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의 수태에 대한 엘리사벳의 신앙고백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구속사
누가복음 1장 18-25절 / 18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 19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20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21백성들이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가 성전 안에서 지체함을 이상히 여기더라 22그가 나와서 그들에게 말을 못하니 백성들이 그가 성전 안에서 환상을 본 줄 알았더라 그가 몸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말 못하는 대로 있더니 23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 24이 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이르되 25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1. 주의 사자가 전한 (세례)요한의 수태 고지
주의 사자는 사가랴에게 아들이 있을 것을 고지(告知)하신 후, 그에 대한 확실한 표징으로 사가랴가 아들을 낳을 때까지 그의 입을 벙어리가 되게 하여 말을 못하게 하였다가 때가 되면 주의 사자가 전하는 말대로 다 이루어질 것을 그의 두 눈으로 보는 아들을 낳은 후에 그를 벙어리로부터 풀려나게 하였습니다.
성소 밖에 있던 사람들은 성소 안에서 분향하는 일을 하던 사가랴에게 있은 일을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소 밖에 나온 사가랴가 말을 하지 못하고 다만 몸짓으로 말을 표현하는 것을 그가 성소 안에서 신비로운 환상을 본 때문인 줄로만 알고 기이히 여길 뿐이었습니다.
2.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에게 있은 요한의 수태가 갖는 구속사적인 의미
하지만 말입니다. 그 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주의 사자가 전하는 주님의 말씀대로 아기를 갖게 되어 다섯 달 동안 집안에만 있게 되었을 때, 엘리사벳은“이제 아기를 낳지 못하던 나에게 아기를 갖게 해 주시어 내 부끄러움 - 수치 - 을 벗겨주시니 주님은 얼마나 은혜로운 분이신가!”라며, 자신에 아들이 있게 된 것이 주님이 하신 은혜임을 알았습니다. 엘리사벳에게 있어서 주께서 아들이 있게 하신 것은 여인이 아이를 낳지 못한 수치에 있었던 것을 말끔하게 씻어주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엘리사벳을 여인이 갖는 이 수치에서 벗어나게 하신 것은 여느 여인이 겪는 수치의 성격과는 전혀 다릅니다. 현대에서는 실효성을 잃고 더 이상 행해지지 않는 것입니다만, 우리나라의 경우 조선 시대에는 아내를 내쫓을 수 있는 이유가 되는 일곱 가지의 허물을 말하는 사자성어로‘칠거지악(七去之惡)’이 있었습니다. 곧, (1)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것(不順舅姑), (2)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無子), (3) 행실이 음탕한 것(淫), (4) 질투하는 것(妬), (5) 나쁜 병이 있는 것(惡症), (6) 말이 많은 것(多言), (7) 도둑질을 하는 것(盜)을 이르는 말입니다. 여기에 자식을 낳지 못하는‘무자’를 아내를 내쫓을 수 있는 중요한 이유의 하나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것이 있었기에 조선시대의 여인네들은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을 시댁에 죄악을 짓는 큰 허물로 여겨 수치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렇듯이 엘리사벳이 자신이 무자한 것을 이 칠거지악의 하나로 여겨서 늘 수치스럽게 여기고 있던 중에 주의 사자가 자신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란 소식을 전해 주었을 때 이것을 자신의 수치를 벗겨주셨다고 했을런지요.
엘리사벳은 주의 사자가 전해준 자신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란 소식을 창세기 21장 1절의 어구에서 끌어와 사용하여서 말합니다.1) 25절의“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에서‘주께서 내게 이렇게 행하심이라’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창 21:1)
에서의‘여호와께서 사라에게 행하셨다.’에서 보고 있는, 여호와께서 사라에게 행하신 아들 - 이삭 - 을 주신 하나님의 이적이 이제 자신에게 그대로 행해졌다고 알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노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셔서 그에게 약속하신 것을 하나님께서 그대로 이루신 것에 대해서 엘리사벳은 익히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사라의 태를 여시는 일을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실 일인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천하 모든 민족들도 받게 하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이루어 가실 것(창 12:1-3; 15:1-6; 17:1-8)에서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을 잇는 씨(자손/후손), 곧‘약속의 씨’를 주시는 것에서 였습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25년의 긴 세월을 하나님이 주실 약속의 씨에 대한 인식과 그것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기다림에 있게 하시면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끌어오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라에게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씨를 주시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실 자신의 일을 행하여 나가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엘리사벳은 창세기 30장 22-23절에서 보게 되는, 하나님께서 야곱의 아내 라헬에게 하신 일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모두 4명의 아내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이루는 열 두 아들 중에서 요셉과 베냐민을 라헬을 통해서 낳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한 동안 라헬에게 생산을 허락하지 않고 그의 태를 닫아놓고 계셨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라헬을 하나님께 간구함에 있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말입니다.“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라고 하는 고백에 있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라헬의 부끄러움을 씻어주신 것은 그녀의 태를 여신 것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라헬에게 주시는 아들 중 요셉을 통해서 야곱의 가족 70명을 가나안 땅에서 애굽 땅으로 들어오게 하는 일을 하실 것이며(창 46:26-34), 이를 통해서 야곱의 후예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며 매우 강하여 애굽 온 땅에 가득하게 하였습니다(출 1:1-7).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약속으로 주신 땅인 가나안으로 올라가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작정한 때에 이르러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그들을 기억하셨습니다(출 2:24-25).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이렇게 해서 있게 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작정하시고, 그 계획하신 바를 이루시기 위하여 야곱이 사랑한 라헬에게 요셉을 주시는 일을 하실 것인데, 라헬의 태를 닫아 두시고 아들을 하나님께 간구함에 있게 하는 것을 통해서 태를 열어 그에게 주시는 아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고백에 있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창 30:22-23)
라헬이 이처럼 야곱의 자손을 하나님께 간구함에 있었고, 하나님은 그런 라헬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열어 잉태에 있게 한 것은 하나님이 그의 부끄러움을 씻어주시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들이 없는 여인의 한을 풀어주시는 것에서가 아니라, 그에게 주시는 아들을 통해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이루어 가실 일을 행하는 것에서 그 아들은 라헬의 기쁨이요 즐거움이 될 것이며, 이는 또한 야곱의 기쁨이요 즐거움이 될 것에서입니다. 그에 따라 야곱이 라헬을 통해서 낳은 아들 요셉은 후에 야곱의 가족 70명을 애굽 땅으로 인도하는 일을 하게 되어 야곱의 가족의 생명을 보존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야곱의 가족을 있게 하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큰 민족을 이루게 되는 이스라엘을 마침내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땅 가나안에 들어가 그곳에서 하나님의 왕국 이스라엘을 세우게 하는 일을 하는 것에 있게 됩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에게서, 그리고 야곱의 아내 라헬에게서 각각 그 여인의 부끄러움을 씻어 주시는 일을 하신 것에서 하나님의 약속에 따른 아들이 있게 하시고 약속으로 주신 땅에서 하나님이 세우시는 나라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이제 요셉과 정혼한 동정녀 마리아에게‘예수’라고 불릴 아들이 있게 할 것에서 나타내실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와 관련하여서 먼저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에게 닫아 두셨던 태를 열어 아들이 있게 함으로 그들의 부끄러움을 씻어 주실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사벳에게 있은 부끄러움을 씻어주시는 것을 앞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아들이 있게 하실 것의 표징으로 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마침내 동정녀 마리아에게 아들이 있게 됨으로써 엘리사벳의 요한 수태는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엘리사벳은 이 사실을 알고 그 믿음에 있었습니다. 이는 그녀의 남편 사가라에게 있은 주께서 알려주신“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눅 1:13-17)라고 하신 주의 사자가 전한 주님의 말씀을 사가랴를 통해 전해 듣고 기억하며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사벳은 주의 사자가 사가랴에게 전한 말씀대로 자신에게서 수태한 일이 있게 되었을 때, 엘리사벳은 그렇게 사라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의 기억에 의해서 남편 사가랴와 자신의 노년에 행하신 일에 대하여서 매우 놀라워하며 그 자비로운 일을 마음에 간직한 채 자신의 아들 수태 사실이 신체에 분명하게 드러날 때까지인 5개월을 집안에만 있음으로써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2) 그럼으로써 엘리사벳은 성령이 함께 하시며 돌보심 속에서 안전히 보호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말입니다. 엘리사벳이 노년의 자신에게 있은 아들이 있게 되었을 때 이를“부끄러움을 씻어주셨다.”고 말한 것은 우리나라 여인네에게서 보게 되는 칠거지악의 악에 있는 수치에서 벗어나게 해주셨다는 것에서가 아니라, 그래서 여인이면 누구나 마음에 원하는 자식을 얻는 것으로서 여인의 한 사람인 엘리사벳도 아들을 마침내 얻은 기쁨에 있게 되었다는 것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태를 열어 주시는 것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주 하나님에게로 다시 돌아오게 할 일을 할 것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시는 아들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가지고 주의 선구자로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있게 하고, 거역하는 자녀들이 아버지에게로 돌아오는 슬기에 있게 하는 것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에 있을 것을 내다보는 기쁨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사벳의 독백적인“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라고 한 고백은 그녀의 남편인 사가랴에게 하실 주의 일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그 믿음에 있는 그녀의 신앙을 말해주고 있습니다.3)
주의 사자가 사가랴에게 전해 준 주님이 하실 일의 말씀은 그대로 행해졌습니다. 하나님의 작정하심에 의해 태가 닫혀 있음으로 해서 아이를 낳지 못하고 있던 노년의 엘리사벳에게 주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행하시는 것으로 아들이 있을 것이란 아들이 있었으며, 그 이름은 요한이라고 부를 것이라고 한 그대로 요한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리고 말이죠. 요한은 모태에 있을 때부터 성령의 충만함에 있었으며,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할 것이라고 한 대로 주의 선구자로서의 일을 하였습니다.
3. 세례요한의 증거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하나님이 해 나가시는 일
구약에서의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 이삭과 그의 아내 라헬에게서 하나님이 해나가실 일에 그들의 믿음이 있었으며, 예수님이 오실 때의 시기에 있어서는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에게서 하나님이 해나가실 일에 그들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렇듯이 우리가 가진 믿음에는 말입니다. 우리에게서 해나가실 하나님의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는 믿음에 있는 것은 그분을 믿음으로써 우리가 살아가는 행복의 조건으로 여기고 있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면 모두를 얻고자 하는 것에서가 아닙니다. TV 한 프로그램에서는 외국의 한 나라가 거북이를 자기 마을의 수호신으로 섬기는 것이 방영되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어른이고 어린이고 할 것 없이 거북이를 정성껏 섬깁니다. 매주 수요일마다 거북이에게 소원을 비는 기회를 갖는데, 이를 위해서 거북이를 먹일 음식을 사서 거북이에게 줍니다. 이 거북이에게 소원을 빌어서 소원 성취했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땅을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빌었더니 그대로 되었다며, 그에 대한 고마움으로 거북이 먹이를 삽니다. 어떤 사람은 거북이에게 소원을 빌어서 마침내 아들을 낳았다고 하구요 이런 저런 온갖 소원이 행해지며 소원한 대로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소문이 나서 주변 마을에서도, 멀리서도 사람이 찾아옵니다. 거북이의 영험한 효력을 보겠다거나 그 영험한 효력을 지닌 거북이를 보겠다고 이 마을 사람들은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북이를 수호신으로 섬겨 자신들의 행복의 조건을 충족시켜 나가는 믿음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마을에서는 도마뱀이 자신들의 행복의 조건을 충족시켜 주는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이 마을에는 도마뱀이 정말 많은데 사계절 내내 잡을 수가 있습니다. 산 속에 들어가서 어렵게 잡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잡을 수 있을 정도로 마을에 출현합니다. 사람들은 이 도마뱀을 잡아서 고추 말리듯이 건조기에서 말려 외국에 약재로 좋은 값으로 팔려나갑니다. 이 마을에 있어서는 도마뱀은 주민들의 경제적 부를 가져다 주는 복입니다. 하지만 말이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우리가 있다는 것은, 그래서 우리가 믿음이 있다는 것은 그렇게 자신의 행복의 조건이 되는 복을 얻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에게 하실 일을 해나가실 것에 믿음이 있는 것이죠.
그것은 주의 사자를 통해서 사가랴에게 알려 준 것인 우리를 하나님에게로 돌아오게 하여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인 죄에서 용서받아 죄로부터의 해방에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죄의 종으로 살지 않아도 되게 해주셨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죄의 종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는 죄의 종에서 자유한 자가 되어 하나님 의로 충만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로 들어가 그분의 종이 되었습니다. 여기서‘종’이란 표현을 썼습니다만, 이는 누구의 지배를 받는, 그래서 누구의 지시를 받는 사람이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곧 누구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구속 사역을 통해서 죄로부터는 완전히 자유한 자가 되었습니다. 죄에서 해방되었는데, 다시 죄에 매여 있는 종으로 살 이유가 없는 참으로 자유한 자입니다. 이 자유에 있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 수 있는 자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에 다스림을 받으므로 그 의가 인도하는데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에서 그의 의로운 삶, 곧 올바른 삶이 말해집니다. 우리의 믿음이란 것은, 우리가 믿음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에 있는 것에서 이것을 약속으로 주시고 있는 그대로 행하실 것을 알고 그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약속으로 주신 그대로 행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고 있는 그대로 행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다는 것은 그렇게 우리 안에서 일어날 일인 하나님이 하실 일에 우리의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무릇 육의 사람은 그 육에서 나오는 생각을 좇아 삽니다만, 우리는 영의 사람으로서 육에 속한 사람처럼 살 자가 아닙니다. 영의 사람은 자신 안에 계시는 영의 생각을 좇아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영, 곧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갖게 해 주는 생각이 무엇이겠는지요. 우리 안에서 행하실 하나님의 일에 우리가 신실히 의존하고 하나님이 해 나가실 일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이 아닌지요. 우리가 죄 많은 이 세상에서 그분의 속죄케 하시는 은혜를 입고 날마다 의롭게 하시는 은혜를 입고 있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으며 그분의 나라를 바라봄에 있는 중에 오직 한 가지 일을 구함에 있게 하십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은 모든 믿는 자에게 똑같이 작정하신 선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입은 속죄에 대하여 항상 깨달음을 잃지 않게 하시며, 무릇 자랑하는 자는 주님만을 자랑하여 말함에 있게 하시는 그 생각을 좇고 그 마음을 가져나간다면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주님을 따르는 믿음으로 잘 사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는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우리 안에서 이루어가고 있는 우리의 주님을 보는 기쁨과 즐거움에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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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ohn Nolland,『WBC주석 : 누가복음 1:1-9:21. 35권A』(서울: 도서출판솔로몬, 2003), p. 149.
2) 위의 책, 152.
3) 엘리사벳에게 아들(요한)을 잉태케 하여 그의 “부끄러움을 씻어 주셨다”는 것은 자랑이 되게 해 주셨다는, 또는 기쁨과 즐거움이 되게 해 주셨다는 역설적인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