범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절을 해 놓고도 실례를 범하는 행위를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그 자체만이 대수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하여 잘 알아야 하고 그래서 잘 알고 정신을 담아서 절해야 마땅합니다.


가장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신지식(神知識)

우선 가장 기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야 할 내용은 마태복음 4장 10절에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하신 말씀처럼, 다만 하나님만을 섬겨야 할 대상으로 알고 절을 해야 합니다. 섬겨야 할 것이 많이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이 최고의 신이시니까 내가 섬겨야 되겠다고 하는 정도의 신앙을 가지고 절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며 따라서 내가 섬겨야 할 유일한 대상이라는 생각을 하고 절을 해야 합니다. '내가 일생을 다 드려서 열심히 섬겨도 나의 정성은 끝없이 부족합니다!. 그렇게 섬긴다 해도 당신은 다함이 없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알고 예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그 하나님을 섬기면 그래도 내 복리를 증진할 수도 있고 내 행복이 더 보태어질 수도 잇는 그런 분으로 생각하고 절을 한다면 이미 그 예배는 결례를 행하는 예배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점차적으로 더 풍성하게 신지식을 알아가야 함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점점 더 풍성해져야만 하나님에 대한 바른 예배를 드릴 수가 있게 됩니다. 가장 기본적인 신지식을 통하여 예배를 드리지만 거기에서 맞춘다면 기본적인 신지식마저 잃게되는 것이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기본적으로 일생을 다 드려서 섬겨도 부족한 분이라는 인식이 있다고 하더라도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서 더욱 풍성히 알아가야만 그분께 합당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가령 오늘날에도 구약에서처럼 예배당에만 계시는 하나님으로 안다거나, 우리의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해결사의 신 정도로 안다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 없습니다. 그분의 영광과 거룩하심에 합당한 예배를 드리려면 그분에 대한 품성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에 따라서 그분의 품성을 잘 알면 아는 만큼 그분의 품성에 합당한 예배를 드릴 수가 있으며 삶 자체에까지 영향이 미쳐지게 됩니다.


십자가의 공효(功效)와 성령님을 의지해야 함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풍성하면 풍성한 만큼 나의 존재 가치라는 것은 보잘 것 없고 그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가 송구스럽게 됩니다. 그분에 대하여 알면 알수록 감히 그분의 어전에 나아가기가 두렵고 절한다는 것이 송구스럽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엄위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고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공효(功效)를 철저히 의지해서 나아갈 수 밖에 없으며, 성령님께서 도우시지 않으시면 그것까지도 할 수 없습니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나를 대표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공효에 의지해서, 그리고 성령님의 도우심만을 의지하는 마음의 경계(境界)가 뚜렷해야 합니다. 이러한 정신으로 예배에 임해야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예배라는 자체가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존엄하신 어전에 들어가서 그 앞에서 절하는 것인데 거기에서 어떻게 경솔한 지식을 가지고 임할 수가 있겠습니까? 진정으로 예배다운 예배를 하려면 반드시 마음 가운데 자기 자신의 부족한 것과 또 부자격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그분이 어떤 분이시며, 과연 그런 분이시라면 내가 어떻게 그분 앞에 스스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하는 자기 의식을 명확하게 가져야 합니다.

따라서 첫째로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자의 마음의 경계는 예수님의 피 공로를 의지하여 나아가야 되겠다는 심정으로 있어야 합니다. '나는 예수님의 피 공로를 의지하여서만 온전히 하나님의 어전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하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 앞에는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 우리를 속하신 그 공로의 터 위에서만 나아갈 수 있음을 믿고, 그 믿음으로 자기의 추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 공로를 의지하는 심정이 없이는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예배할 수 없습니다.

둘째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의 마음의 경계는 성령님을 의지하여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생각으로 예배한다면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도저히 맺을 수가 없습니다. 빌립보서 3장 3절을 보면,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봉사한다'는 말은 '예배한다'는 말과 같은 단어를 그렇게 번역한 것입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라트레이아'( )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영어로는 '워쉽'(worship)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따라서 바울 사도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라는 말씀은 오직 성령님을 의지해서만 예배를 드릴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성령님의 도움 없이는 할 수 없는 것이 예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도 없고 설 수 있다고 해도 우리의 힘으로서나 지식으로서는 그 앞에 설 줄도 모릅니다.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의지해서, 성령님의 힘을 의지해서 하나님 앞에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예배에 임하기 전에 우리는 주님의 피 공로를 의지하고, 성령님을 철저히 의지하는 마음으로 있으면서 "하나님 앞에 나를 이끌어 주옵소서! 그 앞에 예배드리기를 원하나이다"하는 소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뚜렷하게 아는 지식을 가지고 예수님의 피와 성령님을 의지해서 "나를 진정으로 인도해서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하옵소서"하는 소원을 가져야 바른 예배를 드릴 수가 있습니다. 단지 주일날이 되면 아무 생각 없이, 그래서 주님의 피 공로와 성령님을 의지하는 것 없이 다 함께 모이는데 참여해서 식순에 따라서 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막연하게 해서는 바른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예배란 하나님의 계시와 은혜에 대한 응답임

예배는 하나님의 계시와 은혜에 대한 응답입니다. 과거에 이스라엘이 70년 동안 바벨론 포로 생활을 했던 탓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공부할 기회를 잃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거의 잊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이 포로 생활에서 귀환하자 에스라 선지자의 지도 아래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학사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저희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
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느니라"(느8:5-6)

이스라엘 앞에 선 학사 에스라가 율법책을 다시 읽고 해석하기 시작함으로써 이스라엘도 다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면서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습니다. 학사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저희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이제 받겠습니다" 하는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에스라는 광대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송축했습니다. 그들은 계시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심을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경배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배의 개념과 본질을 잘 설명하여 주는 구절입니다. 결국, 예배란 하나님의 계시와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배란 먼저 계시되어진 하나님을 예배할 자로 깊이 인식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영혼과 육체까지라도 하나님 앞에 엎드려 절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배 순서에 따라 행하는 내용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 의식은 이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시는 은혜를 베푸는 시간이 있고,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와 은혜에 대해서 응답하는 순서들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어전에 나아감(묵도)

먼저 주악에 맞추어서 묵도하는 시간이 있는데, 이는 엄숙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성삼위 하나님을 향하여 엎드려 경배하는 심정으로 엄숙하게 나아가는 시간인 것입니다. 따라서 예배하기 전에 준비 찬송이나, 통성 기도는 예배하는데 맞지 않는 자세입니다. 엄숙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리겠다는 심정으로 정신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계시(은혜)와 인간의 응답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거나 말씀 선포를 듣는 시간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고 은혜를 베푸는 시간입니다. 반면에 찬송하고 기도하고 신앙고백하고 헌상하는 시간들은 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해 주시고 베푸신 은혜에 대한 응답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엄위로우시고 인자하시고 광대하심을 찬송하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시간입니다.


3. 하나님의 어전에서 물러남(축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축도하는 순서는 이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하나님의 어전에서 물러나는 시간입니다. 물론 묵도함으로 엄숙하게 나아가고 축복 기도를 받음으로 하나님의 어전에서 물러난다는 표현 때문에 공예배 시간만 하나님과 함께 하고 나머지 일상적인 시간들은 하나님과 떨어져서 살아가는 것처럼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다만 축도의 주된 내용은 성삼위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가 회중과 함께 영원히 함께 하시기를 구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매 순간 하나님과 동행하고 교제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 된 도리이지만 공예배 시간에는 더욱 더 '집약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건 한 지체 지체들이 다 함께 하나의 몸을 이루어서 온전하게 절을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 나아간다', 혹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 우리는 응답한다', '하나님의 어전에서 물러난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 뿐입니다.

공예배 시간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자신을 계시해 주시고 필요한 은혜를 베푸시는 순서와 또 하나님의 계시와 은혜에 대해서 백성들이 응답하는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공예배 현장을 '계시(혹은 은혜)와 응답이 만나는 지점'이라고 합니다. 예배는 바로 계시와 응답이 가장 실감나게 이루어지는 현장입니다. 그래서 시편 여러 곳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할 때 무조건 찬양하라고 하지 않고 항상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어떤 은혜를 베푸셨는지를 언급하면서 그러니 찬양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시가 136편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구원의 주이시며, 인도자이시며, 당신의 백성들에게 필요한 기업을 주시는 분이시라고 하면서 그분께 감사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계시와 은혜에 대해서 응답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배는 하나님의 계시와 베푸신 은혜에 대해서 응답하는 것입니다


예배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2)

여기서 예배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 하나를 또 배울 수 있습니다.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자의 자격은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하나님의 백성만이 참예할 수 있습니다. 그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서 무엇을 하였으며, 무엇을 하고 있으며, 그리고 무엇을 할 것인지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서는 자세가 달라질 것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응답의 대열에 나선 자라면 이러한 지식 정도는 갖고 예배에 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러한 일련의 일들을 행하신다는 사실들을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과의 관계 형성이 없는 자로 예배의 대열에 끼여 있으면서도 항상 방관적 자세를 취하는 수밖에 없으며 예배를 보는(구경하는) 존재로 남게 됩니다. 따라서 예배자가 예배의 대상을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예배하는 자세가 달라집니다.


예배란 영혼의 활동으로 최상의 것을 드리는 행위임

예배란 새생명을 받은 영혼의 활동과 기능을 통하여 최상의 것을 드리는 행위입니다.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옴으로 인간은 하나님을 향하여 죽어 있었는데,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영혼의 기능들이 다 제기능이 상실되어져 버렸는데, 이제 거듭난 이후에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나게 되었습니다(롬6:11). 살아나는 순간부터 영혼의 변개(變改)가 일어나서 하나님을 향하여 영혼의 기능들이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영혼의 기능(지. 정. 의)이 발휘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전에는 하나님을 향하여 도저히 반응을 보일 수 없었던 사람이 정상적인 반응을 보일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변개된 영혼의 활동과 기능 때문입니다. 이렇게 변개된 영혼의 활동과 기능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그에게 최상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예배라고 합니다. 변개된 영혼이 활동하여 그 사람의 몸이 가는 곳마다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련의 행위를 총칭하여 에배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중생한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은 권면을 하였습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예배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3)

예배자는 예배를 드리려는 영혼의 활동이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이 찬송하니까 나도 따라서 하고, 기도하니까 나도 같이 하고, 헌상하면 나도 따라서 헌상하고, 성경을 읽으면 듣고, 그렇게 해서는 예배가 안 됩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는 뚜렷한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해야 그 일이 의미가 있듯이 우리가 주일에 예배당에 올 때는 뚜렷한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와야 합니다. '내가 오늘 지체들과 함께 하나의 몸을 이루어서 예배를 드려야겠다!"는 뚜렷한 마음의 활동이 예배드리기 이전부터 서 있어야 합니다. 그것도 없이 예배를 적당히 참여하여 끝내고, 누구를 만나는 것 때문에, 아니면 집사가 되었기에 무슨 의논을 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으로 이미 예배와는 별개의 것에 마음을 쓰고 온다면 바른 예배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종교행위를 하는 정도로 그렇게 다녀서는 되지 않습니다. 예배드린 다음에 무엇을 결정하고 집행하고, 또 집회를 하며 활동을 하는 이런 데다가 정신을 써서는 예배가 안 됩니다.

사실상 주일(主日)이르는 날 자체가 그런 것을 하기 위해 있는 날이 아닙니다. 다만 사람들이 그렇게 교묘하게 그 날을 이용하는 것 뿐입니다. 우리가 다른 날들에도 할 수 있지만, 주일에는 그 날만을 구별해서 꼭 하나 해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것입니다. '유형교회가 함께 예배를 하는 것'은 일정한 날에 모여야만 할 수 잇는데, 이 날을 주일로 약속한 것입니다. 주일에 교회가 같이 모여서 각 개인으로가 아니고 교회로 모여 연합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다같이 함께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당에 갈 때는 '오늘 하나님 앞에 큰 절을 하러 나아간다'는 이런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사실상 어떤 정신으로 예배를 드렸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생활예배'가 나옵니다. 모든 지체들이 같은 사상과 같은 정신과 태도를 취해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송하고 기도를 드리고 말씀을 듣고, '나를 구별해서 전부를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는 정신으로 예배를 드렸다면 예배를 폐한 이후의 지체들의 교제도 올바르게 나올 것이며, 삶의 현장에서의 생활예배도 바르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막연히 예배를 드리는 교회라면 교제도 그만한 위치에 서 버릴 것이며, 생활예배 또한 제대로 서지 않을 것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올바른 정서를 품고 예배를 드리려는 영혼의 활동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드린 그 예배자가 어떻게 삶 가운데 정당한 정서가 나오겠습니까?


영혼이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 움직여야 함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예배하난 사람의 영혼의 의식 상태입니다. 사람이 어떤 대상에게 절을 한다고 할 때에 그 대상을 향해서 절을 하게 됩니다. 옛날에도 그러한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특히 귀양을 간 사람은 궁성이 있는 한양 쪽을 향해서 요배(遙拜)를 요배를 하였습니다. '멀 요'자에 '절 배'자를 써서 멀리서 절한다는 뜻입니다. 이같이 절을 하는 방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 방향을 놓고 절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아무런 형상이 없어서 누구도 보지 못하였고 볼 수도 없다고 하였는데(딤전6:16), 어떻게 방향을 정하고 절을 해야 합니까?

요한복음 4장 24절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예배하는 자가 실제로 어디를 향해서 몸을 굽히고 절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을 좇는 그 영적인 마음으로와 진리를 좇아 예배하려고 하는 참되고 진실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영혼에는 무엇을 느끼는 것이 있고, 무엇을 아는 것이 있고, 무엇을 하고자 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예배하는 데로 모아서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하는 자는 '내가 하나님을 향해서 예배를 하겠습니다" 하는 뚜렷한 영혼의 활동이 중요합니다. 아멘.

*( )의 글은 히브리어와 헬라어인데 본 게시판에서는 나타나 보여지지 않고 있으므로 비어 있게 되었습니다. 이점 양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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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이수영 | 작성시간 05.07.29 원본 게시글에 꼬리말 인사를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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