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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요한복음 9장 1-12절 /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고치는 이적을 예수께서 행하시다

작성자이천우|작성시간12.09.15|조회수2,747 목록 댓글 0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고치는 이적을 예수께서 행하시다

 

요한복음 9:1-12 / 1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2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3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4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6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8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9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자기 말은 내가 그라 하니 10그들이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11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12그들이 이르되 그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성경에는 맹인으로 있었던 사람이 예수님에 의해서 고침을 받고 눈을 뜨게 된 이적 사건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 (1) 두 맹인을 고치신 마태복음 9:27-31, (2)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고치신 요한복음 9:1-12, (3) 벳새다의 맹인을 고치신 마가복음 8:22-26, (4) 그리고 여리고의 두 맹인을 고치신 병행구절로 나오고 마태복음 20:29-34, 마가복음10:46-52, 누가복음 18:35-43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이미 다룬 것에서 설명된 (1) 첫 번째는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분이심을 드러내시는 계시적 사건이고, (2) 이번에 설명될 두 번째는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시라는 사실을 계시해 주시는 사건이었습니다. (3) 그리고 앞으로 설명되게 될 세 번째인 벳새다의 맹인을 고치는 이적을 행하신 마가복음 8:22-26에서는 맹인의 두 눈에 침을 바르고 손을 얹으신 후 그에게 무엇이 보이느냐?”하고 물으시면서, 맹인이 주변을 살펴보며 그가 보고 있는 것인사람이 보이는데 똑똑하게 보이지는 않고 마치 나무 같은 것이 걸어가는 것처럼 보입니다.”고 그가 보고 있는 것을 대답하게 하고는 다시 그의 눈에 손을 대어 눈이 열리고 시력이 완전히 회복되어 모든 것을 똑똑하게 보게 하신 것을 다루는 것에서 당시 바리새파 사람들이 많은 이적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깨닫지 못하고 다만예수님에게서 또 다른 이적<표징>을 나타내실 것을 요구하며 예수님을 해할 빌미를 찾고자 할 뿐이지 악함이 횡행하는 앞에서 그 가르침을 좇는 사람들의 에게 보지못하는 룹니다. (4) 네 번째인 여리고의 두 맹인을 고치는 이적을 행하신 병행구절로 나오고 마태복음 20:29-34, 마가복음10:46-52, 누가복음 18:35-43에서는 예수께서 여리고를 들렀다가 떠날 때 길 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는 두 맹인 - 그 중에 한 사람은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 이다 -을 고치는 이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이 이적은 두 맹인을 고치신 마태복음 9:27-31의 내용과 매우 유사합니다만, 이때의 두 맹인을 고치는 이적을 행하심은 이번에 세 번째로 말씀하시고 있는 예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음을 당하실 것과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것의 부활을 예고하신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 나라들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것으로 있는 것의 가르침이 있는 것에서 있게 된 것으로 그 하나님 나라의 자리에 앉게 정해진 것이 아버지의 권한에 의한 것이며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서 많은 사람의 죄값을 치르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주려고 오셨음을 계시해 주시는 사건으로 있었습니다.

 

본문은 이 중에서 두 번째인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예수께서 고치는 이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들이 눈이 있기 때문에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빛이 있어 우리들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멀쩡한 두 눈이 있어도 빛이 없으면 온 세상은 어둠에 있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볼 수가 없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있게 하신 빛이 있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은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 그것을 두 눈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빛만으로는 보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계신 위로부터 오신 분이시기에 그 위로부터 오는 빛이 있어야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보여 주시기 위해 친히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볼 수 없는 자들에게 보는 자가 될 수 있게 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한 맹인이 실로암 못가에서 눈을 뜨게 된 이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는 그 일을 위하여 보냄을 받았다는 것의 계시적 사건으로 있었습니다.

 

이것에 대하여 있는 본문의 내용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맹인이 된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습니다. “랍비(선생님),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제자들은 이 질문에서 그들이 보고 있는 사람이 맹인이 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인지, 그래서 그 죄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 것인지에 대하여 묻고 있습니다. 맹인으로 있는 이 사람의 죄 때문인지, 아니면 그를 낳은 부모의 죄 때문인지, 그래서 그의 죄 값(죄의 책임)으로 맹인으로 있는 비참함을 겪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와는 상관없이 그를 낳은 부모의 죄로 그 죄 값을 그가 겪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이는 당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갖고 있는 유대적 죄관(罪觀), 그러니까 죄에 대하여 갖고 있는 인식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저 옛날 욥의 때에 욥이 겪고 있는 고난이 까닭 없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무엇인가가 죄가 있어서가 아닌가라며 당시 여호와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 갖는 상선벌악, 권선징악, 인과응보의 관점에 있으면서 욥을 몰아갔던 욥의 세 친구들이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맹인으로 있는 것을 그의 죄나 또는 그의 부모의 죄의 관점에서 보는 것에 있는 것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을 통해서 맹인이 된 것은 그의 죄 때문이거나 또는 그를 낳은 부모의 죄 때문이거나 하는 그 어느 누구의 죄도 아니라며, 다만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할 뿐임을, 즉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한 것일 뿐임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오늘날에 우리들이 겪는 질병이나 고통에 대한 이해는 죄의 비참한 현상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 값에 따른 것이며, 따라서 죄 값을 겪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 보니 어떤 질병이나 고통을 당하며 어려움을 겪으면 내가 무엇인가 죄를 지었기 때문일 것이니 그 지은 죄를 찾아내서 회개해야 해결이 된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그러나 말이죠. 죄의 비참한 현상은 비단 질병이나 고통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는 것에 국한 된 것이겠는지요. 언제나 건강하며 행복에 겨워하고 어려움을 모르고 평안한 날 속에서 살면 그는 죄와 상관이 없으며 죄의 비참한 현상이란 그에게서 그림자조차 없는 것인지요. 아닙니다. 사람은 의인은 한 사람도 없으며, 모두가 죄인이 지고 있는 죄 값을 치러야 합니다. 죄 값은 사망입니다. 이 사망의 그림자에 있는 것에서 갖는 비참한 현상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은 그 무엇도 없습니다. 그러니 말이죠. 사망의 몸으로 매여 있는 우리가 건져질 수가 있겠습니까? 죄의 비참함인 사망에서 벗어난 때가 단 얼마라도 단 한 시라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요. 무슨 죄를 지어서 질병이나 고통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모두에서 보고 있는 죄의 비참함이란 그가 이런 저런 무엇인가의 죄를 비로소 지었기 때문에 그 죄 값을 당하는 것에서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의 육체로 있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육체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곧 육체가 행하는 모든 것은 죄로 규정됩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생각이 항상 악할 뿐인 것은 그래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서 아직까지 존재해 오고 있었던 죄관은 사람이 어떤 불행을 당하는 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것에 있었습니다. 날 때부터 맹인이 된 사람의 경우, 그가 그렇게 날 때부터 맹인이 된 것이 그의 죄 때문인지, 아니면 그를 낳은 부모의 죄 때문인지의 해답이 필요했습니다. 그의 죄 때문이라면 그가 날 때부터 맹인이 된 것이 죄를 행하지 않은 그에게서는 설명이 되지 않고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그가 죄를 짓기 전에 그가 맹인이 되어 있으니깐요. 한편 그의 부모의 죄 때문이라면 죄값의 유 전을 말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그 아들이 부모의 죄를 함께 짊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됩니다. 이는 마치 신포도를 아버지가 드셨는데, 이가 시린 이는 아들인 셈인, 즉 정작 이가 시린 것은 신포도를 드신 아버지가 아니라 그 아들인 셈이 됩니다. 그러나 날 때부터 맹인이 된 것에서 그같은 불행한 일을 겪는 것은 그의 부모가 지은 죄에서라도 찾으려고 하는 죄관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날 때부터 맹인이 된 사람을 예수께서 만나게 된 것이 왜 있게 되었는지를 알게 해 주십니다. 그러니 예수께서 맹인의 두 눈에 침으로 진흙을 이겨 바르고는 그를 실로암 못에 보내 그곳의 물로 씻게 하여 두 눈을 뜨게 하는 이적을 행하신 것이 어떤 일로 있는 일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날 때부터 맹인이 된 것은 그의 죄 때문이거나 그의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 위한 것에 있다는, 그래서 그에게 하나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한 것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말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의도된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날 때부터 맹인이 되어 지금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이 시점까지 보지 못하고 살아온 것에 대해서 당시의 유대주의적 사고에 있던 자들은 이를 죄 값을 치르는 것으로 생각하며 이를 안타깝게 여겨 측은히 여기고 불쌍하게 생각하고 일을 뿐이었습니다만,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는 일로 날 때부터 맹인으로 있는 사람을 만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설명으로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요.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요 이 빛이 있는 동안에는 세상은 어둠에 있는 밤이 아닌 환하게 밝은 낮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어둠에 의해서 그동안 드러나지 않아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낮의 개념을 빛이 존재하는 것에서 말씀하십니다. 빛이 있는 동안에는 어둠인 밤이 물러가고 빛이 비추이는 밝음에 의해서 낮이 존재합니다. 이 낮 동안에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서 각각을 분별하여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는 빛으로 계십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으로 계셔서 이 빛이 비추이고 있는 낮인 동안에 하시는 일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맹인을보냄을 받았다는 뜻으로 있는 실로암 못에로 보내어서 그의 두 눈을 씻게 하는 것을 통하여 두 눈이 열리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에 따라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었더니 그가 보게 되었습니다.

 

해서 말입니다. 맹인의 두 눈이 떠진 것은 예수님에 의해서 행사되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앞서의 이적들에서 증거되어 온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다윗의 왕권으로 다스리시는 권세 있는 분이심을 알게 해주시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의 빛이심으로 인해서 이 사실이 밝히 드러나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에 온 것은 이 일을 위해서 보냄을 받았기 때문이라며, 자신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낮이므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신다고 합니다. 그에 따라서 예수님을 보는 눈에 있는 자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한 그대로 실로암 -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다 - 못에 가서, 곧 보냄을 받은 곳에 가서 눈에 발려있는 진흙을 씻고 눈이 밝아져서 돌아갔습니다. 그러한 그는 단지 육체의 두 눈만 밝아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일로 맹인이었던 사람을 놓고 사람들 간에이 사람이 바로 그 거지란 말이오?” 하고 의아해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렇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아니라고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구걸하던 맹인과 같은 사람일 리가 없어. 하지만 신기하게도 꼭 그 사람을 닮았네.”하고 수군대는 등 이런 저런 이야기가 말해지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두 눈을 뜬 맹인이었던 사람이내가 바로 여러분이 알고 있던 구걸하던 맹인 그 사람입니다.”라고 자신이 사람들이 알고 있는 구걸하던 그 맹인이었음을 말하면서 사람들이 예수라고 부르는 그분이 말한 그대로 하였더니 자신이 보게 되었다며, 도대체 자신들이 알고 있던 그 맹인이 어떻게 두 눈이 떠져 볼 수 있게 되었는지를 궁금해 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두 눈이 볼 수 있게 된 것이 예수님에 의해서 되어졌다며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신 예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이런 저런 어려움을 겪거나 고통 중에 있는 분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한다는 것에서 본문의 사건을 들어서 이 모두는 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하실 일이 있어서 그런 것이니 너무 힘들어 하지 말고 잘 참고 견뎌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믿음을 보시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을 복 주시려고 이런 일이 있게 하시는 것이다.”합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성경에서의 이 사건은 예수님의 자기 계시적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일을 보내신 분의 일을 신속히 행하시는 것에서 맹인을 만나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는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이 일로 맹인은요. 자신의 두 눈이 떠지는 하나님의 은총을 겪는 것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보냄을 받아 사람들이 예수라고 부르는 그 분이 진흙을 개어 내 눈에 바르고 나에게 실로암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분이 말씀한 그대로 행하였더니 여러분이 보고 있는 대로 내가 이렇게 보게 되었습니다.”라고 사람들이 예수라고 부르는 그 분’,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분으로서 그에게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셨으며, 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맹인이었던 사람의 눈이 보게 되는 것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존재가 세상의 빛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빛이 비취고 있는 낮인 동안을 통해서 예수님을 보는 눈에 있는 자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증거함에 있는 두 눈이 보게 된 맹인이었던 자입니다.

 

그렇게 예수라고 불리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오늘날 우리들의 눈이 열려 볼 수 있게 했습니다. 육체의 두 눈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을 보게 해 주는 빛이 세상에 없어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는 빛이 들어와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빛을 비추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세상의 빛으로 설명되고 있으며, 그 빛인 예수께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므로 이를 우리의 눈이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세상을 비추는 빛인 예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에게 행사됨을 보는 눈에 있음을믿음이라는 말로 하게 됩니다.

 

그러한 우리가 그 하나님의 능력에 온전히 사로잡힘에 있어 우리에게서 나타내지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은 맹인의 두 눈을 뜨게 한 그 하나님의 능력이 오늘날 우리를 죄에서 사하여주셨습니다를 전함에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 다니는 재미로 살아가는 게 아닙니다. 내가 보고 아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복음이 전파되는 현장, 그곳이 교회이며 그 복음의 교제가 있는 예배에, 사귐에 우리가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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