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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누가복음 17장 1-4절 / 형제의 죄 회개에 대한 용서의 가르침에 담긴 진의

작성자이천우|작성시간18.07.30|조회수1,271 목록 댓글 0

형제의 죄 회개에 대한 용서의 가르침에 담긴 진의

 

누가복음 171-4/ 1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2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3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속담에못 먹는 떡 개나 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에게 먹지도 못할 것이나 쓰지도 못할 찌꺼기를 주면서도 인심을 쓰듯이 하는 야박한 인심을 빗대고 있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심한 속담이 있습니다.“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입니다. 제 것으로 삼지 못할 바에야 아예 남의 것도 되지 못하게 망치려고 하는 심술궂은 마음을 이르는 말입니다. 이 둘 모두 다 참으로 심보가 못되었다고 말하게 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보다 더 심한 말이 있습니다. 이는 일반적인 속담 이야기가 아니고, 성경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인데,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23:13).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닫고, 또는 문을 가로 막고 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죠.. 이는 참으로 마음이 뒤틀려 삐뚤어져 있는 것이니, 참으로 못된 심사입니다.

 

그러한 마음에 있는 것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세리들과 또한 많은 죄인들과 함께 하며 그들과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는 예수님을 비난하며 멸시하였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 그들은 마음에 하나님을 공경함이 없습니다. 그에 따라서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에로 나아가는 길과 진리와 생명을 알려주고 있는 율법을 따름에 사람들이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서 칭찬을 들으며 존귀히 받는 수단과 방법으로 사용할 뿐이지 정작 율법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파기하는 행동에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나님 나라의 문을 가로 막고 있는 참으로 악함에 있었습니다. 이는 그 자신이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에는 처음부터 마음에 없으며, 단지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은 돈을 사랑함에 있는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그들을 염두에 두고 본문 1-4절에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여기서실족하게 하는 것은 단어가 지닌 문자적인 뜻은이나장애물로서 이전의 한글개역성경에서는올무’(2:14)또는부딛히는 돌’(9:33), 또는거리끼는 것’(고전 1:23)으로 번역되기도 하였습니다. 본문에서는실족하게 하는 것’(한글개역, 개역개정, 킹제임스흠정역, 한글킹제임스)으로 번역되었는데, 다른 한글성경 번역에서는(죄악)의 유혹’(현대어성경, 공동번역),‘걸려 넘어지게 하는(죄 짓게 하는) 일들’(새번역성경, 바른성경, 쉬운성경, 우리말성경, 현대인의성경, 카톨릭성경)로 번역하였습니다. 이 모두에서 보듯이 실족하게 하는 것이란 죄 짓게 하는 일(유혹)의 의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것에서죄 짓게 하는 일(유혹)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죄짓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 너희가 보기에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일지라도 그들 가운데 하나를 죄짓게 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은 차라리 자기 목에 연자맷돌을 맨 줄을 매달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지옥불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너희 중에 누구라 할지라도 죄를 짓거든 꾸짖어라. 그리고 그가 너희가 하는 말을 듣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하루에 네게 일곱 번 죄를 저지르더라도 매번 뉘우쳐 네게 돌아와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네게 용서를 구한다면 너는 그를 용서해 주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죄짓게 하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죄는 누가복음 151절에서 말씀하시는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에 있는 예수님에게 가까이 와서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는 현장에 있는 모든 세리들과 죄인들에게서 보는 약한 자들, 낮은 자들, 사람들의 멸시에 있는 자들을 실족케 하는 것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께 나아와 그분이 하시는 말씀인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들음에 있음으로 복 있고 그 하나님 나라의 주님을 봄으로 복 있어야 할 사람들을 보잘 것 없게 보며 멸시하여 예수님에게 나아오는 것을 막으며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하지 못하게 막음으로써 그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예수님에게 나오는 일을 하지 않는 죄를 짓는 사람이 있게 한다면 그는 그 죄에 임할 재앙의 화에 그도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기에 그는 차라리 목에 연자맷돌을 달고 깊은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연자맷돌은 우리네에서 가정집에서 보는 곡식을 가는 작은 맷돌이 아닙니다. 연자맷돌에 곡식을 넣고 빻게 되는 뚫린 구명 속으로 머리를 넣어서 목걸이처럼 하여 바다에 던져질 것이란 표현에서 보게 되는 매우 큰 것입니다. 이렇게 연자맷돌을 기괴한 목걸이로 한 채로 바다 속으로 던져지는 것에서 말해지고 있는 것이며, 또는 연자맷돌을 돌리는 나귀에 묶은 것과 같은 모습으로 묶여 바다에 던져질 것에서 말해지고 있는 것인데, 실족하게 하는 자는 이보다 더 나쁜 곤경인 지옥불에로 스스로를 밀어 넣는 것이 될 것이라는 의도에서 이야기 해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말이죠. 마태의 기록에서는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서 지옥불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두 손과 두 발을 잃은 몸이더라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더 나으며,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한 눈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참조. 18:6-9).는 말씀을 해 주시는 것을 통해서 손과 발이 잘라지는 일을 겪고 한 눈을 잃음에 있어도 예수님에게 나아와 예수께서 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사람을 귀히 대할 것을 강조하여 허투루 듣지 말고 마음에 깊이 새기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남을 실족케 하지 않도록 할 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하나를 더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819-20절에 의하면, 그것은 예수님을 주로 섬기는 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모여 마음을 합하여 하나님께 그들이 구할 기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 중에 두 사람이 땅 위에서 마음을 합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두 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예수께서도 그들과 함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예수께서 마음을 합하여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들이 자기를 위하여 원하여 구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예컨대 제네시스 차를 갖기를 원하고 아파트 70평형에 들어가서 살기를 원하고 높은 연봉의 월급을 원하고 노년에도 젊은이 못지 않은 체력을 가지고 건강히 살기를 원하는 따위의 무엇이든지 원하는 그것을 들어주실 것이라고 하는 것에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마음을 합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하신 것은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예수께서도 그들과 함께 하신 까닭이라고 하신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합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루어주시는 것은 그들이 구하는 것을 들어주실 기도에 있는 때문이니 그것은 예수께서 그들에게 구하게 하시는 것을 구하는 기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구하게 하시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예수님이 구하게 하신 것을 구함에 있는 자의 기도를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들어주십니다. 한편, 이렇게 예수께서 구하게 하신 기도에서의무엇이든지 구하면}에서의무엇에든지어떤 사람들이든지’,‘누구이든지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구하게 하신 것을 구하는 기도에 있는 사람이어떤 사람이든지간에’, 또는누구이든지 간에그들이 구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루실 기도의 구함에 있는어떤 사람들이든지’,‘누구이든지는 예수님을 따름에 있는 제자들을 염두에 두신 것에 다름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것을 산상설교에서 예수께서 제자들 가르치신주기도문에서 알 수 있습니다.“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하시면서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821-22절에 의하면, 그때 베드로가 예수께 물었습니다.“주님, 형제가 제게 죄를 지었을 경우에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습니까?”그러자 예수님은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에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누가복음 본문 앞인 173-4절에서는만일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그가 네게 하루에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서 '회개한다'고 하면, 너는 용서하라.”마태복음에서는 일곱 번 용서하면 되겠느냐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용서의 한계를 드러내는 베드로의 물음에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용서인 일곱에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말이죠. 마음을 합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들어주실 것이라고 하신데 따른 것입니다.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곱 번에 일흔 번이라도 하나님께서 용서에 있게 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 형제의 용서를 구하는 기도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가 말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자비에 하나님이 택정하신 모든 백성이 있게 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십자가에 달리고자 하십니다. 이 일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세상에 보내시고 맡기신 일이시기에 말입니다.

 

해서 말입니다.“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라고 하시고, 또한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18:22)라고 말씀하심은 죄의 회개에 있는 자의 용서, 곧 죄 사하심의 권세가 주 예수께 있음을 알게 해 주시고 있는 것이며, 그 죄 사함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세상에 오신 구주 예수님을 영접하여 따름에 있는 믿음에 있게 하시는 것을 통해서 하늘로부터 베풀어지는 것인데,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남도 예수께 나와 예수께서 전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들으며 가르침을 받는 것을 막아 주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하지지 못하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죄를 짓게 하는 그 죄로 말미암아 죄 지음에 있는 자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선언입니다. 실족케 하는 자는 그가 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실족하는 자가 받는 그 화에 있을 것이나 실족에 있었던 자가 누구이든지 간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하는 주 예수께서 구하게 하신 기도에 있어 예수께 죄 용서를 구함에 있는 자의 죄를 용서하실 것을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용서의 자비를 제자 삼으신 사도를 통해서 베풀어 가시니, 유대인에게만 아니라 이방인 모두인 온 세상에 행하여 가실 것이었습니다. 그에 따라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죄의 용서, 곧 죄 사함의 은혜를 받음에 있는 우리입니다. 진정,“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렇게 주 예수님을 보며 또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상태를 아는 우리는 그 봄에 있는 눈이 복 있음으로 인해 보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눈에 들어와 보이는 것이 아닌 것 또한 봄에 있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에 있는 우리입니다. 땅에 있는 것이 아닌 하늘에 있는 것을 봄에 있는 눈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서는 그 보는 것으로 말미암아 삶에 대한 생각 또한 땅엣 것이 전부인 이 세상적이지 않습니다. 하늘을 바라봄에 있는 지극히 영적이며, 주님을 따름에 있는 자신의 존재를 늘 인식하고 그러한 정체성에 따른 삶을 사는 것에 주께 은혜를 구하며 의존합니다. 성도들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생각하며 한 지체인 형제를 섬기며 사는 것은 주께 은혜를 구한 기도의 실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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