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 강도 만난 자에게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 비유 -
누가복음 10장 25-37절 / 25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Ⅰ. 들어가는 말
율법사의 첫 번째 질문 :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의도에서 다음과 같이 질문하였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의 답변하시는 질문 : 율법사가 어떤 의도에서 이런 질문을 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계시는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재질문하시는 것에서 답변을 하셨습니다.“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율법사의 대답 : 그러자 율법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님의 답변 : 율법사의 대답에 예수님은“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라는 말씀으로 답변하셨습니다.
율법사의 두 번째 질문 : 예수님의 말씀에 율법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두 번째 질문을 합니다.“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답변 : 율법사의 두 번째 질문에 예수님은 한 비유를 들어 답변하십니다. 이 비유가 소위‘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입니다.
Ⅱ. 본문 내용
1.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교훈하심
율법사가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질문함으로 예수님은 한 비유를 말씀하시기 시작했습니다. 일반적으로 그 비유를‘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라고 말합니다. 율법사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실상 26절에서 28절로 끝납니다. 율법사가 알고 있는 대로 율법을 행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영생을 얻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율법사는 율법의 본의를 좇아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와 같이 이웃을 사랑함에 있어야 합니다. 율법의 계명에서 하나님을 보며, 계명의 준수는 하나님을 향한 그의 사랑의 행위에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웃은 하나님의 백성 된 공동체로서 그들을 섬기는 것에서 사실상 하나님께서 그들의 주로서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있는 그 자비를 보이는 것이며, 이는 또한 그들의 주로 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율법사는 예수님의 말씀하신 의도와는 다르게 그동안 장로들의 유전을 좇아서 율법을 대해 왔던 그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받습니다. 그래서“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라고 하자 자기의 의를 드러내려고“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율법사는 자기가 모든 율법을 만족시키면서 살아온 것으로 자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하면 둘째 되는 계명인 이웃 사랑도 해 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신이기에 누가 내 이웃인지를 말씀해 주면 지금까지 해 왔듯이 그에게도 선한 일을 행하여 이웃 사랑에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사의 그 물음에 자비를 행하는 자가 누구인가를 어떤 사마리아인을 들어서 설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비유를 통상‘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라고 말합니다만, 적절한 표현은 아닙니다. 예수께서는‘어떤 사마리아인’을 비유로 들어서 말씀하고자 하는 것의 의도를 알려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비록‘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로 제목을 삼을지라도 이는 사마리아인의 성품이 선하다는데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님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 강도들이 그의 옷을 벗기고 돈을 빼앗고는 그를 때려서 거의 죽게 만들어 길에다 버려두고 달아났다. 마침 한 유대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자 피해서 다른 길로 지나갔다. 또 한 레위 사람 역시 지나가다가 그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지만 그도 피해서 그대로 가버렸다. 그러나 유대사람에게 멸시를 받는 한 사마리아 사람은 그곳을 지나가다가 그 사람을 보자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 곁에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후에 자기가 타고 온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가서 밤을 세워 그를 간호하여 주었다. 다음날이 되자 그는 두 데나리온을 여관 주인에게 주며 '이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 만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소'하고 말하였다. 너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를 만난 자의 이웃이 되었다고 생각하느냐』(현대어 성경)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모두 네 사람의 인물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 그리고 강도 만난 사람을 배경으로 제사장과 레위인과 그리고 사마리아인이 등장합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다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죽도록 맞아 거의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곳을 지나던 제사장은 그 사람을 보고 돌보아 주지 않고 피해 갔습니다. 그 다음에 등장한 사람은 레위인인데 그도 같은 행동을 취했습니다. 이들은 다 율법을 엄격히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은 율법 앞에서 흠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율법의 본의는 좇지 않았습니다. 율법에서 첫째가는 계명을 지켰습니다. 누가 봐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보다 작은 계명인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을 지키지를 않았습니다. 작은 것에 충성되지 않고 큰 것을 충성할 수 없는 것이 원리이듯이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 만난 자를 보게 되었을 때 취한 행동은 전혀 하나님의 자비를 드러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보다 더 크고 중요한 계명인 하나님을 사랑하는 계명 준수는 실은 외식하는 신앙에 불과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 사람인 사마리아인은 달랐습니다. 그는 강도 만나 거의 죽게 된 자에게 다가가 그의 상처를 봐주고 그가 완전히 치료받아 나을 수 있기까지 편안히 쉴만한 집을 찾아 제공하는 배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들어가는 재물을 아끼지 않고 사용하였습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죽어 가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자 해서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 만나 죽어 가는 자를 돌보지 않고 피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짐승이나 곤충 등의 주검을 만진 자는 부정하다고 하는 규례에 묶여 있어 마음에 걸리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죽어 가는 자를 대하는 것이 끔찍하고 무섭기도 한데다가, 자칫하면 자신들도 강도를 만나 해를 입을 수 있을 것이기에 아예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마저 들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가 어떻든지 간에 죽어 가는 자를 돌보아 그 생명을 살리는 자비를 베풀지 않은 것은 율법에서 어떤 정신으로 살아야 할 것인지를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할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사실상 그들은 하나님과 그 나라의 의가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반면에 사마리아인이 행한 자비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엄격하게 율법을 준수하는 의보다 더 큰 의였습니다. 그는 생명을 살리는 일에 하나님께서 명하신 이웃을 사랑하라는 자비를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실상 그가 율법이 의도하는 가장 큰 계명을 지킨 것에 속합니다(막 12:31).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지금도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아버지의 일을 맡아서 하고 계십니다. 이 일은‘사랑’이었습니다(마 12:12; 막 3:4; 눅 6:9; 요 5:17).
예수께서 이 비유에서 하시고 싶은 이야기는“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입니다. 즉「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었느냐?」, 또는「누가 강도 만난 자에게 이웃이 되어주었느냐?」 하는 말입니다. 율법사가“자비를 베푼 자입니다”라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바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이는 말이죠.“그 이웃이 행한 것과 같이 너도 그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가서 너도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한 자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따라 자비를 베풀라. 그가 영생하시는 참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게서 보는 그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 베푼 자비가 무엇이기에 예수께서는 왜 이처럼 율법사에게“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이 말씀에는 앞서 28절에서 말한 ("그러면 살리라")라는 말씀이 생략되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지금 율법사에게 그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를 이어서 계속해 가르쳐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지금 율법사, 나아가 유대인들이 안고 있는 문제점인 죄악성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뼈아픈 내용이 있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하면 제사장과 레위인은 지금 모든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의를 좇고 영생을 얻으려 하고 있는데 그 신앙적 내용들이 전부 형식적이고 의식적일 뿐이지 진정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는 일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좋아서 하는 일들이 아닌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율법을 지키고자 하고 있지만 율법에서 정말 중요한 것인 의와 인과 신은 버렸습니다(마 23:23). 강도 만나 거의 죽게 된 자를 외면하여 돌아보지 제사장과 레위인은 실상은 율법사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서 보는 대로 율법사 또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한다고 할지라도 실상 그것은 율법의 정신인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그와 같이 하나님을 섬김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없이 단지 자기가 의롭다는 것을 보이고자 하는 것에서 행하는 자기 사랑에 있을 뿐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되는 종교적 우월감과 성취감 속에서 행해지고 있는, 자기만족에 도취된 자기 욕심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서 그들의 잘못된 신앙관을 교정시켜 주십니다. 강도 만난 자를 만났을 때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행하지 못한 것을 사마리아인은 행하였습니다. 그것은 율법의 계명을 뛰어 넘는 자비였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 자비를 율법사에게“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단지“이웃을 도와주라!”고 선행을 독려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너희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율법에서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 뜻[정신]을 가르침을 받고 있지 않느냐?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섬기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율법을 지키라!”는 말씀을“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그가 유대인이요 더구나 율법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그의 율법 준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관계성에 의해서 행해져야 합니다. 그것은 그의 이웃 사랑에서 잘 보여집니다. 왜냐하면 율법에서 첫째 되는 계명은“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라는 것이며, 이 계명을 지키는 자는 또한“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첫째 되는 계명과 같은 둘째 되는 계명도 지키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이웃 사랑은 첫째 되는 계명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다른 모든 계명과 선지자들의 요구는 이 두 계명으로 요약됩니다(마 22:37-40).
예수님은 율법사에게“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라고 말씀하셔서 그가 만일 이 율법의 계명대로 산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그러면 살리라”는 말씀은“율법에서 하라고 한 대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그는 그가 사랑한 하나님과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주시는 영원한 생명에 그 또한 있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말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자비를 베푸는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자는 그가 행한 선한 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을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여 하나님과 생명의 언약적 관계에 놓여 있어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함에 있는 사실로 인해서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 사랑의 행위의 성격
그러면 선한 사마리아인에게서 보는 '자비', 곧 사랑의 행위는 어떤 성격의 것일까요?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 주라는 것이 구제와 같은 선행을 뜻하는 것이겠습니까? 물론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그런 선행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한 사랑의 행위의 실체는 그가 지금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열정을 가지고서 신행(信行)하여 하나님과 그의 이웃을 섬기는가 하는 것입니다. 가령 다음의 몇 가지 예를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8장 1-11절에는 유대인들이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붙들린 여인을 끌고 와서는 주님을 시험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묻습니다.“이 부정한 여인을 어떻게 할까요? 돌로 쳐 죽일까요?”주님은 그러는 저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시다가 땅에 무엇이라고 쓰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인을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주저주저하다가 한 사람씩 슬그머니 자리를 떠 흩어지고 맙니다. 유대인들이 부정한 여인을 돌로 쳐 죽이자고 한 것은 저들이 지금 하나님의 거룩성이 훼손된 데 대해 치를 떨고 분노하면서 하나님의 거룩성은 지켜야한다는 자존심을 위하여 여인을 죽이므로 죄를 다스리겠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존엄하신 말씀을 불순종하여 따르지 않고 죄에 이끌려 사는 여인을 돌로 쳐 죄 값을 치르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거룩성을 회복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저들은 그렇게 하는 것을 통해서 지금 자기들이 얼마나 율법에 충실하고 있는가 하는 자기 의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부정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는 것을 통하여“우리는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깨끗하다”고 하는 자기 의를 드러내고자 하는 악한 마음에 의해서입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말씀하여서 그들의 악함을 꼬집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죄 없는 의인은 없기에 한 사람 두 사람 그 현장에서 떠나갔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얼마나 그릇되게 나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우리가 여기에 나오는 유대인들처럼 자기 다른 사람에 비해서 자기는 괜찮은 사람인줄 알고 있으면서 그 의를 드러내기 위하여 하나님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서 이런 저런 신행(信行)을 하는 것은 아닌지요. 만일 그렇다면 악한 마음으로 있는 악한 자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그렇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길을 가는 중에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된 사람을 보았을 때 그들은 각각 모두 그를 피해서 자기 길을 갔지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부정을 타지 않으려고 했으며 도와줌으로써 부정한 자가 될 수 있는 것을 면했습니다. 그러한 그들은 율법으로는 의로운 자였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자가 할 수 있는 자신과 함께 하나님의 백성 된 자기 이웃의 생명을 살려 지킬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의 모든 계명을 동원해서 알게 해 주시고 있는 주 하나님을 사랑할 것과 그와 같이 또한 이웃을 사랑할 가장 큰 계명의 실행에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한 사마리아인을 비유로 들어 이야기 해 주신 것은 그의 선행을 들어 선행을 함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영생하시는 하나님과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웃과 함께 하며 사랑하는 사이의 관계에 있는 것에 영생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데, 율법사가“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묻는 것에 답변해 주시는 것에서 하신 것입니다. 율법사의 이 질문이 질문다운 것인지요. 자신의 이웃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해서 그가 그렇게 자신이 이웃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찾는 질문을 한 것이 아닙니다.‘자기 의를 드러내고자’, 그러니까 자기가 옳다고 하는 것을, 자기가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고자 해서 그렇게 질문한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율법에 의로운 제사장도 레위인도 외면한 강도만나 거의 죽어가는 사람을 사마리아인이 도와준 것을 비유로 들어서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은 제사장도 레위인도 아닌,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이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된 것에서 알려주시는 것은 자비를 베풀어 이웃이 된 그가 주 하나님을 사랑할 것과 그와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을 ㄹ것에 있다는 것을 통해 비유에 든 제사장과 레위인에 의해서 지적해 주고 있는 자비를 필요로 하는 이웃을 외면함에 있어 하나님의 뜻을 따름에 있지 않으면서도 자기 의를 드러내어 자랑하려는 율법사를 부끄러움에 두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갖는 열심, 곧 사랑의 행위는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우심의 충동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심성은 죄가 하나님의 거룩성을 훼손시키는 것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그에게는 하나님에 대해 가지고 사랑의 힘이 죄를 향하여 '의로운 분노'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죄를 심판합니다. 우리는 그 예를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이스라엘을 심판했던 데서 볼 수 있습니다. 민수기 22장부터 시작되는 내용에서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이 멀리서 내려다보이는 모압이라고 하는 곳에 진을 칩니다. 모압의 왕 발락은 노도와 같이 밀려드는 이스라엘을 두려워하며 발람 선지자를 찾습니다. 이스라엘을 저주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계신 하나님이 발람의 발걸음을 차단하십니다. 끈질긴 발락의 유혹에 드디어 발람 선지자가 모압으로 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의하여 어거된 그의 입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합니다. 그 축복 속에는 메시야의 도래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민 24:17). 그러나 본래 재물을 탐하는 거짓 선지자 발람을 하나님께서 놓으시자 그는 발락을 위하여 한가지 꾀를 제공합니다. 즉, 바알브올의 신전에 있는 미인들을 이용하여 이스라엘을 범죄케 하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순식간에 엄청난 범죄에 빠지게 되고 이에 하나님이 진노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령합니다. 이 바알브올에게 부속된 자들을 죽이라는 명령이 내립니다. 이때에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창을 들고 범죄에 빠진 천 명의 사람들을 심판합니다. 그런 비느하스를 두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합니다.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중에서 그들을 진멸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너에게 평화의 언약을 주겠다"고 합니다(민 25:11-12). 비느하스의 질투란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힐 수가 있는가? 어찌 그의 백성이 그의 크신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을 수가 있는가? 참으로 그럴 수 있는가? 이와 같은 심정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질투요 그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심정으로 있는 비느하스의 질투였다는 것입니다. 비느하스는 이렇게 하나님의 심정으로, 그 의로 불의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열심을 보였습니다. 이것이 그에게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행위였습니다.
이 비느하스의 질투와 모세의 율법을 들먹거리면서 예수님이 부정한 여인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보자고 하는 유대인들의 잘못된 열심의 차이를 알겠는지요. 또한 율법사가 율법에 철저한 자기 의를 과시하는 것이 결코 하나님을 사랑해서 가진 행위가 아닌 것을 알겠는지요. 율법사는 율법의 조항 하나하나를 지키는 열심을 자랑스러워하였습니다만, 그 모두에서 하나님이 나타내신 뜻인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에 있지는 않았기에 사랑으로 대하지는 않은 것을 이제는 알 수 있겠는지요. 그는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시는 사건으로 끌고 가면서까지 구원하여 자신의 생명을 새생명으로 주고자 하시는 많은 사람, 그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하는 행위가 없는 데서 잘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이는 율법사이나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서 알게 해 주시고 있는 주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인 이웃을 사랑함에는 그의 마음이 가 있지 않고 단지 자기를 의롭게 보이는 것을위해서 율법의 계명을 지키고자 할 뿐인데다가, 역시 율법에서 알게 해 주시고 있는 그리스도와 그분을 믿음으로 주어지는 영생(요 6:40; 12:34; 17:30; 롬 10:4; 갈 3:24)을 그의 이웃인 백성들에게 가르치지 않는 것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율법사와 그의 가르침을 좇는 유대인들은 율법을 받았음에도 여기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그리스도를 놓치고 있습니다(요 12:34). 하나님이 정말 자기들에게 원하고 있는 일로 나아가고 있지를 않습니다. 그래,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예수님을 시험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곤경에 빠뜨리게 하려고 합니다. 정죄 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자기 의를 나타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했으며, 핍박하여 십자가의 길로 몰아갔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실은 그 십자가의 길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온 세상에 생명의 구원을 주시려 준비해 놓으신 섭리 속에 있는 일이었습니다.
3.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께서 율법사에게 말씀하신“가서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라고 하신 의도의 바른 이해를 가져야 함
예수께서 한 사마리아인을 들어 비유로 말씀하신 것에서 율법사에게“가서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는 당시의 율법사와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유대인, 그리고 오늘날의 목사와 교사 및 이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선행(善行)을 가르치며 이것이 하나님과 그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마땅한 도리인 기독교 윤리이며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백성의 마땅한 삶의 정신이라고 하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에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율법사에게“가서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라고 말씀하셔서 그가 만일 그가 알고 있으며 또한 대답한 율법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본의를 좇아서 사는 것에 있다고 하면 그는 과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그러면 살리라”는 말씀은“율법에서 하라고 한 대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그는 그가 사랑한 하나님과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주시는 영원한 생명에 그 또한 있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강도를 만난 자에게 베풀어질 자비는 그가 다친 상처를 치료하고 싸매 주며 낫기까지 돌보아 그의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하나님의 생명이 함께 하는 이웃에게 이웃이 되어 줄 율법사가 율법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의 자비를 베풀 일은 무엇이겠는지요. 그는 그가 율법을 읽어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들으며, 그래서 율법에서 알고 있는 하나님이 명하신 자비인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대로 하는 것입니다. 율법사로서 이렇게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행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의 마음이, 그의 목숨이, 그에게 있는 힘이 온전히 주께 있는 것에서 그는 주께서 주신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또한 이를 주의 백성들에게 전하여 가르쳐야 하니, 율법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본의를 좇아 올바르게 해석하고 그 설명을 백성들에게 해 줌으로써 그들의 마음과 목숨과 힘 또한 율법사가 행하고 있는 주 하나님을 사랑함과 또한 그들의 이웃을 사랑함에 있게 해야 합니다. 율법사의 그러한 행함은 백성들의 죄를 깨닫게 하고 그 죄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의 의로 오시는 메시야를 향하게 하여 메시야께서 베푸시는 자비를 입게 하니 영생이 약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율법사에게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들어“가서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라고 하신 말씀은 자비를 베푸는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자는 그가 행한 선한 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을 것이라는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서 선행을 가르치고 명하신 것이 아니라, 율법사가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맡고 있는 율법을 가지고서 행할 수 있는 그의 직무와 관련하여서 마땅히 그가 해야 할 일을 행하여야 할 것을 가지고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율법사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주로 받아 따름에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의 가르침을 받는 백성들 또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주의 나라의 백성으로 있는 믿음에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러한 율법사와 그의 가르침에 있는 백성들은 그들이 믿음으로 따른 주님의 생명과 함께 함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음에 있습니다. 그러니 말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여 하나님과 언약적 관계에 놓여 있어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함에 있는 사실로 인해서 그들에게 약속된 영생을 얻을 것임을 말씀하여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4.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의 실행에 있는 교회
그러기에 영생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의 구원을 주시는 자비, 곧 사랑을 입음에 있지 않고서는 얻을 수가 없습니다. 유대교에서 보는 종교적 행위에 의한 열심, 그 방법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그를 믿는 자의 관계성의 질인‘사랑’을 함께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고서는 결코 알 수 없으며 얻을 수 없는 것이 영생입니다. 이 영생에 있는 사랑은 예수께서 세우신‘교회’안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집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한 몸 된 그의 몸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랑을 실제적으로 행하는 곳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과 함께 그리스도의 몸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지체인 믿음의 형제와 자매를 주께서 공급하신 생명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은사를 따라 섬겨 주께 믿음을 굳건히 하도록 돕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연합하여 있는 각 지체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아서 서로 섬기는 중에 함께 자라 가는데서 '한 몸'으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가진 믿음의 주께 대한 사랑과 그 열심은 교회를 통해서 실제적이며 구체적으로 발휘됩니다. 우리는 사랑의 행위의 실체를 그 실증을 말한 바울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1절 이하에서 바울은 자신 스스로를 두고 복음에 미쳤다고 말합니다. 이는 달리 표현하면 교회에 미친 것입니다. 바울로 하여금 이 복음에 미치도록 만든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바울로 하여금 복음에 미치도록, 교회에 미치도록 떠밀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을 떠밀고 있는 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이냐 하면 한 사람이 많은 사람을 위하여 죽으시고, 그래서 많은 사람을 살리신 그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생각하면 바울은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도 죄송스러워 미워할 수가 없으며, 불평하고 싶은 그럴 틈을 전혀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복음에 외인이 되어 있는 자들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드려 사용되어지는 일에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한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는 한 몸으로 열 개의 몸이 되어서 살았습니다. 교회의 몸이 되어서 살았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여 주로 섬김으로써 갖게 된 사랑의 행위란 이런 성격의 것입니다. 자기의 죄인 됨을 항상 인식하며, 하나님의 의를 그 마음에 품고 있고, 주님의 사랑의 강권에 이끌려 그 힘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는 신앙이란 바로 이 사랑의 행위를 갖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여서, 주님에게 미쳐서 그분에 대한 사랑에 불타서 지금 자신이 이 주의 날에 교회로 모여 연합하고 있으며, 예배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로 얻은 덕과 그 유익함을 가지고서 지속되는 교회적 삶을 살아가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신앙이 자신으로 하여금 거룩한 규례 - 종교적 예배의 요소 -를 좇게 하고 경건의 연습에 몰두하게 하고, 이 교회를 위해서 살도록 그렇게 자신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Ⅲ. 결론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를 보며 해석에 주의를 가져야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를 보는 우리는 예수께서‘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신 당시가 아직 십자가의 구속을 이루시기 전으로 율법 아래 놓여 있는 상태의 유대인[율법사]에게 하신 것임을 인식하고서 여기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의도가 무엇인지를 보고자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시험하여 영생을 얻기 위해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율법사에게 하나님께서 율법에서 말씀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대답하게 하시며“네 대답이 옳도다. 그러니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라고 하시고, 이웃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면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의 정신을 행함으로 보이겠다고 하는 율법사에게 어떤 사마리아 사람을 비유로 들어 다시“가서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라고 하신 것은 율법 준수에 의한 구원론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율법에 담겨주신 하나님의 참 뜻이 무엇인지를 끄집어 내주셔서 유대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아 맡은 자로서 여기에서 영생을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신을 잃어버리고 단지 형식만 좇음으로써 사실상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에서 떠나 있는 악한 자들임을 드러내 알게 해주시는 것입니다.“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라고 물으셔서“자비를 베푼 자입니다!”는 대답을 이끌어 내시는 것을 통해서 율법의 계명들에 흠이 없음을 자랑하며 자신이 의로운 자임을 내세우는 율법사에게 그가 과연 주 하나님을 섬기며 사랑하는 마음에 있기나 하는지,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백성을 자기 이웃이 되어주고 있기는 하는지를 드러내 주심으로 실상은 그가 영생을 얻는 의에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는 율법의 모든 계명들을 지키는 것에서 단지 자기가 의롭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칭찬을 들으며 존경을 받고자 할 뿐입니다. 즉 자기를 의롭게 보이는 방편으로 율법의 계명들을 지켜왔을 뿐입니다. 그래서 비유에서 보듯이 율법에 저촉되는 일을 하여서 부정한 자가 되는 것을 피하려고 함으로써 자신을 지키려고 할 뿐이지 강도만난 자를 돌보아 치료하여 그의 생명을 살리는 일에서 보는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그와 같이 이웃을 사랑할 마땅한 일에는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영생을 얻는 의로운 자이기 위해서는 율법사는 자기를 위하여 율법을 지켜오던 것에서 나아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듣고 여기에서 알게 해 주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섬기는 것에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시험하는 자로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의에서 보고 있는 그리스도이시오 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따름에 있는 자로 있어야 하며, 백성들을 율법의 종이 되게 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으로 짊어지고 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서 자유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는 것에 자신에게 공급되고 있는 하나님의 자비를 따라 가르침을 주는 것에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영생을 얻는 의를 율법으로는 무흠한 것을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하여 율법이 걸림돌이 되어 넘어지게 하려는 율법사의 의도를 간파하신 예수께서 그의 시험을 통해 율법이 지니고 있는 하나님이 뜻하신 의도를 온전히 설명해 주심으로써 반박하지 못하게 하시며 그의 의롭지 못함을 드러내심으로 부끄러움에 두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