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3장 1-52절을 정독하신 후에 본 설명을 보시기 바랍니다. (병행구절; 막 4:1-34, 눅 8:4-18)
하루는 예수님께서 집에서 나와 바닷가로 내려가셨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로 인해서 몸을 움직이기가 쉽지 않자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아서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지셨습니다. 그리고서는 해변에 둘러선 사람들을 향하여 천국 복음을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비유를 들어서 천국 복음을 자세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기서는 이 내용의 중요성과 함께 모두 10가지의 비유가 사용된 점으로 인해서 여느 때에 비해 많은 분량을 갖고서 다루고자 합니다.
천국 복음을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말씀하신 비유는 모두 10가지에 이릅니다. 마태복음에 8가지 ①씨 뿌리는 비유 ②알곡과 가라지 비유 ③겨자씨 비유 ④누룩 비유 ⑤감추인 보화 비유 ⑥좋은 진주 비유 ⑦그물 비유 ⑧집주인 비유입니다. 이중에서 씨 뿌리는 비유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막 4:1-20, 눅8:4-15). 그리고 겨자씨 비유는 마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막 4:30-34, 겨자씨 비유는 누가복음 13장 18-19절에서도 볼 수 있으나 이것의 기록 시기는 훨씬 후의 일이다). 그리고 마태복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마가복음에는 2가지의 비유가 더 있습니다(막 4:21-25, 26-29). ⑨등불 비유 ⑩스스로 자라나는 씨 비유가 그것입니다. 이중에서 등불 비유는 누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눅 8:16-18).
씨 뿌리는 비유가 있은 후, 제자들이 와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왜 저 사람들에게는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너희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으나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무릇 있는 사람은 더 받아서 넉넉하게 하고, 반면에 없는 자는 그가 가지고 있는 얼마 되지 않은 것까지도 빼앗기게 하려는 것이 내가 비유를 쓰는 이유이다. 사람들은 듣고 보아도 깨닫지 못한다. 그것은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가 뭐라고 예언하였느냐?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지 않았느냐?. 그러나 너희 눈은 보고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 귀는 듣고 있으니 행복하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본 것을 보려고 하였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들은 것을 들으려고 하였으나 듣지 못하였다."
통상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것을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간단하고 단순하며 이런 저런 예나 비유를 들어서 쉽게 말해야 한다고 합니다. 과연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생각에서 천국 복음을 비유를 들어서 가르치신 것일까요? 천국 복음이 사람들이 알기 어렵고 복잡한 것이어서 그것을 자세히 풀어 설명하기 위하여서 비유를 들어 가르치신 것일까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에게는 내가 비유로 말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복음이란 어렵고 쉽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이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가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그 나라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생명을 소유한데 달려 있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 여부에 의해서 알아듣고 못 알아듣는 것이지, 어렵고 복잡하게 말씀하시기 때문에 도무지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거나, 아주 알아듣기 쉽게 말해주기 때문에 잘 깨닫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새롭게 창조된 마음, 곧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중생한 심령을 갖지 못하는 한에는 제아무리 복음을 쉽고 간단하게 가르쳐도 결코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이라면 복음을 직설적으로 말해 주지 않고 아무리 비유를 들어서 복음을 어렵고 신비스럽게 전해도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다. 그래서 너희 눈은 내가 말한 천국을 보고 있는 것이고, 너희 귀는 듣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며, 또한 "그러나 (비유를 듣는) 저희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보지 못하게 하고 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비유를 쓴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주께로 돌아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복음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비유는 복음의 진리를 더욱 감추어 놓습니다. 그러니 더욱 이해할 수 없는 말로 들립니다.
이러한 사실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가 말씀주의가 아닌 이야기주의로 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가령 목사가 설교를 할 때 그 설교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드는 예를 보겠습니다. 예로는 사람이 사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 사건들, 심지어는 고전이나 이솝 우화, 소설, 동화 등도 동원됩니다. 설교를 듣는 회중의 연령의 차이에 의한 생각과 언어적 표현을 고려하여 말을 적절하게 할 수는 있겠으나, 이렇게 설교를 성경에 등장하지도 않은 온갖 예를 들어서 나열해 가면서 그것으로 이해시키려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예란 것이 주로 어떤 사람의 경험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경우 설교가 비록 그가 보인 믿음을 들어서 믿음을 강조한다고 할지라도 인위적인 믿음을 조장하며, 종교영웅주의를 추구하게 만들기 쉽상 입니다. 그런가 하면 성경에 나오는 인물이나 도구 등을 알레고리적으로 풀어서 설교하기도 합니다. 이는 복음의 진리를 전혀 엉뚱하게 왜곡시키는 문제를 야기 시킵니다. 참으로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복음은 그것을 믿고 영접하는 자들을 구원하여 영생에 이르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며 그분의 십자가 사역을 진실하게 의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는 복음은 어느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된 사람이 깨달음에 이르러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알려고 노력하는 배움의 자세의 중요성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을지라도 거기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본의를 알기 위해서는 배우려고 달려드는 적극적인 자세가 요구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이들은 예수님을 3년여 동안이나 모시고 따라다니면서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가르치신 십자가의 구속 사역을 제대로 이해하지를 못하고 있다가 십자가의 사건이 벌어지자 매우 당황하면서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 그래, 십자가의 구속 사역이 있기 전에는 이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이 이제 곧 유대교의 장로들과 대제사장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2)고 하였습니다. 이런 제자들이었고 그러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뿔뿔이 흩어져 자기들의 생업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예수님이 평소에 구속 사역의 현장이 될 십자가 사건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충분히 가르치셨습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그 의미를 온전히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오셔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수행하는 것에 대해서 알고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나은 지식을 가져야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이 십자가에서 어떻게 수행되는 것인지에 대한 몰이해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그분께서 나타나셨을 때마다 거듭 가르침을 받으면서 비로소 깨달음에 이르렀고, 그래서 그들은 성령님의 강림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행 1:3-14). 그리고 그들은 성령님의 증거하게 하심에 따라 담대하게 증거했습니다(행 2:4, 14-40).
이렇게 되기까지 예수님의 말씀은 신비롭고 어렵기만 했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당신의 방법을 고수해 나가셨습니다. 한 계단을 올라 더 높은 또 한 계단을 오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최종적으로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가지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실 구원 계획을 깨달아 거기에 자신을 드려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천국의 비밀을 비유를 써 가시면서 말씀하신 것은 오늘날 청중들의 이해를 도와주시려고 예화를 들어 설명하는 설교자들처럼 그렇게 말씀을 더 쉽게 이해시켜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예수님에게서 표적을 보고 인간적인 기대감을 충족시키려는 저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결코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자물통을 잠가두시는 것이었으나, 반면에 제자들에게는 당신의 말씀을 밝히 드러내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는 비유의 뜻을 설명해 주시면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비유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천국의 특성을 잘 깨달아서 그들이 주로 모시고 섬겨 나가는 예수님께 대한 진실한 순종을 발휘해 나가라는 권면입니다.
비유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천국 이해
1. 천국 복음의 결실을 맺는 자들
예수님께서 천국의 비밀을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사용하신 첫 번째 비유는 '씨 뿌리는 비유'입니다(마 13:1-9, 18-2, 막 4:1-9, 13-20, 눅 8:4-8, 11-15). 한 농부가 그의 밭에 씨를 뿌렸습니다. 뿌린 씨 중의 어떤 것은 길가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쪼아먹어 버렸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씨는 흙이 깊지 돌밭에 떨어졌습니다. 돌밭에 떨어진 씨는 곧 싹이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그 싹은 얼마 가지 않아 곧 말라죽었습니다. 흙이 깊지 않기 때문에 뿌리가 깊이 박히지 않아 뜨거운 태양열을 오래 견디지 못하고 그만 말라죽은 것입니다. 또 어떤 씨는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습니다. 그 속에서 씨는 싹을 내며 자라 올라가려고 했지만 가시나무들이 자라서 그 숨을 막아 버렸기 때문에 제대로 자라지 못하여 결국은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싹을 내고 잘 자라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었습니다.
이 비유에서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본 비유의 뜻을 설명함에 있어서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된 자와 허락되지 않은 자'를 말씀하면서 해 주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비유 사용의 이중적 목적을 가르치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알게 해 주시는 것으로,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전혀 알지 못하도록 감추시는 것으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의 비밀과 관련하여서 제자들의 눈은 봄으로 복이 있고 귀로 들음으로 복이 있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는 바로 이와 관련하여서 말씀되어졌습니다. 그래서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 그래서 결실하지 못한 씨를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서 씨가 결실 맺지 못하는가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와 같은 각각의 다른 상황을 설정하고 설명하고 있으나 한결같은 것입니다. 결실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천국 복음을 들으나 깨닫지 못하는 것은 사단이 와서 씨를 먹어 버림으로, 또는 천국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아들이나 잠시 견디다가 환난이나 핍박이 올 때에는 넘어짐으로써, 또는 천국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함으로써 결실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말씀을 듣고 깨달음으로써 결실합니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여기서 천국 말씀을 들을 때 깨달음에 이르러 결실로까지 나아가는 자인 좋은 땅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입니다. 반면에 앞서의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는 천국 말씀을 듣고도 그리고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보고도 결실하지 못한 마음이 완악한 자들입니다.
그러면 좀 더 이에 대한 설명을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를 들어 천국의 비밀을 가르치신 것은 예수님의 해석에서 잘 나타나 있듯이 그 뜻이 명백합니다. 천국 복음은 누구에게나 똑 같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천국 복음을 받는 자들은 사람들마다 서로 다른 반응을 나타내 보입니다. 어떤 사람은 천국 복음의 기쁜 소식을 듣지만 그 태도는 아주 냉담합니다. "도무지 씨가 안 먹힌다"는 말이 실감이 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전혀 그 인격과 삶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열매를 얻기 위해서 씨를 뿌리셨는데 정작 자신은 마음이 강팍하고 완악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않고 마음밖에 그대로 방치를 합니다. 그러니 좋아할 대상은 사단밖에 없습니다. 사단이 냉큼 와서 먹어버립니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생명을 얻을 길을 완전히 없애 버립니다.
또 어떤 사람은 천국 복음을 들을 때 그 즉시로 반응을 나타냅니다. 아주 좋아하고 기뻐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기쁨이 그야 말로 잠시 잠깐입니다. 오래가지를 못하고 배도의 길을 가며 배교하고 말아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가 천국 복음을 들으면서 반응을 보인 모습을 보면 참으로 의외로 보입니다. 얼마나 좋아하며 큰 기쁨으로 받아들였는데요. 그의 마음을 보면 상당히 종교적이며 믿음이 있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어느 날 하루아침에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어째서 사람이 하루아침에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요? 그 이유를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해 주십니다.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을 받게 되면 곧 넘어지는 자이다"라고 말입니다. 중생하지 못한 자일지라도 천국 복음을 들을 때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세례와 성령의 은사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의 복음을 이해하고 하늘에서 내리신 기쁨을 맛보고 하니 그 누구도 그가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하다는 것을 말하고 장차 올 세계에 대하여 피부로 느끼면서 기다리는 듯 합니다(히 6:2-5).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 그가 진리의 깊은 데로 들어가지 않고 하나님께 등을 돌립니다. 그의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깊이 들어가 뿌리를 내려서 하나님의 말씀인 씨가 가지고 있는 천국 복음의 진리를 좇아 천국 백성의 속성을 가지고서 살게 하려면, 그는 그 때문에 적지 않은 환란과 핍박을 겪게 되는데 그렇게 되기까지는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믿음 생활하는 선을 그어 놓고 그 이상을 요구하여 자기를 괴롭히는 일은 하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자기 부인과 십자가를 지는 삶은 없이 단지 기독교의 각양 좋은 것만 누리고 살겠다는 것이요 만에 하나라도 자기를 건드리는 일을 하면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태도를 갖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신앙 생활하는 그 마음에 이와 같은 단단한 바위가 있습니다.
그런 그이기 때문에 환란을 당하며 핍박을 당하면 그 동안의 믿음은 그야말로 '잠깐'이 되고 맙니다. 잠시 견디어 보는 듯한 모습을 갖지만 그는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사는 것도 좋지만 내 행복을 포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내 넘어집니다. 그에게서는 자기의 행복을 좇겠다는 생각은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참 좋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떻게 예수님을 믿는 일에만 신경을 쓸 수 있느냐? 만일 그렇게 한다고 하면 나는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을 것이요 핍박도 감수해야 한다. 가족과 친지로부터 따돌림을 당할 것이며, 직장 생활인들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 과연 그렇게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있겠느냐? 이 세상과 손을 잡아야 하는 것 아니냐? 그래야 가정도 지킬 수 있고 하나님을 위해서 좋은 일도 할 수 있는데 그런데 그런 것을 다 포기하라고 하니 꼭 그렇게 해야만 예수님을 믿는 것이냐?.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님도 잘 믿고 세상에서도 잘 된 사람으로 있다가 천국가야 할 것 아니냐?" 이렇게 양쪽을 다 취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마 7:24), 그렇게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을 사랑하면 다른 한 쪽은 미워해야 한다고 하니까 자기 행복을 포기하는 환란은 겪지 않겠다고 하여 그동안 말씀을 듣고 기뻐하였으면서도 진리의 순결을 지키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않고 넘어지는 자가 됩니다.
사람마다 각각 하나님께서 그에게 포기하기를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네가 버려야겠다. 이것이 네게는 우상이다. 이것이 네게 구원의 거리낌이 된다" 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때 그것을 포기하고 버리는 과감한 결단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버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되 진실하게 참으로 깊이 깨달음으로 들어가 깊이 있는 신앙으로 살려고 하지 않고, 그 신앙으로 살 것을 요구하면 넘어지고 맙니다. 이런 믿음의 상태로서는 절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라"(행 14:22)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는 자는 그 나라의 속성상 상대적으로 어둠으로 대변되는 세상으로부터 환난과 핍박을 받기 마련인데 이로 인하여 포기되어지는 희생을 겪지 않으려고 하니 그는 주님을 떠나는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이미 그는 마음에서뿐만 아니라 실상 삶에서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는 떠나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그리 큰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 어떤 소유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대신하거나 겸하여 하는 것이 되지를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면서도 환난이나 핍박을 인하여 믿음에서 떠나는 자들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다음의 말씀에서 그 해답을 찾으십시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 가는 것이 아니요"(마 7:21)라고 했으며, "못된 나무에서는 결코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마 7:18). 그러니 믿음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과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 말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그가 중생한 데서 갖게 됩니다. 그러나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은 그가 중생하지 못한 가운데서 가질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천국 복음을 들을 때에 듣기는 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으로 그 마음이 사로잡혀 있어서 항상 그 생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 버립니다. 여기서 '세상의 염려'란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속한 것들로 마음이 점령당하고 거기에 푹 빠져 있어 항상 거기에 맞춰서 생활을 즐기려는 염려로 생각이 집중되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재리의 유혹'은 재물의 유혹이니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로 잘 살 수 있을 것이냐는 것이며, 또한 모아 놓은 재물을 어떻게 하면 잘 관리해서 더 큰 부자가 되어 남부럽지 않게 쓰면서 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에 이끌려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누가는 '일락'이라는 말을 추가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욕심을 갖는 것은 그의 마음이 육체의 정욕적이어서 쾌락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눈과 재물로 인해 일락을 좇아 살고자 합니다. 이것이 온통 자리잡고 있어서 천국 복음이 그 마음 속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서는 천국 복음이 결실을 맺지 못한다. 마가는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함께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는다고 했는데, 이는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 외에도 그밖에 마음으로부터 일어나 갖는 여러 가지 욕심이 있음을 말합니다. 이런 것들로 마음이 차 있는 사람은 그 마음이 이끄는 대로 몸이 움직여 삽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있어서는 이 세상에서 단지 잘 먹고 잘 마시고 잘 입으며 그렇게 즐기며 잘 사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 그들의 마음은 천국 복음이 들어올 자리가 없이 꽉 막혀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인 천국 복음이 그들이 가진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으로 인해 철저히 무시되고 외면을 당하여 결실을 가져오지 못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이런 것은 아닙니다. 천국 복음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환난과 핍박 중에도 천국 복음에 대한 열정은 더욱 커지며 흔들림이 없이 믿음에 견고하게 서고,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가장 존귀한 줄 알아 다른 사람들과 같이 가치 있게 여겼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겨 모두 내 던지고 오직 하나님과 그의 나라만 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착하고 좋은 마음을 발휘하는 사람이 바로 좋은 땅으로 묘사되고 있는 사람입니다. 농부가 씨를 밭에 뿌리는 것은 바로 이 땅입니다. 더러는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떨기에도 떨어지지만 농부가 씨를 뿌리러 나간 곳은 바로 이 좋은 땅입니다. 그것은 열매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떨기에서는 결실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결실은 좋은 땅에서만 얻는 법입니다.
그런데 누가 좋은 땅입니까? 누가 좋은 땅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다시 말해서 누가 천국 복음을 들을 때에 거기서 하나님과 그 나라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가지고 있단 말입니까? 제자에게는 그 복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아닙니다. 비록 무리를 이루고서 예수님이 계신 곳마다 찾아다닌다고 할지라도 그들에게는 하나님과 그 나라를 보고 듣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저희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는 말씀은 그러한 뜻에서 하신 것입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결실을 맺습니다.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결실의 표현인 이러한 묘사는 한 알의 씨가 내는 풍성한 소출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천국 복음을 듣고 그것을 깨달으며, 깨달은 천국 복음을 인내하며 지키는 삶의 그 '과정'을 열매로써 맺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결실은 인내의 강도에 따라 나름대로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에 이르는데 구원의 확신과 그것에 따르는 행복과 기쁨과 천국 백성답게 살아가는 의를 열매의 수확으로 거두어 냅니다. 우리가 천국 복음을 듣고 깨달은 것을 인내하며 살아감으로써 갖게되는 구원의 확신과 그것에 따르는 행복과 기쁨과 천국 백성답게 살아가는 의 그 자체가 열매가 의미하는 첫 번째 본질입니다.
그런가 하면 열매의 두 번째 본질은 다른 사람에게도 천국 복음을 전함으로써 생명으로 충만 시켜 나가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다음의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씨가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기쁨으로 지켜나갈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전함으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현대어 성경)
그렇습니다. 천국 복음의 결실에 이르는 자들이 있습니다. 누구나 천국 복음을 듣는다고 해서 결실을 맺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좋은 땅만이 결실을 맺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마다 천국 복음을 주셨더니 길가, 돌밭, 가시떨기의 땅이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좋은 땅임이 실증되었습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천국 복음을 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좋은 땅으로 묘사되고 있는 사람에게서는 천국 복음을 들을 때 착하고 좋은 마음이 발휘되어서 깨달음에 이르고, 그 말씀을 기쁨 속에서 기쁨으로 인내하며 지켜 나가고, 다른 사람에게도 전함으로써 열매를 맺는 이 열매로 충만하여 있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인 모습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온 땅에 충만 시켜 나가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왕성한 현장입니다.
이제 우리는 '씨 뿌리는 비유'에서 다음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 복음의 비유 중에서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큰 뜻과 능력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작용하고 일하실 때 어떤 태도와 자세를 취해 가야 하는 것인지를 알게 해 주셨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으며, 그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하는 일은 가만히, 저절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깨닫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 하고, 그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하겠다는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착하고 좋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 열매를 맺는데 부적절한 것들이 있으면 제거해 나가는 자기 부정의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떨기에서 말씀되어지고 있는 내용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서서 믿음의 시련으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인내로 결실하는 자를 좋은 땅에 뿌린 씨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으로 받들어 나가면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자신을 드려 가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결국은 그에게 맺어져 가고 있는 열매를 보아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믿음이 있는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귀 있는 자는 들어야 합니다.
2. 천국의 현재와 미래의 모습①
예수님은 두 번째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곡식과 가라지 비유'로도 불려집니다(마 13:24-30, 36-43). 예수님은 이 비유를 사용하여서 천국의 현재적 모습을 잘 가르쳐 주셨습니다. 천국은 농부가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린 것과 같습니다. 이 비유에서 언급되고 있는 곡식은 어떤 종류의 것인가를 현대여 성경에서는 '밀'로 번역을 하였습니다. 여기서는 곡식, 또는 밀로 병행하여 사용하겠습니다.
천국은 마치 어떤 것과 같은가? 하는 것을 이 비유에서는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고 있는 동안에 원수가 와서 밀밭 사이에 가라지를 뿌리고 갔습니다. 밀은 잘 자라갔습니다. 그리고 밀이 자랄 때에 가라지도 함께 자랐습니다. 그것을 본 종들이 주인에게 와서 말하였습니다. "주인님 이 일을 어쩌면 좋습니까? 주인님께서는 밭에 좋은 씨를 뿌렸지 않습니까? 그런데 가라지가 잔뜩 올라왔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주인은 말했습니다. "원수가 와서 그랬구나!." 그러자 종들은 "저희가 가라지를 뽑을까요?"라고 물었습니다. 주인은 "가만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을 염려가 있으니 둘 다 추수 때까지 자라도록 내버려두어라. 추수 때가 되면 내가 일꾼들에게 일러서 가라지를 먼저 뽑아 단으로 묶어서 불에 태워버리고 밀은 거두어 곳간에 들이도록 하겠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비유의 초점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천국 복음을 심었으면 그것만이 풍성히 결실 맺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들어왔기 때문에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능력으로 생명의 결실이 충만해져 갑니다. 그런데 그 결실되어져 가는 안에는 하나님의 자녀만이 자라 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단이 언제 침투하였는지 악한 자녀를 놓고 가 악한 자녀도 같이 자라 가는 것입니다. 가라지는 밀보다 자라는 속도가 더 빠르고 큽니다. 아주 왕성한 성장력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 가라지에 비해서 밀은 상대적으로 성장도 더디고 작아 보입니다. 의인에 비해서 악인이 더 형통해 보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모습입니다.
밀밭에 가라지가 들어와 섞여 있는 것을 하나님은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가 같이 자라는 것을 내버려두십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가라지를 뽑다가 밀 마저 뽑힐 것을 염려해서입니다. 둘째는 추수 때가 되면 가라지와 밀을 각각 거두어들여서 가라지는 불사르고 밀은 곳간에 들일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현재적 모습은 하나님의 자녀와 악한 자녀가 섞여 있으면서 같이 자라가고, 악한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에 비해서 더욱 형통한 모습을 띠지만,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심어주신 자녀들만 입니다. 가라지는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가라지의 운명은 지옥에서 불 가운데 고통받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천국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지금 이 곡식[밀]과 가라지 비유는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존재하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심으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가 하면 악한 영인 마귀가 심어 놓은 악한 자녀도 함께 있으면서 같이 자라고 있습니다. 지금 천국의 실재적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의 생명을 심으신 그 생명이 자라고 있습니다만 또한 악한 자의 자녀들의 생명도 함께 자라고 있습니다. 밀의 씨와 가라지의 씨는 전혀 다른 종자입니다만 그 구별은 각각의 씨가 자라면서 점차 확연히 구별이 되어집니다. 그렇듯이 세상의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이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자녀로 자라고 있거나 또는 악한 자의 자녀로 자라고 있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는 누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악한 자의 자녀인지가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라면서 구별이 되어집니다.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이 임한 실재적 모습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밀이란 곡식으로서의 싹이 나고 결실을 맺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나도 분명하고 뚜렷한 것입니다. 이는 가라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밀과 가라지는 전혀 다른 종류인 것이듯이 하나님의 자녀와 악한 자의 자녀도 그렇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자라면서 구별이 되지 않게 그렇게 엇비슷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비단 이 세상에서의 모습에서만 보는 것은 아닙니다. 가시적인 유형교회와 관련하여서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으로, 그리고 또한 성령의 어떤 일반적인 역사로써 외적으로 부름을 받을 수도 있고, 또 종종 받게 되지만 저희는 저희에게 제공된 은혜를 고의적으로 소홀히 하고 멸시하기 때문에 저희의 불신앙에 마땅한 버림을 받으며, 결코 예수 그리스도에게 참으로 올 수 없습니다. 비록 말입니다. 어떤 자들의 경우는 하나님의 자녀들 속에 섞여 있을지라도(웨스트민스터 대교리 제68문답), 그래서 그들이 비록 교회원의 모습을 띠고 있을지라도 실상 사단이 심은 악한 자녀일 경우는 그들이 아무리 왕성한 활동을 할지라도 교회의 생명은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 그들이기 때문에 교회 속에 있으면서 아무리 교회 생활을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사실 그들은 처음부터 악한 자가 심어 놓은 악한 자의 자녀들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종국은 가라지에 한 데 묶여서 가라지가 불에 태워져버리듯이 지옥에서 영원한 멸망에 처해집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의 미래적인 모습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 밭에 뿌린 씨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생명을 받은 사람은 처음부터 그는 천국의 모습을 현재에 실재적으로 띠고서 왕성히 자라갑니다. 그런 그들의 미래적인 모습은 밀은 곡간에 들어가 저장되듯이 하나님의 자녀들로서만이 하나된 나라를 이루는 천국의 모습을 갖춥니다. 그러나 악한 자의 자녀는 아닙니다. 그들은 곡식과 구분이 되고 그래서 이들로부터 분리가 되어서 먼저 뽑혀져 한데 묶여 불에 던져져 태워져 버리는 것과 같은 멸망의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본 비유에서 핵심의 전부는 아닙니다. 무엇 때문에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밭의 주인은 곡식을 심은 밭에 가라지가 함께 섞여 있는 것을 알면서도 당장에 가라지를 뽑아 버리도록 명령하지 않고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라고 말씀하여 의도적으로 가라지를 곡식과 함께 추수 때까지 두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천국의 능력은 의인의 형통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너희는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부러워하지 말라"(시 73:3)고 하였습니다. 곡식이 가라지와 함께 있는 동안인 이 세상에서는 곡식에 비하여서 가라지가 더욱 왕성한 힘을 발휘하며 더욱 크게 자라가는 모습을 띱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알곡으로 여물어 가는 곡식이 가라지에 비해서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천국의 능력은 추수 때가 되면 곡식은 모아 곳간에 들이듯이 세상 마지막 날에 의인을 천국에 들이는데서 그 진정한 가치를 발휘할 것입니다.
천국의 미래적 모습이 이러한 것이니 현재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은 악인의 형통을 보고 실족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아삽의 시인 시편 73편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악인의 마지막은 졸지에 망할 것이라는 것과 주를 가까이 하는 자는 참으로 복이 있는 자라는 것이 그가 깨달은 진리입니다.
3. 천국의 현재와 미래의 모습②
예수님의 천국 복음의 비유는 계속되어 세 번째인 '겨자씨 비유'에 이릅니다(마 13:31-32, 막 4:30-34). 겨자씨 비유는 천국은 어떤 사람이 자기 밭에 심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는 것입니다. 겨자씨는 모든 씨앗 중에 가장 작습니다. 그러나 밭에 심겨진 겨자씨의 미래적 모습은 전혀 딴 판입니다. 겨자씨는 자란 후에는 공중의 새들이 날아와서 그 가지에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됩니다.
겨자씨의 현재적 모습은 매우 작습니다. 그러나 후에는 아주 큰 거대한 나무가 되어서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이고, 사람들이 그 그늘에서 쉴 곳을 찾게 됩니다. 천국도 그와 같습니다. 천국은 지금 겨자나무가 씨로 있는 것 같은 그런 모습으로 와 있습니다. 이것은 천국 그 자체가 보잘 것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광스런 천국이 도래한 현재적 모습은 아주 조그마한 씨앗과 같은 그런 모습으로 와 있다는 것입니다. 씨앗 중에 가장 작은 것이라서 땅에 뿌리면 볼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미미한 모습으로 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은 아무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천국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라야 합니다. 그러니까 천국은 오직 아는 자들만 알고 있습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된 자만이 알고 있는 것입니다.
겨자씨와 같이 임한 천국은 처음에는 너무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 천국의 실체는 겨자나무와 같습니다. 처음에는 그 자라는 것이 아주 조금씩 조금씩 자라가며 자라가는 속도 또한 느리게 시작됩니다만 최종에 이른 천국의 모습은 심히 창대하고 번창합니다. 이렇게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갑니다. 얼마큼 심히 창대하고 번창하게 자라는가 하면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깃들만큼 자라갑니다.
그래서 그 천국을 소유한 자는 장차 거기서 영원히 안연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천국의 미래적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서 천국은 단지 보는 기쁨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 천국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인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여서 평안한 삶을 살아갈 나라를 이룹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당신의 제자들이 현재와 미래의 천국의 실체를 이해하고 믿음 안에서 견고하게 거해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처음에는 겨자씨 같이 미미한 참으로 볼품없게 시작된 천국의 실체인 자기로 인하여 제자들이 실족하지 않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4. 천국의 현재와 미래의 모습③
예수님께서는 네 번째로 '누룩 비유'를 드셨습니다(마 13:33-35). 이 비유에서도 천국의 현재와 미래의 모습을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그 특징적인 모습은 천국의 확장적인 능력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천국은 어떤 여자가 서 말되는 밀가루 반죽 속에 누룩을 넣었더니 그 누룩이 온 밀가루덩이를 부풀어오르게 한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누룩은 밀가루를 발효시켜 부풀어오르게 하는 '효소'의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밀가루에 넣는 누룩은 그 양이 미미합니다. 밀가루와 누룩의 비율을 1:1로 하는 법은 없습니다. 밀가루의 양에 비해 누룩은 아주 적은 양입니다만 그 적은 양의 누룩이 온 밀가루덩이를 크게 부풀어오르게 합니다. 반죽되는 밀가루에 들어간 누룩은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밀가루가 부풀어오른 것을 보고서 누룩이 들어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천국이 이 세상에 와 있는 모습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밀가루 서 말속에 들어 있는 누룩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의 주인으로서 천국을 가지고 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만 그 세력이 아주 미미해 보입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은 그 수가 아주 적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이 세상에서 놀라울 만큼 확장되어 갑니다.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로 천국의 영역이 넓혀져 가더니 온 땅에 그 영역이 확장되어 갔습니다. 그래서 온 땅에 하나님의 자녀들로 충만하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의 완전수로 충만할 날이 곧 실현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천국 복음의 역사는 이 세상 속에서 능력있게 계속해서 발휘를 하고 있습니다. 누룩이 서 말되는 밀가루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를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만,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은 천국 복음을 통해서 잘 알고 있으며, 이 위대한 하나님의 성업에 자신을 드려 의의 도구로 사용됨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온전히 성취되어 가는 일에 참여하는 기쁨과 영광을 누립니다.
5. 천국의 가치를 아는 자들의 처신
예수님의 비유는 이제 천국의 가치를 아는 자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치는 것으로 넘어갑니다. 모두 다섯 가지의 비유가 여기에 사용됩니다.
1) '하나님의 은혜'와 '자기 부인' : 첫 번째로 드신 비유는 '감추인 보화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서 천국은 밭에 묻혀 있는 보화와 같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런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천국은 너무나도 놀랍고 기뻐서 그 보화를 어떻게 해야할지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려서 그는 다른 사람이 그 보화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다시 밭에 묻어 두고는 즉시 달려가 그 밭을 사기 위해서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 돈을 마련하여 밭의 주인을 찾아가 밭을 팔 것을 흥정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밭을 사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밭에서 보화를 찾아내어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감추인 보화 비유는 천국의 가치의 고귀성을 말해 줍니다. 천국의 가치는 사람들이 소유한 그 어떤 것들보다도 앞섭니다. 그런 값진 천국은 누구도 볼 수 없게 감추어져 있으나 어떤 사람에게는 볼 수 있게 임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사도 요한은 세상을 만드신 분이 세상에 오셨을 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이 자기 땅에 오셨는데도 백성들은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요 1:10-11). 예수님에 앞서 세례 요한이 먼저 천국의 도래를 선포하면서 회개하고 이 기쁜 소식을 믿을 것을 촉구하였지만(막 1:15), 천국을 보는 눈과 듣는 귀를 가진 사람은 예수님의 부르신 열 두 제자에서 알 수 있듯이 몇 몇 뿐이었습니다. 그 후에도 예수님의 곁에 있는 사람은 극히 적은 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주로서 죽음을 당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을 목격한 사람들(고전 15:5-8) 중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제자가 되었으나 멸망에 이르는 사람에 비하면 그야말로 적은 무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천국의 보배로움을 볼 수 있는 은혜를 하나님께로부터 입었습니다. 그러기에 참으로 복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나라를 이 땅에 계시하셨기 때문에 힘있게 진행해 나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은 그 천국을 볼 수 있는 은혜를 입었기에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보이신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볼 때에 천국이 자신에게 있어서 세상에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가치있는 보화인 것을 압니다.
그리고 이 비유는 천국의 가치가 자기가 소유한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고귀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포기해서라도 그 천국을 차지하려고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천국을 보화로 보는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지간에 그 보화를 소유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하기 마련입니다. 만일 천국이 보화로 여겨지지 않으면, 그래서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것보다 가치가 없어 보이면 누가 자기 소유를 팔아서라도 천국을 사려고 하겠습니까? 자기가 소유한 것보다 가치가 더 나갈 때 자기 소유를 팔아서라도 천국을 차지하려고 하는 법입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을 보화로 보는 사람은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천국)를 알게 된 것이 너무나도 존귀해서 이것과 비교하면 다른 것은 모두 무가치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리스도 외에는 다 쓰레기처럼 여기고 모두 내버렸습니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그는 그렇게 한 것입니다(빌 3:7-8). 그가 어느 정도까지 그런 열정을 보였는지 아십니까? 그는 하늘에 있는 더 좋은 것이 영원히 자기의 것이 되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멸시와 조롱을 받았는가 하면, 매도 맞았고, 감옥에도 갇혔으며, 교회가 도움을 준 재산을 다 빼앗기기도 하였고, 생명의 위협을 당하는 등 참으로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 무서운 고난을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다 이겨냈습니다(히 10:32-35).
이것이 바로 자기의 소유를 팔아 보화가 감추인 밭을 사는 행위입니다. 보화가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29-30)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보배로운 천국을 보는 자입니까? 그렇다면 그 천국 앞에서 기뻐하고만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자기 부인을 해 가면서 천국을 소유한 자로 있는 것입니까?
2) '열망(熱望)'과 '자기 부인' :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드신 비유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꾼 비유'입니다. 여기서 '좋은'의 뜻은 '값지다'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값진 진주를 구하는 장사꾼 비유인 것입니다. 이 비유는 '감추인 보화 비유'와 한 짝을 이룹니다. 그러나 내용상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감추인 보화 비유에서는 그 보화가 볼 수 있는 자만(하나님의 은혜) 발견하였지만, 본 비유에서는 좋은 진주를 구하기 위하여 찾아다닌 끝에, 그러니까 천국을 얻기 위해 가진 노력을 하는 열심 끝에 발견되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들어 천국을 가르치실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관련하여서 보면 이것이 갖는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천국이 도래하였지만 감추인 보화에서 설명되었듯이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천국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행적에는 천국의 보배로움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표적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천국의 영원한 생명이 예수님에게서 보여집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가치를 알지 못하여 단지 떡을 먹고 배부른 것에 만족하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이 계신 곳마다 찾아다녔습니다(요 6:22-65).
그러나 예수님에게서 천국의 실체를 발견한 사람은 마치 아주 가치가 큰 좋은 진주를 구하기 위해 찾아다니는 사람모양으로 그것을 얻기 위하여 애씁니다. 그는 그 진주에 완전히 거기에 매료되어 있으며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사 소유합니다. 그는 발견한 이 좋은 진주를 얻기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다 포기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그에게 있어서 자기 인생을 투자할 그런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밭에 감추인 보화로 다가왔습니다. 천국은 그것을 보는 눈을 가진 사람만 볼 수 있습니다. 그 천국은 이제 이 가치 있는 좋은 진주를 구하기 위해 찾아다니는 장사꾼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천국을 소유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먼저 그에게 천국을 간절히 열망하는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중생의 도리로 가르치셨습니다. 거듭난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하나님의 자녀로 택정하신 은혜에 따라 그를 거듭나게 하여서 천국을 열망할 수 있는 마음을 지니게 하셨으며, 그렇게 해서 천국을 부단히 구하며, 그 천국의 실체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보게 되었을 때 그는 큰 기쁨을 가지고서 그 천국 백성이 되고자 합니다. 그래서 그는 그 좋은 진주를 얻기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이 비유에서 보듯이 천국 백성이 되기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세상 그 누구도 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에게서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을 받아 그 천국을 열망하고 그 실체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본 자들만이 할 수 있습니다.
3) 믿음의 의 :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드신 비유는 물고기를 모는 '그물 비유'입니다. 이 비유의 결말이 세상 끝 날에는 의인 중에서 악인을 골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는다는 것에서 알곡과 가라지 비유와 유사한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가 알곡과 가라지 비유와 차이점이 있는 것은 알곡과 가라지 비유가 처음부터 의인과 악인의 구별 속에서 추수 때에 분리될 것을 말씀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의인과 악인이 구별이 되지 않게 한데 어우러져 섞여 있는 것을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구별해 내어 의인에게서 악인을 떼어낼 것을 말씀하는데 있습니다.
이 비유의 내용을 보겠습니다. 천국은 마치 어부가 각종 물고기를 모으기 위해 바다에 친 그물과 같습니다. 그물 안으로 모든 종류의 물고기들이 모여들어서 그물이 가득 차면 어부는 그물을 물가로 끌어올려 놓고 먹을 수 있는 고기만 추려 그릇에 담고 그렇지 않은 고기는 바다에 내다 버립니다. 세상 끝 날에도 이와 같습니다. 천사들이 와서 의인들 사이에 섞여 있는 악인들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서 통곡하며 몸부림 칠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교회를 두시고 사람들을 모으시는 일을 하시지만 그들 모두가 하나님이 용납하시는 것은 아니며, 오직 합당한 자만이 추려져서 하나님의 그릇 속에 담겨지고 남은 자들은 지옥불에 던져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의 현재와 미래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바다는 '세상'이요, 그물은 '교회'로 비유되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물에 걸려든 각종 물고기는 교회에 모인 '신자들'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결말을 볼 때 교회의 신자들이라고 해서 그들 모두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서 한데 어우러져 있기 때문에 의인과 악인이 구별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만 장차 이들 사이를 갈라놓으시는 하나님의 판단은 정확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고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외모로는 구별의 기준을 삼지 않습니다. 외모만 가지고서는 사람이 얼마든지 자신의 모습을 과장하고 가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의 중심을 볼 수 있으면 구별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에는 믿음 생활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며, 그래서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단지 교회를 이용하고 있는 그들의 본심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소년 시절에 목동으로 일할 때 사울 왕의 뒤를 이을 새로운 왕으로 택하셨습니다. 다윗에게는 여러 건장한 형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다윗에게 있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많은 헌금을 하였지만 하나님과 사도를 속이는 거짓된 마음을 보시고 그들을 엄히 징계하셨습니다. 이렇게 교회에 속해 있으면서 다 같이 믿음 생활을 해 나가더라도 악한 자들이 섞여 있습니다. 이들은 비록 교회라고 하는 한 곳에 청함을 받았습니다만 그들 모두가 다 천국 백성으로 택함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마 22:14). 그러기에 이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는데 그 능력은 부인합니다(딤후 3:5). 그야말로 못된 물고기들입니다. 그들은 단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교회를 이용만 하는 합당하지 못한 자들이기 때문에 마지막 날에는 그들을 의인과 구별시키고 의인에게서 분리하여 따로이 지옥불에 던져 넣습니다.
그러므로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마 7:21)라고 하신 말씀을 귀담아 들으십시오.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불의에서 떠나지 않는 자들은 주님께서 결코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정확히 구별하시고 의인으로부터 분리시키십니다. 그 분리는 천국으로부터의 분리로 계속됩니다. 그들의 처소는 지옥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 비유에서 가르치는 핵심은 신자의 '믿음의 의'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서 속임을 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마다 그 행한 대로 갚으십니다. 사람이 행한 행위에 따라 상벌을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부활을 하는데 또 어떤 사람은 영원한 사망에 이르는 부활을 하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교회에서 믿음 생활하는 것은 진실에 의해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서 해야 합니다. 불의에서 떠나야 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는 것을 대단하게 여기면서 정작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뜻에 합당한 믿음을 가지는 의가 아닌 한에는 그는 결코 좋은 물고기가 아닙니다. 못된 물고기로 판단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4) 진리를 수용하는 자세 : 천국의 가치를 아는 자들이 갖는 처신이 어때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네 번째의 비유는 '등불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제자들에게 '진리를 수용하는 자세'를 가질 것을 권면합니다.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거나(됫박으로 덮어둠) 평상 아래(침상 밑)에 두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든지 등불은 등경(등잔대) 위에 둡니다. 그럴 경우 방안에 있는 모든 물건은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등불은 방안에 있는 물건들의 모습을 비추기 위해서 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자신의 존재성을 밝힙니다. 예수님은 자기 안에 감추어져 있던 천국을 드러내어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선택받은 제자들에게서는 천국의 실체를 쉽게 볼 수 없게 하기 위해서 더욱 깊은 비밀 속으로 감추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선명하게 볼 수 있도록 밝혀줍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가르침은 제자들에게 천국을 더 잘 깨달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사용하신 것인 만큼, 듣는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여 거기에 담겨져 있는 의미를 깨달아 이해하는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진리를 수용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의 기록을 보면 이 사실은 더욱 분명합니다. 누가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빛이 보이지 않도록 그릇으로 덮어두거나 침상 아래에 두는 일은 없다고 하면서, 등불을 등잔대 위에 두는 것은 온 방안을 환하게 비추게 하기 위해서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등불을 등잔대 위에 두면 감추어져 드러나지 않을 것이란 아무 것도 없듯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 비밀이란 없다고 하였습니다(눅 8:16-17).
마가와 누가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제자들이 지금 자기들이 무엇을 듣고 있는 것인지 명심하라고 하면서 누구든지 그가 알고 있는 것으로 처신한 데 따라서 가진 사람은 더 받게 될 것이지만, 가지지 못한 사람은 자기가 가졌다고 믿고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4:24-25, 눅 8:18). 이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깨달아 이해하여서 천국 복음의 진리를 수용하는, 그러니까 진리를 순종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취해야 그 믿음이 그를 그가 알고 있는 천국으로 인도할 것이지, 그렇지 않고 어줍잖게 자기의 편견된 지식으로 천국 복음의 진리를 배척한다면 그는 자기가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천국의 비밀을 알게 해 주시는 가르침을 받았지만 배척을 하면서 등불의 빛을 보이지 않도록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아래에 두어 가리우는 일을 해 왔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 빛은 세상 속에 감추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둠의 세력을 이기고(요 1:5) 명확하게 그 모습을 나타내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다한 사람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여 천국을 차지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 된 우리들에게서는 예수님의 말씀 안에 믿음으로 거하는 자세를 일관되게 가져 나가야 합니다. '진리를 수용하는 자세'를 겸손하게 가지는 것은 진리를 순종으로 받들어 나가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5)하나님을 의지하고 열심으로 수고하는 자세 :예수님의 비유는 이제 막바지에 이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가치를 아는 자들이 가질 처신을 다섯 번째 비유인 '스스로 자라나는 씨 비유'를 들어 가르치십니다.
천국은 농부가 그의 밭에 뿌려 놓은 씨와 같습니다. 그 씨는 농부가 자고 깨고 하는 동안에 스스로 자라 싹이 돋고 커 갑니다. 땅이 그 씨를 자라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싹이 돋고 그 다음에는 이삭이 나며 마침내 추수 때가 되면 이삭에 많은 낟알이 맺힙니다. 그러면 농부는 낫을 가지고 나가 풍성하게 잘 익은 곡식을 거두어들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씨앗의 성장 원인은 씨앗 그 자체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밭에 뿌려진 씨는 그 생명이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자라갑니다. 스스로 자라 가는 것입니다. 농부는 추수 때에 밭에 곡식이 충실하게 여문 것을 보고 기쁨으로 단을 거두어들입니다. 이것은 천국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도래한 후에 성장해 나가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의지와 능력에 있기 때문에 그 천국 복음을 위해서 일하는 자는 그 결실의 때를 바라보며 다만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할 것과 열심으로 수고할 것을 가르쳐 줍니다.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심는 일을 하는 사역자들은 자신들이 그 일을 했다고 해서 그 결실을 바로 보지는 못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그가 심은 천국 복음을 자라나게 하여서 결실을 맺게 하실 것이기 때문에 수고의 결실을 즉시 얻지 못할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마치 씨앗을 심은 농부가 추수 때의 결실을 바라보며 날마다 맡은 일을 힘써 수고하듯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열심을 갖고 수고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실로 천국 복음을 결실 맺게 하시는 일은 하나님만이 하십니다. 우리는 다만 그 천국 복음을 사람들에게 심고 물주며 가꾸는 일만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바울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5-7). 그러나 그런 자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기쁨으로 풍성한 곡식의 단을 거두게 될 것이라는 것이 천국 복음을 심는 원리이기 때문입니다(참조. 시 126:5-6, 고후 9:10).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열심으로 수고하는 자세는 사역자들만이 가질 자세는 아닙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요구되는 자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함으로 자신들 안에 도래한 천국의 가치를 아는 자들은 그 나라를 영원한 본향으로 바라보며 그곳에 영원히 거주할 수 있게 되기까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열심으로 맡은 일에 수고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는 그를 하나님은 능력으로 함께 하시면서 천국 백성에 합당한 사람으로 자라게 하십니다. 이렇게 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일생이 걸린 일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방해와 장애도 있을 것입니다. 사단은 호시탐탐 갖은 계략을 써서 미혹과 대적하는 일을 병행하여 믿는 자들을 주에게서 떠나게 합니다. 이로 인해서 자칫하면 믿음에 열심을 갖지 않고 나태한다든지 또는 배도의 길을 가기 쉽습니다. 그러기에 낙심하지 말고 참음으로 기다리면서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믿음 생활에 열심을 가지면 하나님께서 주신 천국을 결실 보게 될 것입니다.
6)천국 복음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을 하여야 함 : 천국 복음의 가치를 아는 자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여러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신 예수님은 이제 말씀을 맺는 결론을 '집주인 비유'로 하십니다. 지금까지의 가르침으로 이제 제자들은 천국의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그렇다고 하면 이제 그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치십니다.
천국에 대한 가르침을 받은 서기관들은 자기 곳간에서 옛 것과 새 것을 꺼내는 집주인과 같습니다. 이 집주인의 비유의 내용은 천국에 대한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이제 깨달음을 가지고 있기에 서기관(율법학자)의 위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의 위치에 서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제자들은 자기가 깨달은 지혜의 곳간에서 그곳에 보관되어 있던 옛 것과 새 것을 끄집어내서 써야 한다는 것이 집주인 비유의 초점입니다.
여기서 옛 것은 옛 교훈, 곧 구약 성경입니다. 그리고 새 것은 새 교훈, 곧 예수님의 교훈입니다. 이 새 교훈의 내용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될 구속과 그 성취에 따라올 것인 천국입니다.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인해서 천국이 도래하고 그의 사역으로 인해서 그 천국이 나타나는 동안에 이 천국에 대해 가르침을 받아 제자 된 지혜 있는 서기관은 그 지혜의 곳간에서 옛 것과 새 것을 다 함께 꺼내와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옛 것으로서의 구약 성경과 새 것으로서의 예수님의 교훈을 적절히 사용하여서 거기에 담겨져 있는 천국 복음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일에 열심을 다하여야 합니다.
옛 것과 새 것을 다 같이 가르쳐야 하는 것은 새 것은 옛 것을 배경 삼아서, 그래서 그 연관 속에서 가르칠 때만이 바르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옛 것은 새 것 안에서 그 의미가 바르게 전달 될 것이며, 또한 새 것은 거기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뜻이 세상 끝 날에서야 비로소 이루어져 충만하게 나타날 것이기 때문에 그 동안에는 암시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데 이것이 옛 것을 통해서 올바르게 해석이 됩니다. 구약 성경과 예수님의 교훈은 한 산으로서 작은 봉우리를 거쳐 큰 봉우리로 올라갈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래서 정상에 오르게 됩니다.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들은 이 사명을 맡고 있습니다.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들의 임무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들은 옛 것과 새 것의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공부하여서 깨달은 뒤에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 천국 복음의 진리를 다 함께 공유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참된 서기관들의 그러한 사역을 통해서만이 천국을 많은 사람들에게 확장시켜 나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가르친 천국 복음을 깨달았느냐? 그렇다면 이제부터 너희는 천국에 대한 깨달음을 가진 지혜 있는 서기관들이다. 그러니 너희가 조상 때부터 알고 온 옛 교훈과 함께 내가 너희에게 가르쳐 준 새 교훈인 지혜의 보따리를 풀어서 사람들을 그 지혜 속으로 들어오게 하라. 너희는 이제부터 그 사명을 수행해 나가는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천국의 가치를 아는 자들의 처신은 바로 이 사명을 수행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그 자신이 세상에 생명을 가지고서 살아있으면서 존재하는 목적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자신을 두고 말하기를 '복음에 빚진 자'라고 한 것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롬 1:14-15). 우리가 무엇 때문에 생명을 가지게 되었는지, 또한 살아 있는지를 말입니다. 천국 복음에 대한 사명의 인식 없이는 사실 천국의 제자된 자로서의 삶의 의욕도 없기 마련입니다. 역설적으로 우리가 참으로 열정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가지고 들어온 천국 복음의 제자된 삶을 사는 것은 우리가 수행하고 마쳐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단지 의욕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생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옛 것과 새 것을 소유하고 있어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꺼내줄 수 있는 집주인으로 있을 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따라서 먼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는 자세를 취해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천국 복음의 비유는 집주인의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끝맺습니다. (*)
하루는 예수님께서 집에서 나와 바닷가로 내려가셨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로 인해서 몸을 움직이기가 쉽지 않자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아서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지셨습니다. 그리고서는 해변에 둘러선 사람들을 향하여 천국 복음을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비유를 들어서 천국 복음을 자세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기서는 이 내용의 중요성과 함께 모두 10가지의 비유가 사용된 점으로 인해서 여느 때에 비해 많은 분량을 갖고서 다루고자 합니다.
천국 복음을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말씀하신 비유는 모두 10가지에 이릅니다. 마태복음에 8가지 ①씨 뿌리는 비유 ②알곡과 가라지 비유 ③겨자씨 비유 ④누룩 비유 ⑤감추인 보화 비유 ⑥좋은 진주 비유 ⑦그물 비유 ⑧집주인 비유입니다. 이중에서 씨 뿌리는 비유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막 4:1-20, 눅8:4-15). 그리고 겨자씨 비유는 마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막 4:30-34, 겨자씨 비유는 누가복음 13장 18-19절에서도 볼 수 있으나 이것의 기록 시기는 훨씬 후의 일이다). 그리고 마태복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마가복음에는 2가지의 비유가 더 있습니다(막 4:21-25, 26-29). ⑨등불 비유 ⑩스스로 자라나는 씨 비유가 그것입니다. 이중에서 등불 비유는 누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눅 8:16-18).
씨 뿌리는 비유가 있은 후, 제자들이 와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왜 저 사람들에게는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너희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으나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무릇 있는 사람은 더 받아서 넉넉하게 하고, 반면에 없는 자는 그가 가지고 있는 얼마 되지 않은 것까지도 빼앗기게 하려는 것이 내가 비유를 쓰는 이유이다. 사람들은 듣고 보아도 깨닫지 못한다. 그것은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가 뭐라고 예언하였느냐?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지 않았느냐?. 그러나 너희 눈은 보고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 귀는 듣고 있으니 행복하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본 것을 보려고 하였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들은 것을 들으려고 하였으나 듣지 못하였다."
통상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것을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간단하고 단순하며 이런 저런 예나 비유를 들어서 쉽게 말해야 한다고 합니다. 과연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생각에서 천국 복음을 비유를 들어서 가르치신 것일까요? 천국 복음이 사람들이 알기 어렵고 복잡한 것이어서 그것을 자세히 풀어 설명하기 위하여서 비유를 들어 가르치신 것일까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에게는 내가 비유로 말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복음이란 어렵고 쉽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이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가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그 나라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생명을 소유한데 달려 있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 여부에 의해서 알아듣고 못 알아듣는 것이지, 어렵고 복잡하게 말씀하시기 때문에 도무지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거나, 아주 알아듣기 쉽게 말해주기 때문에 잘 깨닫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새롭게 창조된 마음, 곧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중생한 심령을 갖지 못하는 한에는 제아무리 복음을 쉽고 간단하게 가르쳐도 결코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이라면 복음을 직설적으로 말해 주지 않고 아무리 비유를 들어서 복음을 어렵고 신비스럽게 전해도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다. 그래서 너희 눈은 내가 말한 천국을 보고 있는 것이고, 너희 귀는 듣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며, 또한 "그러나 (비유를 듣는) 저희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보지 못하게 하고 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비유를 쓴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주께로 돌아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복음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비유는 복음의 진리를 더욱 감추어 놓습니다. 그러니 더욱 이해할 수 없는 말로 들립니다.
이러한 사실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가 말씀주의가 아닌 이야기주의로 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가령 목사가 설교를 할 때 그 설교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드는 예를 보겠습니다. 예로는 사람이 사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 사건들, 심지어는 고전이나 이솝 우화, 소설, 동화 등도 동원됩니다. 설교를 듣는 회중의 연령의 차이에 의한 생각과 언어적 표현을 고려하여 말을 적절하게 할 수는 있겠으나, 이렇게 설교를 성경에 등장하지도 않은 온갖 예를 들어서 나열해 가면서 그것으로 이해시키려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예란 것이 주로 어떤 사람의 경험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경우 설교가 비록 그가 보인 믿음을 들어서 믿음을 강조한다고 할지라도 인위적인 믿음을 조장하며, 종교영웅주의를 추구하게 만들기 쉽상 입니다. 그런가 하면 성경에 나오는 인물이나 도구 등을 알레고리적으로 풀어서 설교하기도 합니다. 이는 복음의 진리를 전혀 엉뚱하게 왜곡시키는 문제를 야기 시킵니다. 참으로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복음은 그것을 믿고 영접하는 자들을 구원하여 영생에 이르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며 그분의 십자가 사역을 진실하게 의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는 복음은 어느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된 사람이 깨달음에 이르러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알려고 노력하는 배움의 자세의 중요성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을지라도 거기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본의를 알기 위해서는 배우려고 달려드는 적극적인 자세가 요구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이들은 예수님을 3년여 동안이나 모시고 따라다니면서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가르치신 십자가의 구속 사역을 제대로 이해하지를 못하고 있다가 십자가의 사건이 벌어지자 매우 당황하면서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 그래, 십자가의 구속 사역이 있기 전에는 이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이 이제 곧 유대교의 장로들과 대제사장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 16:22)고 하였습니다. 이런 제자들이었고 그러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뿔뿔이 흩어져 자기들의 생업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예수님이 평소에 구속 사역의 현장이 될 십자가 사건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충분히 가르치셨습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그 의미를 온전히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오셔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수행하는 것에 대해서 알고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나은 지식을 가져야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이 십자가에서 어떻게 수행되는 것인지에 대한 몰이해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그분께서 나타나셨을 때마다 거듭 가르침을 받으면서 비로소 깨달음에 이르렀고, 그래서 그들은 성령님의 강림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행 1:3-14). 그리고 그들은 성령님의 증거하게 하심에 따라 담대하게 증거했습니다(행 2:4, 14-40).
이렇게 되기까지 예수님의 말씀은 신비롭고 어렵기만 했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당신의 방법을 고수해 나가셨습니다. 한 계단을 올라 더 높은 또 한 계단을 오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최종적으로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가지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실 구원 계획을 깨달아 거기에 자신을 드려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천국의 비밀을 비유를 써 가시면서 말씀하신 것은 오늘날 청중들의 이해를 도와주시려고 예화를 들어 설명하는 설교자들처럼 그렇게 말씀을 더 쉽게 이해시켜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예수님에게서 표적을 보고 인간적인 기대감을 충족시키려는 저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결코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자물통을 잠가두시는 것이었으나, 반면에 제자들에게는 당신의 말씀을 밝히 드러내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는 비유의 뜻을 설명해 주시면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비유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천국의 특성을 잘 깨달아서 그들이 주로 모시고 섬겨 나가는 예수님께 대한 진실한 순종을 발휘해 나가라는 권면입니다.
비유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천국 이해
1. 천국 복음의 결실을 맺는 자들
예수님께서 천국의 비밀을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사용하신 첫 번째 비유는 '씨 뿌리는 비유'입니다(마 13:1-9, 18-2, 막 4:1-9, 13-20, 눅 8:4-8, 11-15). 한 농부가 그의 밭에 씨를 뿌렸습니다. 뿌린 씨 중의 어떤 것은 길가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쪼아먹어 버렸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씨는 흙이 깊지 돌밭에 떨어졌습니다. 돌밭에 떨어진 씨는 곧 싹이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그 싹은 얼마 가지 않아 곧 말라죽었습니다. 흙이 깊지 않기 때문에 뿌리가 깊이 박히지 않아 뜨거운 태양열을 오래 견디지 못하고 그만 말라죽은 것입니다. 또 어떤 씨는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습니다. 그 속에서 씨는 싹을 내며 자라 올라가려고 했지만 가시나무들이 자라서 그 숨을 막아 버렸기 때문에 제대로 자라지 못하여 결국은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싹을 내고 잘 자라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었습니다.
이 비유에서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본 비유의 뜻을 설명함에 있어서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된 자와 허락되지 않은 자'를 말씀하면서 해 주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비유 사용의 이중적 목적을 가르치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알게 해 주시는 것으로,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전혀 알지 못하도록 감추시는 것으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의 비밀과 관련하여서 제자들의 눈은 봄으로 복이 있고 귀로 들음으로 복이 있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는 바로 이와 관련하여서 말씀되어졌습니다. 그래서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 그래서 결실하지 못한 씨를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서 씨가 결실 맺지 못하는가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와 같은 각각의 다른 상황을 설정하고 설명하고 있으나 한결같은 것입니다. 결실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천국 복음을 들으나 깨닫지 못하는 것은 사단이 와서 씨를 먹어 버림으로, 또는 천국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아들이나 잠시 견디다가 환난이나 핍박이 올 때에는 넘어짐으로써, 또는 천국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함으로써 결실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말씀을 듣고 깨달음으로써 결실합니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여기서 천국 말씀을 들을 때 깨달음에 이르러 결실로까지 나아가는 자인 좋은 땅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입니다. 반면에 앞서의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는 천국 말씀을 듣고도 그리고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보고도 결실하지 못한 마음이 완악한 자들입니다.
그러면 좀 더 이에 대한 설명을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를 들어 천국의 비밀을 가르치신 것은 예수님의 해석에서 잘 나타나 있듯이 그 뜻이 명백합니다. 천국 복음은 누구에게나 똑 같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천국 복음을 받는 자들은 사람들마다 서로 다른 반응을 나타내 보입니다. 어떤 사람은 천국 복음의 기쁜 소식을 듣지만 그 태도는 아주 냉담합니다. "도무지 씨가 안 먹힌다"는 말이 실감이 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전혀 그 인격과 삶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열매를 얻기 위해서 씨를 뿌리셨는데 정작 자신은 마음이 강팍하고 완악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않고 마음밖에 그대로 방치를 합니다. 그러니 좋아할 대상은 사단밖에 없습니다. 사단이 냉큼 와서 먹어버립니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생명을 얻을 길을 완전히 없애 버립니다.
또 어떤 사람은 천국 복음을 들을 때 그 즉시로 반응을 나타냅니다. 아주 좋아하고 기뻐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기쁨이 그야 말로 잠시 잠깐입니다. 오래가지를 못하고 배도의 길을 가며 배교하고 말아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가 천국 복음을 들으면서 반응을 보인 모습을 보면 참으로 의외로 보입니다. 얼마나 좋아하며 큰 기쁨으로 받아들였는데요. 그의 마음을 보면 상당히 종교적이며 믿음이 있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어느 날 하루아침에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어째서 사람이 하루아침에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요? 그 이유를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해 주십니다.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을 받게 되면 곧 넘어지는 자이다"라고 말입니다. 중생하지 못한 자일지라도 천국 복음을 들을 때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세례와 성령의 은사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의 복음을 이해하고 하늘에서 내리신 기쁨을 맛보고 하니 그 누구도 그가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하다는 것을 말하고 장차 올 세계에 대하여 피부로 느끼면서 기다리는 듯 합니다(히 6:2-5).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 그가 진리의 깊은 데로 들어가지 않고 하나님께 등을 돌립니다. 그의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깊이 들어가 뿌리를 내려서 하나님의 말씀인 씨가 가지고 있는 천국 복음의 진리를 좇아 천국 백성의 속성을 가지고서 살게 하려면, 그는 그 때문에 적지 않은 환란과 핍박을 겪게 되는데 그렇게 되기까지는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믿음 생활하는 선을 그어 놓고 그 이상을 요구하여 자기를 괴롭히는 일은 하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자기 부인과 십자가를 지는 삶은 없이 단지 기독교의 각양 좋은 것만 누리고 살겠다는 것이요 만에 하나라도 자기를 건드리는 일을 하면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태도를 갖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신앙 생활하는 그 마음에 이와 같은 단단한 바위가 있습니다.
그런 그이기 때문에 환란을 당하며 핍박을 당하면 그 동안의 믿음은 그야말로 '잠깐'이 되고 맙니다. 잠시 견디어 보는 듯한 모습을 갖지만 그는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사는 것도 좋지만 내 행복을 포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내 넘어집니다. 그에게서는 자기의 행복을 좇겠다는 생각은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참 좋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떻게 예수님을 믿는 일에만 신경을 쓸 수 있느냐? 만일 그렇게 한다고 하면 나는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을 것이요 핍박도 감수해야 한다. 가족과 친지로부터 따돌림을 당할 것이며, 직장 생활인들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 과연 그렇게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있겠느냐? 이 세상과 손을 잡아야 하는 것 아니냐? 그래야 가정도 지킬 수 있고 하나님을 위해서 좋은 일도 할 수 있는데 그런데 그런 것을 다 포기하라고 하니 꼭 그렇게 해야만 예수님을 믿는 것이냐?.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님도 잘 믿고 세상에서도 잘 된 사람으로 있다가 천국가야 할 것 아니냐?" 이렇게 양쪽을 다 취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마 7:24), 그렇게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을 사랑하면 다른 한 쪽은 미워해야 한다고 하니까 자기 행복을 포기하는 환란은 겪지 않겠다고 하여 그동안 말씀을 듣고 기뻐하였으면서도 진리의 순결을 지키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않고 넘어지는 자가 됩니다.
사람마다 각각 하나님께서 그에게 포기하기를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네가 버려야겠다. 이것이 네게는 우상이다. 이것이 네게 구원의 거리낌이 된다" 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때 그것을 포기하고 버리는 과감한 결단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버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되 진실하게 참으로 깊이 깨달음으로 들어가 깊이 있는 신앙으로 살려고 하지 않고, 그 신앙으로 살 것을 요구하면 넘어지고 맙니다. 이런 믿음의 상태로서는 절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라"(행 14:22)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는 자는 그 나라의 속성상 상대적으로 어둠으로 대변되는 세상으로부터 환난과 핍박을 받기 마련인데 이로 인하여 포기되어지는 희생을 겪지 않으려고 하니 그는 주님을 떠나는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이미 그는 마음에서뿐만 아니라 실상 삶에서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는 떠나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그리 큰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 어떤 소유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대신하거나 겸하여 하는 것이 되지를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면서도 환난이나 핍박을 인하여 믿음에서 떠나는 자들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다음의 말씀에서 그 해답을 찾으십시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 가는 것이 아니요"(마 7:21)라고 했으며, "못된 나무에서는 결코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마 7:18). 그러니 믿음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과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 말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그가 중생한 데서 갖게 됩니다. 그러나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은 그가 중생하지 못한 가운데서 가질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천국 복음을 들을 때에 듣기는 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으로 그 마음이 사로잡혀 있어서 항상 그 생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 버립니다. 여기서 '세상의 염려'란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속한 것들로 마음이 점령당하고 거기에 푹 빠져 있어 항상 거기에 맞춰서 생활을 즐기려는 염려로 생각이 집중되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재리의 유혹'은 재물의 유혹이니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로 잘 살 수 있을 것이냐는 것이며, 또한 모아 놓은 재물을 어떻게 하면 잘 관리해서 더 큰 부자가 되어 남부럽지 않게 쓰면서 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에 이끌려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누가는 '일락'이라는 말을 추가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욕심을 갖는 것은 그의 마음이 육체의 정욕적이어서 쾌락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눈과 재물로 인해 일락을 좇아 살고자 합니다. 이것이 온통 자리잡고 있어서 천국 복음이 그 마음 속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서는 천국 복음이 결실을 맺지 못한다. 마가는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함께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는다고 했는데, 이는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 외에도 그밖에 마음으로부터 일어나 갖는 여러 가지 욕심이 있음을 말합니다. 이런 것들로 마음이 차 있는 사람은 그 마음이 이끄는 대로 몸이 움직여 삽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있어서는 이 세상에서 단지 잘 먹고 잘 마시고 잘 입으며 그렇게 즐기며 잘 사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 그들의 마음은 천국 복음이 들어올 자리가 없이 꽉 막혀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인 천국 복음이 그들이 가진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으로 인해 철저히 무시되고 외면을 당하여 결실을 가져오지 못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이런 것은 아닙니다. 천국 복음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환난과 핍박 중에도 천국 복음에 대한 열정은 더욱 커지며 흔들림이 없이 믿음에 견고하게 서고,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가장 존귀한 줄 알아 다른 사람들과 같이 가치 있게 여겼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겨 모두 내 던지고 오직 하나님과 그의 나라만 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착하고 좋은 마음을 발휘하는 사람이 바로 좋은 땅으로 묘사되고 있는 사람입니다. 농부가 씨를 밭에 뿌리는 것은 바로 이 땅입니다. 더러는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떨기에도 떨어지지만 농부가 씨를 뿌리러 나간 곳은 바로 이 좋은 땅입니다. 그것은 열매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떨기에서는 결실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결실은 좋은 땅에서만 얻는 법입니다.
그런데 누가 좋은 땅입니까? 누가 좋은 땅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다시 말해서 누가 천국 복음을 들을 때에 거기서 하나님과 그 나라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가지고 있단 말입니까? 제자에게는 그 복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아닙니다. 비록 무리를 이루고서 예수님이 계신 곳마다 찾아다닌다고 할지라도 그들에게는 하나님과 그 나라를 보고 듣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저희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는 말씀은 그러한 뜻에서 하신 것입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결실을 맺습니다.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결실의 표현인 이러한 묘사는 한 알의 씨가 내는 풍성한 소출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천국 복음을 듣고 그것을 깨달으며, 깨달은 천국 복음을 인내하며 지키는 삶의 그 '과정'을 열매로써 맺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결실은 인내의 강도에 따라 나름대로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에 이르는데 구원의 확신과 그것에 따르는 행복과 기쁨과 천국 백성답게 살아가는 의를 열매의 수확으로 거두어 냅니다. 우리가 천국 복음을 듣고 깨달은 것을 인내하며 살아감으로써 갖게되는 구원의 확신과 그것에 따르는 행복과 기쁨과 천국 백성답게 살아가는 의 그 자체가 열매가 의미하는 첫 번째 본질입니다.
그런가 하면 열매의 두 번째 본질은 다른 사람에게도 천국 복음을 전함으로써 생명으로 충만 시켜 나가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다음의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씨가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기쁨으로 지켜나갈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전함으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현대어 성경)
그렇습니다. 천국 복음의 결실에 이르는 자들이 있습니다. 누구나 천국 복음을 듣는다고 해서 결실을 맺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좋은 땅만이 결실을 맺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마다 천국 복음을 주셨더니 길가, 돌밭, 가시떨기의 땅이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좋은 땅임이 실증되었습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천국 복음을 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좋은 땅으로 묘사되고 있는 사람에게서는 천국 복음을 들을 때 착하고 좋은 마음이 발휘되어서 깨달음에 이르고, 그 말씀을 기쁨 속에서 기쁨으로 인내하며 지켜 나가고, 다른 사람에게도 전함으로써 열매를 맺는 이 열매로 충만하여 있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인 모습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온 땅에 충만 시켜 나가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왕성한 현장입니다.
이제 우리는 '씨 뿌리는 비유'에서 다음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 복음의 비유 중에서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큰 뜻과 능력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작용하고 일하실 때 어떤 태도와 자세를 취해 가야 하는 것인지를 알게 해 주셨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으며, 그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하는 일은 가만히, 저절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깨닫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 하고, 그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하겠다는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착하고 좋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 열매를 맺는데 부적절한 것들이 있으면 제거해 나가는 자기 부정의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떨기에서 말씀되어지고 있는 내용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서서 믿음의 시련으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인내로 결실하는 자를 좋은 땅에 뿌린 씨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으로 받들어 나가면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자신을 드려 가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결국은 그에게 맺어져 가고 있는 열매를 보아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믿음이 있는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귀 있는 자는 들어야 합니다.
2. 천국의 현재와 미래의 모습①
예수님은 두 번째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곡식과 가라지 비유'로도 불려집니다(마 13:24-30, 36-43). 예수님은 이 비유를 사용하여서 천국의 현재적 모습을 잘 가르쳐 주셨습니다. 천국은 농부가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린 것과 같습니다. 이 비유에서 언급되고 있는 곡식은 어떤 종류의 것인가를 현대여 성경에서는 '밀'로 번역을 하였습니다. 여기서는 곡식, 또는 밀로 병행하여 사용하겠습니다.
천국은 마치 어떤 것과 같은가? 하는 것을 이 비유에서는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고 있는 동안에 원수가 와서 밀밭 사이에 가라지를 뿌리고 갔습니다. 밀은 잘 자라갔습니다. 그리고 밀이 자랄 때에 가라지도 함께 자랐습니다. 그것을 본 종들이 주인에게 와서 말하였습니다. "주인님 이 일을 어쩌면 좋습니까? 주인님께서는 밭에 좋은 씨를 뿌렸지 않습니까? 그런데 가라지가 잔뜩 올라왔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주인은 말했습니다. "원수가 와서 그랬구나!." 그러자 종들은 "저희가 가라지를 뽑을까요?"라고 물었습니다. 주인은 "가만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을 염려가 있으니 둘 다 추수 때까지 자라도록 내버려두어라. 추수 때가 되면 내가 일꾼들에게 일러서 가라지를 먼저 뽑아 단으로 묶어서 불에 태워버리고 밀은 거두어 곳간에 들이도록 하겠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비유의 초점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천국 복음을 심었으면 그것만이 풍성히 결실 맺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들어왔기 때문에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능력으로 생명의 결실이 충만해져 갑니다. 그런데 그 결실되어져 가는 안에는 하나님의 자녀만이 자라 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단이 언제 침투하였는지 악한 자녀를 놓고 가 악한 자녀도 같이 자라 가는 것입니다. 가라지는 밀보다 자라는 속도가 더 빠르고 큽니다. 아주 왕성한 성장력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 가라지에 비해서 밀은 상대적으로 성장도 더디고 작아 보입니다. 의인에 비해서 악인이 더 형통해 보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모습입니다.
밀밭에 가라지가 들어와 섞여 있는 것을 하나님은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가 같이 자라는 것을 내버려두십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가라지를 뽑다가 밀 마저 뽑힐 것을 염려해서입니다. 둘째는 추수 때가 되면 가라지와 밀을 각각 거두어들여서 가라지는 불사르고 밀은 곳간에 들일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현재적 모습은 하나님의 자녀와 악한 자녀가 섞여 있으면서 같이 자라가고, 악한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에 비해서 더욱 형통한 모습을 띠지만,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심어주신 자녀들만 입니다. 가라지는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가라지의 운명은 지옥에서 불 가운데 고통받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천국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지금 이 곡식[밀]과 가라지 비유는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존재하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심으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가 하면 악한 영인 마귀가 심어 놓은 악한 자녀도 함께 있으면서 같이 자라고 있습니다. 지금 천국의 실재적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의 생명을 심으신 그 생명이 자라고 있습니다만 또한 악한 자의 자녀들의 생명도 함께 자라고 있습니다. 밀의 씨와 가라지의 씨는 전혀 다른 종자입니다만 그 구별은 각각의 씨가 자라면서 점차 확연히 구별이 되어집니다. 그렇듯이 세상의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이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자녀로 자라고 있거나 또는 악한 자의 자녀로 자라고 있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는 누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악한 자의 자녀인지가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라면서 구별이 되어집니다.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이 임한 실재적 모습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밀이란 곡식으로서의 싹이 나고 결실을 맺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나도 분명하고 뚜렷한 것입니다. 이는 가라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밀과 가라지는 전혀 다른 종류인 것이듯이 하나님의 자녀와 악한 자의 자녀도 그렇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자라면서 구별이 되지 않게 그렇게 엇비슷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비단 이 세상에서의 모습에서만 보는 것은 아닙니다. 가시적인 유형교회와 관련하여서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으로, 그리고 또한 성령의 어떤 일반적인 역사로써 외적으로 부름을 받을 수도 있고, 또 종종 받게 되지만 저희는 저희에게 제공된 은혜를 고의적으로 소홀히 하고 멸시하기 때문에 저희의 불신앙에 마땅한 버림을 받으며, 결코 예수 그리스도에게 참으로 올 수 없습니다. 비록 말입니다. 어떤 자들의 경우는 하나님의 자녀들 속에 섞여 있을지라도(웨스트민스터 대교리 제68문답), 그래서 그들이 비록 교회원의 모습을 띠고 있을지라도 실상 사단이 심은 악한 자녀일 경우는 그들이 아무리 왕성한 활동을 할지라도 교회의 생명은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 그들이기 때문에 교회 속에 있으면서 아무리 교회 생활을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사실 그들은 처음부터 악한 자가 심어 놓은 악한 자의 자녀들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종국은 가라지에 한 데 묶여서 가라지가 불에 태워져버리듯이 지옥에서 영원한 멸망에 처해집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의 미래적인 모습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 밭에 뿌린 씨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생명을 받은 사람은 처음부터 그는 천국의 모습을 현재에 실재적으로 띠고서 왕성히 자라갑니다. 그런 그들의 미래적인 모습은 밀은 곡간에 들어가 저장되듯이 하나님의 자녀들로서만이 하나된 나라를 이루는 천국의 모습을 갖춥니다. 그러나 악한 자의 자녀는 아닙니다. 그들은 곡식과 구분이 되고 그래서 이들로부터 분리가 되어서 먼저 뽑혀져 한데 묶여 불에 던져져 태워져 버리는 것과 같은 멸망의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본 비유에서 핵심의 전부는 아닙니다. 무엇 때문에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밭의 주인은 곡식을 심은 밭에 가라지가 함께 섞여 있는 것을 알면서도 당장에 가라지를 뽑아 버리도록 명령하지 않고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라고 말씀하여 의도적으로 가라지를 곡식과 함께 추수 때까지 두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천국의 능력은 의인의 형통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너희는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부러워하지 말라"(시 73:3)고 하였습니다. 곡식이 가라지와 함께 있는 동안인 이 세상에서는 곡식에 비하여서 가라지가 더욱 왕성한 힘을 발휘하며 더욱 크게 자라가는 모습을 띱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알곡으로 여물어 가는 곡식이 가라지에 비해서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천국의 능력은 추수 때가 되면 곡식은 모아 곳간에 들이듯이 세상 마지막 날에 의인을 천국에 들이는데서 그 진정한 가치를 발휘할 것입니다.
천국의 미래적 모습이 이러한 것이니 현재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은 악인의 형통을 보고 실족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아삽의 시인 시편 73편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악인의 마지막은 졸지에 망할 것이라는 것과 주를 가까이 하는 자는 참으로 복이 있는 자라는 것이 그가 깨달은 진리입니다.
3. 천국의 현재와 미래의 모습②
예수님의 천국 복음의 비유는 계속되어 세 번째인 '겨자씨 비유'에 이릅니다(마 13:31-32, 막 4:30-34). 겨자씨 비유는 천국은 어떤 사람이 자기 밭에 심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는 것입니다. 겨자씨는 모든 씨앗 중에 가장 작습니다. 그러나 밭에 심겨진 겨자씨의 미래적 모습은 전혀 딴 판입니다. 겨자씨는 자란 후에는 공중의 새들이 날아와서 그 가지에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됩니다.
겨자씨의 현재적 모습은 매우 작습니다. 그러나 후에는 아주 큰 거대한 나무가 되어서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이고, 사람들이 그 그늘에서 쉴 곳을 찾게 됩니다. 천국도 그와 같습니다. 천국은 지금 겨자나무가 씨로 있는 것 같은 그런 모습으로 와 있습니다. 이것은 천국 그 자체가 보잘 것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광스런 천국이 도래한 현재적 모습은 아주 조그마한 씨앗과 같은 그런 모습으로 와 있다는 것입니다. 씨앗 중에 가장 작은 것이라서 땅에 뿌리면 볼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미미한 모습으로 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은 아무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천국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라야 합니다. 그러니까 천국은 오직 아는 자들만 알고 있습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된 자만이 알고 있는 것입니다.
겨자씨와 같이 임한 천국은 처음에는 너무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 천국의 실체는 겨자나무와 같습니다. 처음에는 그 자라는 것이 아주 조금씩 조금씩 자라가며 자라가는 속도 또한 느리게 시작됩니다만 최종에 이른 천국의 모습은 심히 창대하고 번창합니다. 이렇게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갑니다. 얼마큼 심히 창대하고 번창하게 자라는가 하면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깃들만큼 자라갑니다.
그래서 그 천국을 소유한 자는 장차 거기서 영원히 안연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천국의 미래적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서 천국은 단지 보는 기쁨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 천국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인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여서 평안한 삶을 살아갈 나라를 이룹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당신의 제자들이 현재와 미래의 천국의 실체를 이해하고 믿음 안에서 견고하게 거해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처음에는 겨자씨 같이 미미한 참으로 볼품없게 시작된 천국의 실체인 자기로 인하여 제자들이 실족하지 않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4. 천국의 현재와 미래의 모습③
예수님께서는 네 번째로 '누룩 비유'를 드셨습니다(마 13:33-35). 이 비유에서도 천국의 현재와 미래의 모습을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그 특징적인 모습은 천국의 확장적인 능력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천국은 어떤 여자가 서 말되는 밀가루 반죽 속에 누룩을 넣었더니 그 누룩이 온 밀가루덩이를 부풀어오르게 한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누룩은 밀가루를 발효시켜 부풀어오르게 하는 '효소'의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밀가루에 넣는 누룩은 그 양이 미미합니다. 밀가루와 누룩의 비율을 1:1로 하는 법은 없습니다. 밀가루의 양에 비해 누룩은 아주 적은 양입니다만 그 적은 양의 누룩이 온 밀가루덩이를 크게 부풀어오르게 합니다. 반죽되는 밀가루에 들어간 누룩은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밀가루가 부풀어오른 것을 보고서 누룩이 들어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천국이 이 세상에 와 있는 모습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밀가루 서 말속에 들어 있는 누룩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의 주인으로서 천국을 가지고 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만 그 세력이 아주 미미해 보입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은 그 수가 아주 적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이 세상에서 놀라울 만큼 확장되어 갑니다.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로 천국의 영역이 넓혀져 가더니 온 땅에 그 영역이 확장되어 갔습니다. 그래서 온 땅에 하나님의 자녀들로 충만하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의 완전수로 충만할 날이 곧 실현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천국 복음의 역사는 이 세상 속에서 능력있게 계속해서 발휘를 하고 있습니다. 누룩이 서 말되는 밀가루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를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만,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은 천국 복음을 통해서 잘 알고 있으며, 이 위대한 하나님의 성업에 자신을 드려 의의 도구로 사용됨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온전히 성취되어 가는 일에 참여하는 기쁨과 영광을 누립니다.
5. 천국의 가치를 아는 자들의 처신
예수님의 비유는 이제 천국의 가치를 아는 자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치는 것으로 넘어갑니다. 모두 다섯 가지의 비유가 여기에 사용됩니다.
1) '하나님의 은혜'와 '자기 부인' : 첫 번째로 드신 비유는 '감추인 보화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서 천국은 밭에 묻혀 있는 보화와 같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런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천국은 너무나도 놀랍고 기뻐서 그 보화를 어떻게 해야할지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려서 그는 다른 사람이 그 보화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다시 밭에 묻어 두고는 즉시 달려가 그 밭을 사기 위해서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 돈을 마련하여 밭의 주인을 찾아가 밭을 팔 것을 흥정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밭을 사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밭에서 보화를 찾아내어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감추인 보화 비유는 천국의 가치의 고귀성을 말해 줍니다. 천국의 가치는 사람들이 소유한 그 어떤 것들보다도 앞섭니다. 그런 값진 천국은 누구도 볼 수 없게 감추어져 있으나 어떤 사람에게는 볼 수 있게 임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사도 요한은 세상을 만드신 분이 세상에 오셨을 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이 자기 땅에 오셨는데도 백성들은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요 1:10-11). 예수님에 앞서 세례 요한이 먼저 천국의 도래를 선포하면서 회개하고 이 기쁜 소식을 믿을 것을 촉구하였지만(막 1:15), 천국을 보는 눈과 듣는 귀를 가진 사람은 예수님의 부르신 열 두 제자에서 알 수 있듯이 몇 몇 뿐이었습니다. 그 후에도 예수님의 곁에 있는 사람은 극히 적은 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속주로서 죽음을 당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을 목격한 사람들(고전 15:5-8) 중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제자가 되었으나 멸망에 이르는 사람에 비하면 그야말로 적은 무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천국의 보배로움을 볼 수 있는 은혜를 하나님께로부터 입었습니다. 그러기에 참으로 복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나라를 이 땅에 계시하셨기 때문에 힘있게 진행해 나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은 그 천국을 볼 수 있는 은혜를 입었기에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보이신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볼 때에 천국이 자신에게 있어서 세상에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가치있는 보화인 것을 압니다.
그리고 이 비유는 천국의 가치가 자기가 소유한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고귀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포기해서라도 그 천국을 차지하려고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천국을 보화로 보는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지간에 그 보화를 소유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하기 마련입니다. 만일 천국이 보화로 여겨지지 않으면, 그래서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것보다 가치가 없어 보이면 누가 자기 소유를 팔아서라도 천국을 사려고 하겠습니까? 자기가 소유한 것보다 가치가 더 나갈 때 자기 소유를 팔아서라도 천국을 차지하려고 하는 법입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을 보화로 보는 사람은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천국)를 알게 된 것이 너무나도 존귀해서 이것과 비교하면 다른 것은 모두 무가치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리스도 외에는 다 쓰레기처럼 여기고 모두 내버렸습니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그는 그렇게 한 것입니다(빌 3:7-8). 그가 어느 정도까지 그런 열정을 보였는지 아십니까? 그는 하늘에 있는 더 좋은 것이 영원히 자기의 것이 되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멸시와 조롱을 받았는가 하면, 매도 맞았고, 감옥에도 갇혔으며, 교회가 도움을 준 재산을 다 빼앗기기도 하였고, 생명의 위협을 당하는 등 참으로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 무서운 고난을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다 이겨냈습니다(히 10:32-35).
이것이 바로 자기의 소유를 팔아 보화가 감추인 밭을 사는 행위입니다. 보화가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29-30)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보배로운 천국을 보는 자입니까? 그렇다면 그 천국 앞에서 기뻐하고만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자기 부인을 해 가면서 천국을 소유한 자로 있는 것입니까?
2) '열망(熱望)'과 '자기 부인' :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드신 비유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꾼 비유'입니다. 여기서 '좋은'의 뜻은 '값지다'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값진 진주를 구하는 장사꾼 비유인 것입니다. 이 비유는 '감추인 보화 비유'와 한 짝을 이룹니다. 그러나 내용상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감추인 보화 비유에서는 그 보화가 볼 수 있는 자만(하나님의 은혜) 발견하였지만, 본 비유에서는 좋은 진주를 구하기 위하여 찾아다닌 끝에, 그러니까 천국을 얻기 위해 가진 노력을 하는 열심 끝에 발견되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들어 천국을 가르치실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관련하여서 보면 이것이 갖는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천국이 도래하였지만 감추인 보화에서 설명되었듯이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천국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행적에는 천국의 보배로움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표적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천국의 영원한 생명이 예수님에게서 보여집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가치를 알지 못하여 단지 떡을 먹고 배부른 것에 만족하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이 계신 곳마다 찾아다녔습니다(요 6:22-65).
그러나 예수님에게서 천국의 실체를 발견한 사람은 마치 아주 가치가 큰 좋은 진주를 구하기 위해 찾아다니는 사람모양으로 그것을 얻기 위하여 애씁니다. 그는 그 진주에 완전히 거기에 매료되어 있으며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사 소유합니다. 그는 발견한 이 좋은 진주를 얻기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다 포기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그에게 있어서 자기 인생을 투자할 그런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밭에 감추인 보화로 다가왔습니다. 천국은 그것을 보는 눈을 가진 사람만 볼 수 있습니다. 그 천국은 이제 이 가치 있는 좋은 진주를 구하기 위해 찾아다니는 장사꾼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천국을 소유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먼저 그에게 천국을 간절히 열망하는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중생의 도리로 가르치셨습니다. 거듭난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하나님의 자녀로 택정하신 은혜에 따라 그를 거듭나게 하여서 천국을 열망할 수 있는 마음을 지니게 하셨으며, 그렇게 해서 천국을 부단히 구하며, 그 천국의 실체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보게 되었을 때 그는 큰 기쁨을 가지고서 그 천국 백성이 되고자 합니다. 그래서 그는 그 좋은 진주를 얻기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이 비유에서 보듯이 천국 백성이 되기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세상 그 누구도 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에게서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을 받아 그 천국을 열망하고 그 실체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본 자들만이 할 수 있습니다.
3) 믿음의 의 :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드신 비유는 물고기를 모는 '그물 비유'입니다. 이 비유의 결말이 세상 끝 날에는 의인 중에서 악인을 골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는다는 것에서 알곡과 가라지 비유와 유사한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가 알곡과 가라지 비유와 차이점이 있는 것은 알곡과 가라지 비유가 처음부터 의인과 악인의 구별 속에서 추수 때에 분리될 것을 말씀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의인과 악인이 구별이 되지 않게 한데 어우러져 섞여 있는 것을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구별해 내어 의인에게서 악인을 떼어낼 것을 말씀하는데 있습니다.
이 비유의 내용을 보겠습니다. 천국은 마치 어부가 각종 물고기를 모으기 위해 바다에 친 그물과 같습니다. 그물 안으로 모든 종류의 물고기들이 모여들어서 그물이 가득 차면 어부는 그물을 물가로 끌어올려 놓고 먹을 수 있는 고기만 추려 그릇에 담고 그렇지 않은 고기는 바다에 내다 버립니다. 세상 끝 날에도 이와 같습니다. 천사들이 와서 의인들 사이에 섞여 있는 악인들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서 통곡하며 몸부림 칠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교회를 두시고 사람들을 모으시는 일을 하시지만 그들 모두가 하나님이 용납하시는 것은 아니며, 오직 합당한 자만이 추려져서 하나님의 그릇 속에 담겨지고 남은 자들은 지옥불에 던져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의 현재와 미래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바다는 '세상'이요, 그물은 '교회'로 비유되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물에 걸려든 각종 물고기는 교회에 모인 '신자들'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결말을 볼 때 교회의 신자들이라고 해서 그들 모두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서 한데 어우러져 있기 때문에 의인과 악인이 구별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만 장차 이들 사이를 갈라놓으시는 하나님의 판단은 정확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고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외모로는 구별의 기준을 삼지 않습니다. 외모만 가지고서는 사람이 얼마든지 자신의 모습을 과장하고 가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의 중심을 볼 수 있으면 구별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에는 믿음 생활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며, 그래서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단지 교회를 이용하고 있는 그들의 본심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소년 시절에 목동으로 일할 때 사울 왕의 뒤를 이을 새로운 왕으로 택하셨습니다. 다윗에게는 여러 건장한 형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다윗에게 있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많은 헌금을 하였지만 하나님과 사도를 속이는 거짓된 마음을 보시고 그들을 엄히 징계하셨습니다. 이렇게 교회에 속해 있으면서 다 같이 믿음 생활을 해 나가더라도 악한 자들이 섞여 있습니다. 이들은 비록 교회라고 하는 한 곳에 청함을 받았습니다만 그들 모두가 다 천국 백성으로 택함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마 22:14). 그러기에 이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는데 그 능력은 부인합니다(딤후 3:5). 그야말로 못된 물고기들입니다. 그들은 단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교회를 이용만 하는 합당하지 못한 자들이기 때문에 마지막 날에는 그들을 의인과 구별시키고 의인에게서 분리하여 따로이 지옥불에 던져 넣습니다.
그러므로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마 7:21)라고 하신 말씀을 귀담아 들으십시오.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불의에서 떠나지 않는 자들은 주님께서 결코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정확히 구별하시고 의인으로부터 분리시키십니다. 그 분리는 천국으로부터의 분리로 계속됩니다. 그들의 처소는 지옥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 비유에서 가르치는 핵심은 신자의 '믿음의 의'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서 속임을 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마다 그 행한 대로 갚으십니다. 사람이 행한 행위에 따라 상벌을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부활을 하는데 또 어떤 사람은 영원한 사망에 이르는 부활을 하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교회에서 믿음 생활하는 것은 진실에 의해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서 해야 합니다. 불의에서 떠나야 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행하는 것을 대단하게 여기면서 정작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뜻에 합당한 믿음을 가지는 의가 아닌 한에는 그는 결코 좋은 물고기가 아닙니다. 못된 물고기로 판단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4) 진리를 수용하는 자세 : 천국의 가치를 아는 자들이 갖는 처신이 어때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네 번째의 비유는 '등불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제자들에게 '진리를 수용하는 자세'를 가질 것을 권면합니다.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거나(됫박으로 덮어둠) 평상 아래(침상 밑)에 두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든지 등불은 등경(등잔대) 위에 둡니다. 그럴 경우 방안에 있는 모든 물건은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등불은 방안에 있는 물건들의 모습을 비추기 위해서 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자신의 존재성을 밝힙니다. 예수님은 자기 안에 감추어져 있던 천국을 드러내어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선택받은 제자들에게서는 천국의 실체를 쉽게 볼 수 없게 하기 위해서 더욱 깊은 비밀 속으로 감추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선명하게 볼 수 있도록 밝혀줍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가르침은 제자들에게 천국을 더 잘 깨달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사용하신 것인 만큼, 듣는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여 거기에 담겨져 있는 의미를 깨달아 이해하는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진리를 수용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의 기록을 보면 이 사실은 더욱 분명합니다. 누가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빛이 보이지 않도록 그릇으로 덮어두거나 침상 아래에 두는 일은 없다고 하면서, 등불을 등잔대 위에 두는 것은 온 방안을 환하게 비추게 하기 위해서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등불을 등잔대 위에 두면 감추어져 드러나지 않을 것이란 아무 것도 없듯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 비밀이란 없다고 하였습니다(눅 8:16-17).
마가와 누가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제자들이 지금 자기들이 무엇을 듣고 있는 것인지 명심하라고 하면서 누구든지 그가 알고 있는 것으로 처신한 데 따라서 가진 사람은 더 받게 될 것이지만, 가지지 못한 사람은 자기가 가졌다고 믿고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4:24-25, 눅 8:18). 이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깨달아 이해하여서 천국 복음의 진리를 수용하는, 그러니까 진리를 순종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취해야 그 믿음이 그를 그가 알고 있는 천국으로 인도할 것이지, 그렇지 않고 어줍잖게 자기의 편견된 지식으로 천국 복음의 진리를 배척한다면 그는 자기가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천국의 비밀을 알게 해 주시는 가르침을 받았지만 배척을 하면서 등불의 빛을 보이지 않도록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아래에 두어 가리우는 일을 해 왔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 빛은 세상 속에 감추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둠의 세력을 이기고(요 1:5) 명확하게 그 모습을 나타내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다한 사람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여 천국을 차지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 된 우리들에게서는 예수님의 말씀 안에 믿음으로 거하는 자세를 일관되게 가져 나가야 합니다. '진리를 수용하는 자세'를 겸손하게 가지는 것은 진리를 순종으로 받들어 나가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5)하나님을 의지하고 열심으로 수고하는 자세 :예수님의 비유는 이제 막바지에 이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가치를 아는 자들이 가질 처신을 다섯 번째 비유인 '스스로 자라나는 씨 비유'를 들어 가르치십니다.
천국은 농부가 그의 밭에 뿌려 놓은 씨와 같습니다. 그 씨는 농부가 자고 깨고 하는 동안에 스스로 자라 싹이 돋고 커 갑니다. 땅이 그 씨를 자라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싹이 돋고 그 다음에는 이삭이 나며 마침내 추수 때가 되면 이삭에 많은 낟알이 맺힙니다. 그러면 농부는 낫을 가지고 나가 풍성하게 잘 익은 곡식을 거두어들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씨앗의 성장 원인은 씨앗 그 자체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밭에 뿌려진 씨는 그 생명이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자라갑니다. 스스로 자라 가는 것입니다. 농부는 추수 때에 밭에 곡식이 충실하게 여문 것을 보고 기쁨으로 단을 거두어들입니다. 이것은 천국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도래한 후에 성장해 나가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의지와 능력에 있기 때문에 그 천국 복음을 위해서 일하는 자는 그 결실의 때를 바라보며 다만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할 것과 열심으로 수고할 것을 가르쳐 줍니다.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심는 일을 하는 사역자들은 자신들이 그 일을 했다고 해서 그 결실을 바로 보지는 못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그가 심은 천국 복음을 자라나게 하여서 결실을 맺게 하실 것이기 때문에 수고의 결실을 즉시 얻지 못할지라도 낙심하지 말고 마치 씨앗을 심은 농부가 추수 때의 결실을 바라보며 날마다 맡은 일을 힘써 수고하듯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열심을 갖고 수고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실로 천국 복음을 결실 맺게 하시는 일은 하나님만이 하십니다. 우리는 다만 그 천국 복음을 사람들에게 심고 물주며 가꾸는 일만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바울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5-7). 그러나 그런 자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기쁨으로 풍성한 곡식의 단을 거두게 될 것이라는 것이 천국 복음을 심는 원리이기 때문입니다(참조. 시 126:5-6, 고후 9:10).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열심으로 수고하는 자세는 사역자들만이 가질 자세는 아닙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요구되는 자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함으로 자신들 안에 도래한 천국의 가치를 아는 자들은 그 나라를 영원한 본향으로 바라보며 그곳에 영원히 거주할 수 있게 되기까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열심으로 맡은 일에 수고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는 그를 하나님은 능력으로 함께 하시면서 천국 백성에 합당한 사람으로 자라게 하십니다. 이렇게 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일생이 걸린 일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방해와 장애도 있을 것입니다. 사단은 호시탐탐 갖은 계략을 써서 미혹과 대적하는 일을 병행하여 믿는 자들을 주에게서 떠나게 합니다. 이로 인해서 자칫하면 믿음에 열심을 갖지 않고 나태한다든지 또는 배도의 길을 가기 쉽습니다. 그러기에 낙심하지 말고 참음으로 기다리면서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믿음 생활에 열심을 가지면 하나님께서 주신 천국을 결실 보게 될 것입니다.
6)천국 복음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을 하여야 함 : 천국 복음의 가치를 아는 자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여러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신 예수님은 이제 말씀을 맺는 결론을 '집주인 비유'로 하십니다. 지금까지의 가르침으로 이제 제자들은 천국의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그렇다고 하면 이제 그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치십니다.
천국에 대한 가르침을 받은 서기관들은 자기 곳간에서 옛 것과 새 것을 꺼내는 집주인과 같습니다. 이 집주인의 비유의 내용은 천국에 대한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이제 깨달음을 가지고 있기에 서기관(율법학자)의 위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의 위치에 서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제자들은 자기가 깨달은 지혜의 곳간에서 그곳에 보관되어 있던 옛 것과 새 것을 끄집어내서 써야 한다는 것이 집주인 비유의 초점입니다.
여기서 옛 것은 옛 교훈, 곧 구약 성경입니다. 그리고 새 것은 새 교훈, 곧 예수님의 교훈입니다. 이 새 교훈의 내용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될 구속과 그 성취에 따라올 것인 천국입니다.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인해서 천국이 도래하고 그의 사역으로 인해서 그 천국이 나타나는 동안에 이 천국에 대해 가르침을 받아 제자 된 지혜 있는 서기관은 그 지혜의 곳간에서 옛 것과 새 것을 다 함께 꺼내와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옛 것으로서의 구약 성경과 새 것으로서의 예수님의 교훈을 적절히 사용하여서 거기에 담겨져 있는 천국 복음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일에 열심을 다하여야 합니다.
옛 것과 새 것을 다 같이 가르쳐야 하는 것은 새 것은 옛 것을 배경 삼아서, 그래서 그 연관 속에서 가르칠 때만이 바르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옛 것은 새 것 안에서 그 의미가 바르게 전달 될 것이며, 또한 새 것은 거기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뜻이 세상 끝 날에서야 비로소 이루어져 충만하게 나타날 것이기 때문에 그 동안에는 암시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데 이것이 옛 것을 통해서 올바르게 해석이 됩니다. 구약 성경과 예수님의 교훈은 한 산으로서 작은 봉우리를 거쳐 큰 봉우리로 올라갈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래서 정상에 오르게 됩니다.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들은 이 사명을 맡고 있습니다.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들의 임무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들은 옛 것과 새 것의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공부하여서 깨달은 뒤에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 천국 복음의 진리를 다 함께 공유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참된 서기관들의 그러한 사역을 통해서만이 천국을 많은 사람들에게 확장시켜 나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가르친 천국 복음을 깨달았느냐? 그렇다면 이제부터 너희는 천국에 대한 깨달음을 가진 지혜 있는 서기관들이다. 그러니 너희가 조상 때부터 알고 온 옛 교훈과 함께 내가 너희에게 가르쳐 준 새 교훈인 지혜의 보따리를 풀어서 사람들을 그 지혜 속으로 들어오게 하라. 너희는 이제부터 그 사명을 수행해 나가는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천국의 가치를 아는 자들의 처신은 바로 이 사명을 수행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그 자신이 세상에 생명을 가지고서 살아있으면서 존재하는 목적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자신을 두고 말하기를 '복음에 빚진 자'라고 한 것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롬 1:14-15). 우리가 무엇 때문에 생명을 가지게 되었는지, 또한 살아 있는지를 말입니다. 천국 복음에 대한 사명의 인식 없이는 사실 천국의 제자된 자로서의 삶의 의욕도 없기 마련입니다. 역설적으로 우리가 참으로 열정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가지고 들어온 천국 복음의 제자된 삶을 사는 것은 우리가 수행하고 마쳐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단지 의욕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생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옛 것과 새 것을 소유하고 있어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꺼내줄 수 있는 집주인으로 있을 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따라서 먼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는 자세를 취해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천국 복음의 비유는 집주인의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끝맺습니다. (*)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