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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누가복음 4장 14-21절/ 예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가르치심

작성자이천우|작성시간15.10.04|조회수1,962 목록 댓글 0

예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가르치심

 

누가복음 414-21/ 14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15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16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1. 성령의 권능이 충만하신 예수님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유대 땅에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는 전도 사역을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여러 동네를 다니시면서 행하셨으며,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 갈릴리로 되돌아오셨습니다. 예수께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는 이 전도 사역은 예수님과 함께 하시는 성령의 권능으로 행해졌습니다. 예수님의 구속 사역에서 성령님이 함께 하시며 권능을 행하신 역사는 예수님이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와 하나이며 그리고 또한 성령님과도 하나인 완전한 조화와 일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셨고, 세례 받으실 때도 성령으로 충만하셨으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도 성령의 이끌림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혼자이신 적이 없으며,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과 언제나 하나이신 분이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보내셨으며, 성부 하나님이 보내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은 함께 하시면서 예수께서 성령으로 충만한 지혜에 의하여 천국복음을 전파하며 가르치심에 있게 하였으며, 성령으로 충만한 권능을 행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지닌 능력을 나타내시게 하였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갈릴리로 되돌아오시는 것도성령의 능력으로 행해진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계신 동안에도 언제든지 성령의 능력을 입음에 있는 것에서 모든 일에 자의로 행하지 않고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셨습니다.‘성령의 능력으로갈릴리에 되돌아가셨다는 것은 갈릴리로 되돌아오기까지에서 보게 되는 이제까지의 예수님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그와 함께 하신 성령의 능력으로 행해졌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렇게 성령으로 충만하신 예수께서 갈릴리에 돌아오시자 이 소문은 곧 갈릴리 사방 모든 사람에게 퍼졌습니다. 예수께서는 안식일마다 친히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셨는데 듣는 사람마다 예수님을 칭송하였습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소문은 예수님께서는 친히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말씀을 들은 많은 사람들에게서 칭송을 받으셨습니다.

 

2. 주의 은혜의 해의 도래자이신 예수님

 

그 후 예수께서는 자기가 자라난 고향 동네인 나사렛에 오셨습니다. 나사렛은 갈릴리 지방에 있는 한 동네입니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안식일 규례에 의하여 전에 하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읽으려고 일어나셨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예수께 드리자 예수께서는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아 읽어 나가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혜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18-19)

 

이 말씀은 이사야 611-3절의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를 인용하여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읽기를 마친 후 예수님께서는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는 읽으셨습니다. 회당에 모여 있던 자들의 모든 시선이 예수님께로 향하여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읽은 이사야의 글이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인가를 설명하여 나가셨습니다. 그리고는 다음의 말씀을 저희에게 하셨습니다.“이 글 <성경>이 친히 들은 너희에게 오늘 이루어졌다.”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그 은혜로운 말씀에 놀라며 이상히 여겨 예수님에 대하여 서로 말들을 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이런 말씀을 하실 있을까? 오늘 예수의 하는 말을 듣고 보니 전에 들은 그의 행한 소문이 괜히 떠도는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우리는 본문에서 나사렛 회당에서 예수께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으셔서 회당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여 주고자 하셨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읽으신 글 곧, 선지자 이사야에게 예언하여 주신 이사야 611-3절에서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회당에 모여있는 사람들이 들은 대로 성취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은 메시야가 오셔서 어떤 일을 행하실 것인데 그 메시야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할 때 예수님 자신을 두고서 하신 것이라고 하는 것이며, 그에 따라 선지자 이사야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이루시는 것으로서 지금 그의 글을 읽고 있다는 것입니다. 회당에 있는 사람들은 지금 예수님께로부터 그 글을 듣고 있는 것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자기들에게 이루어지고 있는 가를 보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성취되었다고 말씀하신 이사야 611-3절의 인용구인 누가복음 418-19절은 무엇을 말씀해 주고 있는지를 보고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전해주시는 뜻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주의 영이 자신에게 임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세상에 보내셔서 하시려는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에 따라서 예수님은 주의 영, 곧 성령의 능력으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가르치시며, 이적을 행하여 다음의 일을 하는 것에 계셨습니다.

 

첫째, 이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둘째, 이것은 포로 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얻도록 하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셋째, 이것은 못 보는 사람들에게 다시 볼 수 있도록 하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넷째, 이것은 억눌린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섯째, 그래서 그 모든 사람들에게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마지막 문구인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선포>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한다.’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것에서이며, 이것은 곧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어 모든 사람을 위로해 주시는 시대가 되었음을 알리는것입니다. 이 목적이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목적을 이루실 때가 되시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으며, 또한 성령의 충만함 속에 두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무엇 때문에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는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낭독하신 것에서 들려주시고 있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하신 예언을 회당에 모인 사람들이 자신들의 귀로 직접 들은 그대로 오늘날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시고, 그 예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신 모든 일은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그 일을 행하시는 것에서였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의 구주이셨습니다.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고, 눈 먼 자를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며,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는, 온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이셨습니다. 이렇게 구주 예수님이 오신 이 세상은 은혜의 시대입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주의 은혜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은 주의 은혜의 시대의 도래자이십니다.

 

3. 예수께서 구원하시는 가난한 자의 의미

 

그러면 예수께서 구원하시는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는 어떤 의미로 말씀하신 것인지를 봅니다. ‘사회 구원을 강조하던 한 때에는 실제 현상적인 가난한 자들로 이해했습니다. 정치인, 학생, 근로자들이 민주 정의 사회 실현, 부당한 착취 개선 등을 외치다가 감옥에 갇히고 억울한 형을 받거나 직장에서 쫓겨나 인생의 밑바닥에서 사는 등의 가난한 자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의 정신을 가지고 헌신, 희생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국가나 사회가 가지고 있는 법적이고 제도적인 구조의 불완전하고 결함 때문에 겪는 가난의 현상입니다. 그런데 이로부터의 개혁과 개선의 변화를 갖게 하기 위해서 또한 법과 제도와 투쟁하고 어기는가 하면, 개악(改惡)하기 까지 합니다. 가령 언제인가 변호사법을 고치기 위해 변호사 출신의 의원들에게 법개정을 맡겼더니 오히려 악법으로 고쳤다고 하여 물의가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어느 법인들 안 그렇겠습니까? 항상 반대급부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집단이 이익집단인 까닭에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몰고가는 어쩔 수 없는 현상입니다. 사람은 타락한 부패한 본성인 까닭에 그렇습니다. 사회 구원을 주창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자신들이 일생동안 해 나가야할 사명으로 알고 있는 까닭에 의무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사람들이 있어야 국가와 사회는 그 상태에서 보다 나아져 좀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어 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힘없는 사람 편에 서서 사회 구원의 사명 속에 사는 사람에 의해서입니다.

 

이런 현상은 어느 특정 시대에서만 발생하는 현상은 아닙니다. 시대를 불문하고 사람들은 항상 세상적인 관점에서 구원을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가령 의술을 배워서 가난하고 못사는 나라에 가서 예수님이 가지신 가난한 자의 구원 정신을 가지고 봉사하며 살겠다고 한다면 이 또한 다를 바 없습니다. 의술을 가진 사람이 가난한 자를 찾아가서 봉사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그런 사람이 많이 나와야 하는데 하물며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의 선한 성품을 가지고 의술을 베푸는 것이라고 할 때 바람직한 일입니다. 누구나 그런 일에 뜻을 품고 사명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래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의술을 베풀어 가난한 자를 돕는 구원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난한 자의 구원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난한 자는 그런 세상적인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난한 자는 영적인 개념입니다. 세상 사람은 이를 구분할 수 있는 영적인 식견력이 없습니다. 이 영적인 식견력이 있어 영적인 눈으로 예수님을 보는 자는 세상 사람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인 영적인 자, 곧 영으로 난 자 입니다. 그런데 영으로 난 자가 아닌, 여전히 세상에 속한 자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빌어 기독교를 종교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자들이 갖는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있습니다. 비록 그리스도인일지라도 표면적 그리스도인에 해당하는 종교인이지 내면적 그리스도인이 아닌 이들이 갖는 예수님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아는 지식인 영적인 개념을 가지고서도 세상적으로 그 의미를 풀고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보고서도 세상적인 개념으로 이해하여 사회 구원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사람이 처한 상황으로부터의 구원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를 그러한 자에게서 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여서 말한 가난한 자는 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에 의한 남왕국 유다가 겪은 바벨론  포로생활 70년에서 보게 되는 이스라엘의 상태와 관련하여서 하나님께 범죄하여 타락한 인간의 불행한 상태를 가난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28절에서 인간의 상태를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마음, 라오디게아 교회의 경우 경제적 부요 속에 있었어도 마음의 눈이 어두워 자신의 본래적 상태를 보지 못함으로 실상은 가난한 자임을 말씀하셨습니다(3:17). 우리가 가난하여 살아갈 날이 막막할 때 캄캄하다’, ‘앞이 안 보인다고 말하는데, 미래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마음에 소망의 빛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으로 설명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없는 자의 마음은 인생에 있어서 길이 안보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까닭에 하나님을 거역하고 강팍하게 제 마음대로 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벌하셔서 그들의 마음을 어둠 가운데 방황하게 하고 오직 육체로 살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 육체로 사는 것이 불행인 것은 죄 값으로 죄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고, 사망이 왕노릇 하기 때문입니다(5:17). 그러기에 사람은 일생을 죄의 종이 되어서 살고, 궁극적으로는 영원히 죽음의 형벌 속에 있게 됩니다. 인간을 그 죽음으로 몰아가는 특징적인 몇 가지를 예수님의 구원 사역 속에서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는, 악한 영인 귀신들려 고통을 겪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온갖 병이나 신체적 장애로 고통을 겪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메시야 사역으로서 축귀 사역과 치유 사역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예수님께서 사단의 나라를 멸하시고, 인간을 연약함과 질고로 부터 회복시켜 주시는 권세 있는 분이심을 나타내어 보이심으로 자신의 존재성을 알 수 있게 해 주시는 계시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여 말씀하신 가난한 자는 이어서 언급하신 포로 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들이 겪는 비참한 상태의 모습을 가지고서 죄의 비참함에 있는 자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메시야의 도래에 대한 약속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은 또한 거기서 자기의 죄를 보면서 죄 때문에 불행해 하며 고통스러워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곧 자기를 아는 지식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아는 자는 또한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마련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메시야 대망 속에 있었던 자들인데, 그들은 그 메시야 대망이 자신들의 실상인 죄인의 모습을 보는 것에서여야 했으며, 그래서 자신들 앞에 오신 메시야를 주로 영접하고 섬기는 믿음에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갈릴리 전도를 시작하시면서 자기가 자라난 고향 나사렛에서 그 사실을 선포하셨습니다. 주께서 자신을 이 세상에 보내주심으로 이제 죄 때문에 불행하고 고통을 겪는 가난한 자가 구원받는 은혜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으니 구주 예수를 믿는 자가 되라고 말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것은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주의 은혜의 해<시대>가 되었다고 하는 것을 알리시는 것으로서 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증거를 통해 하나님의 모든 예언이 이루어졌음을 나타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증거를 받은 사람들에게서 하나님과 그 나라를 의로 갈망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죄의 세력에 지배받고 있는 슬픔을 토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그 슬픔을 탄원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시고 구원하여 자기 나라로 이끌어 가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좇음은 그 은혜가 베풀어지는 것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 은혜는 하나님의 주권으로 되어지는 것으로 받는 자 - 하나님의 은혜가 허락된 자, 곧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 - 가 받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허락되지 않은 자는 그들의 눈으로 결코 주의 은혜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는 증거에 있고,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보는 증거에 있습니다만 예수님을 자신들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주님으로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닫힌 강팎한 마음,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완악한 마음으로 있습니다. 이들이 설사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찾게 할지라도 이들의 관심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주로 받아 섬기는 것에서 자기의 생명을 찾는 것에서가 아니라 온통 자신들의 마음에 가득히 채워진 탐욕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나사렛에 계실 때에도 안식일 규례를 좇아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으시는 것을 통해서 주의 은혜의 해<시대>가 예수님에 의해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선포하시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이 계신 회당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악한 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누가 주의 은혜의 해가 도래한 그 혜택</은혜>를 누리는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께서는 자기 고향에서조차 배척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서조차 버림을 받고 있는 것에서 예수님은 실상 모든 유대인들에게서 버림을 받고 있습니다.

 

그처럼 버림받음에 있는 예수께서는 유대인에게만 아니라 이방인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온 세상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많은 과부가 있었으나 엘리야는 그들 어느 누구에게도 보냄을 받지 않고 시돈 땅에 사는 이방인인 사렙다 과부 한 사람에게만 보냄을 받았으며(왕상17:1-16), 선지자 엘리사 때에는 이스라엘에는 많은 문둥병자가 있었으나 엘리사는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고쳐 주지 않았고 오직 이방인인 수리아 사람 나아만을 고쳐 어린 아이의 고운 살처럼 깨끗함에 있게 한 것에서(왕하5:1-14)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는 악한 죄가 말해지고 있는 것처럼, 예수께서 고향에서조차 외면되고 있는 것에서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로 오셨으나 그들은 주님으로 영접하지 않은 악한 죄에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한 예수께서는 그들만이 아니라 이방인 모두에게도 구주가 되시는 온 세상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행사하셔서 우리를 주님 안에로 부르셔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신, 포로 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얻도록 하셨으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볼 수 있게 하시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셔서 주님의 은혜의 시대를 살게 하신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에게서 선포된 포로 된 자에게서 자유에 있게 한 구원은 그동안 포로로 구속(拘束)되어 있으면서 잃었던 자신들의 본 땅에로 돌아가는 자유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눈 먼 자가 보지 못함에 있던 것에서 다시 보는 자로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언약에서 약속되고 있는 것을 다시 바라봄에 있게 되었습니다. 부요하고 힘 있는 강한 자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억눌려 있었으나 해방되어 다시 찾고 자기 집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 것에서 누리는 평화를 다시는 잃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주로 받아 죄에서 구원을 받은 자가 되었다는 것은 이 모두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말입니다. 세상이 결코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이 결코 줄 수 없는 것을 믿음의 주이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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