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
예레미야 9장 1-24절 / 1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 2내가 광야에서 나그네가 머무를 곳을 얻는다면 내 백성을 떠나 가리니 그들은 다 간음하는 자요 반역한 자의 무리가 됨이로다 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활을 당김 같이 그들의 혀를 놀려 거짓을 말하며 그들이 이 땅에서 강성하나 진실하지 아니하고 악에서 악으로 진행하며 또 나를 알지 못하느니라 4너희는 각기 이웃을 조심하며 어떤 형제든지 믿지 말라 형제마다 완전히 속이며 이웃마다 다니며 비방함이라 5그들은 각기 이웃을 속이며 진실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혀로 거짓말하기를 가르치며 악을 행하기에 지치거늘 6네가 사는 곳이 속이는 일 가운데 있도다 그들은 속이는 일로 말미암아 나를 알기를 싫어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7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내 딸 백성을 어떻게 처치할꼬 그들을 녹이고 연단하리라 8그들의 혀는 죽이는 화살이라 거짓을 말하며 입으로는 그 이웃에게 평화를 말하나 마음으로는 해를 꾸미는도다 9내가 이 일들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런 나라에 보복하지 않겠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0내가 산들을 위하여 울며 부르짖으며 광야 목장을 위하여 슬퍼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불에 탔으므로 지나는 자가 없으며 거기서 가축의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며 공중의 새도 짐승도 다 도망하여 없어졌음이라 11내가 예루살렘을 무더기로 만들며 승냥이 굴이 되게 하겠고 유다의 성읍들을 황폐하게 하여 주민이 없게 하리라 12지혜가 있어서 이 일을 깨달을 만한 자가 누구며 여호와의 입의 말씀을 받아서 선포할 자가 누구인고 이 땅이 어찌하여 멸망하여 광야 같이 불타서 지나가는 자가 없게 되었느냐 13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그들이 내가 그들의 앞에 세운 나의 율법을 버리고 내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며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고 14그 마음의 완악함을 따라 그 조상들이 자기에게 가르친 바알들을 따랐음이라 15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그들 곧 이 백성에게 쑥을 먹이며 독한 물을 마시게 하고 16그들과 그들의 조상이 알지 못하던 여러 나라 가운데에 그들을 흩어 버리고 진멸되기까지 그 뒤로 칼을 보내리라 하셨느니라 17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잘 생각해 보고 곡하는 부녀를 불러오며 또 사람을 보내 지혜로운 부녀를 불러오되 18그들로 빨리 와서 우리를 위하여 애곡하여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게 하며 우리 눈꺼풀에서 물이 쏟아지게 하라 19이는 시온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기를 우리가 아주 망하였구나 우리가 크게 부끄러움을 당하였구나 우리가 그 땅을 떠난 것은 그들이 우리 거처를 헐었음이로다 함이로다 20부녀들이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너희 귀에 그 입의 말씀을 받으라 너희 딸들에게 애곡하게 하고 각기 이웃에게 슬픈 노래를 가르치라 21무릇 사망이 우리 창문을 통하여 넘어 들어오며 우리 궁실에 들어오며 밖에서는 자녀들을 거리에서는 청년들을 멸절하려 하느니라 22너는 이같이 말하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의 시체가 분토 같이 들에 떨어질 것이며 추수하는 자의 뒤에 버려져 거두지 못한 곡식단 같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23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24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약성경의 예레미야서
구약성경에서 예레미야서는 히브리어성경에서는 후기 선지서에 속한 것으로 배열되어 있지만, 한글성경에서는 선지서 중에서 대선지서에 속한 것으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서의 저자
예레미야서를 기록한 저자는 선지자 예레미야입니다. 그에 대해서는 예레미야서가 시작되는 1장 첫 절에 설명되어 있습니다.“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라.”그는 베냐민 지파의 땅 아나돗이라는 마을에서 사는 제사장의 한 사람인 힐기야의 아들입니다. 예레미야란 이름의 뜻은‘야웨(여호와)가 억압을 풀어주신다’입니다. 그는 결혼을 하지 않았으며, 친구도 별로 없었고, 심판과 파괴의 메시지를 전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는‘눈물의 선지자(예언자)’라고 불립니다.
예레미야서의 기록 연대
예레미야서가 기록된 연대를 1장 2-3절에서 알려 주고 있습니다.“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다스린지 십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요시야의 아들 유다 왕 여호야김 시대부터 요시야의 아들 유다 왕 시드기야의 제십일년 말까지 임하니라. 이 해 오 월에 예루살렘이 사로잡히니라.”예레미야는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가 통치한지 13년에 선지자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이때의 연도는 B.C. 627년경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때로부터 시작해서 선지자로 사역한 기간은 유다 왕 시드기야가 마지막 왕으로 제11년까지 통치한 끝에 멸망을 당하는 B.C. 586년(587)까지인 40년을 거쳐 예레미야서를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학자들의 견해에서는 선지자 예레미야가 유다의 포로기인 B.C. 580년경에 죽은 것으로 여겨지므로,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이 기록된 예레미야서 또한 이 기간 동안(B.C. 627-580)을 포함하여 모두 47년간에 기록되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때부터 유다가 바벨론 포로기를 겪는 동안에 선지자의 사역을 유다 땅 예루살렘에서 하였으나 그달랴가 살아있을 동안에 한 것이며, 그 후의 사역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애굽에서 있었습니다. 예레미야가 이처럼 애굽에서 선지자의 사역을 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애굽으로 내려간 유대인들에 의해서 애굽으로 끌려간 후 그곳에서 한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백성들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 것을 경고했지만 백성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가면서 강제로 그도 데려갔습니다. 이렇게 애굽으로 오게 된 예레미야는 그곳에서도 충성스럽게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예레미야서가 기록된 역사적 배경
예레미야가 선지자의 소명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이를 기록할 당시의 유다가 처한 상황은 당시 유다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주변 국가의 역사적 상황과 관련하여 유다가 멸망을 향해가고 있는 시대였습니다. 유다는 위쪽으로는 앗수르와 바벨론의 싸움, 아래쪽으로는 애굽의 침략 등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가지는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동안 패권을 차지하며 강성했던 앗수르 제국은 붕괴 위기에 처해 있었으며, B.C. 612년에 마침내 앗수르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함으로, 바벨론 제국이 급부상하여 새로운 강국으로 세력을 떨쳐 유다를 압박하게 되었습니다. 이때의 애굽은 앗수르의 멸망을 계기로 자신의 세력을 확장시켜 나가는 기회로 삼으며 바벨론의 서방 진출을 막으려는 전략으로 이미 패망한 앗수르 왕의 도움을 구하는 요청을 받아들여 군대를 동원하여 앗수르 왕을 돕기 위해 유브라데스 강가의 갈그미스로 올라갑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요시야 왕은 바벨론 편에 섰으며, 유다가 애굽의 손아귀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 애굽의 진행을 막으려고 므깃도에 집결하여서 애굽 왕 느고와 전쟁을 벌였으나 패배하고 전사하게 됩니다(왕하 23:29; 대하 35:20-24, B.C. 609). 이런 와중에서 바벨론은 4년 뒤인 B.C. 605년에 갈그미스에서 앗수르와 연합군을 이룬 애굽을 물리치고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갖춘 나라로 우뚝 섭니다. 그러한 바벨론은 그 해 B.C. 605에 유다마저 침공하였으며, 이후로도 597년과 586(587)년까지 계속해서 모두 3번에 걸쳐 유다를 침공하여 마침내 586년에 멸망시켰습니다. 이런 외적인 역사적 상황 속에서 예레미야는 선지자의 사역을 수행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선지자로 부름을 받아 사역을 시작하게 되기까지의 유다가 처한 내부적인 상태는 요시야가 8세로 유다 왕위에 올라(B.C. 640) 31년 동안 통치하는 기간에서 요시야 왕이 유다의 신앙 회복을 위해 종교개혁을 단행하게 되는 이전의 초기의 모습에서 보게 됩니다. 이는 요시야 왕 이후의 모습이 되기도 하는데, 이때의 유다 모습은 1:16에서 언급해 주시고 있는“무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에 절하였은즉 내가 나의 심판을 베풀어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징계하리라”라고 하신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여호와이신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는 악이 극에 달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유다의 이런 상태는 예레미야가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때가 요시야 왕 제13년(B.C. 627)인 것에서 이해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요시야는 유다의 왕으로서 유다(이스라엘)의 개혁을 주도한 몇 명 안 되는 존경 받는 훌륭한 왕이기 때문입니다. 아사 왕(왕상 15:11∼14), 요아스 왕(왕하 11:4∼21). 히스기야 왕(왕하 19;20∼37)과 함께 요시야 왕이 유다 왕국의 종교개혁을 이끈 왕입니다. 이들 중에서 열왕기하 23:4-25와 역대기하 34-35장에서 기록해 주시고 있는 요시야 왕은 유다 왕국 최후의 개혁을 이룬 왕으로 불리는데, 그가 재위한 B.C. 640-609년에서 예레미야가 선지자의 소명을 받은 때인 요시야 왕 제13년은 유다가 종교개혁에 들어간 시기에 해당하며, 이를 통해서 요시야 왕이 이룬 종교개혁의 업적을 열왕기하에서는 다음과 같이 알려주고 있습니다.
왕하 23:4-25 / 4바알과 아세라와 하늘의 일월성신을 위하여 만든 모든 기명을 여호와의 전에서 내어다가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밭에서 불사르고 그 재를 벧엘로 가져가게 하고 5옛적에 유다 왕들이 세워서 유다 모든 고을과 예루살렘 사면 산당에서 분향하며 우상을 섬기게 한 제사장들을 폐하며 또 바알과 해와 달과 열두 궁성과 하늘의 모든 별에게 분향하는 자들을 폐하고 6또 여호와의 전에서 아세라 상을 내어 예루살렘 바깥 기드론 시내로 가져다가 거기서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어 그 가루를 평민의 묘지에 뿌리고 7또 여호와의 전 가운데 미동의 집을 헐었으니 그곳은 여인이 아세라를 위하여 휘장을 짜는 처소이었더라 8유다 각 성읍에서 모든 제사장을 불러오고 또 제사장이 분향하던 산당을 게바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더럽게 하고 또 성문의 산당들을 헐어 버렸으니 이 산당들은 부윤 여호수아의 대문 어귀 곧 성문 왼편에 있었더라 9산당의 제사장들은 예루살렘 여호와의 단에 올라가지 못하고 다만 그 형제 중에서 무교병을 먹을 뿐이었더라 10왕이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의 도벳을 더럽게 하여 사람으로 몰록에게 드리기 위하여 그 자녀를 불로 지나가게 하지 못하게 하고 11또 유다 열왕이 태양을 위하여 드린 말들을 제하여 버렸으니 이 말들은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곳의 근처 시종 나단멜렉의 집 곁에 있던 것이며 또 태양 수레를 불사르고 12유다 열왕이 아하스의 다락지붕에 세운 단들과 므낫세가 여호와의 전 두 마당에 세운 단들을 왕이 다 헐고 거기서 빻아내려서 그 가루를 기드론 시내에 쏟아버리고 13또 예루살렘 앞 멸망 산 우편에 세운 산당을 더럽게 하였으니 이는 옛적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시돈 사람의 가증한 아스다롯과 모압 사람의 가증한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가증한 밀곰을 위하여 세웠던 것이며 14왕이 또 석상들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들을 찍고 사람의 해골로 그곳에 채웠더라 15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벧엘에 세운 단과 산당을 왕이 헐고 또 그 산당을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며 또 아세라 목상을 불살랐더라 16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산에 있는 묘실들을 보고 보내어 그 묘실에서 해골을 취하여다가 단 위에 불살라 그 단을 더럽게 하니라 이 일을 하나님의 사람이 전하였더니 그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되었더라 17요시야가 이르되 내게 보이는 저것은 무슨 비석이냐 성읍 사람들이 고하되 왕께서 벧엘의 단에 향하여 행하신 이 일을 전하러 유다에서 왔던 하나님의 사람의 묘실이니이다 18가로되 그대로 두고 그 뼈를 옮기지 말라 하매 무리가 그 뼈와 사마리아에서 온 선지자의 뼈는 그대로 두었더라 19전에 이스라엘 열왕이 사마리아 각 성읍에 지어서 여호와의 노를 격발한 산당을 요시야가 다 제하되 벧엘에서 행한 모든 일대로 행하고 20또 거기 있는 산당의 제사장들을 다 단 위에서 죽이고 사람의 해골을 단 위에 불사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더라 21왕이 뭇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 언약책에 기록된 대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매 22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열왕의 시대에든지 유다 열왕의 시대에든지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 23요시야 왕 십팔 년에 예루살렘에서 여호와 앞에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 24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박수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25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이러한 기록에서 보는 요시야 왕이 유다에서 이룬 종교개혁의 업적을 정리한 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요시야 왕이 위에 오른 지 8년 즉, 그의 나이 16세 때에 그는 벌써 하나님을 찾는 간절한 마음이 생겼고, (2)위에 있은지 12년 즉, 그의 나이 20세 때에 예루살렘과 유다와 북방 여러 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우상을 정결케 했다. (3)그러한 정화운동을 다 이루는 데는 무려 6년의 세월이 걸렸다(대하 34:1-8). (4)이것은 유다왕국의 역사에 있어서 전무후무한 개혁운동이었다. (5)이러한 개혁운동은 성전수리에서 발견된 율법책으로 말미암아 그 절정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제사장 힐기야가 발견한 그 책을 그는 서기관에게 주어 그것을 요시야 왕 앞에서 읽게 했을 때 왕은 옷을 찢으며(대하 34:19) 회개했고(27), 온 백성들과 더불어 그는 여호와 앞에 언약을 세워 진정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서약했던 것이다(29-33).
물론 그의 그러한 신앙의 큰 부흥은 성경을 발견하기 전 성전을 수리하려는 간절한 마음이 있을 때부터 벌써 있었던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나 그 율법을 듣게 됨으로 그는 더욱 분명히 열조의 죄를 회개하며 새로운 서약을 하게 되었다. (6)과거 히스기야 왕 때보다도 요시야 왕의 개혁은 더욱 철저했다(왕하 23:13). 진실로 요시야 왕의 철저한 개혁을 통하여 남방 유다에서는 솔로몬 왕 때부터 있었던 모든 우상과 그 산당들과 또 박붕 이스라엘에서는 여로보암 1세 때 세웠던 모든 우상의 제단들을 다 훼파하여 버렸다.
그러나 (7)이 모든 우상들의 숙청과 더불어 그의 신앙운동의 절정을 이루었던 것은 모세의 율법을 따라 유월절을 지킨 것이다(대하 35:1-19; 왕하 23:21-23). 요시야 왕 때처럼 유월절을 크게 지킨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사사시대 이후 처음이었다고 한다(대하 35:18; 왕하 23:22).
요시야 왕의 이 종교개혁은 모든 우상을 숙청하는 작업에 있어서 남방 유다만 아니라 북방 이스라엘까지의 온 이스라엘의 우상을 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처럼 온 이스라엘에 종교개혁을 이룬 큰 업적에 있은 요시야 왕 때의 상황을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세우고 그를 통하여 왕과 온 백성이 듣게 했으니,“무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에 절하였은즉 내가 나의 심판을 베풀어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징계하리라”(1:16)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시야 왕은 앗수르 왕을 돕기 위하여 유브라데스 강가의 갈그미스로 올라가는 애굽과 치른 므깃도 전쟁에서 전사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요. 요시야 왕의 전사는 유다에게 큰 슬픔을 안겨 주는 비극이었으나, 그것은 요시야 왕에 대한 징벌이 아닙니다. 역대기하 34:27-28에서는“내가 이곳과 그 거민을 가리켜 말한 것을 네가 듣고 마음이 연하여 하나님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로 너의 열조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곳과 그 거민에게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하나님께서는 유다가 겪는 비극의 불행을 요시야 왕의 눈으로는 보지 않고 그의 선조가 묻힌 땅으로 편안히 있게 하는 긍휼을 베푸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유다에서 가장 훌륭한 업적을 이룬 종교개혁에 있은 요시야 왕 때 왜 앗수르와 애굽과의 전쟁을 치름을 통해 요시야 왕은 전사하고 온 백성은 피해를 입는 불행을 겪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설명을 열왕기하 34:26-27에서 말씀해 주십니다.
왕하 34:26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진노하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케 한 그 모든 격노를 인함이라 27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 같이 유다도 내 앞에서 물리치며 내가 뺀 이 성 예루살렘과 내 이름을 거기 두리라 한 이 전을 버리리라 하셨더라.
유다에 대한 징벌은 여호와이신 하나님의 분노에 의한 것으로,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에도 불구하고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요시야 왕 이전의 왕인 므낫세가 저지른 악행이 하나님의 분노를 크게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이 남방유다와 북방이스라엘 곧 온 이스라엘에서 행해졌음에도 므낫세에 대해 품으신 하나님의 결심은 변함이 없으셨습니다. 이는 요시야 왕이 온 이스라엘에 이룬 종교개혁이 아무런 효과도 없이 공허한 헛된 것으로 돌아가고 말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시야 왕에 의해서 온 이스라엘에 행해진 어느 왕도 해 내지 못한 전무후무한 큰 업적을 이룬 종교개혁을 해 나간 개혁운동이었지만, 그러한 종교개혁으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의 마음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으니 그들의 마음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여호와이신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키는 죄성이었습니다. 이것이 무너지지 않는 한에는,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에도 불구하고 므낫세에 의해서 행해진 악행에서 보는 온 땅에 가득한 죄성은 요시야 왕 때의 온 땅에 가득한 백성들에게서도 계속되는 것이었으므로 언제든지 멸망의 자식이었습니다. 금, 은, 동, 철 등에 다른 물질이 혼합되어 있는 것을 용광로에 넣어 제련하여서 순수(정결)한 금, 은, 동, 철 등을 내듯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그들을 거주하게 한 땅에서 쫓아낸 것처럼 유다 백성도 쫓아낼 것이니,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처로 선택하였던 예루살렘 도성을 버릴 것이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언제든지 만나기 위하여 자신의 이름을 두셨던 성전도 버릴 것을 예언적으로 선포하셨습니다.
이러함은 요시야 왕 이후 이어지는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 므낫세의 죄악을 잇는 것으로,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에 의해서 표면화되지 않고 은닉적으로 잠재해 있었으나, 요시야 왕 사후에 끓는 용암이 분출하듯이 표출되어 나타났으며, 이는 하나님이 유다를 심판하는 근원적인 이유였습니다. 예레미야 첫 장 16절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바인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우상 숭배의 죄악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의 활동에서 대부분은 바벨론이 유다를 세 번째로 침공하여 멸망케 한 기간인 B.C. 588-586 사이에 집중되어 있으며 최고조를 이룹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레미야서는 첫 장에서부터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들에 절을 한 유다를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북방 왕국들의 모든 족속들을 불러들여서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성읍들을 치게 할 것이니, 그들이 받을 심판의 형벌을 선포하고 징벌을 내리겠다고 하셨습니다(렘 1:15-16).
이는 남왕국 유다가 북왕국 이스라엘이 걸은 죄악의 길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부르셔서 그에게 선지자의 사명을 수행하게 하신 것은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의 길에 있은 것에 이어서 남왕국 유다 또한 그 멸망의 길을 감에 있는 것이 그들의 죄악에 있음을 알게 하시는데, 선지자 예레미야는 자신이 선포하는 것에서 유다의 모습을 역력히 보고 있기에 하나님의 긍휼이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을 구하는 것에서,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에 백성이 있을 것을 구하는 것에서 그의 두 눈에는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그러한 예레미야는‘눈물의 선지자’였으니, 예레미야서에서 우리가 보는 것으로 예레미야서가 기록된 역사적 배경입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
선지자 예레미야에는 늘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있습니다. 그를 가리켜‘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라고 부릅니다. 9:1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고 있습니다.“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렘 9:1) 예레미야는 밤이나 낮이나 울었으면 좋겠다며, 그렇게 실컷 울 수 있도록 자신의 머리가 물(또는 물로 채워진 물주머니나 우물)이었으면 좋겠으며, 자신의 두 눈은 눈물의 샘이었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이처럼 눈물의 선지자인 것은 맞아 죽고 칼레 찔려 죽은 자신의 백성을 생각하는 때문이었습니다.
그러한 선지자 예레미야의 눈물에는,
(1)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심판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살 수 없도록 타락한 죄악을 보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탄식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에서 황량한 사막에 나그네들이 쉬어 갈 곳이 있기만 한다면 동족에게서 멀리 떠나고 싶은 심정을 피력하였으니,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배신하여 진실한 마음을 버리고 떠나 음행을 일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혀는 언제라도 화살을 쏠 수 있도록 준비된 활과 같아서 이 세상에 판치는 것은 거짓말뿐이고 진실은 어느 구석에도 없습니다. 그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마음은 점점 더 흉악해 갈 뿐이니 형제도 믿지 못하며 친구를 비방하며 이웃을 속이니 속임과 거짓말이 일반이며, 탄압과 폭행이 자행되는 세상 그 어디에서 마음 둘 곳이 없습니다.
(2) 그러한 선지자 예레미야의 눈물에는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사람의 실상이 들어 있습니다. 제련소에서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철 등이 용광로의 불속에 들어가야만 녹아서 깨끗하게 되듯이 죄악이 백성이 불속에 던져져 녹여지지 않고서는 깨끗하게 될 방법이 달리 없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3) 이것에 쓰이는 것이 유다의 주변 국가를 들어 전쟁에 쓰시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겪는 비참한 참상은 옛날식에 의한 것이든 현대식에 의한 것이든 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가장 처참한 것입니다. 그 참상에 있는 유다에게 비가가 울려 퍼지게 됩니다. 이는 자신들이 저지른 죄악의 씨가 자신에게 열매로 그대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유다의 아름답던 산야는 불에 타서 황무지로 변하여 지나다니는 사람도 하나 없고 양 떼의 울음소리도 그쳐서 적막하며, 심지어 공중의 새 떼도 사라지고 들짐승들마저 달아나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된다. 예루살렘은 돌무더기로 뒤엎어져 여우들이나 우글거릴 뿐 유다의 모든 성읍은 황무지가 되어 아무도 살 수 없게 됩니다. 예레미야 9장은 이러한 비통한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4)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이 지경이 되었는지요? 이런 비밀을 설명할 만한 지혜로운 사람이 어디에 있으며 어떤 선지자가 여호와이신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가르쳐 줄 수가 있는가요? 이런 물음에 하나님께서 대답해 주셨습니다.“이는 ①그들이 내가 그들의 앞에 세운 나의 율법을 버리고 ②내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며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고, ③그 마음의 완악함을 따라 그 조상들이 자기에게 가르친 바알들을 따랐음이라. ④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그들 곧 이 백성에게 쑥을 먹이며 독한 물을 마시게 하고, 그들과 그들의 조상이 알지 못하던 여러 나라 가운데에 그들을 흩어 버리고 진멸되기까지 그 뒤로 칼을 보내리라 하셨느니라”(9:13-16).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에게 인생의 살길을 가르쳐 주었으나 그들은 무시해 버렸으며, 선지자들을 보내어 끊임없이 경고하였으나 그 말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율법과 선지자의 예언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결과는 그들의 몸에서 행동으로 나타났으니 악하고 완고한 마음에서 생각나는 대로 행동하고 조상들에게서 배운 대로 바알신들을 쫓아다니며 섬기는 우상숭배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독초로 만든 사약을 마시게 하듯이 한사람도 살아남지 못할 때까지 계속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치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의 눈에 있을 것은 눈물입니다. 그렇게 백성들이 흘려야 할 눈물을 누가 머금고 있으며 주야로 흘리는가 하면 선지자 예레미야입니다. 백성의 조가와 애곡이 있는 눈물입니다.
(5) 그 눈물에 있는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구원을 전해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로 부르신 예레미야란 이름에서 알려 주셨듯이 하나님께서 유다(이스라엘)를 그들이 당하는 억압(징계/징벌)으로부터 풀려나게 해 주시는 구원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도 자신의 지혜나 힘이나 부요함을 자랑하지 말 것입니다. 오직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은 명철하여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은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분이심을 아는 사람뿐입니다. 예레미야는 그 하나님의 뜻을 깨침에 백성이 있어야 할 것을 눈물에 담고 있었습니다. 그가 백성에게 남아 있으면서 선지자의 예언에 있은 것은 그래서 입니다. 예레미야는 장차 있을 그 일을 내다보면서 죄악에 있는 백성을 눈물에 담았습니다. 그 눈물은 백성이 흘릴 눈물이나 예레미야의 눈물로 고였으며 그 눈물을 예레미야는 하염없이 흘렸습니다. 그러기에 예레미야가 백성을 위하여 구하는 기도는 눈물의 기도였으며, 그가 기도하며 백성에게 남아 있으면서 그들과 함께 하는 선지자의 사명을 수행하는 것은 하나님이 계명에서 말씀하신‘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실행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는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듯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품에 영원히 안겼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의 눈물에 있는 사랑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속성
선지자 예레미야의 눈물과 그 기도에 있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한 사랑은 독생하신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실현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에 나타난 바 되었으니,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는 자는 또한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자이니 자기 백성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하신 기도를 이루심에서 행하신 사랑이 우리 안에 충만한 공급원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나 말함에 있는 사랑, 우리가 언제나 행하고자 하는 사랑, 우리가 언제나 믿음과 함께 하고자 하는 사랑, 우리가 언제나 소망과 함께 하고자 하는 사랑, 그 사랑이 그리스도에 의해서 나타난바 되었듯이 또한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게 하십니다. 그런 까닭에 사랑은 그리스도인에게서 성령의 열매로 맺혀져 있습니다.
이 사랑이 포도주틀에서 짓눌려서 짜내어지듯 넘치게 나와 어디로 흘러들어가야 하는가요?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은 우리가 살든지 죽든지 언제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님이 되시기 위한 데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한 그리스도를 따라서 과연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님이 되시며 우리는 주님의 것이 되어서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으로 사는 것에 있고자 함이 간절한 원함이어서(롬 14:8-9) 행해지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간절히 원하고, 이 사랑이 간절히 필요한 곳이 어디이겠는지요. 우리를 남아 있게 하여서 우리가 함께 하도록 성령으로 묶어 하나 되게 하신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 그리스도 안에 모으시고 교회가 되게 하시고, 그 교회의 속성으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언제까지나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게 하셨는데 제일은 사랑이게 하셨습니다(고전 13:13). 믿음이 있노라 하고, 소망 중에 꿋꿋이 살아간다면서 사랑이 없으면 그 믿음과 소망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믿음이 품고 있는 것이 소망이며, 믿음이 행해지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믿음 있게 살아가며 소망하는 것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게 위대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해서, 요즘 늘 마음에 품고 생각하게 됩니다. 내(우리)가 갖는 생각이 교회를 의식하며 늘 염두에 두고 있는 것에서 인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바침 같이 내(우리)가 하는 행동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바치는 대속적인 사랑의 삶인가? 이 사랑이 없이는 누구도 자기를 위하여 살뿐이지 남을 위해서는 살지 않으며, 설사 이 사랑이 없이도 행하는 것이라면 비록 남을 위해서 살며 그것이 교회를 위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참으로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 사랑을 할 수 있는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하고 있는 교회 아닌지요. 한때‘패러디’란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8)
“우리가 대답하되 주여 우리가 사랑할 자가 주(주의 교회)께 있사온데 우리가 누구에게 가서 사랑하오리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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