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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누가복음 9장 46-50절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는 변론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2)

작성자이천우|작성시간16.08.07|조회수751 목록 댓글 0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는 변론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2)

 

누가복음 946-50/ 46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47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48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49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50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제자들의 마음에 누가 더 크냐는 변론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예수께서 아시고는 한 어린아이를 그들 앞에 세우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으로 한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주님을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주님을 영접하면 곧 주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면서, 그렇게 땅에서 영접함에 있는 가장 작은 사람이 하늘에서 영접 받는 가장 큰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처럼 한 어린아이를 들어 가장 큰 자가 누구인지를 말씀하여 가르치심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질 것을 말씀해 주셨어도 제자들 마음에 싹트며 일어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오해하여 더욱 육체의 욕망과 그에 따른 탐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자기 부인에 있어 주님과 함께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갈 것에 있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요한이 예수께 대답하여 말하였습니다.“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고서는 저희가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그는 저희와 함께 다니는 사람이 아닌데도 선생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그러지 못하게 하였습니다.”이 이야기를 들은 예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너희 중에서 그 누구도 그를 막지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지지하는 자이니 않느냐? 그러니 나와 함께 하는 너희와 같은 자이다. 그러니 아무도 그가 하는 것을 막으며 반대하지 마라.”

 

예수께로부터 하나님 나라의 큰 자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에 있을 것을 가르침을 받았으나 제자들은 주님이 자신들에게 해 주시는 말씀에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신 후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그 너머에 있는 주님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으로서 취하시는 영광에 제자들을 참여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를 여전히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러한 제자들 중 요한은 당시 자신들 주변에서 있는 일을 들어 자신들의 우월성을 자랑하며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그것은 당시에 어떤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았는데, 그는 자신들과 함께 다니는 사람이 아닌데도 주님의 이름을 사용하여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지 못하게 막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이 귀신을 내쫓지 못하였으면서도(9:14-29) 어떤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이적을 행하는 것을 하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자신들과 함께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는 까닭에서였습니다. 제자들의 이러한 막음은 이적 행함을 자신들만이 행할 수 있는 것으로 한정짓는 집단 이기주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도 예수님을 지지하고 있는 사람으로, 그런 사람은 누구나 주를 전파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할 수 있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의 무리에 속해 있지 않으면서도 주님의 이름으로 이적 행함을 혹자는 귀신을 내쫓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퇴마사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인 바리새인들 중에는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물 또는 연기를 사용해서 (마력, 마술), 그리고 어떤 규정된 의식들을 좇아 주문을 외워 이런 일을 수행하였습니다. 이런 행위는 불법한 것이며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 사이에 이러한 행위가 마치 신적 권능에 의해서 귀신을 쫓아내고 귀신들리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의 어떤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이적을 행함은 그들 중의 한 사람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적을 보고 따라하는 것에서 주님의 이름을 멋대로 사용하면서 행한 것일까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름을 가지고 주술적 행위를 하면서 하는 축귀 행위를 예수께서 허용할 리 만무합니다. 왜냐하면 축귀 행위를 하는 퇴마사란 귀신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하는 것인데, 예수님을 귀신의 능력을 행하는 분으로 알고 있는 것이어서, 그럴 경우 귀신들렸던 자의 형편은 사단이 스스로 분쟁하는 것으로 더욱 강한 귀신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기에 이전보다 더욱 악화되는 형편에 처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귀신을 내쫓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 귀신들렸던 자에게서 귀신을 몰아냄으로써 귀신으로부터 자유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있게 하는 것입니다(12:22-30; 3:20-27; 11:14-23). 그러므로 훗날 사마리아 성읍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될 때 사도에게서 성령을 돈을 주고 사서 사도를 흉내 내어 사람들에게 손을 얹는 사람마다 성령을 받게 해 달라고 하며 성령의 권능을 빙자하여 귀신을 내쫓는 일을 하므로 큰 돈을 벌고자 하였던 마술사 시몬을 베드로는 크게 꾸짖었습니다(8:9-25).

 

그런데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자신의 이름으로 귀신 쫓는 자의 행위에 대해 허용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를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이 말씀은 예수께서 바알세불 논쟁이 있었을 때나와 함께하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이고, 나와 함께 모으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이다.”(12:30) 라고 하신 말씀과 그 의미가 같습니다. 예수께서 허용하시고 있는 것은 예수께서 사도 삼으신 열 두 제자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며 또한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신 것에서 입니다(10:1-4; 3:13-19,6:12-16). 그래서 말입니다. 여기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는 제자들의 경우와 같이 예수님을 주로 모시고 섬기는 그분의 이름이 지닌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드러내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로 있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이는 그렇게 주님의 이름으로 이적 행하는 자가 주님과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반대하지 않고 지지하고 있다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일을 하는 그가 열 두 제자의 무리 속에 들어와 함께 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는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가 아니며,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흩어 놓는 일을 하는 자가 아닌, 그가 있는 곳에서 그는 그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일을 하는 것에서 예수님의 열 두 제자와 동일하게 예수님과 함께 하며 예수님을 지지하고 따르는 자입니다. 그러한 그의 이적 행함은 지금 예수님의 가르침에 즈음하여 있게 하신 예수님의 허용에 의한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 있는 성격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의 이적 행함은 주이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는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예수님은 이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그가 행하는 일이 참으로 귀하고 가치 있는 일임을 시사하면서, 그런 소자 하나를 소중히 여길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제자들에게 누가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하여 물 한 잔이라도 주면 그 사람은 반드시 하늘에서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9:41).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임을 밝히며 그분과 그분이 가지고 오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을 기뻐하여 반가이 맞이하는 그 사람은 제자들이 전하는 주님과 그분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한 사람이기에 그 또한 주님의 나라에서 주님과 하나님으로부터 기뻐하며 반가이 맞이하는 영접을 받아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여 하늘 보좌에 계신 영광을 함께 누리는 참으로 하늘에서 큰 자로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시며 제자들이 막은 자의 활동을 허용하신 것은 예수님을 따름에 있으면서 예수님과 직접 함께 하는 제자의 무리에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자가 될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에 대해 예수님의 이름에 있는 하나님의 권능이 하나님의 나라에로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하나님의 한 백성으로 모음에 있는 자가 예수님이 한 어린아이를 들어 설명한 주님의 이름을 전하여 사람들을 불러 모으시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하나님의 일을 생각함으로 예수님을 따름에 있는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자가 하늘의 영접을 받음에 있을 큰 자라고 하는 것을 알게 해 주시는 것에서입니다.

 

하늘에서의 큰 자는 이렇게 이 땅에서의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과 관련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1-12장에서 믿음이 무엇인지를 설명해 줍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장차 이루실 실상을 확신을 갖고서 바라는 것이라며, 비록 지금의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앞으로 일어날 일일지라도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반드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에 믿음이 있기에 눈으로 보는 듯이 즐거움에 있는 것이니, 아벨을 비롯하여 에녹, 노아,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 야곱, 요셉, 모세,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 기생 라합, 또한 사사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 왕, 사무엘과 선지자들 이들 모두는 다 이 믿음에 있은 의로운 자라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있으므로 이 세상의 천지만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음을 압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의해서 있게 되었다는 것을 믿음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입니다. 그렇게 존재하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의 근원으로서 장래 있을 일의 완성자가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은 십자가의 죽음 뒤에 올 기쁨을 아시고 그 십자가를 수치로 여기지 않고 거기에 달려 죽으셨으며, 지금은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의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아계십니다.

 

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것을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만일에 말입니다. 우리가 지치거나 낙심케 되거든 죄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예수께 무서운 악행을 저지름에도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질 일을 잘 알기에 그 모두를 참고 견디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우리에게 주어지는 시련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손에 힘을 쥐고 무릎을 일으켜 우리가 바라보는 것을 향하여 나아가자고 말합니다.

 

우리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에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보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이죠. 오직 육에서 나오는 생각을 좇아 육의 일을 도모해 나가는 것이 전부인 인생인 우리에게서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일으키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을 생각하며 그분의 사람으로 사는 자기를 부인해 나가며 자기 십자가를 지는 믿음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 믿음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우리에게서 이 믿음을 완성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말입니다. 우리가 바라보고 있으며 다다라야 할 이 푯대를 향하여 달려감에 있는 이 의로운 길을 다 마칠 때까지, 그래서 우리에 앞서 계시며 우리를 기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르러 영광스러운 그분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우리에게 달라붙어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짐이 되어 자꾸 넘어지게 하여 그리스도로부터 마음도 몸도 떠나도록 하는 죄를 벗어버리고 나아가야겠습니다. 그렇게 우리에게서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날마다 일어납니다. 영광스러운 영구한 푯대가 없는 자는 이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질 일이 없습니다. 육체의 욕망에서 나오는 생각을 가능한 크게 갖고서 큰 야망, 큰 꿈, 큰 비젼으로 목표를 삼고 할 수 있는 한에는 성취해 나가는 것에 일생을 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영광스럽게 여기는 환희와 환호는 일장춘몽에 비유할 수 있는 것으로 아무리 길어봐야 한 여름 밤에 꾼 꿈에 불과한 헛된 영화이며 덧없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그들의 인생에 전부입니다만, 세상에서 바라보고 세상이 줄 수 있는 것을 얻는 것에 그들의 인생을 건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얻은 영광은 땅에서 그들의 육체의 욕망이 사라지는 날 그들과 함께 사라지는 그야말로 일장춘몽이 될 뿐입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영광스러운 푯대로 삼는 것은 육체의 욕망에서 나오는 생각을 좇아 탐심을 갖는 땅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영에게서 나오는 생각을 따라 하늘의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하늘과 땅이란 차이를 갖습니다. 땅에서 얻는 영광이 하늘에서 얻는 영광에 이를 수 없습니다. 따라서 땅에서 얻는 영광이 하늘에서 얻는 영광에 비교될 수 없습니다. 땅이 갖는 의미이든 땅이 갖는 가치이든 하늘이 갖는 의미, 하늘이 갖는 가치에 비교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히 여기며 아무 일에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살든지 죽든지 항상 자신의 몸에서 그리스도만을 존귀히 여겼습니다. 그런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와 하나 되고자 하는 생각이 그의 온 마음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3:8-9). 그런 그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것에 뜻을 두었습니다(고전 10:31). 이 믿음의 상속자, 이 믿음의 계승자인 것이 교회이며, 그는 하늘에서 큰 자라고 하는 약속에 있는 것이 또한 교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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