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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 / 15강 요한계시록 3장 14-22절/ 일곱 번째 편지인 라오디게아교회 보낸 주님의 말씀

작성자이천우|작성시간14.12.14|조회수474 목록 댓글 0

15강 일곱 번째 편지인 라오디게아교회에 보낸 주님의 말씀

 

요한계시록 314-22/ 14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15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7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18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1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1. 라오디게아교회

 

(1) 라오디게아에 대한 설명

 

라오디게아는 빌라델비아에서 동남쪽으로 약 40마일 떨어진 리커스강 계곡에는 3개의 유명한 도시가 밀집해 있는 곳에 있었다. 강 북쪽에는 히에라폴리스(성경에는 히에라볼리 라고 되어 있다. 4:13)가 있었고, 남쪽에는 라오디게아와 골로새가 서로 약 10마일쯤 떨어져 있었다. 라오디게아는 일곱 교회들 중 가장 남쪽에 있었으며, 에베소에서는 거의 정동에 위치하고 있었다. 바클레이는 라오디게아 지역의 특징을 의류 제조업의 중심지로서 이곳에서 흔히 보는 양에서 나오는 양모는 부드럽고 검보라색이며 매끄럽기로 유명하면서 값싼 의류가 대량 생산되었다고 했다. 또한 의학적으로 상당한 지위에 있었는데, 라오디게아의 주화에는 당시 학파 중의 유명한 의사들의 이름이 나타난다고 했다. 그리고 라오디게아는 유대인 인구가 극히 많은 곳에 위치해 있다고 하였다.

 

(2) 라오디게아교회의 설립

 

라오디게아에 언제 복음의 씨가 뿌려져서 주님의 교회가 세워졌는지는 앞서의 교회에서와 같이 알 수 없다. 더욱이 사도 바울도 이쪽으로는 방문하지 않았던 것 같기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바울이 골로새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언급한 것(4:13, 15, 16)을 보아서 골로새교회에 편지를 써서 보낼 당시 이전에 이미 복음이 전파되어서 교회가 세워졌을 것으로 생각하는 데에는 아무런 이견이 없다.

 

 

2. 라오디게아교회에 나타내신 주님의 모습

 

일곱 교회에서 마지막으로 나오는 라오디게아교회에 나타내신 주님은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의 모습이었다. 여기서 주님은 세 가지 중요하고 서로 관련된 기독론적 직함들이 나온다. 아멘, 충성되고 참된 증인,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다. 주님의 이름이아멘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은 특이하다.‘아멘의 히브리어 어의는확실하고 참되다는 것이다. 주님은 종종 중요한 말씀을 시작하실 때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아멘 아멘 내가 네게 이르노니이다. 우리가 예배할 때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아멘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멘을 주님은 자신의 명칭으로 사용하셨다.

 

그런데 아멘과 비슷한 하나님의 명칭이 이사야 6516절에서 사용되었다. 거기에는엘로힘아멘엘로힘 아멘으로 합성되어 두 차례 등장한다. 개역성경을 비롯하여서 대부분의 성경은 이것을진리의 하나님이라고 번역하였다. 그런데 새영어성경의 번역은 두 단어가 결합된 뜻을 훨씬 잘 전달해 준다.“땅에서 자기 자신을 위해 복을 구하는 자는 그의 이름이 아멘이신 하나님께 구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아멘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라”(He who invokes a blessing on himself in the land shall do so by the God whose name is Amen, and he who utters an oath in the land shall do so by the God of Amen).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이처럼 아멘이라고 지칭하신 것은 아멘이 암시하는 바를 쓰셔서 그가 절대적인 진리이신 하나님 되심을 알리시기 위해서이다. 뿐만 아니라 이는 라오디게아교회를 준엄히 책망하시며 약속으로 주시는 것에 대해서 반드시 이루실 것에 대한 주님의 신실성을 미리 암시적으로 나타내 보인 것이기도 하다.

 

주님은 자신을충성되고 참되신 증인으로 묘사하여 표현하기도 하셨다. 이 복합 칭호는 아멘의 본질적인 의미를 정의하는 데 기여한다. , 아멘이라는 그의 이름의 의미와 부합하고 또 그 의미를 설명해 준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님은 자신이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라고 선언한다. 여기서근본시작을 의미한다. 이 명칭은 요한계시록 여러 곳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자기 명칭인처음과 나중과도 관련이 없지 않다. 골로새서 115절에서는 자신을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고 하셨다. 이는 모든 창조물이 주님에게서 나와 시작된 것임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창조물과의 관계를 누가 먼저이며 나중이냐는 선후(先後) 관계를 말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모든 창조물을 다스리시는 절대자이심을 말하고자 하는데 있을 것이다(1:1, 3; 1:16-18).

 

주께서 자신을 이러한 표현에 의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라오디게아교회에 주신 책망과 관련해서, 그리고 라오디게아교회에 주신 약속과 관련하여 그 책망과 약속에서 하신 주님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에서 하신 말씀이다.

 

 

3.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책망

 

라오디게아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칭찬 없이 시종일관 준엄한 책망을 받았다. 주님은 그의 행위를 안다고 하면서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으며 미지근한 것을 책망하셨다. 그리고 주님은 이런 그를 몹시도 역겨워하면서 입에서 토하여 내치겠다고까지 말씀하셨다. 여기서 찬 물과 더운 물, 그리고 미지근한 물은 골로새의 맑고 차가운 물과 히에라볼리의 뜨거운 약수 광천물과 대조되는 미지근한 상수도 급수에서 나온 물의 은유에 의한 대조이다. 라오디게아에는 수도관의 유적들이 남아 있는데, 아마 이 수도관은 남쪽으로 5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뜨거운 광천에서 물을 끌어왔을 것이다. 그리고 이 물은 서서히 식어서 최종적으로 라오디게아에 도착했을 때는 미지근하고 구역질하는 물이 되었을 것이다. 뜨거운 광천수가 식어 미지근해지면 이 물이 포함한 화합물질로 인하여 맛과 냄새가 고약해서 마실 때 구역질이 나는 것이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교회에서 이런 토함을 느끼셨다. 그러므로 주님은 차든지, 아니면 덥든지 할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면, 라오디게아교회가 이처럼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미지근하여 있는 원인은 무엇인가? 이를 17절에서 말해준다.“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주님의 이 말씀은 에브라임의 교만을 생각나게 한다.“, 나는 실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 무릇 나의 수고한 중에서 죄라 할 만한 불의를 발견할 자 없으리라”(12;8). 주님의 이 말씀을 보면, 라오디게아교회는 주님을 섬기면서도 또한 재물에 집착했던 것 같다. 이 교회를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미지근하여 토학질 할 것 같은 물로 표현한 것은, 주님께서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면서,“한편을 미워하면 다른 한편은 사랑하고, 한편을 사랑하면 다른 한편은 미워해야 한다고 하신 말씀에서 잘 알 수 있다(6:24). 라오디게아교회는 그럼에도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고자 하였다. 하나님을 통해서 하늘의 영생도 얻고자 하면서도 또한 재물을 통해서는 지상에서 부요를 누리며 이를 자랑하고자 하였다. 라오디게아교회는 주님을 믿는 생활을 하면서도 결코 재물을 부인하지를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재물을 자랑스러워했다. 이는 그 재물을 하나님이 자신들을 축복해서 주신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아마도 오늘날에 전형적으로 보는 기복신앙이 아닌가 생각된다. 재물을 많이 소유하여 부요한 것을 주님을 잘 믿는 신앙인양 여겼으리라. 그러므로 그들은 나는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하였다.

 

이런 교만에 빠진 라오디게아교회에 주님은 그들의 실상을 알게 해 준다. 라오디게아교회는 불쌍하고 비참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 실상은 전혀 부요하지도 않았고, 아무 것도 부족하지 않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그들은 안전하고 위협적인 것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였으나, 사실은 그들의 상태야말로 가장 위험한 처지였다.

 

그러므로 주님은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고 권면하셨다.‘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는 실상은 가난한 자에게 부요로 부요해 있으라는 역설적인 표현으로, 그들이 부요의 소유물로 삼고 있는 것인 불로 제련된 순금을 주님에게서 사서 부요하여 있으라는 것이다. 이는돈없이 값없이 와서 사라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55:1)이나,“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22:17)는 초대와 일맥상통한다. 결국 주님이 하시고자 하는 말씀의 의미는 주님을 소유함으로 부요한 자가 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만이 참다운 부자이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주님은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권면하셨다. 이 역시 라오디게아교회가 이곳에서 생산되는 훌륭한 옷으로 자신의 몸을 치장하는 것을 들어서 실상은 그들이 벌거벗은 자이므로 주님에게서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는 것이다. 주님으로 옷 입는 것에서 참된 순결과 단정함이 있다. 그 옷은어린양의 피에 구속함을 입은 것이기 때문이다(7:14).

 

또한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권면하셨다. 라오디게아교회는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으나, 이를 보지 못하는 상태이기에, 당시에 이곳에서 의술의 발달에 의해서 사용되고 있는 자랑하는 안약을 들어서 자신들의 몸을 분명하게 똑똑하게 볼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사람이 벌거벗은 수치스런 존재인 것은 주님이 그 눈을 뜨게 해 줌으로써만 비로소 안다. 그러므로 바울은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를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1:17-18)고 기도하였다.

 

주님은 이런 권면에서 자신이 라오디게아교회와 어떤 관계인지를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라오디게아교회가 사생자가 아닌아들의 관계라는 것이다(12:5-13). 그러므로 주님은 라오디게아교회를 책망하신다. 아버지의 사랑을 입는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책망하여 징계를 나타내셨는데, 이를 주님은 멈추지 않고 하신다. 주님이 책망하시는 징계는 라오디게아교회가 주님을 그 마음에 품고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해하며 믿고 따를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열심을 내라, 회개하라에서의 열심을 내라는 것은 네가 차든지 덥든지 하라는 것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다. , 미지근한 상태를 이제는 그치고 광천수가 뜨겁게 끓어 솟아오르는 것처럼 주님께 열정적이 되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15, 16절의덥다/뜨겁다’(hot)는  19절에서의열심을 내라’(끓는다’)는 뜻을 갖는다. 그리고 회개하라는 것은 아직은 라오디게아교회가 그들이 두 마음을 품어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었던 것에서 돌이켜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둘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있기 때문에(딤전 6:17), 그들이 궤도 수정하기에 아직도 늦지 않았다는 것을 충고하는 것이다. 주님은 자기의 택한 모든 백성들이 회개하기를 오래 참음으로 기다리신다(벧후 3:9, 15).

 

 

4. 라오디게아교회에 주신 약속

 

라오디게아교회에 자신을 나타내신 주님은 이 교회에 주시는 약속으로 일곱 교회에 하신 모든 말씀을 끝맺는다.“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기서 주님이 문 밖에 서서 두드리는 모습은 그 음성을 듣고 문을 여는 자에게로 들어가 유월절 만찬에서 제자들과 함께 하셨듯이 그와 함께 먹고 그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함께 먹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주님이 문을 두드리신다는 표현은 아가서의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을 열어다고”(5:2-6) 한 것에서 보듯이, 지금 연인이신 주께서 사랑하는 자인 라오디게아교회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서 계신 것이다. 우리가 문을 연다는 것은 들어오고자 하시는 주님에게 응하는 것이고, 그래서 주님이 들어오시는 것은 주님이 우리와 그리고 우리가 주님과 거처를 함께 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께서는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그는 내 말을 지킬 것이요, 내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리니, 우리가 그에게로 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14:23)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거처는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거처가 될 것이며, 우리의 소유라고 생각하던 소유권이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소유권이 될 것이다. 그래서 사실은 주님이 우리의 진정한 주인으로 판명될 것이다.

 

주님이 이렇게 문을 두드려 문을 열어주는 자에게 들어가 그를 거처 삼고자 하시는 것은 그에게 바라시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라오디게아교회가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순종하여 이기는 자가 되게 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님을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히신 것과 같이 주님도 자신의 보좌에 그를 앉게 해 주기 위해서이다. 이 약속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얻게 되는 지위의 실재에 근거한 것이다. 이 약속은 성육신 하신 아들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뛰어난 영광의 자리에 높임을 받으셔서 지금은 하늘의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는 점에서 현재 실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우리를 그와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1:20, 2:6). 이런 까닭에 우리는 현재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하고 있는 실재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미 지금 영화롭게 되었다. 그러면서 주님의 약속은 이러한 실재에 미래적인 차원도 있음을 암시한다. 이에 따른이미아직의 차이는 단지 우리 몸이 부활을 기다리는 것에 있을 뿐이다. 이기는 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보좌와 다스림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은, 그의 백성들의 무리에 속하는 것(1:6, 5:10),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것(2:26)과 같은 약속이다.

 

 

5.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들음에 있는 교회

 

13.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라오디게아교회에는 앞서의 교회에서와 같이 그 이름이 하늘에 있을 것에서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하는 말씀이 주어진다. 교회에 약속된 복에 의해서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있으며,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들음에 있는 교회이다.

 

 

6. 결론

 

요한계시록 2장의 에베소교회, 서머나교회, 버가모교회, 두아디라교회 네 교회에 이어서 3장에서는 사데교회, 빌라델비아교회, 라오디게아교회 세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의 말씀을 다룸으로 일곱 교회 모두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이 알게 해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았다. 그것은 생명의 약속에서 다루어지고 있듯이 그리스도는 교회의가 되시기 때문에 그를 따르는 교회는 반드시 그리스도께서 이기신 죽음을 또한 이긴 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자신들이 섬겨 따르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로서 온 세상에 있는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주님이심을 믿는 믿음에 굳게 서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자로 있다. 세상이 이런 자들을 감당치 못할 것이니, 세상은 이들의 믿음을 결코 이기지 못한다.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루고 있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크나큰 위로와 힘이 되며 용기의 북돋움에 있어 주 안에서 서로를 격려하며 자신들을 위하여 준비된 소망을 향하여 참음으로 견뎌 나감으로 마침내 그들에게 주시는 구원에 있게 한다. 그리스도께서 일곱 교회에 편지를 써 보내게 한 이유요 목적이 여기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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