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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누가복음 1장 46-56절 / 마리아가 부른 찬양

작성자이천우|작성시간15.06.16|조회수620 목록 댓글 0

 

마리아가 부른 찬양

 

누가복음 146-56/ 46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48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49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50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51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54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55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56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

 

 

주의 사자가 전해준 대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아기 예수님을 잉태한 동정녀 마리아는 주의 사자가 떠난 후인 며칠 후 친족 사가랴의 집을 방문하여 엘리사벳을 찾아 문안 인사를 드렸습니다. 이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인하여 예수님에 앞서 당시 6개월 전에 노년의 몸으로 엘리사벳 역시 주의 사자가 일러준 대로 아들 요한을 잉태하고 있었기 때문에 엘리사벳을 찾아 그녀에게 일어난 일에 대하여 자세히 듣고 자신에게 있은 일이 어떤 일로 있는 일인지를 자세히 알고자 한 때문입니다. 그러한 마리아의 방문이 있을 때에 엘리사벳은 주의 아들을 잉태한 마리아는 모든 여자 중에서 가장 큰 복을 받았고 태중에 있는 아기도 복 받은 분이라면서 자신의 주가 되시는 분을 잉태한 어머니가 자신을 찾아 주신 것은 참으로 큰 영광스러운 일임을 말하였습니다. 이는 엘리사벳의 복중에 있는 아기도 그러했습니다. 엘리사벳은 그 사실을 바로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문안 인사를 할 때 자신의 복중에서 성령으로 충만한 아기가 마리아의 복중에 있는 주를 맞이하는 기쁨에서 뛰놀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마리아의 복중에 있는 아기는 주님을 잉태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의 복중에 아기가 있게 된 것은 주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해서 엘리사벳은 주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은 마리아는 복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엘리사벳이 이렇게 말하자, 마리아는 자신의 복중에 있는 주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하였습니다.

 

내 마음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영혼이 내 구주 하나님을 높임은

주께서 이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세대가

나를 하나님의 복을 받은 여인이라고 할 것입니다.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분이

내게 큰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하심은,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대대로 있을 것입니다.

주께서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왕들을 그들의 왕좌에서 끌어 내리시고

비천한 사람들을 높이셨습니다.

주께서는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

주께서는 자비를 기억하셔서,

당신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대로 약속을 잊지 않으셨으니,

우리 조상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주의 자비가 영원토록 있을 것입니다.(바른성경)

 

마리아가 노래한 찬양은 전능하시고 거룩한 주께서 비천한 계집종에게 주의 아들을 잉태케 하는 큰 일을 행하셨다는 것인데, 왜 그렇게 자기에게 주의 아들을 잉태케 하는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해 줍니다 : (1) 주의 아들을 잉태케 함으로써 주께서는 자비를 베푸셨으며 그분의 자비는 그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대대로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이죠. 모든 세대가 주님을 경외하여 그분의 이름을 높임에 있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46-51). (2) 주께서는 높은 자나 낮은 자나, 부요한 자나 가난한 자나 그들 모두를 주님을 경외함에 있도록 주의 팔로 권능을 행하십니다(52-53). (3) 주께서 이처럼 자신을 경외함에 있게 하는 권능을 행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과 맺은 자비를 베푸실 언약을 기억하신데 따라 도우시는 것이었습니다(54). (4) 그래서 말입니다. 마리아의 찬양은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약속을 잊지 않으셨으니,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주의 자비가 영원토록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55).

 

마리아의 이 찬양에는 주께서 비천한 자기에게, 그리고 대대로 모든 세대에게 행하신 놀라운 큰 일로 인한 감격에 있음을 보게 됩니다. 마리아는 주께서 자기에게 주의 아들을 잉태케 한 것에서 주께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주신 약속을 성취하시는 자비를 베품이 있음을 보며, 그 자비를 입게 하시는 주의 도우심이 모든 세대에 걸쳐 대대로 있게 하시는 것에 주께서 자신을 통해 해 나가시는 주의 일에 대한 감격을 가지고서 주님을 바라봄에 있으며 주의 이름을 높여 주님을 경외함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주께서 아들을 통해서 베풀어 주시는 자비를 힘입지 않고서는 주님의 이름을 높임에 있는 경외에 있지 못합니다.

 

우리는 마리아의 찬양에서 보는 주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큰 일로 주님의 자비를 입음에서 마음 깊이 자리하고 있는 믿음에서 나오는 감격으로 주님의 이름을 높여 주님을 경외함에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이관대, 주께서는 비천한 우리에게 이처럼 주님의 이름을 높여 주님을 경외함에 있는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은혜에 있는지요. 주님이 이 자비를 베풀어 주신 것은 우리가 이렇게 하겠다는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마리아가 주의 아들을 잉태한 것이 자신이 원하여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주께서 전능하심으로 행하신 것처럼, 우리가 주의 이름을 높이는 경외에 있는 자비를 입은 것도 우리가 원하고 바라서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지금의 우리 모습 이전의 옛사람에게서는 그럴 인식도 생각도 갖고 있지 않기에 원하지도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원하고 바라기도 전에 있는 우리에게 주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해 오신 일이 있었습니다. 이미 주께서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주의 자비가 영원히 있을 것을 약속으로 주시고, 우리를 그 약속을 입는 하나님의 것으로 택하셨습니다.

 

그러니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높아질 수가 없으며, 그래서 교만하고 거만을 떨 수가 없습니다. 주님 발 앞에 자신을 낮추어 엎드리듯이 마음도 그렇게 낮추고 주님의 자비로우신 은혜에 고마운 마음을 가지며 감사함으로 언제까지나, 곧 어제 그랬듯이 오늘도, 오늘 그랬듯이 내일도, 그렇게 주의 이름을 높여 주님을 경외함에 있을 것입니다. 이는 말이죠. 주께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주의 자비가 영원토록 있게 하실 것에 따른 것입니다. 주의 자비가 영원하시니 우리에게서 주의 이름을 높여 주님을 경외하는 것 또한 영원할 것입니다. 이렇게 주의 이름을 높여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우리가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주의 이름을 높여 주님을 경외함에 있는 예배에 있음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그런데 은혜롭다고 하며 부르는 찬양이 내 평생 살아온 길 걸음걸음마다...”라고 하며,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말하는 것에서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여정을 말하는 노래를 할 뿐인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들이 살아온 흔적인 인생을 노래하는 것이지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노래하는 것에서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야곱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으로 주신 가나안 땅을 떠나 애굽의 고센 땅에 들어가 살게 될 때 애굽 왕 앞에서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세상을 떠돌아다닌 햇수가 백 년 하고도 삼십 년입니다. 저의 조상들이 세상을 떠돌던 세월에 비하면, 제가 누린 햇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험난한 세월을 보냈습니다.”(47:9) 야곱이 말한 험난한 세월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가 다른 사람들은 겪어 보지 못한, 그래서 다른 사람은 꿈에서조차 알 수 없는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그런 고통을 겪는 고생을 하며 힘들게 세월을 보내며 그렇게 어렵게 살아왔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의 인생 여정은 자신의 가족을 이끌고 지금 애굽 땅 고센에 들어와 살게 되는 이 시점에 이르러 애굽 왕 앞에 서 있게 되기까지는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시며 자신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맺은 언약을 이루어 가실 것에서 그 조상들의 인생 여정을 섭리해 오셨었듯이 또한 자신의 인생의 여정을 섭리해 오셨다는 것에서입니다. 여기에 자신의 인생이 겪은 것은 자신의 조상이 겪은 세월에 비할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것으로 앞으로도 이제까지의 험난한 세월에서 겪은 것보다 더 험한 일을 겪는다고 할지라도 그 모두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조상에게 해오셨듯이 또한 자신에게서도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실 일을 해 나가실 것이란 믿음에 굳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조상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 의해서 그의 후손들을 이방에서 400년 동안 객이 되게 하실 것이나 반드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해 주시고 그와 그의 후손들에게 주실 것이란 말씀 그대로 행하실 것에서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하실 하나님을 따르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창 15장). 이렇게 야곱이 말한내 평생 살아온 길 걸음걸음마다에는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그분께서 해 나가실 일을 바라보며 견고히 그 믿음에 있는 것이 말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것에서 이스라엘로 불리는 것으로의 이름에 있는 야곱은 147세에 이르러 눈을 감을 때 아들들을 불러 놓고 마지막 말인 유언을 다음과 같이 하여 그 다짐에 있게 하였습니다.“아들들아, 너희가 나를 기쁘게 할 것에서 너희의 손을 나의 다리 사이에 넣고,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인 부탁을 반드시 꼭 들어주겠다고 맹세하여라. 내가 눈을 감아 내 조상들에게로 내가 돌아가면, 너희는 나를 애굽에 묻지 말고 내 조상들이 있는 곳으로  가져가 그곳에다 나를 묻어다오.”(47:29-31). 아브라함의 믿음에 있어오고, 그 자손 이삭의 믿음에 있어 오고, 그리고 또한 그 믿음에 있어 온 야곱의 믿음에 우리가 있는 것이 말해지는 것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가진 믿음이요, 이 믿음이 교회 안에서 고백되어 지고 있는 것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배에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예배에서 주님의 사랑을 받는 믿음의 형제들이 부르는 찬양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져나가고 있는 것으로서 자신들이 주께 가진 신앙고백이 말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입니다. 우리들이 하는 찬양에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크고 놀라운 일인 구원의 권능이 말해져야 하는 것이지, 주께서 자신과 함께 하셨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인생 성공 여담을 노래하여 그 흥겨움에 도취되어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러한 찬양이 아닌 제대로 부르는 찬양에 있는 것이 예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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