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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계별학습

신약구속사 20강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작성자이천우|작성시간05.05.23|조회수470 목록 댓글 1
*누가복음 10장 25-37절을 정독하신 후에 본 설명을 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는 질문을 함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제 3년째의 초막절 이후 수전절 사이인 어느 날 예수님께서 백성들을 가르치시는데 한 율법사(율법학자;서기관)가 일어나 예수님께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의 이 질문은 자기가 정말 알고 싶은 것이 있어서 알고자 하여 질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시험하는 것으로서 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기가 한 질문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대답하는지 듣고 고소할 건을 얻고자 하였습니다(참조. 요 8:6). 그러니까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아 공회에 고발하여 세우고자 했던 것입니다(참조. 눅 11:53-54).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는 유대인으로서 유대교에 벗어난 자, 곧 유대주의 신앙을 혼잡케 하고, 위배되는 새로운 사상을 전파하는 거짓된 선생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율법사는 예수가 더 이상 백성들에게 전파하고 가르치지 못하게 막고 백성들에게는 예수의 가르치는 교훈이 유대인에게 유대주의 신앙에서 벗어나게 하는 감언이설의 이단적 사설에 불과하다는 것을 드러내어 백성들이 예수를 좇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하고자 하는 유대주의적 열심으로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유대교에서 벗어난 소리를 하면 그것을 빌미로 체포하고자 하였습니다. 그것이 그에게 있어서는 유대교에 충성하는 것이었으며, 율법의 육체적 열심을 따르는 율법의 의였습니다.


율법사의 질문 의도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님을 시험하는 것으로서 한 질문은,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하는 말이었습니다. 자기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은 것입니다. 이 시험하는 말은 이 일 후 - 약 5개월이 지남 - 에도 있었습니다. 이때에는 한 율법사가 본문에서 한 말은 생략하고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입니까"(막 12:28),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가장 큽니까"(막 12:35)라고 질문하여 예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나 예수님을 시험하는 의도는 똑같습니다. 각기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질문한 것과는 전혀 다른 의도에서 한 질문이지만 예수님의 베뢰아 전도 때에 있은 어떤 부자 청년 관원의 이야기(마 19:16-30, 막 10:17-31, 눅 18:18-20)에서도 "선생님, 내가 영생을 얻으려면 어떤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와 같이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겠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은 영생(또는 하나님의 나라)문제를 율법 준수의 차원에서 보았습니다. 유대인이 알고 있는 영생 얻는 방법은 율법이 요구하고 있는 바로서 가장 큰 정신〈대강령〉인 '사랑'이었습니다. 신명기 6장 4-5절의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모든 율법 중에 첫 째 되는 것이었으며 레위기 19장 18절의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는 계명〈율법〉 또한 그와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었습니다(마 22:39) 유대인은 이 율법 정신을 충실히 따르며 이행하는 것으로서 모든 율법의 준수를 엄격히 할 것이 요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그러한 신앙에는 영생, 곧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율법의 정신을 좇는 것은 없고 단지 율법을 준수하는 그 행위만 유대인들에게 남았습니다. 그들은 모든 율법을 지키는 것을 자기들에게 주어진 의무요 책임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자기를 영생에 이르게 하는 의가 된다고 알았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러한 생각에 의한 유대인의 종교 생활은 장로들의 유전으로 정당시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장로들의 유전을 좇는 신앙화 되어 외식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율법사는 분명 율법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그리고 그와 같이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잃어버리고 그들의 신앙에 남은 것은 단지 율법의 조항 하나 하나를 지키는 것에서 하나님 앞에 가질 믿음 생활을 다하고 있다고 여겼으며, 그러한 자신들의 행위를 의로 여겨 대단하게 생각했습니다. 영생을 얻을 것으로 알았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율법사가 예수님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은 것은 짐짓 자기가 의롭다고 하는 것을 드러내려고 예수님을 떠보려고 한 말이었습니다.


율법의 본의를 좇게 하심

율법사의 시험하는 질문에 예수님은 바로 대답하여 주지를 않고 그 율법사에게 되물었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예수님의 이 질문은 율법사가 율법을 도대체 얼마나 알고 있는가 하는 율법 지식의 수준을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보다는 그가 시험하는 말을 하고 있는 의도와 계획을 아시고서는 율법의 본의를 그 자신 스스로 말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을 좇아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라고 물으시자, 율법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율법사는 자기가 레위기 19장 18절과 신명기 6장 4-58절에서 들어 알고 있는 사실을 그대로 답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에서 가르쳐주시고 있는, 그래서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있는 것은 자신들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리고 그와 같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한 율법사에게 예수님은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사가 영생 얻는 방법을 알고 있기를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본의를 좇아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다면 알고 있는 그것을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그가 영생을 얻을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은 거기에서 보여주시고 있는 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그와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통해서 영생에 이르게 하려고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사람을 생명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법입니다(롬 7:10).


율법의 본의를 놓치고 있는 율법사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살아야 할 생명의 준칙을 율법을 통해서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율법을 지키는 행함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서 하는 것, 말을 바꾸면 그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을 전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다윗의 시에서 보는 대로 중심에 진실함을 가진 것으로서 그래서 자기들의 영혼 깊숙이서 하나님을 아는 지혜에 의해서, 죄에서 깨끗이 씻긴 마음 정결한 마음에서 의해서(시 53:5-10)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위로 율법을 따르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사는 율법이 요구하고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행위로 율법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맺어 가는 관계는 없이 단지 유대 종교의 규례인 율법을 지켜 갔고 그런 자기의 행함을 영생을 얻는 데는 아무런 부족이 없는 것으로 봤습니다. 그러니 율법사의 신앙은 자기 의를 쌓는 공적 신앙에 불과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율법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시고 있는 그 정신에 의해서 하려고 하면 인간에게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전적 타락〈부패〉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를 수 없는 전적 무능력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언약을 맺어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시다는 사실을 계시하여 주셨습니다(시 89:4, 110:4, 사 9:7, 겔 37:25, 눅 1:33). 그 분이 오심으로 해서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신 백성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신(神)을 두어서 새 마음을 갖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으로 그들에게 나게 하신 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마음에 두고 믿고 따르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율법의 정신을 올바로 알면 그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향하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그 마음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율법사는 자기가 의롭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내가 무엇을 행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떠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율법을 다 지켰습니다. 그러니 내가 영생 얻는데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선생님은 어떻게 보십니까?"라고 말입니다.

허지만 예수님은 율법사를 칭찬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그 신앙으로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비록 모든 율법을 다 지킨다고 할지라도 그에게 없는 것을 그 자신 스스로의 입으로 말하게 함으로써 알게 해 주셨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어떻게 하라고 되어 있느냐?"고 물어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가 대답하자 "네 대답이 옳다. 그러면 이제 네가 알고 있는 그것을 행하라 그러면 영생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율법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하는 말은 '자기가 옳다고 하는 것을 드러내려고' 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자기 의를 드러내려고'하는 말로 대신 할 수가 있습니다. 율법사는 자기 의를 드러내려고 지금 예수님께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입으로 율법의 본의를 말해 놓고서도 거기에 좇아서 살려고 하지를 않고, 오히려 자기가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 "누가 내 이웃입니까? 말씀해 보십시오. 그러면 내가 그에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천해 보이겠습니다. 그러면 되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교훈하심

율법사가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질문함으로 예수님은 한 비유를 말씀하시기 시작했습니다. 일반적으로 그 비유를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라고 말합니다. 율법사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실상 26절에서 28절로 끝납니다. 율법사가 알고 있는 대로 율법을 행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영생을 얻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율법사는 율법의 본의를 좇아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와 같이 이웃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율법의 계명에서 하나님을 보며, 계명의 준수는 하나님을 향한 그의 사랑의 행위를 갖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웃은 하나님의 백성 된 공동체로서 그들을 섬기는 것에서 사실상 하나님께서 그들의 주로서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있는 그 자비를 보이는 것이며, 이는 또한 그들의 주로 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율법사는 예수님의 말씀하신 의도와는 다르게 그 동안 장로들의 유전을 좇아서 율법을 대해 왔던 그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받습니다. 그래서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하자 자기의 의를 드러내려고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율법사는 자기가 모든 율법을 만족시키면서 살아온 것으로 자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하면 둘째 되는 계명인 이웃 사랑도 해 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신이기에 누가 내 이웃인지를 말씀해 주면 지금까지 해 왔듯이 그에게도 선행을 베풀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사의 그 물음에 자비를 행하는 자가 누구인가를 선한 사마리아인을 들어서 설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 강도들이 그의 옷을 벗기고 돈을 빼앗고는 그를 때려서 거의 죽게 만들어 길에다 버려 두고 달아났다. 마침 한 유대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자 피해서 다른 길로 지나갔다. 또 한 레위 사람 역시 지나가다가 그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지만 그도 피해서 그대로 가버렸다. 그러나 유대사람에게 멸시를 받는 한 사마리아 사람은 그곳을 지나가다가 그 사람을 보자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 곁에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후에 자기가 타고 온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가서 밤을 세워 그를 간호하여 주었다. 다음날이 되자 그는 두 데나리온을 여관 주인에게 주며 '이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 만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소'하고 말하였다. 너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를 만난 자의 이웃이 되었다고 생각하느냐』(현대어 성경)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모두 네 사람의 인물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 그리고 강도 만난 사람을 배경으로 제사장과 레위인과 그리고 사마리아인이 등장합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다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죽도록 맞아 거의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곳을 지나던 제사장은 그 사람을 보고 돌보아 주지 않고 피해 갔습니다. 그 다음에 등장한 사람은 레위인인데 그도 같은 행동을 취했습니다. 이들은 다 율법을 엄격히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은 율법 앞에서 흠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율법의 본의는 좇지 않았습니다. 율법에서 첫째 가는 계명을 지켰습니다. 누가 봐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보다 작은 계명인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을 지키지를 않았습니다. 작은 것에 충성되지 않고 큰 것을 충성할 수 없는 것이 원리이듯이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 만난 자를 보게 되었을 때 취한 행동은 전혀 하나님의 자비를 드러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보다 더 크고 중요한 계명인 하나님을 사랑하는 계명 준수는 실은 외식하는 신앙에 불과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 사람인 사마리아인은 달랐습니다. 그는 강도 만나 거의 죽게 된 자에게 다가가 그의 상처를 봐주고 그가 완전히 치료받아 나을 수 있기까지 편안히 쉴만한 집을 찾아 제공하는 배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들어가는 재물을 아끼지 않고 사용하였습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죽어 가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자 해서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 만나 죽어 가는 자를 돌보지 않고 피한 것은 여러 이유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짐승이나 곤충 등의 주검을 만진 자는 부정하다고 하는 규례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죽어 가는 자를 대하는 것이 끔찍하고 무서워서이거나, 아예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해서 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가 어떻든지 간에 죽어 가는 자를 돌보아 그 생명을 살리는 자비를 베풀지 않은 것은 율법에서 어떤 정신으로 살아야 할 것인지를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할 짓이 아니었습니다. 사실상 그들은 하나님과 그 나라의 의가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반면에 사마리아인이 행한 자비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엄격하게 율법을 준수하는 의보다 더 큰 의였습니다. 그는 생명을 살리는 일에 참예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실상 그가 가장 큰 율법을 지킨 것에 속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지금도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아버지의 일을 맡아서 하고 계십니다. 이 일은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에서 하시고 싶은 이야기는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었느냐"입니다. 즉「누가 강도 만난 자에게 이웃이 되어주었느냐?」 하는 말입니다. 율법사가 "자비를 베푼 자 입니다"라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바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그러니까 "그 이웃이 행한 것과 같이 너도 그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처럼 율법사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이 말씀에는 앞서 28절에서 말한 ("그러면 살리라")라는 말씀이 생략되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지금 율법사에게 그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하여 가르쳐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지금 율법사, 나아가 유대인들이 안고 있는 문제점인 죄악성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뼈아픈 내용이 있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제사장과 레위인은 지금 모든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의를 좇고 영생을 얻으려 하고 있는데 그 신앙적 내용들이 전부 형식적이고 의식적일 뿐이지 진정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는 일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좋아서 하는 일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율법을 지키지만 율법에서 정말 중요한 것인 의와 인과 신은 버렸습니다(마 23:23). 강도 만나 거의 죽게 된 자를 외면하여 돌아보지 않은 것이 그 실증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율법을 다 지켜 행한다고 할지라도 실상 그것은 율법의 정신인 사랑은 없이 모두 자기를 사랑해서 합니다. 종교적 우월감과 성취감 속에서 행해지고 있는, 자기 만족에 도취된 자기 욕심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서 그들의 잘못된 신앙관을 교정시켜 주십니다. 강도 만난 자를 만났을 때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행하지 못한 것을 사마리아인은 행하였습니다. 그것은 자비였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 자비를 율법사에게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단지 "이웃을 도와 주라!"고 선행을 독려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율법에서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 뜻[정신]을 가르침을 받고 있지 않느냐?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섬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율법을 지키라!"는 말씀을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그가 유대인이요 더구나 율법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그의 율법 준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관계성에 의해서 행해져야 합니다. 그것은 그의 이웃 사랑에서 잘 보여집니다. 왜냐하면 율법에서 첫째 가는 계명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며, 이 계명을 지키는 자는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가는 계명도 지키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이웃 사랑은 첫째 가는 계명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사실상 다른 모든 계명과 선지자들의 요구는 이 두 계명으로 요약됩니다(마 22:37-40).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셔서 그가 만일 이 율법의 계명대로 산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살리라"는 말씀은 "네가 율법에서 하라고 한 대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와 같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비를 베푸는 이웃 사랑을 실천했기 때문에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것에서 하나님과 생명의 언약적 관계에 놓여 있는 사실로 인해서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행위의 성격

그러면 선한 사마리아인에게서 보는 '자비', 곧 사랑의 행위는 어떤 성격의 것일까요?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 주라는 것이 구제와 같은 선행을 뜻하는 것이겠습니까? 물론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그런 선행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한 사랑의 행위의 실체는 그가 지금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열정을 가지고서 신행(信行)하여 하나님과 그의 이웃을 섬기는가 하는 것입니다. 가령 다음의 몇 가지 예를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8장 1-11절에는 유대인들이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붙들린 여인을 끌고 와서는 주님을 시험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이 부정한 여인을 어떻게 할까요? 돌로 쳐죽일까요?" 주님은 그러는 저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시다가 땅에 무엇이라고 쓰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인을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주저주저하다가 한 사람씩 슬그머니 자리를 떠 흩어지고 맙니다. 유대인들이 부정한 여인을 돌로 쳐죽이자고 한 것은 저들이 지금 하나님의 거룩성이 훼손된 데 대해 치를 떨고 분노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자존심을 위하여 여인을 죽임으로 죄를 다스리겠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회복하기 위하여 돌로 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저들은 그렇게 하는 것을 통해서 지금 자기들이 얼마나 율법에 충실하고 있는가 하는 자기 의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부정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는 것을 통하여 "우리는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깨끗하다"고 하는 악한 마음에 의해서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말씀하여서 그들의 악함을 꼬집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의인은 없기에 한 사람 두 사람 그 현장에서 떠나갔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얼마나 그릇되게 나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우리가 여기에 나오는 유대인들처럼 자기 다른 사람에 비해서 자기는 괜찮은 사람인줄 알고 있으면서 그 의를 드러내기 위하여 하나님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서 이런 저런 신행을 하는 것은 아닙니까? 만일 그렇다면 그는 악한 마음으로 있는 악한 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갖는 열심, 곧 사랑의 행위는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우심의 충동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심성은 죄가 하나님의 거룩성을 훼손시키는 것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그에게는 하나님에 대해 가지고 사랑의 힘이 죄를 향하여 '의로운 분노'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죄를 심판합니다. 우리는 그 예를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이스라엘을 심판했던 데서 볼 수 있습니다. 민수기 22장부터 시작되는 내용에서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이 멀리서 내려다보이는 모압이라고 하는 곳에 진을 칩니다. 모압의 왕 발락은 노도와 같이 밀려드는 이스라엘을 두려워하며 발람 선지자를 찾습니다. 이스라엘을 저주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계신 하나님이 발람의 발걸음을 차단하십니다. 끈질긴 발락의 유혹에 드디어 발람 선지자가 모압으로 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의하여 어거된 그의 입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합니다. 그 축복 속에는 메시야의 도래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민 24:17). 그러나 본래 재물을 탐하는 거짓 선지자 발람을 하나님께서 놓으시자 그는 발락을 위하여 한가지 꾀를 제공합니다. 즉, 바알브올의 신전에 있는 미인들을 이용하여 이스라엘을 범죄케 하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순식간에 엄청난 범죄에 빠지게 되고 이에 하나님이 진노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령합니다. 이 바알브올에게 부속된 자들을 죽이라는 명령이 내립니다. 이때에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창을 들고 범죄에 빠진 천 명의 사람들을 심판합니다. 그런 비느하스를 두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합니다.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중에서 그들을 진멸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너에게 평화의 언약을 주겠다"고 합니다(민 25:11-12). 비느하스의 질투란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힐 수가 있는가? 어찌 그의 백성이 그의 크신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을 수가 있는가? 참으로 그럴 수 있는가? 이와 같은 심정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질투요 그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심정으로 있는 비느하스의 질투였다는 것입니다. 비느하스는 이렇게 하나님의 심정으로, 그 의로 불의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열심을 보였습니다. 이것이 그에게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행위였습니다.

이 비느하스의 질투와 모세의 율법을 들먹거리면서 예수님이 부정한 여인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보자고 하는 유대인들의 잘못된 열심의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또한 율법사가 율법에 철저한 자기 의를 과시하는 것이 결코 하나님을 사랑해서 가진 행위가 아닌 것을 아시겠습니까? 그가 율법의 조항 하나 하나를 지키는 열심을 보였습니다만 정작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을 이제는 알 수 있겠습니까? 그는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시는 사건으로 끌고 가면서까지 구원하여 자신의 생명을 새생명으로 주신 많은 사람, 그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하는 행위가 없는 데서 잘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그들이기에 그들은 율법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그리스도를 놓치고 있습니다(요 12:34). 하나님이 정말 자기들에게 원하고 있는 일로 나아가고 있지를 않습니다. 그래,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예수님을 시험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곤경에 빠뜨리게 하려고 합니다. 정죄 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자기 의를 나타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했으며, 핍박하여 십자가의 길로 몰아갔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실은 그 십자가의 길은 하나님이 그를 위하여 준비해 놓으신 섭리 속에 있는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어떤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이 비결을 종교적 행위에 의한 열심, 그 방법에서는 결코 찾아낼 수 없습니다. 이 비결은 하나님과 그를 믿는 자의 관계성의 질인 '사랑'을 나누는 것이 아니고서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이 사랑은 '교회' 안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집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그의 몸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랑을 실제적으로 행하는 곳입니다. 이때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그 방법은 자신과 함께 그리스도의 몸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지체인 믿음의 형제와 자매들을 사랑하는데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연합하여 있는 각 지체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아서 서로 섬기는 중에 함께 자라 가는데서 '한 몸'으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가진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그 열심은 교회를 통해서 실제적이며 구체적으로 발휘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의 행위의 실체를 더욱 극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1절 이하에서 바울은 자신 스스로를 두고 복음에 미쳤다고 말합니다. 교회에 미친 것입니다. 바울로 하여금 이 복음에 미치도록 만든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바울로 하여금 복음에 미치도록, 교회에 미치도록 떠밀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을 떠밀고 있는 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이냐 하면 한 사람이 많은 사람을 위하여 죽으시고, 그래서 많은 사람을 살리신 그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생각하면 바울은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도 죄송스러워 미워할 수가 없으며, 맡은 일을 좀 편안히 쉬면서 적당히 일하고 싶은 마음이나 불평하고 싶은 그럴 틈을 전혀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복음에 외인이 되어 있는 자들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드려 사용되어지는 일에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한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는 한 몸으로 열 개의 몸이 되어서 살았습니다. 교회의 몸이 되어서 살았습니다.

우리가 가질 사랑의 행위란 이런 성격의 것입니다. 자기의 죄인 됨을 항상 인식하며, 하나님의 의를 그 마음에 품고 있고, 주님의 사랑의 강권에 이끌려 그 힘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는 신앙이란 바로 이 사랑의 행위를 갖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여서, 주님에게 미쳐서 그분에 대한 사랑에 불타서 지금 자신이 이 주의 날에 교회로 모여 연합하고 있으며, 예배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로 얻은 덕과 그 유익함을 가지고서 지속되는 교회적 삶을 살아가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신앙이 자신으로 하여금 거룩한 규례 - 종교적 예배의 요소 -를 좇게 하고 경건의 연습에 몰두하게 하고, 이 교회를 위해서 살도록 그렇게 자신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멘.

*본 글을 읽으신 분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당시가 아직 십자가의 구속을 이루시기 전으로 율법 아래 놓여 있는 상태의 유대인[율법사]에게 하신 것임을 인식하고서 여기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의도가 무엇인지를 보고자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하시며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어 다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 하신 것은 율법 준수에 의한 구원론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율법에 담겨주신 하나님의 참 뜻이 무엇인지를 끄집어 내주셔서 유대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아 맡은 자로서 여기에서 영생을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신을 잃어버리고 단지 그 형식만 좇음으로써 사실상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에서 떠나 있는 악한 자들임을 드러내 알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 주었으냐?" 물으셔서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는 대답을 이끌어 내시는 것을 통해서 율법의 계명들을 다 지켰다고 자부하는 율법사에게 사실상 그가 영생을 얻는 의에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는 율법의 모든 계명들을 지키는 것에서 단지 자기가 의롭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하기 때문에 말입니다. 즉 자기를 의롭게 보이는 것의 방편으로 율법의 계명들을 지켜왔을 뿐입니다(그래서 율법에 저촉되는 일을 하여서 부정한 자가 되는 것을 피하려고 함으로써 강도만난 자를 돌보아 치료하여 그의 생명을 살리는 일을 마땅히 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음). 그러나 율법을 지키는 것보다 더 큰 일이요 진정 영생을 얻는 의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듣고 여기에서 알게 해 주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섬기는데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임을 선한 사마리아 사람들 들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만난 자를 살리는 자비를 베푼 것은(율법의 대강령을 실천한 것은)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율법을 지킨 의(자기 의)를 행한 것보다 더 크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심으로써 영생을 얻는 의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를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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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이수영 | 작성시간 05.07.29 원본 게시글에 꼬리말 인사를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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