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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마태복음 5장 38-42절/ 산상설교(4) 율법의 해석에서 드러나는 천국의 의(4)

작성자이천우|작성시간11.07.19|조회수547 목록 댓글 0

산상설교(20)

- 율법의 해석에서 드러나는 천국의 의(4)

하나님의 사랑

 

 

마태복음 5:38-42 / 38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42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유엔이 정한 국제기념일 가운데 ‘국제 홀로코스트 희생자 기념일’이 있습니다. 매년 1월 16일에 갖는 기념입니다. 이기념일은 2차 대전에서 최대의 희생자를 냈던 폴란드 아우슈비츠의 유대인 포로수용소가 연합군에 의해 해방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제정된 날입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나치 친위대(SS)로 복무했던 이제는 80대 노인이 된 오스카 그뢰닝이라는 독일 노인은 전쟁이 끝난지 60년 만에 다음과 같이 말하며 용서를 구했다. “무엇을 해도 내 실수를 보상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로선 다만 용서를 빌 수 있을 뿐이다.”

 

그러한 독일 나치에 무참한 학살 피해의 당사자인 이스라엘은 어떻게 대처했을까? 우리나라 천안에 있는 ‘독립기념관’처럼 이스라엘에 있는 예루살렘에 가면 ‘바드야쉼’이라는 추모박물관이 있습니다. 독일 나치가 600만 명의 유대인들을 학살한 역사적인 사실을 교훈하기 위해 만들어 놓았는데, 그곳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용서는 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라.”

 

그런데 과연 ‘용서’하는 것이 쉬울까요? 그렇게 말처럼 할 수 있는 것일까요?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단지 원수의 화를 돋우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역설적인 용서를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용서에 있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원수의 화를 돋아주는 것이라면, 그것은 용서에 있은 것이 아닙니다. 용서받음으로써 비로소 자신이 범한 죄의 두려움으로부터와 피해를 입고 분노하는 상대방으로부터 자유하여 평안함을 얻고자 함인데 말입니다. 인간은 원수를 용서하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독일 나치에 의해 자행된 약 600만 명의 유대인 학살은 인류가 행한 최대 치욕 중의 하나입니다. 이런 학살자에 대해서 유대인은 과연 용서에 있을 수 있을런지요. 그리고 우리는 우리에게 학살을 자행한 자들을 과연 용서할 수 있을런지요. 우리나라의 경우에 있어서는 지난 일제 통치를 통해 나라를 빼앗긴 상태에서 많은 사람들이 식민지배의 설움과 탈취, 정신대, 강제노역, 731부대의 생체실험 등을 겪으며 일제와 싸우는 중에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본 우리 민족이다. 그리고 이로 인한 일본과 우리나라와의 민족적 대립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가령, 스포츠 경기에서 일본과 상대하게 되기만 하면 ‘숙적’이란 표현을 써가면서 다른 나라는 몰라도 일본에게만은 져서는 안 된다며 일본을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적대적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민족적 피해를 입은 우리나라는 지금까지도 용서에 있지 못하고 있는데 과연 일본을 용서할 수 있을까요? 그 대답은 “용서는 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라!”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독일에 대해서 그렇게 하고 있다면, 우리나라 또한 일본에 대해서도 그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용서에 있으면, 그에 따른 유익이 용서에 있은 사람에게 있습니다. 미국 스탠퍼드 의대의 프레드 러스킨 교수는 연구로써 ‘용서 프로젝트’를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원한을 키우면 많은 신체 변화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혈압이 높아지고, 면역 기능이 떨어지며,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반대로 용서하는 법을 배운 이들은 신체적으로 더 건강하고 정서적으로도 더 행복하다고 합니다. 이런 용서의 유익함을 이해해도 선뜻 용서하기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막상 입으로 용서한다고 말은 하지만 마음속의 원한과 고통이 사그라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용서에 있으면 용서에 있지 않음으로 인해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불행으로부터 벗어나고 달라지는 변화가 있을 것임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우리가 이런 효과를 기대하며, 또한 그 효과를 얻기 위해서 용서에 있어야 하는 것일까요? 그래서 이것에 말해지고 있는 ‘용서’가, 그래서 이 ‘용서’에 있고자 하는 용서의 ‘사랑’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가르침에서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는 말씀을 대하고, 또한 43절에서 구약성경에서 본래 말씀하시고 있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갚지 말라“와 그럼에도 유대인들이 이를 임의로 바꿔서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하셨다“는 것에 대해서 이제 예수께서는 44절에서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에서의 ‘이웃을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에서 보게 되는 그 ‘용서’의 의미이겠는지요.

 

다시 말해서 말입니다. 우리에게 개인적이든 민족적이든 피해를 주고 고통을 안겨준 잘못을 다 용서하라는 것에서 예수께서도 ‘용서하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겠는가 하는 말입니다. 이런 차원에서의 용서를, 관용을 이해하기 때문에 이런 용서에서 우리가 해야 할 용서를 하는 사랑에 있고자 합니다. 그러면서 그 효과를 얻을 것을 기대합니다.

 

하지만 거듭 질문합니다만, 과연 우리가 이런 용서에 있는 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용서의 의미였을까요? 그래서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것이 이런 용서에 있는 것일런지요.

 

그리스도인은 자주 말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조상 때부터 들어온 모세의 율법은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레위기 19:18에 근거한 것인데,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미워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라고 하신 말씀에서 보게 되는 본래의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르게 조상 때부터, 그리고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들에게서 들어왔습니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지요. 레위기에서 하시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것이 아닌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미워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것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갚지 말라, 동포를 미워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에 대한 고대 랍비 - 율법 선생 - 들의 해석은 율법의 본의에서 떠나 다르게 해석하여 백성들에게 가르쳤습니다. 먼저는, ‘이웃을 사랑하라’에서 ‘네 몸과 같이’라는 한정어를 생략함으로써 율법의 본의를 손상시켰습니다. 다음에는 ‘원수를 갚지 말라, 동포를 미워하지 말라’를 ‘원수를 미워하며’라고 임의적으로 바꿔버렸습니다.

 

고대 랍비들이 이렇게 한 것은 자신들에게 있어서 “누가 내 이웃이며, 누가 내 원수인가?”라는 것에 대한 이해 차이 때문이다. 옛 유대 문헌에 따르면, 레위기 19:18의 이웃 사랑의 계명은 비록 레위기 19:34에는 어느 정도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도 포함되기는 하지만, 일차적으로 그 대상은 유대인들 자신에게 한정한다(Herman N. Ridderbos).

 

그러나 그곳에서의 진의는 이스라엘 땅에서 몸 붙여 사는 나그네와 같은 타국인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과거에 애굽 땅에서 몸 붙여 살던 때를 상기시키면서 그들을 아껴줄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타국인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위해서 주신 땅에 들어와 있는 사실로 인해서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백성이 입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동일하게 입게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레위기 19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미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다른 여러 가지 말씀과 함께 병행해서 하시고 있습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을 공경하라, 너희는 하나님인 나를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32절), “너희는 법정에서 판결을 할 때 공정하게 하라”, “너희는 장사를 할 때에도 바른 저울과 추를 사용하고 바른 에바와 힌을 사용하여서 물건의 크기를 재고 무게를 달고 곡실을 될 때에도 속이지 말고 정직하게 하라. 나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이다”(35-36절),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지키라고 명한 규정과 법을 지켜라. 나는 여호와이다”(37절)라고 하나님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우면서 말씀하시는 것에서 ‘이웃 사랑’이, 그리고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미워하지 말라’가 말씀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로우심 안에 자기 백성을 두고 자신이 다스리는 땅에 있는 자들을 하나님의 의로 보호하고 살펴나가실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얼마나 잘못되게 곡해하며, 그래서 왜곡하는지…. 이스라엘 백성은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에서 ‘네 몸과 같이’를 빼버렸으며, 또한 “원수를 갚지 말며”에서 그 원수를 이스라엘 동족에 한정시켜 이스라엘 땅에 거한 나그네를 하나님이 멸하고자 하시는 원수로 적대하여 ‘원수를 미워하며’, “동포를 미워하지 말라”를 약하고 힘없는 동포를 억압하고 학대하며 탈취하며 목숨도 빼앗는 악행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러한 사람의 탐욕으로 있으며 그래서 그들의 탐욕으로부터 약한 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출 21:24)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사람을 죽인 경우에 이어서)사람을 때린 경우에 그들이 그에 대한 처벌로 배상하여야 하는데, “목숨은 목숨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 '만일 어떤 사람이 남의 눈을 상하게 하였거든 자기 눈도 상하게 하라. 만일 남의 이를 부러뜨렸거든 자기 이도 부러뜨리라' -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에서 였습니다. 여기서 말이죠. 하나님은 자신의 ‘의’에 근거하여서 ‘사랑’을 이야기 하는데, 이스라엘은 그와 반대되는 이윳에게 피해를 주고 상해를 입히고 생명을 빼앗는 일을 합니다. 배상의 법 “〜는 〜하라”는 법은 인과응보의 법칙이 아닌, 또한 상선벌악의 법칙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돌봄에 있어야 하는 약한 자를 보호하시고 살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그 실례가 자세히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웃 간에 서로 싸우다가 한 사람이 상대방을 돌이나 주먹으로 친 경우에 다행히 맞은 사람이 죽지 않고 자리에 누웠다가 지팡이를 짚고라도 몸을 움직일 수 있으면 친 사람이 처형은 면한다. 그러나 그는 맞은 사람이 누워 있는 동안 생활비를 대주어야 하고 완전히 나을 때까지 모든 비용을 책임져야 한다. 누구든지 남자 노예든지 여자 노예든지 매로 때려 그 자리에서 숨지게 하였을 때에는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 다만 매를 맞은 노예가 하루나 이틀이라도 더 목숨이 붙어 있으면 그 주인이 벌을 받지 않아도 된다. 그 노예는 주인의 재산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서로 싸우다가 아이를 가진 여인을 밀쳐 낙태시켰을 경우 다른 곳은 다친 데가 없다면 그 여인의 남편이 요구하는 대로 반드시 배상해야 한다. 배상액은 재판장의 판결에 따라 결정한다. 하지만 다른 사고가 생겼을 경우, 목숨은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 남자 노예나 여자 노예의 눈을 때려서 멀게 하였을 경우 눈을 멀게 한 대가로 그 노예를 풀어 주어야 한다. 또 그 남자 노예나 여자 노예의 이를 부러뜨렸으면 그 이를 부러뜨린 대가로 그 노예를 풀어 주어야 한다.”(출 21:18-27).

 

하나님의 이 율법은 범죄한 자의 악행을 드러내어 그들을 정죄 - 유죄 판결 - 함으로써 그들이 죄인임을 규정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이 율법은 사람들의 죄가 얼마나 무섭게 증진되고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이 엄한 법이 있음에도 사람은 이 법을 무시하고 또는 악용하여서라도 범죄하는 악행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서 사람의 죄가 가져오는 대가는 정죄와 그에 대한 처벌인 심판임을 알게 해주십니다. 누가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지요.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사망의 법에서 그 누구도 자유롭지 못함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사람에게서 자기 백성에게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또 옛사람에게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말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38-4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사랑이 어디까지 가는가 하는 것을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은 선지자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입니다. “내가 할 일은 오직 주님의 말씀을 듣고 글로 전하는 것뿐이다. 주께서 나를 그런 사람으로 만드셨다. 그 일로 내가 갇히고 고문을 당하여도 나는 거역하지 아니하며 무슨 사명을 받아도 두려워 피하지 않는다. 나를 때리는 이들에게 내 등을 내주며 턱수염을 뽑는 이들에게 내 두 뺨을 내주었다. 나를 고문하는 이들이 나에게 욕하고 침을 뱉어도 나는 얼굴을 가리며 피하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고문을 당하면 패배한 것으로 원수들은 생각하겠지만 나의 주 하나님께서 내 편에 서 계신다. 그래서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굳게 하였다. 모든 고난과 수모를 견뎌 내었다. 내게는 나의 무죄를 증명해 주실 분이 계신다. 그분이 이미 나를 변호하러 나에게 가까이 오셨다. 그런데도 감히 나를 고발할 사람이 있느냐? 그런 사람이 있으면 나하고 함께 법정으로 가자. 나를 고소해서 이길 사람이 있으면, 어서 내 앞으로 나와 보아라! 똑똑히 보아라! 나의 주님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러 가까이 오셨다! 그런데도 나에게 유죄 판결을 내릴 자가 누구냐? 똑똑히 두고 보아라! 나에게 죄를 씌우는 이들이 모두 멸망할 것이다”(사 50:5-9). 예수님은 말이죠. 구약성경에서 나타내시고 있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약속으로 주신 땅에 들어와 있는 원수를 사랑하며 동포를 미워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인 사랑을 누가 이루시는지를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며 동포를 미워하지 않는 사랑을 이루시는 분은 이것을 말씀하신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은 이를 아들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십니다.

 

예수님은 선지자가 예언한 그리스도에 의하여 있게 될 성취를 지금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자비를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제자들을 자신과 함께 있게 하며 예수님에게 있게 될 십자가로 향하게 하십니다. 율법에서 죄의 궁극적인 최종 지점은 어디이겠습니까? 사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오심으로 최종 지점이란 높이에 새로운 높이가 생겼습니다. 바로 십자가 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인간은 그 어떤 경우에도 죄인이며 그 값으로 모든 인간은 결국 죽게 된다는 것의 파악에서 절망과 좌절뿐인데 여기에 덮여 오는 새로운 것이 있습니다. 죄인을 용서하여 ‘죄 없다’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 곧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 8:30-38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여 당신께 나아가도록 부르셨고 우리가 하나님께로 갔을 때 '죄 없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선량한 성품을 지니게 하여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해주셨으며 그분의 영광을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이런 놀라운 은혜를 우리가 무엇으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편인데 누가 감히 우리를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고 내주셨으니 무엇인들 아깝다 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것으로 선택하신 우리를 누가 감히 고소하겠습니까? 하나님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자신과 올바른 관계로 끌어 주신 분입니다. 그러면 누가 우리를 정죄하겠습니까? 그리스도입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오른편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러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려움이나 재난을 당할 때, 또 박해받고 죽임을 당한다고 할 때, 과연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더 이상 우리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겠습니까? 굶주리고 헐벗고 위험을 당하고 죽음에 직면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신 것이겠습니까?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 때문에 종일토록 죽임을 당하고 도살당할 양처럼 취급당하며 살아갑니다.'(시 44:22). 그러나 우리는 결국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큰 승리를 거두고야 말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확신합니다. 죽음도 그렇게 할 수 없고, 생명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천사들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지옥의 모든 세력을 다 합친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멀리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오늘에 대한 우리의 염려도 내일에 대한 우리의 공포도 또는 하늘 높이 올라가거나 바다 깊은 곳에 들어가거나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실 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실 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환난음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곤고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박해와 굶주림과 헐벗음도, 그래서 그 어떤 위험도, 그리고 생명을 앗아가는 칼도,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바대로 종일 주님을 위하여 죽임을 당하며, 그래서 도살당할 양과 같이 여김을 받을지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요. 우리는 그 모두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고 있기 때문이며, 그래서 그 모두를 넉넉히 이기고도 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예수님을 아는 사람은, 진정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본 뜻인 큰 자비의 용서의 은총을 아는 즐거움을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저런 어떤 일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견고함이 그 사실을 여실히 말해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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