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 있을 것이다, 너희 바리새인이여!(1)
누가복음 11장 42-44절 / 42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 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43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 도다 44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예수님은 바리새인을 심하게 책망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행동에 잘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해서는 안 될 것을 행해서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행하는 것을 잘못하고 있어서입니다. 바리새인은 장로들의 전통에 따라 정결 의식을 지켜왔습니다. 그 정결 의식은 모세의 율법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정결 규례를 그것에 한정하지 않고 확대하고 확장하여 자신들의 생활에서 행하는 것에 적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식사하기 전에 손을 깨끗이 씻는다든지 깨끗이 씻은 그릇에 음식을 담는다든지 등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유대인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나라 사람들이 갖는 공통된 생각에서 갖는 관습에 의한 전통일 것입니다. 위생상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근동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경우는 더 그렇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에 의한 정결 규례에 근거해서 자신들의 생활 습관에 필요한 것에까지 확대, 확장하여 적용하며 이를 종교적인 목적에서 거룩한 의식을 행하는 것으로 정결 의식을 가져나갔습니다. 그렇다 보니 말이죠. 식사하기 전에 손을 씻지 않고 식탁에 앉는 자는 부정한 자이며, 깨끗이 씻지 않은 그릇에 음식을 담아 먹는 자 또한 부정한 자로 규정하며, 그들은 유대인이면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하는 자이며, 그들은 유대인이면 마땅히 해야 할 행동을 하지 않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고 범하는 참으로 악한 자로 여겼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깨끗이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고, 깨끗이 씻지 않은 식기에 음식을 담아 먹음으로써 음식이 부정해지는 것이 아니며, 그렇게 해서 먹은 음식이 사람을 부정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예를 들어서 설명하였습니다. 깨끗이 씻지 않은 손과 그릇으로 먹은 음식은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는 것이 결코 아니라 배로 들어가서 뒤로 배설되어 나오기에 그 음식이 사람을 더럽힐 수 없으니 그 음식으로 사람이 더럽혀지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이죠. 예수님은 사람이 더럽혀 있는 것은 음식에 의해서가 그런 것이 아니라 비록 겉은 깨끗이 씻지만 속마음은 여전히 탐욕과 악독이 가득 차 있어서 더러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서는 그들을 그렇게 탐욕과 악독이 가득 차 있게 하는 것에서 돌아서 그들은 그가 사랑해야 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하며 그들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의 뜻을 순복해 가야 할 것을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눅 11:39-41) 라고 하는 말씀으로 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의 겉을 만드시고 속 또한 만드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깨끗하게 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보내신 구주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야 할 것을 내비추시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들의 속마음이 깨끗함을 받음에 있지 않고 탐욕과 악독으로 가득 차 있어나갈 때 화가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말이죠. 그들이 비록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는 철저함과 아주 엄격함에 있을지라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은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들에게 왜 그처럼 화가 있을 것인지에 대한 이유를 잘 알려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개역개정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성경 원문에는“화 있을진저”라고 말씀하신 후에 그 이유를 설명해 주는 것에서“왜냐하면”이란 뜻을 지닌 단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왜냐하면 너희는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고 있다. 하지만 이것(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도 행하고 저것(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도 행하여야 한다.” 이것들 중에서 그 어느 것도 행하지 않아도 될 것은 없다는 것이요, 그래서 그 모두는 어느 것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언급되고 있는 세 가지 식물은 약초들인데, 박하는‘향기롭고 달콤한 냄새가 나는’정원에서 재배하는 향기 짙은 조그만 식물로 향료 식물로 쓰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식물의 가루나 즙을 집이나 회당의 바닥에 뿌려 향기를 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운향은 녹회색의 잎과 노란꽃을 가진 식물입니다. 그리고 모든 채소에서의 채소는 어떤 특정한 종류의 채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총칭으로 이것저것의 채소를 뜻합‘니다. 그런데 이와 병행되는 구절인 마태복음 23장 23절에서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의 ‘회향’은 미나리과에 속하는 식물로 양념의 향료로 쓰입니다. 그러니까 음식의 맛을 살려주는 향기를 지닌 양념 식품으로 쓰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근채’또한 역시 미나리과에 속하는 향기가 짙은 식물로 양념이나 약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식, 약용 및 향료로 쓰이는 약초인 세 가지 식물을 십분 일은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 규정으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이 식물들은 십일조를 규정하고 있는 율법(레 27:30-33; 신 14:22-29)에는 기록되지 않은 것들입니다. 율법에서 십일조 규정은 식, 약용 및 향료로 쓰기 위하여 정원에서 키우는 약초들이 아니라 토지 소산으로 농사짓는 작물인 땅의 곡식과 나무의 과실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같은 주요 농산물들과 가축에 적용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박하와 회향과 근채)는 십일조에 규정되지 않은 것으로 십일조 규정에 묶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땅 위에서 소출하는 모든 것이라는 개념이 포함된 것으로 그 범위를 확대하고 그에 따른 종류를 확장하여 백성들이 생활하는데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사소한 부분에까지, 곧 양념, 약용, 향료품에까지 신경 써 가며 작고 아주 적은 분량에조차 십분의 일을 엄격히 떼어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 규정에 포함하여 지켜왔습니다. 랍비 규범에 의하면 심지어는 뗄나무까지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요구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이런 행동은 못하게 말리고 금지시키고 할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그처럼 세세한 부분에까지 신경과 마음을 써서 십일조를 드린다면, 이는 성전과 이와 관련한 일을 맡아서 봉사하는 자들의 생활을 보살펴 성전 외의 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직 성전의 일에만 마음을 집중하여 살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참으로 의로운 일이요 선한 일에 그들의 자비가 함께하는 참으로 유익한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십일조를 책망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행한 십일조가 잘못이기 때문이 아니라, 왜 그처럼 백성들의 가정에까지 그리고 주방 생활 에까지 십일조 규정을 의무로 짊어지게 하여 철저하고도 엄격히 지켜가게 하는가에 대한 그들의 본심을 보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속마음이 탐욕과 악독으로 가득 찼기 때문입니다. 여기서의 탐욕은 ‘강탈’,‘약탈’,‘착취’의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는 말이죠. 겉으로는 깨끗한 모습에 있으려고 하지만 그들의 속은 불의한 욕심으로 탐하는 마음이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는 말이죠.‘한 청지기 비유‘(눅 16:1-13)를 말씀해 주시는 것에서 바리새인들이 어떤 자들인지를 알려주시는 것으로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라는 평가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런 그들은 돈에 대한 탐욕으로 가난한 과부의 가산인 참으로 적은 돈까지도 종교적 의무를 이용하여 삼키는 행위까지 서슴치 않았습니다(막 12:40). 그리고 그들의 속이‘악독’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은 ‘악한 성품의’,‘타락한’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것으로 ‘시기심’,‘욕심’을 의미하여서 그들의 탐심이 그들이 사랑의 품에 안고 있어야 할 백성의 재산에 대한 시기와 욕심에 따른 것으로 그들의 부패한 악한 성품에서 나오는 때문인 것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며, 이러한 모습을 갖는 것에서 백성의 존경을 받으며 백성들이 따라 하게 하는 것에서 있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하여서 쌓이는 십일조가 그들의 배를 불리는 것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그들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에까지 십일조를 드림에 있는 아주 적은 분량의 십일조에까지 세심히 마음을 쓰는 것입니다만, 그들의 탐욕과 악독이 가득 차 있는 마음은 그들이 정한 십일조의 규정보다 더 큰, 마태의 표현에 의하면‘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 곧 공의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아예 염두에 없었습니다. 공의는‘정의’,‘의로움’이라는 의미인데, 유대인의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이 자신의 백성들에게 공의로워야 할 것이 무엇이겠는지요. 가난한 사람들이 부요한 사람들에 의해 당하는, 요즘 말하는 갑질 당하는 을을 생각해 보십시오. 불의에 억압당하는 사람들이 있죠. 이들 모두는 연약한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은 어떠해야 하겠는지요. 그들을 이끌고 있는 지도자로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 있어야 하며, 그래서 힘이 없는 연약한 자란 사실로 인해 잘못한 일이 없고 죄가 없는데도, 그리고 생각지 않은 일로 억울함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그들의 보호자 역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가 그들의 마음에 강같이 흐르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으로 자비로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원문은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연관성을 갖는 등위 접속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하나님의 그 사랑’으로 직역할 수 있는 것으로‘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랑’이란 의미를 지닙니다. 따라서 공의를 베푸는 것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랑을 행함에 있는 것은 동시에 추구되어야 하는 같은 소중한 가치를 지닙니다.
바리새인들이 말이죠. 율법에 의한 십일조 규정에 근거해서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에까지 십일조를 드려왔으며, 이를 백성들에게도 철저하고도 엄격히 따를 것을 가르친다면, 이렇게 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맡은 사람들과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베푸는 것에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공의로우시며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나타내며,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께 있도록 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바리새인들은 그렇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은 십일조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준수했지만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에 대해서는 한치의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엄격함은 십일조 규정의 준수에만 있었지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대해서는 엄격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이들의 마음은 “공의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버렸도다”라고 한 말씀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의‘버렸다’는‘지나치다’,‘비켜가다’를 뜻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에서는 벗어나 있으면서 단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지켜갈 뿐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말이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에는 마음에 없어 주의하여 살피는 것이 없이 외적 형식만을 가져나가는 것에 온 신경을 집중하여 치중할 뿐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내용은 없이 단지 외적 형식만으로 관습처럼 가져나가는 십일조 준수는 외식, 그러니까 겉 모양만 가져나갈 뿐이었습니다. 이는 말이죠. 하나님을 의식함이 없이 단지 사람만을 생각하여 그들에게 자신의 엄격한 준수만을 보임으로써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며 그런 자신들을 따르게 함으로 자신들이 얻는 이익에 목적을 둘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말이죠. ‘당연히 해야 한다’,‘마땅히 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일조 율법이 지닌 큰 의미에서 아주 작은 물품에까지 비록 아주 적은 분량일지라도 십일조 규정을 가져나가려고 하는 마음을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에 의해서인지요. 그것이 지닌 큰 의미인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행해지는 것에서 말이죠.
율법으로 주어진 십일조 규정, 곧 십일조 계명은 율법이 존속하는 한에는 지켜져야 할 것이었습니다. 큰 틀에서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 그리고 가축들에서 십일조를 유대인들은 율법이 주어진 모세 시대 때부터 조상 대대로 따르며 지켜왔습니다. 시간이 많이 흐른 후대의 백성들은 조상들보다도 더 철저하고 엄격히 지키려고 하였습니다. 아주 작은 사소한 것에까지 세세히 지키려고 했으니깐요. 그렇게 하는 것에서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고 백성을 위하는 것에 있다면 이는 참으로 당연히 행해야 할 것으로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성취하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계속되어 갈 것입니다. 그런 것에서 십일조는 율법을 온전히 성취해 가시는 과정에 있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기간에서는 아직‘이것도 행할 것’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성취함으로 십일조 규정이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온전히 성취하여 그리스도께서‘사랑의 법’으로 온 세상 사람들에게 주어진 후에는 그동안 행하여 왔던 기능과 역할을 다 마쳤으므로 종결되어 폐해져서 사라질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말입니다. 십일조 규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성취로 있는 가나안 땅에서 세워질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띤 이스라엘 왕국에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실 자인 메시야를 모형, 또는 예표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정복해 차지하여 이스라엘 왕국을 세우고 성전 생활을 하는 시대에서 이스라엘 열 두 지파 중 열 한 지파가 정복한 가나안 땅을 소유하여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름으로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살아가게 하신 것과는 달리 성막(성전)의 일을 맡아 수행하는 일로 땅을 분배 받는 것에서 제외 된 레위 지파를 위하여 열 한 지파가 하나님의 기업으로 땅을 분배 받은 것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기업을 소유하는 것으로 열 한 지파가 분배 받은 땅에서 얻은 소산인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분의 일과 소와 양의 첫새끼는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하여 바치게 하고 이것을 하나님은 레위 지파가 얻을 기업의 몫으로 삼게 하였습니다. 레위 지파는 말이죠. 이렇게 자기들의 몫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기업인 십분의 일에서 다시 십분의 일을 아론과 그 후손들이 맡는 제사장에게 돌아갈 몫으로 구별하여 하나님께 바쳤습니다(레 27:30-33; 민 18:20-32; 신 14:22-23, 참조. 민 3:5-13). 이렇게 하여 레위 지파가 받을 하나님의 기업의 몫인 십분의 일은 다른 열 한 지파가 하나님의 기업으로 분배 받은 땅과 동일한 성격을 갖습니다.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라고 말하는데, 이는 레위인들이 성막(성전)에서 맡은 일을 수행하는데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 규례는 이 외에도 절기를 지키며 기쁜 잔치를 가져나가는 것에서 쓰일 십일조를 매년 행하게 하는 것으로도 지켜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절기에 참여함으로 그와 함께 한 온 가족이 하나님이 먹이시는 양식으로 기쁨과 만족함에 있으며 하나님과 화목함을 누림에 있는 것을 겪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 규례는 땅을 분배 받지 못한 레위인과 성(마을)에 머물고 있는 객(외국인)과 고아와 과부들을 돕는 구휼(구제)의 성격을 띤 십일조를 매3년마다 행하게 하는 것으로도 지켜졌습니다(신 12:4-12, 14:28-29, 26:12-15).
이들 십일조를 하는 것에서 이스라엘 열 한 지파는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얻은 농사물과 가축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위하여 주신 복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이 곡식을 내고 나무가 열매를 맺고 가축이 새끼를 낳는 이 모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자비를 베푸셔서 돌보시는 것으로 있는 것인데, 이렇게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다시 하나님께 바치는 것에 있는 십일조에서의 십분의 일은 레위인과 아론의 제사장들에게 돌아갈 몫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바치는 가장 좋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가축이니 처음 난 것이요 처음 얻은 것입니다. 곧 곡식이나 과일 등 농사 지은 것에서 맨 먼저 수확한 맏물, 짐승이 낳은 첫 새끼인 맏배입니다. 이 맏물, 맏배는 온전히 하나님께 바친 거룩한 것으로 다루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바친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레위인의 몫으로 돌리며 그것의 또 십일조를 떼어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맏물, 맏배로 다루어지며, 하나님께서 그것으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품은 성격을 띱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것은 그들을 하나님의 것으로 삼고 그들의 주가 되신 까닭이며, 하나님은 그들의 구속주가 되신 까닭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주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시며 구속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는 레위인의 도움을 받아 제사장이 성전에서 행하는 희생제사에 의하여 있게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레위인을 위하여 십일조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레위인과 그들에게서 세워지는 제사장, 그리고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일에 희생되어지는 제물은 그것이 사람이든 곡식과 과일이든 또한 가축이든‘처음 난 맏배’의 성격을 띱니다(민 3:40-51, 8:16-17). 그래서 그 모두는‘처음 난 것’으로 하나님께 바친 거룩한 것으로 구별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된 ‘처음 난 것’은 이것에 의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사는 것을 표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메시야’입니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성령으로 잉태되어 출생함으로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 첫 번째, 곧 맏아들이 되십니다. 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영, 곧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아들들로 받아들여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자는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예수께 주신 것처럼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기업을 그들이 받을 몫(분깃)으로 나누어주십니다. 곧 아들의 영광을 함께 누릴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롬 8:1-14).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자신 안에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세상에 보내신 뜻을 받들어 수행하십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구속 사역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자신의 몸을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바치는 것에 의해서 하십니다. 맏배, 곧 처음 난 것의 성격을 갖고 있는 레위인과 제사장, 십일조, 그리고 성전에서 희생되어지는 제물, 이 모두가 가리켜 왔던 실체인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께서 처음 난 것의 일을 수행하여 완성하심으로 이전 것이 해 왔던 일은 끝마쳐져 종결됩니다. 그에 따라서 레위인과 제사장, 십일조 규례, 성전과 이 안에서 행해졌던 희생제사는 더 이상 행해져야 할 의무를 갖지 않아 없어집니다.
그러기에 말입니다. 예수께서“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신 바리새인과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유대인들이 엄격하고도 철저하게 지켜온 십일조 규례는 예수께서 구세주로서의 구속 사역을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드려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바침으로써 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성취하실 때까지는 행해져야 할 것이었습니다.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십자가에서의 구속 사역을 마치신 후에는 더 이상“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하여야 할 것이다”에 있지 않습니다.“이것도 행할 것”이 온전히 성취되어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가“다 이루었다”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 후에는 구약 시대에서 존재해 왔던 것은 그 맡은 바의 일을 다 끝내 마쳤기 때문에 더 이상 행해져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제는 레위인과 아론의 제사장, 그리고 십일조 규례, 성전의 희생제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이 지향해 왔던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 의해서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우리들에게 베풀어집니다. 그래서“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하여야 할 것이다”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예수님에 의해서 실행되어집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말이죠.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신과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룬 교회에 베푸시는 사랑인 은사로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자신에게 있는 것을 은사로 주시는 일을 하십니다. 그것이 자신 안에 있는 충만한 하나님의 사랑을 공급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에 따라서 교회가 그리스도로부터 공급받고 있는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드린 것과 똑같은 성격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교회를 위해서 은사를 주시는 데 따른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공급 받은 그 사랑으로 자신의 지체인 형제들에게 사랑을 행하여서 함께 주께 굳건히 서 나가도록 믿음에 덕을 더 합니다.
이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연보입니다. 연보는 성도를 섬기는 봉사의 직무에 있게 하시는 은사로 말해집니다. 바울이 무엇 때문에 연보를 독려하였는지요. 그것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라고 하셨으며, 또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라고 하신 예수님의 분부를 따르게 하시는 것으로 이방의 각 지역에 교회가 서 나가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을 위시하여 성도들을 보내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데 예루살렘에 있던 제자들에게 박해가 가해지는 방식을 통해서 각 지역으로 흩으심으로 말미암아 심히 연약한 상태에 있은 예루살렘교회를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연보를 통해 예루살렘교회와 이방 지역의 모든 교회는 부요한 교회라든가 가난한 교회라든가의 차이, 차별이 없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보호와 살핌을 입음에 평균(균등)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몸으로의 하나 됨에 온전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롬 15:26)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전 16:1)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전 16: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 8: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고후 8:13-14)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에 대하여 아무도 우리를 비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고후 8:20)
그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게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고후 9:5)
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그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고후 9:11)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그들과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후 9:13)
이러한 연보가, 그리고 연보에 있어서 십일조로 드리게 하는 헌금이 하나님의 축복을 빙자하여 돈을 사랑하는 탐욕을 채우는 방법과 수단으로 행해질 수 있는 것인지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모세 때 주어져 지켜온 구약 시대에서의 십일조 규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사역을 기점으로 해서 그 전과 그 후에 이런 차이를 갖습니다. 그러니 말입니다. 아직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진행되는 과정에 있는 바리새인들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좋은 의도에서 시작됨으로 그들이 행하여 온 장로의 전통을 따라 하고 있는 대로 계속해서 하면 됩니다. 십일조 규례에 계시되고 있는 하나님의 맏아들 되신 메시야(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자신을 구속의 첫 열매로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을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이 기쁨으로 받으실 구속 받은 열매가 되게 하실 때까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으로 말입니다.“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 것”을 말씀하신 것은 그러한 의도에서 였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십일조에서 빠진 단지 외적 형식만 갖춘 십일조 준수는 마태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킨다”(마 23:24)는 풍자적인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율법에 부정한 동물로 규정된 약대를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삼키듯이 탐욕과 악독이 그들의 마음에 가득 차 율법에 엄청나게 큰 부정한 행동을 아무 거리낌이 없이 행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이는 오늘날에 행해지는 연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빠진 십일조 규례의 준수만을 행함에 있게 하며, 그 연장에서의 십일조 준수로 연보에서 십일조 헌금을 강조하며 행할 것을 요구함으로 헛된 연보에 있게 하는 자들의 궁극적인 결말이 무엇인지를 예수님은 “화 있을 것이다. 너희 바리새인이여”라는 말씀을 해 주시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심판의 저주를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을 통해서 외식하며 헛된 가르침을 주는 바리새인의 처지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해 주시며, 또한 그 가르침을 좇아 바리새인과 함께 동일한 외식에 빠짐으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에는 눈 멀어 있고 귀 막혀 있으며 입은 벙어리 되어 있음으로 함께 멸망의 화를 당함에 있는 백성들에게 경고가 되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