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교회는 구약성경을 하나님의 본의에 의해 올바르게 해석하여 그에 따른 설명을 해 나가야할 것에 있어야 할 것이란 것에서 구약성경 해석학의 필요성과 그 중요성을 다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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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해석학의 필요성과 중요성
이 천 우
구약성경 해석학의 필요성
구약성경 해석학은 성경 전체의 포괄적 개념을 갖는 성경해석학을 구약성경 해석학과 신약성경 해석학 둘로 분류하여 보다 세부화 시킨 것이다. 교회사에서 등장하는 중요 인물들에 의하여 성경 해석학에 대한 다양한 방법들이 있어왔으나,1) 기독교 신학으로 구약성경 해석학이 '성경해석학이란 학문적 성격을 갖게 된 것은 20세기에 이르러서인 것으로 여겨진다. 버클리 미켈슨(Berkeley Mickelsen)의 ‘성경 해석학’(Interpreting the Bible, 1963.), 버나드 램(Bernard Ramm)의 ‘성경 해석학 : 프로테스탄트 성경 해석학의 교과서’(Protestant biblical interpretation, 1970.)가 쓰여지면서 ‘성경 해석학’은 신학의 한 과목으로 자리 매김하며 성경 해석자들에게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여야 하는지를 가르쳐왔다. 이 후 성경해석학은 짧은 기간에 많은 발전을 하여 식견 있는 학자들에 의하여 더 많은 출간을 가져왔다. 그리고 성경 해석학은 ‘구약성경 해석학’과 ‘신약성경 해석학’으로 분류되었으며, 구약성경 해석학은 다시 더 세부화 되어 가령 구약성경 해석학으로 모세오경의 해석학을 다루는 것에서 ‘모세오경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신약성경 해석학을 다루는 것에서 ‘바울서신 해석학’, 또는 구약성경 및 신약성경 각 권별로 해석학을 다루는 것으로 점차 추세화 되어 가고 있다.
그러기에 성경 해석학에 관심을 갖기 마련인데, 이는 무엇보다 성경은 해석을 필요로 하는 것에서 더욱 그렇다. 그런데다가 구약성경은 해석을 더욱 필요로 한다. 대체로 구약성경은 잘 읽지도 않는데다가 또한 구약성경을 신약성경을 설교하는 것에 비해서 현저히 적다. 그 이유는 (1) 구약성경을 고대의 역사서를 기술하고 있는 고전적인 책으로 여기는데다가 그 내용과 이것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알지 못하기에 설교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때문이다. (2) 구약성경을 설교하더라도 인물이나 특정한 사건을 가지고서 하며, 이것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인물이 겪으며, 사건의 상황이 주어진 것에 임의로 의미를 부여해서 부각을 시킨다. (3) 그렇게 해서는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것에 접근해 나갈 수가 없다. 성경을 해석하는 데는 잘 숙고되고 정리된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 이 부분이 바로 올바른 해석에 있기 위한 '해석학'이 관여되는 부분이다.
해석학(hermeneutics)이란 단어는 아주 중요한 단어이다. 이 단어는 ‘헤르메스’(hermes)라는 고대 그리스 신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그 신은 다른 신들을 위해 그들의 의사를 그들의 수신자들에게 행운 또는 불행의 소식과 함께 전해주고 해석해 주는 일종의 전달자였다고 한다. 성경학자들은 이러한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는 단어인 ‘헤르메뉴틱스’(hermeneutics)를 성경의 의미를 설명하는 일을 가리키는 데 사용하는 기술적 용어로 삼고 있다. 그러한 이 단어는 그리스어, 곧 헬라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헬라어 사전을 보면 ‘헤르메뉴엔’(eJrmhneuven, hermeneuen)이라는 동사는 “설명하다", "해석하다", 혹은 "번역하다”란 의미를 갖고 있고, ‘헤르메네이아’(eJrmhneiva, hermeneia)란 명사는 “해석", 혹은 "번역”이란 의미를 갖는다.
누가는 이 동사를 사용해서 예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에게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과 시편"(히브리어 성경의 구성에 의한 것으로 모세오경과 선지서와 성문서를 뜻한다), 곧 구약의 모든 성경 이 그리스도를 가리켜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자세히 ‘설명했다/해석했다’(dihrmhvneusen, diermeneusen; GNT/ dihrmhvneuen, diermeneuen; GTS)고 말하고 있다(눅 24:27).2)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자신이 구약성경에서 선지자의 예언을 통해 말씀해 주신 그 그리스도로서 고난을 받고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을 구약 전체에서 해석학적으로 자세히 설명하여 구약성경이 지니고 있는 뜻을 밝히신 것이다. 예수께서 두 제자들을‘미련하고…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이 늘 들어서 알고 있는 구약성경을 해석하신 것은 예수님에 의해서 해석되지 않고서는 구약성경에 기록하신 하나님의 뜻을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을 깔고 있는 것이다. 땅에 속한 자로서는, 그래서 그 사람의 이성에 의해서 가져지는 지식으로는 아무리 지성 있는 사람일지라도 하늘의 뜻(비밀)을 알 수 없다. 하늘의 것은 하늘에서 오는 지혜로서 비로소 알 수 있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10절에서 명사를 사용해서 방언을 ‘통역’(hermeneia)하는 은사를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의 통역으로 번역하고 있는 성경 원어는 ‘해석’, 또는 ‘설명’해 주는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즉, 방언을 해석하여 여기에 담겨 있는 의미를 알게 해 줌으로써 방언을 듣는 자들에게서 그들의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듣는 유익에 있게 해주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본질상 (구약)성경 해석학은 성경을 해석하거나 설명하는 일을 포함한다. 이때 설명은 해석되어진, 그래서 이해되어진 것을 알 수 있게 풀어서 이야기 해 주는 것이다. 성경 해석학에서 구약성경 해석학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해석하고 이를 설명해 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구약성경에 기록된 본문의 내용인 하나님의 메시지가 전달하려는 바를 이해하여 알 수 있도록 사용하는 원리들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성경 해석학의 중요성
구약성경의 해석학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의 해석학을 해야만 하는, 곧 구약성경의 해석학을 필요로 하는 중요성이 있다. 이는 성경의 해석이 없이 자의적인 뜻풀이로 설교가 행해지는 것으로 인해 교회에 큰 해악을 끼치는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한 ‘성경해석학 총론’에 소개된 한 예에서 본다. 한 신학교 교수가 성경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원리들에 관한 세미나를 가져나가는데, 한 한생이 우는 바람에 한때 강의가 중단되었다. 교수는 그 학생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무슨 일로 그러는지를 물어 보았다. 그러자 그 학생은 울음을 참지 못하고 계속해서 흐느껴 울면서 그 이유를 말했다. “제가 우는 이유는 교수님이 너무 안쓰러워서 그렇습니다”. 그 대답을 들은 교수는 당황해 하면서 “왜 내가 안스러워 보이느냐?”라고 다시 물었다. 그러자 그 학생은 “왜냐하면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 교수님에게는 너무나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냥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이 그 의미를 보여 주시는데요”라고 말했다.
학생의 대답에서 볼 수 있는 성경 해석은 해석 방법도 아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성경의 의미를 알 수 있게 보여주신다는, 참으로 막연한 것이다. 소위 ‘영해’라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성경의 의미를 알 수 있게 계시해 주셔서 영해가 아니다. 하나님은 성경의 의미를 알 수 있게 하시는 것으로 영해란 방법을 사용하시지 않는다. 학생이 영해라고 알고 있는 것은 성경 본문의 구절을 놓고 소위 기도한다면서 자신이 생각되는 대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성경 해석이 위험한 것은 성경을 영적으로 해석한다며 자신을 계시를 전달받은 자로 두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만 알려주신 신비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위험한 발상의 성경 해석에 의한 설교도 있다.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니라”(고전 3:21)란 제목으로 설교한 것인데, 소개된 글을 그대로 옮긴다.
"나는 가난이 지긋지긋한 사람입니다. 나는 부자로 살던 사람이기 때문에 가난이 아주 지긋지긋해. 우리 하나님은 부잔 걸 믿으면 아멘하세요. 내가 이 교회 들어올 때 자가용 네 대 밖에 없었습니다. 일년 전에, 지금은 자가용이 댈 데가 없어서 난리가 났어요. 자가용 타고 다니면 안되겠어요? 저택에 살면 안되겠어요? "여기가 좋사옵나이다"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도울 수 없습니다. 나는 여기가 싫다고 하나님 걸 뺏어야 합니다. 천국은 빼앗는 자 거라고 했습니다. 달래야 합니다. 조건이 어디 있어요. 아버지한테? 아버지한테 야곱이라는 사람은 여러분, 어떻게 했어요? 사기꾼이요. 도적놈이요. 그런데 누구 거 도적질했어? 아버지 거 도적질했어. 그런데 아버지가 도적놈이라고 했어요? 안그랬어요. 아니라 그랬습니다. 얘야, 네가 음성은 야곱 같고 털은 에서 같으냐. 그 아버지가 그 털을 만지면서 그가 그 털을 붙인 건지 몰랐겠어요? 알았겠어요? 알고 남았습니다. 그 자식을 나이 먹도록 한 집에서 길렀는데, 그 목소릴 모르겠어요? 여러분 아버지가 친정에 걸려 있던 멋있는 벽화 같은 것을 딸이 와서 아버지 없을 때 몰래 갖다가 자기 집에 걸어 놓고 난 다음에 “아버지 , 우리 집에 좀 오세요”. 오고 난 다음에 딸 집에 있으면 “이 놈의 딸년아, 이걸 왜 가지고 왔느냐?”고 욕합디까? “하, 거 보기 좋다. 잘 갔다 놨다”. 믿으면 아멘 하세요! 잘 들어요. 잘 들어야 합니다. 지금 잘 들어요. 성경은 계속 침노하는 자 거라고, 뺏는 자 거라고 합니다. 싸워서 이기는 자 거라고 얘기한단 말이요. 계속 구약에 보면 뭐요? 싸움이에요. 싸움! 전쟁은 여호와께 달렸느니라. 여호와를 의지하라. 싸우면 이기리라. 너희는 싸워라. 뺏어라. 침노해라. 성경은 자꾸 얘기합니다. 신가하게 놀랍게도 야곱같이 도적놈, 사기꾼인데도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얘기하지 않습니까?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해 가지고서라도 뺏아서 잘 사는 그 아들을 보고 자랑하는 걸 믿으면 아멘하세요. 여러분, 비밀이에요. 놀라운 비밀이야. 사람들에게 거짓말하지 말라, 사람들에게는 거짓말하지 말라 하지만, “아버지 이번에 내게 축복만 해 주신다면, 내가 목사가 되겠어요.” 그래 가지고 대학 딱 들어가고 난 다음에 목사가 안되도 아버지가 오래 참는 걸 믿으면 아멘 하세요. 하나님이 이런 분이야. 이렇게 좋으신 분이야."
이 설교에는 물질주의, 배금사상, 쾌락주의에 있는 이교적인 온갖 생각이 다 들어 있다.3) 그런데도 비성경적인 이런 사상에 성경 구절들을 두들겨 맞춘다. 이 설교를 한 그는 이것을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하며, 성경대로 설교한다고 한다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이 설교는 소위 ‘복조리 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샤마니즘적 기복신앙이 성경을 그릇되게 해석하는 척추가 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잘못된 신앙관에서는 성경 해석이 올바르게 될 수가 없다. 즉 정석(正釋)이 될 수가 없다. 예수님은 이러한 해석에 있는 자들인 바리새인들을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한다”(마 23:15) 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당시에 친히 성경 오석을 예리하게 비판하시고 바른 성경 해석에 있어야 함을 친히 보이심으로써, 오늘날의 우리들에게서도 성경을 바르게 해석할 필요가 당연히 있음을 알게 해 주시고 있다.
에디오피아 여왕의 재무장관이 이사야서를 읽으나 그 읽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빌립이 그에게 “읽는 것을 깨닫느뇨?”라고 물었을 때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빌립은 “읽는 구절은 이것이니”하면서 이사야서에 예언된 내용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음을 자세히 해석하여 설명해 주었다(행 8:26-39).
종종 "성경은 성경으로 푼다(해석한다/설명한다)"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맞는 말인데,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이해에 의해서여야 한다. 성경은 계시의 진전이란 차원이 있기 때문에 단순히 본문 그 내용을 해석한다기보다는 해석에 기초한 진전이 있다. 이는 성경은 그 자체 내에서 이후 말씀이 이전 말씀의 해석 형태를 지니고 있는 것에서도 그렇다. 뿐만 아니라 신약성경에는 구약의 인용이 있는데, 그것은 단순한 인용이 아니라 해석적 인용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과 사도들은 구약을 해석하면서 점진적 계시를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신약 속에서 반드시 명시적으로 인용하고 해석한 것은 아닐지라도 바울 사도가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한 것이나 복음서 이외의 부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해석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신약 속에 이후 말씀이 이전 말씀의 해석으로 진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성경 자체 속에서 성경해석이 나오기 때문에 우리는 그 해석되어진 것이 오늘의 우리들에게 보다 잘 이해될 수 있게 전달되게 하기 위한 해석의 작업이 필요하며 또한 해석되어져야 할 것을 해석함으로써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면 알 수 없는 ‘미련함/어리석음’에 있는 자들을마땅히 알아야 할 열어 주시지 않으면 알 수 없는 하늘의 비밀을 앎에 있는 ‘지혜 있는 자’가 되게 한다. 그러니 구약성경 해석학은 그 필요성과 함께 또한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구약성경 해석학은 구약성경 해석을 해 나가는데 필요한 것을 알아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서 성경해석학이 목표로 하는 그리스도를 아는 장성함에 이른다(엡 4:13). 이것이 어떤 것인지를 다음의 사실에서 보게 된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1)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2)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3)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눅 24:32-35)
그러나 이를 무시하고 억지로 푸는 것의 위험성을 의식하고서 주의하며 조심해야 할 것이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5-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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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와 클레멘트, 오리켄은 풍유적인 해석 방법, 곧 알레고리적 해석 방법을 취하였고, 이러한 해석 방법을 견제하는 것에서 소아시아 안디옥의 크리소스톰, 데오도르를 중심으로 하는 문법적-역사적 해석 방법을 취해 왔다. 이에 반하여 어거스틴은 문법적-역사적 해석 방법을 취하면서 여기에 알레고리적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보는 둘 모두를 수용하는 자세인 병행적 해석 방법을 취하였다. 이러한 해석 방법 속에서 중세 교회는 보다 포용적인 자세를 취하였으니, 문자적, 교훈적, 알레고리적, 신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 성경 해석에서 이 의미를 찾는 해석 방법을 취하였다. 그후 종교개혁기를 맞는 루터와 칼빈은 풍유적이고 신비적인 의미를 찾는 해석 방법과 함께 교회 당국만의 해석 권한을 반대하였으며, 하나님의 축자적 영감설에 의한 문자적-문법적-역사적 해석 방법을 취하였다. 그러나 근현대의 해석학은 르네상스에 뿌리를 둔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의 영향과 진화론적 다윈설과 변증법적 사고가 결합하여 19세기의 서구 신학자들에게 성경 해석에 있어 예수의 시대와 초대 교회의 역사에서 모든 초자연적인 역사를 제거하여 신화화하며 단지 자연적인 현상과 개연성을 기준으로 재해석하는 것에 있는 역사 비평을 해 나가는 소위 자유신학이 등장하였다. 역사 비평은 기본적으로 성경 본문을 해체해서 예수 시대와 초대교회의 역사적 정황을 다시 구성해 보려는 비평적 노력이다. 이 시대에는 이 외에도 성경이 한 사람의 기록으로 일관성 있게 씌여졌다기 보다는 여러 사람에 의해서 여러 가지 지료들이 섞인 일종의 편집된 것으로 보는 자료 비평, 성경 저자가 성경 본문을 편집할 때 저자의 상황과 특유의 신학이 반영되었으므로 이를 찾아내어서 저자의 특성과 신학이 어떻게 본래의 사건에 영향을 끼쳤는지를 연구해서 재해석을 해야 한다는 편집 비평, 성경 본문에서 보다 작은 단위의 형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추려 내어 그 기원을 추적하고 진정성 있는 의미를 찾아보고자 하는 양식 비평 등이 있어 옴으로, 성경 해석에 인본주의적 사고와 시도가 개입되는 현상이 있어 왔다. 이 외에도 슐라이마허는 문법적 해석과 함께 심리적 해석 방법을 취하였으며, 딜타이는 정신과학에 토대를 두고 해석해 나가는 방법을 취하였고, 바르트는 기존의 역사 비평의 자료들과 신앙의 실존적 입장을 분리하여 해석하고자 하였다. 그러다가 20세기 중반에 넘어서면서 역사 비평의 본문-해체주의적인 문제들을 극복하고자 시도하는 해석 방법이 등장하였다. 이는 본문 자체의 의도를 도외시하는 역사 비평적 해석 방법을 극복하고 본문 내의 대조되는 사상들의 연관된 이해를 해석의 축으로 하고자 하는 것인데, 하이데거, 가다머 등이 있다. 성경 해석에 대한 이러한 다양한 방법들이 있어 왔지만,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은 칼빈의 성경 주석에서 보는 해석 자세이다. 그는 말하기를, “성경은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며, 선지자들을 성령의 도구로 사용하셨고, 그들은 하늘에서 선언하도록 위임 받은 것만 말하였다” 라고 하였다.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바인 ‘하늘에서 선언하도록 위임 받은 것만’이 무엇이겠는가? 선지자들이 예언하였으며, 사도들이 증거하여 전파한 하나님의 언약과 그 성취로 오셔서 하나님이 택한 자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 아닌가?
2) ‘자세히 설명하시니라’에 사용된 헬라어 ‘디에르메뉴센’(diermhvneusen)는 기본형이 ‘설명하다’(explain), ‘해석하다’(interpret), ‘번역하다’(translate)를 뜻하는 ‘헤르메뉴오’(eJrmhneuvw)인데, ‘~을 통하여, ~을 이유로’를 뜻하는 전치사 ‘디아’(diav)가 결합된 형태로, ‘~을 해석하다’, ‘~에 대하여 말하는 것의 의미를 밝히다’, ‘~을 번역하다’는 뜻을 지닌 ‘디에르메뉴오’(diermhneuvw)란 부정과거형으로 사용되어 예수께서 두 제자들에게 자신의 고난에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해석하여 주는 것)을 끝냈음을 보여 준다. 이는 매우 자세하게 설명하여 주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한편, 표준 원문(Textus Receptus)은 미완료동사 ‘디에르메뉴엔’(diermhvneuen)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예수께서 계속해서 설명해 주고 있는 모습을 표현해 주는 것에서 이다. 어느 것을 사용하든 두 표현 모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상세하게 설명(해석)해 주시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3) 이러한 설교는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물질만능주의, 배금주의, 쾌락주의에 빠지게 하는 위험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자들이 거짓말쟁이요 사기꾼이요 도적놈이 되어도 그 행위에 아무런 잘못을 갖지 않으며 정당하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위험성도 함께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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