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신약본문

요한복음 13장 31-35절/주님이 주신 새 계명인 '서로 사랑하라'

작성자이천우|작성시간06.02.26|조회수2,457 목록 댓글 0
주님이 주신 새 계명인 '서로 사랑하라'
요한복음 13장 31-35절

31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32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33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34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본문은 예수님께서 가룟인 유다로부터 배신을 당하여 잡히시기 전 마지막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전날이 자신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이기에 지금이 세상에서 마지막 밤을 제자들과 함께 보내는 것임을 아셨습니다. 마귀는 이미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때를 이용해서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를 꾀어 그 밤 안으로 예수님을 배반할 계획을 진행하도록 일러두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신에게 맡기신 것과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하나님께로 가실 것을 알고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제자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한층 더하셨습니다. 그래서 식탁에서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동이고는 대야에 물을 떠나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허리에 둘렀던 수건으로 그들의 발을 닦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한 사랑을 이처럼 행동으로 옮기셨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들과 갖는 대화에서 그들을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은 끝까지 계속되어져 갈 것을 알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이심을 제자들에게 그들의 발을 씻겨주는 행동을 하시는 것에서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제자가 다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 사람, 곧 가룟 유다는 예수님에게서 등을 돌려 배신할 것을 예언한 시편 41편 9절의 말씀이 곧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 가운데 자신을 배신할 사람이 앉아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이를 의아해 하며 누가 예수님을 배신할 것인지를 궁금해 하는 예수께서 떡을 적셔 주는 사람이 그 사람이라고 말해 주며 떡을 적셔서 가룟 유다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유다가 떡을 받아먹자마자 사단이 그에게 들어가 예수님을 배신할 행동을 옮기고자 하므로 그에게 "이제 빨리 네가 할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제자들은 알아채지를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돈 관리하는 일을 맡은 유다에게 명절에 쓸 물건을 어서 사오라고 지시하는 것이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좀 주라고 하시는 말씀인 정도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곧 그 자리를 떠나 밖으로 나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과 결탁하여 예수님을 팔아 넘기고자 합니다.

유다가 방을 나가자 예수님은 남은 제자들에게 이제 자신의 때가 왔으며 하나님의 영광이 곧 자신을 둘러쌀 것이므로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일로 하나님께서는 크게 찬양을 받으실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에게 주실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자신은 제자들을 떠나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이 자기를 찾더라도 찾지 못할 것이라고 하면서, 그들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으로 너희가 내 제자인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아는 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여기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면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여기에다 두고자 합니다. 어떻게 말인가 하면, 서로 사랑할 것을 새로운 계명으로 주셔서 그에 대한 행동을 취할 것을 명령하셨으니 순종하는 믿음을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새 계명으로 주신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아무리 봐도 새로운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옛 계명인 율법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거든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그와 같이 우리의 이웃도 사랑할 것이 율법의 대강령입니다. 그런가 하면 여느 우상 종교에서도 강조하고 강조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또한 사람들은 입만 열면 사랑입니다. 클랙식에서도 트롯트에서도 사랑이 주 내용입니다. 사랑은 사람들이 해오고 있으며 또한 끊임없이 사랑을 말해오고 있습니다. 이런 노래도 있지요. 아주 인기 있는 곡인데,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랑 받고 사랑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옛 계명인 율법에서 주신 사랑은 우상 종교에서 가르쳐지거나 어떤 음악에서 노래하고 있는 사랑하고는 차원이 다른 것 아닙니까? 라고 반문하기에 율법만 가지고서 말해 보도록 하죠. 이미 옛 계명인 율법에서 사랑을 말씀해 왔는데 왜 또 새 계명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도대체 옛 계명과 새 계명과는 무엇이 다릅니까? 만일 옛 계명에서의 사랑이나 새 계명으로 주신 사랑이나 이 사랑을 부부와 가족간의 정이나 이웃간의 정, 연인간의 애정을 나누는 정도의 인식을 가진 것이라면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또는 가난한 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대변인이 되어 주고 도움을 줄 수 있는 힘이 되어 주는 것이라거나 구제라든지 등의 선행의 생각에서 사랑을 생각하고 있다면 이 또한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또는 이 모든 것에서 갖는 사랑을 종교적 개념으로 다루어 이를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그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하는 신앙으로 생각하여서 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식의 사랑이라면 옛 계명인 율법과 새 계명간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굳이 새 계명을 주실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런데 과연 그러한 아무런 차이 없는 사랑을 예수님께서 새 계명으로 주신다고 하셨겠습니까? 새 계명으로 주신다고 하셨을 때에는 분명 차이가 있기에, 옛 계명보다 더욱더 나은 차이가 있기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신다고 하면서 서로 사랑할 것을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신 사랑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실 것을 행동으로 몸소 보이셨는데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는 것에서였습니다. 대야에 물을 떠다 제자들의 발을 한 사람 한 사람 씻겨 나가실 때 제자들은 참으로 민망해 하며 만류를 하였습니다. 그 까닭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인 저희가 선생님의 발을 씻겨 드려야 하는데 선생님께서 저희들을 발을 씻기십니까? 이는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하는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을 하는 사람으로 나선 사람이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이렇게 하는 까닭을 너희가 지금은 모를 것이지만 훗날에 가면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고, 그럼에도 베드로가 극구 만류하며 "주님,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제 발은 절대로 못 씻기십니다."하자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제서야 베드로는 "그러시다면 제 발만이 아니라 손과 머리까지도 모두 씻어 주십시오!"라고 말하였는데, 그러나 예께서는 "이미 목욕한 사람은 온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된다. 이제 너희는 깨끗하다."고 하시면서 "그러나 여기 있는 사람이 모두다 깨끗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는 이미 자기를 배신할 자가 누구인지를 알고 계셨기 때문에 모두가 다 깨끗한 것은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내용을 교회는 중생의 교리로 끌고 갑니다. 그러나 사실 직접 중생의 교리로 다루어질 내용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것에서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그동안 사랑해 오셨는데 이제 자신이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에 의해서 체포되어서 사형 판결을 받고 십자가에 넘겨져 그 위에 달려 죽음을 당하게 된 후 자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께로 돌아갈 것이기에 세상에 남겨 놓은 제자들은 그러한 주님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인데 그렇게 남겨진 제자들을 주님께서는 끝까지 사랑하실 것을 알게 해주시는 것으로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행동을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은 단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지고 있는 정(精)을 가지고서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이것을 알 수 있기 위해서는 새 계명을 말씀하시게 된 그 앞 절들의 내용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가룟 유다에게 배신을 당하여서 체포될 것을 내다보시면서 이를 제자들에게 거듭 알려주시는데, 가룟 유다의 이러한 배신은 하나님의 뜻인 십자가의 구속을 이룰 예수님의 때가 온 데 따라 있게 되는 것으로 이제 예수께서 영광을 받게 되었고 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서 그를 보내신 하나님께서도 영광을 받으실 것과의 연관에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 예수님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일로 하나님께서 크게 찬양을 받으실 것이면 - 하나님께서도 몸소 인자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라는 연관에서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신다고 하면서 서로 사랑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다가온 때를 받아들이십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아들로 오신 분이시기에 온전히 순종하는 모습을 취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 중 한 사람인 가룟 유다의 배신에도 분노하지 않으며 이를 책망하며 마다하지 않고 그에게 주어진 일을 할 것을 허락하십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가룟 유다와 공모한 대로 뜻을 이루어 예수님을 잡아 십자가의 형벌에 처형을 받게 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성경에 예언하신 대로 '나무에 달린 자'가 되시며, 여기에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십니다.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드리는 헌신제사의 희생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후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 올리우심을 받아 하나님의 영광의 우편 보좌에 앉아 세상을 심판하실 주가 되심으로 영광을 얻으십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강림하셔서 자기 백성들 가운데 거하셔서 생명을 얻게 하시고 이들을 안전히 보호해 가십니다. 이러한 사실이 요한일서 4장 9-10절에서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이런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를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것에서 이를 알려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발을 씻기고자 하실 때 감히 어떻게 그렇게는 하실 수 없다고 하였으나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것이 없으면 제자들은 주님과 상관이 없다고 하심으로 자신의 발 만이 아니라 손과 머리도 모두 씻겨 달라고 할 때 이미 목욕한 사람은 온 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신 말씀에서 예수님의 제자들 발 씻음이 이미 이들의 몸 전체를 씻은 표시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지금 예수께서 자신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사랑을 받고 있는 것에서만 사랑의 행위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손과 머리까지 몸 구석 구석을 씻음 받는 사랑 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이처럼 제자들을 사랑한 것 같이 제자들은 서로 사랑할 것을 새 계명으로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발 씻음을 받고 있는 이 사랑의 행위가 왜 있게 되는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끝까지 있게 되는지를 이미 요한복음 12장 23-25절에서 가르침을 받았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이 얻을 영광의 때가 온 것을 이야기하면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는 일로써 자기 생명을 내놓는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많은 열매'는 그 뒤에 말씀하시는 '영생'을 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자기 생명을 내놓는 사랑의 행위는 많은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는 목적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곧 자기 생명을 내놓으시는 것은 자기 생명을 사랑함으로써 자기 생명을 내놓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사랑의 행위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자기 사랑에서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의 행위도 생각하는 것입니다. 전혀 자기 사랑은 없이 다른 사람만 생각하여서 사랑의 행위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한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에 교회에서 어떤 프로그램으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은 것을 적용하여서 '수족식'을 행하는 순서를 가지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렇게 하는 데에는 '서로' 사랑을 주고받는다는 것이 깔려 있습니다. 사랑을 받는 것이 없이 사랑을 주는 행위도 하지 않습니다. 가령 가정 행복 프로그램으로 예수님이 제자의 발을 씻으신 것을 적용하여서 남편이 아내의 발을 씻어주고 남자가 사랑하는 여인의 발을 씻어주고 건강한 사람이 병약한 사람의 발을 씻어 주고 할 때 그로 인해서 얻는 가정의 평화에 의한 화목, 또는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 기쁨의 만족을 얻는다는 것이 따라다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행하신 사랑의 행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기 생명을 사랑함으로써 한 알의 밀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음을 당하는 이 일을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하여서'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의 사랑을 행하면 그로 인해서 자신이 베푼 사랑보다 더 많은 사랑을 입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합니다만, 예수님은 처음부터 사랑을 주는 사람에게서 받을 사랑을 염두에 두시고서 사랑을 행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처음부터 자기 생명은 미워하셨습니다. 자기 목숨을 버리시는 일로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이 사랑을 베푼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염두는 아예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으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랑의 행위를 하시는 것에서 하나님의 저주의 진노를 한몸에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쏟아 부으실 저주의 진노를 용서 없이 예수님에게 쏟아 부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대신하여 죄값을 짊어지셨으며 이러한 예수님의 행위에 대하여 하나님은 조금도 긍휼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전혀 용서받지 못하였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 같이 예수님은 자기 생명을 버리심으로 죽음을 당하셨는데 이로 인해서 하나님의 택한 많은 사람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행한 사랑의 행위를 제자들에게도 가르치신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예수님은 말입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들일 수밖에 없는 자들이었으나 이제는 예수님이 행하신 사랑 안에 있어 그 사랑을 입는 자가 됨으로써 이들의 존재가 전혀 달라졌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달라졌다는 것입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이제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 속에 들어와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죠. 무슨 말인가 하면, 예수께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여 제자들을 사랑한 이 관계에 의해서 제자들은 주님과 상관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천국의 복음이 온 땅에 전하여서져서 예수님께서 모든 믿는 자들의 주가 되시기까지 예수님이 행하신 사랑의 행위가 전파되어 갈 것인데 제자들이 죽도록 자기 생명을 미워함으로써 되어져 갈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모든 자들을 죄 용서 받게 하실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일을 하는 것에서 자기 생명의 구원을 바라는 욕심과 그 집착 속에서, 그렇게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것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이들의 생명은 주님의 보호 속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하신 그 사랑은 지금 이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것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미 손도 씻어 주시고 머리도 씻어주시며 몸 전체를 깨끗하게 씻어주신 사랑에 의해서 갖는 행위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끝까지 갑니다. 그러니까 계속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사랑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준다고 하면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며 행하고자 하는 사랑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영광을 입게 될 것이므로 주님이 그들의 곁을 떠날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제자들에게 유익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오셔서 제자들의 이런 저런 잘못과 악한 죄를 행한 것이 흠이 되어서 온갖 더러움 속에 있을지라도 이미 그들을 깨끗하게 해주신 사랑에 따라서 더러워진 발을 씻어주시는 사랑인 죄 용서의 은혜를 날마다 입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입음으로 해서 몸이 더러워졌을 때마다 율법이 이를 정죄하여 사망의 해로 끌고 가려는 죄의 권세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흘린 피가 이미 이들의 죄를 다 용서했으니 아무리 정죄하고 죽음의 형벌을 심판으로 내려달라고 해도 소용없다. 그러니 더 이상 이러쿵 저러쿵 말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한 점 흠이 없는 거룩한 자로 구속을 받았기 때문에 혹 실수가 있거나 잘못이 있는 흠이 있을지라도 이미 이들을 깨끗하게 하신 구속의 피에서 나오는 은혜를 통해서 깨끗이 씻음을 받아 이것으로 흠이 되지 않게 하십니다. 이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지닌 흠이 그들이 가진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깨뜨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중단되어 더 이상 주어지지 않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이미 이들의 그리스도 된 사랑은 계속 나와서 끊임없이 용서하시고 또 용서하십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제자들은 자신을 깨끗하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가지는 힘과 용기 속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해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정리함으로 끝맺음을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신다고 하면서 '서로 사랑할 것'을 말씀하신 것은 결코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것에서 갖는 인간적인 사랑의 행위를 지시하고 명령하시며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그런 쪽으로 생각을 가져나간다면 사랑은 미움을 증폭시켜가게 됩니다. 가령 우리는 신호등 하나도 제대로 못 지켜 나갑니다. 소위 법조차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때 그러한 사람을 보고 증오하게 됩니다. 법 하나 지키지 못하는 사람의 도덕성과 인격성을 무시하게 되어서 그런 사람과 사귐을 가지면 자기에게 하나도 이로울 게 없고 맨 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호등 앞에서 믿는 자의 인격성은 여지없이 무너지기 마련이죠. 법 하나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말이죠. 그래서 그런 법 하나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무슨 더 큰 사랑을 할 수 있겠느냐는 식으로 가게 됩니다. 교회에서 사랑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사람들은 말입니다. 가령 구제나 그러한 선행을 사랑의 행위로 말합니다. 당연히 종교적인 행위로서 이런 저런 것도 사랑의 행위로 들어가게 되죠. 그런데 이 사랑의 행위가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것으로 가져나가고자 할 때는 이게 티가 되어서 공격 대상이 됩니다. 항상 만족하지 못하는 부분이 눈에 띠게 마련이거든요. 그래서 사랑을 온전히 행하지 않는 자가 되고 맙니다. 그러면 공격당하는 상대방은 가만히 있습니까? 이제까지 사랑의 대상자로 보듬어 왔는데 공격당하는 순간에 그동안 용납하여 왔던 상대방이 지닌 티가 들보로 확대가 되어서 공격의 대상이 됩니다. 결코 자기 눈에 있는 들보를 들보로 여기지 않고 의로 생각하고 상대방의 티는 들보로 다루어서 용서할 수 없는 흠으로 자리잡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새 계명으로 주시면서 말입니다. 새 계명으로 주어지는 이 사랑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여서 영광을 얻으실 것에서 언급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주시는 영생에서 다루어지는 사랑을 행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제자들은 말입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것에서 이미 떠나 있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주가 되신 예수님께서 이들 안에서 하나가 되어 있어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였던 것을 버리고 그래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주님의 몸으로 움직이도록 예수님이 주시는 생각을 좇아서 예수님이 공급하시는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예수님이 새 계명으로 주신 서로를 사랑하는 행위를 가져나가십시오. 발만 씻어 주는 것이 아니라 손도 씻어 주고 머리도 씻어 주면서 그렇게 온 몸을 씻어주는 사랑의 행위를 가져나가십시오. 보고, 또 보아도 주님이 주신 죄 용서를 통해서 영생을 얻은 한몸 된 지체인 믿음의 형제들입니다. 허물이 있기에 죄 용서를 합니다. 흠이 있기에 자기의 몸을 희생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나가는 일에서 사랑의 행위가 필요합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해 가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서로 사랑하는 것에서 해 나가십시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장 10절에서 참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면서 이 사랑은 우리 죄 때문에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벌하시는 대신에 사랑하는 아들을 희생제물로 내주신 데서 나타났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1).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새 계명을 말씀하시는 것이니,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이시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은 우리가 한번도 하나님을 뵌적이 없지만 우리 속에 사시며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게 하여 그 전에 가지고 있던 그분에 대한 두려움을 다 몰아내 주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 믿음의 형제를 사랑하게 하십니다(요일 4:12-21). 요한은 요한일서 2장 11-18절에서는 이러한 사랑의 행위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심으로써 보이신 사랑에서 나오는 것으로 우리가 믿음의 형제들을 위해 생명을 바치는 것에서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은 자임을 확증해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은 가인과 같은 사람이 되어 있어서 의로운 동생 아벨을 미워함으로 죽인 것에서 보듯이 사랑을 주지 못합니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자신 안에 계신 그리스도로부터 사랑을 공급받고 있어서 함께 믿음으로 형제 된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을 몰아냅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마음 속으로 살인을 하는 자인데 살인을 하려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을 수 없고 영원한 죽음인 지옥으로 치달려 내려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미 지옥에서 구원받아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자이기 때문에 믿음의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은 그리스도에게로부터 공급되는 마음에서 갖는 것이 아니므로 이러한 마음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마음이 일어나 갖는 것은 그 자신 스스로 하나님의 가족이 아니라 사단에게 속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만일 이러한 마음이 일어나 갖는다면 그 사람은 지옥 간다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것을 예수님께서 그에게 그리스도가 되셔서 지옥의 해를 당하지 않게 해 주시고 있는 데 따라서 지옥의 해를 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께서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생을 주신 사랑을 인하여서 끝까지 사랑하여 주시는 긍휼하심이 그의 허물과 그로 말미암은 흠을 덮고 있음으로 해서 지옥의 해를 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새 계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의 존재성을 확인시켜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누구인지 아느냐?는 것이죠. 본래 우리의 마음이란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것에서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존재요 자기의 생명을 사랑할 수 있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이용하기도 하는 존재인데 이런 자신에게서 다른 사람의 생명을 생각하고 그들의 생명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은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정복당하여 그 사랑의 지배를 받고 있는데 따른 결과라고 하는 것입니다. 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여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너희는 그리스도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요 그 자신 스스로에게서도 자신이 하나님 편에 서 있다는 것을 더욱 확신케 하는 것이 됩니다(요일 3:10-18, 19). 그러므로 이것은 본문 마지막 부분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고 말입니다. (*)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