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설교(14)
-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하게 하며 다 이루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 -
마태복음 5장 17-18절/ 17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들 것임이요”로 시작한 ‘팔복’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를 말씀하신 것에 이어지는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해주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고 왔다”고 하였습니다. ‘율법이나 선지자나’란 말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또는 글, 책)‘이란 말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폐한다‘는 것은 없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이 온 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곧 없애기 위하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러 오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완전케 한다‘는 것은 ’완성한다‘ 또는 ’성취한다‘는 뜻에서입니다. 그래서 ’다 이룬다‘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이나 선지자가 한 말을 다 이루기 - 완성(성취)하기 - 위하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완성(성취)되는 것의 확실성을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라는 말씀으로 하셨습니다. 천지가 없어지더라도 율법은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확실성을 성경을 기록하시는데 사용한 히브리 글자를 가지고 설명하였습니다. 히브리 글자에 가장 작은 글자는 ‘요드’(y)입니다. 이것을 ‘일점’, 곧 ‘하나의 점’ 글자로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히브리 글자에 역시 가장 작은 글자인데 히브리 글자 모음 ‘와우’(w)란 히브리 글자의 꼭대기 부분의 ‘한 획(뿔)’ 말하였습니다. 또는 헬라어 글자에서 가장 작은 글자는 ‘이오타’(ι)인데 이 것 위에 찍는 ‘점’(΄)과 대문자 ‘에타’(Η)나 ‘이오타’(Ι)란 글자 위나 아래의 가는 작은 선을 말하기도 합니다. ‘일 점’과 ‘일 획’은 둘 다 아주 작은 글자 형태의 ‘작은 점’이요 ‘작은 뿔’입니다. 천지가 없어져도 일점 일획을 사용하여서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 이루어질 것”이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세상 끝 날까지 말 한마디, 글자 한 마디 공허한 법이 없으며 변함이 없는 것이기에 말씀하신 그대로 반드시 완성(성취) 될 것임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언급되었습니다. 천지가 없어지더라도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그 말씀하신 대로 반드시 완성(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이죠. 천지가 없어지는 이변, 재앙, 이러한 것이 하나님이 하신 말씀에 결코 어떤 영향을 미치지 못하며, 따라서 천지가 없어지는 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자신이 말씀하신 그대로 자신이 하실 일을 행하여 나가서 마침내 반드시 성취하십니다. 더욱이 천지가 없어지는 것은 세상이 심판을 받으므로 있게 되는 세상 끝 날에 있는 것인데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게 될 것 속에서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 하나님께서 율법과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날이 있게 됩니다.
그러면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 - 하나님의 말씀 - 이 이처럼 온전히 이루어진다는 것은,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완성하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완전케 하러 왔다’ 라는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꽉 차도록 채우다’인데, 이같은 기본적인 의미로부터 ‘완수하다’, ‘끝내다’, ‘완성하다’는 의미가 파생되었습니다. 우리 한글역은 이 ‘완성’(성취)의 의미에서 번역하였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렇게 완성의 의미로 번역한 ‘완전케 하러 왔다’는 이 단어가 본절에서 어떤 내용의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는 이 단락 전체의 맥락, 특히 18절과의 관계에서 그 의미를 이해하여야 합니다. 5:21-48에서 예수님은 율법에 대한 그릇된 - 또는 피상적인 - 이해를 바로잡아 주십니다. 그것은 메시야와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로 인해 가능케 된,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가 말해온 진정한 의미를 밝혀 명확하게 해석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율법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뜻을 알게 해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진정한 의미를 분명히 밝혀 올바르게 드러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입니다.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 - 하나님의 말씀 - 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과 관련하여서 그렇다면 과연 이 일을 누가 할 것인지를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내가…완전케 하려 함이로라…다 이루리라” 라고 말씀하심으로 예수님 자신이 율법을 완성하심으로 여기에서 하시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말해주시고 있는 뜻을 다 이루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있어서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내가…온 줄로 생각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말이죠. “너희가…하였다는 것을 들었으나”라고 말씀하셔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이들의 가르침을 받는 유대인들이 들어온, 그래서 지켜온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폐지 - 무효, 철폐 - 하는 것에 예수님의 오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오신 것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 그 모두에서 하시고 있는 - 예언하시고 있는 - 하나님의 뜻, 곧 하나님이 의도하신 진정한 의미를 밝혀 명확하게 해석하여 알려줌으로써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에 담긴 진정한 뜻을 온전하게 - 일점 일획까지 - 살릴 수 있다는 것이요, 그래서 예수님 자신이 여기에 드러나고 있는 뜻을 실현시킴으로 마침내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는 말이죠.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는 말씀으로 하시고 있어서 예수님에 의해서 반드시 되어질 일임을 강조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 일을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섬김에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이 반드시 모두 다 이루어질 것인데, 그렇게 되지 않는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만일에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을 생각한다면 차라리 천지가 없어지는 것이 더 쉬울 것입니다. 천지가 없어지는 일은 세상 끝날에서야 비로소 일어날 것인데, 이런 일이 있기 전에 예수님에 의해서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이 모두 다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죠. 예수님에 의해서 말입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은 먼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올바르게 해석하여 그 뜻을 명확히 드러내심으로 하나님이 뜻하시는 진정한 의미를 완전히 드러내시는 일을 하십니다. 그것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하나님의 본의를 좇아 해석하고 이해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으로 해석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곡해하고 오해하여 잘못 가르쳐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내가…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내가…다 이루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완전케 하려 함이로라…다 이루리라” 라고 말씀하신 그대로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21절부터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했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라고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무엇을 들어왔는지를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고 그들이 들어온 모세의 율법에서 하시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이 들어서 잘못 알고 있는 것과는 그 진정성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시는 일을 하십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모세의 율법을 가지고 자신들이 행하는 악을 정당화 하며 의롭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그러한 생각과 그 행함에 숨어있는 그들의 본성의 악함을 드러내셨습니다. 가령 마태복음 6장에서는 ‘구제’가 나오는데,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보이려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의 - 선행 - 을 베푸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말씀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부터 아무런 상을 받을 수 없다며 말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친절을 베풀 때에 외식하는 자들이 하는 것처럼 하지 말라며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게 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에는 그들의 은밀한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 있었습니다. 다일공동체의 최일도 목사님이 벌써 20년의 세월이 넘게 ‘밥퍼(나눔의 공동체)’를 운영하며 지금도 하루에 700-1000명에 가까운 분들에게 따뜻한 밥 한끼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분의 선행에 대하여 아무런 할 말이 없습니다. 이분처럼 못하고 있는 우리잖습니까? 그는 신학을 하면서 한 노인의 어려움을 보고 그에게 식사 한끼를 제공하게 된 것에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이 추상적인 개념에서만 말에 있는 것에 있음을 알고 가려던 유학도 포기하고 실천에 들어갔습니다. 처음에는 한 사람을 대접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라면으로 30-40명을 대접하던 것이 점차 그 수가 늘어났으며, 그의 그러한 행실을 보고 도움의 손길을 보낸 분들에 의해서 밥을 제공해 줄 수 있었으며, 많은 자원 봉사자와 재정적 후원이 뒷받침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 대상이 우리나라에 국한되지 않고 세계적이 되어갑니다. 중국, 미주와 호주에도 다일공동체 분원이 세워졌으며, 우리나라보다 더 가난한 나라에 눈을 돌려 베트남, 캄보디아, 필리핀, 네팔에도 다일공동체 분원이 세워졌습니다. 이는 더욱 확대되어 아프리카 탄자니아, 우간다 등등으로 나가 한국형 ‘밥퍼(나눔의 공동체)’를 그 나라에 실현해 나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아마, 성공할 것입니다. 최일도 목사님은 보다 많은 사람이 이 일에 동참하여 그들의 적은 손길이 이들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될 것인지를 알려 나갈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좋은 선행이 예수께서 말씀한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에 위배되고 있음을 아는지요. 뿐만 아니라 그는 다일공동체를 세우게 되면서 필요하게 된 다일천사병원 건물을 짓기 위하여 1인 100만원을 후원하는 것을 천사(1004명) 운동을 통해서 하고 - 지금은 만사(10004명) 운동으로 다일천사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 이를 기념함으로써 그들의 이름으로 그들이 한 공로를 치적하는 일을 하여 “사람에게 보이려고 자기 의를 행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에 위배하고 있음을 아는지요. 또한 ‘밥퍼’ 운동으로 많은 사람을 먹인 그릇이 300만 그릇을 돌파할 때는 이를 기념하여 밥퍼 300만 그릇 돌파 기념 및 비빔밥 나눔 잔치 ‘쌀 한톨의 기적 365일' 모금 운동 전개를 함으로써 자신들이 한 치적으로 칭찬과 영광의 집중 관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500만 그릇 돌파 기념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와 그리고 그와 함께 하고 있는 많은 참여자의 그러한 착함이 언론매체를 통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와 많은 나라에 알려져 그의 선한 공로를 치하하고 있는지요. 그는 자신이 하는 일에 많은 사람이 동참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하는 일을 알려나갈 필요를 갖습니다. 그러한 그는 겸손함을 잃지 않으려고 하고 있습니다만, 사람들은 그를 높여 존귀히 대합니다. 그를 돕는 분들이 아무런 보상도 대가도 받지 않고 물질적 지원을 하며 자원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오해하고 있는지요.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께서 이 선한 사업을 원하며, 이 가르침을 주시고 있는 것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이 선한 사업을 잘 할 수 있기 위해서 이것을 위한 기도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계속해서 잘 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과연 이러한 분들이 많이 있어야 하고, 이러한 분들의 지원과 수고와 노력이 할 수만 있으면 많이 있어야 합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연약한 분들이 참으로 이분들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이들이 이것에 나타내고 있는 그 행한 의로운 일로 구원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이 모든 것에 열심을 품고 또한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실행하였습니다만, 그럼에도 이들에게 언제나 있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요 천국의 의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 믿음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이 그들을 구원하며 천국에 들어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사람 중에 프란체스코가 있습니다. 당대에서도 후대에서도 그가 예수님이 가르친 산상설교를 그대로 실천하며 예수님을 좇아서 살아가고자 한 삶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존경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는 이를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여 버렸습니다. 심지어는 입고 있는 옷까지도 벗어던졌습니다.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서 부모로부터 자신에게 남아있는 것으로 말미암아 걸림이 되는 모든 것은 다 버린 것입니다. 그러한 그는 탁발승 - 구걸로 끼니를 연명하며 수도자로 살아가는 수도사 - 청빈하며 참으로 겸손하며 남을 위해 희생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가 이렇게 달라져서 그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왜냐하면 말입니다. 그러한 그도 그가 그러한 자로 산 의로운 삶으로 생명의 구원을 받고 천국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구원의 의요 천국의 의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말합니다. ‘오직 믿음에 의한 하나님의 의’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과는 다르게 사람에 의해서 행해지는 본성의 악함을 끄집어 내시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자기 의를 행하는 이 악함을 발휘하지 않고 나갈 수 있겠는지요. 이는 말이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에 있는 모든 행위에 있어서 있게 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나가는 모든 행위를 불필요한 것으로 무시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외면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들이기에 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거기에 있는 사람의 모든 생각과 행함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있는 악한 죄성을 드러내십니다. 율법에서 ‘~하라’고 하시며 또한 ‘~하지 마라’고 주신 말씀에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의도와는 다르게 있는지를 알게 해주시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서 예수님이 행하신 일은 그 모든 것에서 있는 죄를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구속의 피를 흘리시고 이 피의 공효가 자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날마다 뿌림에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사하시는 은혜에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