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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계별학습

신약구속사 6강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심

작성자이천우|작성시간05.05.23|조회수236 목록 댓글 1
*마가복음 1장 12-13절(마 4:1-11, 눅 4:1-13)을 읽으신 후에 본 설명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에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심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로서의 공적 사역을 시작하실 때 앞서 중요한 두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일이고, 또 하나는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것은 자원하는 마음에서 자발적으로 되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가 시험을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응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스스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러 나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 복음서는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로 가셔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마 4:1, 눅 4:2),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시므로 사단(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막 1:12), "예수께서 성령이 충만하여 광야로 가셨는데 거기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눅 4:1-2)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것은 성령에게 이끌리어서 되어졌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의도에 의해서 있은 일입니다. 세례를 받으실 당시에 예수님 위에 충만하게 임하신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여 마귀에게 시험을 받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받으신 시험은 40일을 금식하신 후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40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기간 내내 시험을 받으시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충만하여 요단강을 떠나 성령의 인도로 유대 광야로 가셨고, 거기서 40일 동안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40일을 금식하신 것은 이 기간 동안에 굶주림을 겪으면서 그로 인한 고통을 얼마나 참을 수 있는지 자기 인내를 확인해 보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 고요하게 교통하시면서 수세 후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사역을 준비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마귀는 40일 내내 끊임없이 시험하였습니다. 참을 수 없는 배고픔을 중단하게 하는 데 시험의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을 훼방하는 시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을 받으면서도 40일간의 영적 준비를 끝내셨습니다. 40일간을 금식한 후인지라 예수님은 몹시 굶주리셨습니다. 배고픔의 고통은 몹시 심했으며, 음식을 먹고자 하는 욕망 또한 매우 강렬했습니다. 마귀는 그러한 예수님의 상태를 이용하여 다시 시험하였습니다. 그 내용이 본문에 나오는 세 가지 시험입니다. 첫째,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을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둘째, "만일 네가 나에게 무릎을 끓고 절하면 내가 이 모든 나라들을 네게 주어 권세와 영화를 누리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셋째,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너를 보호해 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귀가 자기를 시험하는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간파하고 있었기에, 단호하게 물리쳤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받으신 시험이 갖는 의미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것은 세례 받으신 직후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그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께서는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아들로서 그를 보낸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자라는 신적 선포를 하셨습니다(막 1:11, 눅 3:22). 그리고 이제 그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적 권위를 가지시고 죄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구속하여 그들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가시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하시게 되는 세상 나라에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는 마귀와의 싸움을 하시는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앞으로 행하시는 모든 공적 사역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시험받으심은 다음 두 가지 사실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에게 이끌리어 둘째 아담의 자격과 새 이스라엘의 대표자의 신분으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은 둘째 아담의 자격으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첫 사람 아담이 받은 시험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을 시험적 상태에 두셨습니다. 이 시험은 일종의 보상과 형벌이 대가와 조건으로 달려 있는 언약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6-17) 하나님이 이와 같은 시험을 주신 의도는 아담과 그의 후손으로 하여금 이 시험을 통하여 선과 악을 구별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즉 순종하는 것을 통하여 선으로 올라감으로 악과는 영원히 상관없는 자리에로 이르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담은 실패했습니다(*그러나 이 아담의 실패를 단지 그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라거나 그의 의지가 약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다는 것으로만 관점을 갖고 몰아가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이 실패는 분명히 그가 하나님께 불순종한 불신앙에 따른 것이기는 합니다만 이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정하신 구속의 계획에 따라 허용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담의 실패를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가지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실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구상 속에서 봐야 합니다.그에 따라서 아담과 그의 후손이 완전한 선에로 올라가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되어질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원하심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족하시게 됩니다). 아담의 이 실패는 마귀의 악한 시험(꾀임)을 받아서 되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께서 둘째 아담이 되어 이 실패를 회복하는 구원자의 사명을 수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때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첫 사람 아담이 받았던 시험에 대응하는 성격을 가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마귀의 시험을 받고 실패한 아담에게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라고 장차 있을 시험의 상태를 예언하셨는데 이 예언을 이루어 가시는 순종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시험에서 승리하심으로 마귀에게 패한 첫사람 아담의 실패를 회복시켜 주셨는데 장차 자신의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로 확정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는 것에서 마귀와 대적하여 승리하심으로 패배를 당한 마귀는 점차 그 세력을 잃고 쫓겨 나가는 반면에 예수님에 의하여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지는 하나님의 나라는 점차 그 모습이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이신 까닭에 둘째 아담의 자격을 능히 취하실 수 있습니다. 이 자격을 취하시기 위하여 성육신 하심으로 세상에로 들어오셨고, 그리고 둘째 아담의 무죄한 인성의 입장에서 아담의 실패를 회복하기 위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첫사람 아담의 죄와 전혀 상관없는 분이시오, 따라서 구원자가 되시기에 합당한 자격을 가지셨습니다(히 4:14-16).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은 구약 교회의 실패를 회복하는 성격을 가지는 것이기도 하다. 출애굽을 한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구약 교회의 자격을 가지고, 광야에서 40년간 시험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에게 시험이 베풀어진 광야라고 하는 장소에 대한 상징적 의미가 여기에 있으며, 또한 40일 이라고 하는 시험 기간에 대한 상징적 의미 또한 동일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광야 이스라엘 백성이 보냈던 40년의 역사를 함축하고 있는 신명기 말씀(신8:3,6:13,18)에 의지하여 마귀와 싸우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자의 자격으로 자기 백성을 대표하셔서 참 이스라엘이 되십니다. 구속 사역의 성취를 위하여 도래하신 예수님은 옛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실패했던 것을 다시금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서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마2:15)라고 했던 호세아의 예언을 들어, 예수님의 시험받으신 사건이 하나의 '성취'라고 해석했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가 타락했다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교회에 연합하는 모든 인류가 구원을 누릴 것입니다. 이는 이제 예수님은 새 이스라엘인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친히 당신의 생명을 그 몸에게 공급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받으신 시험 세 가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에게 이끌려 광야로 나가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 때는 예수님께서 40일 낮과 40일 밤을 금식한 뒤였으므로 몹시 시장하였습니다. 그때 마귀가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시험에서 둘째 아담의 자격과 새 이스라엘의 대표자의 신분으로 역사의 한 경점에서 마귀와 결정적인 대결을 벌이십니다. 그것은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범죄하고 타락하여서 마귀의 지배 속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그의 후손 된 모든 인류에게 죄가 미쳤고 마귀의 지배 속에 놓여있게 되었으며 또한 사망이 왕 노릇하게 되었는데, 이제 예수님께서 둘째 아담의 자격으로 마귀와의 시험에서 이겨 승리함으로 자신 안에서 모든 인류를 회복시키고자 하여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마귀의 시험은 모두 세 번에 걸쳐서 주어졌습니다. 사단의 시험은 세 번에 걸쳐 계속되었지만, 이 모두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방식으로 물리치셨습니다.


1. 첫 번째 시험

첫 번째 시험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시험(유혹)하기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대답하시기를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첫 번째로 삼은 수단과 방편은 '떡'이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시험하기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말하였습니다. 마귀가 이러한 시험을 첫 번째 시험으로 시도한 것은 예수님께서 40일간을 금식하신 후이므로 몹시 주린 상태에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시험하기에 가장 좋은 재료로 삼은 것입니다. 또한 떡(양식)은 모든 인류에게 있어서 생명을 유지하며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될 꼭 있어야만 하는 가장 현실적인 문제이므로 시험하기에 가장 좋은 재료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을 완전히 다른 것으로 뒤바꿔 놓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신 구원 사역을 구속을 통해서 이루어 가셔야 하는데 사람들에게 떡을 제공하여 그들의 배를 불리므로 그들의 임금으로 안주하게 만들음으로써 본래의 사역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고 결국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마귀는 예수님을 시험함에 있어서 단순히 돌들을 떡덩이로 만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마귀는 간교한 자로서 이번의 시험에서도 그 교활한 특성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곧, 시험하는 말을 하기에 앞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하고 들어가는 것처럼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말에는 간교한 계략, 곧 함정이 있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돌들을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자신(마귀)의 말에 순종하여서 그 기적을 시도해 성공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적을 성공시키지 못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교묘한 참으로 간사한 시험입니까? 마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돌들을 떡덩이가 되게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마귀의 말에 순종하여서 행한 것이므로 결국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써 마귀에게 순종한 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는 마귀와의 시험에서 첫째 아담이 그랬던 것처럼 또 미혹 받아 넘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은 구속자로서의 하나님 아버지께 받은 일을 실패케 하는 것이 되며, 그로 인해서 모든 인류는 영원히 마귀의 종이 되어 그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게 되고 말게 됩니다. 마귀는 바로 그것을 노렸습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돌들을 떡덩이가 되게 하는 그 일 조차하지 못한다고 하면 그 자신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님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고 이는 곧 스스로 자신의 하나님 되신 신성을 부인, 부정하게 되고 맙니다. 마귀는 여기까지 노리고 있었습니다.

마귀의 시험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교회를 향하여 계속되어집니다. 마귀는 '시험하는 자'로서 교회를 넘어뜨리려고 애씁니다. 마귀는 할 수만 있으면 택한 자까지라도 미혹시키려 듭니다. 마귀는 때로는 시련(試鍊)을 주는 방법으로 시험하기도 하며, 때로는 부(富)의 제공을 미끼로 하는 방법으로 시험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가장 종교적인 것을 동원하여 시험하기도 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했던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을 시험의 요소로 삼아 하나님의 아들만이 할 수 있는 기적을 통하여 역사하는 마귀의 시험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살후 2:9-10) 사실 마귀는 시험하는 자로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광채를 가리우기 위해서는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마귀가 시험하는 수단과 방법으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없습니다. 마귀의 시험에 있어서 시련(고난)이 혹독한 것이긴 하지만 그보다 더 강력하게 미혹하는 힘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안심시키는 가운데 은밀히 침투하는 것입니다. 곧 가장 육적이고 세상적인 풍요를 동원하여 미혹하는 미끼로 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에서 평안을 찾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고등한 시험을 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기복, 환상, 기적, 은사, 열심들과 같은 가장 종교적인 것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귀의 이 시험에 쉽게 넘어가는 것은 그 시험이 미혹하는 속임으로 오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으로서는 이성이 마비되어 있어 분별력을 갖지 못하고 있으므로 넘어가는 것이며, 또한 감정과 감각의 지배를 받아들이고 있어 자기 욕심에 이끌려 스스로 속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대부분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피상적으로 취급해 버리고 있어 마귀의 시험에 대항하여 싸울만한 힘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곳에는 마귀의 시험이 가장 쉽게 임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이 마귀에게 첫 번째 받으신 시험은 고난, 평안, 종교적인 요소가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항상 마귀의 시험 앞에 있는 자로서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면서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마귀는 성도를 시험하여 넘어뜨리려고 하나, 하나님은 그 시험을 믿음의 시련으로 받아들여 인내하게 하고, 연단하게 합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어떠한 시련 앞에서도 놓치지 않고 바라보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롬 5:2-4). 마귀의 시험은 오히려 성도들로 하여금 소망을 이루는 기회로 주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시험을 하나님께서 성도의 믿음을 연단하기 위하여 허락하신 선한 시련으로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 1:6-7) 성도는 마귀의 시험을 하나님의 시험으로 승화시키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이렇게 하고 계셨습니다. 그럼으로써 마귀의 시험을 하나님 앞에서 칭찬 받는 믿음의 시련으로 승화시키셨다.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을 아주 단호하게 물리치셨습니다."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연약함을 체휼하심으로 능히 죄인들을 구원하실 수 있는 자격자가 되셔야 했으므로 단호히 거부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언약의 머리의 신분으로 시험을 받으시는 중이었고, 여기서 핵심은 '믿음의 순종' 여부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신명기 8장 3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사용하심으로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순종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존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신앙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실제로 의지함으로 그 내용에다가 자신을 친히 적용시키시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 배우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요, 곧 그 말씀의 의미에다 자신을 적용시키는데서 찾아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삽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이스라엘의 광야에서의 삶에서 보고 있습니다. 성도의 생명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하고 사는 한 하나님의 은혜의 베푸심에 의해 보존되어집니다. 이스라엘에게 40년간 베풀어진 만나는 그에 대한 실증적 사건이었습니다. 떡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이 세상에 거하며 사는 동안에 반드시 필요한 수단과 방법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는 것은 거기에 있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의지와 뜻으로서의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떡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자에게 생계 수단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님이 당하신 시험과 같은 참으로 고난, 곤핍 등과 같은 시련에 부딪친다고 할지라도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에게 있어야 할 믿음이고, 또 그 믿음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믿음과 순종으로 마귀의 시험을 이겨 승리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든 믿는 자들의 표본이 되셨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예수님이 이기신 그 승리 안에서 또한 승리를 쟁취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러기에 쟁취해 나가야만 합니다.


2. 두 번째 시험

두 번째 시험입니다. 마귀는 첫 번째 시험에 실패하자 이번에는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지붕 위에 세워 놓고 말하기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 내리라 성경에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라고 하였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대답하시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마귀는 이 두 번째 시험에서 예수님을 성전 지붕 꼭대기에서 뛰어 내릴 것을 명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부추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도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사자가 보호할 것이니까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니 안심하고 어서 뛰어 내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주 교묘히 인용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인용한 하나님의 말씀은 시편 91편 11-12절로서 지금 예수님에게 거기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하나님의 보호를 직접 체험해 보라고 하고 있는 것인데, 그러나 실상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의 본래 의미를 왜곡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시편 91편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시편 91편은 하나님의 백성이 자신이 처한 형편과 처지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를 확신하는 믿음을 지닐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자신의 보호 아래 두시고서 돌보신다는 것인데, 11-12절에 이르러서 하나님께서 사자에게 명하여 위험에 처한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여 해를 입지 않게 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을 전적 신뢰하는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혹시라도 돌부리에라도 채여 다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을 가지고서 눈여겨보시며 돌보아 주시는 사실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은 어떠한 때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에서 구원해 주셔서 자기 백성으로 삼아 주신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주로 모시고 섬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빌 3:12 참조). 시편 91편의 내용이 그렇습니다. 시편 기자는 자기를 사랑으로 대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자기 또한 사랑으로 하나님을 대하며 전적으로 의지하는 태도를 갖겠다는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하나님의 백성의 신앙고백을 예수님을 타락시키는 데에다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면 즉시 사자를 보내어서 구해줄 것으로 말씀하신 것처럼 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시험하는 말을 합니다. "네가 다만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만으로 살겠다고 했느냐? 좋다!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의지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정말 그런지 어디 한번 보자!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고 의지하는 자가 어디를 가든지 사자를 보내 보호해 주시겠다고 하셨으니 그들이 두 손으로 너를 꽉 붙잡아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해 주실 것이 아니냐? 그러니 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서 네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였는데도 너의 생명이 보호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봐라! 더구나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너를 다치지 않게 잘 보호해 줄 것이니 여기서 뛰어 내려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라!"고 말입니다. 마귀는 이렇게 시편 91편 11-12절을 인용하여서 예수님을 시험하였습니다만 왜곡되게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마귀가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도록 시험하는 목적은 어디에 있을까요? 마귀는 이 시험을 통해서 만일 예수님께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렸는데 하나님이 보내신 주의 사자의 보호를 받아 땅에 안전히 내려올 경우 그 광경을 본 많은 백성들이 예수님을 과연 하나님의 아들로 크게 받들어 모실 것이라는 미혹의 마음을 받게 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시험하도록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좇아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수행하는 순종하는 자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의 존재 의의가 발휘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사십니다. 마귀는 그런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되게 적용하도록 시험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마귀의 간교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마귀가 시험하는 의도를 간파하신 예수님은 그 시험을 물리치시기 위하여 신명기 6장 16절의 말씀을 사용하십니다.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마귀는 예수님께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나와 있는 대로 그 말씀을 의지하고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림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는 신앙을 보이는 것이라고 몰아갔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행위가 하나님을 신앙하는 행위가 아니라 실상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악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신명기 6장 16절의 말씀의 배경을 보겠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로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 들어서고 계속 진행하여 르비딤에 이르렀는데 마실 물이 없어 갈증을 심하게 겪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께서 생명을 보존해 주시는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적극적으로 나서서 물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 자기들이 있는 자리에서 "애굽에서 잘 지내는 우리를 왜 이곳까지 끌고 와서 목말라 죽게 하는 것이냐?"하며 모세를 붙들고 원망과 불평하는 말을 했습니다. 모세는 이러한 그들의 행위를 "여호와를 시험하는 행위"라고 하면서 그런 이유로 그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고 불렀습니다(출 17:1-7). 훗날 모세는 그때의 상황을 회상하면서 신명기 6장 16절에서 다시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고 엄히 명하였습니다. 맛사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의 행위가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였던 것은 목말라 하는 자기들에게 당장에 물을 주시면 하나님이 자기들의 신이신 것을 믿겠고, 그렇지 않으면 믿지 못하겠다는 억지 떼를 쓰는 차원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지금 물 문제 건으로 핑계삼아 주로 섬기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겠습니까? 다른 신을 찾아가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의 행태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사실 물 문제에 부딪히기 전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생명의 주이신 사실을 여러 이적에서 경험해 왔습니다.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며, 이미 물이 풍족한 오아시스(출 15:27)로 인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이었기에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여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의도적으로 물이 없는 현실에 두시고서 그들이 참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배워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원망과 불평으로 하나님을 대했습니다. 이러한 일은 하나님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어서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조금도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물 문제로 보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행태는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켜 그 자신들을 멸망시키는 행위입니다(신 6:16). 그런 것을 하나님께서 인내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모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언제까지 인내하시는가 보자!"는 것이니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시험한 사건을 가지고서 이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귀는 예수님을 시험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을 시험하도록 미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사실은 마귀의 시험을 통해서 비로소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될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높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야만 하나님께서 그가 자기의 아들이신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아무 해를 입지 않게 안전하게 보호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진리는 그가 자기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순종으로 성취해 가는데서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그런 것인데도 예수님께서 마귀의 말을 좇아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서 그것을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증명하려는 행위를 갖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셨다고 하면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한 이 두 번째의 시험은 첫 번째의 시험과 함께 오늘날에도 교묘하게 성도들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하게 왜곡시켜서 적용시켜 가게 하는 것인데, 이 때문에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말씀의 진리에서 떠나 엉뚱하게도 배도의 길을 걸어갑니까? 설교의 내용도 말씀을 왜곡되게 증거하고 있고, 성도들의 믿음도 믿음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즉 예배, 기도, 찬송, 헌금, 봉사 이 어느 것 하나라도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는 것이 없는 지경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구속의 원리 속에서 믿음 생활을 하지 않고 자기 육체의 정욕을 위하여 인본 중심으로 말씀을 해석하고 믿음 생활에 적용해 나가기 때문입니다. 이는 참으로 하나님의 인내를 시험하는 불신앙의 행위입니다.


3. 세 번째 시험

세 번째 시험입니다. 두 번째 시험도 실패로 끝나자 마귀는 다시 예수님을 이끌고 아주 높은 산으로 올라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말하기를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라고 대답하여 사단을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마귀는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천사들이 와서 예수님께 시중을 들었습니다.

두 번의 시험이 실패하고 나서도 마귀는 물러가지를 않고 세 번째의 시험에 나섰습니다. 마귀의 시험은 그 수를 더해 갈수록 간교함은 고도의 술수를 발휘합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는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고서는 그 본의를 드러냅니다. 만일 예수님이 자기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그에게 보여준 모든 것을 다 주겠다고 말입니다. 누가는 마귀가 예수님에게 보여준 천하만국과 그 영광은 '순식간'에 되어진 일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눅 4:5). 예수님에게 보여준 그 광경은 순식간에 되어진 일이지만 마귀는 그 순간을 통해서 천하만국을 차지하는 영광이 얼마나 위엄이 있으며 큰 것인지를 깊이 인식시켜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천하만국을 차지하는 데서 누리는 영광이 얼마나 위엄 있고 큰 것인가를 보자 마귀는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다 너에게 주겠다"고 시험하였습니다.

이 번의 시험은 앞에서 이미 있었던 시험에 비해 단순한 것 같지만 그 어느 것보다도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고도의 술책이 있는 시험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으로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가는데 예정된 고난의 길을 걸어가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맡겨진 그리스도의 직무를 충성되게 수행하여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성취했을 때 그에게 아버지로부터 약속 받은 영광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지만 그것은 고난 없이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십자가의 희생 사역을 거쳐야만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대속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아는 마귀는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한순간에 다 보여주고서는 그에게 예정된 고난의 길을 벗어나 고난 없는 영광을 얻으라고 시험하였습니다. 고난 없이도 영광을 누릴 수 있다니! 얼마나 매혹적입니까?

그렇다면 이 세 번째 마귀의 시험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원자의 직무인 그리스도의 사역을 수행하시는 예수님께서 그 구원자의 직무를 이탈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구원자의 직무는 고난을 겪는 일을 그 본질로 합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했듯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구원자는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사역을 담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대신하여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는 멸시를 당하고 우리가 겪을 중병에 걸려 온갖 고통에 시달리며 우리의 온갖 질병을 대신하여 앓고 우리가 당해야 될 고통을 대신 당하여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죄 값을 받을 하나님의 진노와 그 형벌을 대신 당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그가 고난을 당하고 상한 몸으로 죽는 것이 그를 보내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었습니다(사 53:1-11). 이런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는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요 1:29). 실로 예수님은 구원자로서 한 마리의 어린양이 되어 백성들의 죄 값을 대신 담당하시는 고난의 길을 가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속죄제물로 희생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원하신 고난을 감당하시는 것을 통하여 영광에 이를 것이었습니다(사 53:12). 그러므로 그가 죽음에 이르는 고난을 받는 것은 실상은 영광의 길목에 들어서는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이런 까닭에 마귀는 예수님을 그 고난의 길에서 이탈하게 함으로써 창세 전에 가지신 영원한 작정에 따른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고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다 보여주고서는 자기에게 절하여 경배하면 그 모든 것을 다 주어 누리도록 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만이 그 아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을 마치 자기가 줄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한 마귀의 시험을 받자 예수님은 즉시 반격하여 물리쳤습니다.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하였느니라"고 하여서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거기에 순종하는 것으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쳤습니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신명기 6장 13절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인데 거기에 보면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만 그분만을 섬길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가지고 지금 자신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아들인 것을 분명하게 언급합니다. 그럼으로써 마귀의 시험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만 그분만을 섬기는 그분의 아들로 존재하였습니다.

이 번에 마귀가 사용한 시험의 원리도 오늘날 교회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고난 없는 믿음 생활을 원합니다. 예수님을 잘 믿으면 만사형통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그런 자들에게서 고난을 생각인들 해 보는 것이 있겠습니까? 그렇다 보니까 설사 고난을 당하는 현실이 닥치면 감당하려고 하기 보다는 그 고난을 어떻게 해서라도 피하고 벗어나려고 합니다. 그래서 또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온갖 아첨을 다 합니다. 소위 하나님께 헌금하고 기도하고 교회의 이 일 저 일에 열심을 표하면서 자신이 하나님께 행한 것보다 갑절로, 30∼100배의 축복을 기대합니다. 그런 이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로 믿는 그 때부터 고난도 함께 겪어야 한다는 사실은 관심 밖입니다. 마귀는 이런 마음을 잘 알고서 이를 시험으로 이용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견고히 서 있는 성도는 능히 마귀의 간교함을 간파하고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자신을 드려갑니다.


마귀의 시험을 이기는 원리

예수님께서 세 번에 걸친 마귀의 시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긴 데서 오늘날 교회가 마귀의 시험을 이기는 원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의 중심이 견고하게 서 있는 성도만이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어설프게 알고, 이렇게 들어도 옳은 것 같고 저렇게 들어도 옳은 것 같은 상태에 있어서는 마귀의 시험을 이겨 나갈 수가 없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해 있어서 매사를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은 그의 믿음 생활에 뒤따르는 마귀의 시험을 이기는 가장 효과적인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에베소서 6장 10-17절에서 마귀의 어떤 속임수나 올무에도 대항할 수 있도록 자신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능력으로 강한 사람이 될 것을 말하면서 그 무장의 방편으로 진리의 허리 띠, 의의 흉배,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하나님의 말씀인 성령의 검을 거론하고 있는데, 이 모두는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해 있는 믿음의 상태와 관련하여서 사용하고 있는 표현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신 것은 단순히 마귀가 예수님께 말을 하고. 예수님은 이에 대꾸를 하여 물리치고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신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곧 구원의 언약의 성취로 오신 구주이시냐, 아니냐고 하는 하나님의 아들의 자격 시비가 걸린 엄청난 것이며, 그에 따라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여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느냐, 못하느냐고 하는 마귀의 최후, 최대의 도전이며 싸움이었습니다.

성도에게도 마귀의 시험은 늘 주어집니다. 그 시험은 '유혹'으로 옵니다. 제물, 권세, 영광 등에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생의 자랑을 두게 합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인생의 목적을 삼고 사랑하고 살아가게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는 전혀 관심이 없게 합니다.

성도가 마귀의 시험과 더불어 싸워 나갈 때 그 시험은 '불로 연단하는 시험'으로 엄청난 시련을 줍니다. 그래서 그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시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좇을 것이냐 아니면 세상을 좇을 것이냐고 하는 그 어느 하나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환란은 그런 자신을 더욱 괴롭힙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확신에 찬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해 주셨습니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참조 벧전 1:6-9)

오늘날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에게서 심하게 뒤틀려 있어 왜곡되고 있는 때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의 중심을 견고하게 세워 나가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아무리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을 듯 싶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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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이수영 | 작성시간 05.07.29 원본 게시글에 꼬리말 인사를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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