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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계별학습

신약구속사 13강 장로들의 유전을 좇는 신앙을 책망하심

작성자이천우|작성시간05.05.23|조회수368 목록 댓글 1
*마태복음 15장 1-20절을 정독하신 후에 본 설명을 보시기 바랍니다.



장로들의 유전을 좇는 바리새인과 서기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게네사렛에 계신 예수님을 찾아서 먼 곳 예루살렘으로부터 여행해 왔습니다. 그들은 항상 예수님께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진리의 가르침으로 자기들의 거짓과 모순된 신앙이 여실히 드러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을 곤경에 몰아넣기 위해서 골몰하였습니다. 그들이 이번에도 예수님을 찾아서 나온 것은 동기가 그런 불순한 목적에서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만나 질문한 내용을 볼 때 분명합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여기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문제삼은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않고 먹음으로 '장로들의 유전'을 범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만날 때 한 광경을 보았는데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는 것을 목격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책잡아 걸고 넘어질 수 있을 것인지를 궁리하던 그들은 마침 좋은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빌미로 예수님을 비방하며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들의 말에서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의 의중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보인 행동을 이유로 사실은 예수님을 비방하고 있습니다.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정한 자라고 하는 것이요, 그들의 스승인 예수님은 제자들이 율법을 범하도록 충동시켰다고 하는 것입니다.

'장로들의 유전'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과는 다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성문 율법으로 모세의 오경 외에도 또 하나의 율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구전 율법(미쉬나)입니다. 구전 율법은 모세와 70인 장로들의 구전을 중심으로 집대성한 생활 규범입니다. 구전 율법이 형성된 과정을 보면, 바벨론 포로 귀환 후 유대인들은 율법을 현실적인 생활 환경에 맞게끔 구체적으로 규범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여긴 랍비들이 고대의 전승 자료를 중심으로 세세히 생활 규정들을 정비하여 집대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장로들의 유전' 형성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문서화시킨 것이 바로 '탈무드'(Talmud)입니다. 이 탈무드는 내용상으로는 율법의 세부 규정을 담은 '미쉬나'와 이것을 주석(註釋)한 '게마라'로 구분됩니다. 또한 이 탈무드는 문체상으로는 법 규정을 다루는 '할라카'와 각종 이야기를 통해 지혜와 훈계를 주는 '학가다'로 구분됩니다. 이 중에서 할라카는 모세로부터 개개인에 의해 전래된 것과 모세의 기록에 기초한 규칙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총 613개항에 달합니다. 유대교는 이것을 다시 인체의 뼈대수에 상응하는 18개 주제의 의무 규정 248항목과 1년의 날수에 상응하는 13개 주제의 금지규정 365항목으로 구분하였습니다.

유대인은 이와 같은 장로들의 유전을 조상의 전통으로 지켜왔습니다. 이때 그들은 그 기원을 모세의 율법에 두었습니다. 본문에서 떡을 먹을 때 손을 씻는 규정 역시 그렇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정하고 부정한 규례'가 있습니다. 특별히 레위기에 보면 이에 대한 규례가 아주 세세히 수록되어 있습니다. '문둥병 부정 규례', '산모의 부정 규례', '정하고 부정한 짐승 규례', '유출병 규례' 등과 관련한 정하고 부정한 규례들이 자세히 나옵니다. 이 규례에 의해서 가령 시체를 만진 사람은 부정한 자로 취급당하였으며, 피를 먹거나 혹은 비늘이 없는 짐승이나 어류, 낙지나 문어 같은 것을 먹거나 만지기만 해도 부정하다고 규정되었습니다. 그래서 부정하다고 규정된 것들에 접촉되게 되면 그 사람은 부정한 자로 취급당하여 정결 의식을 치러야만 했습니다. 이때 특별히 요구된 일련의 제사를 드려야만 비로소 정하게 될 수 있었습니다. 이때 제사를 드리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의식이 물로써 자기 몸을 씻는 규례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부정으로부터 깨끗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던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인은 만일 율법으로 규정한 어떤 부정한 것을 접촉하였을 경우 그것과 관련하여 규정된 일련의 제사를 드려야 하고, 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를 물로써 깨끗이 씻는 정결 의식을 치러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제사장이 백성들의 제사를 집례하기에 앞서 물두멍의 물로 자신을 깨끗이 씻어야 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질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당시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이 성막에 들어가기 전에 손과 발을 씻도록 요구하셨던 다음과 같은 말씀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출애굽기 30장 19-21절에 "아론과 그 아들들이 그 물두멍에서 수족을 씻되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화제를 여호와 앞에 사를 때에도 그리할지니라 이와 같이 그들이 그 수족을 씻어 죽기를 면할지니 이는 그와 그 자손이 대대로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고 했습니다. 또 출애굽기 40장 12절을 보면, "너는 또 아론과 그 아들들을 회막문으로 데려다가 물로 씻기고"라고 했습니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 유대 장로들은 제사장들에게만 해당하는 이 말씀을 일반 백성들까지도 결례로 지켜야 한다고 확대 해석하여 주장함으로써 모든 유대인들도 지키게 하였습니다.

특별히 스스로를 분리주의자로 자칭하는 바리새인은 이런 결례를 지키는 데 대단한 열심을 보였습니다. 손 씻는 결례만 해도 그렇습니다. 제사 의식과 관련하여 손을 씻는 규례가 주어진 것인데, 이 규례가 장로들의 유전에 의해서 그 본래의 의미는 잃어버리고 엉뚱하게도 사람들의 실생활을 규제하고 억압하는 강제 규정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규례의 의해 바리새인들은 손을 씻지 않으면 떡을 먹지 않았습니다. 마가복음 7장 3절을 봅니다.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켜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아니하면 먹지 아니하니라"(막 7:3). 여기의 '부지런히 씻는다'는 말은, 성경의 난하에 '팔뚝까지 씻는다'는 뜻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손 씻는 법이 독특합니다. 손을 약간 허름하게 쥐듯이 한 상태에서 한 컵 정도의 물을 부어 손가락이 다 씻어지게 하는데 손을 아래로 내리지 않고 팔꿈치보다 약간 높이 들고 물을 붓습니다. 그렇게 해서 물이 팔꿈치로 흘러 떨어지게 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손가락으로부터 시작해서 손을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하였는데 손을 아래로 내리면 손을 씻은 그 더러운 물이 손가락으로 흘러 내려 다시 손을 더럽혀 결국은 더러워진 그 손으로 인해 부정하게 되고, 부정한 손으로 먹는 떡도 부정하게 되기 때문에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마가복음 7장 4절에는 "또 시장에서 돌아 와서는 물을 뿌리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기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뿌린다'는 말은 성경 난하에 '목욕한다'라는 뜻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때 목욕한다는 뜻은 '세례 받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의식적으로 목욕하여 정결케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손 씻는 결례를 행한 것은 엄밀히 말해서 위생상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자기들이 결례를 행했다고 하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였습니다. 즉 자신은 정결하다고 하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손 씻는 결례는 단지 손 씻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잔도 씻어야 하고 주발도 씻어야 하고 놋그릇도 씻어야만 하는 것으로 확대되어 갔습니다. 그렇게 한 손으로, 그릇으로 떡을 먹는 사람이라야 정결한 자라고 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이 결례를 행하지 않으면 불결한 자, 곧 부정한 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부정한 자로 취급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장로들의 유전을 지켜 결례를 행하였습니다. 이것이 전통을 좇아 오랫동안 행해져 오면서 그야말로 형식만 지키는 외식주의자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바리새인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좇는 신앙에 대단한 열심을 가졌습니다.

그런 바리새인은 두 가지의 큰 과오를 범하였습니다. 하나는, 율법의 의식적인 규례들은 그 외부적인 형식 자체를 문자적으로 시행하는 것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배후의 정신을 지키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인데 그것을 놓치고 형식만을 취하여 지킨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정하고 부정한 규례들은 종교적인 목적을 의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규례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속한 구원의 은혜를 받은 백성으로서의 특별한 존재인 사실을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확립해 나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이 규례들을 지키는 것을 통해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있음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효과를 보였습니다. 이것은 비단 정하고 부정한 규례에서만이 아니고 모든 율법이 다 그랬습니다. 그렇지만 유대인은 엄격히 형식만을 취하여 종교적 의로 삼았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의식법 규례는 도덕법 규례와 함께 지킴으로써 외식으로만 흘러가지 않고 내면적으로도 하나님의 성품을 지녀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그와 같이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최고의 율법을 준수하여야 하는데 이 부분을 놓치고 단지 형식만 취하여서 지킴으로 외식만을 중시하는 위선자가 된 데서도 그 특징이 더욱 두드러지게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유대인은 '장로들의 유전'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확대 규정하고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의무화시킴으로 모체격인 성문 율법과 충돌을 일으키는 우를 범하였습니다. 가령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예를 든 것에서 볼 수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장로들의 유전을 좇는 자들은 말하기를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고 하여서 정면으로 모세의 율법과 충돌을 갖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장로들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 '장로들의 유전'을 들먹이며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는 것을 문제삼아 사실상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범하도록 제자들을 충동시키고 있다는 시비성의 비방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책잡기 위하여 예수님께로 나온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책망

바리새인들이 장로들의 유전 운운하자,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 자신이 그것으로 하나님의 계명-율법-을 범하고 있는 범법자라는 사실을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지적하셨습니다. 장로들의 유전을 엄격히 지키는 자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진정으로 성취하는데 방해자들 입니다. 왜냐하면 장로들의 유전은 전적으로 외형적이며 비성경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에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출 20:12, 신 5:16). 또한 아비나 어미를 우습게 여기는 자를 반드시 죽일 것을 명령하셨습니다(출 21:17, 레 20:9). 하나님께서 율법에 부모를 공경할 것을 명령하신 것은, 그것이 인간 사회의 근본 질서를 세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자기를 낳아 길러주시는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로 하나님께서 강력히 요구하십니다. 한편, 하나님께서 율법에 부모를 공경할 것을 명령하신 진정한 의도는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에서 모든 사람을 내신 진정한 아버지, 곧 영혼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잘 공경하는 법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즉, 자식은 부모를 공경해 나가는 것에서 또한 하나님을 공경하는 법을 배웁니다. 하나님께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잘 공경하는 것이 되는지를 체득하여 하나님을 공경함을 실질로 누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율법을 주신 것은 그것이 인간이 해야 할 전부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정말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을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땅히 하나님을 공경할 일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율법을 범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잘 대우하기 위해서 하나님 공경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율법을 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해 나가는데는 불가피성이 없습니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이 적용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부모 공경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 공경으로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그 사람은 부모 공경을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 공경을 내신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것은 진정한 공경에 들어가지 못하는 법입니다. 반면에 부모 공경하지 않고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은 가능하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보이는 사람을 공경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고르반 사상'이 있는데, 유대인의 랍비들이 이것을 장로들의 유전화 시키면서 악용하여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빌미로 부모 공경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만듦으로 실제는 율법을 범하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고르반 사상이 사실은 하나님을 공경해서가 아니라 지도자들의 탐심과 유대인의 탐심이 함께 공조를 이루고서 행해지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고르반 사상'은 민수기 30장의 '서원 규례'에서 찾습니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에게 무엇을 드리겠다고 서원을 하였거나 또는 어떤 일은 하지 않겠다고 서약을 하였다면 반드시 지켜야 하며, 절대로 그것을 파약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들이 있습니다. 아버지 시하(侍下)에 있는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하나님께 자기가 무슨 일을 하면서 살겠다고 서원을 하였거나, 어떤 일은 하지 않겠다고 서약하고서 그 사실을 아버지께 알렸는데 아버지가 아무 말하지 않으면 그 여자는 서원이나 서약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아버지가 딸의 서원이나 서약을 듣고도 아무 말하지 않는 것은 그것을 지키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으면 그 여자는 아버지가 하지 말라고 하였기 때문에 지키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용인하십니다. 그래서 그 여자가 하나님께 한 서원이나 서약을 지키지 못하는 죄를 용서하시고 책임을 묻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결혼하지 않은 여자는 아직 독립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자신을 주장할 수 없고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는 딸이 서원이나 서약한대로 살아가도록 허락하거나 금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 원리는 결혼한 여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결혼한 여자가 결혼하기 전에 하나님께 서원이나 서약을 한 것을 남편에게 알렸을 경우 남편이 아무 말하지 않으면 그 여자는 하나님께 한 서원이나 서약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렇지만 남편이 허락하지 않으면 그 여자는 그 서원이나 서약을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이것은 결혼 후에 한 서원이나 서약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아내로부터 그녀가 한 서원이나 서약을 듣고 그 당시에는 아무 말하지 않아 동의하였는데 후에 아내에게 그 서원이나 서약을 허락하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때도 아내는 남편의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아내가 하나님께 한 서원이나 서약은 깨집니다. 이때의 경우는 남편에 의해서 불가피하게 아내의 서원이나 서약이 깨졌기 때문에 아내는 파약한 데 따른 책임은 없습니다. 대신에 그 책임은 파약 시킨 남편이 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파약한 책임을 남편에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부나 이혼을 당하여 혼자 사는 여인의 경우에서는 자신이 서원이나 서약한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남편이 없으므로 자신이 하나님께 서원 하거나 서약한 것에 대해서 통제가 없어져 자신이 마음에 원하며 약속한대로 자유롭게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고르반 사상'이 나옵니다. 예를 들면, 레위기 1장 2절을 보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라고 말씀하시고 있는데, 거기서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린다'라는 말이 바로 '고르반'입니다. 따라서 '고르반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물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재산을 "고르반 되었다"라고 했다면, "내 재산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재산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 하였고, 서약한대로 그대로 지키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르반 사상'입니다.

그런데 이 사상이 훗날 장로들의 유전으로 지켜 오면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것을 악의적으로 변형시켜 사용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지적한대로 "아비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부모님에게 드려서 유익하게 할 것이 이제는 '고르반' 됐습니다. 하나님에게 드림이 됐습니다"하였으면, 후에 그 사람이 마음이 바뀌어서 "내가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하고 서약했는데 지금 형편상 그것을 내가 부모님을 봉양하여 섬기는데 사용하겠습니다"를 밝히며 그것을 허락 받기 위하여 서기관에게 나아오더라도 서기관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고르반 되었다)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7장 11절에서는"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 이라 하고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 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한 말씀에서도 그 사실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재산을 '고르반'하였지만, 아직 그 재산이 성전에 갔다 바친 것은 아니고, 그 사람에게 그대로 있고 그 사람의 관리하에 있기 때문에 그가 부모 봉양하기를 원하므로 허락하면 됩니다. 부모 공경이란 큰 원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없이 고르반 하였다고 해서 하나님을 공경함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자기 재산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과 서약을 하였지만 부모를 공경할 것을 가지고 그 도리를 행하지는 않고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면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 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는 먼저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죄를 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진정한 하나님 사랑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서기관은 백성들이 부모 공경을 위하여 재산을 사용하게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서도 부모가 자식에게 그가 서원하고 서약한 그대로 지킬 것을 요구한다면 그대로 할 것입니다. 부모가 원하는데도 자식이 자신이 서원하고 서약한 것을 스스로 파약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서기관들이 백성들이 한번 고르반 하였으면 장로들의 유전에는 "하나님께 드림이 된 것을 가지고 하나님 외에 또 다른 사람에게 다시 드리지 못하게 되어 있다"고 하면서 무조건 하나님께 드릴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럼으로써 장로들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폐하는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런가 하면, 백성들도 '고르반 사상'을 악용하였습니다. 재산을 부모님을 봉양하는데 쓰고 싶지 않는 것입니다. 즉 부모 공경의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탐심으로 가득 찬 마음을 가지고 부모 공양해야 할 것을 '고르반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부모 봉양에 대한 책임을 면제시켜 주는 장로들의 유전을 악용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변명하기를 "설혹 부모님을 봉양하는 일을 소홀히 대하게 되지만 하나님을 섬기는데 사용하는 것이니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는 부모님을 봉양하지 않아도 괜찮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부모가 봉양을 요구해도 "아버님, 어머님, 죄송합니다. 마땅히 잘 봉양해야 하는데, 그만 제가 재산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약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봉양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해하여 주십시오"하며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율법을 범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고르반' 한 재산을 성전에 가져가 바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부모 공경할 몫까지도 자기 것으로 삼아 욕심을 채웁니다. 왜냐하면, 자기 재산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하고 서약한 것은 그의 자유 의사에 의해서입니다. 사실 처음 장로들의 유전은 비록 어떤 사람이 고르반 하였어도 그의 부모를 봉양하며 공경하는 일을 위해서는 그가 하나님께 서원하고 서약한 것을 지키지 않아도 되도록 허락하고 있는 데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랍비 엘리에셀(Eliezer)은 말하기를, "그의 부모를 위해서는 그 사람에게 문이 열려 있다"고 하였습니다. 즉 어떤 사람이 자기 부모를 봉양할 것을 하나님께 서약하여 고르반 하였을지라도 마음을 바꿔 부모를 봉양할 수 있도록 자유 의사를 개방시켜 두었습니다. 그와 같이 비록 고르반 하였지만 지금 아직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부모님을 봉양하는 것도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자기 것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할 것입니다. 이것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주님께 재산을 헌금하겠다고 하고서는 일부를 감춘 것에 대해 사도 베드로가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 5:3-4)한 말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고르반한 것과 그것으로 부모를 봉양하는 것 모두 임의로 할 수 있습니다. 자기 마음에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약했으니 반드시 지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그 고르반 한 것을 가지고 부모 봉양하는데 사용하는 것 또한 하나님의 율법을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까지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하는 것은 작은 선을 행하기 위해서 큰 죄를 짓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당시 백성들은 '고르반 사상'조차 탐심으로 악용하면서 그것으로 하나님의 율법까지 범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율법을 폐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리고 그들의 지도를 받는 유대인들 모두가 장로들의 유전을 좇아 사는 형식에 얽매여 있었으며, 또한 그것으로 종교적인 의를 삼았습니다.


장로들의 유전을 좇는 신앙은 외식하는 자들의 특징임

예수님께서는 자기 앞에 나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단정지어 말하면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여 그들의 외식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책망은 단지 예수님 앞에 있는 자들만을 두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사야 선지자가 묘사하고 정죄한 사람들과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말로는 하나님을 존경한다고 하지만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습니다. 그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그들이 자기 조상들로부터 구전되어 온 계명을 좇아서 의식(儀式)에 의해 형식적으로만 하나님을 섬길 뿐으로서, 설사 제물을 하나님께 바친다고 해도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지 않는 그 행위로 알 수 있습니다. 그 경배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기 때문에 헛되게 경배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왜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까? 유대교 지도자들은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 그 본래의 정신을 잘 깨달아서 하기보다는 외적인 형식 그 자체에 빠져 그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시행 세칙들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이것은 계속하여 세대를 거치면서 그 수가 더해져 갔습니다. 그렇게 유전되어져 온 시행 세칙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근간(根幹)으로 하고 있으나 하나님의 계명과는 다른 사람들의 계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계명은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으로 주어졌습니다. 백성들이 시행 세칙들을 수고하여 지키고자 하나 온전히 지키지 못하는 까닭에 항상 무거운 짐으로 여겨졌고, 그럴수록 백성들은 형식적으로나마 잘 지키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 외식주의로 나아갔습니다. 그 모두는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음으로 말미암은 필연적인 결과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배하나 실은 헛되게 경배하였습니다.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죄성에 있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외식주의를 책망하신 예수님은 몸을 돌이켜 무리를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한 말씀이 어떤 의미로 하신 것인지를 예수님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있는 무리들이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듣고 깨달으라"는 말씀으로 먼저 운을 떼셨습니다. 그리고서는 사람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더러워지는지를 예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쉽게 깨닫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외식하는 자들이 입을 화에 대한 말씀으로 모든 말씀을 마치자 베드로가 나서서 방금 전에 무리들에게 말씀하신 비유가 무슨 뜻인지 설명하여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15-20절).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이 아직도 자신이 무슨 의미로 그런 비유를 말씀하신 것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나무라시면서 설명하여 주었습니다. 사람의 입으로 들어간 모든 음식은 위와 장을 거쳐 다시 배설물로 나오듯이,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으로 이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입에서 나오는 그것'은 사람의 속에 있는 여러 가지 것들, 곧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 등을 의미합니다(19절). 이런 것들이 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으로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지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설명에서 사람을 더럽히는 죄의 근원지는 사람 속에 있는 부패한 악한 마음이지, 결코 사람밖에 있는 어떤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더러워지는 것은 손을 씻고 음식을 먹도록 한 장로들의 유전을 좇지 않은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가 악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장로들의 유전을 좇아 깨끗이 씻은 손으로 음식을 깨끗이 먹는다고 해서 사람이 깨끗해질 수 있겠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물로 손가락 정도를 씻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물동이로 부어서 온 몸을 씻는다고 하더라도 악한 마음을 깨끗이 할 수는 없습니다. 그 사실을 유대인들은 알아야 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말하기를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라고 했습니다(렘 17:9). 그러니 사람이 장로들의 유전을 좇아 종교적인 의식(儀式)을 행하며 사는 것으로는 죄악으로부터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무릇 그 마음의 깨끗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은 구주의 임재와 죄 사함을 베푸시는 은혜를 입는 것으로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죄를 사하시는 일을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구주이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이 사건에서도 자신을 계시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이 입을 화를 말씀하심

예수님이 예를 들어 무리들에게 말씀하실 때 제자들이 와서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는 이해를 하고 마음에 찔림을 받겠습니까? 오히려 그들의 마음을 건드렸으니 화를 입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제자들이 이와 같이 말한 것을 보아 아마도 예수님께로부터 책망을 받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마음이 상해 있어 안색이 변해 있는 것을 보고 뒷일이 두려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개의치 않고 그들이 장차 당할 화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그들은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께서 심지 않은 나무로서 모두 뽑힐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전혀 하나님의 관심과 돌봄 속에 있지 않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 그들은 소경이면서 소경을 인도하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어리석은 백성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는 일을 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들 자신들도 남의 인도를 받지 않으면 안될 똑같은 상태임을 의미합니다.

셋째, 소경이 소경의 손을 붙들고 가면 둘 다 구덩이 빠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은 소경의 인도를 받는 소경처럼 그들과 함께 멸망할 것임을 의미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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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이수영 | 작성시간 05.07.29 원본 게시글에 꼬리말 인사를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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