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에서는 누가 큰 자입니까?란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께서 가르치심
마태복음 18장 1-9절 / 1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5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7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8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9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10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천국에서는 누가 큰 자일 것인지를 묻는 제자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천국에서는 누가 큰 자입니까?”라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이 질문을 한 ‘그 때에’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전세를 내게 하신 때의 시점을 이릅니다.1) 즉,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사건인 성전세를 내게 하신 그 때인데,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천국에서는 누가 큰 자입니까?” 하는 질문을 한 것입니다. 이는“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우리들 중에 누가 더 큰 자입니까?”라고 하는 것으로,“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누가 제일 위대한가요?”또는“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누가 제일 높은 자리에 앉게 되는가요?”하는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질문이 있는‘그 때에’는 당시 유대인의 상황으로 볼 때 성전세가 유대력으로 아산월(태양력 2, 3월) 15일 경에 내었던 때이므로, 예수께서 니산월(태양력 3, 4월) 14일에 있었던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약 한 달 전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수난을 받으실 것을 예언하신 때가 매우 가까운 시점에 있으러 가는 긴박한 상황이 진행되는 때였습니다. 그러한 때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하신 수난의 예고에 깊은 생각에 있으면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일을 따름에 있어 가야 했습니다만, 그들의 마음에는 여전히 예수께서 자기 부인에 있으라고 하신 사람의 일을 생각함에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누가 더 큰 자일 것인지를 물은 것은 내세의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고서 그 나라를 섬길 부푼 기대에서가 아닙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지고 오신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 마지막 이후에 있게 되는 내세의 개념에서 이해하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지고 오신 하나님의 나라를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서 회복될 것을 기대하는 다윗 왕국을 바라보는 것에서입니다. 제자들은 그 하나님의 나라를 그리스도이시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세우실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그 나라를 마침내 세우실 때가 가까이 이르신 것에서 예루살렘 입성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다가 예수께서 자신의 수난을 거듭 예고해 주시는 것이 아니겠는가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이에 그 나라를 섬길 때가 되면 자신들 중에서 누가 더 예수님을 위해서 큰 일을 하는 역할에 있을 것인지에 관심을 갖고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누가 더 큰 자인지를 물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어린아이와 같이 낮출 것을 말씀하심
예수님은 제자들이 가진 생각을 간파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제자들 앞에 어린아이 하나를 세우시고는“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어린아이 하나를 세우시고서 말씀을 하신 것은 그들에게 가르침을 주시는 교훈을 주시는 말씀을 하심에 제자들이 알아 듣게 해 주시는 것에서입니다.
그 말씀을 해 주시는“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은‘너희가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어야 한다’는 또 다른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돌이켜’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물리적인 방향 전환 뿐만 아니라‘마음의 변화’(행 7:39), 그리고‘행동 양식의 변화’(요 12:40)까지도 의미하여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따름에서 죄에서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돌아옴에 있는 데 따라 완전히 바뀐 변화에 있어야 할 것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것이요 그것은‘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춤’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 낮춤에 사용된 단어는‘평지로 만들다’(사 40:4; 눅 3:5)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굴곡이 심한 땅을 다져 평평한 길로 만드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인데, 당시의 사회적 상황에서는‘사회적으로 낮은’, 또는‘사회적 지위와 영향력이 보잘 것 없는’,‘권력이 없는’,‘순종하는’의 뜻으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이 단어가 예수님에 의해서 사용되며 의도하고 있는 것은 천국에서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아 예수님을 위해서 일할 것인지를 묻는 것에 답하는 것에서 어린아이를 들어 돌이켜 그들과 같이 될 것에서‘어린아이와 같이 낮춤’에 있을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므로, 그 이해에 의해서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어린아이를 들어서 말씀하신 것은 겸손한 자가 될 것을 이름에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자가 될 것을 마음에 품은 것에 대한 상대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주로 섬기며 따름에 있는 제자들은 높은 자리에 앉아 섬김을 받는 큰 자가 될 생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섬김에 있는 자신을 낮춘 자리에 앉는 자이어야 할 것을 이르시는 말씀에서 하신 것으로, 마태복음 10:42에서는 제자들을‘작은 자’, 곧‘소자’로 표현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이처럼‘작은 자’, 곧‘소자’로 지칭하고 계신데, 그러한 그들에게 어린아이 이처럼 제자들에게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춤에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 간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더 높은 자리에서 주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하겠다는 우월 의식을 갖고 있어 동료보다 더 나은 우월한 자가 되기 위하여 동료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렇게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자기의 부인에 있으며 하나님의 일을 생각함으로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야 할 것을 가르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사람들에게서 섬김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주는 것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통해서 자신과 함께 하는 제자들을 자신이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이는 일을 하시는데, 제자들은 예수님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일과는 전혀 다른 사람의 일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따르고 있으니 그러한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과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받들어 섬김에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에서 어린아이를 들어 그들과 같이 되는 낮춤에 있을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렇게 자기 부인에 있지 않으면 또한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예수님을 따름에 있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제자들 중에서“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름에 있지 못하니 천국에 들어가 못합니다. 그러나“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낮추는 사람은 천국에서 큰 자”입니다. 그는 예수님과 같이 아버지의 영광을 입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름에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실족하게 하는 자들은 화가 있다!
예수님은 이렇게 어린아이와 같이 됨에 있는 제자들, 곧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춤에 있는 제자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듯이, 또는 예수님을 생각하듯이 맞이하여 환대하여야 대상인데, 그들을 실족하게 하는 사람들에게는 화가 임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5-7절)
여기서‘실족하게 한다’에 사용된 단어는‘죄에 빠지다’,‘죄를 범하게 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 어떤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거나 죄에 빠뜨리게 하는 것에 쓰이는 것을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유혹하여 주와 복음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을 나타내는 중대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도래로 인한 하나님의 나라에서가 아닌 이와는 다른 것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죄와 배교에 있게 하는 유혹으로, 제자들은 이 유혹에 의해 원치 않게 실족당하는 일이 있을 수 있으나, 실족하게 유혹하는 자들은 받을 화가 참으로 클 것을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깊은 바다에 내던지는 것이 나을 것을 들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러한 사람은 범죄케 하는 자기의 손이나 발을 찍어 내버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손이 없는 장애를 갖거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심도 앞에서 연자맷돌을 들어 말씀하신 것과 같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실족케 하는 자들이 받을 화가 참으로 클 것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경각심을 갖게 하며 제자의 길을 가게 하는 가르침을 주시는 말씀이심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는 경각심을 갖게 해 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해 주시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과 함께의 동행에 있으면서 그들의 주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당하실 일에 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함에 있어야 하지만 아직 그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고 있으므로 주께서 세우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바른 이해를 갖고 있지 못하여 세상 나라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함으로 그 나라에서의 높은 자리에서 주님을 섬길 영예에 기대치를 갖고 있음으로 서로 불편한 마음과 충돌에 있는 것은 동료를 실족케 하는 일에 있는 것이니 이는 사단이 갖는 생각을 따름에 있는 참으로 사악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는 자로 있었듯이, 또한 동료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름에 있는 제자들은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서 하나님을 뵙는 자로 있을 것이므로 그들 중 그 누구라도 업신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천국에서는 누가 큰 자입니까?”라고 하는 질문에 있는 제자들에게 천국에서 높은 자로 있고자 하는 욕망으로 함께 하고 있는 다른 제자들을 업신여기지 말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의 주께서 자신의 몸을 대속물로 드려 섬기는 자로 오심(마 20:28; 딤전 2:6)을 따라 주와 주의 나라의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드릴 것에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같이 쏟아 나가야 합니다. 그러해야 할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에게 경각심을 갖게 하여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며 제자의 길을 가게 하는 귀한 가르침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제자의 도’와‘어린아이와 같이 낮춤’에서 교회 섬김의 도 를 생각함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름에 있게 하신‘제자의 도’를 비롯하여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며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출 것을 말씀하신 것에 있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함에 있는 섬김의 원리는 그 제자들을 통해 세워 나가신 교회에 주어진 원리로 그대로 작용합니다. 그에 따라서 교회를 이루는 그리스도인들 또한 제자의 길을 따라 감에 있어서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름에 있는 믿음에 있습니다.
이는 예수께서“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제자들에게서 있는 섬김이 주께서 세우신 교회에 섬김의 도로 실행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섬김은‘봉사’에 있습니다. 이것을 잘 나타내 주신 것이 예루살렘교회에 성도를 섬길 첫 직분자를 세우는 집사를 선출한 것입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며 이를 위해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서 자신들을 도와 봉사할 일곱 사람을 세우기 위해서 추천하게 하였습니다. 이들은 일곱 집사라고 불리는데(행 6:1-6; 21:8), 집사란 말이 지닌 단어적인 의미는“다른 사람의 명령을 실행하는 사람, 특히 주인의 하인 등”을 이르는 것으로, 기독교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고 그들의 사용을 위해 모아진 돈을 책임지고 있거나 그와 같이 성도를 돕는 일에 있으며 봉사하는 자들을 일컫는데 집사로 불립니다(딤전 3:8-13). 그러므로 집사란 교회 일을 도와 섬기는‘봉사하는 자’를 말합니다.
이렇게 봉사하는 일에 있는 것은 성령의 은사에 따른 것입니다.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함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돕는 자(조력자/협력자)에 있었습니다. 그와 같이 교회에서는 목사가 설교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돕는 자가 함께 하여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증거할 수 있도록 그를 돕는 자는 자기에게 있는 성령의 은사인 능력을 사용해야 합니다. 이 은사는 특정한 사람만이 받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는 누구나 성령으로부터 받음에 있습니다. 이 은사가 직분으로 나타나는 것이 교회의 삼직분 – 목사(겸하여 교사), 장로, 집사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성도 모두가 이 직분에 있어야 할 것은 아니기에(고전 12:29), 예루살렘교회에서 추천하게 한 원리인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인정받는 사람 일곱 명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모든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인 스데반과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로 개종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뽑아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였다.(행 6:6, 바른성경)
에 따라서 선출하되,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한 바와 같이
이와 같이 집사들도 존경할 만하며, 일구이언을 하지 않고, 많은 포도주에 빠지지 않으며, 부정한 이득을 탐내지 않고,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간직한 자라야 한다. 이런 이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일을 하게 하여라. 이와 같이 여자들도 존경할 만하고, 비방하지 않으며, 절제하고, 모든 일에 신실한 자라야 한다.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며,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라야 한다. 집사의 직분을 잘 수행한 자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좋은 지위를 얻게 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 안에서 큰 확신을 얻게 된다.(딤전 3:8-13, 바른성경)
를 충분히 살펴 교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을 추천하여 세움으로써 성도의 믿음을 세우는데 목사를 돕게 봉사의 일을 맡기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목사(와 교사)를 비롯하여 장로, 집사는 자신들에게 성령의 은사가 함께 함이 무엇 때문인지를 잘 인식하고서 항상 이를 상기하여 섬김의 자리에 있으면서 목사를 도와 봉사하는 일에 있어야 합니다. 목사가 그렇듯이 이를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라서 집사의 직분을 잘 감당하는 사람은 바울이 격려한 바와 같이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것은 물론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에 더욱더 확신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 .................................................... 1) 본문과 동일한 내용을 다루는 병행구절인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의 ‘그 때에’는 마태복음의 사건과는 다른 기사에서 이다. 마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이르러 한 집에 들어가 계실 때이며(막 9:33), 누가복음의 경우에서는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는 두 번째 수난의 예고가 주어지나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천국에서 누가 더 큰 자일 것인지를 논쟁하고 있는 때이다(눅 9:43-46). 이렇게 ‘그 때에’ 있는 사건의 내용에 대한 기술이 각각 다른 것은, 각 복음서의 사건이 있는 시점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한 시점에서 각 복음서의 사건들이 있었던 ‘그 때에’를 이르는 것이다. 가령, ‘그 때에’의 어느 날에 성전세를 내게 하신 일이 있었고, 그 날에 가버나움에서 한 집에 들어가 계셨으며, 제자들에게 자신의 수난에 대한 두 번째 예고를 하셨던 것이며, 그 날, 곧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천국에서는 누가 더 큰 자일 것인지를 질문하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