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는 변론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1)
누가복음 9장 46-48절 / 46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47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48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예수께서는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여 생명의 주님이심을 알게 하시며 그 신앙고백에 있게 하시는 것을 통해서 주님의 교회를 세워나가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죽으실 것과 부활하실 것에 의해서 하실 것이기 때문에 이때로부터 이 일을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알리시며 그 믿음에 있게 해 나가셨습니다. 변화산에서의 가르침에서도(눅 9:31), 그리고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서기관들과 논쟁이 벌리고 있을 때 예수께서 그 아이를 고치는 이적을 행하시는 것에서도 자신이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할 것을 잊지 말 것을 당부하셨습니다(눅 9:44).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뜻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왜 그러한지 그 까닭을 그 뜻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해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해 주셔도 마음이 닫혀져 있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지닌 내면적 의미를 도무지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를 알고자 묻는 것조차 두려워하였습니다(눅 9:45).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에 있으시게 되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까닭에 예수께서 자신이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므로 단지 그 사실이 염려되고 두려울 뿐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은 차마 묻기조차 어려워하였습니다. 이는 앞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올라가시는 것에서 일어날 일인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해 주셨을 때 베드로가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가로 막는 말을 함으로 예수님으로부터“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마 16:23) 라고 꾸짖는 말을 들었으며, 자신들 또한 모두 함께“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마 16:24-28) 라고 하는 가르침을 받았었는데, 이 말씀에 제자들의 믿음이 아직 이르지 못한 상태에서 예수께서 거듭 자신의 죽임을 예고하시는 것에 예수께 닥칠 일로 큰 두려움에 휩싸일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자들에게서 본문에서 보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제자들 사이에서 자신들 가운데 누가 더 크냐고 하는, 즉 자신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자인가 하는 것으로 변론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변론이 갖는 원문의 개념은 언쟁에 있는 것에서가 아닌, 내적 생각이나 견해 또는 무엇인가에 대해 갖는 사고의 개념에서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제자들이 변론에 있었다는 것은 서로 얼굴을 맞대고 붉히며 말다툼을 하는 상태로까지 번진 것은 아니지만, 제자들의 마음에서 소리 없이, 그러나 제자들 사이를 갈라놓는 다툼이 있게 하는 생각들이 저마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에서 입니다. 하지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이러한 제자들의 마음에 일어난 누가 더 큰 자인가라는 생각은 마음에만 머물지 않고 어느덧 제자들 사이에서 분출되듯이 표출되어 길가에서 서로 이러쿵저러쿵 하며 변론하기에 이르더니 결국은 예수님에게“천국에서는 누가 더 큰 자입니까?”라고 묻기에 이릅니다(마 18:1; 막 9:33-34). 이러한 것이 누가복음에서는 이러한 제자들의 큰 자 논쟁에서 그들의 마음에 일어나고 있는 것에 초점을 두고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을 뿐입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에 말없이 다툼이 일어나며 그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고 있는 논쟁, 곧 제자들이 어떤 생각에 있었는지를 아시고, 한 어린아이를 데려다가 자신의 곁에 세우시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너희는 이 어린아이를 보아라!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너희 중에서 가장 작은 자가 가장 큰 자이다.”제자들 사이를 분열시키고 있는 것은 그들 마음에 일어나고 있는 저마다 자신이 제일 큰 자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의‘큰 자’는 다른 말로는‘높은 자’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더 높은 자이냐는 것에 생각에 잠겨 있으나 서로에게 마음을 드러내지 않은 채 감추고서 서로 견제의 눈치에 있는 상태입니다.
이 시점에서 제자들이 왜 이렇게 누가 더 큰 자이냐는 것에 마음을 빼앗겨 서로 견제하며 싸움에 있듯이 그렇게 갈라져 있어 불편한 사이에 있는지요. 이는 예수께서 여러 차례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알려주신 것과 관련해서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대속주로서의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수행하여 가시는데, 이러한 자신을 따름에 있는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하나님의 일을 생각함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야 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죽임을 당하시는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임을 당하실 것을 거듭 예고해 주시는 것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때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서 기대하며 바라보는 이스라엘의 구원자의 모습은 예수께서 알려주신 대속주에서가 아니라 모세 또는 엘리야의 활동에서 보는 것에서 이며, 삼손과 같은 사사에게서 보는 것에서입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의 구원자는 가령 국가를 위기에서 구한 잔 다르크와 같은 영웅에 불과합니다. 그렇다 보니, 제자들의 마음에 자리 잡으며 떠오르는 생각은 이스라엘이 새롭게 재건될 때 영향력을 끼치며 활동을 많이 하여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을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며 각각 자신들이 죽임 당할 위험에 처하게 되는 예수님의 곁에 끝까지 남아 있으면서 그 위기를 벗어날 수 있도록 충성을 다해야겠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며, 그럴 경우 그 공로를 인정받아 공신의 반열에 들어 주의 곁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을 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에 자리하고 있는 이러한 생각을 아시고는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깨부수는 일을 하십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생각은 그야 말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에 있는 것이기에 이러한 자기를 부인하는 것에 있지 않으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주님을 따름에 있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한 예를 들기 위하여 한 어린아이를 제자들 앞에 세웠습니다. 그리고는 말씀하셨습니다.“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우리 한글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지만“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와“너희 모든 사람 중에”사이에 원인이나 이유를 나타내는 말인‘그러므로’,‘왜냐하면’,‘그렇기 때문에’를 뜻하는 말이 들어가 있습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내가 너희에게 천국에서 누가 큰 자인지를 말해 줄테니 잘 들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이는 풀어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은 논리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아이를 영접함
예수께서 제자들이 영접한 어린아이의 주님이 되심
그러니 제자들은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에서 그 아이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영접함에 있음
주 예수님을 영접한 제자들은 곧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임
주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을 영접한 제자들은 하늘에서 주 예수님과 하나님으로부터 영접을 받을 것임
그렇게 주 예수님과 하나님으로부터 영접을 받는 그 제자들은 하늘에서 큰 자임
그 제자들은 주 예수님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크신 영광과 함께 할 것임
따라서 땅에서 어린아이를 영접함에 있은 제자들이 하늘에서 가장 큰 자임
그는 땅에서 영접함에 있은 가장 낮은(작은) 자였으나 하늘에서 영접 받음에 있는 가장 높은(큰) 자로 있게 되는 것임
예수님은 이러한 의도의 말씀을 하시는 것에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함에 몰두해 있는, 그래서 땅(세상)의 방식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며 한 자리씩 차지하되 동료들 중에서도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픈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잘못된 생각으로부터 돌이키는 자기 부인에 있게 하시며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예루살렘에 올라가심에 제자들도 따름에 있으므로 예수께서 그들을 통해서 세우시는 교회의 초석 삼으심에 참여하게 하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일을 함으로써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세워 가르치셨던 어린아이 한 사람 한 사람을 영접함에 있게 됩니다. 그러한 제자들은 변화산에서 보았던 바인 선지자 모세와 엘리야가 주님과 같이 있는 것에서 찬란히 빛나는 옷을 입고 있듯 한 영광과 함께 하는 천국에서 실로 큰 자입니다.
따라서 본문에서도 우리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통해서 들으며 아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려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예수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죽임을 당할 시기가 가까이 다가온 시점에 이르러서도 그 일이 일어나는 이유도 의미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이 말씀을 알지 못하니 이는 그들로 깨닫지 못하게 숨긴 바 되었음이라”(눅 9:45)라고 하신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그 깨달음에 있게 되는 때가 아직 이르지 않은 까닭인 때문입니다만, 제자들은 예수께서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고 예고해 주신 말씀을 귀 담아 듣고 명심하여 있어야 할 것이었습니다(눅 9:44). 그러나 제자들은 그러하지를 못했었습니다. 그러한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임 당할 것에서, 이 일이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게 하실 것에 세상 나라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서 높은 자리를 탐하여 추구하는 자기를 위한 욕망을 분출하는 잘못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름에 있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에 의해서 그들의 나라가 될 하나님의 나라 앞에서 그들이 해 나가야 할 일이 무엇인지요. 예수님의 죽음에 그들의 죄의 욕망이 묶여 함께 죽음에 있는 것이 아닌지요. 그것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질 자기 부인이며 자기 십자가입니다. 그러한 제자들의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 품으신 하나님의 일에 사로잡힌 마음과 생각입니다. 그에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마음에 원하며 생각하는 하나님의 일을 해 나갔습니다. 예수께서 예고하신 대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고 성령강림하여 권능으로 제자들과 함께 하신 때부터 성령의 다스림에 제자들에게 있은 변화입니다.
해서 말입니다. 예수께서 사도 삼으신 열 두 제자에게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가 있어 왔습니다. 이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에 의해서 전파된 하나님의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있는 하나님의 권능은 온 세상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서 오신 구주이심을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이 교회는 성령의 생각을 좇음에 있는 것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아홉 가지 열매에서 보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습니다. 이게 어떻게 해서 있는 일인지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여기에 대해서는 죽은 자 되고서 생명을 주신 성령을 좇아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것에서입니다. 그러기에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갈 5:22-26).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집니다. 여기에서는 교회가 갈라질 틈을 갖지 않으며 분열하고 분리되는 나누어짐에 있지 않습니다. 교회는 나누어질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 되는 몸에 있는 것이 교회입니다. 우리를 한 성령을 받게 하셨으며, 한 성령에게서 주어지는 믿음에 하나 되게 하신 것은 그래서입니다. 그러니 한 믿음에 있게 하신 이 믿음으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에 힘써 나가야겠습니다.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으로 성령이 하시는 일의 생각과 대적이 되면“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마 16:23)라고 하신 말씀을 공식처럼 생각하고 떠올리시기 바랍니다.‘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 어느 것이 마음을 품고 따를 비중 있는 것인지요.‘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에 있어야겠는지요.‘사람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함으로’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에 있는 자기를 부인하고 그 부인되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 되어야 하지 않겠는지요. 그리고서 생명을 주신 성령을 좇아 성령의 인도를 따름에서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이같은 것을 행함에 있게 하시는 성령의 권능은 결코 제약 받지 않으며 금지되지 않으니 이같은 것을 하고자 함에 주저하고 금할 이유가 없습니다. 참으로 이 일을 하고자 하는 생각과 그 생각에 있는 마음을 억제하지 말며 행함에 자유하시기 바랍니다. 이를 통해서 성령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주님과 한 몸의 믿음으로 하나 되게 해 나가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