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책잡으려 혈안이 되어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누가복음 11장 53-54절 / 53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일을 따져 묻고 54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더라.
예수님은 한 바리새인의 집에 식사 초대를 받아 가신 자리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율법교사)들에게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마음에 없이는 단지 몸으로 형식을 갖출 뿐인 외식하는 신앙이 당할 심판의 화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그 집에서 나오셨습니다. 그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예수님에게 이말 저말로 여러 가지 일을 따져 물으며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에서 책잡을 말이 나오기만을 엿보며 기회를 노렸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어떻게 그렇게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없이 다만 외식하는 신앙일 뿐이었을까요? 외식하는 그들이 만일 자신의 문제점을 알기는 할 수 있고, 그래서 안다면 더 이상 외식하지 않고 예수님이 지적하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그들의 마음에 채울 수 있겠는지요.
하나님을 주로 받아 섬기며 따르는 믿음이 있는데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그들 속에 있지 않을 수 있는지요. 또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는데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원할 수 있으며, 원해서 자신들의 마음에 채워 있게 할 수 있는지요.
이 중에서 그 어느 것도 가능하지 않으며, 따라서 가당치 않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거칠게 대하며 예수님에게서 흠을 잡고자 하는 것은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며, 그런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을 리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공의도 사랑도 그 어느 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말이죠. 다만 탐욕과 악독이 가득할 뿐이었습니다.
탐욕과 악독은 하나님의 공의 및 사랑과 대립됩니다. 이는 육의 사람이 띤 특성입니다. 39절에서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에서 보는 바인 정결 규례를 엄격히 따르며 철저하게 지키는데 탐욕과 악독이 가득합니다. 십일조 규례를 엄격히 따르며 철저하게 지키는데 탐욕과 악독이 가득합니다. 율법의 계명을 만들고 가르치며 전통을 세워나가는데 탐욕과 악독이 가득합니다. 의롭고 자비로울 마음으로 의를 행하지 않고 자비를 베풀지 않아서 탐욕과 악독이 가득한 것이 아닙니다. 본래 의롭지 못하고 자비롭지 못한 마음이어서, 본래 탐욕과 악독이 가득 채워져 자리하고 있는 부패한 본성이어서 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의 마음에 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없는 것은 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은 때문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유대인들은 조상 때부터 여호와이신 하나님을 부르며 섬기는 신앙에 있어왔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공의와 사랑은 없이 탐욕과 악독이 가득한 것에서 외식한다며, 이러한 그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그들은 하나님께서 믿음의 의로 여기시는 것에 있어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이 그것을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인양 의식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이는 자의적인 신앙일 뿐이지, 하나님의 본의에 의한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의로 여기시는 신앙은 아브라함과 그리고 그의 후손들과 대대로 맺은 언약에 의해서입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창 17:1-9)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의 하나님이 되신 것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과 대대로 맺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되셔서 그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될 땅을 주시고, 그곳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자손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며 하나님이 주가 되셔서 그들을 보호하실 것이며,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으로 천하 민족을 복 받게 하실 것을 언약 하신 것입니다(창 12:1-3). 하나님은 이 언약을 여자의 자손(씨)으로 오실 메시야 약속(창 3:15)에 의해서 맺으시는데,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 대대로 마음에 새겨 놓으시고 이를 믿음으로 바라보며 그 의존에 있게 하시는 것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하나님이 되시는 믿음이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새겨 놓으신 하나님의 메시야 언약을 믿는 믿음에 있는 것에서 말해집니다.
이 믿음이 구약시대에서는 하나님이 선민으로 이스라엘을 삼으시고 언약의 계보를 세워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난 약속을 잇는 자손(씨)을 통해서 함께 하시는 것에서 있어왔습니다. 이 믿음은 사람의 본성에 의해서는 그들의 마음에 생기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부패한 본성에 의해서 전적으로 오염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하나님을 믿는 종교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이 다만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여 있었던 이스라엘의 외식에서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언약 자손(메시야 언약의 씨)을 잇는 계보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세상에 나타내시고 그 믿음의 계승에 있어오게 하셨습니다.
그에 따라서 언약의 주이신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께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서 나시는 구주의 탄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믿는 믿음에 있게 하는 은혜에 의해서 자신의 백성으로 택한 자들을 부르시는 일을 하시고 그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십니다. 이 모든 일은 말이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것으로 있는 일입니다(마 1:20-23).
그러기에 말입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자신들의 주님으로 영접함이 없는, 그래서 주님으로 섬겨 따름이 없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었기에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없었습니다. 이런 그들이 조상 때부터 대대로 가져왔던 유대교를 가지고 신앙을 가져나가는 것은 마음에는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고 그 마음에 가득한 탐욕과 악독을 좇아서 장로들의 전통을 내세우며 형식으로 가져나갈 뿐이었습니다.
이런 그들이기에 자신들이 지닌 문제점인 외식을 예수께서 들추어내시며 그것이 가져올 심판의 화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 그들의 마음에는 반발, 반대, 대적이 일어나 거세게 예수님에게 달려들었으며 여러 가지 말을 하며 예수님에게서 책잡을 말이 나오기를 노렸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일을 알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는 것이 우리 자신 스스로 마음이 움직여서 되어졌다는, 그래서 우리 마음먹기에 의해서 되어졌다는 생각을 추호도 갖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은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로 된 것이요,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순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조차도 우리의 자발적인 의지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엡 2:7-9).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 선한 일을 하신 하나님을 늘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언제나 잊지 않고 생각하는 것에 있어야겠습니다. 이는 말입니다.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정체성에 관한 일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는 우리는 이것이 지닌 세계의 특성을 발휘하여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을 영의 사람이라고 말하며, 새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영의 사람에게는 영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게 있습니다. 새사람에게는 새사람으로 살아가는 게 있습니다. 가령 말입니다. 야수인 호랑이나 사자 등 맹수뿐만 아니라 야생동물을 잡아서 좁은 우리 안에 가두어 둔다고 해보죠. 이는 야생동물로 살아가는 특성을 발휘할 공간이 아니어서 못하고 갇혀 있는 상태에서 그 독특한 특성을 발휘를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는 참으로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한 야생동물이 야생에 풀려놔 보세요. 그것은 야생동물에게는 자유를 뜻합니다. 야생동물이 자신의 특성에 따라 자신의 모습 그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영의 사람으로서, 새사람으로서 당연히 발휘하고 살아야 할 특성, 곧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야 할 특성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고, 그렇게 살수 없는 것에는 마음에 큰 고통을 갖습니다. 그것이 영의 사람에게서 나오는 마음이요 생각입니다. 반면에 영의 사람, 새사람, 그리스도인인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을 따라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그 삶을 살아가는 것에는 큰 기쁨을 갖게 됩니다.
앞서 예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화가 있게 되는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신 것을 통해서 이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앙생활에서 마음에 공의와 사랑은 없이 형식으로만 해 나가는 것은 외식일 뿐이며, 이러한 것으로 예수님을 믿는 신앙생활을 해나간다면 이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하는 방식을 그대로 본 따서 똑같이 따라 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님을 잘 압니다. 이에 대한 유혹을 항상 받고 있는 우리이기에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과 6장에 걸쳐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써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에서 확실히 구원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됐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심으로 인해 그분과 화목하게 됐으니 화목하게 된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인해 확실히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 안에서 기뻐합니다.(롬 5:8-11. 우리말성경)
바울은 이 몸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다음과 같이 말을 이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자신의 삶의 중심을 어떤 방향에 두고 살아야 할지를 제시해 줍니다.
여러분도 자신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산 자로 여기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의 죽을 몸에서 죄가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해 몸의 정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여러분의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자처럼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며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죄가 여러분을 지배하지 못할 것인데 여러분이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해서 죄를 짓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든지 순종하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순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 되는 줄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죄의 종이 돼 죽음에 이르거나 아니면 순종의 종이 돼 의에 이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드립시다.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전해 받은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부터 순종함으로 죄에서 해방돼 의의 종이 됐습니다. 여러분의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방식대로 말합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자기의 지체를 부정과 불법의 종으로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처럼 이제는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십시오.(롬 6:11-19. 우리말성경)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지닌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능력은 복음의 진리로 온 세상에 주어져 하나님의 택하심에 있는 자들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부르심을 받은 자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능력으로 행동에 있게 하십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늘 율법을 말하며 백성들에게 행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정작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대지 않음으로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다”(마 23:2-3) 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는데, 그래서 모세의 자리에 또아리를 틀고 오랜 세월을 장로들의 전통을 따르고 있으나 여전히 부정한 죄인으로 있었습니다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무엇이든지 말하는바 그대로 행함’에 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에 대해 깨어 있게 우리 안에 계신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늘 지식의 말씀으로, 지혜의 권면으로 우리의 믿음을 동(動)하게 하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