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6장 24-26절/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없이 갖는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란 한갖 육체의 욕망에 이끌려서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작성자이천우작성시간05.03.08조회수3,825 목록 댓글 0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없이 갖는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란 한갖 육체의 욕망에 이끌려서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마태복음 16장 24-26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제자'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이를 '신자'와 구분하고서 자신들은 신자일지언정 아직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하였다며 예수님의 제자된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거나 의도적으로 감추려는 사람은 없습니다. 한결같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모든 믿는 자들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어 그를 믿는 자들에게 그의 이름으로 세례가 주어지고 그가 주신 복음을 가르침으로써(마 28:20) 만들어집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그리스도인은 "나를 따르라"고 하신 주님의 요구를 받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질 것이 요구되어짐에 따라서 누구든지 주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립니다(마 16:24-25).
이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은 -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세례를 받으며 가르침을 받은 그 속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제자 삼은 사람 - '누구든지'라고 말씀하신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 누구든지는 베드로 처럼 어부일수도 있고 농부일수도 있고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일수도 있고 관원일수도 있고 정치인일 수도 있고 주부일수도 있고 학생일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은 그가 누구이든지간에 그래서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지 간에 자신의 주가 되신 예수님께서로부터 "나를 따르라"는 요구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주셔서 주로 세우시는 것을 통해서 그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을 따라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좋은 이상으로 삼고 그 생각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는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은 자기를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따르려는 자는 자기를 버릴 것을 그가 주로 받들어 섬기는 예수님으로부터 요구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 따라서 반드시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왜 이런 요구를 하시고 계실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런 요구를 말씀하시는 것을 통해서 자신을 따르려는 자에게,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려고 하는 자에게 그들을 향하여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의 제자로 살게 된 현실은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 살던 현실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는 그들의 몸이 담겨져 있던 그 현실에서 충실하게 살면 됩니다. 그리고 그것에 만족이 되면 그는 행복한 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상대하게 되는 현실은 그 전에 살아온 현실과는 성격이 전혀 다릅니다. 전에는 이런 현실인줄은 몰랐었습니다. 바라보는게 세상이었으니깐요. 그러나 생명의 주이신 예수님 안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헛되고 헛된 모든 것이 헛되다는 실상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는 영원을 결코 전혀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런 이 세상에서는 그 무엇을 손에 넣을지라도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자는 인생의 행복이 이런 세상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를 보내신 하나님과 그 나라로부터 주어지는 것임을 압니다. 예수님의 제자된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니까 이제는 예수님이 자신들을 이끄는 현실 세계로 기꺼이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그동안 따랐던, 그래서 소유하고자 하였던 것 모든 것을 버리는 작업에 들어갑니다. "자기를 부인하고"는 디모데후서 2장 12절에서 말씀하신 "주를 부인하면"에 대한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주님을 미워하는 자는 주님으로부터 미움을 받기 때문에 주님에게서 마음이 떠나 세상을 향하기 마련이고 그래서 세상을 사랑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미워하는 자는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기 때문에 세상에 마음을 둘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마음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되는데 주님에게 마음을 두게 되어서 주님을 사랑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부인하고'는 주님을 사랑함으로써 세상은 미워하는 신앙적 자세를 취하게 되는 것인데 주(복음)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립니다. 그런데 이는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마 10:37)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들어오심으로 나타나는 당연한 현상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들어오신 것은 칼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에 따라서 아들을 그 아버지와 맞서게 하고 딸을 그 어머니와 맞서게 하고 며느리를 그 시어머니와 맞서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원수는 바로 그 집안 식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0:34-36). 예수님이 세상에 들어오심으로 해서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 집안 식구에서 예수님에게로 옮겨집니다. 이는 예수님에게서 생명을 보기 때문입니다. 이 생명으로 인해서 그동안 집안 식구에게 두었던 관심과 사랑이 예수님에게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를 집안 식구는 용납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불화가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이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의 현실 세계이므로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이 현실 세계에 들어와 있는 것이기에 이 속에서 기꺼이 예수님을 따르는 자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머리 하나 제대로 두고서 쉴만한 곳이 없으셨는데 그런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그가 생명의 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에게 두고 있는 믿음이 아니고서는 즉 예수님에게서 생명을 보는 것이 아니며 그 생명에 믿음을 두는 것이 아니고서는 예수님께서 어디를 가시며 어디에 계시든지 간에 따를 수가 없습니다. 생명이 없는 죽은 일에는 생명 없는 자들이 맡아서 일하는 것인데 이런 이들이 일하는 현장 속에서도 생명에 관심을 두고 있는 자는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데 만일 그 일로 인해서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게 한다고 하면 그 일을 할 사람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방식인 '제자의 도'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고'하는 정도까지만 우리 인간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 십자가를 질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니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십자가'란 예수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필연적으로 있게 될 '자기가 져야 할 십자가'란 말입니다. 이 자기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것은 자기가 져야 할 십자가를 회피하지 말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것으로 이 십자가를 회피하고 예수님을 따르려고 한다면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것은 앞서 말씀하신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는 것과 연계해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주(복음)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라"는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자는 "목숨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면서, 이것으로 목숨을 버리는 것이 아닌 한에는 자기 목숨을 잃는 것으로서 온 천하를 얻는다고 할지라도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를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사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 외에 또 다른 짊어질 것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동격의 개념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려는 자들에게 그것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것이란 것을 알게 해주는 것이면서 또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게 되는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란 것을 예수님께서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수행하실 구속 사역의 십자가를 염두에 두고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 까닭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기 전에는 그 누구도 진정한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인줄 아십니까? 우리는 이를 로마서 8장 3절의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여기에 보면, '육신에 죄를 정하사'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을 알고 그것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죄의 지배를 벗어나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계획으로 주신 것은 자신의 아들을 사람의 몸으로 보내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여 죄값을 치를 희생제물로 삼아 우리를 지배하는 죄를 멸하신 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에 나타내신 구속의 은혜를 힘입지 않고는 누구든지간에 그 육에서 행해지는 것은 죄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이 이 십자가 사건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그래서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지 않고서는 단지 예수님을 선생으로 모시고, 또는 자기들의 종교의 지도자로 모시는 등 별 짓을 다하며 예수님을 받들고 섬기려고 할지라도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로 나타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말이죠. 예수님이 마시려는 잔을 그들도 마실 수 있어야 하는데(마 20:22) 예수님께서 보내신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의 진리에로 인도 받아서 그 위에 믿음으로 서 있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잔을 마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자 하십니까? 그래서 무릇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십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지금 육으로 관계되어 있는 온갖 이 삶의 현장에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 몸에 흔적으로 남겨진 십자가를 짊어지고 이 속에 뛰어들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여기에 자기의 생명을 둔다면 그는 이미 예수님께서 주신 참 생명인 영생에 들어와 있는 자로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며 그래서 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데 까지 나아가는 것이기에 실은 목숨을 잃는 것이 아니요 이미 주 안에서 목숨을 얻은 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이죠. '자기 십자가'를 안 지고서도 '자기를 부인하려'들면 안 됩니다. 자기가 져야 할 십자가를 지지는 않은 채 자기를 부인하는 방식을 취하며 예수님을 따르면, 그래서 자기 십자가가 빠진 자기 부인하는 삶만 남게 되면 여기서 '자기 의' 신앙이 나오며 '자기 공적' 신앙이 나오며 '자기 상급 신앙'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말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에서 실은 자기 목숨을 잃는 한이 있어도 예수님을 보호하고 지키겠다는 베드로에게 이러한 자기를 부인하는 주님에 대한 열심[사랑]이 자기 십자가를 지지는 않은 채 되어지는 것에 대해 경계를 갖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데만 관심을 갖습니다만 실은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자신의 제자가 될 수 없는지(도)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의도를 담고서 제자의 도를 말씀하신 것은 그의 제자인 베드로가 예수님께 가진 신앙을 고백하는 믿음을 표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에 대한 인식이 없는 가운데서 다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주님을 위해 발휘하고자 하는 충성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그 섭리에 순종해 나가시는 예수님을 가로막는 잘못된 열심을 갖는 육체의 욕망을 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그만 사단의 미혹을 받아 육체의 욕망이 이끌려 자기 힘으로 하고자 하는 베드로를 책망하시는 것에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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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6장 24-26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제자'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이를 '신자'와 구분하고서 자신들은 신자일지언정 아직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하였다며 예수님의 제자된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거나 의도적으로 감추려는 사람은 없습니다. 한결같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모든 믿는 자들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어 그를 믿는 자들에게 그의 이름으로 세례가 주어지고 그가 주신 복음을 가르침으로써(마 28:20) 만들어집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그리스도인은 "나를 따르라"고 하신 주님의 요구를 받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질 것이 요구되어짐에 따라서 누구든지 주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립니다(마 16:24-25).
이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은 -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세례를 받으며 가르침을 받은 그 속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제자 삼은 사람 - '누구든지'라고 말씀하신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 누구든지는 베드로 처럼 어부일수도 있고 농부일수도 있고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일수도 있고 관원일수도 있고 정치인일 수도 있고 주부일수도 있고 학생일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은 그가 누구이든지간에 그래서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지 간에 자신의 주가 되신 예수님께서로부터 "나를 따르라"는 요구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주셔서 주로 세우시는 것을 통해서 그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을 따라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좋은 이상으로 삼고 그 생각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는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은 자기를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따르려는 자는 자기를 버릴 것을 그가 주로 받들어 섬기는 예수님으로부터 요구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 따라서 반드시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왜 이런 요구를 하시고 계실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런 요구를 말씀하시는 것을 통해서 자신을 따르려는 자에게,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려고 하는 자에게 그들을 향하여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의 제자로 살게 된 현실은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 살던 현실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는 그들의 몸이 담겨져 있던 그 현실에서 충실하게 살면 됩니다. 그리고 그것에 만족이 되면 그는 행복한 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상대하게 되는 현실은 그 전에 살아온 현실과는 성격이 전혀 다릅니다. 전에는 이런 현실인줄은 몰랐었습니다. 바라보는게 세상이었으니깐요. 그러나 생명의 주이신 예수님 안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헛되고 헛된 모든 것이 헛되다는 실상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는 영원을 결코 전혀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런 이 세상에서는 그 무엇을 손에 넣을지라도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자는 인생의 행복이 이런 세상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를 보내신 하나님과 그 나라로부터 주어지는 것임을 압니다. 예수님의 제자된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니까 이제는 예수님이 자신들을 이끄는 현실 세계로 기꺼이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그동안 따랐던, 그래서 소유하고자 하였던 것 모든 것을 버리는 작업에 들어갑니다. "자기를 부인하고"는 디모데후서 2장 12절에서 말씀하신 "주를 부인하면"에 대한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주님을 미워하는 자는 주님으로부터 미움을 받기 때문에 주님에게서 마음이 떠나 세상을 향하기 마련이고 그래서 세상을 사랑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미워하는 자는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기 때문에 세상에 마음을 둘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마음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되는데 주님에게 마음을 두게 되어서 주님을 사랑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부인하고'는 주님을 사랑함으로써 세상은 미워하는 신앙적 자세를 취하게 되는 것인데 주(복음)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립니다. 그런데 이는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마 10:37)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들어오심으로 나타나는 당연한 현상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들어오신 것은 칼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에 따라서 아들을 그 아버지와 맞서게 하고 딸을 그 어머니와 맞서게 하고 며느리를 그 시어머니와 맞서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원수는 바로 그 집안 식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0:34-36). 예수님이 세상에 들어오심으로 해서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 집안 식구에서 예수님에게로 옮겨집니다. 이는 예수님에게서 생명을 보기 때문입니다. 이 생명으로 인해서 그동안 집안 식구에게 두었던 관심과 사랑이 예수님에게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를 집안 식구는 용납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불화가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이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의 현실 세계이므로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이 현실 세계에 들어와 있는 것이기에 이 속에서 기꺼이 예수님을 따르는 자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머리 하나 제대로 두고서 쉴만한 곳이 없으셨는데 그런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그가 생명의 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에게 두고 있는 믿음이 아니고서는 즉 예수님에게서 생명을 보는 것이 아니며 그 생명에 믿음을 두는 것이 아니고서는 예수님께서 어디를 가시며 어디에 계시든지 간에 따를 수가 없습니다. 생명이 없는 죽은 일에는 생명 없는 자들이 맡아서 일하는 것인데 이런 이들이 일하는 현장 속에서도 생명에 관심을 두고 있는 자는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데 만일 그 일로 인해서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게 한다고 하면 그 일을 할 사람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방식인 '제자의 도'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고'하는 정도까지만 우리 인간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 십자가를 질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니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십자가'란 예수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필연적으로 있게 될 '자기가 져야 할 십자가'란 말입니다. 이 자기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것은 자기가 져야 할 십자가를 회피하지 말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것으로 이 십자가를 회피하고 예수님을 따르려고 한다면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것은 앞서 말씀하신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는 것과 연계해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주(복음)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라"는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자는 "목숨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면서, 이것으로 목숨을 버리는 것이 아닌 한에는 자기 목숨을 잃는 것으로서 온 천하를 얻는다고 할지라도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를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사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 외에 또 다른 짊어질 것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동격의 개념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려는 자들에게 그것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것이란 것을 알게 해주는 것이면서 또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게 되는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란 것을 예수님께서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수행하실 구속 사역의 십자가를 염두에 두고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 까닭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기 전에는 그 누구도 진정한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인줄 아십니까? 우리는 이를 로마서 8장 3절의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여기에 보면, '육신에 죄를 정하사'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을 알고 그것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죄의 지배를 벗어나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계획으로 주신 것은 자신의 아들을 사람의 몸으로 보내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여 죄값을 치를 희생제물로 삼아 우리를 지배하는 죄를 멸하신 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에 나타내신 구속의 은혜를 힘입지 않고는 누구든지간에 그 육에서 행해지는 것은 죄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이 이 십자가 사건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그래서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지 않고서는 단지 예수님을 선생으로 모시고, 또는 자기들의 종교의 지도자로 모시는 등 별 짓을 다하며 예수님을 받들고 섬기려고 할지라도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로 나타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말이죠. 예수님이 마시려는 잔을 그들도 마실 수 있어야 하는데(마 20:22) 예수님께서 보내신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의 진리에로 인도 받아서 그 위에 믿음으로 서 있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잔을 마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자 하십니까? 그래서 무릇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십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지금 육으로 관계되어 있는 온갖 이 삶의 현장에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 몸에 흔적으로 남겨진 십자가를 짊어지고 이 속에 뛰어들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여기에 자기의 생명을 둔다면 그는 이미 예수님께서 주신 참 생명인 영생에 들어와 있는 자로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며 그래서 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데 까지 나아가는 것이기에 실은 목숨을 잃는 것이 아니요 이미 주 안에서 목숨을 얻은 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이죠. '자기 십자가'를 안 지고서도 '자기를 부인하려'들면 안 됩니다. 자기가 져야 할 십자가를 지지는 않은 채 자기를 부인하는 방식을 취하며 예수님을 따르면, 그래서 자기 십자가가 빠진 자기 부인하는 삶만 남게 되면 여기서 '자기 의' 신앙이 나오며 '자기 공적' 신앙이 나오며 '자기 상급 신앙'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말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에서 실은 자기 목숨을 잃는 한이 있어도 예수님을 보호하고 지키겠다는 베드로에게 이러한 자기를 부인하는 주님에 대한 열심[사랑]이 자기 십자가를 지지는 않은 채 되어지는 것에 대해 경계를 갖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데만 관심을 갖습니다만 실은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자신의 제자가 될 수 없는지(도)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의도를 담고서 제자의 도를 말씀하신 것은 그의 제자인 베드로가 예수님께 가진 신앙을 고백하는 믿음을 표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에 대한 인식이 없는 가운데서 다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주님을 위해 발휘하고자 하는 충성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그 섭리에 순종해 나가시는 예수님을 가로막는 잘못된 열심을 갖는 육체의 욕망을 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그만 사단의 미혹을 받아 육체의 욕망이 이끌려 자기 힘으로 하고자 하는 베드로를 책망하시는 것에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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