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창조 :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사상
(요한계시록 21장-22장 5절의 해석을 통해서 본 새하늘과 새땅 이해)
요한계시록 21장 1-22장 5절 / 21:1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5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6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7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8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9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10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11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12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13동쪽에 세 문, 북쪽에 세 문, 남쪽에 세 문, 서쪽에 세 문이니 14그 성의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15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측량하려고 금 갈대 자를 가졌더라 16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가 같은지라 그 갈대 자로 그 성을 측량하니 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더라 17그 성곽을 측량하매 백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측량 곧 천사의 측량이라 18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19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20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수정이라 21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각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22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3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24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25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26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27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22:1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3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4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5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Ⅰ. 서론
구약성경 및 신약성경의 총체적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성경은 그 시작인 창조 사역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시는 것에서 시작하고 창조 사역의 완성인 새창조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끝마친다. 성경이 이러하기에 하나님의 나라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며, 이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 많은 연구가 있어 왔다. 하나님의 나라에 갖는 이해는 이러한 노력에 의해 체계적으로 잘 정리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어떤 내용에서는 더욱 지속적인 연구의 필요성을 갖는 분야가 있다. 여기에 해당되는 것으로는 창조 사역의 완성으로서 말하는 새창조에 의한 하나님의 나라는 어떨 것인지에 대한 연구를 들 수 있다.
요한계시록은 21-22장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 새 하늘과 새 땅, 곧 새 예루살렘으로 말씀하시고 있는 새 창조에 대하여 예언 계시를 주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총 22장으로 되어 있는데, ①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1장) ②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2-3장) ③하늘의 성전 환상(4-5장) ④일곱 심판 시리즈(6-16장) ⑤바벨론의 멸망과 최후의 심판(17-20장) ⑥새 창조와 새 예루살렘(21장-22장 5절) ⑦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계시(22장 6-21절)의 구조를 통해서 부활을 통해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함께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시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신원하는 소리의 응답으로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과 함께 교회의 구원을 보살펴 나가실 것을 알려 주신다.
이 중에서 새 하늘과 새 땅, 곧 새 예루살렘으로 말씀해 주시는 새 창조는 요한계시록의 일곱 심판이 가져다주는 교회의 완성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장차 있게 될 일인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된 우리가 영원히 거주하여 살 하나님의 나라는 어떠한 과정으로 있게 되는 것이며, 그 나라의 모습은 어떤 상태로 있는 것인지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으로 본다.
그런 까닭에 요한계시록 21-22장을 본 글의 주요 본문으로 삼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말하고자 하는 ‘새 창조의 하나님 나라’를 기술하고자 한다. 이때 먼저 교회 역사 속에서 이 분야에 있어온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견해를 밝힌 후, 이어서 요한계시록 21-22장의 해석을 갖고, ‘새 창조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최종적인 견해를 밝히는 것으로 본 글을 끝낼 것이다.
Ⅱ. 본론
1. 요한이 본 새 하늘과 새 땅
요한은 환상 계시를 통해“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다.”(계 21:1a) 라고 말한다. 요한이 본 새 하늘과 새 땅의 세계는 이전에 있던 처음 하늘과 처음 땅, 그리고 바다가 있던 세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요한이 본 새 하늘과 새 땅은“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 한 것 같았다.”(계 21:1b). 요한은 그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면서 구약성경에 기록된 이사야 선지자에게 주신 말씀의 내용을 기억했을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구약 시대의 이사야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그가 받은 계시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요한이 본 바인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어린이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세에 죽는 자를 젊은이라 하겠고 백세가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자이리라(사 65:17-20).
구약시대에서 예루살렘 성전은 종국에 있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의 표상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성전을 통해 지상에서 사람들이 경험한 세계와는 전혀 다른 것을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누릴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다. 그런데 이 새 하늘과 새 땅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실 하나님의 날이 있을 것을 이야기 하면서 그에 대한 소망 중에 있으면서 믿음에 굳게 있을 것을 신약성경에서도 말씀해 주시는 것을 사도 베드로가 쓴 두 번째 서신을 통해서 본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벧후 3:10-14)
이사야서에서의 예언과 베드로후서에서의 권면은 선지자의 예언에 의해 종말적 관점에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주의 날’, 그리고‘하나님의 날’로 불려지는 ‘그 날’에 의해서 반드시 있을 것임을 말해 주고 있다. ‘그 날’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음으로 인해서 환란을 겪으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약속이므로 반드시 있을 일이다.
2. 유대인에게 깊이 뿌리내려 있는 새 하늘과 새 땅 사상
요한이 본 바인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새 하늘과 새 땅은 유대인들을 그 예언이 성취될 것의 소망에 있게 하였다. 그에 따라서 유대인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그 날을 기다려 왔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만드실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해 언급하였는데, 그곳에서는 사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하나의 계속된 경배가 될 것이다(사 66:22-23). 이 개념은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중간기에도 매우 강하여 유대문헌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이에 대해 윌리암 바클레이(Willam Barclay)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내가 하늘을 변화시켜 영원한 축복과 빛이 되게 하리라.”(에녹서 45:4)는 것이다. 새로운 창조가 완성될 것인데 그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다(에녹서 72:1). 첫째 하늘은 떠나 지나고 새 하늘이 나타난다. 하늘의 빛은 일곱 배나 밝을 것이며, 그 새로 창조된 것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에녹서 91:16). 능력자가 천지를 흔들어 새 것을 만들 것이다(바룩 2서 32:6).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조물을 새롭게 하실 것이다(에스라 4서 7:75).
3.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개혁파 교회(개혁주의 신학)의 관점 : 새 창조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제견(諸見)
그런데 요한이 본 바인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는 방식과 관련해서 몇 가지의 견해가 있다. 요한계시록 21-22장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 곧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새 창조’로 있는 것이라는 이해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이견이 없다. 그러나 이 새 창조의 개념 및 성격에 대해서는 크게 셋으로 나누어지고 있다. 하나는, 재창조로서의 새 창조이다. 다른 하나는 갱신으로서의 새 창조 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재창조와 갱신의 개념을 병행적으로 가져나가는 새 창조 이다.
(1) 우주의 재창조로서의 새 창조
새 하늘과 새 땅을 재창조로서의 새 창조의 개념으로 말하는 것은 새 하늘과 새 땅 이전의 것인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없어지고 하나님의 어린양에 의해서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 살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을 다시 창조하여 주신다는 견해에서 이전에 존재했던 우주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우주를 창조하실 것을 주장하는 것에서 이다. 이것은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진다는 것에서 ‘소멸설’로 불려진다.
이것은 루터교 신학자들이 주장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들은 옛 것과 새 것은 전혀 관계가 없다고 주장한다. 즉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은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존재했던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완전히 소멸되고, 이 처음 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하늘과 땅이 주어지는 것에서‘소멸설’을 주장한다. 이들은 성경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문자 그대로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은 완전히 사라져 버릴 것이며, 그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완전한 새 하늘과 새 땅이 내려 올 것을 주장한다. 따라서 새 하늘과 새 땅은 이전에 존재하던 처음 하늘과 처음 땅과는 연속성이 없다. 이러한 루터교의 새 하늘과 새 땅은 재창조에 의한 새 창조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불려지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새 창조에 의해서 새롭게 등장하는 세계이다.1)
(2) 현 우주의 영광스러운 갱신으로서의 새 창조
윌리암 헨드릭슨(William Hendriksen)은 그리스도의 재림 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늘과 땅이 모두 순간적으로 사람들이 하나도 살지 않게 될 때 - 그리스도와 그의 천사들은 구속함을 입은 자들의 영혼들과 함께 하늘에서부터 내려옴, 곧 이어서 신자들이 땅에서부터 공중에 계신 주님을 맞으러 올라가며, 불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심판의 보좌 앞으로 쫓겨 올 것이므로 - 우주는 영광스러운 변혁의 과정을 겪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옛‘하늘과 땅’에서 새‘하늘과 땅’이 나올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들이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계 20:11).
헨드릭슨은 옛 하늘과 옛 땅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혁(變革)될 것을 말하는 것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가 다시 있을 것이란 갱신을 말하는 새 창조를 말한다. 그에게서 갱신으로서의 새 창조는 베드로후서 3장 13절과 요한계시록 21장 1-5절에 근거하고 있는 것으로,2) 지금 있는 하늘과 땅은 불에 타 없어짐으로써 전 우주로부터 모든 죄의 오점들과 모든 저주의 자취가 사라질 것이나 우주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처음 하늘이 있었고 처음 땅이 있었던 것처럼 똑같은 하늘과 땅이 있을 것인데 영광스럽게 새로워진 것으로 나타날 것에서 이다.
헨드릭슨이 이처럼 갱신에 의한 새 창조를 말하는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있게 되는 것이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없어져 다시 있지 않게 되는데, 이는 만물이 새롭게 되는 것에 의해서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만물이 새롭게 되는 것은 온 우주가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서 처음의 성질이 없어지고 - 저주가 제거되고 - 새로운 성질로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한 까닭이다.3)
이 갱신설은 여러 학자들에 의해서 지지되고 있다. 존 머레이(John Murray, 1898-1975)도 이 갱신설을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이 세대를 마감하고 올 세대의 도래를 알리는 사건이며, 구속의 전 과정을 완성하는 행위이며,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고, 현존하는 질서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대치될 우주적 혁신(革新)을 알리는 사건이다.
갱신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이 외에도 필립 E. 휴즈(Philip Edgcumbe Hughes),4) 안토니 A. 후크마(Anthony A. Hoekema)5) 등이 있다.
(3) 갱신에 의한 재창조로서의 새 창조
위 두 견해에서 어느 것이 보다 더 성경의 관점에 의한 것인가? 재창조로서의 새 창조인가? 아니면 갱신으로서의 새 창조인가? 데이비드 E. 아우내(David E. Aune)는 이 둘 모두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에서 새 창조를 말한다. 그는 유대교 묵시론적 문헌에는 재창조와 갱신이 구분 없이 병행적으로 사용되어온 것을 말하면서, 요한계시록 21장 5절인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를 이사야 41장 19절의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에 대한 간접 인용이라고 보면서, 세계의 재창조, 또는 우주적 갱신이라는 묵시론적 개념으로 이해하며, 이러한 사상은 인간에게도‘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로 적용되었다고 보았다.
아우내가 이처럼 재창조와 갱신을 구분 없이 병행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갱신으로 인한 질적 변화가 갖는 새로움을 하나님의 재창조 사역으로 보고 있는 때문일 것이다. 즉 재창조와 갱신의 개념을 같이 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재창조란 말을 사용하지 않고 갱신이란 말을 사용하는 학자들도 공통적으로 갖는 인식이다. 그럼에도 갱신으로서의 재창조에 의한 새 창조 사역과 재창조로서의 새 창조 사역은 분명히 엄연히 다르다. 전자는 현 우주의 혁신으로서의 재창조를 말하는 것이나, 후자는 그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우주 세계의 창조이다. 그리고 갱신의 사역에서 재창조를 말하는 것은 갱신함으로써 우주가 본질적으로의 변화를 새롭게 가져오게 하시는 것을 재창조의 개념을 갖는 것에서 이다. 재창조하심으로써 갱신을 생각하는 것은 재창조 사역이 이전 것(세상/우주)과는 전혀 다른 또 다른 것이 아닌 이전과 같은 것(세상/우주)의 형태를 띠되 이전 것과는 다른 본질인 새로운 것으로 창조하시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까닭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재창조로서의 새 창조는 A¹-A²이나, 갱신으로서의 새 창조는 A-A'이고, 재창조로서의 갱신, 또는 갱신으로서의 재창조에 의한 새 창조는 A¹-A²=A-A' 또는 A-A'=A¹-A² 이다. 반면에 여호와의 증인에서 말하는 천국은 여호와의 증인 중에서 144,000명에 해당되는 무리들이 들어가는 천상세계의 천국과 남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머무는 지상낙원의 천국으로 분류하면서 갖는 천국관으로, 이때 지상낙원의 천국은 A-A이다. 하나님께서 지구를 만드시고 그곳의 에덴동산(A)을 창설하셨으나, 실낙원(A ̄)이 된 낙원을 복원시킨 회복낙원(A)의 개념을 갖기 때문이다. 이중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천국관은 개혁주의 천국관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논의에 제외한다.
(4)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그 완성으로서의 새 창조
여호와의 증인의 천국관, 그리고 이와 같거나 유사한 천국관을 제외한 개혁주의 천국관으로 말해지는 위의 모든 견해는 광의적으로는 온 우주의 재창조, 또는 갱신이 행해져 새 하늘과 새 땅의 세계인 신천신지가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재창조와 갱신, 이 중에서 어느 것이 옳은 주장의 견해에 있는 것인가? 또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이 둘이 병합된 것이 옳은가? 루이스 뻘콥(Louis Berkhof)은 신자들의 마지막 상태가 있기 이전에 현 세계가 없어지고 새로운 창조가 나타나는 일이 있게 될 것이라면서, 마태복음 19장 28절6)에서의 “세상이 새롭게 되는 것”, 사도행전 3장 21절7)에서의 “만물을 회복하실 것”, 히브리서 12장 27절7)에서의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실 것”, 베드로후서 3장 12-13절8)에서의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질 것이나 새 하늘과 새 땅이 약속된 것”을 들며, 요한이 환상 중에 이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는데(계 21:1) 그가 본 새 하늘과 새 땅이 설립된 이후에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올 것이며,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 가운데 있을 것이며, 의인들이 그들의 영원한 희락에 들어갈 것인데, 이것이 전적으로 신창조물일 것인지 아니면 현재 창조물의 갱신인지에는 의문이 제기된다고 보았다. 이는 루터파 신학자들은 베드로후서 3장 7-13절, 요한계시록 20장 11절, 21장 1절에 근거해서 신창조물, 즉 재창조에 의한 새 창조를 말하나, 개혁파 신학자들은 시편 102편 26-27절, 히브리서 1장 10-12절, 12장 26-28절에 근거해서 갱신에 의한 새 창조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에게서는 그가 재창조로서의 새 창조의 견해에 있는지 또는 갱신으로서의 새 창조의 견해에 있는지를 알 수가 없다. 그는 다만 두 견해를 소개하며, 이 중에서 어떤 것의 견해에 있든지 간에 신자들의 마지막 상태가 있기 이전에 현 세계가 없어지고 새로운 창조가 나타나는 일이 있게 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재창조설이든, 갱신설이든 그 어느 쪽이든지 간에 그것이 온 우주에 일어나는 새 창조에서 보는 것이라면 이는 협의적으로는 지구상에서의 신천신지를 말하는 것으로 잘못된 주장이다.9) 재창조로서의 새 창조이든, 또는 갱신으로서의 새 창조이든, 나아가서는 이 둘이 병행되는 것에서의 새 창조이든,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이 세상이 존재하는 온 우주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인 한에는 분명히 그렇다.
이 세상은 심판의 대상으로서 요한이 말한 바인,“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 21:1b)에 있게 될 것이다. 이는“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다.”에 있기 때문이다(계 21:1a). 요한이 보고 있는 것은“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계 21:2a)인데, 그 모습이 마치 신랑을 맞을 신부가 단장한 것 같았다(계 21:2b). 요한이 이렇게 본 새 하늘과 새 땅은 이전 것인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지고 새로운 것으로서의 하늘과 땅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땅 또는 온 우주의 갱신이란 개념이 전혀 없다. 따라서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갱신되어서 새롭게 된 것이 아니다. 즉, 갱신되어서 새로운 것이 아니라, 처음 하늘과 처음 땅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것으로서의 하늘과 땅이 하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새 하늘과 새 땅이다. 그러므로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는 이것은 세상 마지막 날로 말해지는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재창조 사역으로 이해한다. 즉 재창조로서의 새 창조인 것이다. 요한계시록 22장 1-5절의 묘사를 학자들은 상실한 에덴인 실낙원의 회복으로 보면서 지구상의 회복, 또는 온 우주의 회복의 관점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해하려고 하지만, 새 하늘과 새 땅을 천상의 에덴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서 이러한 묘사를 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시고 있는 바는 보좌에 앉으신 어린양 구속주께서 생명수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주시고자 하는데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다음의 말씀을 확증한다.“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계 2:7)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한 생명에 있는 것은 생명의 근원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생명의 공급에 의해서이다.
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세계인 하나님의 나라는 창세 전에서 보는 영원 전부터 존재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시작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구성하는 백성들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실 구원의 계획에 의해서 나타내셨다. 그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창조를 통해서 계시되었으나, 사람의 타락으로 묵시의 성격을 띤 은닉된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에 있어왔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의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에 도래하였으며 계시된 하나님의 나라로 있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의 재림에 의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새 창조의 성격을 띠고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존재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있어온 하나님의 자녀 된 자요 하나님의 백성 된 자들이 주와 함께 그분의 나라에서 영생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새 하늘과 새 땅의 성격인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없었던 세계가 하나님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존재해온 하나님의 나라가 처음 하늘과 처음 땅에 있었던 우리에게서 이전 것은 없게 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주어지는 것이다.10) 이는 우리의 부활과도 관련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처음 몸은 없애시고 하늘로부터 오는 새로운 몸을 입은 새사람이 되게 하심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의 세계인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가 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세계인 하나님의 나라를 천상의 나라와 구별되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하나님이 계시는 원래의 천상의 나라는 영원 전부터 존재하는 영역으로서 사람의 일반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피조세계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곳으로 영원 전부터 존재해 온 하나님의 고유한 영역이지만, 이에 비해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영원한 피조세계로서, 하나님께서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을 창조하셨듯이 완벽하게 지으신 새로운 영역이요, 처음의 우주 만물을 하나님께서 친히 창조하셨듯이 구속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다시 새로운 창조를 하신 것이라는 이해를 갖는다. 이에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천상의 보좌 가까이에서 영원토록 사는 것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된다고 본다. 그래서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천상의 나라와 새 하늘과 새 땅은 따로 분리된 영역으로, 하나님께서 처음 세상에서 아담을 위해 에덴동산을 거처로 정해 주셨던 사실과 동일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것을 오늘날 하나님께서 천상의 보좌에 거하시면서 동시에 지상 교회 가운데 거하고 계시는 것과 동일하다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천상의 나라에 계시면서 타락한 세상을 심판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신 후, 그 안에 거하시면서 새 예루살렘인 자기 백성들을 영원토록 통치하시면서 찬송과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라고 본다.
이 견해는 온 우주의 재창조 또는 갱신을 말하는 것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의 새 창조를 주장하는 것과는 다른 처음 하늘과 처음 땅과는 전혀 완전히 다른 새로운 하늘과 땅의 창조인 새 창조를 말하는 것으로 필자의 견해와 같다. 그러면서도 필자와의 견해에 차이를 갖는다. 필자는 천상의 나라와 새 하늘과 새 땅의 세계의 영역을 구분하지 않는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새 예루살렘으로도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은 임마누엘로 말해지는 하나님의 장막[성막/성전] 사상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백성들이 거주할 영원한 도성[집]이 되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은 그 도성의 성벽을 이루는 돌 하나하나가 된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에는 영역의 구분이 없다. 새 예루살렘에서 성전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은 그 도성 안 어디에서든지 전능하신 주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예배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영광이 온 도성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계 21:9-27). 새 하늘과 새 땅이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과 어린양이 계신 보좌가 있고 그 보좌에 앉으신 분께 예배를 드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말해지는 것에서 구분은 있겠지만, 이것은 새 예루살렘이라고 불리는 도성 안에서 있는 광경으로 따로 영역이 구분되는 것에서는 아니다.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주신 환상에 의한 천상 계시에서 새 하늘과 새 땅, 곧 새 예루살렘이 새 창조인 것은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을 만들어 창조하셨듯이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으로서의 세계를 하나님께서 다시 만들어 새로 주셨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와 함께 그분의 나라에 있게 하시는 것이 처음 하늘과 처음 땅에서는 있을 수 없는 것이 일어나는 것에서 이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물리적인 세계의 나라로서 육에 있는 자들이 거주한다. 그러나 이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없어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주어지는 창조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과는 전혀 다르게 새로운 것인 영의 세계의 나라로서 더욱 좋은 것이 주어지는 개념에서‘새’창조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나라에 우리를 있게 하시는 것이 그렇다. 영의 사람으로서 영이신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게 한 이 새로운 나라가 주어진 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이요 새 예루살렘의 창조인 새 창조이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표현하여 묘사하면 Aº-Aº'라고 할 것이다. 옛(처음) 하늘과 옛(처음) 땅과는 완전히 전혀 다른 새 하늘과 새 땅이 주어지는 것인데 이것은 창세 전의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를 믿는 모든 자들, 곧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 세상과는 전연 다른 영원히 새로운 나라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4. 요한계시록 21장-22장 5절의 해석을 통해서 본 새 하늘과 새 땅 이해
요한계시록 21장-22장 5절은 (1) 새 창조 : 새 하늘과 새 땅(21:1-8) (2) 새 예루살렘(21:9-22:5)의 둘로 나누어져 있다.
(1) 새 창조 : 새 하늘과 새 땅(21:1-8)
요한계시록 21:1-8은 새 창조인 새 하늘과 새 땅의 기사이다. 요한은 이제 하나님의 평화와 의의 통치의 영원한 날이 동터오는 환상을 본다. 심판은 지나갔고, 세상은 정결하게 되었으며, 만국에 기쁨과 조화가 편만해 있다.
그런데 1절에서 요한이 본 새 하늘과 새 땅의 의미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또 내가 보매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이 구절은 요한이 환상의 도입 문구인 ‘또 내가 보니’를 사용해서, 이사야 65장 17절에 나오는 여호와의 예언인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를 환상 이야기로 변화시켰다.
요한이 본 요한계시록 21:1-8의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는 관점으로는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베드로후서 3:10-13과 관련해서 ‘갱신’(renewal)이 아닌 ‘재창조’(regeneration)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다.11) 여기에서 우주의 ‘재창조’는 현존하는 우주 만물이 완전히 파괴되어 무(無)의 상태로 돌아간 후, 다시 창조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재창조’가 아닌‘갱신’의 의미로 보는 것이다. ‘갱신’은 현존하는 우주 만물을 없애지 않고 하나님의 신비스런 방법으로 새롭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재창조설과 갱신설을 병합한 갱신에 재창조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본문이 과연 ‘재창조’와 ‘갱신’중에서, 또는 재창조와 갱신을 병합한 견해 중에서 어느 것을 말하는지를 진지하게 물을 필요가 있다. 이것들 중에서 어느 것을 취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그리스도인들의 세계관과 우주관은 판이하게 달라지기 때문에 본문이 말하고 있는 바를 밝혀내는 것이 중요하다.
21장 1절을 보면 요한은,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라고 말하여 이전 하늘과 땅은 없어지고 새로운 것으로서의 하늘과 땅을 본 것으로 말한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새’란 단어는 종별상(種別上) 혹은 품질상(品質上)의 새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없어졌고’는 ‘사라지고’, ‘사라져 버리고’로의 번역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새 것이 옴으로써 옛 것은 사라진다. 그러므로 뉴웰(Newell)은 이것을 신창조의 천지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 구절만 보면 재창조로서의 새 것인 새 창조의 개념을 갖는다.
그러나 박윤선은 이것이 우주의 구재료(舊材料)들을 버리고 아무 것도 없는 데서 만물을 새로이 지으셨다는 의미라고 생각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필찬은 5절에서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라고 말하여서 이전 하늘과 땅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질의 변형을 말하여 갱신의 개념을 갖는 것이라고 보았다. 박윤선은 “하늘과 옛 땅은 없어지고(20:11), 아주 딴 종류의 천지가 생겨났다고 할 만큼, 그것들(옛 천지)은 심각한 변화를 받았다. 베드로후서 3장 10-12절을 보면,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라고 하였는데, 이는 천지의 물질이 근본적으로 변화됨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세계는 옛 세계 실체의 연속이면서도 아주 딴 종류의 것이라고 할만하다”라고 말하였다. 따라서 새 하늘과 새 땅이 말하는 새 창조의 개념은 재창조나 갱신 그 어느 하나의 개념으로서가 아닌 이 둘의 의미가 다 포함된 것으로서 옛 것이 아닌 그보다 더욱더 나은 것이며 또한 전혀 새로운 것으로서의 세계라고 본 것이다.
이필찬은 1절에서는 재창조를 말하고 있으면서, 또한 5절에서는 갱신으로 말함으로써 마치 모순된 듯한 두 구절을 설명하기를, “1절을 기준으로 5절을 설명하는 것보다는 5절을 근거로 1절을 설명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왜냐하면 1절은 의미가 확정적인 5절에 비해 의미가 훨씬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5절로 1절을 설명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새롭게 하신 그 정도가 완전하고 완벽해서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져 버린 것과 같은 모습을 띠는 것이다. 5절에 의하면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그대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러한 존재는 하나님의 완전성에 근거해서 완전하게 새롭게 하심을 경험함으로써 사라져 버린 것과 같은 모습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이필찬은 박윤선처럼 갱신의 의미에서 재창조를 보는 것이다. 단지 재창조이냐 아니면 갱신이냐 하는 것 만으로의 논쟁은 지루한 싸움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반면에 박윤선과 이필찬의 견해는 갱신을 분명히 하면서 이는 재창조로 오는 것임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지며, 이를 새 창조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와는 다른 견해를 갖는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부활의 영광에 있는 인간의 존재와 관련해서 볼 때도 그렇다. 성경은 인간을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된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다시 사는 것으로 우리가 겪을 부활을 말하는데, 이것이 사람인 몸의 실존은 그대로 있는데 다만 그의 변형(변화)에 의해서 육의 몸이 아닌 신령한 몸(영의 몸)이 있게 하는 것에서가 아닌 전혀 다른 새로운 것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다. 이는 씨앗과 이 씨앗에서 나오는 새싹은 처음에 뿌린 씨앗과는 전혀 다른 별개인 것과 같다. 우리 육체의 부활이 이와 같다. 그래서 죽으면 썩어질 우리의 땅 위의 몸도 다시 살아날 때에는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날 것인데 처음 것의 몸과 나중 것의 몸은 전혀 다른 별개의 몸인 것이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몸은 병들며 죽음을 당하는 몸이지만 다시 살아날 때에는 영광에 가득 찬 몸이 될 것이요, 지금은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몸이지만 다시 살아날 때에는 다시는 쇠함이 없는 강한 몸이 될 것이요, 지금은 죽음을 눈 앞에 둔 인간의 몸이지만 다시 살아날 때에는 영적인 몸이 될 것으로서 처음 것의 몸과 나중 것의 몸은 전혀 다른 별개의 몸이다(고전 15:42-44). 이는 처음 우리 몸을 없애시고 하늘로부터 오는 몸으로 새로운 몸을 입게 하여 하늘의 천사와 같게 함으로 하늘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러한 부활체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의 세계에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사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세계도 그러할 것이다. 그리고 이 세계는 옛 것은 없어지고 새 것으로 오는 것이니 새 창조된 새로운 세계이다. 결국은 현 우주의 재창조이냐 아니면 갱신이냐는 논쟁은 무의미하다.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우리의 육의 몸은 이제 없고 영의 몸이 있는 부활을 겪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 세상은 이제 없고 새로운 세상이 오는 것이다. 하늘로부터 새 하늘과 새 땅, 곧 새 예루살렘으로 말해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함으로 말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이다. 이 나라에 의해서 이전 것인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다시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요한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이 새 하늘과 새 땅의 나라일 뿐이다.
요한이 주시한 환상 속에 펼쳐진 또 다른 내용은 “바다도 다시 있지 않다.”는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는데, 왜 “바다도 다시 있지 않다.”는 언급이 필요한가? 이는 요한 자신에게서는 중요한 부분이다. 바다는 요한계시록 13장에서 짐승이 나오는 악의 근원이다. 그 짐승은 바다에서 올라와 사단인 용에게 그 권세를 받아 죽은 것처럼 되었다가 기사회생하여 땅에 거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케 하여 자신을 경배하게 한 장본인이다(13:1-8). 땅으로부터 올라오는 둘째 짐승은 거짓 선지자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 둘째 짐승은 사람들에게 그 손과 이마에 첫째 짐승의 표를 받고 첫째 짐승의 형상에 절을 하도록 강요한다(13:11-17). 이처럼 바다에서 나온 첫째 짐승은 성도들의 신앙의 순수성을 위협하는 강력한 존재이다. 이러한 존재를 있게 한 바다는 새 창조에서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12)
이러한 원리를 처음 하늘과 처음 땅에도 적용할 수 있다. 사단 곧 용은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졌고(12:7-9), 둘째 짐승은 땅에서 올라왔다(13:11). 하늘과 땅과 바다는 모두 사단과 두 짐승에 의해 오염되고 더럽혀졌음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들을 불과 유황이 타는 못으로 던져짐으로써 처음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가 영원히 없어진 것과 같은 정도로 새로워져야 한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새 예루살렘의 등장이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은 것을 요한은 보았다. 그리고 요한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이 계신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 광경은 마치 결혼식에 단장한 신부가 내려오는 것 같아 아름답고도 영광스러운 것이었다.
그때 요한은 보좌에서 들려오는 큰 음성을 들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3-4절). 옛 것 곧 하늘과 땅이 없어지고, 바다도 영원히 없어진 것과 같은 정도로 새로워진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성도들에게 눈물을 흘리게 하였던 악의 근원을 파멸시킴으로써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들의 눈에 눈물이 남아 있을 이유가 없게 되었으며, 더 이상의 죽음도, 슬픔도, 애통함도, 고통도 존재할 이유가 없어져 버렸다. 그러므로 이런 것이“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라고 하였다. 현 우주의 갱신론을 말하는 자들은 그 요인을 사단과 함께 짐승의 제거로 든다. 이는 성도들에게 이러한 복된 순간을 안겨주게 될 것이다. 즉 사단과 함께 짐승이 영원히 제거됨으로써 그로 인해서 있게 되었던 모든 불행이 없어져 복을 영원히 누리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과연 사단과 짐승이 있게 되는 요인이 제거되면 현 우주는 하나님의 나라로 탈바꿈을 갖는 갱신이 되는 것인가? 요한에 의해서 계시되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은 그 출발이 처음(옛) 하늘과 처음(옛) 땅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지구요 또한 우주에 있지 않다. 요한에 의해서 계시되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은 그 출발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있다. 그리고 그 새 하늘과 새 땅은 그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말해지는 새 예루살렘으로 상징되는 교회다. 하나님은 요한계시록 21장 이전까지의 내용에서 하나님과 어린양의 인도하심을 받아 마침내 승리자로 우뚝 서는 교회의 모습을 이제 21장 1-4절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의 새 창조를 겪는 것에서 지상과 영원히 단절하시며 천상으로의 영원에 있게 하시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지상과 천상은 연속성을 띠는 것이 아니다. 지상과 천상은 불연속성의 관계다. 연속성을 띠는 것은 현 우주와 새 우주의 관계로 가져나가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그리스도 안에서’그분의 나라를 이룸에 있는 것에서 이다. 우리가 지상에 있으나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현세에서 창세전에 예비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로부터 오는 그분의 영원한 천상의 나라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5-7절에서 이 사실을 언급하는데, 보좌에 앉으신 분이 만물/교회를 새롭게 하실 것인데, 그분은 신실하고 참되신 분이요, 알파와 오메가 곧 처음과 나중으로 이제 다 이루었기 때문에 새 예루살렘으로 등장하는 승리한 자들이 4절의 상대적 개념인 생명의 샘물을 복으로 받을 것임을 말씀하셨다.“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라는 표현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임을 말해 준다.
그러나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두려워하는 자들13)과 믿지 않는 자들14)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불 못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이기는 자에 비해서 지는 자가 겪을 운명이 분명히 갈라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지는 자들이 갈 곳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이다. 이것이 무엇인지는 “둘째 사망이다.”라고 알려주었다. 여기서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 곧 불 못과 둘째 사망은 같은 개념이다. 둘째 사망은 두 번째 사망이라는 것으로, 첫째 사망은 몸이 죽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으며 둘째 사망은 영혼이 죽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예수님이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고 말씀하신 바에서 알 수 있듯이, 그리고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서 알 수 있듯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 주로 받들어 섬기지 않는 자들이 처하는 영원한 고통(eternal torment)을 의미할 것이다.
(2) 새 예루살렘(21:9-22:5)
21장 9절-22장 5절은 21장 1-8절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의 새 창조에 의해서 등장하며, 하나님이 계신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에 관한 계시이다. 이 새 예루살렘은 2절에서 마치 단장한 신부와 같이 묘사되었었다. 곧 그리스도의 신부에 관한 묘사인데, 본문에서 그 그리스도의 신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9절은 마지막 일곱 재앙이 담긴 대접을 쏟았던 일곱 천사 가운데 하나가 와서 요한에게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나서 그 천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요한을 이끌고 높은 산꼭대기로 올라가 거기서 아름다운 성 거룩한 예루살렘이 하나님이 계신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게 해주었다.
여기서의 마지막 일곱 재앙이 담긴 대접을 쏟았던 일곱 천사 가운데 하나는 17장 1절에서 언급된 천사 곧, 요한에게 말하고 큰 음녀의 심판을 그에게 보여준 천사와 동일한 천사인가에 관해서는 이견이 있다. 그것은 이 천사가 17장 1절에서 언급된 천사와 동일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저자가 그러한 연결 관계를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에,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또 다른 천사’를 가리키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요한이 본 새 예루살렘의 광경은 21장 2절에서는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은 아름답고도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예비 신부의 모습이었는데, 9절에서는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로 표현하여 묘사되고 있다. 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교회 외에 다른 것을 의미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신부는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가리킨다. 우리 모두는 어린양의 신부이다.
그러면 왜 이처럼 그리스도의 교회를 ‘어린양의 아내인 신부’로 묘사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묘사하기 위하여 이 장면에서 분명히 나타내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라는 우리들이 그리스도와 하나 된 몸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는 그리스도를 멸시하는 자들에게서는 현재로서는 별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늘의 혼인잔치가 벌어질 때에는 신부를 사랑하는 신랑에 의해 영광스러운 자리에 들려질 것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교회는 무한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변화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는 어린양의 아내인 교회의 미래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교회는 신랑 되신 그리스도를 향해서 소망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교회를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의 신부로 표현하는 방법은, 구약성경에서부터 잘 나타난다.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신부로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사 54:5; 호 2:19-20).
요한이 천사의 이끌림을 받아 산꼭대기에서 본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에스겔의 환상과 매우 비슷하다. 에스겔은 자신의 환상 속에서 다음과 같은 경험을 하였다. “하나님의 이상 중에 나를 데리고 그 땅 위에 이르러 나를 극히 높은 산 위에 내려놓으시는데 거기서 남으로 향하여 성읍 형상 같은 것이 있더라.”(겔 40:2). 그런가 하면, 이사야 60장에 나타나는 새 예루살렘에 관한 환상을 비롯하여서 에스겔 28장 13에 열거된 두로 왕의 보석들과 이사야 54장11절 이하에 나오는 시온을 재건할 때 쓰이는 보석, 그리고 출애굽기 28장 14절 이하에 나타나는 대제사장의 흉패에 박힌 보석 등 두루 인용되어 묘사되면서 새 예루살렘의 규모와 아름다움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다.
새 예루살렘의 요소로서 첫 번째로 언급되는 것은 성벽이다. “성벽은 그 치수가 크고 높다.”라고 묘사된다(12절). 그 높이는 144규빗이니, 약 70미터 정도 되는 높이이다. 이 치수는 실제로 크고 높은 것이지만 성의 장(길이)과 광(넓이)과 고(높이)가 12,000스타디온(1500마일)15)이라는 사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형편없이 작은 치수다.
그러면 왜 이러한 치수로 성벽의 길이를 말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먼저 성벽의 치수로서 144규빗을 사용하고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44는 7장과 14장에서 각각 사용하고 있는 숫자인 144,000(144×1000)과 같은 숫자이다. 144는 12×12로서, 열두 지파에 의한 약속으로서의 구약의 교회와 열두 사도에 의한 성취로서의 신약의 교회가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성벽을 통해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온전한 백성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리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의도는 성벽에 함께 붙어 있는 열두 기둥에 새겨진 열두 사도의 이름과 열두 진주문에 쓰여진 열두 지파의 이름을 통해서 더욱 확증되고 있다. 이러한 목적과 더불어 그 성벽이 크고 높다는 표현을 통해 성이 완전(complete)하고 완성된(finished) 것이며, 완전한 안전(security)과 장엄함(magnitude)을 갖추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이는 17절에서 성벽의 두께가 144규빗으로 묘사되고 있는 데서도 그 견고함은 더욱 확고하다.
그런데 성벽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았다. 여기서 벽옥(Jasper)으로의 장식은 종말에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스러움과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할 것을 상징한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4장 3절에서“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라고 한 것처럼 벽옥은 하나님의 모양을 나타내는데 사용된 보석이기 때문이다. 성벽의 빛은 보석처럼 빛나고 벽옥 빛만이 아니라 수정 같이 맑았다고 하였다. 이렇게 성벽의 빛이 여러 귀한 보석에 의해서 되어진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은 그의 엄위의 보좌 앉아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으로서 23절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는 말로써 설명되었다. 그 장면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광채가 나는 장면이다. 이는 18-20절에서는 더욱 극치를 보여준다. 새 예루살렘의 성은 수정처럼 맑은 정금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벽옥으로 쌓아올린 성벽은 각종 보석들이 박혀 있는 열두 기초돌 위에 세워져 있었는데 벽옥, 남보석(사파이어), 옥수, 녹보석(에메랄드), 홍마노, 홍보석(홍옥수), 황옥(감람석), 녹옥(녹주석), 담황옥(황옥), 비취옥(녹옥수), 청옥, 자정(자수정)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 많은 보석의 다양한 종류는 그 각각의 보석에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석의 전체적인 의미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그래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영광, 순결성, 아름다움 그리고 소중함을 나타내고 있다. 그럼으로써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서 사는 시민의 참된 영광을 말해 준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기 때문이다. 그 영광의 충만은 그 성이 예비 된 사람들에게만 보이며 알려진다.
그리고 새 예루살렘의 성벽은 열두 문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문을 열두 천사가 지키고 있었다. 이 열두 문에는 열두 지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그 문은 동쪽에 셋, 서쪽에 셋, 남쪽에 셋, 북쪽에 셋이 있었다. 이는 에스겔 48장 30-35절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에스겔의 환상은 각 지파가 땅을 분배할 때 자기에게 할당된 충분한 몫을 가지게 되며, 예루살렘으로 출입을 위한 각 지파 자신의 입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 전체가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에 들어갈 동등한 권리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동등한 권리에 대해 확신을 가진다. 이러한 패턴이 요한계시록에도 적용된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서의 열두 문은 미래의 새 하늘과 새 땅에 서 있는 요한의 시점에서 영광스럽고 놀라운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로 들어갈 풍성한 기회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21절에서는 열두 문이 한 개의 커다란 진주로 만들어져 있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처럼 정금으로 되어있는데, 25절에서“열두 문이 항상 열려 있다”고 묘사하고 있다는 묘사가 이러한 사실을 더욱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런데 요한이 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는 지상에서의 성 예루살렘과는 다른 특징을 22절에서 말해 준다.“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라고 말씀하여 성 안에서 성전을 볼 수가 없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왜 그와 같이 성 안에서 성전을 볼 수가 없었는지에 대한 이유도 말씀해 준다.“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라고 하나님과 어린양이신 그리스도 자신이 성전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과 그리스도 자신이 성전이시기에 성전 건물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는 성전이신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것이기 때문에 또 다른 성전 건물이 있을 까닭이 없다. 새 예루살렘이 주어지기 전의 예루살렘에서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시며 하나님의 백성과의 관계를 위하여 그 안에 성전이 있어야만 했으나, 새 예루살렘에서는 이 성의 거처가 되는 분이 하나님과 그분의 어린양이시므로 성전이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과 어린양이신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있는 새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시기 때문에 해나 달의 비췸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나님과 어린양에게서 나오는 빛은 땅 위에 있는 모든 나라를 비추는데 이 빛을 받는 새 예루살렘은 밤이 없으므로 결코 닫히는 일이 없어 종일토록 열려 있어서 역시 빛을 받는 온 세상의 임금들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와 그들이 받은 영광과 존귀는 전적으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므로 돌려드리게 되며 감사하게 된다.
그러나 속되고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들은 결코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만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간다. 이런 이유로, 요한은 22장 10-11절에서 요한이 본 것을 기록하고 그것을 봉인하지 말라고 하면서, 그 기록한 일이 실현될 때가 가까워져서 악한 일을 하는 자는 계속해서 더욱더 악한 일을 하고 더러운 자는 더욱더 더러워질 것이며, 의로운 자는 계속해서 더욱더 의로운 행동을 할 것이며 거룩한 자는 더욱더 거룩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이렇게 각 사람이 행한 그 행위가 그들을 심판할 것이어서 의롭고 거룩한 자는 새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갈 자격을 얻고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자는 복이 있을 것이나, 악하고 더러운 자는 성 밖에 있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22장 1-5절은 새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자의 복됨을 언급한다. 이 광경은 에스겔 47장의 환상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선지자에게 주신 예언이 성취된 종말론적 축복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만 에스겔이 본 것과 요한이 본 것과의 차이는 에스겔은 성전 문틈에서 스며 나온 물이 강물을 이루고 이 강물은 양쪽에 있는 나무들을 소성케 하여서 열매를 맺게 하는 복 있는 광경이나, 요한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흘러나와서 생명수가 흐르는 강을 이루고 그 강 양쪽에 열두 종류의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달마다 새 열매를 맺고 그 나뭇잎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만국을 소성케 하는 생명수가 에스겔이 본 성전에서가 아닌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본 것은 하나님과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가 생명수의 원천이시기 때문이다. 이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의 과실을 따먹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심에 따라 생명을 잃어버렸으나, 에스겔의 환상에 의해서 성전을 통해 기대되었던 만국을 소성케 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온 새 예루살렘에서 온전히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첫 창조 시에 아담과 하와를 위해 예비 되었던 생명나무는 이제 종말에 교회를 위해 예비 된 생명수 강에 의해서 만국을 소성케 함으로 그 성 안에는 이제 더 이상 저주가 없고, 하나님과 어린양의 종들이 그분께 예배를 드린다. 그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뵙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이름이 그 이마에 새겨질 것이다. 이제 그곳에는 하나님이 저희에게 빛이 되시기 때문에 밤이 없을 것이며 등불이나 햇빛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들은 거기서 세세토록 왕 노릇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보여준 환상 계시에 의한 새 하늘과 새 땅, 곧 새 예루살렘이 이렇다. 이전 것인 처음 하늘과 처음 땅에서는 결코 있지 않은 진실로 새로운 것이다.
이 모두는 새 예루살렘이 에덴동산의 회복의 개념을 띠고 있다 - 에덴동산이 회복되는 것이 아님에 유의하라 - 는 것을 말해 준다. 아담과 하와가 죄의 결과로 하나님의 저주 때문에 죽음을 형벌로 받았으며,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되었었으나 새 하늘과 새 땅의 새 예루살렘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어린양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수에 의해서 생명의 기운이 넘침에 있으며 하나님의 얼굴을 뵘에 있다. 이러한 배경으로 볼 때 새 하늘과 새 땅인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어린양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으며 하나님의 얼굴을 뵌다는 것은 하나님을 상실한 마음에 있었던 타락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회복에 있음이 가져온 극적인 반전이 아닐 수 없다. 새 창조의 주인공인 교회는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원한 나라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신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따른 에덴동산에서의 첫 창조의 목적에 대한 완전한 창조의 성취를 보여 주고 있다.
Ⅲ. 결론
요한계시록 21장-22장 5절은 새 창조의 개념을 갖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성으로 오는 새 예루살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승리한 교회로 하늘에 있게 되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묘사된다. 그리스도의 신부 된 교회는 요한이 본 하늘의 세계의 환상을 봄으로써 이미 확정된 장차 되어질 자신들의 모습을 미리 보고 있다.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는 지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며 애통과 슬픔, 그리고 죽음을 겪지만 자신들이 신원하는 소리를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신랑 되신 어린양이 들으시고 세상을 심판하시며, 교회의 생명이 되시고 영원히 대면케 하시며 함께 하신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계시록 21장-22장 5절은 비록 지상에 있을지라도 하늘에 속한 자로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호하심을 받는 종말적 축복 속에 있다는 묵시적 확증이며,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승리한 교회로 우뚝 서 창세전에 영원한 작정으로 계획하셨던 하나님 나라의 성취를 보게 하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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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루터파 교회의 새 하늘과 새 땅의 재창조에 대한 반론 : 루터파 교회의 새 하늘과 새 땅의 재창조에 의한 새 창조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완전히 소멸되어 없어지고, 이것과는 완전히 다른 새 하늘과 새 땅이 재창조 사역으로 주어지는 것에서 말해지고 있다. 이것은 현 우주가 소멸하는 대신에 이것을 대체하는 새로운 우주가 주어지는 것에서 재창조가 말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 견해가 새 하늘과 새 땅에 갖는 학자들의 주장에서 가장 성경의 관점에 근접하기는 하나, 우주의 대체에 의한 재창조가 아닌 하나님의 구속사의 경륜에 있어온 창세전의 영원부터 존재해 온 하나님의 나라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어 영원히 존재하는 것에서 육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영의 세계가 주어진 것이요, 이는 이전의 것보다 더욱더 좋은 것이 주어진 것기에 재창조, 또는 재창조로서의 새 창조의 개념을 가질 수 있다는 이해를 갖는다.
2) 베드로후서 3장 13절. “우리는 그의 약속[언약]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요한계시록 21장 1-5절.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3) 윌리암 헤드릭슨(William Hendriksen)의 견해에 대한 반론 : 사도 요한이 새 하늘과 새 땅의 환상 계시를 말해주고 있는 것에서 만물이 새롭게 됨은 온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만물을 의미하는 것에서가 아니다. 요한계시록 21장 5절에서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에 사용된 ‘만물’은 ‘모든’, ‘어떤’, ‘온’, ‘전체의’, 형용사, 또는 ‘만유’, ‘만민, ’매(일)‘, ’많은(것)을 뜻하는 형용대명사로 사용되는 ‘파스’(pa'")가 목적격과 복수형인 ‘판타’(pavnta)로 쓰이고 있는 것으로 이 단어가 지닌 뜻인 본래의 의미로 온 우주에 있는 만물을 지칭하는 것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통해서 보좌에 앉으신 어린양 구속주에 의해서 새롭게 됨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성도]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의 예는 에베소서에서도 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 20-23절에서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라고 말한다.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하늘의 기업을 잇게 하시는 능력을 알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그 능력을 행하셔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쪽에 앉히셔서 모든 정권과 권세와 능력과 주권 위에, 그리고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 불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다는 것을 말하며,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에 굴복시키시고 그분을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으니,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는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라고 하였다. 바울은 여기서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굴복하고 있는 교회요, 그리스도와 하나된 몸에 있는 교회와 동일시 하는 표현으로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 21장 5절에서의 만물이 새롭게 됨은 헨드릭슨이 말하는 온 우주의 갱신에 의한 새 창조를 말하는 것에서 말해지고 있는 구절이 아니다.
4) 필립 E. 휴즈는 갱신으로서의 새 창조를 말하나 그의 글에서는 ‘갱신’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보다는 ‘재창조’, ‘중생’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있게 하신 것을 새로운 창조, 새로운 탄생의 의미에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5) 후크마(Anthony A. Hoekema,)는 갱신설을 지지하는 이유로 네 가지를 든다.
(1) 베드로후서 3장 13절과 요한계시록 21장 1절에서 새 우주의 참신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된 헬라어 단어가 시간과 기원에서 있어서 전혀 새로운 것을 뜻하는 ‘neos’가 아니라 본성이나 질에 있어서 새롭다는 뜻인 ‘kainos’인 것에 주목한다. (2) 로마서 8장 20-21절에서 피조물이 바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인데 이는 창조세계가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에 주목한다. (3) 새 땅과 신자들의 부활한 육체(현재의 육체와 부활한 육체 사이의 연속성)를 비교해서 설명해 보면 명백해진다는 것에 주목한다. (4) 현재의 우주를 완전 소멸시킨다면, 이것은 현재의 우주와 창조질서를 치명적으로 부패시키는데 성공한 사단이 승리를 쟁취하게 되는 것이므로, 역사적으로 사단이 이러한 승리를 쟁취하지 못하고 오히려 정반대로 사단은 결정적인 패배를 맛보았는데, 그 패배의 클라이막스는 하나님께서 사단이 그토록 부패시키려고 힘썼던 그 땅을 새롭게 하시고 사단의 악한 음모의 결과들을 그 땅에서부터 완전히 제거하실 바로 그 때인 것에 주목한다.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7)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8)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9) 새 하늘과 새 땅이 현 우주의 갱신으로 있을 것이라는 사상은 ‘여호와의 증인’에서도 보는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은 최종 말에 이룩되는 하나님의 나라는 두 가지가 있다고 본다. 이 천국에는 오직 여호와의 증인들만이 있게 되는데, 하나는 천상 세계의 천국이다. 여기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함께 ‘성별된 무리’인 144,000명이 있게 되며, 이들 무리는 왕적, 제사장적 권위를 가지고 다스린다. 이때 여호와는 가장 위대하신 영원하신 왕이요, 그리스도는 그 보다 낮은 섭정왕(Co-regent)으로 있다고 본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지상 세계의 천국, 곧 지상 천국이다. 여기에는 여호와의 증인들 중에서 선택 받은 자들인 144,000명의 무리 외의 사람들, 곧 144,000명 무리에 들지는 못했지만 여호와의 증인으로 있는 ‘다른 양들’이 들어가는 곳이다. 이들은 땅에서 평화로운 하나님 왕국의 백성으로서 지상낙원을 이루며 산다고 본다. 여호와의 증인이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비록 천상 세계의 천국과 지상 세계의 천국으로 나누고 있지만, 지상 세계의 천국, 곧 지상천국관은 현 우주의 갱신으로서의 재창조를 말하는 개혁파 신학자들의 주장과 다를 바가 없다. 현 우주의 갱신으로서의 재창조는 지상천국관이다. 개신교는 여호와의 증인이 주장하는 지상낙원의 천국을 문제 있다고 보는 것은 이들이 말하는 여호와의 증인들 중에서 144,000명의 무리 외의 남은 여호와의 증인들만이 있는 지상낙원을 말하는 것에도 있지만, 이들이 말하는 지상낙원이 천국/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데 현 우주의 갱신으로서의 재창조에 의한 천국 또한 지상천국을 말하는 것으로 여호와의 증인이 주장하는 지상낙원의 천국과 다를 바가 없다.
10) 요한은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1-2) 라고 말함으로써, ‘새 하늘과 새 땅’이 없던 것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이미 하늘에서 준비되어 온 것임을 말한다. 이것은 구약시대에서 있어온 예루살렘을 가지고 묵시적 성격을 띤 종말적 관점에서 새 예루살렘으로 말해지고 있다. 지상의 예루살렘은 하늘의 실재의 그림자요 모형의 성격을 띤다. 지상의 예루살렘이 그림자가 된 하늘에는 완전한 원형의 예루살렘이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 26절에서 하갈과 사라를 들어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에 관해 이야기 한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이는 히브리서의 기자가 히브리서 12장 22절에서 하늘의 예루살렘에 관해 이야기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11) 이 견해의 대표적인 학자는 J. W. Walvoord이다. 그는 20:11과 21:1을 주석하면서 갱신의 입장을 완전히 부정하면서 현존하는 모든 만물을 철저하게 파괴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에 의하면, “우주 전체의 구조는 멈추어 가는 시계의 원리로 작동하고 있다”고 하였다.
12) 다니엘7:3ff에서 네 마리의 짐승들은 바다로부터 올라오고 이사야는 악의 세력들을 ‘끊임없이 물결을 일으켜 진흙과 더러운 것을 솟구쳐 오르게 하는 요동하는 바다’와 관련시킨다. 그리고 고대 우주관에 있어서 아무런 바다를 소유하지 않은 세상이 현세계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 질서로부터의 완전한 변화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바다가 더 이상 없음은 이 땅이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악한 세력이 제거될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16:6-16, 17:13-14, 19:11-21, 그리고 20:7-10에서 사단의 진영의 완전한 패배와 직접 관련이 있다.
13) 여기서 ‘두려워하는 자들’은 겁이 많은 겁쟁이, 그래서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돌아선 비겁한 사람들을 의미한다. 공동번역, 표준새번역, 현대인의성경, 현대어성경은 모두 이 번역을 따르고 있다.
14) 여기서 말하는 ‘믿지 않는 자들’은 앞서의 ‘두려워하는 자들’과 극히 비슷한 것으로, 이 두 단어는 오직 여기에만 나오는데(David E. Aune), 믿음이 없어 신실하지 못한 자들(표준새번역), 불신자들(현대인의 성경)을 의미한다.
15) 성벽의 길이는 사방 길이와 높이가 똑같은 입방체로 각각 2400km나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