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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마태복음 18장 21-22절 /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

작성자이천우|작성시간20.04.06|조회수8,662 목록 댓글 0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

 

마태복음 1821-22/ 21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베드로가 예수께 범죄 한 형제에 대한 용서를 몇 번하면 되는지를 묻다

 

베드로가 예수께 나아와 물었습니다.“주님, 형제가 제게 죄를 범했을 경우에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습니까?'”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습니다.“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 주어라.”

 

 

베드로가 예수께 범죄 한 형제에 대한 용서를 묻게 된 배경

 

하나님의 일이신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담긴 하나님의 크신 뜻을 알지 못하여 그 믿음에 서있지 못한 제자들 간에천국에서 누가 가장 큰 자인가?“라는 쟁론이 있자 (1)예수님은 어린아이를 들어서 영광스런 하나님을 뵘에 있게 될 주님의 품에 있는 한 소자(제자)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18:1-9). (2)그리고 이들 중 한 사람이라도 잃은 자가 되지 않을 것임을양 일백 마리 비유(한 마리의 잃은 양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18:10-14). (3)그리고 또한 그 한 소자의 성격을 예수님은 죄 용서 받음에 있는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주님이 함께 하는 공동체를 들어서 이야기 해줍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의한 제자들의 공동체는 죄 용서 받음의 주님의 자비가 있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범죄 한 형제를 위한 권고와 기도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18:15-18, 19-20). (4) 그리고 그에 대한 언급으로 본문에서는 비유를 들어 주님이 자비를 베푸시는용서에 대한 이해를 갖게 해 주십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범죄 한 형제에 대한 용서를 묻게 된죄 용서

 

예수님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온 세상의 구주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그리스도의 사역을 행하십니다. 예수님이 부르시어 자신을 따르는 제자 삼은 자들은 영광스런 하나님을 뵘에 있게 되니, 그들에게는 죄 사함을 얻는 용서(자비)를 베푸십니다. 일백 마리 양 비유에서는 양떼를 이탈하여 떠나 있는 한 마리의 양을 찾으시는 것을 통해서이같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십니다. 이것으로 이야기 해 주시는 것이 범죄 한 형제에 대한 권고와 기도입니다. 이처럼 예수께서 권고와 기도에 의한 용서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심은 이 일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지상에서메고 푸는 권세에 의해 있게 될 것으로, 예수님이 땅에서 떠나신 후에 성령의 임재에 의한 권능을 통해 세워 나가실 교회에서 있어 나가게 될 것(참조. 1:8)을 염두에 두신 것에서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 의해서 온 세상에 있게 될 용서는 앞서의 11절부터 20절에서 보게 되는 형제의 죄를 가지고서 말하는 것이어야 하기에, 어떤 개인에게 지은 죄를 가지고서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영광스런 하나님의 얼굴을 뵐 자들을 회개에 있게 하여 용서의 자비를 입게 하시는 것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어야 하며, 이는 확대되어 장차 성도들 사이에서 있는 일로 하나님 앞에서의 죄책과 교회에 해악을 끼침으로 교회 전체를 오염시키는 죄를 이름을 의미하는 것에서 말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 죄를 범함에 있는 형제들의 어그러진 마음을 돌이켜 회개에 있게 권고하는 제자들을 거스림에 있는 것은 그들을 용서하여 품에 두고자 하시는 주님을 거역함에 있는 것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하나님이 없는 이방인이나 세리에게서 볼 수 있는 죄입니다. ,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며 배척함에 있는 죄입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범죄 한 형제들을 찾아가 권고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할 것에서 일흔 번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실 주님의 자비를 말씀해 주시고 있으니 이는메고 푸는 권세에 의해서 권능 있게 행해집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아직 그 이해에 있지 못하고서 다만 자신이 주위 사람들과 갖는 권고와 기도에 의해서 가져나갈 수 있는 용서를 생각하고서 궁금해 하는 것을 물었습니다.“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면 되겠습니까? 일곱 번까지 하면 되겠습니까?라고 말입니다. 이는 베드로가 당시 자신의 형제인 동족 유대인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배척을 당하는 중에도 그들을 위해 권고를 하고 기도하며 용서를 할지라도 듣지 않고 있는 악함을 의식하고서 과연 그들을 얼마나 용서하면 될지를 물었습니다. 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용서에는 한계가 있어야 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용서의 한계선을 의식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 용서할 수 있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1)

 

마이어(Gerhard Maier)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형제를 예수님 당시의제자로 봅니다.2) 이는 그를 비롯한 헤르만 리델보스(Herman R. Ridderbos) 등 국내외 학자들도 대체적으로 같은 견해입니다. 헤르만 리델보스는 예수님은 가끔 제자들에게 큰 관용으로 용서할 것을 말씀하시곤 했다면서, 베드로가 이것을 인지하고 있었음이일곱 번이라는 그의 말속에 나타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형제가 죄를 범하면에서의형제는 전후 문맥에 의해서 볼 때 이를 언급한 그 당시에 베드로가 자신의 동료인 제자들을 직접적으로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아집니다.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뵐 존귀한 자들을 언급해 오시는 중에 그들 중 한 사람도 잃지 않고 얻음에 있을 것에서 형제를 위한 권고와 기도가 말씀되고 있는 것에서 열 두 제자의 범주를 넘어 주님에 의해 세워질 제자의 공동체인 교회로 확대되고 있는 것에 반해 베드로가 인식하고 있는 형제는 용서의 한계를 갖는 것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베드로가 자신과 같은 예수님의 제자인 동료를 인식하고서 갖는 생각일 수 없습니다. 동료인 형제는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될 것인지를 묻는 죄 속에 있어서 그를 위해 권고하고 그와 함께 기도해야 하는 관계가 아닌, 범죄 한 형제의 용서를 위해 함께 주님의 명령을 받들어감에 있는 같은 형제입니다. 베드로가 언급한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에서의 형제의 죄를 범함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권고와 기도를 필요로 하는 주님을 거스름(거역함)에 있는 자들이며, 주님의 자비에 의한 용서를 전함에 있는 제자들의 권고와 기도를 거역함에 있는 자들은 곧 그들의 주님을 거역함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제자들의 권고와 기도를 통해서 주께서는 하나님의 택정함을 받은 자들을 용서에 두고서 그들을 얻어 나가실 것입니다. 이들은 일백 마리의 양 비유에서 보는 목자의 돌봄에 있는양떼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뵘에 있게 될 자들입니다. 그들은 가까이에서는 유대인에게서 있을 것이며, 멀리서는 온 이방인들에게서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형제의 죄를 용서함에서 몇 번이나 하면 될 것인지를 물은 것은 십자가의 구속 사역의 길에 오른 중에 있는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겪게 되는 유대인들의 배척에서 얼마나 그들을 용서함에 있어야 할 것인지를 물은 것으로 봄이 더욱 타당해 보입니다.


이때 베드로가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면 되겠습니까?”라고 물으며,“일곱 번 용서하면 되겠습니까?”라고 말하고 있는 것에서의일곱 번이란 수는 다음의 배경에서라고 보아집니다. 사람은 한 번 참으며 용서하기도 쉽지가 않습니다. 우리말에세 번까지는 참는다는 말이 있습니다.“세 번까지는 용서하고 넘어 가겠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상은 유대인들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의 랍비들은 자신에게 잘못한 자에 대하여 세 번 용서해 주는 것을 대단한 관용으로 평가했으며, 자신들을 따라서 사람들도 실천할 것을 가르쳤습니다. 랍비들은 동일한 죄에 대한 용서로는 세 번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이러한 말을 하는 진의는 어떻게 해서든지 나는 용서하겠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그 이상은 나도 참지 못한다. 참을 수 있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따라서 나도 용서 못한다는 것이 깔려 있습니다. 자신이 참을 수 있는 한계 이상을 건드리면 도저히 용서를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베드로는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말하여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는지를 물었으니, 그 나름대로는 대단한 참음을 보인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참을 수 있는 마지노선의 마음으로 일곱 번을 내세우면서이 정도면 되겠지하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베드로가 이처럼 일곱 번까지 참으면 되겠는가라고 말한 것은 유대 랍비들이 가진 생각보다 훨씬 더 큰 관용을 내세운 것인데, 일곱 번이란‘7’의 숫자를 생각한 것은 이 역시 유대인들이 갖는 숫자의 사고(사상)에 따른 것입니다. 유대인에게서‘7’은 창조사역을 마치신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신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모든 날의 마침에 따른 완성의 개념에서‘7’이란 숫자를 완성의 숫자를 사용하였습니다. 이렇게 베드로는 전통적인 완전의 수인일곱 번이면 매우 관대한 용서를 베푸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예수께서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번의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의도하시는죄 용서

 

베드로가 형제의 죄에 대해 일곱 번 용서하면 될 것인지를 묻는 것에 예수님의 그가 용서에 있고자 하는 최대 수치를 뛰어넘는 답변을 하십니다. 예수님은일곱 번 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3)고 말씀하심으로 이 수가 의도하는 바인 셀 수 없는 숫자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일곱 번의 일흔 번(또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은 문자적 숫자상으로는 490번이나, 예수님의 의도는 형제를 용서함은 일곱 번이라는 숫자로 제한 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때의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또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에 사용된 헬라어 원문은일흔일곱 번(또는 일흔일곱 배)’이나일흔 번씩 일곱 번두 가지의 경우로 모두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일곱 번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란 숫자를 말씀하시게 된 배경 : 여기서일흔일곱 번(또는 일흔일곱 배)’의 번역은 창세기 4:24에서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라고 언급되고 있는 것에 따른 것입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해친 벌로 땅에서 저주를 받을 것인 땅이 아벨의 피를 받은데 따라 밭을 갈아도 땅이 효력을 내지 않을 것이며, 땅에서 떠돌아다니는 자가 되는 저주를 받게 되었을 때, 가인은 자신의 죄벌이 너무 중하여 가혹하다며 이제 자신은 주의 낯을 뵐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주의 낯을 피하여 유리하는 자신을 만나는 사람마다 죽이려고 할 것이라고 말할 때, 하나님은 그에게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4:15)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가인의 후손에게 행사된 죄의 힘이 더욱 강력하게 나타나 라멕에 이르러서는 당대에 이전의 죄악보다 더욱 강하였으니 자신의 두 아내에게 자랑삼아 하는 말인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4:23)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들과 싸움을 즐기며 죽이는 일을 예사로이 여겼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라멕을 저주하여 말씀하시기를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아벨을 죽인 죄에서 보는 죄성에 있는 죄의 힘은 가인을 비롯하여 살인의 죄를 범한 살인자에게 임하는 저주의 재앙인 형벌을 규정하시는 것에서 가인을 해친 자는 일곱 배, 라멕을 해친 자는 일흔일곱 배의 벌을 받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에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구약의 이 처벌 기준을 인용하여 역설적으로 자신의 용서 기준을 제시하신 것이라면, 위의 표현은일흔일곱 번(또는 일흔일곱 배)’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입니다. 그러나일흔 번씩 일곱 번으로도, 그리고일흔일곱 번’(또는 일흔일곱 배)으로도 어떤 번역으로도 가능하며, 어떤 번역의 입장을 취하든지 간에 예수님이 의도하시는 것은 베드로가 사람이 할 수 있는 한계에 의한 용서를 이해하고 있는 것에 대해 예수님은 수로 제한 할 수 없는 완전한 용서를 나타내주십니다.

 

하나님은 이를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모세를 통해 주신 십계명에서 약속의 계명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20:1-6)

 

십계명에서의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천 대까지 베푸느니라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에서 말씀하시는 것인가? : 십계명은 열 가지의 언약의 말씀을 뜻합니다. 이 말씀을 기록하여 주시는 중에서 제1, 2계명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하나님 여호와만이 참 신이심을 알리시면서 이 하나님 외에 우상으로 다른 신을 만들어 숭배하지 말 것을 명하시면서 이를 따르지 않는 자에게는 그들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할 것이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천 대(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자비의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언급하시고 있는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라고 하신 말씀이나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은 모두 같은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는 부모의 죄를 자식에게까지 묻고, 부모의 의를 자식에게까지 고려하는 개념에서가 아닙니다. 먼저, 죄에 대한 보응은 연좌제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연좌제는 부모의 죄값을 묻는 사법적인 처벌을 자식에게까지 묻는 것입니다. 가령, 부모가 과거에 친일파 또는 공산주의자였다는 것을 들어서 그 자식들을 같은 친일 매국노 또는 공산주의자로 몰며 배척하는 것은 연좌제를 적용하는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식이 사람들에게 잠재적으로 있을 뿐만 아니라, 관습적으로 행해지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에게서는아비가 신 포도를 많이 먹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18:2)는 속담이 있었습니다. 조상이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자손들의 이가 시리다는 것으로, 바벨론 포로기에 있은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처지의 신세를 한탄하기를 자신들의 부모와 그 조상이 저지른 죄값을 자신들이 당한다고 불평하는 것에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자식이 잘못하거나 죄를 범하였음에도 부모가 과거에 의로우며 선을 행한 사실을 들어서 죄의 책임을 묻지 않거나 현저히 감해주는 것 또한 연좌제를 적용하는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무의식적으로 이런 경우에 있는 것이 흔합니다. 가령,“이번 경우에는 그냥 넘어가 봐주는데, 이 모두가 부모를 잘 둔 덕분인 줄 알아라는 것에서 보게 됩니다.

 

악을 따름에 있는 자에게 임할 화와 의를 따름에 있는 자에게 임할 복 : 그러나 하나님께서 십계명에서 명하시는 것은 그런 의도에서가 아닙니다. , 부모의 허물과 그 죄값을 자식 대인 제2대를 넘어서 심지어는 3, 4대에까지 물어 반드시 책임을 지게 하겠다는 것에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계명에서 명하시는 것을 통해 나타내시는 것은 부모들의 죄와 그 허물이 끼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를 알게 해 주시는 것이며, 부모들에게서 보는 죄성에 의해서 자식들이 부모들의 죄와 그 허물을 좇아 부모들이 저지른 죄와 허물에 있을 때 그들이 받는 벌 또한 부모들이 받는 벌과 동일할 것임을 알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는 부모의 의로 자신들이 혜택의 보은을 받는다는 것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에서 부모가 입은 하나님의 은혜를 오고 오는 그의 후손들이 보고 그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에 있으면 부모들이 입었던 하나님의 은혜인 하나님 안에서 그들의 생명이 장구한 영생할 것임을 알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정리하면, 하나님께서 십계명에서 알려주시는 것이 이것입니다.“아벨을 해친 가인에게는 벌이 내려질 것이니 땅이 그에게 아무런 효력이 없을 것이며, 그는 땅에서 유리할 것이다. 그런 그는 흙이니 마침내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가인을 해친 자는 가인에 비해서 벌이 칠 배가 될 것이다. 그런데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가 될 것이다. 죄의 벌이 그와 같이 참으로 중할 것이니 아무도 그 벌에서 벗어날 자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에게 알린다. 내 백성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에 있게 할 것이다. 그래서 ()천 대에 이르러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그들의 조상들에게 베풀었던 은혜를 동일하게 베풀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살게 할 것이니 아무도 이를 막을 자가 없을 것이므로 그 세월이 참으로 장구하여 영생에 있을 것이다.”

 

십계명은 메시야 언약의 법 : 하나님은 이를 위하여 열 가지 언약의 계명인 십계명에서 이 계명을 온전히 이루실 분이신 메시야를 율법의 정신으로 담아 약속으로 주셨습니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는 율법에서 언약하시고 있는 주님으로써 자신의 백성을 그들의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죄 사함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여기에 있는 용서는 일곱 번의 일흔 번이라도 하여서 그들의 죄를 없애 깨끗하게 하시는 것으로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제자들에게 예고하신 대로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신 후 제 삼일에 부활하시어서 모든 사람들의 주가 되어 십자가에서 그들을 위하여 흘린 피로 단번에 죄 사하시는 것에서 하시되 일곱 번을 넘은 일곱 번의 일흔 번을 범한 죄만이 아니라 그들의 모든 죄로부터 사함을 받는 은혜를 베푸십니다(요일 1:7, 9). 베드로가 말한 바인일곱 번까지 하면 됩니까?”만 아니라,“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참으로 셀 수 없이 죄 사함, 곧 죄 용서가 됩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는 죄로부터 시작하여 그가 육으로 하는 모든 것이 죄인 것에 있습니다. 육이 죄이며 육의 본성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 죄인데 따라 육으로 하는 모든 것 또한 죄입니다. 그리고 그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이것이 일곱 번 용서하면 용서 받을 죄가 없으며, 일곱 번의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면 용서 받을 죄가 없는 육이 되는지요. 아닙니다. 육이 온전한 구속을 입는 부활에 있지 않고서는 육은 결코 죄에서 용서 받음에 있지를 못합니다. 이 죄는 육이 멸하는 죽음에 있어도 없어지지 않으니 죄의 힘이 미치고 있는 형벌이 영원하여 맹렬히 타는 지옥불이 그 위세를 떨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 :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죄의 힘이 전혀 미치지 못하며 죄값인 죽음의 형벌이 아무런 위세도 떨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는 아무에게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에 있지 못하였으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의 주님이 되신 후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에 온전하게 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믿음이 그 일을 합니다. 다음의 말씀에서 그 사실을 보게 됩니다.

 

요한일서 4:9“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요일 4:14-17.“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의가 되시어 죄 사함을 얻는 구원을 보증하시며 우리의 생명이 되시어 안전히 지켜 영원히 주와 함께 살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우리가 얼마나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일곱 번 용서하면 되겠습니까?”라고 묻는 베드로에게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곱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신 후 제 삼일에 살아나셔서 자신을 따르는 믿음에 있는 자들을 그들의 모든 죄로부터 용서하여 구원하실 하나님의 구원이시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 전파에 의해 온 세상에 미칠죄 용서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는 것에서 말씀해 주시는 용서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겪으실 일인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그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에 의해서 있을 것인회개의 용서가 온 세상에 전파되는 것에서 있게 됩니다. 이 용서는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흘리는 바십자가에서 흘리시는 보배로운 피에 의해 단 한 번에 베풀어져 모든 죄에 대하여 용서하시는 효력을 발휘함에 따라 영원한 구속이 됩니다. 예수님의 용서는 7, 70, 490, 그 이상의 셀 수 없는 숫자의 몇 번이건 용서를 해야 하는 것을 십자가의 보혈의 피로 단번에 용서하시는 것이며, 그 효력은 모든 죄에 미치는 것이며, 영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에 의해서 죄 용서를 받은 자는 하늘에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얼굴을 뵐 수 있게 됩니다. 그 용서의 자비를 받음에 있는 자가 누가인가가 요한계시록 7:1-17, 14:1-5에서 말씀되고 있으니, 어린양의 피로 구속함을 입어 주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는 셀 수 없이 많은 흰 옷 자들인 144,000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또한 누구인가 하면 주 예수이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입니다.

 

이 죄 용서의 실현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 사도행전 2:21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이며, 이로 인해서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함으로써(2:37-41), 예루살렘이란 지상에 하늘로부터 주어진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져,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하신 대로 예루살렘으로부터 복음 전파가 시작되게 하시고, 이를 통해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증인이 있어 나가게 하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죄를 용서하여 죄에서 구원하시는 용서의 자비를 온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 온전히 이루십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죄의 진노에 있는 저주의 심판을 푸십니다. 그리고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 받은 자가 되게 하여서 이 용서의 자비를 날마다 입고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십니다. 그러니 십자가에 의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권능이 우리가 받아야 할 용서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에 의한죄 용서의 자비는 교회의 특성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에 의한죄 용서의 자비에 행사되는 권능으로 세워진 교회 :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권능이 우리를 죄에서 용서하시는 권능으로 행하시니, 복음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우리를 듣는 귀에 있게 해 주시고 보는 눈에 있게 해 주시고 마음에 깨달아 알게 해 주시는 권능을 행하심으로 우리를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와 우리를 위해서 베푸시는 죄의 용서 받음에 있게 하시는데 우리의 모든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용서 받음에 있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부터 용서를 받았으므로, 우리도 형제를 용서 속에 두게 권능으로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은 용서 속에 저들의 용서 받음에 있게 하십니다. 그럼으로써 우리 자신을 저들의 용서 속에 두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용서가 하나님이 택하신 모든 자들에게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69-14절에서 말씀해주신 주기도문인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이다이며,“우리가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도 용서하여 주옵소서의 성취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우리가 먼저 용서하면, 이 용서를 근거로 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용서한다고 오해해선 안 됩니다. 우리는 용서자가 아닙니다. 용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진 것으로, 용서의 권능과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셨기 때문에 그 용서 받음에 있는 공동체는 한몸을 이루고 있는 자들에게서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자신을 용서 속에 두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 속에 두는 것처럼 또한 우리 자신도 용서 속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 용서에 있는 것은 우리 삶의 목표치이어서가 아닙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입니다. 이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합니다.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부터 용서를 받았으므로, 우리도 형제를 우리가 받은 용서 속에 둡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우리 자신을 저들의 용서 속에 둡니다. 그러니 우리가 용서해야 할 용서에제한’(한계선)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로부터 공급되는 자비의 은사로 부요한 교회 : 해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몇 번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우리가 용서하는 것은 몇 번의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셈이 없는 하나님 큰 자비의 용서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그것을 본다면 우리는 형제를 용서로 다가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에 들어 있는 자이며, 또한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를 통해서 큰 자비로 나타내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89절에서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서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은혜자비’,‘긍휼’,‘사랑이란 말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비에 부요하신 분으로 자기를 믿고 따르는 모든 자들을 그 자비 속에 두시고서 힘입게 함으로 자비에 부요하게 하십니다. 여기에 평균을 이루게 하십니다. 누가 더 자비가 큰 자이고, 누가 자비가 덜 한 자이며, 누가 그마저도 없는 무자비한 자인가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자비로우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요로 자비에 부요하도록 자비에 부요한 자가 되게 해주셨습니다. 그것이 성령을 통하여 자비로우신 주께로부터 공급받은 은사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용서해야 할 용서에제한’(한계선)을 두고 우리 스스로 우리 속에서 용서의 자비(은사)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공급되어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용서의 자비를 따라 온유함으로, 오래참음으로, 착함으로, 화평에 힘씀으로 마음껏 형제를 사랑하고, 그렇게 사랑에 힘쓰는 데도 과실이 발생하면 이는 주님의 이름으로 용서(용납)를 받아 사랑에 온전함을 이룹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의 온전함을 이루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마음을 품음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의 온전함을 이루도록 은사를 공급하시니 성도를 섬기는 봉사에 있는 자들을 교회의 직분자로 세우십니다. 곧 목사(와 교사), 장로, 집사입니다. 이 삼직은 자비(긍휼)의 직분으로 말해지니, 하나님 나라의 부요한 자비를 가지고 성도를 위하여 섬김에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로부터 공급되는 자비를 따라 자신이 받은 은사에 의해서 성도를 섬김에 있으니, 이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온전케 하는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직분자가 주께로부터 받은 직분을 잘 감당하며 수행한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로부터 공급되는 자비의 은사를 잘 사용한다는 것이요, 이는 또한 그 자비의 은사에 주신 주님의 권능을 능력있게 잘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이루고 있는 온 성도가 주님의 권능에 의해서 행사되는 하나님 나라의 자비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온전함에 있게 하십니다. 이것을 알고 그 믿음에 있어 장차 주께서 자신의 교회를 세워나가실 때 제자들이 무엇을 하여야 함에 있어야 할 것인지를 잘 알고 있는 그 일을 해 나감에 있게 하고자 하시는 것이 주님의 의도입니다.

 

 

맺는 말 

 

정리하여 요지를 말하면, 예수께서는 이제까지의 말씀으로 자신의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에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존귀한 자는 하나님의 받아들이심에 의해서 하나님을 뵘에 있게 되는 자인 것을, 그리고 그 일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있는 하나님의 권능에 의한 죄 용서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임을, 이 권능에 의해서 제자들은 장차 주께서 세우시는 교회에서 능력있게 사역해 나갈 것이니 그들의 구함에 있는 용서에서 하나님 나라의 부요한 자비를 입게 할 것임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보는 이 용서의 자비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음에 있는 그리스도로부터 공급되는 (성령의)은사에 의해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에 있는 모든 자인 성도를 그들의 주이신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 되게 힘쓰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으로 온전케 하는 것으로 실행이 되는 것에서 교회의 특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이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 안에 품으신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까지 우리의 생각이 미쳐야 합니다. 이것을 알게 해 주시려고 성경을 기록해 주셔서 온 세상에 전파되는 복음의 진리가 되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라서 우리의 신앙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전해주는 복음의 진리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왜 우리의 믿음의 주가 되시는지를 잘 알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굳건히 서 나가야 할 것이며, 그리스도의 몸으로 온전케 됨에 한몸으로 있어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몸으로 장성함을 추구하게 하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교회를 이루고 있는 자는 각각 주께로부터 받은 은사를 가지고 믿음 있는 일을 해 나가니 주께로부터 믿음의 직분을 받은 목사는 설교하며 장로는 감독하며 집사는 구제함에 있는 성도를 섬김의 봉사를 함에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하며, 이들과 함께 하는 성도들 또한 주께로부터 받은 은사를 가지고 믿음 있는 일을 부지런히 나가니 증거 된 말씀에 있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하나가 됨에 힘써 모두가 다같이 한 믿음으로 한 분 주님을 섬김에 있는 교회로 서 나가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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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칼빈은 베드로가 예수께 자신에게 죄를 범한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하면 될지를 물은 것의 해석을 다른 관점에서 본다. “ ‘주여 몇 번이나 용서하리이까?’라고 하는 말에는 만일 우리가 너무 쉽게 용서해 준다면 우리의 관용이 더 많은 범죄를 자행케 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베드로는 범죄자를 자주 용서하여 주는 것이 옳은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일곱이란 숫자는 많은 숫자를 의미하고 있으며, ‘일곱 번까지란 부사는 주님은 우리가 범죄자와 얼마나 자주 화해하는 것을 원하십니까? 우리가 몇 번이건 용서해 주는 자들임을 알게 될 때 이는 그들을 위해서 합당하지도 않고 유익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라고 용서의 한계를 정해줄 것을 구하는 것으로 보았다.

2) 마이어는 베드로가 언급한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형제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같은 제자라는 견해를 가졌다.

3)  개역개정판이 출간되기 이전의 개역한글 성경은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라고 번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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