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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서

고린도전서 11장 17-34절/ 성찬(주님의 성만찬)에 대한 가르침

작성자이천우|작성시간12.03.04|조회수2,431 목록 댓글 0

 

성찬에 대한 가르침

- 주님의 성만찬 -

 

고린도전서 11:17-34/ 17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18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 19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20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21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22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23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27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28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29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30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31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32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33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34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밖의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

 

주님의 교회는 예배와 함께 성례전을 시행합니다. ‘성례전’은 ‘세례’와 ‘성찬’에 대한 예전입니다. 로마카톨릭교회는 ‘칠성례’ - (1) 성세성사(聖洗聖事) : 개신교의 세례에 해당한다. 흔히 영세(領洗)로 알려져 있으며 원죄(原罪)와 본죄(本罪, 자범죄)를 사(赦)한다고 한다. (2) 견진성사(堅振聖事) : 신자에게 성령을 내려주고 신앙에 방해가 되는 세속과 싸울 수 있는 힘을 주는 성사이다. (3) 성체성사(聖體聖事) : 사람에게 영적 양식으로 빵과 포도주 형태로 그리스도께서 자기 스스로를 제공한 성사이다. (4) 신품성사(神品聖事) : 교회의 사제로 성사와 미사집전, 교회에 봉사하는 직능을 수여하는 성사이다. (5) 혼인성사(婚姻聖事) : 혼인생활로 성스런 가정을 꾸미고 자녀의 교육적 양육의 은총을 주는 성사이다. (6) 고백성사(告白聖事) : 죄인의 잃은 생명과 약해진 은총을 회복하게 하는 성사이다. (7) 병자성사(病者聖事) : 중병으로 신음하는 신자와 죽음에 임한 신자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성사이다. - 를 행하여 왔습니다. 개신교는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시작되고 칼빈에 의하여 세워진 개혁교회를 통해서 잘못된 교리와 예전에 대한 개혁에 있으면서 로마카톨릭교회의 ‘칠성례’를 없애고, 단지 ‘세례’와 ‘성찬’, 이 두 가지만을 인정하며 시행하여 왔습니다.

 

500여년이 흘러오면서 교회<개혁교회/개신교>가 행하는 ‘성찬’은 ‘세례’와 함께 예배 모임에서 시행되어 왔는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그 시행에 있어서 다양하게 행해지고 있습니다. 일년에 3, 4차례 행하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매월 한 차례 또는 두 차례 행하는 교회가 있고, 매주일 행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성찬은 몇 번 행하여 갖는가에 그 중요성이 있지 않으며, 또한 성찬을 갖는다면 어떠한 형태로 갖는가에도 그 중요성이 있지 않습니다. 성찬은 이것의 필요성을 가지고 이것을 행하는 성도들이 이것을 행하게 하신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성찬이 갖는 본질적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서 그 인식과 믿음에 있는 것에서 올바르게 행하는 것인가에서 그 중요성이 말해집니다.

 

우리는 이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을 고린도전서 11:17-34에서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27절에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찬을 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가지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찬을 행하는데 그 성찬을 합당하게 행하지 않은 것에 대한 책망을 하고 있는 것이며, 이러한 이유로 당시 고린도교회에는 약한 자와 병든 자와 잠자는 자<죽은 자>가 많았다고 말합니다.

 

그런 까닭에 잘못된 성찬을 행하여 오는 것을 바르게 성찬을 행하는 것으로 고치기 위해서 바울은 31절에서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라고 말하여, 우리가 우리 자신 스스로를 잘 살피고 성찬을 행하면 하나님께 판단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의 ‘판단’은 ‘심판’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앞에서 말한 당시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약한 자, 병든 자, 잠자는 자가 많았던 그러한 일을 하나님께서 일으키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어느 한 교회가 성찬을 제대로 행하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 교회에 약한 자, 병든 자, 잠자는 자가 있게 하는, 그러니까 약함과 병듦과 죽음을 당하는 심판을 행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당시 고린도교회에는 이러한 심판을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은 왜일까요?

 

그것은 당시 고린도교회가 성찬을 제대로 행하지 않은, 곧 무분별하게 행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거룩성을 심각하게 훼손한 데 따른 하나님의 심판을 원리적으로 분명히 세우시는 때문이었습니다. 그에 따라서 이 원리에 들어 있는 교회의 무분별한 성찬의 시행은 비록 당시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약한 자, 병든 자, 잠자는 자가 많았던 하나님의 심판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사도행전 5장에서의 잘못된 연보<헌금>에 대해 있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심판하였던 하나님의 심판에서도 보게 됩니다. 오늘날에 우리 마음에 작정하였던 연보대로 연보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당장에 이 자리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죽이듯이 죽이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연보에서의 연보가 아닌 탐욕에 의한 잘못된 연보에 있다는 것은 비록 그 자신이 당장에 죽음을 당하지는 않지만 교회의 거룩성을 훼손한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서 행하였던 하나님의 심판의 원리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지적한 고린도교회에서 행하여졌던 성찬에서의 문제는 무엇인지요. 그것은 성찬의 외형이나 성찬의 시행에 있어서의 방법과 관련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성찬의 본질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성찬의 본질을 잘못이해하고 성찬에 임하였기에 심각한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서 고린도교회는 성찬을 잘못 행하는 것으로 인한 악한 죄의 처벌을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 것에서 받았던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 라 그 남은 것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귀정하리라.”(27-34절)에서 보게 되는 것은 (1) 먼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심으로써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2)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사람은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시라는 것이며, 만일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 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3) 성찬의 시행에 있어서 언제 먹으며, 어떻게 먹느냐는 것은 본질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고린도교회에서 행한 떡을 먹고 잔<음료>을 마시는 것에서 갖는 성찬은 ‘주님의 만찬(성만찬)’으로서 주님과 함께 하는 만찬<저녁식사>의 성격을 가집니다만, 이는 단지 함께 모여서 떡과 잔을 나누는 그냥 먹고 마시는 식사가 아닙니다. 만일에 먹고 마시는 것으로서 성찬을 갖는 것이라면 굳이 교회에서 성찬을 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시장하면 집에서 먹으면 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집에서 할 수 있는 것을 교회에까지 가져와서 하는 것으로 한다면 이것은 교회의 거룩성을 훼손시키고 식사할 음식을 가져오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결코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성찬’, 곧 ‘주님의 만찬(성만찬)’은 무엇인지요. 이는 주께서 친히 말씀하신 가르침에 따른 이해에 있어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23-26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여기에서 바울은 주께서 무엇 때문에 제자들과 ‘만찬’을 가졌는가를 말합니다. 이 만찬은 주께서 잡히시던 밤에 ‘유월절 잔치’로 갖는 것이었는데, 이것을 갖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은 새로운 개념을 갖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떡을 떼어 나누어 주시고, 또한 그와 같이 잔을 나누어 주시는 것을 통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것을 행할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말이죠. 27-29절에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라고 말한 것에서 ‘합당하게 먹고 마시라’,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먹고 마시라’, ‘주의 몸을 분별하여 먹고 마시라’는 표현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있을 수 있는 죄에 빠지는 것에 대한 주의를 주며 경계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말이죠. 바울은 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성도는 성찬에 임하기 전에 먼저 ‘자기를 살피라’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자기를 살피라’ 라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는 ‘합당하게 성찬에 임하라’는 것이요, 또한 ‘주의 몸을 분별해야 한다’ 라는 말입니다. 성도가 자기를 살피지 않고 성찬에 임하는 것은 주의 몸을 분별하지 않고 성찬에 임한다는 것이며, 또한 합당하지 않게 성찬을 행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말입니다. 바울이 말한 ‘자기를 살피라’, ‘합당하게 성찬에 임하라’, ‘주의 몸을 분별해야 한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에서 당시 고린도교회가 성찬을 행함에 있어서 그렇게 하지 않은 잘못에 있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교회는 예배 모임을 가진 후에 성도들이 식사의 형식으로 성만찬을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성만찬에 분쟁과 파당이 있었습니다. “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18-19절) 이는 당시 고린도교회가 갖는 모임에서 논쟁과 분열을 일삼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는데 참으로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 말을 믿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가 자신이 옳다고 말하니 누가 옳고 그른지를 가리는 것으로 파당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바울이 전해오는 소식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성만찬을 행함에 있어서 분쟁과 파당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참으로 침통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성만찬을 위해서 갖는 자리가 유익하기 보다는 오히려 해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만찬은 예배 모임을 갖는 것에서 행하였는데, 예배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들의 생명의 주가 되심이 선포되며, 이는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주님의 피, 곧 언약의 피가 가져온 은혜에 따른 것임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래서 예배에서 성도는 이것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그 인식 속에서 하나님의 한 백성<자녀>으로 있는 ‘실질’에 있는 믿음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선포된 말씀에 따라 실질적으로 하나님의 한 백성으로 있는 것에서 주님의 몸과 피에 참여함을 갖는 것에서 성찬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에 따라서 성만찬은 주님과 하나된 몸으로 있는, ‘연합’과 ‘일치’에 의한 ‘일체’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은 주님의 몸인 교회로 모이면서 다른 사람을 기다렸다가 함께 음식을 나누지 않고 끼리끼리 유유상종이 되어서 먼저 온 사람은 먼저 온 사람끼리, 그리고 부유한 사람은 부유한 사람끼리 그렇게 ‘끼리’가 되어서 제각기 자기들이 먹을 양을 챙기고 배를 채웠습니다. 그들은 양껏 먹고 마시며 배부름과 취함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소외된 가난한 사람은 제대로 먹지를 못하여 배고픔에 있습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는 현대와는 달라서 주인과 종, 자유인과 노예계급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이들이 함께 교회를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는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주인, 자유인은 경제적 형편이 넉넉한 부유한 사람들이며 이는 이들이 준비해오는 음식에서도 확연하게 나타납니다. 하지만 종, 노예계급에 속하는 사람은 생활이 매우 곤궁하고 삶이 고단한 가난한 자였습니다. 이들은 부유한 사람들이 준비해오는 것처럼 음식을 준비하여서 가져올 수가 없습니다. 자신들이 그날 그날 또는 겨우 겨우 먹고 있는 음식을 가져올 수 있을 뿐이며, 그마저도 가져오지 못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이들은 배고픔에 있으며 배를 곪에 있습니다. 주님의 성만찬으로 갖는 자리는 이들 부유한 자나 가나한 자나 차이와 차별이 없는 주님의 한 몸으로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유한 사람은 자신들이 준비해온 음식을 넉넉히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나눔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유한 사람도 가난한 사람도 다같이 동일한 성만찬에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갖는 성만찬을 통해서 부유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다같이 주님의 몸에로의 생명에 참여함이 있어 생명의 주님을 기념함에 있고, 주님의 피로 세운 죄 사함을 얻게 하신 새언약에 참여한 자가 되어 주님을 기념함에 있는데, 이 축복이 주님의 죽으심에 의하여 되어졌으므로 떡을 먹고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이 자신들을 위해서 죽으신 의미를 되풀이해서 기억하며 이를 전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간에, 있는 자와 없는 자간에, 힘 있는 자와 힘 없는 자간에 논쟁과 분열이 생기고 서로의 주장으로 파당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말이죠. 주님이 가르치신 대로의 참된 성만찬은 전혀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바울은 22절에서 부유한 사람들에게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라고 책망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23-26절에서 이들에게 성찬이 갖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가르칩니다. 주님의 몸인 교회가 갖는 성찬은 성도들이 집에서 음식을 먹는 식사의 자리하고는 전혀 그 성격을 달리합니다. 왜냐하면요. 교회가 갖는 성찬은 끼니를 해결하는 식사를 위해서 갖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것에서 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28절에서 주님이 행하신 성찬에 근거해서 성도들은 성찬에 임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성찬의 참된 의미를 바르게 알고서 주님의 몸을 분별하고 있는지, 그래서 합당하게 성찬에 참여하고 있는 것인지를 스스로 살피라고 하였습니다. 떡을 먹고 잔을 마시는 성찬은 그런 후에 임하여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성찬에 임하는 자세는 26절에서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라는 말씀에서 언급되고 있듯이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되어야 할 것이므로,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동일해야 합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우리는 예배와 더불어 성찬식을 행하기 전에, 또는 우리는 예배와 함께 갖는 식사를 할 때에 먼저 이 성찬이 갖는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 상고하고 상기하는 것을 통해서 ‘자기를 살핌’이 있어야 합니다. 성찬은 우리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떡을 먹는 것에서 생명의 주님이신 몸에로의 참여가 갖는 복에 있음을 되새겨야 하며, 잔을 마시는 것에서 친히 피 흘려 죄 사함을 주신 새언약에 참여하는 복에 있음을 되새겨야 합니다. 이것을 떡을 먹을 때마다, 또한 잔을 마실 때마다 그렇게 매번 ‘자기를 살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지 않으면 당시 고린도교회에서 보게 되듯이 언제든지 주님의 몸과 피와 상관없이, 그래서 주님의 생명과 죄 사함을 얻음에 있게 하시는 새언약과 관계없이 다만 자기의 배를 위함에 있을 뿐이어서 예배에서 선포된 주님의 생명과 죄 사함을 얻음에 있게 하신 주님의 새언약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죄에 있는데 따른 정죄와 심판에 있는 것에 불과하는 행동을 거듭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을 가질 때마다 항상 먼저 ‘자기를 살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서 말이죠. 이렇게 떡을 먹고 잔을 마시는 것에서 갖는 자리에서 주님의 몸으로의 연합에 있는 성도들이 말하여 증거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의미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이죠. 주님을 두런두런 이야기 하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성찬 - 주님의 성만찬 - 을 가지면서 우리들이 하는 재밌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간 이런저런 이야기가 있죠. 그 삶에서, 그 생활에서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은혜가 우리를 어떻게 사로잡고 왔는지가 이야기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죽으심만이 아니라 그와 함께 주님을 부활시키신 하나님의 능력이 어떻게 죽을 나를 살리시고 또한 온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주님께서 다시 오실 마지막 날에 우리 몸을 다시 살리시는 부활에 있게 하실 것인지가 이야기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을 기념하고 주님의 죽으심이 갖는 의미를 전하는 것이 아닌 단지 한끼의 음식을 먹는 식사로만 갖는 성찬이라고 하면 이는 성찬의 의미를 모르고 성찬 에 임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이 단지 우리 몸을 위하여 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일 뿐이기 때문에 그러한 성찬으로서는 정죄와 그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에 있는 것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고 성찬이 갖는 참된 의미의 이해에 의해서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되어야겠으며, 이렇게 성찬에 참여함으로 주님의 몸과 그 피로 세운 하나님의 새언약의 백성된 기쁨을 함께 누리는 것에서 친밀한 교제가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자기를 살펴’, ‘주님의 몸을 분별함으로’, ‘합당하게’ 주님의 성찬에 임하는 올바른 자세요 태도입니다. (*)

 

 

 첨부파일 고전 11장 17-34절 성찬(주님의 성만찬).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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