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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기독교강요 제1부.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 강론 1장

작성자이천우|작성시간03.10.27|조회수932 목록 댓글 3
*본 글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입니다. 기독교 강요는 개혁교회의 신앙을 이해할 수 있는 아주 유익한 책입니다. 여기서는 제1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항목에 따라 매주 순차적으로 올려 놓겠습니다. 하오니 매주 연속적으로 깊이 있게 정독하시고 사색하여 개혁교회의 신앙을 이루는데 도움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1부.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 강론


1장.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면 이 둘은 어떻게 서로 관련되어 있는가?


1항. 자신을 알지 못하고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거의 모든 지혜, 곧 참되며 건전한 지혜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요, 다른 하나는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입니다. 그러나 이 두 지식은 여러 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쪽이 먼저이며, 어느 쪽의 지식이 다른 쪽의 지식을 산출해 내는가를 알아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먼저, 자기 생각을 돌려, 자기가 "힘입어 살며 기동"(행17:28)하고 있는 바 하나님을 응시하지 않고는 아무도 자신을 살펴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받은 은사 중 그 어느 하나도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없으며, 심지어는 우리의 존재 자체도 한 분 하나님 안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늘에서 이슬처럼 떨어지는 이들 축복들로 말미암아 우리는 마치 시내를 따라 샘 근원으로 올라가는 것처럼, 그 축복의 근원에까지 인도함을 받게 됩니다.

실로 우리 자신의 빈곤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축복을 보다 더 잘 드러내 줍니다. 특별히 최초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빠지게 된 그 비참한 파멸은 우리들로 하여금 위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굶주림과 배고픔 때문에 우리의 결함을 찾을 뿐만 아니라, 공포에 눈을 뜨게 되어 겸손을 배우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참으로 비참한 세계가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신적 의상(衣裳)을 빼앗긴 후부터 우리의 벌거벗음의 수치는 수 없이 많은 추행을 드러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모든 사람은 자신의 불행을 의식하도록 자극을 받아 적어도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다소나마 얻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 자신의 무지, 공허, 빈곤, 허약, 이보다 더한 것인 타락과 부패를 자각함으로써, 지혜의 참된 광채, 건전한 덕, 차고 넘치는 선, 의의 순결함이 오직 주 안에만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악들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선하신 일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을 미워하기 전에는 진실로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자신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있는 한, 곧 자신의 재능에 만족하고,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알지 못하거나, 잊어버리고 있는 한, 자신에 대하여 만족하지 않을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은, 우리를 일깨워서 하나님을 찾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마치 손으로 끄는 것처럼 우리를 인도하여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는 것입니다.(*)


2항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자신을 알지 못한다

한편 인간은 분명히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응시하고 나서, 다음으로 자신을 세밀히 검토하지 않는 한, 결단코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명백한 증거에 의해서 우리 자신의 불의, 더러움, 어리석음, 불결함을 스스로 확신하기 전에는, 우리는 항상 자신을 의롭고, 바르고, 현명하며, 거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이러한 교만은 온 인류에게 본유적인 것입니다). 더우기 우리가 자신만을 바라보고 이러한 판단의 유일한 표준이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그와 같은 확신을 가지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가 본래 위선으로 기울어져 있어서, 일종의 공허한 의와 형상이 의 그 자체를 대신하여 충분히 만족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속과 주위는 너무나 부패하여 더러워지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정신이 인간 부패의 범위 내에서만 보게 되면, 적게 더러워진 것을 보았을 때, 그것이 마치 가장 깨끗한 것처럼 우리를 즐겁게 합니다. 그것은 마치 검은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한 눈이 희끄므레한 것이나 갈색인 물체를 볼 때, 완전히 흰 것으로 판단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영혼의 여러 능력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크게 속고 있는가 하는 것은 육체의 감각을 통해서 더욱 분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대낮에 땅을 내려다 보거나, 주위에 있는 어떤 사물들을 본다면, 아마 우리는 자신이 가장 강하고 가장 예리한 시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눈을 들어 태양을 똑바로 쳐다보게 될 때, 우리의 시력을 당장 그 광채로 말미암아 눈이 부시고 혼란을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구상의 사물을 볼 때에는 그렇게 예리하던 시력이 태양을 쳐다볼 때에는 아주 흐려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또한 영적 은사를 생각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지상 너머를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의 의와 지혜와 덕으로 완전히 만족하고 있는 한, 우리는 자신이 가장 훌륭한 존재인 양 우쭐대며 자신을 거의 반신적인 존재로 착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 쪽으로 향하며, 그의 속성을 생각하며, 마땅히 우리의 규범이 되어야 할 하나님의 의와 지혜와 권능이 절대 완전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전에 의라는 가면을 쓰고 우리를 즐겁게 하던 것은 최대한 불의한 것으로 여겨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혜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기묘하게 속이던 것은 매우 어리석은 것으로 미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또한 전에 능력의 탈을 쓰고 있던 것은 가장 비참한 무력자로 증명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완전하게 보이는 것도 하나님의 순결에 비하면 그 자체가 사악한 것입니다.


3항 하나님의 존엄과 인간

성경이 어디에서나 말한 것 같이 성도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할 때마다 충격을 받으며 압도당하였던 그 두려움과 놀라움은 바로 여기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생각할 때에는 보통 안전하게 또는 확고하게 서 있지만, 일단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 보이시면, 죽음의 공포로 쓰러질 만큼 마음이 흔들리며 놀라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실 그들은 죽음의 공포에 압도되어 거의 멸절 되다시피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자신을 하나님의 위엄과 비교해 보기 전에는, 결단코 자신의 비천한 상태를 충분히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추론할 수 있습니다. 더우기 우리는 이러한 놀라운 사건의 많은 실례를 사사기나 여러 예언서에서 자주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말이 자주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공통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이리로다"(삿13:22, 사6:5, 겔2:1, 1:28, 삿6:22-23).

욥기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순결을 표현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어리석음과 무능력, 그리고 부패를 인식케 하는 가장 강력한 논증을 사용합니다(욥38:1). 그것은 아무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하여 가까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자신이 "티끌과 재"(창18:27)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했으며, 엘리야도 자기 얼굴을 겉옷으로 가리우지 않고는 주께서 가까이 오심을 감히 견뎌낼 수가 없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의 나타나심은 매우 두려운 것입니다(왕상19:13). 그룹까지도 두려움을 피해 그들의 얼굴을 가리우지 않으면 안 되었거늘(사6:2) 하물며 후패하고(욥13:28), 버러지에 지나지 않는(욥7:5, 시22:6) 인간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에 대하여 선지자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그 때에 달이 무색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 왕이 되시고...."(사24:23). 곧 주께서 자신의 광채를 나타내시며 보다 더 가까이 발하실 때에는, 가장 빛나던 광채들도 그 앞에서 어두워지게 되는 것입니다(사2:10, 19).

그러나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에 서로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더라도, 먼저는 전자에 대해 논의하고 다음으로 후자를 논의하는 것이 정당한 순서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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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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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한우리 | 작성시간 05.08.04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 작성자대장간 | 작성시간 09.12.01 펌하겠습니다.
  • 작성자존분 | 작성시간 12.03.14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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